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상 음대교수들 모여 ‘틀’을 깨다… 김현미 ‘2025 평택 실내악 축제’ 예술감독 [문화인]

“실내악은 지휘자 없이 선율을 통해 이뤄지는 음악의 대화입니다. 국내 한 번도 소개되지 않은 레퍼토리 발굴과 클래식의 정통, 고전에서 벗어나는 재밌는 실험을 많이 준비했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찾아와 연주자들이 펼칠 앙상블과 예술의 대화에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대, 연세대, 인디애나(미국) 등 국내외 내로라하는 음악대학의 교수 및 세계적인 명성의 연주자 40명이 13일부터 열리는 ‘2025 평택 실내악 축제(PCMF)’를 위해 한자리에 모인다. 클래식의 ‘고수’이자 ‘교수’들은 ‘정통’ 대신 ‘모험’을 택했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는 물론 마림바, 오르간 등 실내악의 틀을 깨는 악기를 편성하고 베토벤과 모차르트 등 고전 음악가뿐만 아니라 핀란드의 머스토넨 등 지금 우리와 현시대를 살아가는 작곡가들의 작품을 국내 처음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그 중심엔 축제를 기획하고 이끌어가는 김현미 예술감독 겸 한예종 교수가 있다. “클래식은 오랜 시간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한 특별한 예술입니다. 고전 프로그램에 안주하는 것은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곡을 찾아 늘 헤맸고, 보석 같이 숨겨진 곡들은 저에게도 관객에게도 또 다른 지평을 열어줄 것입니다.” 김현미 예술감독은 뛰어난 연주가이자 교육자로 한국 클래식계를 이끌어가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대통령상, 대원음악상 수상 등 국내 대표 바이올리니스트인 그는 워싱턴 국제 콩쿨, 메네스 콘체르토 오디션, 동아 콩쿠르 등 수상 및 1998년 평양의 윤이상 음악제 등 국내외 유수 음악제에서 각종 초청 공연 및 순회 연주를 펼쳤다. 1991년엔 현악4중주단 Quartet 21을 창단하고 현재는 한예종 음악원 교수 겸 문화예술교육센터장, 코리아나 챔버 뮤직 소사이어티 음악감독이자 젊은 음악가를 위한 실내악 단체 ‘Ad Musica’를 결성하며 후임 양성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가 ‘2025 평택 실내악 축제’를 기획하게 된 배경은 평택이라는 도시가 갖는 특별함 때문이다. “평택은 자라나는 ‘젊은 청년’과 같은 도시예요. 세계 최대 규모의 미군 기지, 산업을 이끌어가는 국내 최대 규모의 반도체 생산단지 등 여러 세대의 다양한 문화가 섞여 독특한 색을 뿜어냅니다. 이러한 도시에서 예술을 통해 새로움을 선보인다면 지역에도, 예술계에도 ‘윈윈’이지 않을까요.” 13일부터 4회에 걸쳐 펼쳐지는 이번 음악회는 한 마디로 클래식 공연의 ‘축제화’이자 틀을 깨고 장벽을 허무는 실험이다. 그의 시도는 프로그램 구성에서 엿보인다. ‘열정의 서곡’을 주제로 한 첫날(13일)엔 라벨, 드보르작의 유럽 낭만주의와 인상주의를 아우르며, ‘풍요의 여정’을 주제로 한 둘째 날(14일)엔 피아졸라의 탱고와 파야의 스페인 민속 음악 등 리듬과 색채가 풍부한 남미·지중해의 풍요로움이 감성을 더한다. ‘선율의 마법’이 주제인 셋째 날(20일)엔 고집스런 이미지로 각인된 베토벤이 ‘의무적으로 안경을 써야 하는 두 사람을 위한 2중주’란 유머러스한 부제를 갖고 자기 친구를 위해 작곡한 곡 등이 펼쳐지고, 마지막 ‘축제의 메아리’(21일)엔 아방가르드 음악을 적극 수용하고 재즈를 예술 음악에 대입한 1세대 유럽의 작곡가 슐호프부터 스벤센의 8중주 등 대규모 앙상블로 재치 있는 무대가 대미를 장식한다. 4일간의 프로그램을 구성하기 위해 김 감독은 몇 달을 고심했다. 특히 국내 초연의 머스토넨 곡은 의미가 남다르다. 김 감독과의 깊이 있는 교감을 바탕으로 그의 곡이 펼쳐지는 둘째 날 현장엔 머스토넨의 인터뷰를 만나볼 수 있는 이벤트가 현재 조율 중이다. 이번 축제의 또 다른 특별함은 바로 ‘관객과의 지속적인 교감’이다. 김현미 감독에 이경선(인디애나 음대 종신교수), 김다미(서울대), 김상진(연세대), 이한나(텐진 줄리어드), 주연선 (중앙대) 등 교수 및 첼로 이강호(한국예술음악학교 음악원장), 피아노 오윤주(성신여대 음대 학장), 더블베이스 박상현(과천시립교향악단 수석) 등 한자리에 모이기 어려운 40명의 연주가는 클래식을 대중에게 더 쉽게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김 감독은 각각 프로그램의 깊이 있는 내용과 연주 설명 등을 평택문화재단 채널 등에서 살펴볼 수 있도록 영상을 만들었다. 관객과 지속적으로 교감하며 클래식을 대중 앞에 조금 더 친근하게 느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는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과 연주자가 있어도 관객이 호응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며 “실내악이, 클래식이 진정한 축제가 될 수 있도록 많은 분이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옹기의 매력, 세계에 알릴 것”…‘옹기장’ 전수자 김희건씨 [청년 장인, 전통을 잇다⑥]

청년 장인, 전통을 잇다⑥ ‘옹기장’ 전수자 김희건씨 3.3㎡(1평) 남짓한 물레간에 자리를 잡는다. 옹기와 그 앞에 자리 잡은 이, 단 둘뿐이다. 호숫가의 우아한 백조처럼 정적이고 고요한 공간 아래로는 두 발이 분주하고 바쁘게 움직인다. ‘통통통…’. 팔 길이의 동그란 가래떡 같은 점토를 또아리 삼아 쌓아 올리고, 바느질 하듯 점토를 한 땀 한 땀 엮어내며 쌓아 올리다 보면 어느새 여러 겹의 흙덩이는 하나의 옹기로 이어져 있다. 이제 기다림의 시간이다. 건조 과정을 거친 옹기를 가마로 옮겨 포개어 쌓는다. 불을 땐 그곳에 은은하고 서서히 온기를 높이며 6일을 보내고, 마지막 7일 차에 1천200도의 뜨거움으로 옹기를 완성한다. ‘옹기’. 투박하면서도 묵직하고, 건조한 이 옹기에는 온 가족의 식탁을 채우는 각종 장과 반찬, 집안의 소중한 물건들을 품어낸 따스함이 담겨있다. 2002년생 김희건씨는 경기도 무형유산 옹기장 전수 장학생이다. 2023년 전수 교육을 받기 시작해 지난해 전수 장학생이 된 그는 8대에 걸쳐 옹기의 길을 얼어 온 장인 집안의 막내로 그의 할아버지는 김일만 국가 무형유산 옹기장 보유자이고, 아버지는 김용호 경기도 무형유산 옹기장 보유자다. 어린 시절부터 전통의 길을 걸어온 그는 현재 현대미술 전공자이자, 유튜버이자, 인스타그램 팔로워 약 2만 1천명을 보유한 MZ세대 청년 장인이다. ■ 경기도의 중요한 민속자료가 된 가마, 그 곳에서 놀며 자라나… 옹기의 핵심은 옹기가 파손되지 않도록 잘 구워 완성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가마’란 존재는 옹기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 희건씨의 집안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중요한 공간이자, 현재 경기도 민속자료 제11호인 여주 이포리 옹기가마는 어린 시절 그의 놀이터이자 보금자리이기도 했다. 집안 어르신들이 옹기를 만들어 가마터로 옮겨오면 희건씨를 비롯한 어린 자녀들은 입구에서부터 25m 길이의 가마 안으로 항아리를 옮겼다. 옹기를 굽는 과정이 끝나면 치킨 한 마리 얻어먹는 뿌듯한 일터이기도, 어느 9살 땐 새벽 2시까지 불을 지켜보다 그곳에서 잠이 들기도 한 공간이었다. MZ 장인인 희건씨는 그의 집안에 젊은 시각으로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정해진 길처럼 ‘틀’이 있는 옹기의 길을 집안 어르신들과 걸어온 그는 현재 대학에서 현대미술을 전공하고 있다. 평일이면 의왕의 계원예대에서 순수미술을 공부하고, 주말에는 가족이 있는 여주로 내려와 전수 교육을 받고 있다. 명확한 ‘틀’이 정해져 있는 옹기와 자유로움의 상징과도 같은 순수예술 사이에서 희건씨는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 팔로워 2만명·숏폼 활용 젊은 장인… 한국 전통 교육으로 해외에서 큰 관심 일으켜 “전통에 매몰되지 않고, 시대에 맞춰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볼 생각입니다.” 희건씨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적극 활용해 옹기의 매력을 젊은 세대는 물론 해외에까지 전파하고 있다. 최근 종료한 여주 도자기 축제, 지난 1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한국 전통 옹기 제작 워크숍’ 등에서 아버지의 작업 과정을 찍어 올린 숏폼 영상은 조회수 220만을 기록했다. 또 해외의 많은 이들이 그의 집안으로 옹기 제작을 체험하기 위해 줄을 서며 인기 강사로 거듭나기도 했다. 그가 이 같은 길을 걷는 이유는 사라져가는 전통, 집안의 소중한 과업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2000년대 초반엔 아침에 눈을 뜨면 사람들이 줄지어 구매를 기다릴 정도로 한 때 옹기는 불티나게 팔렸다. 하지만 김치냉장고, 값싼 플라스틱 용기 등이 인기를 끌수록 옹기에 대한 수요는 줄었다. 이에 희건씨는 전통이 나아갈 길을 젊은 감각으로 모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삶을 대하는 태도 알려준 인생의 장인 할아버지…“전통 새롭게 일으킬 것” “할아버지는 제게 삶을 대하는 자세를 가르쳐주셨습니다.” 23살. 어린 나이지만 그의 책임감은 여느 장인 못지 않다. 어깨너머 배웠던 옹기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면서 높은 벽에 좌절을 맛보기도 했다. 전동물레 대신 수동으로 발을 움직이는 물레, 옹기가 커질수록 더해지는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울 때는 남몰래 울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그를 묵묵히 응원했다. 일평생 ‘옹기’ 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길을 따라 희건씨 역시 전통의 명맥을 이어가려고 한다. 2027년엔 전통 옹기 기법을 집중적으로 연습하고, 그해 아버지와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옹기 워크숍을 할 계획이며 이듬해엔 외국인들이 한국으로 와 옹기를 배우는 마스터 클래스를 만들겠다는 청사진도 만든 상태다. “전통과 현대, 그 사이에서 저 만의 길을 찾아갈 겁니다. 전통 공예와 순수미술의 영역을 넘나드는 작가로 전통성과 현대성, 예술성을 모두 갖춘 우리의 훌륭한 옹기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힘을 쏟겠습니다.” 옹기란? ‘옹기’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단어처럼 들린다. 하지만 옹기는 선사시대부터 우리 곁을 지켜온 존재다. 국가유산청 등에 따르면 ‘도기’와 ‘자기’를 합친 개념이 ‘도자기’다. 옹기는 이 중 도기에 속하는데, 직접 흙을 채취해 가공한 후 원하는 형태로 성형해 시유·건조하고, 가마에 쌓아서 불에 굽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옹기는 ‘숨을 쉰다’. 옹기토의 미세한 모래 알갱이가 옹기의 안과 밖으로 공기를 통하게 해 간장, 김치, 젓갈과 같은 발효 음식의 저장 그릇으로 많이 사용되고, 옹기를 가마 안에 넣고 굽는 과정과 잿물유약 등으로 보관품을 잘 썩지 않게 만드는 특성이 있다. 성형 기법은 지역에 따른 차이가 있는데, 경기도를 비롯한 중부지방에선 흙을 가래떡 형태로 둥글게 만드는 흙가래(질가래)를 쓰며, 흙을 층층히 쌓은 기술인 ‘타림’의 측면에선 마치 바느질을 박는 모습과 흡사하다고 하여 ‘배기타림’ 기술을 활용한다. ●관련기사 : 광대 왔소, 줄을 서시오…줄타기 이수자 ‘한산하’ [청년 장인, 전통을 잇다①] https://www.kyeonggi.com/article/20250102580306 “열 네살에 매료된 양주별산대놀이, 이젠 운명”…이수자 ‘윤동준’ [청년 장인, 전통을 잇다②] https://www.kyeonggi.com/article/20250125580062 “세밀함의 예술, 완성에 끝이 없어”…불화장 전수자 ‘정수현’ [청년 장인, 전통을 잇다③] https://kyeonggi.com/article/20250217580401 “마을의 뿌리, 우리가 지키는 것”…화성팔탄민요 전수자 ‘이정민’ [청년 장인, 전통을 잇다④] https://kyeonggi.com/article/20250330580077 3대에 걸쳐 전하는 입사의 매력…‘빛이 된 금과 은의 향연’ 입사 전수자 ‘박승준’ [청년 장인, 전통을 잇다⑤] https://kyeonggi.com/article/20250417580239

