천자춘추/국민윤리의 실현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큰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외적으로는 국제질서의 재편과 세계화 물결 속의 정체성 혼돈 그리고 주변국가들의 정치·경제적 도전이며, 내적으로는 민족·지역·연령·이념에서 투쟁적인 데 있다. 이와 같은 역사의 도전 앞에 우리는 어떻게 응전할 것인가? 이것이 오늘의 우리에게 있어 가장 큰 과제이다. 우리는 역사와 현실 앞에 다가온 도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민정신의 진작과 이를 실천하려는 국민 공동생활의 원리가 확립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곧 ‘국민윤리’이다. 그렇다면 국민윤리의 과제는 무엇인가? 온갖 도전과 시련으로 점철된 우리 민족사 전체를 통해서 현재의 나와 우리 모두가 서있는 삶의 터전과 양식이 어떻게 지켜지고 가꾸어져 왔으며, 또한 우리 모두가 바라는 이상을 어떻게 실천해 나갈 것인가 하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다. 나아가 세계의 모든 갈등과 이해의 대립장인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결해 민주복지국가를 이룩하느냐 하는 데 있다. 오늘날 모든 국가와 민족은 국민 공동생활의 원리와 실천이 요구된다. 특히 우리는 내부적으로 이념적·사상적 대립과 남북 분단의 현실, 정치적·지리적 조건에서 오는 지정학적 관계,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강대국들과의 관계, 민족의 번영과 발전을 위하여 요구되는 변화와 개혁 등에서 국민적 역할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국민윤리, 즉 국민 공동생활의 원리는 그 의미가 다양하다. 국민 모두가 지켜야할 규범은 물론, 공동체 의식과 국민적 일체감, 국민적 기상과 정신 그리고 민족과 국가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요구되는 가치관, 태도, 지식 등의 모든 것이 내포된다. 이와 같은 것들은 어느 사회나 국가에도 필요했던 것이며, 실재해왔다. 그것은 공통적일 수도, 다를 수도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윤리 대신에 국민윤리라는 개념이 사용되게 된 것이다. 이 때 윤리 앞에 쓰여진 ‘국민’은 윤리의 구체적인 실천주체를 명시한 것이다. 그리고 국민이라는 개념은 공동체의 구성원이며, 주체이고, 주인임을 자각하게 하는 의미도 포함되며, 우리에게 실재하는 생활원리를 개선·발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역사적 도전에 대응하기 위하여 민족의 통합과 번영 그리고 발전을 확인하는 것이 國民倫理이다. 이 국민윤리의 실현은 어느 정파나 정권의 차원을 넘는 민족의 것이다. /조휘각 한국국민윤리학회 회장.인천대교수

천자춘추/붉은 가슴의 전사들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을 하고 밤이 될 때까지 TV를 봤다. 마침 고릴라들의 생활상을 소개하는 ‘붉은 가슴의 전사들’이 방영됐다. 수컷 고릴라 한 마리가 30여마리의 암컷과 새끼들을 거느리고 집단의 수장으로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30여마리의 대 집단을 이끌어온 것으로 보아 수컷 고릴라는 정력이 왕성하고 리더십이 있음에 틀림없다. 외적으로 다른 집단의 고릴라와 사자, 치타, 하이에나와 같은 짐승들의 공격을 막아야 하고, 내적으로는 젊은 수컷 고릴라의 도전을 차단하고 구성원간의 위계질서를 공고히 해야만 리더십이 유지되고 집단이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사회에서도 권불십년이란 말이 있듯이 수컷 고릴라에게도 세월 따라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멀리서 수 고릴라로 구성된 무리가 공격의 거리를 좁혀 오면서 항복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수장 고릴라가 분투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다음은 수장 자리를 놓고 침입자의 수컷 고릴라들 사이에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고, 곧 바로 무리를 이끌어갈 새 지도자가 탄생했다. 권력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불안에 떨던 암컷 고릴라와 새끼들은 아무런 저항없이 새 지도자를 받아들였다. 나는 가스 불 위에 올려놓은 된장찌개가 타는 줄도 모르고 권력다툼에서 패배한 전임 리더가 어떤 행동을 보일까 하는데만 몰두했다. 구성원들이 보는 가운데 장렬하게 죽음을 택함으로써 영원한 지도자로 남을까. 그렇지 않으면 구차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을 가버릴까. 결과는 나의 모든 예상을 뒤엎고 새로운 형태의 선택을 했다. 새로 탄생한 지도자에게 축하를 하고 타협을 하는 것이었다. 타협의 결과는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유지하되 아내와는 절연을 해야했고 대신 자기가 낳은 새끼들을 돌볼 수 있는 의무와 권한을 부여 받았다. 승자는 승자로서의, 패자는 패자로서의 명분과 실리를 서로 주고받은 것이다. 인간은 원래 미완성으로 살아가는데 더 큰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완전하다면 사회 자체가 존재할 수 없을 것 아닌가.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그 부족함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채우고 보완하는 것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방과 인내를 갖고 타협하고 관용하는 것을 가장 큰 덕목으로 삼는게 아닌가 생각된다. /임낙윤 인천.경기지방병무청장

천자춘추/작은 것이 아름답다

우리사회는 언제부터인가 큰 것이 좋은 것이라는 등식이 통용되는 듯하다. 그러나 큰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공룡은 몸집이 너무 거대해서 먹는 먹이와 주위 환경변화에 기민하게 적응하는데 실패하였다. 세계사에서 큰 위용을 자랑했던 몽골제국도 너무 큰 관할지역으로 관리상 한계를 드러내고 멸망하였으며 오늘날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큰 것 지향적인 교육을 받아온 것 같다. 교과서의 교육내용에도 우리동네에서 제일 큰 건물을 알아 보자는 식의 질문내용이 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우리 젊은이들이 교육을 받고 성장하며 사회인이 되었을때 우리 사회는 큰 것의 우월적인 사회가 형성된다. 아마도 14만명에 이르는 중소기업의 인력난 속에서도 39만명의 젊은 청년들이 실업자로서 살아가는 이유도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버젓한 기업=대기업이라는 인식속에서 대기업의 바늘구멍 같은 일자리를 마냥 기다리는 시절은 언제 끝날는지 모른다. 사실상 우리나라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대기업 육성이 주요한 과제였다. 그러기에 중소기업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작은 것이 아름답고 중요한 시대가 열리고 있다. 디지털카메라, 핸드폰, 노트북PC 등의 디지털 용품은 보다 작고 편리한 제품이 아니면 시장에서 외면당한다. 우리나라 주식시장 상장기업 중 순이익을 내는 기업의 상당수가 중소벤처기업들이 차지하고 있다. 요새 같은 불황기에도 매출액 1천억원 이상을 기록하는 중소벤처기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비해 자율, 창의, 민주의 원천이다. 혁신을 이끌어가는 기민성과 탄력성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장점을 가지고 혁신을 추구해가는 중소기업들이 많아질때 우리 경제는 보다 튼튼해질 것이다. 대규모 조직은 의사결정구조가 단순하지 않다. 외부의 환경에 중소기업만큼 기민성을 가질수는 없다. 그렇다고 중소기업이라해서 모든 기업이 좋다는 것은 아니다. 작지만 강한기업 이른바 강소기업(强小企業)의 육성이 필요하다. 한여름의 작열하는 태양빛 아래서 영그는 작은 고추가 맵듯이 도전정신과 불굴의 기업가 정신으로 어려운 역경을 이겨내고 성장하는 중소기업이야말로 우리경제의 보배요 성장의 원천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우리에게는 불굴의 강소기업들이 있다. /정영태 경기지방중소기업청장

