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석가탄신일을 맞아 경기지역 사찰 곳곳에서 봉축 법요식이 열렸다. 이날 오전 10시50분께 용주사에서 열린 봉축법회에는 ‘차별 없는 세상 우리가 주인공’을 표어로 걸고 남경필 경기지사 등 내빈을 비롯한 신도 2만여 명이 참석해 부처 탄생의 기쁨을 축하하고 중생의 고(苦)를 덜어줄 것을 탄원했다.이번 법요식은 중생을 깨치고자 종을 울리는 명종 의식으로 시작해 도량을 깨끗이 하는 도량결계의식, 향·등·꽃·과일·차·쌀 등 6가지 공양물을 부처님 앞에 올리는 육법공양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날 자리에서 용주사 주지 성월 스님은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의 봉축사를 대독했다. 성월 스님은 “모든 존재가 본래 자유롭고 평등한 불성(佛性)의 소유자이며, 모두가 존귀하고 스스로 온전하여 소중한 존재”라며 “시비분별을 멈추면 본래부터 완전한 자성이 모습을 드러내고, 자성이 청정한 줄 알게 되면 순간순간 대하는 온 중생을 부처로서 마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모두가 본래 면목을 드러내니 누구 하나 주인공 아님이 없다. ‘차별 없는 세상 우리가 주인공’이라는 이치를 바로 알면 지혜와 자비의 길이 열린다”고 덧붙였다.같은 날 남양주시 진전읍에 소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 봉선사와 호평동에 소재한 수진사 등에서도 봉축법요식이 일제히 봉행됐다. 봉선사와 수진사에서 각각 열린 봉축법회에는 이석우 남양주시장 등 내빈이 참석한 가운데 총 5천여 명의 불자가 일제히 부처님의 자비로 시민의 안녕을 기원했다. 또 안양 삼막사에도 신자 5천여 명이 찾아 부처님의 공덕을 기렸다. 권소영기자
“이 시대 청춘들의 고뇌가 2천600년 전 청년 싯다르타의 고뇌와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일들은 그저 부처님이 저잣거리에서 대중으로 하여금 삶의 고(苦)를 털고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한 마음고향으로 돌아가도록 돌보신 그 길의 발꿈치를 따르는 것일 뿐입니다.”20대 초반 법대를 갓 졸업하고 생(生)의 목적이 세속의 욕망에 있지 않다고 느낀 청년은 곧바로 해인사 고운암(庵)에 입산 출가한다. 국내외 제방 선원(禪院)에서 삼천 배, 염불, 참선 등으로 수행과 전법에 20여 년을 던졌다.스님은 좌복 위에서 고꾸라져도 좋다는 각오로 화두참선에 몰입했다. 눈·귀·입을 닫은 면벽속에 만난 것은 나(Ego)를 벗은 나(Self),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중도연기(中道 緣起)의 시력이었다.그즈음 세월호가 침몰했다. 산 부처를 만난 것은 팽목항 천막법당에서였다. BTN불교라디오 울림 ‘그대에게 이르는 길 운성입니다’의 진행자 운성(運性)스님.스님을 만난 날은 모처럼 미세먼지가 걷히고 시원한 바람마저 서늘했던 지난 25일 오후 1시께. 서울 방배동에 소재한 BTN불교TV 사옥 8층의 접견실. 운성 스님은 기자와 만나 차를 나누며 수행하며 세상과 소통해 온 과정을 담담히 풀어냈다.스님은 “팽목항법당에는 하루 13시간씩 기도와 봉사를 위해 천여 분 스님들이 다녀가셨죠. 한국불교의 희망을 보았어요. 희생자나 바라보는 자나 분별과 두려움은 매 한 자리니, 부처님 일생을 관통하는 대비원력(大悲願力·일체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소망)의 근원에 철저히 깨어나, ‘이젠 행(行)이다’ 서원하기까지 좌복 위에서 많이 울었습니다.” 이번 생 부모님이나 다름없는 은사 성주(性珠) 스님(진주 용화사 주지)과 열반하신 노스님 법모(法模) 스님의 가르침들 늘 가슴깊이 흐르고 있다는 스님. ‘운성아, 이 옷이 스님이 아니다. 속지 마라!’이후 스님은 거리로 나왔다. 승복 앞섶에 노란 리본 달고 당당히 눈총받으며 지하철을 타고, 틈틈이 심리학을 공부해 애도치유그룹(상실의 슬픔 달빛으로 열릴 때)를 열었고, 생활수행을 안내하며 각자 내면에 이미 갖춘 ‘치유력’을 보게 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저녁 7시면 어김없이 들리는 스님의 목소리. 가청취자(국외 포함)까지 50만이 넘는 울림에서 그의 닉네임은 ‘언니야 누나야’ 스님.“닉네임이 따뜻하죠?(웃음) 스님이란 가면 벗기가 참 어려웠지만 평등한 보리심(菩提心)으로 열리는 지름길인 거죠. 애청자 여러분이 저를 편안한 가족, 도반(道伴)으로 느껴주시는 것 같아 감사합니다”불기 2561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의미를 묻자, 되려 생일축하를 건네는 스님. “올해 봉축표어가 ‘차별 없는 세상 우리가 주인공‘예요. 부처님께선 금수저로 안락한 생이 보장됐던 왕자의 자리를 박차고 탁발로 받은 쌀 세 톨을 곱씹으며 중생의 가난과 고락을 함께한 길 위의 삶을 선택하셨죠. 깨달으신 직후 희유하구나! 일체중생이 나와 꼭 같은 지혜 덕상을 갖추었는데, 무명(無明)에 가려 알지 못하는구나!라 탄식하셨죠. 겉모습, 피부색, 성별, 어른 아이, 진보 보수, 종교를 막론하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삶이 있는 그대로 부처님 될 무한가능성 즉 붓다꽃씨이시니, 매일이 여러분의 생신이세요. 최고의 ‘태생적 금수저’죠!(웃음)”‘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의 저자이자 글로벌 힐링멘토 혜민스님(마음치유학교 교장)과 인연도 궁금했다. 운성스님은 “해외서도 명상 치유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상담 현장에서 당장 숨조차 못쉬고 자살욕에 시달리는 사람들 만나며, 1천700년 역사로 무진보배를 갖춘 한국불교 수행전통이 좀 더 소통적인 길을 고민한다면 이분들을 살릴 수 있음을 절실히 느낍니다.그간 책을 통해 받은 사랑을 가장 선한 방법으로 돌려 드리리라 서원했다는 혜민스님 말씀 들으며, 스타 스님인 줄만 알았던 편견이 걷어지고 내심 고맙더군요. ‘치유수행공동체’가 필요함에 깊이 공감했어요.“ 이후 사찰에 익숙한 대중에게 다소 낯선 공간인 마음치유학교에서 스님들은 치유전문가들과 함께 사람들 개개인의 구체적인 고통에 맞춰 다양한 치유 프로그램들을 기획해 자조 그룹을 나누고 있다. 