“해외 입양인, 그 후”…국내외 무대 휩쓴 다큐멘터리 영화 ‘케이 넘버’ 조세영 감독 [문화인]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현장의 ‘목격자’가 되어 그들의 시선과 발걸음을 따라가 봤으면 좋겠습니다.” ‘723915’, ‘85c-3128’, ‘K82-2150’, ‘10846’. 10자리 남짓의 이 숫자는 한 명의 ‘아이’에게 부여된 고유번호다. 해외로 입양 가는 아동을 분류하기 위해 개별 입양기관마다 기관 고유의 번호 체계를 만들어 붙인 것이다. 그렇게 대한민국에서 해외로 보내진 아이들의 숫자는 20만명. 지난 14일 개봉한 조세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독립영화 ‘케이 넘버’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조 감독은 친생 가족을 찾기 위해 한국을 찾은 해외 입양인들이 조작된 서류와 감춰진 기록을 추적하며 그 이면의 이야기를 영화로 파헤쳤다. 영화엔 ‘메이드 인 한국인-해외입양을 말하다’(2004)에서 한국의 해외 입양 제도와 해외 입양인들의 목소리를 본격 조망하기 시작한 그의 끈질긴 추적기가 담겨 있다. 2시간 내내 관객을 ‘아동 수출국’이라는 한국의 불편한 진실과 해외 입양인들이 마주하는 현실로 안내한다. 작품 개봉을 하루 앞둔 날, 그가 다큐멘터리 수업을 가르치고 있는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강의실에서 만난 조 감독은 “한국으로 돌아온 여러 입양인과 만나며 그들이 자신의 입양 원본 기록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불합리한 상황을 목격했다”며 “입양인 대부분 스스로에 관한 정보를 어느 기관에서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는 걸 걸 알고 6년간 직접 입양인들을 만나고,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며 영화 ‘케이 넘버’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영화는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경쟁 ‘다큐멘터리 관객상’(2024),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장편 경쟁 ‘대상’ (2024),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열혈스태프상’(2024), 제22회 코펜하겐 국제 다큐멘터리영화제 F:ACT AWARD (2025), 제13회 디아스포라 영화제 디아스포라 장편(2025)을 수상했다. 특히 ‘관객상’은 관객들이 직접 투표로 뽑아준 상이기에 의미가 남다르다. 조 감독은 당시 한국으로 돌아온 여러 입양인들과 만나며 그들이 자신의 입양 원본 기록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들을 목격한다. 입양인 대부분은 스스로에 관한 정보를 어느 기관에서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이후 6년간 그는 직접 입양인과 만나고,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며 영화 ‘케이 넘버’를 만들게 된다. ‘케이 넘버’에서 관객은 4명의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723915(김미옥)’. 8세(추정) 때 길에서 발견돼 미국으로 입양된 미오카는 서류에 적혀 있던 이름 ‘미옥’에 스스로 A를 붙여 ‘미오카’라는 이름을 짓는다. 친생모를 찾기 위해 여러 차례 한국에 왔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그런가 하면 ‘K82-2150(신선희)’은 태어난 지 4개월 만에 덴마크에 입양됐다. 인생의 절반을 한국에 돌아오기 위해 살았다는 그녀는 ‘당신은 입양 가서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자신의 행복에 대해 아무도 물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조 감독은 “네 사람의 이야기는 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수많은 해외 입양인이 공통으로 겪어온 문제”라며 “덴마크에서 열린 상영회에 100명이 넘는 입양인 관객들이 자리했는데, 이들이 ‘영화를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해 기억에 남았다”고 말했다. 영화는 ‘고아’가 아님에도 아동을 ‘고아’로 만들고, 그 속엔 미혼모와 미혼모의 아이를 ‘정화’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으며, 한국전쟁 이후 해외로 아동을 ‘수출’하며 국가의 ‘자산’을 채우는 모습, 깨끗하고 정갈화된 ‘입양 시스템’은 전 세계 유례없는 시스템으로 정착됐다는 점 등 보고도 믿기지 않는 사실을 나열한다. 전문가와 함께하는 밀도 높은 추적기는 묵직하지만, 전달 방식은 친절하고 자세하다. “제가 만난 많은 해외 입양인들이 이렇게 묻더군요. ‘한국인들은 입양인들이 돌아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라고요. 당시엔 제대로 답할 수가 없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존재조차 알지 못할 테니까요. 하지만 이젠 우리가 함께 답을 찾아가야 한다고 결론을 지었어요.” 그의 말처럼 영화는 동정도, 연민도, 분노도 필요 없다고 말한다. 다만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함께 알아야 한다고 한다. “있는 그대로 사실을 바라봐줬으면 좋겠어요. 바로 며칠 전 ‘입양의 날’에 상영회를 한 적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 왜 ‘입양인의 날’은 없을까 누군가 말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누군가의 일생은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이유로 희생되고 고통받고 있어요.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新한복 중심에 선 ‘기로에’ 여백선옥 대표…“한복의 디지털화, 새로운 ‘기로’ 될 것” [문화인]

“각종 드라마와 예능이 OTT를 통해 해외에 방영되기 전에는 영국에 사는 사람이 우리 한복을 입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올 거라고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현재에도 한복의 세계에 변화가 찾아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려워 말고 이러한 흐름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패션 브랜드 ‘기로에(Guiroe)’의 여백선옥(박선옥) 대표 겸 디자이너(54)는 ‘옷이 스스로 말하게 하라’는 디자인 철학이 있다. 때로 옷은 백 마디의 말보다 그 사람에 관해 더 많은 것을 표현한다. 해외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던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주인공 ‘장 회장’(유재명 분)의 내공이 느껴지는 캐릭터는 한복 의상과 어울리며 시청자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예능 ‘놀면 뭐 하니?’의 캐릭터 중 하나인 ‘유야호’(유재석 분)가 입고 나온 한복 의상 역시 세련되면서도 독특한 디자인으로 정체성을 한껏 드러냈다. 장 회장과 유야호에 또 다른 숨을 불어넣은 박 대표는 문화체육관광부 주관의 ‘올해의 한복인 상’(2022)을 수상하고, 최근에는 드라마 ‘보물섬’에 이르기까지 패션쇼·전시·문화·공연 등 다양한 장르에서 한복 문화콘텐츠를 기획, 한류의 중심에서 한복의 매력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 그는 ‘기로’에서의 선택을 강조한다. 그는 “인생에서 우리 모두 기로에 서는 순간이 다가온다. 나 역시 수많은 기로의 순간에서 변화를 맞이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 시절 서양 학문인 의생활학을 전공했다. 패션 디자인은 서양의 학문으로 대학 때 배웠던 모든 것은 서양인을 기준으로 한 커리큘럼이었다. 8등신의 패션 일러스트도 서양 사람을 기반으로 한 미의 기준이다. 동양인인 박 대표는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박 대표는 ‘우리’만의 미를 찾기 시작했다. 기로에서 맞이한 첫 번째 변화였다. 그는 “내가 만드는 옷에 ‘진정성’을 담고 싶었다”며 “내가 그리는 디자인의 대부분은 한국적인 것에서 차용하는데 정작 그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알지 못했다”고 전했다. 본격적으로 한복에 관해 공부하기 시작한 그는 2004년 ‘여백’이라는 한복 브랜드를 런칭한다. 한복을 패션의 개념으로 접근하며 창의성을 추구했던 그는 전통 오방색 한복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한복에 데님과 레이스·벨벳 소재를 사용하는 등 새로움을 시도했다. 서울패션위크부터 해외 전시 등 성과를 보였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랭했다. 좌절을 겪고 2012년 호주로 떠났다. 기로에서 두 번째 선택이었다. 타국에서의 생활은 오히려 그에게 영감을 줬다. 그가 직접 만든 한복을 입고 호주 친구들과 만나니 반응이 매우 좋았다. 그때 한복이 한국 사람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야심차게 돌아왔지만 시대는 변해있었다. 당시 한국에선 무관이 입던 ‘철릭’을 평상시에도 입을 수 있도록 변형한 ‘철릭 원피스’ 등 일상 패션으로의 한복을 추구하는 ‘신한복’ 붐이 일어나고 있었다. 선발주자라고 생각했던 그가 오히려 후발주자가 된 셈이다. 기로에 선 그는 과감히 ‘블루오션’으로 뛰어들었다. 현대적인 한복, 서양의 정장에 대척할 만한 남성 한복 슈트(정장)를 만든 것이다. 2015년 한복진흥센터와 함께 신한복 개발 프로젝트에 착수해 오방색 중 적색을 추상표현주의의 대표 서양화가인 마크 로스코 회화에서 영감을 받아 한복 디자인으로 제시했다. 이것이 한복 슈트 모태 디자인이 돼 그는 2017년 아시아의 전통에 서양 패션을 접목한 ‘기로에’의 문을 열게 된다. 이후 문체부와 한류 협업 콘텐츠 기획 개발 사업을 하는 등 그는 시대의 흐름과 함께한다. 그가 그리는 한복의 미래는 변화의 기로에서 새로운 문화콘텐츠를 넓혀가는 것이다. “다가오는 시대에는 직접 입는 실물 한복뿐만 아니라 AI 기반의 디지털화된 한복 문화콘텐츠 시장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많은 후배들이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러한 기술을 잘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대에 걸쳐 전하는 입사의 매력…‘빛이 된 금과 은의 향연’ 입사 전수자 ‘박승준’ [청년 장인, 전통을 잇다⑤]

