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며 읽는 동시] 빛

빛 - 박정식 침침한 거실에 걸어놓은 내 사진 보고 오메, 환한 거! 기뻐하시는 모습에서 알 수 있지. 할머니께 난 빛이라는 걸. 아이들은 집안의 꽃이다. 언제 봐도 환한 꽃이다. 그 꽃 덕분에 집안엔 웃음이 피어나고 사람 사는 즐거움이 넘친다. 시인은 이 꽃을 빛으로 보았다. 거실에 걸린 손주의 사진이 온 집안을 환하게 한다고 했다. 어디 거실뿐이겠는가. 아이들이 있는 곳은 어느 곳이든 다 환하다. 거리며, 공원이며, 버스 안이며아이들은 세상의 빛이다. 생전의 천상병 시인은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다. 오죽했으면 시집 제목을 요놈 요놈 요 이쁜 놈이라고 했을까. 어린이들은/보면 볼수록 좋다/잘 커서 큰일해다오. 라고 노래했다. 헌데 언제부턴가 이 빛들이 자꾸 가물가물해지고 있어 걱정이다. 아이를 안 낳으니 빛도 안 생긴다. 내 어릴 적엔 동네마다 아기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앞집에서도, 옆집에서도, 뒷집에서도. 그 반짝이는 빛들로 가득 찼던 아침을 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맑고 투명했던 저 생명의 소리들. 가난한 살림살이 속에서도 웃을 수 있었던 것 또한 저 어린 것들 덕분이었다. 오메, 환한 거! 시인은 요 한 마디로 아이의 존재 가치를 말했다. 이보다 더 적확한 표현이 어디 있을 것인가. 어린이는 미래의 희망이다. 세상의 빛이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하늘을 보면

하늘을 보면 - 정두리 하늘이 회색으로 무겁게 보이면 할머니 말씀 눈이 오려나 보다. 비가 오려나? 얼추 맞추시는 할머니. 하늘 한 번 올려다 보고 하늘을 읽을 수 있으려면 얼마큼 하늘을 보아야 하는 것일까? 얼마나 틀린 다음 알게 되는 일일까? 나이를 먹는다는 건 단순히 숫자로만 따질 수 없는 그 무엇을 지닌다. 이를 경험이라고 해도 좋겠고 경륜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이는 과학 문명이 발달한 오늘날까지도 우리들이 무시할 수 없는 삶의 지혜가 아닌가 한다. 이 동시 속의 할머니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하늘이 회색인 것을 보자 머뭇거림도 없이 그날의 날씨를 점지해 주신다. 눈이 오려나 보다., 비가 오려나?. 그리고 신기하게도 용케 알아맞히신다. 이 동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얼마큼 하늘을 보아야/하는 것일까?/얼마나 틀린 다음/알게 되는 일일까?이다. 할머니가 하늘을 보고 그날의 날씨를 점지하게까지는 숫한 세월이 있었다는 걸 말해준다. 그렇다! 경험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숫자로 셀 수 없는 틀림이 있었기에 맞춤이 있다는 것. 여기서 틀림을 다른 말로 하자면 실패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시는 단순한 날씨에 관한 의미를 넘어 우리네 인생살이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실패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고. 백번 옳은 말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실패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실패 다음이다. 그대로 주저앉았는가? 아니면 떨치고 일어났는가? 할머니의 날씨 예보 하나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시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1101호 아저씨