천자춘추/지금 여기에서

매일 아침 운동을 하며 듣게되는 노래가 있다. 원더버드의 ‘옛날 사람’이라는 곡이다. 어느 날 아침, 땀에 흠뻑 젖은 채 의미 없이 지나가던 노래를 들으며 내가 그토록 꿈꾸던 곳이 여기인가 하는 소박한 의구심이 생겼다. 노래의 가사는 이렇다. 술을 마시면 언제나 생각이 나는 옛날사람/꿈을 찾아서 오늘도 기타를 치는 옛날사람/이젠 다시 올 것 같지 않은 그 날을 기다리며/지칠 때도 된 나이에 바보 같은 옛날사람/잊지 못할 추억들과 함께 있던 옛날노래/사랑하는 사람들 곁엔 언제나 옛날사람/실망하지마 주눅들지마/가고싶던 곳 기다렸던 날/지금 여기야 ~/ -중략-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우리들 모두의 장래 희망은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때의 기준으로 보면 시간상 지금의 나는 이미 ‘훌륭한 사람’이 되어있거나 아니면 될 시점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 나는 그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룬 것일까? 10대와 20대에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긴 시간을 공부했나? 작업과 직장생활을 병행하려 애쓰던 30대에 내가 가진 열망은 무엇이었나? 오늘 내가 사무실 책상 앞에서 구사하고 있는 것이 내가 원하던 삶 바로 내 꿈을 이루는 작업인가? 이제는 어느덧 40대가 되어버린 우리는 이제 좋든 싫든 책임감을 갖고 무엇인가 기획하고 선택하고 결정을 해야만 한다. 책상 위에 쌓여있는 일들이 모두 그것이 아닌가. 뜨거운 열정과 전문인으로서의 확신과 신념을 가지고 추진해야 하는 일들 말이다. 이 일들이 바로 내가 꿈꾸던 나의 미래였으며,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어둠 속의 별빛을 헤듯 그토록 애태우던 꿈과 열정을 꽃피울 기회가 아닌가? 노래의 가사처럼 내가 가고싶던 곳 기다렸던 날은 바로 지금 여기였던 것이다. 일이 너무 많아서, 쉴 시간이 없어서, 사람들에 치여서,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지쳐있다고, 이런 모든 불평들은 단지 내가 갖고자 했던 꿈과 열정의 목소리와 기다림의 긴 시간의 의미를 망각한 투덜거림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토록 오랜 시간동안 내가 가고싶던 곳 기다렸던 날은 바로 지금 여기였던 것이다. 일의 귀천과 경중을 잊고 잃어버린 꿈들의 조각을 다시 찾은 듯한 소박하면서도 중요한 깨달음이다. 즐겁게 신나게 일해야겠다. /이승미 과천제비울미술관 실장

천자춘추/장정(長征)과 동북공정(東北工程)

1921년 여름 상해. 모택동 외 11명의 대표로 중국 공산당이 탄생하였다. 1934년 10월 16일. 장개석군에 쫓기어 홍군(紅軍)은 전략적 후퇴를 시작한다. 우선 적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고 그들에게는 합의된 목적지조차 없다. 눈덮인 산맥들과 세찬 강물을 건너고 늪지와 숲을 지난다. 비적떼가 우글대는 지역, 호전적인 부족이 사는 땅, 물이 없어 자기들의 오줌을 받아먹으면서 간신히 연명할 수 있는 사막을 가로지른다. 죽음을 동반한 마지막 운명의 산 대설산(大雪山)을 넘는 것은 서로 싸우고 죽이는 전쟁보다 더 힘든 자연과의 싸움이었다. 8만여명의 홍군 중 대설산을 넘어 살아남은 자는 4분의 1인 2만명. 무려 11개 성(省)을 거쳐 18개의 산맥, 24개의 강과 사막, 늪지대를 지나 장장 9,600㎞의 거리다. 1년을 꼬박 걸어서 런던에서 동경까지, 미대륙을 동서로 왕복한 거리, 서울~부산의 28배 달하는 거리, 2만 5천리의 대장정이었다. 여자는 35명 가운데 단 6명만이 살아남았고, 長征중에 모택동의 처 하자정은 아이를 낳았지만 돌볼 수가 없어 태어난지 몇 시간 안 된 갓난아기를 보자기에 싸서 은화 24닢과 함께 농부에게 맡겼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상황하에 그네들이 준수한 생존수칙이 있었다. 첫째, 명령에 절대 복종할 것. 둘째, 민중들로부터 바늘하나, 실 한오라기도 빼앗지 말 것. 셋째, 사용한 모든 물품은 틀림없이 돌려 줄 것. 이렇게 사선을 넘고 넘어 모택동, 주은래, 등소평 등등의 이름을 앞세우며 1949년 10월 1일에 中華人民共和國은 건설되었다. 적어도 중국공산당 혁명 1세대들은 역사앞에 당당하였다. 무엇보다 개인의 기득권을 모두 버리고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大義가 있었다. 그러기에 등소평은 UN에서 행한 연설에서 ‘만약 훗날 중국이 강대해져서 주변국들에게 교만하게 된다면 중국의 社會帝國主義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된다’고 스스로 선언한다. 중국의 양심, 중국인민의 영원한 총리 주은래는 말한다. 한족(漢族)은 소수민족의 역사앞에 겸손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오늘날 후진타오를 비롯한 중국지도부는 전문기술관료 출신들이다. 동북공정이란 역사조작의 모습을 보라. 천안문에 걸려있는 모택동의 초상과 世界萬民一切라는 大義의 사회주의 사상에 비춰 너무나 초라하다. 개인이나 국가나 철학이 없는 기술은 위험한 면도칼이다. 우리 청소년들 중 동북공정에 대해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역사를 배우고 사유(思惟)함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다. /송기출 수원청소년문화센터관장