또한 단순한 위로를 넘어 인식의 전환을 가져 올 치유적 경전수행, 법화경 법회 등 수행의 장을 열고 있다.“훌륭한 스님들께서 산중과 도심 한복판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수행으로 혼탁한 세상을 정화하고 계십니다. 여기에 한 뼘만 더 ‘아픔 속에 피워 낸 꽃’을 나누는 데 정성 기울이자 서원합니다. 사성제(四聖諦)의 멋진 가르침이 관념이 아닌 생생한 실제로 숨 쉴때 비로소 수행도 푹 함께 발효됩니다. 지혜와 자비, 두 날개 모두 온전해야 잘 날아오를 수 있으니.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다면 가장 먼저 어디부터 가실까요?”화두 하나 던지고, 이날 오후에 예정된 달라이라마 방한추진회 회의에 참석하고자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난 운성스님. 생명·평화·자비의 아이콘, 티베트도 불교도 넘어선 세계인의 영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를 분단국가 한국땅에서 직접 만나 뵐 수 있는 그 멋진 날을 위해 서로 깊은 합장을 건넸다.권소영기자사진=전형민기자
역사가는 어떠한 사건이 옳다 나쁘다 혹은 누가 좋다 나쁘다 등의 평가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일어났던 그대로의 사실을 냉철하게 객관적으로 관찰하여야 한다. 이처럼 역사 서술에서 보다 객관적이고 보다 체계적이며 보다 종합적인 사서(史書)를 꿈꾸어 온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서술한 실증사학자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이다. 소론 명문가문에서 태어나 당쟁의 아픔을 겪다. 이긍익은 1736년(영조 12) 서체로 유명한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정종의 서자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이자, 이경직(李景稷)의 5대손이다. 이경직은 동생 이경석(李景奭)과 함께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호란 때에 왕을 호위하여 호조판서에까지 이르렀고, 이경석은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르는 등 당대 명망 높은 명문 집안이었다. 그러나 소론 강경파였던 이 가문은 여러 차례 큰 화를 입었다. 백조부 이진유(李眞儒)는 이조판서 재직 당시 경종이 승하한 사실을 청나라에 보고하기 위하여 고부부사(告訃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경종을 쫓아내려는 노론에 맞섰다가 영조의 역적으로 몰려 옥사하였다. 조부 이진검(李眞儉)은 신임사화(辛壬士禍)에 앞장섰다가 영조의 즉위 이후에 처형당했다. 이 집안의 환란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20살 때에 아버지 이광사는 1728년(영조 4)의 이인좌(李麟佐)의 난과 1755년(영조 31)의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에 연루되어 함경도 부령(富寧)에 유배되었다가 1777년(정조 1) 적소(謫所)인 신지도(薪知島)에서 사망하였고, 남편의 투옥에 충격을 받은 이긍익의 어머니는 42살의 나이로 자결하였다. 집안이 풍비박산된 상황에서 이긍익은 평생 벼슬을 외면한 채 초야에 묻혀 학문을 닦는 데만 전념하였다. 약 30년간에 걸쳐 『연려실기술』을 저술하게 된 데에는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불우한 삶을 살아야 했던 개인적인 아픔이 계기가 되었다. 조선 야사(野史) 연구의 선두주자가 되다 노·소론의 당쟁 속에서 뼈아픈 가정사를 겪은 이긍익은 자신의 불운한 환경을 원망하기보다는 역사에 대한 관심과 저술에 대한 열정으로 승화시켰다. 부친의 유배지인 신지도에서 그는 여동생을 데리고 채소밭을 가꿔 생계를 이으면서 역사서인 『연려실기술』을 편찬했다. 이 책의 탄생은 실로 운명적이었다. 13살 때에 이긍익은 임금이 내준 운(韻)에 대구를 짓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꿈 이야기를 들은 부친 이광사는 ‘길몽’이라고 기뻐했고, 이긍익도 훗날 어전에서 붓을 잡을 징조[日後簪筆之兆]라고 생각했다. 잠필(簪筆)이란 붓을 휴대한다는 의미로, 그는 ‘임금 곁에서 붓을 드는 신하[簪筆之臣]’ 즉, 정사(正史)를 편찬하는 사관(史官)이 될 것이라 믿었다. 집안이 몰락하면서 꿈꾸어 왔던 입신의 꿈은 사라졌지만 조선시대 야사(野史)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를 편찬할 것이라는 예언은 적중한 셈이다. 실제로 그는 “요즘에 와서 문득 생각하니, 초야 잠필(草野簪筆)이란 글귀가 늙어서 궁하게 살면서 야사를 편집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어린 시절 꿈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하면서 “실로 우연이 아니라 모든 일이 미리 정해졌기에 그런 것이다[實不偶然 凡事莫非前定而然歟]”라고 말한 바 있다. 야사란 개인이 사사로이 저술한 사서(史書), 즉 사찬 사서(私撰史書)를 가리킨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등은 국가가 주도한 관찬 사서(官撰史書)이다. 당시 개인의 손으로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사서와 문집 등 400여 종에 이르는 각종 서적에서 사료를 발췌하여 조선시대 역사를 하나하나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완성했다. 그는 역사에서 고증을 최고로 여겼다. 『연려실기술』의 서문 격인 「의례(義例)」에서 이긍익은 ‘불편부당(不偏不黨)’ 또는 ‘술이부작(述而不作, 서술만 할 뿐 창작하지 않는다)’의 정신으로 편찬하였음을 밝혔다.