1101호 아저씨 - 최중녀 딩동딩동 밤늦게 인터폰으로 찾아 온 1101호 아저씨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어요 엄마는 인터폰 속 아저씨께 연신 고개 숙이며 -죄송합니다. -연년생 아들이라 그 이후 인터폰은 울리지 않았고 우리는 1101호 아저씨를 만나면 90도로 인사한다. 1101호 아저씨 개인주택이 수평적 관계로 이웃과 연결돼 있다고 한다면 아파트는 수직관계로 이웃과 연결돼 있다. 여기에다 서로 등까지 붙다 보니 미세한 움직임조차도 전파되고 느끼게 된다. 이 1101호 아저씨는 아파트 위층과 아래층의 소음 때문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 눈여겨 볼 것은 대화를 통해 서로 소통하며 관계하는 해결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 두 아들을 둔 1201호 엄마는 전전긍긍하며 산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래층 아저씨의 호된 항의를 받는다. 갑자기 엄마는 죄인이 되고 사정사정 애결을 한다. -죄송합니다/-연년생 아들이라 미소를 짓게 하는 건 1101호 아저씨의 태도다. 아저씨는 그 이후부터 인터폰을 울리지 않는다. 이에 두 아들은 1101호 아저씨를 만나기만 하면 허리를 90도로 꺾어 인사를 한다. 이 얼마나 보기 좋은 풍경인가. 최근 들어 층간 소음 문제로 이웃 간의 불화가 끔찍한 사건까지 낳는 현실을 볼 때 이 동시는 마치 한 송이 꽃처럼 신선한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어떻게 더불어 살아야 하는 가를 보여주는 삶의 본보기이기도 하다. 서로를 배려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안아주는 사회. 잘 산다는 게 뭔지, 그 해답이 이 시에 담겨 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스마트폰

[생각하며 읽는 동시] 단풍

단풍 - 곽해룡 가을 산이반성을 한다제 몸 불리기에 바빴던지난날 부끄러워온몸 벌겋게 달아올랐다 가을의 아름다움은 뭐니 뭐니 해도 단풍이 든 산이다. 해서 사람들은 이를 놓칠 세라 주말이면 너도나도 산행에 열을 올리곤 한다. 어디 일반인뿐인가.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들도 가을 산은 고맙기 그지없는 ‘밥상’이다. 저 주홍빛으로 물들다 못해 붉게 타는 단풍을 놔두고 뭘 쓴다는 말인가. 헌데 이 동시는 좀 이상하다. 가을 산이 반성을 하다니! 지금까지 가을 산을 이렇게 말한 이는 없었다. 하나같이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칭송을 했지 ‘반성’이란 말을 넣어 나무란 사람은 없었다. 이 시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남들과 다른 시선 그리고 자기만의 표현. ‘제 몸 불리기에 바빴던/지난날 부끄러워/온몸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찌 보면 가을 산이 화를 낼 만도 하고 산행 좋아하는 이들 또한 고약한 시인이라고 얼굴을 붉힐 것 같다. 그런데 또 이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벌겋게 달아오른 산’이 왜 조금도 밉지 않은가.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가을 산이 그지없이 예뻐 보이는가. 그건 마치 엄마한테서 꾸중을 들은 천진스런 아이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릴 때의 그 귀여움 같아 보인다. 아, 가을이다! 단풍의 계절이다! 가까운 산에라도 올라 우리 모두 단풍이 돼 보면 어떨까.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뚜껑

[생각하며 읽는 동시] 한가위 날에

한가위 날에 - 장덕천 내 마음의 보름달하늘에 걸자달은 수직으로 나를 내려본다 사람으로 사람답게 살고 있는지. 보름달은 꼭 하늘에만 있는 게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 안에도 보름달이 있다. 그런데 그 마음 안의 보름달을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사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이 동시는 마음 안의 보름달을 하늘에 걸자고 귀띔한다. 사는 게 힘들어서, 앞만 보고 달리느라 정신이 없어서,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아서, 모든 게 귀찮아서…잊고 살았던 마음 안의 저 보름달. 이 동시에서 보름달은 그냥 보름달이 아니라 자신을 비쳐볼 수 있는 ‘삶의 거울’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제대로 살아왔는지, 나 좀 잘 살겠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진 않았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살 것인지…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잖다. 그러고 보니 며칠 있으면 추석이다. 추석은 일 년 동안 땀 흘려 일한 햇곡식과 과일로 차례를 지내고 친지와 이웃이 한데 어울려 둥근 보름달 아래서 삶의 기쁨을 누리는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이 동시는 추석에 딱 어울리는 시. 밤하늘의 보름달만 바라보지 말고 마음 안의 보름달도 함께 보잖다. ‘사람으로 사람답게 살고 있는지’.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 모두 ‘사람답게’ 살잖다.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무엇보다도 인간답게!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들꽃은