천자춘추/원광법사의 어머니

신라24대 진흥왕(眞興王·540-576)때 경상도 안동에 박덕삼(朴德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들 경조는 삼대독자로 생후 석달밖에 안 되는 귀여운 아들이었다. 덕삼은 봄철의 바쁜때라 새벽에 들로 나가고 그의 아내는 부엌에서 아침식사 준비에 바빴다. 아침준비가 끝나 경조에게 젖을 먹이려고 안방에 들어가 자고 있는 경조를 안고 나와 부엌에서 보니 어느 틈엔지 죽어서 뻣뻣한 송장이 되어 있었다. 삼대독자 귀한 아들이 별안간 죽어서 송장이 되었으니 참으로 원통한 일이었다. 기가 막힐 지경이었으나 시아버지가 놀랄까봐 아무 소리도 않고 송장된 아기를 들쳐업고 남편의 밥을 함지에 담아 집을 나섰다. 남편이 아침밥을 다 먹은 후 아내는 죽은 애를 남편 앞에 내놓으며 전후사실을 자세히 한 후에야 목을 놓아 울었다. ‘이 불효 막심한 놈아! 아비 어미를 두고 이다지도 빨리 간단말이냐? 아비 어미 보다도 할아버지 앞에 이렇게 가야만 한단 말이냐? 아무리 죽은 놈이라도 이 아비에게 매를 맞고 가거라!’ 하고 뺨을 서너번 때렸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뻣뻣했던 송장이 혈맥이 통하고 체온이 돌며 신통하게도 소생하는 것이 아닌가! 그보다 더 큰 경사가 어디에 있을까? 덕삼의 아내는 과연 현부이며 효부였다. 보통 여인 같으면 아기가 죽은 걸보는 순간 대성통곡을 했을 것이요 눈앞이 캄캄하여 시아버지고 누구고 간에 생각할 여유도 없었을 것이며 참고 집을 나섰다하더라도 남편 앞에서는 만나자마자 붙잡고 울었을 것이나 남편이 아침밥을 다 먹고 난 후에야 침착하게 발설을 하였으니 그 얼마나 신중한 어머니 인가?  그 훌륭한 어머니의 교훈을 받아 나중에 큰 인물이 되었으니 그가 바로 열두살에 한학에 달통하고 불서까지 공부하여 진흥왕 二七년(566년) 스물네살에 중이 되어 삼십 장년에 불교에 조예 깊은 진평왕(신라 二六대 왕 579-633년)의 왕사(王師)로 이름 높은 원광법사였다. /서일성 경민대학 효실천본부장

천자춘추/마음공부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어느새 하늘은 높고 바람은 상쾌한 가을이 성큼 우리 옆에 다가왔다. 아침 저녁 제법 선선한 바람이 오히려 긴 옷을 재촉하는 이 계절. 이러한 때가 되면 누구나 공부하기 좋은 철이 돌아왔다 이야기 하고 자신의 미진한 공부를 촉진하는 마음의 다짐을 하곤한다. 특히 수도자들에게 있어 이러한 시간은 마음을 다잡고 정진하는 참으로 좋은 계절이다. 그런데 보통 공부라고 하면 누구나 으레 독서를 생각하고 책을 가까이하며 마음의 양식을 장만하고 학생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양의 지식을 축적하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하는 모습을 그리게 된다. 이러한 공부도 대단히 중요하고 사람은 이러한 공부를 통하여 좀더 나은 삶을 향한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유용한 수단이 되긴 하지만 이것만으로 우리는 공부를 다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이러한 지식 축적의 공부는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하고 어떠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역량을 개발하는 데에는 한 몫을 담당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많은 지식과 기술, 일에 대한 역량 등이 우리에게 진정한 인생의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냐고 다시 묻는다면 그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렵다. 그것이 한 조건이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 인생이 충분히 행복할 수는 없다. 역사를 보고 또 현실 진행되는 여러 가지 일을 보더라도 지식과 역량과 기술과 그 사람의 행복이 정비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느 경우는 그 반대인 경우도 허다하다. 자기가 가진 모든 지식과 역량을 다하여 사람을 해치고 사회를 해치고 평화를 파괴하는 일도 허다히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정말 공부해야할 중요한 과목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하겠다. 그것은 바로 마음이다. 마음은 나의 주인공이다. 그 마음이 올바로 되어있다면 모든 것이 다 올바라질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모든 것이 다 글러진다. 이 마음은 무형한 것이어서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것이지만 사실 마음은 나의 행복과 가정의 행복, 나아가 이 사회와 인류의 행복까지도 좌우할 수 있는 귀중한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공부 과목삼아 전 인류가 공부하는 때가 언제쯤 올 수 있을지…. /김주원 원불교 경인교구장

