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드라마와 예능이 OTT를 통해 해외에 방영되기 전에는 영국에 사는 사람이 우리 한복을 입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올 거라고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현재에도 한복의 세계에 변화가 찾아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려워 말고 이러한 흐름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패션 브랜드 ‘기로에(Guiroe)’의 여백선옥(박선옥) 대표 겸 디자이너(54)는 ‘옷이 스스로 말하게 하라’는 디자인 철학이 있다. 때로 옷은 백 마디의 말보다 그 사람에 관해 더 많은 것을 표현한다. 해외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던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주인공 ‘장 회장’(유재명 분)의 내공이 느껴지는 캐릭터는 한복 의상과 어울리며 시청자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예능 ‘놀면 뭐 하니?’의 캐릭터 중 하나인 ‘유야호’(유재석 분)가 입고 나온 한복 의상 역시 세련되면서도 독특한 디자인으로 정체성을 한껏 드러냈다.
장 회장과 유야호에 또 다른 숨을 불어넣은 박 대표는 문화체육관광부 주관의 ‘올해의 한복인 상’(2022)을 수상하고, 최근에는 드라마 ‘보물섬’에 이르기까지 패션쇼·전시·문화·공연 등 다양한 장르에서 한복 문화콘텐츠를 기획, 한류의 중심에서 한복의 매력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 그는 ‘기로’에서의 선택을 강조한다.
그는 “인생에서 우리 모두 기로에 서는 순간이 다가온다. 나 역시 수많은 기로의 순간에서 변화를 맞이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 시절 서양 학문인 의생활학을 전공했다. 패션 디자인은 서양의 학문으로 대학 때 배웠던 모든 것은 서양인을 기준으로 한 커리큘럼이었다. 8등신의 패션 일러스트도 서양 사람을 기반으로 한 미의 기준이다. 동양인인 박 대표는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박 대표는 ‘우리’만의 미를 찾기 시작했다. 기로에서 맞이한 첫 번째 변화였다. 그는 “내가 만드는 옷에 ‘진정성’을 담고 싶었다”며 “내가 그리는 디자인의 대부분은 한국적인 것에서 차용하는데 정작 그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알지 못했다”고 전했다.
본격적으로 한복에 관해 공부하기 시작한 그는 2004년 ‘여백’이라는 한복 브랜드를 런칭한다. 한복을 패션의 개념으로 접근하며 창의성을 추구했던 그는 전통 오방색 한복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한복에 데님과 레이스·벨벳 소재를 사용하는 등 새로움을 시도했다. 서울패션위크부터 해외 전시 등 성과를 보였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랭했다.
좌절을 겪고 2012년 호주로 떠났다. 기로에서 두 번째 선택이었다. 타국에서의 생활은 오히려 그에게 영감을 줬다. 그가 직접 만든 한복을 입고 호주 친구들과 만나니 반응이 매우 좋았다. 그때 한복이 한국 사람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야심차게 돌아왔지만 시대는 변해있었다. 당시 한국에선 무관이 입던 ‘철릭’을 평상시에도 입을 수 있도록 변형한 ‘철릭 원피스’ 등 일상 패션으로의 한복을 추구하는 ‘신한복’ 붐이 일어나고 있었다. 선발주자라고 생각했던 그가 오히려 후발주자가 된 셈이다.
기로에 선 그는 과감히 ‘블루오션’으로 뛰어들었다. 현대적인 한복, 서양의 정장에 대척할 만한 남성 한복 슈트(정장)를 만든 것이다.
2015년 한복진흥센터와 함께 신한복 개발 프로젝트에 착수해 오방색 중 적색을 추상표현주의의 대표 서양화가인 마크 로스코 회화에서 영감을 받아 한복 디자인으로 제시했다. 이것이 한복 슈트 모태 디자인이 돼 그는 2017년 아시아의 전통에 서양 패션을 접목한 ‘기로에’의 문을 열게 된다. 이후 문체부와 한류 협업 콘텐츠 기획 개발 사업을 하는 등 그는 시대의 흐름과 함께한다.
그가 그리는 한복의 미래는 변화의 기로에서 새로운 문화콘텐츠를 넓혀가는 것이다.
“다가오는 시대에는 직접 입는 실물 한복뿐만 아니라 AI 기반의 디지털화된 한복 문화콘텐츠 시장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많은 후배들이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러한 기술을 잘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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