들꽃은 - 김소운 눈 맞춰주는 이하나 없어도 쓸쓸하지 않아이름 불러주는 이하나 없어도외롭지 않아들녘 여기저기마구 피어서 예쁘게 수놓으면 그뿐......아무런 꾸밈없이아무런 욕심없이피었다 진다. 꽃도 자리가 있다. 잘 가꿔진 정원 안에서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는 꽃이 있는가 하면 민가(民家)와는 거리가 먼 들판에서 피었다가 지는 꽃도 있다. 이 동시는 정원과는 거리가 먼 들녘의 풀꽃에 바치는 헌시이기도 하다. 아무도 봐주지 않고, 게다가 이름조차 불러주지 않는 들꽃. 그러나 들꽃은 아무래도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오로지 예쁘게 꽃을 피워 들녘을 자신의 꽃으로 수놓으면 그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신이 자신에게 준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어여쁜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주어진 삶을 살아간다는 것! 욕심 내지 않고 자기 삶을 사랑한다는 것! 이게 바로 아름다운 일생이란 것! 최근 들어 몇 통의 부고장을 받으면서 생각난 게 이 동시다. 한 세상 사는 일이 들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누가 봐주거나 이름 불러주지 않아도 한 세상 스스로 자위하며 살아가는 일은 어쩌면 가장 인간다운 삶이 아니겠는가. “살아 보니 별 게 아니군!” 며칠 전 우연히 만난 초등학교 친구가 내게 한 말이었다. 머리가 허연 우리 둘은 찻집이 떠나가라 웃고 또 웃었다. 아, 무덥던 여름도 기울고 이제 가을이다. 들꽃을 보러 들녘에라도 나가야겠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손글씨 편지

손글씨 편지 엄기원 옛날엔 편지를 손글씨로 썼다 종이 한 장 펴놓고 생각을 다듬어 한 줄 두 줄 편지 사연 속엔 따뜻한 마음, 정성이 가득 글씨가 비뚤배뚤 받침이 틀려도 편지 쓰는 얼굴에 번지는 미소! 그런 편지 한 장 받고 싶다 스마트폰에 찍힌 문자는 도무지 편지 같지 않아서… 학창시절의 추억 가운데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편지 쓰기였다. 고향을 일찍 떠나온 나는 좋아하는 연상의 여학생을 만나는 방법이 편지밖에 없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밤을 꼬박 새워가며 썼던 편지! 지금 생각하면 내 문학의 시발점은 바로 그 편지 쓰기였다. 요즘은 휴대폰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통신이 가능하지만 당시엔 편지가 유일한 방법이었다. 편지는 정성 없이는 쓸 수 없는 통신이다. 우선 종이와 펜이 있어야한다. 여기에 편지를 쓸 만한 장소도 있어야 한다. 그것만 가지고 편지가 되느냐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마음속의 생각을 다듬고 이를 풀어내야 한다. 그런 후 한 자, 한 자 정성을 모아 써야 하는 손글씨. ‘글씨가 비뚤배뚤/받침이 틀려도/편지 쓰는 얼굴에 번지는 미소!’. 편지를 써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설렘과 행복감을 이 동시는 보여주고 있다. ‘그런 편지 한 장 받고 싶다/스마트폰에 찍힌 문자는 도무지/편지 같지 않아서…’. 요즘 같은 시대에 편지라니? 그렇게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손글씨 편지는 문자 이전에 ‘마음’이요, ‘정성’이란 생각이 든다.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서 정다운 이가 보낸 편지 한 장 정말이지 읽고 싶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섬에 갈 이유