그래서 선학자들의 자료에 기술된 부분을 그대로 나열만 하고 그 끝에 인용한 책 이름을 밝혀 독자들의 이해를 돕게 하는 한편, 말을 깎아 줄인 것은 많았으나 자신의 의견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국내 사료에 국한하여 남인·북인·노론·소론 등 당파를 가리지 않고 사실 그대로의 자료들을 모두 인용하여 제시했던 것도 당파성을 배제하고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연려실기술』은 조선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엮는 편년체(編年體)가 아닌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로 엮은 역사서다. 기사본말체는 시대 순으로 인과 관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의 전말을 서술하였다. 한말에『매천야록(梅泉野錄)』을 쓴 황현(黃炫)이 그의 역사 정신을 계승하였다. 이 책은 조선시대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에 좋은 안내서이자, 조선 왕조 야사에 금자탑이라 평가할 수 있다. 강화학파의 맥을 이어나가다. 이긍익이 활동한 시기에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던 노론은 주자학만을 완전무결한 사상체계이자 정치이론으로 받아들였다. 이와 달리 그는 양명학(陽明學)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양명학은 명나라 때 학자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이 주창한 학문으로, 지행합일(知行合一, 지식과 행동의 통일)을 강조하였다. 이긍익의 집안이 양명학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부친 이광사 때문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겪으면서 주자학을 비판하였고, 양명학자인 하곡 정제두(鄭齊斗)를 찾아 학문을 배우고자 했다. 심지어 이광사는 1736년(영조 12)에 그에게서 학문을 배우기 위해 강화도로 이사했고, 정제두의 손녀를 며느리로 맞이하였다. 훗날 이광사가 정제두의 문인이 된 이후 이영익(李令翊), 이충익(李忠翊) 등 이 집안으로 이어지는 양명학을 ‘강화학파(江華學派)’라 불렀다. 이후 양명학은 고종 때의 이건창(李建昌)에 이르기까지 이 가문의 가학(家學)으로 전승되었다. 이긍익의 후손인 이건창은 『당의통략(黨議通略)』을 저술하여 조선시대 당쟁사를 정리하였는데, 이 집안에서 『연려실기술』과 함께 조선시대 정치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저술하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연려실(燃藜室)’이란 한(漢) 나라의 유향(劉向)이 책을 교정할 때 태일 선인(太一仙人)이 짚고 있던 푸른 명아주 지팡이[靑藜杖]에 불을 붙여[燃] 비춰주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아버지 이광사가 그의 서재(書齋) 벽에 써준 그의 당호였다. 밤늦도록 책을 읽고 저술하는 사람에게 이보다 잘 어울리는 멋진 호가 또 있을까? 글_이미선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ㆍ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저의 프랑스 고향 마을 기용벨에는 태극기가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한국을 제 고향처럼 생각했습니다” 한국에서 순교한 신부 마틴 뤽 위앵(Martin Luc Huin)의 후손 까트린 메나싸 씨(52ㆍ여)는 한국 방문의 소회를 밝혔다. 그는 지난 11일부터 김미자 단장이 프랑스에서 이끌고 있는 합창단 ‘아미부와(친구의 소리)’의 단원으로 한국을 찾았다. 아미부와는 한국에서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와 참전 용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9박11일 일정으로 방문했다. 1년 여 전부터 이번 한국 방문을 기획, 합창단원을 대상으로 신청자를 모집했다.그 결과 이번 일정에는 합창단원 중 프랑스인 26명, 한국인 3명 등 총 29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전라도 광주와 보령의 갈매못 성지, 화성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수원 화성 등을 돌며 전쟁과 민주 항쟁을 겪은 한국의 역사를 살폈다. 또 양로원과 교회에서 합창 공연을 펼쳤다. 메나싸 씨는 “위앵 신부가 태어난 기용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톨릭 교육을 받으며 항상 그분의 영향 아래 있었고 동양의 먼 나라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위앵 신부가 한 일은 가족과 고향의 자랑이었었다”고 밝혔다. 메나싸 씨의 조상인 위앵 신부는 1865년 조선에 들어와 이듬해 3월30일 병인박해 때 체포돼 프랑스 선교사 4명과 함께 갈매못 성지에서 순교한 인물이다. 죽을 때까지 조선인 500여 명의 고해성사를 우리말로 집전하며 선교 활동에 인생을 바쳤다. 한국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던 그는 현지에서 한국 가곡 독창회를 주최했던 김미자 단장을 만나 단원으로 활동하며, 한국의 전통 문화를 배웠고 이번 방문을 고대해왔다. 갈매못 성지를 비롯해 국내 일정을 소화한 그는 “위앵 신부가 갔던 순교의 길을 따라가볼 수 있어 기뻤다”며 “위앵 신부가 전파한 신앙이 지금 한국에 뿌리내렸다고 생각하니 감격스러웠다”고 말했다. 메나싸 씨는 또 위앵 신부의 사진을 꺼내 보이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는 늘 위앵 신부의 사진을 품고 다니며 만나는 사람에게 한 장씩 선물한다고 했다. 곧 프랑스로 돌아가는 메나싸 씨는 갈매못 성지를 비롯해 한국 여러 곳을 둘러보며 새로운 인생계획을 세웠다. 조상인 위앵 신부처럼 한국과 프랑스를 잇는 가교가 되겠다는 것이다. 