천자춘추/호남 품에 안기기

산에 피어 산이 환하고/강물에 져서 강이 서러운/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사랑도 그렇게 와서/그렇게 지는지/섬진강가에 서서 당신도/매화꽃잎처럼/물 깊이 울어 보았는지요// 섬진강 시인 김용택님의 시다. 지난 달 말 한나라당 의원들은 2박3일간 섬진강가인 곡성과 구례로 연찬회를 다녀왔다. 머리가 아닌 가슴과 피부로 느끼기엔 분명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섬진강이 있었기에 뭔가 와닿는게 있음을 느꼈다. 우리에게 섬진강을 설명하던 선생은 이른 봄에 꼭 다시 찾기를 권했다. 아마도 김용택 시인도 같은 생각으로 시를 썼나보다.¶ 한나라당 17대 국회의원 국토순례, 그 첫 번째 ‘섬진강에서 만나다’라는 프로그램으로 우리는 호남을 찾았다. 물론 나는 오랜 방송 생활속에서 전라도 곳곳을 찾을 기회는 많았다. 하지만 이번 방문의 감회는 새로웠다. 그것은 국회의원이라는, 거기에 한나라당이라는 신분이 주는 부담감이 없지 않았으리라. ‘만인의총’ 방문시에도, 섬진강 어귀에 도착했을 때도 몇몇 주민이 방문에 대한 낮은 거부감이 적힌 현수막을 들고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그동안 호남 정서에 잘못 처신해 왔던 한나라당으로서는 당연히 거쳐야 했던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는 만큼 아마 우리 일행중에는 남모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도 있었을 것이다. 많은 의원들이 이제 한나라당이 호남을 껴안아야 한다는 발언들을 했다. 나는 생각이 달랐다. 우리가 호남을 껴안는 것이 아니라 호남이 우릴 껴안아 줄 때까지 우린 열심히 그들과 만나고 그들의 소릴 듣고 그리고 그것을 진실로 실천하는 끝없는 과정이 되풀이될 때 비로소 호남의 품에 안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2박3일의 일정중에 우린 곡성군 봉조리 농촌 체험마을을 방문했다. 지난 번 다양한 반응을 불러 일으킨 의원들의 연극이 공연됐던 곳이기도 하다. 한 50~60가구가 모여사는 섬진강가의 한가로운 시골마을 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이 마을의 폐교된 학교를 리모델링해서 체험마을을 만들었다. 아직 완전히 정리가 안된 상태에서 우릴 맞이하며 “태풍이 오는 바람에 채 마무릴 못 지었구먼요. 귀한 손님 오셨는디 워쩔까.” 뵙기에 일흔이 넘으신 할머니의 참으로 진심어린 인사 말씀이었다. 그리고 우린 그 마음을 그대로 느꼈다. 호남은 이렇게 푸근하다. 일정 마지막 날 우린 망월동 국립묘지를 참배했다. 최근 우리 현대사에 가장 불행한 과거를 간직한 이곳이지만 이름모를 새소리만 들릴 뿐 평온하고 고요하기만 했다. 그러나 곳곳에선 아직도 억울한 죽음에 대한 흐느낌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묘지를 빠져 나오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됐다. /한선교 국회의원(용인을)

천자춘추/정치윤리

정치는 인간생활에 있어 개인의 다양한 이익과 욕구, 주장을 조정함으로써 사회정의를 실현하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정치는 가장 높은 윤리성을 지니고 있으며, 정치윤리는 인간의 삶을 정의롭고 인간답게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정치윤리의 실제를 질서·복지·안보·신뢰로 나누어 보기로 한다. 첫째는 질서를 확립하는 데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동시에 정치적 동물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회를 만들고 공동생활을 한다. 그러나 인간은 저마다 성격과 행동이 달라서 하나의 사회를 이루는 데 많은 문제를 낳아 갈등과 투쟁이 나타나곤 한다. 이 같은 문제는 자칫 인간 공동생활의 질서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질서 있는 사회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법과 질서를 확립하고, 공존과 협력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 둘째는 복지를 향상시키는 데 있다. 인간은 태어나 생존하는 기간 내내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복지문제는 한 개인에서 사회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기 때문에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여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이 많다. 즉 의식주·고용·임금·노사문제 등과 같은 여러 문제들을 적절히 조절하고 해결해 나가야 한다. 정치의 실제운용자인 정치지도자는 국민복지의 기초인 의식주문제를 해결해야 할 윤리적 책임이 있다. 우리가 북한을 비롯한 몇몇 독재정권의 비윤리성을 지적하는 것도 주민 복지상황의 열악함과 인간존엄에 대한 훼손 때문이다. 셋째는 안보를 확립하는 데 있다. 역사적으로 민족단위의 국가체제가 형성된 이후 안보문제는 정치의 중심과제 중의 하나였다. 국가공동체에 있어 안보의 붕괴는 국가나 민족 내 모든 사람들의 인간적 삶과 질적 문제를 유발시켜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삶을 파괴시켜 왔던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보아왔으며, 현실에서도 직접·간접으로 느끼고 있다. 특히, 자유민주주의국가는 국민의 자유로운 생활을 위해 외부로부터의 침략에 대비한 방위체제 구축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이 같은 전쟁 방지를 위한 국가적 노력은 개인의 평화로운 생활을 보장해 주는 데 있기 때문에 정치의 윤리성이 강조된다. 넷째는 신뢰를 구축하는 데 있다. 정치윤리에 있어 무엇보다 강조되는 것은 믿음이다. 정치가 국민의 의식주를 해결하고, 군사력으로써 안보를 유지한다 하더라도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다. 신뢰는 정치의 바탕이며, 정치윤리의 본령이다. /조휘각 한국국민윤리학회장.인천대 교수

천자춘추/노블리스 오블리제

초기 로마시대, 포에니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나자 로마의 귀족들은 자발적으로 기부금을 납부하고 평민들보다 먼저 전쟁터에 나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모범을 보였다. 여기서 유래된 것이 사회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 Oblige)다. 현대 사회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행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기부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부보다 더욱 근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해야할 병역의 의무, 납세의 의무 등을 솔선수범하는 것이다.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그가 속한 사회 고위층 인사들에게 일반인들보다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기대가 충족되면 고위층에 대한 존경심을 갖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깊은 배신감을 느끼게 되고, 이는 계층간의 분열을 야기한다. 전쟁과 같은 총체적 국난의 경우, 국민을 통합하고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고위층의 자기희생이 필요하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에서는 영국의 고위층 자제가 다니던 이튼칼리지출신 중 2천여명이 전사했고, 포클랜드전쟁 때는 엘리자베스2세 여왕의 차남 앤드류 왕자가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하였다. 6·25전쟁 때에도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의 아들은 야간폭격 임무수행 중 전사했으며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도 육군소령으로 참전했다. 우리나라도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선생, 경주 최 부자집 등 사회적 기부를 통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행한 경우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병무청에서는 지속적인 제도개혁과 전산화로 부정이 개입할 수 있는 소지를 원천적으로 차단하여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투명하고 공정한 병무행정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고위층, 연예인, 프로 체육인 등 청소년의 병역에 대한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고려하여 고위 공직자의 병역사항 공개범위를 확대하고 사회관심 병역의무자를 중점관리하기 위한 법률안에 대해 입법예고를 마치고 국회상정을 준비하고 있다. 병역사항 공개대상을 1급이상 공직자에서 4급이상의 일반직 공무원, 법관, 검사 등까지 확대하고 병역사항을 인터넷에도 게시하여 국민들이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하여 제도의 실효성을 제고할 예정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구현을 위해서는 제도와 법규를 만드는 것보다 사회고위층의 높은 도덕성과 솔선수범이 더욱 중요하다. /임낙윤 인천.경기지방병무청장