“‘전통’을 살아 숨 쉬게 해 후대에 전승되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입사’ 전수자 박승준씨(22)가 철로 된 기물을 정과 망치로 두드리는 ‘쪼음질’ 작업을 이어가자 가로, 세로, 대각선의 방향으로 가느다란 수백개의 선이 나타났다. 일정한 세기의 힘과 반복적인 두드림으로 촘촘하고 균일한 홈을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입사’의 시작이다. 수천, 수만번의 쪼음질이 끝나면 가느다란 홈에 금과 은을 마치 실처럼 박아 넣는데 이것이 입사의 백미다. 쪼음질로 바탕을 만들어 놓은 뒤 그 길을 따라 금과 은으로 세밀하게 문양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다만 고된 수행과 같은 쪼음질 작업을 10년 정도 해야 비로소 금과 은을 새겨 넣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박씨가 3년간 매일같이 정을 두드리며 쪼음질에 힘을 쏟고 있는 이유다. 박씨는 “‘입사’는 작업자의 손길, 즉 인간의 흔적이 깊게 스며들고 그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는 기술”이라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체력적으로 힘든 과정을 거치지만, 아름다운 결과물을 보면 지난 시간은 까맣게 잊혀진다. 특히 고된 과정을 거치며 ‘살아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는 점이 매력이다”라고 말했다. 박씨는 경기도 무형유산 제19호인 입사장의 유일한 전수자다. 지난 2022년부터 본격적으로 입사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사실 어릴 적부터 일상생활에서 입사를 접해왔다. 그의 외할머니인 이경자씨가 유일한 경기도 무형유산 입사장 보유자이고, 그의 어머니인 이유나씨가 유일한 이수자이기 때문이다. 박씨의 집이 곧 작업장이었기에 집에서는 늘 망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입사의 많은 과정을 보고 자랐다. ‘입사’는 흑철·백동 등의 기물 표면을 정으로 쪼아 금·은·오동을 끼워넣거나 덧씌워 무늬를 놓는 금속공예 기법이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시작돼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왔으며, 입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장인을 입사장이라 한다. 입사장은 1983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 뒤 1997년 경기도 무형유산으로도 지정됐다. 지역의 특성이 강하거나 전승 단절 위험이 있는 종목은 중복으로 지정되는데, 경기도는 입사가 전승 단절의 위험이 있다고 봤다. 또 이경자 보유자가 조선시대 마지막 입사장이었던 고 이학응 선생의 계보를 잇고 있어 종목 지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3대째 입사를 이어가고 있는 박씨는 어머니와 함께 다양한 전시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덕수궁에서 펼쳐진 한독수교 140주년 기념 특별전 ‘1899, 하인리히 왕자에게 보낸 선물’에 참여해 작품을 선보였다. 박씨와 그의 어머니인 이유나 이수자는 고종 황제가 1899년 대한제국을 최초로 국빈 방문한 하인리히 친왕에게 하사했던 선물 중 하나인 ‘투구’를 재현해 큰 호평을 받기도 했다. 현재 서울의 한 조형대학 AI디자인학과에 재학 중인 박씨는 전통과 기술을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입사를 선보이는 목표를 갖고 있다. 사람과 분위기에 맞춰 달라지는 입사 공예품을 만들거나, 이전에 기획했던 공예품에 인공지능(AI) 회로를 결합해 실제 움직이는 형태의 공예품을 선보이는 식이다. 박씨는 “더이상 입사를 배우려는 전수자가 없는 상황이다.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기만 해서는 전통이 살아남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며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전통이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만들어야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AI 시대에 입사를 포함한 전통기술들이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다”고 힘줘 말했다. 20대 초반의 나이인만큼 그는 하루에도 여러 번 앞날에 대한 고민을 하며 마음이 ‘갈팡질팡’ 한다. 하지만 현재 입사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기에, 전통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이 강하다고 한다. “입사는 쉽게 배울 수 있는 기술이 아니지만, 금과 은으로 ‘빛’을 새긴 완성품은 정말이나 아름답습니다. 입사를 통해 저만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나가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다음 세대로 전승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관련기사 : 광대 왔소, 줄을 서시오…줄타기 이수자 ‘한산하’ [청년 장인, 전통을 잇다①] https://www.kyeonggi.com/article/20250102580306 “열 네살에 매료된 양주별산대놀이, 이젠 운명”…이수자 ‘윤동준’ [청년 장인, 전통을 잇다②] https://www.kyeonggi.com/article/20250125580062 “세밀함의 예술, 완성에 끝이 없어”…불화장 전수자 ‘정수현’ [청년 장인, 전통을 잇다③] https://kyeonggi.com/article/20250217580401 “마을의 뿌리, 우리가 지키는 것”…화성팔탄민요 전수자 ‘이정민’ [청년 장인, 전통을 잇다④] https://kyeonggi.com/article/20250330580077

산업단지에서 꽃 피운 문화예술…최혜미 한국공예체험박물관장 [문화인]

점심시간쯤 되자 작업복을 입은 근로자들이 박물관 카페에 들러 차를 마시거나 작품을 보며 담소를 나눴다. 아이 손을 잡고 온 부모, 세차를 하던 남성 등 관람객은 다양했다.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작품과 내부는 고색창연함에 현대미가 더해졌다. 공장이 들어선 시흥시 매화산업단지에 둥지를 튼 이 곳은 지난해 8월 문을 연 한국공예체험박물관이다. 삭막했던 산업단지에 새로운 문화예술이 피어나고 있다. ■ 문턱 낮춘 박물관… 누구나 일상에서 예술을 즐기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한국공예체험박물관은 홍익대 대학원, 펜실베니아·밴쿠버컬리지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작가, 큐레이터 등으로 활동한 최혜미 관장(46)이 전국에서 가장 문턱 낮은 박물관을 지향하며 개관했다. “좋은 곳에 가야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들어설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어요. 누구나 일상에서 문화예술을 누리고, 또 작가들의 작품이 기꺼이 관람되는 공간이 필요하죠. 마음먹고 가지 않아도,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되는 동네 아지트 같은 박물관, 누구나 새로운 경험을 하고 꿈을 꿀 수 있는 박물관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곳에선 박물관 전속 작가들의 전시와 기획전을 관람하거나 16개의 전통 체험 등을 할 수 있다. 한국공예체험박물관이지만 내부는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졌다. 복합문화생활공간을 표방한 만큼 공간들은 예술과 문화, 상품과 체험, 쉼과 여유를 품었다. 박물관 1층은 쇼윈도 갤러리가 있어 외부에서도 다양한 작품을 볼 수 있다. 맥간 공예 전시부터 내부에 쓸모를 다하고 버려지는 자개장을 쇼케이스로 감각적으로 변화시켜 여러 유물과 조형 작품을 모았다. 2층은 갤러리 공간으로 여러 회화작품과 조형작품이 전시됐고 공예작품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 3층은 세미나실과 전통 좌식공간으로 구성돼 전통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전시품은 규방공예와 민화, 맥간공예, 전통 한복 의상 등 다양하다. 2층과 3층 사이엔 ‘소소한 도서관’이 있어 아이들 누구나 박물관 어디서든 책을 읽고 즐길 수 있다. ■ 버려진 것에서 새로움 찾고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 담긴, 전통 조각을 전공한 최 관장이 전통에 빠져든 것은 버려진 것에서 새로운 예술이 피어나는 것을 보면서다. 맥간공예의 보릿대가 출발점이었다. 누군가에겐 쓰레기이지만 누군가에겐 재료가 돼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맥간공예의 보릿대에서 전통의 아름다움을 엿봤다. 이후 ‘전통이 잊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란 생각에 맥간을 배우고 옻칠을 배우고 나전도 배웠다. “민화를 그린 그 마음은 결국 누군가를 위한 소망, 바람이더라고요. 누군가에게 주는 따뜻한 메시지, 낡은 것에서 새로움을 찾는 전통에 끌려 전통 체험을 주제로 현대의 작품이 공존하는 박물관을 열었습니다.” ‘산업단지에 박물관이 웬 말이냐’ 하는 주위의 만류도 많았다. 하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최 관장은 자신이 거주하고 사업체를 운영하는 곳에서 문화예술을 꽃피우고 싶었다. ‘맛집은 산골에 있어도 소문난다’라는 자신감으로 박물관을 열었다. 확신은 들어맞았다. 개관한 지 아직 채 1년이 되지 않았지만 주변의 직장인들을 비롯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온 가족 관람객, 대학생, 전문가 과정을 꿈꾸는 지망생 등 많은 이들이 이곳에 전시를 보거나 체험하러 온다. 주말엔 사람도 차도 없이 적막했던 산단에 관람객을 실은 관광버스가 줄을 잇고 있다. 커피값이 부담 없다 보니 어르신들도 좋아하는 공간이 됐다. 최 관장은 단순한 전통의 전시를 넘어 전통이 가진, 문화예술이 가진 본질을 박물관에 오롯이 담는 게 목표다. 누구나 감동받을 수 있고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문화예술 공간이다. 전시를 하고 싶으나 마땅한 공간을 찾지 못하는 작가들을 위해 인도 갤러리를 무상으로 열어 놓고 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작가들의 작품이 포털 쇼핑몰에서 판매가 이뤄지도록 돕는 것도 이런 이유다. 지역사회와의 접점을 늘리며 예술이 가진 연대와 회복, 나눔의 가치도 전파하고 있다. 그동안 학교와 문화센터에서 강사로 교육하고 전시한 경험을 살려 지역의 다문화센터, 장애인센터와 연계해 무료 한복 체험 등 재능기부를 이어나가는 중이다. 최 관장은 “전통만 있는 게 아니라 문화복합공간으로 특이하고 재밌는 곳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며 “지역단체와 함께하는 이벤트도 만들어 누구나 누리고 즐거움을 맛보는 문화예술을 전파하겠다”라고 강조했다.

“마을의 뿌리, 우리가 지키는 것”…화성팔탄민요 전수자 ‘이정민’ [청년 장인, 전통을 잇다④]

한 사람의 정체성은 그가 나고 자란 땅과 뗄레야 뗄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뿌리’라 일컫는다. 여기, 온 마을 사람이 힘을 모아 잊혀진 뿌리를 되찾은 곳이 있다. 경기도 무형유산 제65호 ‘화성팔탄민요’ 보유 단체이자 화성시 팔탄면 주민들로 구성된 팔탄면향토민요보존회 이야기다. 팔탄 토박이이자, 평범한 직장인이며 무형유산 전수자(전수장학생)인 이정민씨(35)는 고향으로 돌아와 팔탄민요를 만났고, 마을과 세대를 이어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20일 저녁 7시,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고 마을에 불빛이 켜질 때쯤 각자의 자리에서 일을 마친 주민들이 삼삼오오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낮에는 자동차부품회사의 평범한 직장인이던 정민씨도 퇴근 후엔 이곳에 모여 무형유산 전수교육을 받는다. 농사일로 햇빛에 얼굴이 그을린 어르신부터 앳된 얼굴의 초등학생까지 나잇대도, 생김새도 제각각인 이들이지만 한마음 한뜻으로 앞에 선 선생님을 쳐다본다. 자리에서 일어나 어떤 이는 한 손에 모를 들고, 누군가는 머리에 새참바구니를 이고, 누군가는 징과 꽹가리를 집어든다. “야 논 매기 시작들 해봅시다” 선소리꾼의 선창에 “에, 합시다” 답이 이어진다. “얼카 덩어리 넘어간다. 우여차 덩어리 잘 넘어간다.” 일이 너무 힘들면 어여쁜 가족 먹여 살릴 거라며 원하는 바를 노래하고, 품삯이 적으면 익살스런 장난도 치고, 그러다 다같이 하늘 한번 바라보자며 허리도 펴보자며 신명나는 노랫가락을 따라 부르다 보면 어느새 논밭에 모가 가지런히 심어져 있을 테다. ■ 할아버지의 아버지, 할머니의 어머니 때부터…구장리에서 나고 자란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듣고 배운 소리 이곳에 모인 이들은 지난 2022년 경기도 무형유산 제65호로 지정된 ‘화성팔탄민요’ 보유단체인 ‘팔탄면 향토민요보존회’ 회원들이자 팔탄면 주민들이다. 이정민씨 역시 대대로 팔탄이 고향인 이곳 토박이다. 보존회 분들 대부분은 오랫동안 구장리의 유일한 초등학교였던 팔탄초등학교 선배다. 어렸을 때부터 마을에서 알고 지내던 친구 어머니, 친구 아버지, 삼촌과 고모 등이 계신다. 이 30여명의 회원들은 2대가 함께하는 가족, 부부 등 다양하다. ‘화성팔탄민요’의 경기도 무형유산 지정은 모두가 놀랄만한 일이었다. 관이나 전문가의 도움 없이 마을 주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향토민요가 복원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공동체 문화를 오랫동안 간직하고, 소문난 소리꾼이 많던 팔탄면 구장리의 장례의식요는 마을 전통과 소리의 가치가 인정받으며 1998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7-2호(팔탄상요·회다지소리)로 지정됐다. 하지만 유산이 전승되지 못한 채 2008년 보유자인 박조원 선생이 사망해 무형유산 지정이 해제되고 말았다. 한동안 잊혀졌던 마을의 과거는 이장과 선소리꾼 이만규(현 보존회장), 주민자치회 간사 안희만(현 보존회 운영위원장) 등의 노력으로 2015년부터 자료조사가 시작됐다. 살아생전 박조원 선생을 비롯해 그와 함께 활동했던 어르신들의 육성을 담고, 여기에 과거 두레농악을 생생히 기억하며 농악회로 활동하던 주민들을 끌어모았다. ■ 경기 남부·서해안의 바다·충청도의 향기까지…한데 섞인 문화적 특성이 만들어낸 독특함 과거의 기억을 교훈 삼아 마을 주민들은 이번엔 보존회 자체를 보유단체로 지정하고,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선소리꾼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큼 그래서 언제든 유산이 전승되도록 매주 교육을 이어가고 있다. 향토민요를 부르는 정민씨지만, 평소의 그는 여느 90년대생과 다를 바 없다. 아이돌 노래를 꿰뚫고, 유튜브를 즐겨보며 유행에도 민감하다. 그런 그가 보존회 활동에 뛰어든 배경은 뭘까. “몇 년 전 한 방송에서 보존회 활동을 촬영하러 온 적이 있어요. 그때 멤버가 모자라 제가 사물놀이를 돕는 역할로 현장을 찾아왔었는데, 그때 농악회 회원 출신이자 보존회 원년 멤버인 어머니를 비롯해 주민들이 너무나 신나게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며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존회 활동은 단순히 마을의 무형유산을 이어가는 역할만 한 게 아니었다. 마을의 세대와 공동체를 이어주는 가교가 됐다. 오랫동안 논농사를 지어오던 팔탄면이지만 점점 주변은 산업화되고 농업은 기계화되고 있다. ‘논 메는 소리’ 등을 하기 위해 이들은 마을 어르신에게 농삿일을 배우고 아랫세대는 자신의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의 역사를 알게 됐다. 이씨 역시 마찬가지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일로 고향을 떠나 천안에서 10여년 동안 살아왔던 그는 팔탄 인근으로 일터를 옮기며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었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며 마을의 역사를 알고, 보존회에 들어가고 어머니와 끈끈한 유대를 맺게 됐다. 지난해 제65회 한국민속예술제에 경기도 대표로 출전한 보존회는 전승상도 수상했다. 그는 “지난해 제65회 한국민속예술제 출전했을 때 상여소리를 했던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난다”며 “그 해 갑자기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지셨고 같은 해 나는 결혼을 하며 인생의 많은 일들이 있었다. 예술제 무대에서 회장님이 ‘나는 간다’라며 소리를 시작하시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라고 밝혔다. “농사를 지어보지 않았던 또래 친구들은 아마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장르일 겁니다. 하지만 팔탄민요를 일반 시민들이 조금 더 가깝게 느끼실 수 있도록 저와 보존회는 끊임없이 노력 중입니다. 어르신들에겐 추억의 소리로, 지금의 세대에겐 신선한 향토문화로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화성팔탄민요’ ‘화성팔탄민요’(구장터 면생이)는 ‘모 심는 소리’, 초벌 매는 ‘얼카덩어리’, 논 훔치는 소리인 ‘둘레’, 입 구음(아, 우, 에 등)만으로 이루어진 ‘면생이’, ‘긴방아소리’, ‘자진방아소리’, 받는 부분의 사설에 ‘상사’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상사소리’, 받는 소리에 ‘먼들’ 단어가 들어가는 ‘먼들소리’ 집터 다질 때 부르는 ‘지경다지기소리’등 총 9개 악곡으로 구성됐다. 경기 남부의 보편적 특성과 충청남도 북부 문화권의 특성을 갖고 있어 유산으로의 가치가 크나, 곡의 난이도가 높고 전승이 쉽지 않아 소멸될 뻔했다. 2022년 5월20일 경기도 무형유산 제65호로 지정된 ‘화성팔탄민요’ 보유단체 팔탄면 향토민요 보존회는 ‘구장터 면생이’라는 이름으로 해당 지역에서만 독특하게 구전되던 향토민요가 농업의 기계화로 사라지자, 이를 복원하고 전승하는 한편 무형유산을 후대에 계승할 수 있도록 전통문화 교육 활동을 하기 위해 설립된 비영리 단체이다. 보존회는 경기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됐다 해제된 ‘팔탄상여소리’를 비롯해 복원이 미흡해 제외됐던 ‘동아줄다리기, 가래질소리’ 등을 무형유산으로 지정받고자 하며 현재 이수자 지정과 전수장학생 양성을 위해 노력 중이다. ●관련기사 : 광대 왔소, 줄을 서시오…줄타기 이수자 ‘한산하’ [청년 장인, 전통을 잇다①] https://www.kyeonggi.com/article/20250102580306 “열 네살에 매료된 양주별산대놀이, 이젠 운명”…이수자 ‘윤동준’ [청년 장인, 전통을 잇다②] https://www.kyeonggi.com/article/20250125580062 “세밀함의 예술, 완성에 끝이 없어”…불화장 전수자 ‘정수현’ [청년 장인, 전통을 잇다③] https://kyeonggi.com/article/20250217580401