메나싸 씨는 “이번에는 한국의 양로원과 교회에서 공연했는데, 앞으로 더 다양한 방식으로 양국의 관계를 이어나가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손의연기자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1649~1736)는 당시 학계에서 이단시되던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조선 최초 양명학의 사상적 체계를 세웠음은 물론 이를 바탕으로 경세론을 전개한 조선 후기의 양명학자다. 이것이 오늘날 바라보는 정제두에 대한 우리의 평가다. 학문과 충절의 가문에서 태어나다. 정제두의 본관은 연일(延日)로,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그는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祖)’라 칭송되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11대손이다. 1649년(효종 1) 한성 반석방(盤石坊)에서 정상징(鄭尙徵)과 한산이씨 이기조(李基祚) 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종형 인평위(寅平尉) 정제현(鄭齊賢)은 효종의 부마이고, 부인 윤홍거(尹鴻擧)의 딸은 서인 명가의 후손 윤선거(尹宣擧)의 종질이었다. 정제두의 가문은 정몽주의 사후에 학문과 충절의 표상으로 조선시대 내내 선비들의 추앙을 받아왔다. 하지만 이 집안이 두각을 나타낸 때는 조부 정유성(鄭維城)에 이르러서였다. 도촌(陶村) 정유성은 1627년(인조 5)에 강도정시(江都庭試)에서 급제한 뒤 승문원에서 관직생활을 시작, 세자시강원 설서와 승정원 주서, 경기도관찰사, 이조판서 등의 엘리트 코스를 두루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정제두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1653년(효종 4) 5살 때 부친과 외조부를 여의고 1664년(현종 5) 16살 때 백부 정창징(鄭昌徵)과 조부 정유성이 세상을 떠났다. 설상가상 17살 때 결혼한 파평 윤씨는 정제두의 나이 23살 때에 죽었고 어린 아들마저 요절하고 말았다. 더구나 정제두 자신도 1682년(숙종 8) 34살 때에 병에 걸려 집안의 대소사를 동생 정제태(鄭齊泰)에게 부탁하면서 「임술유교(壬戌遺敎)」를 유언장으로 남길 정도로 평생 건강하지 못했다. 다행히 이때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이러한 가정사는 인생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제두는 1668년(현종 9) 별시문과 초시에 급제했다.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을 떨친 그는 1680년(숙종 6)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를 받아 벼슬길에 나갔으나 사퇴하였다. 이후에도 중신의 천거로 여러 차례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호조참의, 한성부윤, 사헌부 대사헌, 우찬성 등 관직 생활을 잠시 지냈을 뿐 거의 거절하고 강화도 하곡(霞谷)으로 거처를 옮겨 한평생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오로지 학문 탐구의 열정과 무욕의 삶을 살다가 88세의 장수를 누렸다. 학계의 이단아(異端兒) 정제두는 학계의 이단아였다. 그는 남계 박세채(朴世采)와 명재 윤증(尹拯)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처음에 성리학을 공부했지만 주자의 성즉리(性卽理)와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에 회의를 느끼고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성리설을 비판하면서 양명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양명학은 명나라 때 학자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이 주창한 학문으로, 지행합일(知行合一, 지식과 행동의 통일)을 주장한 것이다. 조선후기는 성리학이 사회 저변에 뿌리내려 성리학 중심의 권위주의적 학풍이 만연화된 폐쇄된 시대였다. 도학의 엄격한 정통 의식에 사로잡혀 학문의 다양성을 용인하지 않았고 주자에 대한 이설(異說)들을 배척하였으며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숨까지 위험할 지경이었다. 주자학의 권위주의적 학문 풍토에 대해 윤증(尹拯)은 ‘주자를 끼고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는 것[협주자이겸중구(挾朱子而箝衆口)]’이라 비판하였고, 정제두도 “오늘날에 주자의 학문을 말하는 자는 주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주자를 핑계 대는 것이요, 주자를 핑계 대는 데에서 나아가 주자를 억지로 끌어다 붙여서 그 뜻을 성취시키며, 주자를 끼고 위엄을 지어서 사사로운 계책을 이루려는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 당시에 주자의 성리학만을 올바른 학문으로 인식하고 이외의 모든 학문과 사상은 이단으로 몰아세웠기에 주자의 견해와 약간의 차이만 보여도 ‘사문난적(斯文亂賊,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을 비난하는 말)’으로 배척당했다. 이러한 시대에 주자를 비판하고 성리학을 신랄히 비판한 그는 자연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이단으로 몰아세우는 주자학자들에게 오히려 학문을 논하자며 당당히 맞섰다. 또한 같은 소론 계열의 학자인 박세채와 윤증을 비롯하여 최석정(崔錫鼎), 민이승(閔以升) 등과 함께 서신을 통해 양명학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스승 박세채는 「왕양명학변(王陽明學辨)」을 짓고, 윤증은 「변설(辨說)」을 짓고, 최석정은 「변학(辨學)」을 지어 정제두의 양명학적 견해를 비판하였다. 심지어 사제관계나 교유관계였던 그들은 양명학을 버리도록 종용하였다. 