육지를 벗어나 혼자 있는 섬 따돌림 받는 민영이도 섬이다 혼자 지내는 옆집 할머니도 섬이다 가끔 시무룩한 아빠도 섬이다 배 멀리 참고 섬에 찾아가야겠다 ‘태어나보니 섬이었다. 둘러보아야 온통 바다뿐, 들리는 것이라고는 파도소리뿐…’. 욕지도가 고향인 언론인 김성우 선생은 자서전격인 수필집에서 이렇게 썼다. 자기를 태어나게 해준 섬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한 사람, 김성우박성배 작가의 ‘섬에 가야 할 이유’를 읽고 문득 떠오른 글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섬치고 외롭지 않은 섬이 어디 있으랴. ‘육지를 벗어나/혼자 있는 섬’. 작가는 첫 연을 이렇게 썼다. 벗어난다는 것, 그건 곧 혼자이고 외롭다는 얘기다. 작가는 여기서만 그치지 않고 섬을 아예 사람들 안으로 옮겼다. ‘따돌림 받는 민영이도/섬이다//혼자 지내는 옆집 할머니도/섬이다//가끔 시무룩한 아빠도/섬이다’. 인간은 누구 할 것 없이 하나의 섬이고, 섬과 섬 사이에는 바다가 있다는 것. 상대방의 섬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거친 물살과 배 멀미쯤은 감수해야 한다는 것.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시란 그릇에 담은 게 이 동시다. 바캉스의 계절이다. 산도 좋고 바다도 좋지만 호젓한 섬은 어떨까.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혼자 있는 섬을 찾아가는 건 어떨까. 사위(四圍)가 바다인 그 곳에서 ‘나’를 돌아다보는 일은 또 어떨까. 섬은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의 좌표를 가지고 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웃음을 찾아보세요

웃음을 찾아보세요 - 이연희 파도가 곱게 다져놓은 모래밭을 뽀득 뽀득 맨발로 가면발바닥이 간질간질 까르르 웃음이 발바닥 안에 숨어 있었네. 신발 속에 갇혀 있던 내가 나왔다 수많은 모래알 속에 반짝!빛나는 것들 모래밭은 맨발로 걸어야 제 맛이다. 그 간질거리는 맛을 뭣에 비기랴. 제아무리 웃음과 담을 쌓고 살던 사람도 맨발로 모래밭을 걷는다면 1초도 안 되어 낄낄거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동시는 사람들 마음 안에 숨어 있는 ‘웃음’을 노래하고 있다. ‘웃음이/발바닥 안에 숨어 있었네.//신발 속에 갇혀 있던/내가 나왔다’. 웃음이 발바닥 안에 숨어 있었고, 그건 곧 ‘나’ 자신이었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그렇다! 우린 모두 어린 시절부터 웃음을 입에 물고 지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이 웃음을 하나씩 하나씩 잃어갔다. 어른이 돼 가면서는 아예 웃음과 멀어졌다. 그러면서 남들과도 자연 거리가 생겼다. ‘수많은 모래알 속에/반짝!/빛나는 것들’. 웃음이 삶의 보석이라는 사실을 점차 까먹은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차제에 ‘잃어버린 웃음 찾아주기 운동’이라도 벌이면 어떨까 싶다. 시내 적당한 곳에 모래밭을 조성하여 누구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에게 발바닥 웃음을 선사하는 것이다. 햇빛에 달궈진 모래를 통해 심신의 건강도 얻고 마음속에 숨어 있는 웃음을 되찾는다면 이 보다 더 즐겁고 행복한 일도 없으리라. 문학을 생활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삶의 한 지혜란 생각이 든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누군가가 품어 주면