천자춘추/벤처정신을 키우자

최근 지속된 경기의 어려움으로 우리 중소기업들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것 같다. 이런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세계시장을 누비며 건실한 성장을 지속하는 기업도 있어 한편으론 큰 위로와 희망이 되고 있다. 경제가 어렵고 불투명할 때 일수록 ‘기업가 정신+도전 정신’인 벤처정신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벤처기업의 성장과정에서 제기되었던 여러 가지 부작용은 있었지만 총체적으로 평가해보면 긍정적인 효과가 더 큰 것이 사실이다. 신벤처의 도약은 벤처정신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제 새롭게 벤처정신을 바탕으로 한 신벤처문화를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몇 가지 기존관행과 제도를 먼저 혁신시킬 필요가 있다. 첫째는 창업과 벤처지원 시스템을 재정비해야 한다. 현재 벤처기업을 육성하기 위한 자금·보육·교육·투자지원제도의 상호연계체제와 보육·창업·교육·금융지원 기관간 업무협의나 교류가 미흡한 실정이다. 유관지원기관과 지원 인프라간 유기적인 연계체제를 구축하고 지원제도를 성장가능 기업에 대해 집중할 수 있는 노력을 해야한다. 둘째는 창업벤처에 대한 금융지원시스템을 혁신시켜야 한다. 창업초기기업은 기술개발에 전념할 수밖에 없는 특성을 갖고 있다. 초기에는 R&D에 자본금이 집중투자 되기 때문에 기업의 회계상 부채로 남게된다. 그러나 대부분 금융시스템은 재무제표에 의한 평가만 기계적으로 고수한다. 초기기업에 대해서는 미래지향적 요소에 대한 금융평가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벤처창업의 성공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셋째로 창업시부터 확실한 경영전략 계획을 수립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 기술개발은 항상 판매가 가능한 개발과제를 선정해야 한다. 시장성 없는 기술개발은 개발 후 과도한 추가자금이 소요되고 결국은 경영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개발전에 분명하고 확실한 자금조달과 판매 계획 수립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기업간인수 합병(M&A)이 과감히 이뤄지도록 해야한다. 상당수의 기업들은 정부의 지원정책에 안주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생력을 갖는 벤처정신은 실종되는 것이다. 어떤 경우는 시장성이 없는 사업 모델을 가지고 정부의 자금지원을 요구하면서 버티기도 한다. 이러한 벤처정신이 실종된 기업을 가려 낼 수 있는 평가기법의 개발을 통해 과감히 시장에서 구조조정이 이루질 수 있도록 해야한다. 지칠줄 모르는 벤처정신은 우리경제를 재도약하는데 큰 힘이 될 것이고, 중소벤처기업의 도약은 우리 경제 성장의 엔진이 될 것이다. /정영태 경기지방중소기업청장

천자춘추/미술작품 감상하기

“저는 미술에 문외한인데요….” 내가 사람을 처음 만날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 말을 하면서 부끄럽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저 당연한 자기 소개를 하듯 당당하게 말하곤 한다. 그러나 만일 ‘저는 영어에 대해서는 문외한인데요…’라고 한다거나, ‘저는 도무지 문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이렇게 말한다면 말하는 사람 스스로가 자신을 책망하는 의미를 담고 말하고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 그러한 사실이 결코 자랑거리가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미술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작품을 볼 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눈 가진 사람이 작품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뿐만 아니라 그동안 미술 작품 보기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든다. 미술 작품을 보고 감상하는 데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작가가 누구인지, 재료는 무엇을 사용했는지, 작품의 사이즈가 얼마나 되는지 … 이런 것들은 정작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아무런 정보가 되지못하는 경향이 있다. 미술 작품감상에 정작 필요한 것은 이런 물질적인 정보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마음이 필요할 뿐이다. 감상자가 보고싶은 것을 보면 되는 것이다. 가령 아름다운 여인을 의미하는 미인도라는 윤석남씨의 작품<사진>을 본다고 할 때, 이 작품을 보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작품의 재료가 나무를 잘라 붙여서 위에 물감으로 사람의 형상을 그려 넣었다는 것은 누구나 보는 순간 한눈에 알 수 있는 정보다. 그러면 작가가 여성이고 여성주의 작가라는 것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까? 그것은 그때부터 왜곡이 시작될 뿐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을 보면서 무엇을 감상포인트라고 해야할까? 정확한 모범답안을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원래 미술작품을 관람하는 감상포인트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답할 것이다. 미술 작품은 그저 내게 보이는 만큼 보면 되는 것이다. 이번 가을에는 특별히 준비된 좋은 전시회가 정말 많다. 덕수궁미술관의 그리운 금강산전, 서울시립미술관의 삶의 풍경전, 그리고 10월에 있을 서울 세계박물관대회 즈음한 각 미술관들이 준비한 전시들이 그것이다. 이런 전시를 꼼꼼히 보다보면 10월말쯤이 되면 미술을 모른다는 말은 사라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승미 과천 제비울미술관 실장

천자춘추/인간 이산(李示示)

조선시대 27명의 임금 중 가장 위대하다고 평가되는 분은 세종과 정조이다. 특히 정조는 문예부흥을 일으킨 임금으로 추앙되고 있다. 우리가 정조를 회상할 때 의젓하고 웃음 띤 모습만 기억한다. 그렇다면 인간 정조는 어떠한가? 1752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아들이 태어난다. 그 이름 이산. 1759년 7살이 된 그는 왕세손이 되어 세상의 눈길을 한몸에 받는다. 그런 이산에게 3년후 청천벽력의 가시덤불이 심장을 찌른다. 이름하여 임오화변. 1762년 5월 화창한 봄날, 할아버지인 영조의 명에 의해 28살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감금된 채 굶겨죽임을 당한다. 이때 열 살박이였던 이산은 훗날 이렇게 술회한다. “가슴에 사무친 슬픔을 죽도록 간직한 채, 평생을 돌아갈 곳 없는 곤궁한 사람으로 살았다”고. 세손 이산은 정치적 반대세력이 심어놓은 내시와 종들의 감시를 받는다. 밤낮으로 염탐당하고, 몇 달씩 옷을 벗지 못한 채 잠을 자야 했다. 임금이 된 후에도 대궐에 침입한 자객에 의해 시해당할 뻔한 위험에 처한다. 재위 24년간 일곱 차례의 역모를 겪는다. 아버지 사도세자 능을 방문할 때의 기록을 보자. 재위 13년 7월. 청량리에 있던 아버지 무덤 ‘영우원’을 수원으로 이장하는 과정의 모습. ‘사초(莎草)를 부여잡고 울부짖으며 가슴치기를 오랫동안 하여 구토증세를 보였다’ 재위 18년 1월 수원 ‘현륭원’ 행차모습. ‘슬픔을 억제치 못해 옥체를 땅바닥에 던지고 눈물을 한없이 흘리며 손으로 잔디와 흙을 움켜잡아 뜯다가 손톱이 상했으며 정신을 잃기까지 하였다’ 그러한 인간적, 정치적 시련을 극복한 인간 이산에게 역사는 평한다. ‘왕조중흥의 꽃을 만개시킨 성군. 르네상스를 일궈낸 군주. 위민정책과 통합의 정치로 국가부흥을 이끈 정조대왕’이라고. 오늘날은 불확실성의 시대, 신뢰가 부족한 시대이다. 생명이 생명을 적으로만 여기는 섬뜩한 동물세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人間事의 무게가 고단하게 느껴진다면 오늘 밤 홀로 책상에 앉아 역사책을 펴십시오. /송기출 수원청소년문화센터관장