그러나 정제두는 『학변(學辯)』을 저술하여 주자의 견해에 대해 비판적 입장에서 심학-양명학의 정당성을 변론하였으며, 「존언(存言)」을 저술하여 양명학의 입장을 제시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왕수인의 학설에 애착을 갖는 것이 만약 남보다 특이한 것을 구하려는 사사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결연히 끊어 버리기도 어려운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학문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성인의 뜻을 찾아서 실지로 얻음이 있고자 할 뿐입니다.”라고 하며 초지일관 확고한 신념과 결연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강화학파의 비조(鼻祖)가 되다. 권위적인 시대와 주류 학문인 성리학에 맞서 자신의 학문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양명학을 연구, 발전시켜 양명학 연구의 비조가 되었다. 이 학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어 훗날 그의 학맥을 ‘강화학파(江華學派)’ 또는 ‘하곡학파(霞谷學派)’라고 불렀다. 강화학파는 정제두가 강화도로 자리를 잡은 후 일부 소론계 인사들이 이주하면서 형성된 학풍을 가리킨다. 이로 인해 강화도는 주자학 중심 체제의 조선에서 학문의 자유가 보장된 유일한 공간이 되었다. 양명학은 아들 정후일(鄭厚一)을 비롯하여 김택수(金澤秀), 이광사(李匡師), 신대우(申大羽), 신작(申綽), 유희(柳僖) 등 그의 후예들과 당시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그 맥을 이어나갔다. 이들은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려는 박학풍(博學風)과 실천적 성향을 강조하는 실리적 학풍을 추구하였다. 학계의 아웃사이더에 있었던 양명학이 조선과 한국의 학술계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강화학파의 후예들은 다양한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광사는 시·서·화에 두각을 나타났고 유희는 한글을 연구하였으며,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저술한 이긍익과 『동사(東史)』를 편찬한 이종휘는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특히 한말 갑오경장이 단행되자 이건창(李建昌)은 벼슬길을 버리고 강화로 낙향했다. 조선이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박은식(朴殷植)과 정인보(鄭寅普) 등은 항일운동은 물론 국학 진흥에 선구적 업적을 이루었다. 글_이미선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ㆍ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학문과 교육이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전통시대 조선사회에서 자신의 문집을 편집하여 정서해 두고 간행할 계획을 세우고자 했던 여성이 있었다면, 그 자체만으로 이미 시대를 앞선 비범한 여성이라 하겠다.이러한 사실은 저술 중 「문집 초고를 정서하여 지계로 보내며[文草謄送溪上時短引]」에 보이는데, 이 여성이 바로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1793, 이하 “윤지당”이라고 약칭함)이다. 학문적 명성이 높은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다 윤지당은 1721년(경종 1)에 함흥 판관을 지낸 임적(任適)과 파평 윤씨의 사이에서 5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조선 후기의 대 성리학자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의 여동생이자 운호(雲湖) 임정주(任靖周)의 누님이다. ‘윤지당’은 어린 시절에 임성주가 지어 준 당호로, 주자의 ‘윤신지(允莘摯)’의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신(莘)은 태사(太?, 문왕의 부인)의 친정 고향이고, 지(摯)는 태임(太妊, 문왕의 어머니)의 친정 고향이다. 그 뜻은 태사와 태임의 덕을 본받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집안은 풍천 임씨(?川任氏)로, 고려의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를 지낸 임온(任溫)을 시조로 한다. 고조 금시당(今始堂) 임의백(任義伯)은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나아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과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교유하였다.증조 임승(任陞)과 조부 임사원(任思元)은 각각 우의정 홍중보(洪重普)의 딸과 호조판서 이경직(李景稷)의 손녀와 혼인하였다. 외조부 윤부(尹扶)는 소론의 영수 윤증(尹拯)의 6촌 동생이자 이조판서 윤동섬(尹東暹)의 조부다. 부친 임적은 송시열의 학통을 이어받은 대학자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1710년(숙종 36) 사마시에 뽑혀 진사가 되었고, 장원서 별제, 양성 현감 등을 거쳐 함흥 판관이 되었으나 실정을 탄핵 받아 관직을 떠났다. 그 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유가 경전 등의 서적을 섭렵하여 정통하였다. 큰오빠 임명주(任命周)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이라는 청요직을 지냈다. 둘째 오빠 임성주는 도암(陶庵) 이재(李縡)의 제자로 막내 동생 임정주와 함께 한 시대를 대표하는 대학자가 되었다. 셋째 오빠 임경주(任敬周)는 28세의 나이로 요절했지만,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문장에 비상한 재능이 있었으므로, 문집인 청천자집(靑川子集)을 남겼다. 