누군가가 품어 주면 - 신이림 친구한테 시비 걸고 강아지를 걷어차던 창민이도 누군가가 꼬옥 품어 주면 온순한 아이가 될 거예요. 정말이에요. 천방지축 생채기를 내고 아무에게나 날을 세우던 칼날이 대팻집나무를 만나고는 얌전한 대팻날이 되었거든요. 초등학교 시절, 꾀나 말썽을 피우던 아이가 있었다. 걸핏하면 싸움질에다 손버릇까지 나빠서 선생님 속을 새까맣게 태웠던 아이. 학교에서뿐 아니라 고아원에서조차 일찌감치 ‘문제아’로 점이 찍혀진 아이. 그런데 난 이상하게도 그 아이가 싫지 않았다. 그 아이 역시 나한테는 신기하리만큼 고분고분하였다.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았다. 그가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 잘 들어준다는 것! 여기에다 “그랬니?” “그랬구나.” “그래서 어떻게 됐어?” 해가며 호기심에다 맞장구까지 쳐준다는 것! 그는 아무한테도 하지 않은 비밀스런 이야기도 나한테는 서슴없이 해주곤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는 많이 외로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누구한테서도 정을 받아보지 못한 불쌍한 아이였다. 이 동시를 읽었을 때 난 그 옛날의 그 아이가 생각났다. 그리고 지금이라고 해서 그런 아이가 없으리란 법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자. 그런 아이가 있다면 내 아이라 생각하고 따뜻이 가슴으로 품어주자. ‘아무에게나 날을 세우던 칼날이/대팻집나무를 만나고는/얌전한 대팻날이 되었거든요.’ 병아리도 어미닭의 품에서 나온다는 것, 품보다 더 깊은 사랑은 없다. 이 동시는 그것을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해주고 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경운기

경운기 - 김용희 황소 대신 들여와서 손발을 맞춘 경운기 할아버지 따라 그새 나이를 먹더니 털 털 털 힘겨운 숨소리 내리막길도 소걸음 “아즉, 멈춰 서지 않고 힘쓰는 것이 어디여!“ 등을 쓰다듬는 할아버지 손길에 툴 툴 툴 가쁜 숨 몰아쉬며 오르막도 거뜬히 탈 탈 거리며 한 대의 경운기가 시골길을 간다. 경운기 위에는 학교 가는 아이들이 아예 전세를 내었다. 뭐가 좋은지 연실 웃고 떠들며 소란한 아이들. 경운기를 운전하는 할아버지의 얼굴에도 아침 햇살이 금빛이다. 어디 아이들뿐인가. 경운기는 장터에서 돌아오는 아낙네들의 발품을 덜어주는 택시(?)이기도 했고, 씨앗이나 농기구를 운반하는 전용 트럭이기도 했다. 또 급한 환자가 생길 땐 읍내 병원까지도 마다않는 구급차이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골길에서 종종 마주치던 광경이다. 이 동시는 그 경운기를 노래했다. 비록 기계일망정 세월 속에서 정이 든 경운기를 황소처럼 아니, 한 가족처럼 여기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따뜻하게 그렸다. 오래도록 함께 살아온,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노쇠해 버린 경운기의 등을 안쓰러운 마음으로 쓰다듬어 주는 할아버지의 손길.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르막길을 힘차게 오르는 경운기. 이 얼마나 가슴 뭉클한가. 이쯤 되면 경운기는 더 이상 차가운 기계가 아니다. 피가 흐르고 마음이 통하는 한 가족이다. 문학은 이래서 아름답다. 시인은 이래서 귀한 존재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어깨동무하기