천자춘추/세종대왕을 그리워하며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어진 분이요 뛰어난 재능을 가진 분이다. 태종은 양녕, 효령, 충령, 선녕 등 4대군이 있었으나 “충령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며 그를 1418년 8월 10일 조선 제4대 왕위에 책봉했다.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 목적에서 처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했다. 절대왕권을 가진 당시의 군왕으로서 그러한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범상한 일이 아니다. 거기다 해시계, 측우기, 혼천의 등을 만든 과학자요, 천문학자요, 아악을 정리한 음악가로 실로 다재다능하며 위대한 인물이었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대왕이 남긴 문화유산중 가장 빛날 뿐 아니라 유네스코(UNESCO)에서 세계유산으로 지정할만큼 유례가 없는 훌륭한 문자로 매년 문맹퇴치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세종상’을 포상하고 있다. 한글은 우리민족의 혼이다. 이 글을 지키기 위해서 일본제국주의와 맞서 옥고를 치르면서 독립운동을 했고, 이 글이 문맹없는 문화민족이 되게 했으니 한글이야말로 세계에 자랑할만한 보배가 아니겠는가. 그뿐만 아니다. 1966년 일본의 천문학자는 새로운 별을 발견하여 그 이름을 붙이는데 세종대왕을 그 당시(14세기) 세계최고의 천문학자로 인정해 ‘세종별’이라고 명명했다. 측우기를 발명해 강우량을 측정함으로써 농업기상학의 괄목할만한 진전을 이루기도 했고 농업서적을 통해 농업기술의 계몽과 권장에도 힘썼다. 친히 정대업 보태평 등 대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근 600년 전에 우리나라를 다스렸던 대왕에 관한 글을 싣는 뜻은 오늘날의 지도자들이 이런 위대한 성군(聖君)에게서 백성위하는 도(道)를 배웠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다. 백성들을 위하여 쉬운 글을 만들어 주겠다고 집현전 학사들과 밤을 새우며 안질에 걸릴 정도로 정성을 다바쳤던 대왕을 생각하고 백성을 위해 전 세계에서 인정할만한 대음악가, 천문학자 그리고 어문학자가 됐던 임금님을 생각해 본다. 백성과 나라를 위하는 일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그리고 무언의 꾸준한 행동이 날이 갈수록 백성들의 감동을 자아내게 해야 된다. 한나라의 지도자는 정말 국민을 위하여 신명(身命)을 다 바쳐야 하며 지도자 덕에 이 나라가 하루하루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어야 한다. 세종대왕 같은 성군이 정말 그립다. /서일성 경민대학 효실천본부장

천자춘추/아카시아의 복수

만일 얼마 남지않은 지구의 허파, 아마존밀림의 나무들이 자신들을 파괴하는 인간종족을 응징하여 독가스를 뿜기 시작한다면. 혹은 그 식물들로 만든 음식이나 그것으로 만든 목재가구 따위가 인간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거나 목숨을 앗아 가게 된다면…. 이 이야기는 실제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일어난, 수많은 학자들이 과학적으로 증명한 사실이다. 태고적부터 아프리카의 초식동물들은 풍부한 식물들을 섭취하면서 생태계를 유지하여 왔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가장 큰 규모의 남아프리카의 영양목장에서 아카시아 나무잎을 가장 좋아하는 영양들이 수년 전부터 이유 없이 죽어가기 시작했다. 무슨 특별한 약품을 쓴 것도 아니고 사료를 먹인 것도 아닌데 그저 쓰러져 가는 영양들을 보던 과학자들은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다. 어느 날 동물학자들은 영양을 부검하다가 이상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수만 년 동안 영양들의 주식으로 알려진 아카시아 잎들이 뱃속에서 하나도 소화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이상한 것은 농장의 울타리 안에 있는 아카시아가 울타리 밖의 아카시아와는 달리 가지마다, 잎 사이마다 손가락 크기만한 가시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었다. 원래 아카시아엔 어느 정도 가시가 다 있지만 제한된 영역사이의 지나친 영양의 개체수 증가로 아카시아가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굵고 긴 가시로 무장하게 됐음을 발견했고 초식동물들이 한 나무에서 15분 이상을 뜯지 않는다거나 다른 동물이 뜯던 나무는 입도 안 대는 사실 등을 알아냈다. 잎이 뜯겨지기 시작하여 10분단위로 조사한 결과 그 나무 잎에는 쓴맛을 내는 탄닌산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식물들은 스스로의 생명을 보호하며 생태계의 연속성을 유지해왔던 거다. 그런데 대규모 영양농장에선 자연의 계율을 어기고 많은 수의 영양을 울타리에 가두어 제한된 아카시아의 나뭇잎을 뜯게 만들었다. 점점 개체수가 줄기 시작하던 아카시아는 드디어 치사량이상의 탄닌을 잎에 공급하였고 그 독성으로 소화과정이 불가능해진 영양들은 괴질처럼 독성물질에 중독되어 쓰러져 간 것이다. 아직도 식물들의 반란, 아카시아의 복수란 사실이 이상해 보이는지. 인간이 인위적으로 자연의 질서를 파괴한 것에 대한 생태계의 극히 자연스런 반응일 뿐이다. /김 용 이천환경운동연합상임의장 의사