“CONNECT BTS부터 베니스비엔날레까지”…이대형 에이치존 대표 [문화인]

때로 백 마디 말보다 3분 남짓한 노래 하나가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불러오기도 한다. 지금의 전 세계는 갈수록 ‘다양성’은 사라지고, ‘연대’의 가치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 예술을 통해 우리는 연결돼 있음을 이야기하는 이가 있다. 이대형 에이치존 대표 겸 큐레이터(51)는 “전 세계가 처한 공통의 위기는 연대하고, 집단지성을 발휘할 때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며 “여기에는 시대와 국경을 넘어 다양한 사람과 생각을 연결 짓는 문화예술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한다”고 강조한다. ■ 거리의 언어 케이팝에 세계 연결… “예술, 시대와 국경 뛰어넘어 사람과 생각 연결하고 공감 능력 일깨워” 몇 년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글로벌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아시안 헤이트(아시아인 혐오)’를 비롯해 ‘혐오’와 ‘증오’의 물결이 지배했던 2020년, 글로벌 전시 프로젝트 ‘CONNECT BTS’는 사라져가는 연대의 가치를 회복하자는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CONNECT BTS’는 뉴욕, 런던, 베를린, 부에노스아이레스, 서울 등 세계 5개 도시를 연결해 BTS(방탄소년단)의 음악이 추구하는 철학적인 메시지를 재해석하고, 전 세계 예술가들이 이를 현대예술 작품으로 승화시켜 세상에 알리는 프로젝트이다. 대중 언어와 순수예술의 전무후무한 만남에 뉴욕타임즈, 가디언지, BBC 등 해외 언론의 반응 또한 뜨거웠다. 당시 BTS는 ‘거리의 언어’로 치유와 연대, 자기 긍정과 소통, 다양성, 변두리의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전 세계 다양한 계층과 언어, 종교를 뛰어넘어 그들의 음악을 듣는 수많은 이들을 하나로 연결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조각가 안토니 곰리, 설치미술가 토마스 사라세노 등 22인의 저명한 각국의 작가와 큐레이터가 뜻을 모았다. 음악에 담긴 다양성과 낯설고 멀게만 느껴지는 고전 철학, 인문학에 녹여낸 ‘연대’의 가치는 국내외 예술가들에 의해 재탄생하며 미국, 영국, 독일, 아르헨티나, 한국에서 전시가 이어졌다. 해당 프로젝트를 총괄했던 이대형 대표는 이를 통해 예술이 가진 선한 영향력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베를린에서 열린 전시에서는 한 흑인 소녀가 미술관 관장에게 감사하다며 꽃다발을 들고 왔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의 전통 음악과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줘 감사하다는 것이었죠. 그런가 하면 영국에선 한 소녀가 수첩을 들고, BTS의 이야기를 하나라도 놓칠세라 꼼꼼하게 메모하고 공부하는 것을 보며 인종도, 교육 환경도, 언어도 다 다르지만, 이들이 친숙한 일상의 언어를 바탕으로 하나 되며 다양성의 철학을 흡수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2025년 현재에도 혐오의 물결은 여전하다. 오히려 더욱 강화됐다. 그가 추구하는 인류애적 가치가 더욱 강조되는 이유다. 이처럼 이대형 대표는 큐레이터로서 시대에 필요한 메시지와 가치를 던지는 일을 한다. ■ 2017 베니스비엔날레서 현지 문화 보호하는 기부 펼쳐… “문화예술은 공동의 것” 이 대표는 큐레이토리얼 회사인 에이치존을 이끌어가고 있다. 그는 자신의 회사에 대해 “예술이 실제의 삶과는 거리가 있기에 그 간극을 메워가며 지금의 시대 혹은 작가, 미술계, 기업, 정부 등에 ‘마땅히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것이 무엇인지’, ‘결핍돼 있지만 추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바로 그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 제시하는 일을 한다”고 설명한다. 큐레이토리얼이란 단순한 작품 배열이 아닌, 문화예술을 통한 특정한 메시지나 문제의식 혹은 철학의 실천 또는 이를 담아낸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구성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이 대표가 예술이 가진 선한 영향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프로젝트를 이끌 수 있게 된 배경엔 미술계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예술감독 시절의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관의 예술감독이 되는 것은 올림픽의 국가대표 감독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2017년 제57회 베니스비엔날레 예술감독으로 참여하며 그곳에서 금메달을 따야 한다는 사회적인 기대치와 스스로의 욕심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베니스에 도착해 다양한 문화재를 보니 모든 것을 잊고 그저 감동하게 됐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전시를 기획하고 ‘예술’을 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이기려 하는 게 아닌,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선한 영향력으로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본질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결국 그러한 진정성은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5개 국가가 뽑은 베스트 전시라는 좋은 결과도 가져왔다. “비엔날레에서 한 가지 실험을 했습니다. 전시를 통해 사람들의 행동을 바꿔보자는 것이었죠.” 당시 그는 한국관의 신문을 만들어 판매하고, “당신의 자본으로 인류애적 가치를 실현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다양한 나라의 관람객들에게 받은 돈을 바탕으로 베니스의 물 자원에 관한 환경보호 단체에 기부하게 된다. “베니스 당국과 환경단체 등에서 ‘왜 그런 행동을 했냐’고 물었습니다. 반대로 당신들이 한국의 경복궁에 오면 똑같은 경건함을 느꼈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문화와 예술은 모든 인류가 감상할 수 있는 공동의 자산이고, 이를 지키는 것 역시 공동의 몫이라는 것이었죠.” 동양의 케이팝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서 글로벌 전시를 이끄는 데 색안경을 끼던 현지인들과 해외 언론을 감탄하게 만든 것도, 미술을 주인공으로 한 올림픽에서 ‘경쟁’을 펼치러 온 타국의 예술감독을 추켜세운 것도 결국 그가 추구하고자 한 따뜻한 메시지의 진정성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그는 6년 넘게 현대자동차의 아트디렉터로 활동하며 세계적인 미술관 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과의 파트너십을 이끌기도 했으며, 지난해에는 2024 파리 올림픽을 맞이해 현지에서 열린 한국 미디어아트 전시 '디코딩 코리아'를 기획했다. ■ 국내 미술계 “협업 통해 시너지 효과 발휘할 수 있어”…“오리지널 매력 담긴 ‘독창성’ 추구해야” 세계 곳곳의 미술관, 기업, 아티스트, 국가 등 굵직한 글로벌 프로젝트를 이끌어 온 이 대표이지만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땅 한국과 경기도를 비롯한 국내 미술계의 발전에 대한 애정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달 말에 그는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연계 인문학 강좌에 참여해 수원 지역의 작가와 관객들에게 ‘AI와 현대미술’을 주제로 기술 발전의 흐름 속에 인간과 예술, 미술관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는 경기도와 수원에 대해 수준급의 전시 인력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1년에 한 번 정도는 도내 미술관의 인력 네트워크를 총동원해서 도나 시를 위한 공공의 프로그램이 마련되기를 제안합니다. 공공 미술이 될 수도, 페스티벌이 될 수도 있고 형태는 다양할 것입니다. 중요한 건 지역에서만 할 수 있는 오리지널리티(독창성)를 만드는 것입니다.” 시대의 맥락 속에 더 깊은 울림을 주는 방향을 이끌어가자는 이야기다. ■ “큐레이터, 시대가 추구해야 할 가치 던지는 역할”… “위태로울지라도 경계선에 서, 안과 밖 들여다봐야” 그에게 큐레이터의 역할에 관해 묻자, ‘생각의 지도를 확장하는 이’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래전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몰랐을 때 바다 너머는 낭떠러지가 아닐까라고 착각했습니다. 그 너머에 무언가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죠. 예술은 사람들의 사고를 확장하는 역할을 하고, 그것을 일러주는 것이 큐레이터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연한 사고를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들려준 나이테에 관한 비유를 들려줬다. “해가 갈수록 나무의 나이테가 하나둘 넓어지는 것처럼 생각이라는 것도 나이 듦에 따라 머릿속에 하나씩 나이테처럼 자라나게 됩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지금의 네가 어디에 서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나무의 안쪽 가운데는 딱딱하지만, 나무의 경계선, 외곽은 계속 성장해야 하니 무르고 부드럽습니다. 할아버지는 제게 나무의 가운데 서 있을 것인지, 경계선에 서 있을지를 물었습니다.” 나무의 안쪽 한가운데 서 있으면 사람들은 안전하고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더 자라날 수는 없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너머를 그려볼 수 없다. 반면 경계선은 위태롭지만, 끊임없이 자라나며 안과 밖 세상을 동시에 살펴볼 수 있다. “당신의 생각이 경계선에 설 수 있어야 세상 중심의 서는 것입니다. 생각의 지도, 지평선의 가운데가 아닌 경계선에서 그 너머를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영상] “폴 매카트니의 전속 사진작가에서 영화감독까지”…김명중의 인생 한 컷 [문화인]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 방식으로 사진을 찍을 때면 예상하지 못한 결과물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피사체가 눈을 감기도, 지나치게 빛이 많이 들어가기도 하죠. 의도하지 않았던 순간이 더 깊은 여운과 감동을 줄 때도 있습니다. 삶도 마찬가지라 생각해요. 티끌 하나 없이 말끔하고, 오점 하나 없이 완벽한 삶을 살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오늘 하루 마음에 안 들었다고 ‘삭제’ 버튼을 누를 수도 없는 게 인생이잖아요.” 영어 한마디 제대로 못 한 채 무작정 낯선 땅으로 떠났던 한국의 한 청년은 세기의 스타와 함께 전 세계를 누비는 사진작가가 됐다. 김명중(MJ KIM·53) 작가는 영국의 전설적인 록 밴드 비틀스의 여러 히트곡을 만든 싱어송라이터 폴 매카트니의 곁에서 17년째 영광의 순간부터 무대 아래 민낯까지 매 순간을 기록 중이다. 마이클 잭슨, 스팅, 조니 뎁, 비욘세, 콜드플레이부터 방탄소년단 등 수많은 스타와 작업을 이어오더니 단편영화 ‘쥬시걸’(2020)을 만들어 국제 영화제에서 다수의 상을 받았고, 이제는 장편영화를 준비 중이다. 최근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종료한 ‘22세기 유물전’으로 그의 첫 정물 사진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종횡무진 예술가 김명중을 지난달 그의 작업실에서 만나봤다. 여든이 넘은 폴 매카트니의 삶에서 가장 오래 연을 이어간 전속 사진작가라는 영예를 이어가고 있지만 그가 사진의 길에 들어선 계기는 ‘우연’에 가깝다.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시간만 보내던 20대 초반, 영국으로 무작정 떠났다. 말이 통하지 않아 혼자 작업할 수 있던 ‘사진’을 부전공으로 택했고, IMF로 학업을 중단하게 됐던 때에는 가게의 간판 사진을 찍으며 생계를 이어갔다. 한국에서 공수한 각종 책과 잡지를 읽으며 사진, 조명을 다루는 법 등을 익혀갔다. 1998년 런던의 작은 지역 신문사에서 수습사원으로 시작했던 일은 한 단계씩 발전했고 2007년 그의 인생을 뒤흔든 영국의 전설적인 걸 그룹 스파이스 걸스와의 작업 이후 폴 매카트니와 연을 맺게 됐다. “폴과의 2015년 내한 공연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텔레비전을 통해 88 올림픽의 굴렁쇠 소년이 운동장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갔던 서울 올림픽주경기장(잠실종합운동장)에 폴과 함께 무대에 올랐던 때 정말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또 다른 기억은 마이클 잭슨과의 추억입니다. 2009년 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 투어에서 사진을 담당하기로 했는데 어린 시절 우상이었던 마이클 잭슨과 맞닿은 손은 참 따뜻하고 커다랗던 기억이 납니다. 런던에서만 6개월이 예정됐던 때로 기대감에 부풀었는데 몇 개월 뒤 그가 죽고 말았습니다.” 전설적인 팝스타들과 작업해 온 김 작가는 평범한 이들을 담아냈던 작업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김 작가의 작업실에는 숱한 해외 스타들과 찍은 화려한 사진과 함께 한 가운데 을지로의 평범한 ‘거인’들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2020년에 을지로가 재개발되며 골목 곳곳이 철거되던 때 그곳에 자리한 장인들의 모습을 담아낸 프로젝트를 했습니다. 아주 작디작은 가게들이지만 가족의 생계를 이어갔던 이들의 삶의 터전이 사라지던 때였죠. 6개월 동안 을지로에 거주하며 이들과 살을 부대끼고 같이 술잔을 부딪치며 다가갔습니다.” 무작정 카메라를 들이민 것이 아니라 그들의 깊숙한 내면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들의 곁으로 다가가 그 일부가 된 것이다. 김명중에게 ‘좋은 사진’이 무엇인지 묻자, 그는 내면의 감정과 진실한 모습을 끌어낼 수 있는 사진이라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 ‘소통’이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미국의 유명 사진가 리차드 아베든이 찍은 마릴린 먼로의 사진을 참 좋아합니다. 화려한 아름다움의 대명사인 마릴린 먼로가 쉬는 시간 어딘가 지쳐 보이기도 약간은 슬퍼 보이기도 하는 그 찰나의 인간적인 모습을 담아냈는데, 이 컷을 당사자인 마릴린 먼로도 오케이(허락)했다는 점이 인상 깊습니다. 사진을 찍는 이와 찍히는 이가 진정한 ‘교류’를 했다는 것이죠. 저 또한 진심을 담아내기 위해 늘 노력할 것입니다.” ● 관련기사 : “쓰레기, 유물이 되다” 수원시립미술관x김명중x 프로쉬 공동 프로젝트 ‘22세기 유물전’ [전시리뷰] https://www.kyeonggi.com/article/20250112580238