이로써 보면 이 집안의 학문은 사계-우암-수암-도암으로 전해지는 기호학파(畿湖學派)에 속한 것이다. 가정적인 삶은 불행했지만, 학문의 기회를 얻다. 윤지당의 삶은 ‘타고난 운명이 박복하였다’고 스스로를 탄식할 정도로 외롭고 고독했다. 8세 때에 부친을 전염병으로 여의고 홀어머니 아래서 자랐다. 1739년(영조 15) 열아홉 살에 원주에 사는 선비 신광유(申光裕, 1722~1747)와 결혼했으나 8년 만인 1747년(영조 23)에 사별하여 청상과부가 되었다. 설상가상 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마저 일찍 요절하였고, 후에 시동생 신광우(申光祐)의 아들 신재준(申在竣)을 입양하였지만 그 역시 28살의 젊은 나이로 그녀보다 앞서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삼종지도(三從之道)를 할 수 없는 불쌍한 처지였으나, 그녀의 바람대로 일생 동안 심성 수양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전통사회에서 남녀의 사회적 역할은 엄격하게 구별되었다. 여러 가지 유교적 규범과 차별 때문에 여성들의 활동은 봉제사(奉祭祀)와 접빈객(接賓客)의 가정 관리에만 집중되었으며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학문 교육 활동에는 철저히 격리되었다. 그러나 윤지당은 여성들의 학문적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던 시대에 어려서부터 오빠 임성주에게서 고급 유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기억력이 뛰어나고 책 읽는 것을 즐겨 해서 많은 책을 섭렵했다. 여동생의 타고난 재능을 알아 본 임성주는 아홉 살이 된 윤지당에게 효경, 열녀전, 소학, 사서 등을 직접 가르쳤고 더 나아가 그의 특별한 배려로 형제들이 학문 토론하는 자리에 그녀를 자주 끼워주어 유교 경전을 비롯하여 역사, 인물, 정치 등을 강론하곤 했다. 그녀가 대학자로 칭송되는 형제들로부터 우주와 인간을 관통하는 원리와 성인에 이르기 위한 도덕적 실천을 강조하던 성리학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고 하겠다. 이로 인해 그녀는 훗날 인간 심성의 수양을 논한 철학 논문들을 저술할 만큼 학문적 소양을 쌓을 수 있었다. 한국여성사의 큰 별 되다. 윤지당은 중국의 경강(敬姜, 춘추시대 魯 나라 文伯의 어머니)과 반소(班昭, 後漢 시대 班固의 여동생)에 비유될 정도로 위대한 여류 학자였다. 실제로 대학자 오빠 임성주도 “누이는 우리 가문이 낳은 태임이나 태사다. 정자의 딸은 대수롭지 않다”고 평한 바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 그녀의 학문적 성취나 자아실현은 그녀 자신의 학문에 대한 애착과 집념, 그리고 부단한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윤지당은 큰오빠 임명주가 세상을 떠나자 한문으로 제문을 지음으로써 여성은 학문을 할 수 없다는 남성들의 편견을 깨부수었다. 시부모가 세상을 떠난 이후부터 그녀는 남성 중심의 유교 사회에 요순과 같은 성인의 경지를 목표로 하여 학문과 수행에 몰두하였다. 그래서 조선시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성리학을 여성의 시각으로 연구하여 성리학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것이 바로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인데, 형이상학적 철학과 역사를 연구한 논문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윤지당은 대학·중용 등의 유교 경전을 새롭게 해석하였고 성리학의 핵심인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과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을 설파하였으며, 사기(史記)·한서(漢書) 등의 역사책을 꿰뚫었다. 특히 그녀에 따르면, 성인과 범인(凡人)이 같은 성품을 타고 나고 남성과 여성은 현실에 처한 입장만이 차이가 날 뿐, 하늘에서 부여받은 성품에는 애초에 차이가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성인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며, 사람은 누구나 요순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 여성들도 노력을 하면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훗날 윤지당은 강정일당(姜靜一堂)에게 여성 선비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글_이미선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ㆍ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기쁜소식선교회, 16일 서울서 ‘2017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 개최 16일 오전 10시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2017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가 열렸다. 기쁜소식선교회가 주최하고 한국기독교연합(KCA) 부활절 연합예배 준비위원회가 주관한 이날 예배에는 2만여 명의 기독교인이 참석한 가운데 박옥수 목사가 주강사로 예수 부활의 참의미를 설교했다. 박옥수 목사는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는 성경말씀처럼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우리를 의롭게 하셨고 그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부활하셨다”고 전했다. 설교에 앞서는 800여 명의 전국연합 합창단이 ‘예수 부활했으니’ 등 3곡으로 예수 부활을 찬양했고, 미국 캔사스주에 거주하는 김윤옥(59)씨가 신앙으로 자궁암과 난소암을 극복한 체험을 간증했다. 