/천자춘추/중국 탐방기

지난 주 3박4일의 일정으로 백두산과 중국의 연태시를 다녀왔다. 지난 97년 상해 방문 이후 실로 7년만의 방문이다. 요즈음의 중국의 변화 속도를 생각한다면 너무 오랫만의 여행이 아닐 수 없다. 먼저 백두산에 올랐다. 한나라당 의원 20명이 방문해서인지 중국 공안이 연길공항에서부터 그곳을 떠날 때까지 에스코트를 했다. 내심 뿌듯했다. 의원 신분으로는 첫 외국 방문인 나로서는 그들의 호위가 싫지 않았다. 그러나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순간 그러한 나의 생각이 참으로 순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호위의 목적이 아니라 감시의 목적으로 우리를 따라다닌 것이다. 우리가 백두산 천지에서 ‘한민족 통일을 위한 백두산 기원제’라는 현수막을 펼치려하자 그것을 빼앗아 버렸다. 아마도 고구려사 문제와도 맞물려 더 민감하게 감시하는 것은 아닌지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천지에 오른 날 날씨가 유난히도 맑아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중국의 강택민도 3번 올랐는데 날씨가 불순해 천지를 한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단다. 그렇게 백두산은 멀어져 갔다.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산동성의 연태라는 도시다. 이미 크고 작은 우리 기업이 천여개가 진출해 있었다. 대우중공업이 대표적 기업이었다. 현지 공장 총책임자는 만약 한국에서 만들어 수출을 한다면 과연 자신들이 1위를 차지할 수 있겠느냐는 말로서 한국에서의 공장경영의 애로점을 대신했다. 그속에는 높은 임금, 노조파업, 정부의 규제, 공무원의 적극적인 지원 정신 결여 등이 포함되어 있으리라. 하지만 중국에 진출한 기업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영세한 기업일수록 실패 확률은 컸다. 그곳에 진출해 사업적으로 성공한 한 중소 기업인은 나에게 성공시대의 무용담이 아닌 허탈한 마음을 전했다. 50대초반인 그는 “돈 벌면 뭐 합니까? 집에 들어가면 반겨주는 마누라가 있나요, 자식이 있나요, 돈 덜 벌어도 내 조국이 좋지요. 그런데 인건비에 파업에…” 그곳에서 인천까지는 45분. 서울로 들어오는 나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했다. 중국은 마치 호기심 많은 10대 소년의 설레임이 넘치는 땅이라면 이 땅은 산전수전 다 꺾은 30대의 무기력증이라 할까. 아직은 더 뛰어야 하는데, 이 나라 산업의 주인공은 2,30대 청년이라야 하는데, 그들의 일터는 중국땅으로 다 가버렸다. /한 선 교 국회의원(용인을)

천자춘추/하늘의 눈, 하늘의 말, 하늘의 마음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하늘을 두려워하며 살았다. 하늘은 지극히 밝고 공정하여 무엇이든지 빠짐없이 다 알고 선악간 조금도 차질없이 공정하게 보응하기 때문에 그러한 하늘의 밝음과 보응을 대단히 두려워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속일 수 없는 하늘이 있기 때문에 그 하늘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억제하고 사람의 보응은 피할 수 있어도 하늘의 보응은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그 죄벌을 두려워하여 악행을 자제하기도 했다. 그런데 하늘은 어떻게 보고 어떻게 말하며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과연 알수 있을까? 하늘은 무형하여 형상도 없고 언어도 없고 생각도 없는데 하늘이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바가 무엇인지 과연 알 수 있을까? 안다면 하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 뜻을 잘 받들어 하늘의 제재를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한 인생을 살수도 있을텐데…. 과연 그러한 방법이 있을 수 있는가? 이것은 쉬운듯하면서 대단히 어려운 질문이다. 원불교 교조이신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이 질문에 대하여 명쾌한 해답을 주신다. 대중을 어리석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대중의 입을 모으면 하늘 입이 되고 대중의 귀를 모으면 하늘 귀가 되며 대중의 마음을 모으면 하늘 마음이 되나니 어찌 대중이 어리석다하여 함부로 하리요 하셨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다. 우리가 그들이 무엇을 알것이냐 하고 무시할 수도 있는 대중이지만 그 사람들의 마음 마음을 모아 놓으면 곧 하늘이 된다 함이니 이 말은 곧 대중을 하늘로 받들라 하는 말이요 대중이 곧 하나님이요 옥황상제요 진리다 하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니 얼마나 두려운 말인가? 그러니 하늘은 두려워할 줄 알면서 만약 대중은 어리석다 하여 두려워할 줄을 모른다면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대중의 마음을 모으면 곧 하늘 마음이 되고 대중의 입을 모으면 곧 하늘입이 되기 때문이니 대중을 어리석다 하여 어찌 함부로 하리요! /김 주 원 원불교 경인교구장

천자춘추/노사윤리

근대 이후 노사관계(勞使關係)는 인류와 함께 한 역사의 산물이자 이 시대의 문제이다. 오늘날 노사는 외형적 균형에도 불구하고, 내면적으로는 불평등관계가 계속되고 있다. 노사의 불평등관계를 균형 잡힌 평등관계로 전환하기 위하여 노동자에게는 노동삼권을, 사용자에게는 직장폐쇄의 길을 열어주었으나, 아직도 노사간에는 긴장과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바람직한 노사관계는 금슬(琴瑟)이 좋은 부부와 같다고 보기 때문에 적대와 대립을 원하지 않는다. 노사가 협력하여 열악한 근로환경과 조건을 개선하고, 복지향상에 역량을 집중하면 생산성이 높아져 노동자에게는 임금이, 사용자에게는 이윤이 증대된다. 노사관계는 수레의 양 바퀴와 같아서 서로의 균형이 깨지면 공멸하고, 균형을 유지하면 공생하게 된다. 마치 부부가 싸우면 가정이 흔들리는 것처럼, 노사가 다툼을 계속하면 갈등이 고조되고, 마침내는 파국을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윤리적인 대처방안을 모색해 보기로 한다. 우선 노사관계는 종속성을 극복하고 대등한 관계 속에서 상호 협력적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 같은 세 가지의 기본 바탕 위에 첫째, 노사간의 적극적 협력관계가 확립되어야 한다. 사측의 경쟁력 강화와 근로자의 삶의 질 향상이라는 노사 공동의 선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사 당사자는 소극적 대립관계를 적극적 협력관계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둘째, 노사 양자가 권리와 의무를 동시 추구함에 있어 역할이 분명해야 한다. 셋째, 노사간에 문제가 발생하면 대증적 방법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에서 예방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넷째, 노동자의 일방적 욕구충족체제를 쌍무적 노사관계로 전환해야 한다. 즉, 노사관계를 요구하고 주는 관계에서 주고받는 쌍무적 관계로 바꾸어야 한다. 노사관계는 상호간의 책임과 의무를 성실하게 실천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단기적 성과·분배·보상보다는 장기적 고용안정 위에 파이를 키워나가야 하며, 상호협력의 범위를 넓혀나가야 한다. 결국 노사관계는 불평등에서 평등으로, 대립에서 공존으로, 일방적 삶에서 공생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 노사간의 문제와 그 해법의 본질은 인간 존엄에 대한 숭고한 정신과 실천의지에서 시작되고 마무리된다는 것을 노사는 다같이 인식해야 한다. /조 휘 각 한국국민윤리학회 회장 인천대 교수