“열 네살에 매료된 양주별산대놀이, 이젠 운명”…이수자 ‘윤동준’ [청년 장인, 전통을 잇다②]

아버지와 함께 양주별산대놀이 보존회를 처음 찾은 열 네 살의 남학생의 눈에서 초롱초롱 빛이 났다. 연구생들의 화려한 의상과 장구·피리 등 삼현육각의 울림, 전승교육사의 열정적인 가르침이 그의 마음을 울렸다. 소녀시대와 티아라, 빅뱅 등등 한국 가요계의 아이돌 그룹이 첨단과 유행을 이끌며 10대들의 마음을 흠뻑 적실 때, 그는 오롯이 이 과거의 놀이에, 예술에 매료됐다. 학교 수업시간에도 온통 탈춤 생각뿐이었다. 동아리 역시 양주별산대놀이를 택했고 열일곱의 나이에 전수자를 거쳐 스무 살에 국가무형유산 양주별산대놀이 이수자가 됐다. 현재 26명의 양주별산대놀이 이수자 중 막내인 윤동준씨(27)의 이야기다. 설 명절을 앞두고 양주시 부흥로의 양주별산대놀이전수회관에서 만난 윤씨는 영하의 날씨에도 야외에서 탈을 쓰고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하루하루, 매일매일 윤씨는 자신의 기량을 닦고 익히고자 과거의 유산에 자신의 몸을 던진다. 그는 “‘양주별산대놀이’ 전승을 오래 전부터 ‘운명’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어린 나이에 양주별산대놀이를 하겠다고 하니 아버지께서 ‘정말 하고 싶냐’고 여러 번 되물으셨어요. 대답하는 순간마다 내 눈이 그렇게 반짝였다고 하시더군요. 슬럼프도 있었지만 꾸준히 양주별산대놀이를 하는 것 보면 ‘천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싫든 좋든 이제 이것밖에 할 수가 없겠구나’ 하는 운명 같은 것이라고 할까요.” 양주별산대놀이는 춤과 무언극, 덩담과 익살이 어우러진 민중놀이로 250여년 전부터 양주에 정착돼 전승되다 1964년 국가무형유산 제2호로 지정됐다. 양주는 현재 서울지역의 본산대가 소멸된 상태에서 유일하게 본산대패의 탈놀이를 정착시킨 곳이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춤사위가 부드럽고 우아하면서도 손목과 고개를 까딱까딱하며 모든 춤사위를 깔끔하고 산뜻하게 처리한다. 특히 각 과장과 배역이 세분화돼 있고, ‘중(승려)’ 관련 과장이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윤씨 역시 주전공으로는 ‘옴중’을, 부전공으로는 ‘말뚝이’를 선택해 이수자 시험을 통과했다. 전체 8과장8경으로 이뤄진 양주별산대놀이는 1과장부터 8과장까지 각각 다른 이야기 구조를 가진다. 윤씨가 주로 맡는 ‘옴중’ 역은 전 과장에서 절반 이상을 출연하고, 독무를 하는 장면도 있어 까다롭게 여겨진다. 더욱이 자세를 낮게 해 무거우면서도 강력하게 흩뿌리는 ‘용틀임’ 등의 춤을 추는 ‘옴중’은 하루 이틀의 연습으로 해낼 수 있는 역할이 아니다. 윤씨는 “허리를 숙이고 다리로 버티면서 호흡을 타는 게 정말 힘들다. 자세뿐 아니라 진중하고 엄숙한 감정을 내기 위해 어릴 때부터 노력을 많이 했다”며 “6시간 공연을 끝내고 나면 기진맥진하지만 ‘잘 봤다. 어린 친구들이 있어 다행이다. 든든하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들을 때 뿌듯하다”고 말했다. 현재 양주별산대놀이를 배우고 있는 이들은 연구생 3명을 포함해 6명이 전부다. 전수자는 아직 없다. 전통을 이어가는 윤씨와 같은 청년들의 참여가 중요한 이유다. 윤씨의 꿈은 양주별산대놀이 한 과장의 후일담을 만들어보는 것이다. ‘취발이가 버리고 간 아기 마당이의 미래’를 그려보는 식이다. 전통을 살리되 후일담을 만들어 장면의 폭을 넓히겠다는 당찬 목표다. 이와 함께 윤씨는 30여개의 배역을 모두 배워 전승교육사, 나아가 보유자가 되길 꿈꾼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양주별산대놀이’를 하려는 청년들이 적어지는 게 걱정”이라며 “양주에서 나고 자란 나는 자칭 ‘전통지킴이’다. 더 열심히 기량을 갈고 닦아 ‘양주별산대놀이’가 지금 시대의 많은 이들에게 더욱 알려져 인기를 얻고 보존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매력에 한 번 빠지면, 현재에도 너무 재밌고 의미있는 문화예술이란 걸 알게 되실 거예요. 제가 택한 길을 묵묵히 걸으며 이러한 양주별산대놀이의 매력을 많은 분들께 알리도록 온 힘을 쏟겠습니다.” 옴중 탈을 쓴 윤씨의 춤이 다시 한 번 날아올랐다.

[영상] ‘이날치’에서 ‘정년이’까지…소리꾼 권송희, “전통의 미학 지켜야죠” [문화인]