어깨동무하기 - 신새별 어깨동무하고 몰려다니는 구름들. 어깨동무하고 뻗어 있는 산들. 어깨동무하고 누워 있는 밭이랑들. 강물도, 파도도 파란 어깨동무. 어깨동무하기 사람들만 힘든가 보다. 어깨동무는 아무나하고 할 수 없다. 친구라 하더라도 여간 친한 사이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게 어깨동무다. 신새별은 이를 자연 속에서 찾았다. 어깨동무를 한 구름, 어깨동무를 한 산, 어깨동무를 한 밭이랑 그리고 강물, 파도…이들은 따로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서로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산다. 그래서 자연은 아름답다. 거기에는 서로를 존중해 주고, 아껴 주고, 신뢰해 주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동시는 마지막 연에서 가슴이 칵 막힌다. ‘어깨동무하기/사람들만 힘든가 보다.’ 아,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다. 시인은 요 말을 하기 위해서 구름, 산, 밭이랑, 강물, 파도 얘기를 한 것 같다. 참 고약한 시인이다. 이렇게 아픈 곳을 찌르는 법이 어디 있는가! 이럴 때 시는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칼’이다. 함께 살아가면서도 어깨동무한 풍경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어른들 세상에 던지는 경고장이나 다름없다. 어릴 적엔 잘도 어깨동무하던 그 버릇이 어디로 갔는지를 묻고 있다. 그와 함께 금을 그어 놓고, 담을 쌓아 놓고 지내는 어른들의 그 단절과 슬픈 이야기들을 고발하고 있다. ‘어깨동무하기’는 아이들이 읽어야 할 동시지만, 오히려 어른들이 먼저 읽어야 할 것 같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시골 빈 집

시골 빈 집 - 박지현 버리고 떠난 시골 빈 집 돌담 틈새로 새어나온 귀뚜라미 울음소리만 담에 기대어 환한 달빛 아래 오늘 밤도 잠 안 자고 목이 쉬도록 애타게 주인을 부릅니다. 끼루루 끼루루 깊은 가을밤 몇 해 전 일본 여행에서 본 것 중 하나는 빈 집이 많은 시골 풍경이었다. 굳게 닫힌 창문, 아무 것도 널린 게 없는 마당 안의 빈 빨랫줄,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아보기 힘든 동네…남의 나라이긴 해도 시골이 황폐화된 걸 보는 기분은 여행의 맛을 씁쓰레하게 하였다. 언젠가부터 우리나라도 시골에 빈 집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요즘엔 그 현상이 날로 두드러지고 있다.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저 황량한 시골 풍경, 시골이 죽어가는 걸 보는 마음은 어둡다 못해 아프다. 위 동시는 버리고 떠난 빈 집을 회색빛깔로 보여준다. 도시로 가면서 팽개치고 간 집, 달빛만 가득한 마당, 귀뚜라미 울음만이 들리는 텅 빈 집. 박지현 시인은 이런 시골 풍경을 아픈 마음으로 시 속에 담았다. 그러면서 ‘빈 집’을 통해 우리들의 공중에 뜬 삶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시골집은 단순히 낡은 집이 아니라 우리들의 정신적 고향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 그 집에는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가, 그 위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았던 삶의 터전. 여기에서 ‘끼루루 끼루루’ 애타게 주인을 부르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다름 아닌 시인 자신이다. 그리고 어쩌면 고향을 잃어버린 우리들 자신이라는 생각도 든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꼬불꼬불