천자춘추/유리의 성

몇일전 우리나라 인터넷인구가 3천만명을 돌파했고 20대의 인터넷 이용률은 95%라는 언론보도를 접했다. 20대 초반의 병역의무자를 대상으로 하는 병무행정에 있어 이러한 외부환경의 변화는 병역비리로 인한 투명성과 형평성의 요구, 정부 조직개편에 따른 병무행정의 독자수행, 정부의 전자정부 구현을 배경으로 인터넷과 전산시스템을 이용한 정보화를 필요하게 했다. 그리고 병무행정 정보화는 업무처리과정의 수작업에서 전산화로, 비공개에서 공개를 기치로 행정의 효율성 및 투명성 제고와 고객의 행정편익 증대를 목표로 진행되었다. 1998년부터 시작된 새로운 정보화 작업은 모든 제도와 업무처리 절차를 제로 베이스에서 재검토해 9천여종의 프로그램과 주전산기, 서버, 고객지원시스템, 네트워크장비 등 총 3천300여대의 정보화장비를 갖추고, 병무행정 종합정보관리 시스템이 2002년 완성돼 지금까지 지속적인 보완과 수정을 통해 활용되고 있다. 첫째, 행정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 문서처리과정을 전산화하여 종이 없는 행정과 문서의 생산, 유통, 보존 등 정보를 통합 관리하는 신전자문서 시스템을 운영하고, 정부기관 최초로 전 직원에게 개인별 신분인식카드를 지급으로 업무처리 담당을 정확히 확인할 수 있도록 실명화 하였다. 둘째, 행정의 투명성 제고를 위해 인터넷, FAX 등을 통해 접수된 민원서류의 접수에서 최종 처리까지 전 과정을 병무청 홈페이지를 통해 실시간으로 공개하고 처리결과를 핸드폰 문자메세지 및 E-mail을 통해 통보하고 있다. 또한 입영일자, 징병검사 결과 등 각 종 병역의무이행 과정의 정보를 인터넷을 통한 24시간 서비스하고 있다. 셋째, 병무민원의 행정편익을 위해 전화를 통한 주민번호 입력으로 상담직원이 병역의무자의 모든 병역사항을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된 병무민원상담소를 운영하여 일평균 8천여 건에 달하는 민원상담을 처리하고 있으며 휴일 요청된 상담도 업무시작 즉시 답변하는 상담 예약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병무행정 정보화는 246개의 시·군·구 및 3천720개의 읍·면·동 병무조직의 폐지에도 불구하고 차질없는 업무수행과 하루가 다르게 높아가는 고객의 요구에 신속정확한 고객서비스를 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으며, 2000년 이후 한건의 병역비리도 없는 투명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임 낙 윤 인천경기지방병무청장

천자춘추/운림산방

몇 해 전 우연히 남도 여행을 하다 진도에 들렀었다. 그때는 진도에 대해 아는 것 이라곤 진돗개와 홍주 정도였지만 그 후로는 여행을 떠나게 되면 늘 진도를 가게 되곤 했는데, 그 이유는 그날 처음 만난 이후 늘 그리워하는 운림산방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운림산방을 안고 있는 첨찰산 뒤편의 모사라는 작고 아름다운 해변 때문이었다. 며칠 전 아무런 계획 없이 떠난 올 여름 휴가도 가다보니 어느새 또 진도를 향해 가고 있었다. 밤새 달려 도착한 진도. 황구와 백구가 나란히 서있는 진도 다리를 지나 먼저 모사를 찾았으나 잘 생긴 소나무들을 병풍처럼 가리고 있던 곱고 소박한 해변 모사는 조개종자를 키우는 양식장으로 변해 그 곱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서운한 마음을 달래며 운림산방엘 갔다. 운림산방은 전 보다 더 고운 모습으로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지난번에 갔을 때만해도 사람 손이 닿지 않는 것처럼 낡아가고 있었는데, 이번에 가보니 정성껏 수리하고 가꾸어진 깔끔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어서 무척 기분이 좋았다. 운림산방은 조선조 후기 남종화의 대가인 소치(小痴) 허련선생이 쓰던 화실의 당호로 소허암(小許庵) 또는 운림각(雲林閣)이라고 불렸었는데 1982년 소치선생의 3대손 남농(南農) 허건선생에 의해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진도 소치선생의 집안은 또한 소치 선생이후 이대 미산(米山), 삼대 남농(南農)선생등을 배출하고 4대에 이르러서도 화업을 가업으로 이어오고 있어 그 또한 범상치 않은 일로 생각된다. 현재 운림산방은 진도군에서 관리하고 있었는데 최근에는 소치 기념관을 주변과 같이 한옥으로 잘 지어 소치와 미산, 남농등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역시 아쉽고 걱정스러운 점이 있었는데, 첫째는 명색이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대가의 기념관(미술관이라 해야 옳다)에 전문적인 큐레이터가 단 한사람도 없다는 점, 둘째는 소치, 미산, 남농이라는 대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공간에 현재 생존한 후손들의 작품들이 마치 같은 반열인양 오히려 더 크고 화려하게 전시되어있는 점이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이미 소치, 미산, 남농은 그 자손들만의 자랑스런 선조라는 관점을 크게 벗어난, 우리 미술계의 역사적 자산이며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그 후손들의 짧은 생각으로 자칫 그들의 가치마저도 훼손 될까 심히 염려된다. /이승미 과천 제비울미술관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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