민족 고유의 정서 ‘한’을 녹여낸 영화 ‘서편제’를 보고 자라난 어린 소녀는 어느새 30년 차 소리꾼이 됐다. 국악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간 권송희(38). 그녀는 그룹 ‘이날치’ 멤버로 “범 내려온다”를 통해 국내는 물론 해외에 신선한 충격을 주더니, 이번에는 국극 대 열풍을 일으킨 드라마 ‘정년이’의 소리 감독이 됐다. 권씨는 우리의 전통 소리가 다시 한번 뜨거운 관심을 받는 요즘, 국악이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서도록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었다. 오랜 세월 전통을 이끌어온 스승 세대와 각종 ‘컬래버’(타 장르와의 협연)를 통한 퓨전 국악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젊은 후배 세대, 그사이에 자리한 권씨는 “전통의 아름다움을 보존하면서도 대중의 사랑을 이어가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정년이’는 해방 이후 1950년대 활약을 펼쳤던 여성 국극의 이야기를 담았다. 소리꾼과 고수로 구성된 ‘판소리’를 기반으로 남녀 역할을 나눈 ‘창극’이 탄생했고, 박녹주 선생 등 여성 명창들이 모여 창극을 하는 여성 국극이 생겼다. 권씨는 극 중 최고 인기인 ‘매란 국극단’에서 진정한 소리꾼으로 거듭나는 천방지축 천재 소녀 정년이를 열연한 배우 김태리를 집중 지도했다. 촬영 현장 모니터링과 극중극 소리 일부를 구성 및 작창, 녹음 참여 등에도 권씨의 손길이 가닿았다. “지난해에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냈어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국극의 역사를 많은 분들이 알게 되고, 전에 없이 소리가 주목을 받으며 더 뿌듯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드라마 중 특히 압권은 정년이가 ‘떡목’이 되는 부분이다. 판소리에서 너무 목을 혹사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거나 상청(고음)이 나지 않는 것을 ‘목이 부러졌다’, ‘떡목이 됐다’ 등으로 표현하는데 극 중 파트너를 잃고 불안함과 경쟁심, 득음에 대한 욕망 등 여러 복합적인 감정으로 한계에 도전하던 정년이가 끝내 떡목이 되는 과정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김태리씨와는 2021년 4월부터 연습을 시작해, 다 같이 소리의 고장 남원에 가 합숙 훈련을 하기도 하는 등 정말 진지하게 임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떡목’을 그려내기 위한 과정이 기억에 남는데 쉰 목소리를 만들기 위해 촬영 전날 모여 4~5시간 계속 소리를 지르기도 했지요.” 이 같은 과정은 배우에게도, 그녀의 소리 스승이던 권씨에게도, 시청자에게도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만들었다. 권씨가 대중의 이목을 끌었던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녀는 “범 내려온다”로 잘 알려진 ‘이날치’의 원년 멤버로 2019년부터 2023년까지 활동하며 ‘K-국악’의 매력을 전 세계에 알린 이 중 한 명이다. 퓨전 국악, 판소리의 대중화 등 수식어를 자랑하지만, 그 배경엔 묵묵히 걸어 낸 전통 소리길이 있다. “어린 시절 ‘서편제’라는 작품이 나왔는데 그때 소리를 따라하는 성대모사를 하곤 했어요. 그런데 부모님께서 제가 소리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셨고, 마침 명창분이 멀지 않은 곳에 계셔서 그분을 스승님으로 삼아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인생에서 ‘정년이’와 같은 순간이 존재했다. 사춘기 시절 변성기가 찾아오며 목소리가 변하게 된 것이다. 인생에서 첫 번째 위기의 순간이었다. 다행히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한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렇게 꿈을 이어갈 수 있었다. 소리는 그녀의 인생에 또 다른 변화를 불러왔다. 소리꾼에게 있어 영원한 동반자인 ‘고수’를 인생의 동반자로 맞이하게 된 것이다. 권씨는 한 해가 갈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작품에서 느껴지는 깊이가 달라진다고 말했다. 가장 애착이 가는 판소리 마당을 묻자, 그녀는 ‘심청가’를 꼽았다. “아이를 낳고 인물이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이제는 ‘심청이’의 모친 곽씨 부인에 주목하게 됐는데, 소리의 깊이가 달라진다는 말이 인생의 경험이 얼마나 쌓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작품의 이야기가,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닿을수록 진짜 내 소리가 되는 기분입니다. 반면 예전에는 썩 좋아하지 않았던 ‘흥보가’가 요즘 들어 마음에 들어오게 되더라고요. 흥보 부인의 입장에서 서로가 정말 아끼고 좋아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며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한층 깊어진 것인데, 이렇게 해마다 소리의 묘미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올 한 해 아티스트이자 한 아이의 엄마로 고루 균형을 이루며 행복하게 지내고 싶다”면서도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은 역시 소리꾼다웠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기, 판소리라는 음악 장르가 전통의 미학을 지키면서도 살아남는 길에 대해서도 꾸준히 고민하고 노력할 겁니다.”

광대 왔소, 줄을 서시오…줄타기 이수자 ‘한산하’ [청년 장인, 전통을 잇다①]

전통은 ‘옛 것’, ‘오래된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오랫동안 우리 삶 속에 스며들어 있던 무형유산 중 상당수가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인식이 크게 자리한다. 5일 경기도 등에 따르면 도내 국가무형유산은 총 14개 종목에 기능보유자 14명(단체), 전승교육사 19명(단체)이 있다. 도 지정 무형유산으론 총 72개 종목에 41명의 보유자와 17곳의 보유 단체, 42명의 전승교육사가 활동 중이다. 도 무형유산 보유자의 평균 연령은 73세이며, 전승교육사는 60세다. 상당수 무형유산은 ‘인간문화재’로 불리는 무형유산 보유자의 노령화와 전승세대의 무관심 등으로 맥이 끊길 처지에 놓였다. 실제 도 무형유산 가운데 보유자가 없는 종목은 7개(단체 제외)다. 머리카락처럼 가늘게 쪼갠 대나무를 엮어 갓의 둥근 테 부분인 양태를 만드는 양태장은 지난 2020년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장인이 사망해 현재까지 보유자가 없다. 국가무형유산으로도 지정된 화각장은 9년째 도 무형유산 보유자가 공백이며 생칠장은 2022년 10월부터, 주물장과 조선장은 지난해 초 보유자가 별세한 이후로 보유자가 부재하다. 이 외에 상당수의 무형유산은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언제 명맥이 끊길지 알 수 없다. 위태위태한 전통유산에, 현재 유행하지 않는 전통예술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MZ 무형유산 전승·이수자들이 있다. 빠름과 변화, 유행에 민감함 등이 MZ 세대를 나타내는 주요 특징으로 꼽히지만, 이들에게 전통은 자신들이 잘 가꿔 나갈 현재의 이야기다. 우리의 정체성을 지킨다는 자부심과 자신만의 예술성으로 현대에 전통의 이야기를 불어넣는 청년 장인들을 만나본다. 첫 번째 ‘MZ 장인’은 줄타기 이수자 한산하씨다. 3m 높이의 허공, 줄광대가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외줄에 발을 얹자 주위에서 탄성과 환호가 터져 나온다. 장구, 해금, 피리 등 삼현육각의 전통 음악이 시작되면서 줄광대는 줄 위를 걷고, 뛰고, 부채를 펼쳐 솟아가며 기예를 부린다. 줄 아래에서 흥을 돋우는 어릿광대의 재담이 더해지면 신명나는 ‘줄타기’ 공연이 완성된다. 허공이라는 걸 잊은 듯 하늘을 훨훨 나는 줄광대는 국가무형문화유산 줄타기의 이수자 한산하씨(21)다. 줄타기의 유일한 예능보유자 김대균씨의 제자 세 명 중 막내로, 국가무형유산의 명맥을 이어갈 MZ세대의 대표주자다. 한 씨는 초등학생이던 10세에 줄에 올라 4년 뒤 전수 장학생으로 지정되고, 19세에 시험을 거쳐 이수자가 됐다. 전통공연을 좋아하던 부모님 손에 이끌려, 수줍음을 이기기 위해 찾았던 ‘줄타기 보존회’. 그곳에서 줄타기의 매력에 빠져 스무살 인생의 절반을 줄을 타는 데 쏟았다. 그는 지난해 10월31일 남한산성역사문화관 개관식에서의 줄타기를 끝으로 군에 입대했다. 입대 전 마지막으로 선보인 무대를 마친 후 한 씨는 “어릴 때는 줄을 타는 게 마냥 좋았지만, 이제는 사명감이 생겨 줄을 놓을 수 없다”며 “줄타기가 전승 취약 종목이기 때문에 후대에도 전승되도록 계속 배우고 성장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줄타기는 지난 2016년 ‘국가긴급보호무형유산’으로 지정됐다. 더 이상 이수자가 없어 전승 단절 위험이 큰 종목에 내려지는 조치다. 그러나 한 씨를 비롯해 젊은 이수자들이 배출되면서 2023년 다행히 긴급 보호 종목에서 해제됐다. 사라질 위험에 처했던 줄타기가 보존된 데는 한 씨와 같은 청년들의 피, 땀, 눈물, 노력이 있었다. 이들이 지난 10년간 매일같이 줄을 탄 결과다. 줄타기의 가장 기본은 ‘중심’이다. 시선은 줄을 지지하는 작수목 사이에, 명치는 틀어지지 않고 정면을 바라봐야 하는데 ‘균형’을 잡는 데만 수년이 걸린다. 그 이후에야 줄을 건너가보고, 줄 가운데서 무릎을 꿇고, 한 발씩 들어보고, 비상할 수 있다. 한 씨는 “고등학교 1학년 때 허공에서 몸을 비트는 ‘허공잽이’ 동작을 배우다 안 좋게 떨어지면서 트라우마로 남았다. 허공에서 하는 동작들이 겁이 났지만 이겨내고 1년 만에 동작을 성공했을 때 느꼈던 성취감이 정말 컸다”고 말했다. 이어 “줄타기는 좌절을 이겨내고 성취감을 얻는 과정의 반복”이라며 “체중을 조절해야 하고, 컨디션을 잘 유지해야 해 하고 싶고, 먹고 싶은 걸 억누른다. 또래 친구들처럼 여행도 가고 싶지만 꾸준히 줄을 타야 해 그것도 어렵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하지만 줄타기를 계승해 우리의 정체성을 지킨다는 자부심이 있다”며 “줄 위에 올랐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웃어보였다. 한씨의 목표는 신명나는 자신만의 줄판을 만드는 것이다. 줄타기의 가치를 보존하면서 다양한 현대예술과 결합해 새로운 방식의 줄타기를 시도하는 거다. 줄타기와 연극을 결합해 줄 위에서 연기를 선보이거나, 재즈나 밴드 등 다양한 음악에 줄을 타는 식이다. 한 씨는 “김대균 선생님께서 항상 ‘줄에 너만의 이야기를 실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며 “대중적으로 줄타기를 더욱 친밀하게 만들고, 잘 전승되도록 열심히 익히고 노력해 좋은 ‘광대’가 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안양소년원 찾은 폴 포츠, “절대 포기하지 마라” [인터뷰 줌-in]

“절대 포기하지 마라. 빛도 없이 휘어져서 안 보이는 터널을 지나더라도 포기하지 마라. 영원한 것은 없다.” 지난 2007년 영국의 ‘브리튼즈 갓 탤런트’ 우승자로 잘 알려진 성악가 폴 포츠. 그는 지난 21일 안양소년원(정심여자중고교)을 찾아 학생 130여명을 위해 무대에 올랐다. 경기도수원월드컵경기장관리재단, 법무부 수원보호관찰소, ㈔나누리와 함께 마련한 ‘월드컵 드림콘서트’에서 그는 오페라 투란도트의 ‘네순 도르마(Nessun Dorma·아무도 잠들지 마라)’ 등을 불러 호응을 얻었다. 이날 폴 포츠는 경기일보와 만나 “아이들의 반응이 정말 좋았다. 음악이 다소 올드할 수도 있는데도 반응이 좋았다”고 소감을 전했다. 그러면서 폴 포츠는 자신의 음악에 환호를 보내준 소년원 학생들을 위해 한국의 명언을 들려줬다. 그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고,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고 했다. 어렸을 때의 실수로 절대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날 폴 포츠는 무대에서 올라 ‘네순 도르마’를 부르기 전 “승리를 위한 노래다. 삶에서 희망을 잃지 말고 여러분의 승리를 위해 노래하겠다”고 말한 뒤 노래를 불렀다. 폴 포츠는 ‘브리튼즈 갓 탤런트’ 우승자로 알려진 뒤 특히 한국에 여러 번 방문했다.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도 모습을 드러내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려주기도 했지만, 이 같은 재능기부를 통한 공연도 이번이 9번째다. 그는 “한국 사람들은 친절하고 잘 반겨준다. 유럽 중에서는 이탈리아인처럼 감정이 풍부하고 이를 공유하는 문화가 좋다. 한국도 서울, 부산, 수원 말고도 많은 도시를 다녀봤는데 어디에나 한국 특유의 ‘한’이 있었다”며 “처음에는 슬픔도 아닌 어떤 불완전성 같은 한에 대한 감정을 모르다가 한국에 여러 번 오면서 불완전성에서 완성되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반도가 분단돼 하나로 돼야 하는 남과 북 모두의 열망이 남아 있는 것도 한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폴 포츠는 안양소년원을 포함한 한국의 여러 절망과 아픔 속에 있는 청년, 청소년들을 향해 “지나온 과거는 완전하지 못하고 성공적이지 못할 수 있지만, 삶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며 자기 삶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폴 포츠는 “저 역시 몇 번을 포기한 적도 있지만 다시 기회가 왔고 노력한 것이다”라며 “남은 생애 동안 노래를 하는 게 제 소망이다. 죽는 순간까지 노래하고 싶고, 한국에도 계속 오고 싶다”고 말했다.