꼬불꼬불 - 최영재 강은 그냥 곧게 흐르면 맘 편하고 훨씬 빠를 텐데 왜 꼬불꼬불 돌아가지? 장마철 모래톱 바위는 굳건히 서 있는지 나무와 폭풍은 이제 사이가 좋아졌는지 산새들은 여전히 알을 품고 있는지 휘휘 둘러보느라 강물은 요리조리 꼬불꼬불 돌아서 간다. 직선으로 흐르는 강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구불구불 흐르든지, 꼬불꼬불 흐르든지 곡선으로 흐른다. 그렇게 흘러야 강이다. 강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 곡선미(曲線美)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곡선은 아름다움에만 그치지 않고 세상과 세상을 끊임없이 연결시켜 준다. 곡선으로 이어지는 저 수많은 길들, 길 위를 달리는 저 바퀴들. 최영재 시인은 강이 지닌 곡선의 의미를 동심의 눈으로 잘 풀어 놓았다. 강은 ‘모래톱 바위’, ‘나무와 폭풍’, ‘산새 알’ 등을 둘러보느라 직선을 마다하고 꼬불꼬불해졌다고 썼다. 이 얼마나 기발한 발상인가! ‘꼬불꼬불’은 단지 통로로서의 의미만 갖는 게 아니다. 만나는 것들을 몸으로 핥고 끌어안는 ‘포용’의 의미가 훨씬 더 크다. 그러고 보면 강은 어머니의 마음을 닮았다. 어머니가 아기를 품에 안 듯 땅의 구석구석을 품에 안으며 흐른다. 시인은 이를 ‘휘휘 둘러본다’는 말로 표현했다. 이 또한 어루만지고 보듬어주는 시인만이 지닐 수 있는 언어법(言語法)이다. 시인은 같은 언어라 할지라도 격하거나 모난 언어 대신 순한 언어를 택한다. 시를 읽으면 마음이 순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5월은 마음속에 ‘시 나무’ 한 그루 심는 달이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물 웅덩이

물 웅덩이 - 홍오선 아무도 찾지 않아 춥다고, 외롭다고 산속의 웅덩이가 달님께 기도합니다 달님이 구름을 헤치고 밤새 지켜줍니다. “네 안에 내가 있지? 나를 꼭 안아보렴 누군가를 사랑하면 가슴이 따뜻하단다.” 웅덩인 가슴에 가득 달님을 안습니다. 외아들로 자라서인지 난 어릴 적부터 외로움을 많이 탔다. 가슴에 무엇이든 담지 않고서는 하루도 견디기 어려웠다. 그것이 밤하늘의 별이든, 들녘의 풀꽃이든 상관없었다. 사춘기로 접어들어서는 그 대상이 이성異性으로 바뀌었고 외로움과 그리움은 나이 든 오늘날까지도 나를 놔주지 않고 있다. 홍오선 시인의 ‘물웅덩이’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아!”했던 것도 그 때문이리라. ‘아무도 찾지 않아/춥다고, 외롭다고//산속의 웅덩이가/달님께 기도합니다’. 외로운 웅덩이는 밤하늘의 달님에게 하소연한다. 그러자 달님은 밤새 웅덩이를 지켜주며, 네 안에 내가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러면서 ‘누군가를 사랑하면/가슴이 따뜻하다.’고 말해준다. 홍오선 시인은 바로 이 말을 하기 위해 웅덩이를 소재로 삼았다. 여기에다 사랑의 대상을 밤하늘의 달님으로 정했다. 물 웅덩이와 밤하늘의 달은 서로의 처지부터가 다르고 거리상으로도 까마득하다. 여기에 바로 시인의 노림수(?)가 숨어 있는 것이다. 진실로 아름다운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 다만 서로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어쩌면 영원한 사랑이며, 고단한 삶의 위안이며, 행복이 아니냐는 것. 봄밤에 읽으면 더욱 좋은 시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징검다리

징검다리 - 김숙분 내가 누군가의 발이 될 수 있을까요? -정말 힘든 일이에요. 시냇가로 나가 보세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모든 이의 발이 되려 잠시도 떠나지 않는 징검돌 다섯 개. 어릴 적 동네 냇물에 놓여 있던 징검다리는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폴짝폴짝 뛰어 건너는 재미는 그 어떤 놀이보다도 재미있었다. 그러다가 간혹 발을 헛디뎌 냇물에라도 빠지는 날엔 배꼽을 쥐고 웃고 또 웃었던 저 어린 날의 추억. 지금은 웬만한 시골에 가도 그런 풍경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아니, 어쩌다 그런 징검다리가 놓여 있다손 치더라도 아이들은 그런 재미를 모를 것이다. 김숙분 시인은 징검돌 다섯 개가 놓인 징검다리를 통해 삶의 깊은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다름 아닌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다. 여기에서 ‘징검돌 다섯 개’는 자기 자리에서 오로지 남의 발이 되어주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아니, 행복해하는 사람이다. 우리 주위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자기 몸 하나로 여러 사람의 발이 돼주는 사람이다. 그것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를 가리지 않고 한 자리에서 묵묵히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사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조금도 서운해 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사람. 우린 그들에게 다들 빚을 지고 산다. 오늘은 잠시나마 하던 일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면 어떨까. 나에게 발이 돼주고 있는 이에게 고마움의 목례라도 보내자.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짝꿍