송시연기자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뚜렷했던 조선 사회에 그 차별적 구분에 반대하고 열악한 가정환경 속에서도 스스로의 학문적 성취와 함께 실천적 행위를 규율하였다.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희를 평생 흠모하여 ‘주자를 스승으로 삼겠다사주(師朱)’는 호를 지을 정도로 배움에 대한 열정이 높았으며, 그 결과 최고의 여성 실학자가 되었다. 그녀가 바로 사주당 이씨(師朱堂李氏, 1739~1821, 이하 ‘사주당’)다.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학문과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다. 사주당은 1739년(영조 15) 청주 서면(西面) 지동(池洞)에서 이창식(李昌植)과 사헌부 감찰을 지낸 강덕언(姜德彦)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규합총서(閨閤叢書)를 지은 빙허각 이씨의 외숙모이자, 언문지(諺文志)와 물명고(物名攷)를 펴낸 실학자 유희(柳僖)의 어머니다.사주당의 가계는 그다지 화려하지 않았다. 태종의 아들 경령군(敬寧君)의 후손이었으나, 조부 이함부(李咸溥)는 이렇다 할 벼슬에 오르지 못했고, 부친 이창식도 통덕랑의 직함만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리 현달하지는 못했어도 학덕이 있고 청렴한 선비의 덕성을 지닌 인물들로, 사주당의 지식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사주당은 1763년(영조 39)에 유한규(柳漢奎, 1719~1783)의 네 번째 부인이 되었다. 그녀의 나이 25살로, 혼인 적령기를 훌쩍 넘긴 때였다. 혼인의 시기를 놓친 이유는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데다가 1757년(영조 33) 19살에 부친상을 당해 3년 상을 치렀기 때문이다.어렸을 때부터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공부한 사주당의 학식과 견식 수준을 고려해볼 때, 남편 유한규는 그녀의 지적 욕망을 채워줄 훌륭한 배우자감이었다. 그러나 시댁 역시 집안 환경이 풍족하지 못한 한미한 선비 집안이었다. 시조부 유응운(柳應運)은 안협 현감을 지냈고, 시아버지 유담(柳紞)은 성균관 생원에 머물렀으며, 남편 역시 이렇다 할 관직이 없었다.다만 유한규의 외가는 전주 이씨 덕천군파(德泉君派) 명문가문으로, 조부 이진경(李眞卿)은 육진팔광(六眞八匡)으로 명성을 얻은 인물이었다. 육진팔광은 석문(石門) 이경직(李景稷)의 증손 북곡(北谷) 이진유(李眞儒)가 1730년(영조 6)에 옥사를 당한 후 출사(出仕)를 포기하고 강화도로 들어가 학문에만 전념했던 그 후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유한규 역시 1755년(영조 31) 백부 유수(柳綏)가 을해옥사에 연루되면서 그의 조카라는 이유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1779년(정조 3)에 잠시 목천 현감에 제수되었지만 1783년(정조 7) 향년 64살에 사망하였다. 사주당과의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다.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자신의 꿈을 추구하다.유한규는 사주당보다 스무 살 연상이었다. 부부는 많은 나이차에도 결혼 생활 30년 동안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학문을 토론하며 일상의 재미를 함께 나누는 지우(知友)였다. 종종 유교 경전에 대해 사주당이 질문하면 그가 대답해주었고 간혹 떨어져 지내더라도 각자의 생활을 편지로 주고받으며 소식을 전할 정도로 잉꼬부부였다. 그녀가 성리학적 지식을 축적할 수 있었던 것도 오랜 생활 남편과의 끊임없는 토론을 통해 얻어진 성과였다.유학의 가르침을 터득한 사주당은 지식을 습득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몸소 체득하고 군자로서의 삶을 실천하며 살고자 했다. 이는 사주당의 일생에 대해 아들 유희가 “주체를 지닌 여성 군자의 삶”이었다고 평하거나, 묘지를 쓴 신작(申綽)이 ‘동해 모의(東海母儀)’ 곧 조선의 어머니상으로 표현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유한규는 부인 사주당의 학문에 대한 열망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녀가 소학과 주자가례(朱子家禮), 그리고 여사서(女四書) 등을 배우고 익혀 가어(家語)를 저술하자, 책 서문에 망설임 없이 내훈(內訓)과 여범(女範)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평하였다. 그런 만큼 유한규는 부인의 학문적 소양과 능력을 높이 인정하였다. 실제로도 그녀는 4남매 외에 상사(上舍) 이면눌(李勉訥)과 감역(監役) 이양연(李亮淵) 등 사대부 남성들을 직접 가르쳤다.사주당은 학문에 대한 열정을 어린 자녀들의 교육열에 쏟았다. 45살 되던 해에 남편과 사별한 사주당은 어린 4남매를 데리고 용인으로 이사했다. 남편 생전에도 넉넉한 살림이 아니었던 터라 그의 가정 형편은 더욱 열악하였다. 그런데도 4남매 모두 글공부를 시켰고, 딸들의 경우에는 태교신기에 발문을 쓸 정도의 글 솜씨를 구사하도록 만들었다. 심지어 딸들을 위한 교육 교재를 직접 제작하여 훈육할 정도로 자녀 교육에 힘을 쏟았다.임신 경험을 바탕으로 태교신기를 저술하다. 사주당은 1800년(순조 즉위)에 세계 최초의 태교 백과사전인 태교신기(胎敎新記)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총 10장으로 구성되었다. 원래 한문으로 지어졌으나 아들 유희가 한글로 번역하고 발문을 써서 그 이듬해에 완성한 것이다. 사주당은 태모의 심성과 태아의 환경을 강조하였으며 이 때문에 태교(胎敎)를 중시하였다. 그 이유는 태(胎)가 곧 사람의 출발이므로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기간 동안 사람의 품성이 결정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생 후에 스승에게서 배운 교육보다 태교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아버지의 낳음과 어머니의 기름, 스승의 가르침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었다. 