정수연 작가 "생동감 넘치는 예술실험은 나의 힘" [문화인]

수원시 행궁동 행리단길을 걷다보면 모든 꾸밈을 떼어낸 채 본연의 모습으로만 남은 건물 하나가 보인다. 새로운 쓰임을 기다리는 그 건물은 얼마 전까지 ‘초원여관’이란 간판을 달았었다. 간판을 떼어내고 임대를 알리는 그 건물을 정수연 서양화가는 우연히 마주했다. 화랑을 운영하는 그는 얼마든지 화려한 전시장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인위적인 아름다움을 덜어내고 예술 본연의 아름다움을 관객과 함께 하고 싶었다. ‘관객에게 가장 최근의 작품을 보여주고 소통하자’. 건물 본연의 모습을 살려 전시를 하고자 마음 먹었다. 전시장은 곧 작업실이 됐다. 지난 1월 11일부터 31일까지 이어진 정수연 작가의 전시 ‘문닫은 여관-아트 쇼’가 열린 배경이다. 그는 전시 기간 예술의 날 것 그대로를 일반 시민에게 드러내며 예술의 경계를 허물었다. 1층과 2층, 옥상으로 이뤄진 건물에 그 어떤 치장도 하지 않았다. 고스란히 드러낸 여관의 맨살은 건축의 원형 그 자체. 벽지가 모두 뜯긴 채 콘크리트의 맨살을 오롯이 드러낸 건물은 기괴하면서도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이 묘한 분위기를 냈다. 그는 “50호짜리 캔버스 20개를 들고 와 전시장에서 작업을 이어나갔다”며 “영하권의 기온에서 창문이 모두 뜯긴 상태로 난방 하나 되지 않는 빈 건물. 자연과 하나된 전시장 덕분에 외부 환경이 작품에 반영됐다”고 전했다. 물감이 추위에 얼어버린 흔적, 붓이 얼어버려 제멋대로 캔버스를 누린 흔적, 흩뿌린 물감이 자연 현상의 원심력과 중력을 이용해 자연스럽게 완성한 작품들이 탄생했다. 1, 2층의 ‘문닫은 여관’ 건물 전체가 하나의 퍼포먼스가 됐다. 색다른 실험에 지나가던 사람들은 곧 관객이 되어 전시에 참여했다. 작품엔 좌우, 상하 등 뚜렷한 경계가 없었고 제목도 없었다. ‘강아지 가족의 탄생’ 등 관객이 해석하는데로, 제목을 짓는대로 작품은 명명됐다. 그는 “작업을 하는 동안 미술운동처럼 스스로 참여했던 것 같다. 여기서 갤러리가 계속됐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관객들이 많았다”며 “무언가 쓰임을 기다리는 공간에 그 짬과 틈을 찾아 작가가 작품 활동을 하고 전시를 하며, 관객과 함께 어우러지는 그 자체가 참 좋았다”고 말했다. 정수연 작가는 미술가이자 문학가, 기술혁신 전문강사 등으로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서강대 경영학과 재학 시절 홍익대 조소학과 학생들과 미술 동아리를 결성해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대기업에 근무하면서도 어릴 적부터 손에서 놓지 않았던 그림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았다. 2003년부터 2011년까진 광교산 자락 도마치문화예술촌 입주 화가로 작품 활동을 선보였고, 현재 화랑을 운영하면서 전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행궁동 전시가 열릴 때 제주도와 인사동에서도 전시를 선보이는 등 관객과 만나는 접점 역시 넓혀가고 있다. 그는 관객과 함께 하는 예술 작업, 시민과 함께 만들어가는 예술의 세계를 구축해 나갈 예정이다. “인사동처럼 행궁동 역시 활발한 작업과 활동들이 늘어나서 또 새로운 문화와 활동이 펼쳐지면 좋을 것 같아요. 관객과 함께 하는 문화운동, 실험의 예술 세계를 많은 분들과 함께 해나가 보려 합니다.”

쉰 아홉에 재도전... 서예의 맥 잇는 인경 문경호 [문화인]

한 획 한 획 써내려간 붓글씨는 제 각기 다른 멋을 품었다. 바르게 쓴 해서부터 미친 듯이 쓴 광초, 행서, 초서, 예서, 전서, 한글까지. 제각각 형태를 취한 붓글씨들은 한 자 한 자 우리가 살며 새겨야 할 내용들이 옮겨져 서예로 살아움직였다. ‘서여기인(書如其人)’. 글씨는 그 사람을 나타낸다고 했던가. 인경 문경호 서예가(79)의 글씨는 전통을 바탕으로 공부에 매진하고 인격과 수양을 갈고 닦은 자신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 했다. 인경은 가장 고전적이면서 자연에 가까운 예술, 몸과 마음이 일치되는 예술, 서예의 기본과 전통을 지키며 오산 지역 문화 발전에도 힘을 쏟고 있다. 현재 인경 서예연구회가 자리잡은 오산시 양산동 터는 그의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 역할했다. 자그마치 180년 역사를 품은 이 곳에서 인경은 서예에 정진한다. 그가 처음 붓을 손에 쥔 것은 다섯 살 때다. 시서화를 좋아하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서예가 생활과 함께 하던 때였다. 어릴 적부터 전통 문화, 서예와 함께 했고, 늘 배우는 삶이었다. 고사리 손에서 써 내려간 글씨는 누가 봐도 빼어났다. 일단 먹고 사는 문제를 생각해 경영을 배웠고 직장 생활을 했다. 직장에서 나와 개척한 사업 역시 꽤나 잘됐다. 사업이 잘 될 때에도 늘 마음 속엔 서예가 꿈틀댔다. 붓을 놓았지만 서예와 단절된 시간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중국에서 큰 사업을 하며 관계자를 만날 때엔 술 대신 글씨를 선물했고, 유명한 서화가들과 교류를 이어나갔다. 이론으로 익히고 눈으로 감상하며 서예를 몸으로 축적해왔다. 그는 “아마 어릴 적부터 체득했던 전통문화와 글, 붓에 대한 경험이 계속 가슴 깊숙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며 “늘 서예에 목 말랐고 언젠가는 해야겠다 생각했다”고 밝혔다. 사업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쉰 아홉의 나이에 붓을 다시 잡았다. 타고난 실력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즈음 한문서예로 1974년 국전 대통령상을 받은 우죽 양진니 선생과 사제지간을 맺었다. 인경은 20여년 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업에 몰두했다. 그의 그런 노력과 실력에 우죽 선생은 타계 전 ‘인경(문경호 선생의 호) 세교’라는 글을 써주며 문경호 선생을 제자이자 친구로 인정했다. 그의 서예는 철저한 온고지신(溫故知新)이다. 옛것을 답습해 철저하게 공부하고 그 바탕 위에서 변례창신(變例創新)의 노력을 이어갔다. 그의 글씨엔 작위가 없다. 고전과 전통에 근본을 두고 20여년간 몸과 마음으로 체득했다. 인경은 “서예는 몸과 마음이 일치해야 한다”며 “요즘 글씨를 많이들 쓰지만 서예의 기본과 전통이 사라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고 말했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이지만 그는 서예를 매개로 할 일이 많다. 양진니 선생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던 제자로서 인경은 그의 서맥과 뿌리를 이어나가는 데 역할을 할 예정이다. 이미 우죽선생 기념사업회를 꾸려 그의 서예 정신과 세계를 이어나가기 위한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서예’라는 단어를 만든 소전 손재형(1903년~1981년)에서 시작돼 우죽 양진니(1928년~2018년)-인경 문경호로 이어지는 서맥을 굳건히 해 서예의 근본을 지키겠다는 의지다. 인경은 “연구회를 통해 서예의 근본과 전통을 지켜나가는 것은 물론 서예문화가 꽃 피고 지역사회와 우리나라의 문화예술이 풍성해지는 활동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전했다.

“글쓰기로 지탱하는 나의 삶”…김명숙 시인 [문화인]

스쳐가는 일상과 자연의 구석구석을 붙잡아 바라보는 애정 어린 눈, 끝끝내 사람과 세상을 향해 그 마음을 번져가게 하는 몸부림. 김명숙 시인에게서 엿볼 수 있는 면모다. 나를 지탱하는 요소를 창작에서 찾았다는 김 시인. 그는 어릴 적부터 글쓰기에 소질이 있었고, 대학 진학과 함께 성악과에 들어갔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학업을 그만두고 결혼 이후 남편과 요식업을 하다 IMF 위기를 겪는 등 희로애락으로 뒤덮인 삶을 치열하게 살아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가슴속에 간직했던 응어리를 끝내 창작의 산물로 빚어내는 데 성공했다. 지난달 15일 부천 교보문고에서 열린 ‘내 마음의 실루엣’ 시집 출판 기념회 및 문학 강연 현장에선 김명숙 시인의 진솔한 한마디가 청중의 마음에 가닿았다. “IMF가 터졌을 때 너무 힘들었지만, 당시 온라인 카페에 무심코 올렸던 저의 시와 수필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뜨거웠어요. 그들에게서 힘을 얻고 나니, 내가 잘하는 걸 앞으로도 계속해서 시도해 보고 싶다는 의욕이 샘솟더라고요.” 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난 김 시인은 어느덧 고향에서 멀찍이 떨어진 부천에 자리잡아 삶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그 여자의 바다’, ‘내 마음의 실루엣’ 등 두 권의 시집을 낸 시인·아동문학가이자 47곡의 가곡, 81곡의 동요 등 수많은 곡에 노랫말을 붙여온 작사가다. 글을 쓰는 활동뿐 아니라 부천시노인복지관에서 작문을 가르치고, 지난달 문학 강연을 개최하는 등 교류의 무대에서도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온기 가득한 마음 덕분에 그는 끊임없는 도전을 이어가며 창작의 여정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가 써 내려가는 글처럼, 그의 삶은 한 존재의 내부에서 출발해 타인과 교류하고 세상과 마주하면서 바깥을 향해 번져가고 스며든다. 앞으로 그는 동시집을 펴놓을 계획이다. “아이들의 눈으로 바라보는 하찮고 소박한 일상의 단면을 포착하려고 했어요. 조그마한 씨앗 안에서 온 우주를 찾을 수 있는 셈이죠.” 글을 매개로 세상 곳곳을 누볐던 그의 행보는 현재진행형이다. 김 시인은 앞으로 희곡과 소설 집필에 대한 의지도 드러냈다. 이어 그는 동요시집, 가곡시집, 악보집, 음반 발매를 계획하고 있다. 김명숙 시인은 “지금껏 그래왔듯 품어왔던 꿈과 열정을 사람들과 나누면서 창작을 이어가고 싶다”고 웃어 보였다.

고혼들을 위한 용주사 수륙대재 참 뜻 이어지길…묵전 김황섭 서예가 [문화인]

지난 3일 화성 용주사에서는 천불(千佛)의 명호(名號)를 써 내린 수백개의 번(幡)이 세상의 번잡한 일을 씻어내듯 나부끼며 이른 아침부터 사부대중을 맞이했다. 육지와 바다를 떠도는 죽은 영혼을 좋은 곳으로 보내는 천도를 위해 지내는 ‘제6회 용주사 수륙대재’가 열린 이날. 오방색이 번 하나하나마다 조화롭게 어우러져 수륙대재의 의식을 이뤘다. 행사장 빼곡히 내걸린 번을 써내려 간 이는 묵전 김황섭 서예가(62)다. 그는 국내 조계종의 각종 의식에 참여해 글을 쓰며 봉사하고 있다. 각종 번과 결계에 내거는 글을 쓰고 오리는데 그처럼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기술을 가진 이는 드물다. 그는 “수륙재 양식에 맞춰 집집마다 거는 위치가 다르다. 행사에 맞게 종이 선정부터 오방색 다섯 색깔의 배합도 잘 맞춰야 한다. 굿판에 맞게 서예를 쓰고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인데 정조대왕과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숨결이 깃든 용주사인만큼 이들과 왕후들의 영혼을 불러올 수 있도록, 또 전쟁 등 여러 떠도는 영혼들을 위한 글을 써내려갔다”고 밝혔다. 결계는 외부의 나쁜 기운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맑은 도량을 만드는 의식이다. 번은 영가들을 불러들이는 의식으로 나쁜 기운을 막은 후 의식이 진행되는 행사장에선 각종 번들이 고혼을 불러들인다. 묵전이 쓴 글들은 결계를 치고, 번으로 영가들을 불러들였다. 불교 신자로 절에서 장엄 작업을 해오며 솜씨를 인정받던 그는 약 15년 전 조계종 봉선사 한암 정수스님에게 서예를 사사해 글을 쓰고 있다. 또 조계종 의례의식을 관장하는 어산어장 인묵스님에게 번을 배워 조계종에서 진행되는 수륙재 행사에 참여한다. 매년 절에서 서예 특별전을 열어 여기에 나온 수익금은 모두 절에 기부하는 베푸는 삶도 이어나가는 중이다. 그에게도 이번 수륙대재에 참여한 감회는 새롭다. 용주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수륙재 봉행 도량’으로 고려시대 의식 절차를 계승했다는 자긍심이 높은데다 조선 정조 14년(1790년) 용주사에서 열린 무차회가 조선 후기 공식적인 기록을 갖는 유일한 국행수륙재라는 연구결과가 발표돼 그 가치가 크다. 특히 그동안 맥이 끊어져 전수되지 못했지만 지난 2017년 제1회 용주사 수륙대재를 봉행한 데 이어, 올해엔 고려 수륙대재를 고증하고 전통문화 복원과 계승에 힘을 쏟기로 하면서 용주사 본사와 말사 스님, 조계종 수륙대재를 집행하는 스님들이 한 자리에서 전통 의식을 제대로 선보이는 자리로 마련됐다. 묵전은 “희미해져가는 옛 의식을 다시 되살리는데 힘 쏟고 정조와 장조의 숨결이 깃든 용주사의 수륙대재에 그 정신을 함께 하게 돼 의미가 더욱 남달랐다”며 “절에서 삶과 인생을 배우고, 글을 배운 만큼 내가 취한 것을 다시 본래의 곳에 되돌려주는 게 배움의 참뜻이라 생각한다. 앞으로도 내가 가진 글을 더 많은 자비와 베풂에 쓰이도록 할 것”이라고 전했다.