짝꿍 - 오순택 너 없으면 어떻게 길을 가니. 고맙다 지팡이야. 할아버지 아니면 나는 누구와 함께 놀겠어요. 그렇구나. 너와 나는 참 좋은 짝꿍이구나. “아침에는 네 발로 기다가 점심에는 두 발로 걷다가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동물은?” 어릴 적 동네 누나들이랑 수수께끼 놀이를 할 적에 난 이 문제를 풀지 못해 이마에 알밤을 먹은 기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 문제의 해답이 ‘인간’이라는 것을 난 몰랐던 것이다. 수수께끼치곤 참 고약한(?) 수수께끼였다. 이 동시를 쓴 오순택 시인은 나와 같은 동갑내기이다. 그도 어느새 지팡이가 필요한 세월을 맞았다. ‘짝꿍’은 할아버지와 지팡이의 관계를 재미있게 보여준다. 그것도 ‘어쩔 수 없는’ 관계가 아니라 친구의 입장에서 보여주는 따뜻한 작품이다. “너 없으면/어떻게 길을 가니./고맙다 지팡이야.”, “할아버지 아니면/나는/누구와 함께 놀겠어요.” 이 얼마나 정겨운가. 친구는 기쁠 때보다 외로울 때 더 필요한 존재다.그냥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사람, 그게 친구란 생각이 든다. 언젠가 노인대학 강의에 갔다가 이런 얘길 들은 적이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곁에 있는 사람처럼 고마운 사람이 없다는 걸 느낀단다. 옳은 말이다. 내 곁에 있는 사람, 그게 바로 지팡이 같은 사람이 아닐까. 짝꿍은 초등학교 시절에도 있어야 하지만 노년엔 더더욱 필요한 존재란 생각이 든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김미영 씨

누군가 “김미영 씨.” 하고 부르는 순간 나도 한 알의 씨앗이었다는 걸 깨달았네. 채송화씨, 오이씨, 겨자씨처럼 지구라는 커다란 밭에 뿌려진 씨앗 한 알. 우린 모두 이름으로 존재한다. 박 아무개 씨, 이 아무개 씨, 정 아무개 씨…. 세상에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다. 요즘엔 개명을 하는 이도 있지만, 그건 일부 사람들에 해당되는 일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이름을 지니고 일생을 산다. 김미영 시인은 이를 ‘씨앗’에 비유했다. ‘누군가/“김미영 씨.”/하고 부르는 순간//나도/한 알의 씨앗이었다는 걸/깨달았네.’ 씨앗은 작다. 그러나 그 작은 것이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면 한 그루의 나무가 된다. 씨앗이 비로소 씨앗 값을 한 것이다. 우리들 인간도 씨앗과 다를 게 없다. 자기 이름값을 하기 위해 평생 땀을 흘린다. 누구는 학자로, 누구는 예술가로, 누구는 종교인으로, 누구는 의사나 상업인으로, 또 누구는 정치인으로...각자 맡은 바 위치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마지막엔 이름 석 자를 남기고 떠난다. 어떤 이름으로 남을 것인가는 오로지 각자에 달렸다. 위 동시는 ‘지구라는 커다란 밭에/뿌려진’ 씨앗 한 알인 나는 어떤 열매를 맺고 떠나야 할까를 생각하게 해주는 작품이다. 비록 어린이를 대상으로 삼아 쓴 동시지만 오히려 어른들이 읽어야 할 시(詩)가 아닌가 싶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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