훌륭한 의사는 병이 나기 전에 손을 쓰고, 훌륭한 교사는 아직 태어나기 전에 가르친다. 그러므로 어진 스승의 십 년 가르침이 어머니의 열 달의 가르침만 못하다.(태교신기 1장 2절)이 책은 사주당이 읽은 경서와 사서 및 기존 의서(醫書)에서 태교 관련 이야기를 뽑아서 정리하고, 몸소 4남매를 낳아 혼자 기르며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된 것이다. 태교의 전문적인 이론과 자신의 실제 경험을 정리함으로써 모든 여성들에게 단편적이고 고루한 지식에서 벗어나 실용적이고도 체계적인 지식을 제공하도록 하였다.사주당은 1821년(순조 21) 83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녀는 아들 유희에게 자신이 지은 모든 글들을 태우고 태교신기만 남겨둘 것을 유언했다. 유희는 사주당의 유언에 따라 이 책만을 남겨두고 그녀의 모든 작품들을 모두 불살랐다. 죽음을 눈앞에 둔 학자가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에 유언으로 부탁할 정도였다면 얼마나 그 책에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엿볼 수 있다. 즉, 그녀는 태교신기를 지어 조선시대 학술계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여성 선각자였던 것이다.글_이미선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ㆍ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5천여 명의 수원지역 기독교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확인한다. 수원시기독교총연합회(이하 수기총)가 오는 16일 수원실내체육관에서 진행하는 ‘2017수원부활절연합새벽예배’가 그 현장. 수원은혜교회 임영섭 목사가 사회를 맡아 진행하는 이날 예배는 오전 5시께 문을 연다. 세한성결교회 찬양팀의 경배와 찬양으로 기도의 앞선 혼란스러운 마음을 씻어낸 뒤 권남호 목사(사무총장·한사랑교회)가 내빈소개를. 이인기 수기총 대표회장(수원화산교회 목사)의 인사말로 행사의 커튼을 걷는다. 브라스밴드의 ‘트럼펫으로 찬양하라’ 공연에 이어 고명진 목사(직전 회장·수원중앙교회)가 대표기도를, 황진석 목사(충신교회)가 성경을 봉독하고 김철한 목사(증경회장·오목천감리교회)가 설교를 맡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맞은 현재 우리의 마인드를 함께 고민한다. 또 국응석(증경회장·순복음중앙교회)·반종원(증경회장·수원침례교회)·송종완(증경회장·수원삼일장로교회) 목사와 정광재(부회장·CBMC)중부연합회장) 집사가 각각 ▲국가와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하여 ▲대통령선거와 새로운 지도자를 위하여 ▲한국교회와 부활신앙을 위하여 ▲경기도와 수원시 복음화를 위하여 등의 주제로 공동기도를 올린다. 축도는 이영호 목사(증경회장·수원제이교회)가 맡아 예배의 끝단을 장식한다. 이인기 대표회장 목사는 “사망의 그늘 아래 놓여있는 우리들에게 생명과 빛을 주신 부활의 날을 맞아 수원시내 모든 성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 주님의 부활을 노래하는 뜻깊은 시간을 맞았다”며 “부활절 새벽 아침에 존귀하신 목사님과 교회 성도들을 초대한 자리에 형제가 동거하고 연합함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지를 경험하고 보여주는 날이 되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예배에는 남경필 경기지사와 염태영 수원시장이 각각 축사를 맡을 예정이다. 예배 참여문의는 권남호 수기총 사무총장(010-4412-6860)으로 하면 된다. 권소영기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독교의 축일(祝日), 부활절을 맞아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는 6일 보도문을 통해 북한을 포함 전 세계에 희망을 주문했다. 한기총은 이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메인 죄의 사슬에서 해방되고, 자유를 얻게 됐다.모든 미움과 갈등, 분열과 반목을 십자가의 피로 덮고,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길이 열렸다”고 희생의 의미를 짚었다.이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고 설명했다. 특히 세월호 미수습자 가정을 위해 위로의 메시지를 함께 해달라고 요청했다. 한기총은 이어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이유는 더 큰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섬길 수 있는 이유 역시 더 큰 섬김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미 받았고,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을 나눠야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의 짐을 대신 지셨듯, 우리는 이웃의 짐을 함께 지고 주님의 십자가 길을 걸어가야 한다”며 “우리가 다가가야 할 이웃은 소외되고 약한 자,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을 위로하고 나눔과 섬김의 사랑으로 품어야 합니다. 특별히 세월호 미수습자 가정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미수습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고, 모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다.권소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