“바느질로 인연 잇고자 노력”…나정희 규방공예 조각보 명인 [문화인]

자그마한 자투리 천 조각을 서로 이어붙이다 보면, 실과 실, 면과 면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 피어나는 인연 역시 연결된다. 늘 진심을 담아 정성껏 조각보를 꿰어내는 나정희 명인(75)의 섬세한 바느질은 언제나 사람을 향해 있었다. 여인들이 규방에 모여 바느질로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든 데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는 규방공예는 오랜 역사 동안 우리 곁에서 호흡해온 예술인 만큼, 바느질로 빚어낸 생활용품 및 치장품 등 곳곳에 조상들의 온기가 배어 있다. 특히 자투리 천을 십분 활용해 만들어낸 보자기와 주머니 등은 새로운 가치와 쓸모를 부여하는 장인의 손길을 만끽하는 매개체가 된다. 디지털 전환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지만, 여전히 아날로그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이들과 함께 나 작가는 오늘도 공방을 오고 가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지난 2016년 ㈔한국예총의 규방공예(조각보 부문)분야 한국예술문화명인으로 선정되기도 한 나 명인의 인생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표면에 드러나는 것들에 집중하기보다는 그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왔는지 살펴보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형형색색의 생기를 머금고 재탄생한 조각보를 중심으로 하는 그의 작품 세계를 이루는 기본 원리는 뛰어난 바느질 실력에만 있지 않다. 제자리에만 머무르는 대신 늘 사람들과 교류하고 외부와 소통의 기회를 만들어가면서 외연을 확장하는 데 주력하는 태도에서 그 근간을 찾을 수 있다. 나 작가는 2005년 수원규방공예 연구회를 창설한 뒤 국내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하면서도 세상과의 접촉을 늘리기 위해 애썼다. 일본 아사히카와를 비롯해 뉴욕, 파리 등지에서 초청을 받아 우리나라 규방공예의 우수성을 알리고 예술가들과 소통하는 데 노력했다. 오는 9일부터 15일까지 수원 팔달문화센터 1층 전시장에선 나 명인의 진심을 눌러담은 회고전 ‘조각보에 담은 나의 시간’이 수원 시민들과 함께할 예정이다. 그가 지금껏 제작해온 조각보 작품과 다양한 소품 50여점을 전시장 곳곳에서 만나는 기회다. 삶의 궤적이 묻어나는 작품들, 이를테면 여자로서 가족에 헌신한 경험이 녹아든 ‘환생’뿐 아니라 국악인으로서의 자취가 담긴 ‘나의 아리랑’ 등을 비롯해 심적으로 힘들었던 시기의 어두운 내면이 반영된 ‘암흑’과 같은 작품들이 시민들의 공감대를 건드린다. 나 명인은 올해까지 이어지는 행보에 이어 새롭게 구상하는 계획에 관해서도 밝혔다. 내년부터 그는 바느질의 기법이나 소재와 형식 등 작업 과정 전반에 변화를 주면서 작품을 통해 더 많은 세대와 소통하고 싶다는 바람도 품고 있는 상태다. 또 그는 조각보뿐 아니라 훨씬 더 손이 많이 가고 작업 과정이 번거로운 작은 소품들 역시 그 가치가 뛰어나기 때문에 소품 관련 전시 개최 등의 명맥을 잇는 시도 역시 활성화하겠다는 소망 역시 내비쳤다. 나 명인은 “출신도 성분도 전부 다른 자투리 천을 엮어내는 과정은 그 자체로 크고 작은 인연이 예상치 못하게 피어나는 우리네 인생과 다를 게 없다”며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면서 쌓아온 시간뿐 아니라 앞으로 쌓아갈 시간 역시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커피 그림쟁이' 장인영 작가 [문화인]

아기를 손에 들고 바라보는 마더 테레사 수녀의 깊게 팬 주름과 입가에 머금은 자애로운 미소가 액자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화지 위, 한 가지 재료를 사용했지만 흑색으로 표현된 깊고 안락한 느낌은 수만가지의 색을 섞어놓은 듯 매혹적이다. 안중근 의사의 결연한 의지도, 음악에 흠뻑 빠져 있는 카라얀의 모습도 열정과, 인내, 존경 등 인물이 안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여기에 활용된 재료는 단 하나, 커피다. ‘커피 그림쟁이’로 불리는 장인영 작가는 커피를 재료로 수묵화와 같은 작품을 선보이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주목받고 있다. 그는 2017년 커피 박물관 초대전을 시작으로 2020 국회아트갤러리초대전, 2020 뉴욕 맨해튼K&P갤러리, 2021서울갤러리 초대전 등 7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각종 단체전과 수상 경력을 보유했다. 지난해 11월부터는 특별한 전시에 참여 중이다. 커피코리아협동조합에서 주최하는 ‘경계선 지능인 인식개선 문화캠페인 장인영작가 후원 특별전시’에 함께해 커피라운지 55 본점에 작품 13점을 내걸었다. 그중 그가 아끼는 작품 ‘카라얀’은 후원에 활용되도록 선뜻 기증했다. 그가 커피로 작업을 시작한 것은 우연이었다. 화지에 수채화 작업을 하던 중 커피를 쏟았다. 화지가 커피를 흠뻑 머금으면서 수채화 물감과 커피의 질감, 결이 다른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다시 붓을 잡고 커피로 그림을 그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다. 색다른 시도와 그 안에 탄탄히 내재된 장 작가의 실력, 커피의 질감과 함께 되살아난 그의 그림은 찬사를 받기에 충분했다. “커피를 쏟은 화지를 보니 얼룩과 색감의 깊이가 일반 물감보다 짙었고 깊어 먹물을 머금은 수묵화 같았어요. 이것도 꽤 괜찮다. 이후 마음 먹고 본격적으로 연구를 했죠.” 쉽지만은 않았다. 수묵화나 민화같이 표현되는 커피만의 특징이 있지만 실수를 할 경우 수정할 수 없어 미리 농도와 명암을 계산해야 했던 것. 수많은 작업과 연구, 실패가 뒤따랐다. 수채화에선 여러 색깔로 표현할 수 있지만 커피는 탈색된 빛밖에 없어 표정이나 인물 등 한곳에 최대한 집중해야 했다. 그러다 찾은 소재는 표정에 집중할 수 있는 인물과 동물이었다. 때론 수묵화처럼, 때론 흑심의 물성을 최대한 활용한 연필 드로잉처럼 농도와 명암, 질감을 드러내는 기법에 따라 품는 이야기가 달랐다. 그 수많은 이야기 속 공통점이 있다. 끊임없이 나아가려는 열정과 사랑, 자애, 희망. 마치 사진인 듯 하나하나 살아 숨쉬는 듯한 작품은 장인영 작가의 모습과 닮았다. 그는 커피뿐만 아니라 그 위에 새로운 재료를 중첩하는 작업으로 자신의 작품 세계 를 한 단계 끌어올리고 있다. “상대성 이론이 뭐야, 엄마?”라는 아들의 말 한마디에 은하를 표현한 ‘갤럭시 시리즈’다. 이 작업은 커피 위에 금가루와 비즈 등 새로운 재료를 중첩한다. 커피를 붓고 금을 붓고 또 다시 커피를 붓자 색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커피의 장점이 드러나 은하처럼 황홀하게 반짝였다. 그림을 전공도 하지 않은 그가, 우연한 실수를 발판 삼아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작가로 떠오른 비결은 뭘까. 그는 “재료가 무엇이든 그저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놓지 않고 즐겼을 뿐”이라고 말한다. “앞으로도 제가 좋아하는 그림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공감하고 즐겼으면 좋겠어요. 그 일엔 뭐든 적극적으로 나설 겁니다.”

[문화인] ‘영화와 사람을 잇는 방식 고민’…정지혜 영화평론가

영화를 즐기는 방식은 코로나19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다양해졌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영화를 통해 누구를 만나고 어떤 걸 발견할 수 있는지 따져보는 일이다. 이를 위해 정지혜 영화 평론가는 영화와 사람을 연결하는 작업을 묵묵히 이어 오면서 영화제 등 현장에서 영화를 만든 이들이나 영화를 보고 감상을 나누는 관객들, 동료 평론가들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그는 시민들에게 단순한 영화 감상을 넘어 영화와 연결되는 경험을 만끽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마련 중이다. 지난 여름 성남미디어센터 ‘2022 청년시민영화기획단’ 사업을 통해 청년들과 만난 데 이어 10월20일부터 11월8일까지 수원미디어센터 시민프로그래머 양성 과정에도 참여했다. 오는 12월2일, 3일 양일간 진행될 제7회 수원사람들영화제 ‘흘러가는 우리들’을 8명의 수원 시민들이 직접 기획할 수 있도록 강의를 진행했던 그는 영화 프로그래머의 개념과 실무, 영화제 기획·운영 과제 선정 등에 관한 내용을 시민들과 공유했다. 수업을 통해선 시민들이 각자 선정한 영화와 어울리는 작품을 골라보기도 하고, 왜 이 영화를 이 섹션에 배치했는지 소개하고, 기획의 변을 풀어낼 수 있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정 평론가는 “이번 수업에 모인 분들이 20대가 대부분이라 상대적으로 젊은 분들이 많은 데다 열의를 보여주시는 분들이 많아 활기 넘치게 진행할 수 있었다”며 “시민들이 선정한 영화 리스트가 물의 온도를 테마로 한 선명한 콘셉트라는 점에서 인상 깊었다”고 회상했다. 정 평론가는 프로그래머 활동 역시 비평의 일환으로 여긴다. 자신이 기획한 영화들을 토대로 한 소개글, 프로그램 노트 등으로 관객들과 소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와 글, 그 틈에서 발견되는 사람들의 사연을 들여다 본다. 영화와 만나고, 영화를 만든 사람들을 떠올리고, 글로 풀어낸 영화를 통해 다시 사람과 만나면서 탐색 지대를 넓혀가고 있다. 학창시절부터 글에 관심이 많았다는 정 평론가는 TV 평론 공모전에 당선돼 매체 관련 글쓰기 활동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다. 그의 궤적은 TV 드라마·시사 프로그램·예능 등 매체 전반에 대한 글에서 출발했지만, ‘씨네21’에서 한동안 기자로 근무하면서 영화와의 인연이 더욱 깊어졌다. 영화와 만나는 일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영화가 있는 곳이면 몸담을 기회가 생겼다. 정 평론가는 서울독립영화제,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활동했고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경쟁 예심 등을 진행하는 등 폭넓은 행보를 이어 오고 있다. 그는 영화를 글로 풀어내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작업에 있어 늘 고민한다. 이미지, 사운드 등의 영화 요소들을 완전히 다른 문법을 지닌 정제된 형태의 글로 눌러 담아낸 뒤 사람들과 나누는 과정은 사실 말이 안 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와 글 사이 미처 풀어낼 수 없는 지점들이 무한해 좌절감을 느낄 때도 많지만, 한편으로는 그 간극을 메꿔 가는 시도를 계속하는 데서 매력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그는 여전히 설레는 마음으로 영화와 만나고 있다. 정 평론가는 “새로운 영화를 만날 때마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 함께한다”면서 “영화라는 게 결국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쳐 빚어낸 산물이라는 점에서 더 애착이 간다”며 “영화에서 결국 사람들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하기에, 내가 영화를 잘 봤는지 늘 고민하게 된다”고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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