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인장을 잘 새긴 유금, ‘아스트로라브’를 만들다

거문고를 잘 탄 탄소 유금유금(柳琴, 1741~1788)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 중 한 사람인 유득공의 숙부로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 서호수 등과 교우한 북학파 실학자 중의 한명이다. 평생 관직에는 나가지 않았고 학문과 예술을 즐기며 북학파 벗들과 교유한 인물이다.유금은 거문고를 좋아하여 자를 탄소(彈素)라 하고 원래 이름이 유련(柳璉)이었으나 이 이름 대신 거문고 금(琴)자를 써서 유금으로 개명하였다. ‘탄소’는 ‘탄소금(彈素琴)’의 준말로 소금을 연주한다는 의미이다. 탄소라는 자와 유금이라는 개명에서 보듯이 거문고를 매우 사랑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유금은 음악뿐만 아니라, 인장을 잘 새기는 재주가 있었고 수학과 천문에 관심이 많았다. 자신의 서재를 기하학의 기하를 따서 ‘기하실(幾何室)’이라고까지 불렀다.아정 이덕무는 친한 벗 유금의 서재 기하실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고라니 눈같이 뚫어진 울타리 그림자가 비추는데 / 麂眼疏籬影斜수펄들은 미친듯이 나물꽃을 희롱하네 / 雄蜂狂嬲菁花유금은 북경 연행을 모두 3번이나 갔다 왔다. 물론 서자출신인 자신의 신분 탓에 공식적으로 간 것은 아니었지만,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연행을 다녀 온 뒤 유금으로 이름을 개명했고, 서양선교사들의 서적도 탐독했다.유금은 1776년에 사은부사였던 서호수를 따라 연경에 갔다. 이때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이서구 등 벗들의 시를 각각 100수씩 총 400수를 뽑아 만든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을 편찬하여 이조원과 반정균 등 청나라 문인들에게 소개하였다. 유금은 귀국길에 이들의 서문과 비평을 받아 왔다. 『한객건연집』을 통해 유득공과 이덕무, 박제가, 이서구 등의 이름이 청나라 문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조(朝)·청(淸) 문인들의 교유가 『한객건연집』을 통해 더욱 활발해졌고, 조선 후기 문화와 학술사에서 유금과 북학파 문인들의 위상이 높아졌다.천문학과 수학을 좋아한 실학자유금은 천문학과 수학을 좋아했다. 자신의 서재를 “기하실”이라 붙였는데 기하는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소개한 서양의 수학인 『기하원본』에서 따온 것이다. 유교경전을 읽고 해독하는 것이 선비들의 최고의 도였던 시대에 천문학이나 수학은 말단 학문이었다. 공부해 봐야 과거시험에도 나오지 않았고 선비가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학문으로 여겨졌다.천문학과 수학에 몰두한 유금이었지만, 그가 남긴 저술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인장 새기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의 책에 인장 찍기를 즐겨한 그였지만, 그의 책은 거의 다 사라지고 없다.연암 박지원은 유금이 인장을 새길 때면 돌을 쥐고 무릎에 받치고서 어깨를 비스듬히 하고 턱을 숙인 채, 눈을 깜빡이며 입으로 후후 불면서, 먹 자국에 따라 누에가 뽕잎 갉아먹듯 파 들어가는데 마치 실처럼 가늘면서도 획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표현했다.친한 벗 이덕무가 하루는 그 모습을 보고 “자네는 그 굳은 돌멩이를 힘들게 새겨서 무엇에 쓰려고 하는건가?”물었다.“천하의 모든 물건에는 주인이 있고, 주인이 있으면 이를 증명할 신표가 있어야 하네. 그러기에 열 집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고을이나 백부장(百夫長)까지도 부절(符節)이나 인신(印信)이 있었던 것일세. 주인이 없으면 흩어져 버리고 신표가 없으면 어지러워지거든.”유금의 아스트로라브오늘날 아쉽게도 그가 새긴 인장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의 손길이 천문기구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나타났다. 유금이 만든 아스트로라브가 세상에 공개된 것은 2002년이다. 2002년 일본 시가현 오오미하치만시의 토기야(磨谷)가 일본 동아천문학회 이사장인 야부 야스오에게 검토를 의뢰하면서부터이다. 토기야의 조부가 1930년경에 대구에서 구입하여 패전한 후 일본으로 가져온 것이다.처음 이 아스트로라브가 일본에서 공개될 때는 누가 만든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앞면 위쪽 고리 부분에 ‘유씨금(柳氏琴’)이라는 인장이 고문헌 연구자인 박철상에 의해 해독되면서 이 귀중한 작품의 제작자가 유금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아울러 아스트롤라베에 청동 고리에 새겨진 “북극출지 38도(한양의 위도) 1787년에 약암 윤선생(이름 미상)을 위해 만들었다(北極出地三十八度 乾隆丁未爲約菴尹先生製)”라는 기록을 통해 제작연도도 알게 되었다. 이후 동아시아 전통 천문학의 권위자인 미야지마 카즈히코 교수에 의해 18세기 동아시아인이 만든 것으로는 유일한 것으로 학계에 보고되었다.아스트로라브는 14세기 기계시계가 고안되기 전까지 고대와 중세 여행자들에게 가야 할 방향과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가장 정교하고 정확한 천문시계였다. 명나라 말기에 클라비우스(Christoph Clavius, 1538~1612)의 아스트로라브 해설서인 “아스트롤라븀(Astrolabium)”(1593)을 명말의 학자인 이지조(1569~1630)와 마테오 리치가 『혼개통헌도설(渾蓋通憲圖說)』(1607)로 제목을 붙여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아스트로라브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혼개통헌(渾蓋通憲)’이라는 이름으로 청과 조선에 전래되었고, 일본은 16세기에 서유럽을 통해 직접 전래되었다.유금의 아스트로라브는 한중일 통틀어 자국에서 제작된 것으로는 현존하는 유일한 전형적 형태의 아스트로라브이다. 동아시아 특히 조선시대 서양근대 과학의 전래와 수용을 고찰하는 데 있어 귀중한 유물이 아닐 수 없다.글_정성희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조선 최고의 실용적인 철학자인 최한기

조선후기 동아시아 기철학의 집대성자 최한기(崔漢綺, 1803~1877)는 신분과 학문에서 그 시대의 비주류였으므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사상가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19세기 중엽의 암담했던 조선 사회에 개화사상을 형성한 선진 사상가이자 개신 유림의 선각자로서, 조선후기 실학사상과 근대 개화사상을 연결해준 가교자(架橋者)였다. 부유한 무관 집안의 자제가 되다. 최한기의 본관은 삭녕(朔寧)이고, 자는 운로(芸老) 또는 지로(芝老)이며, 호는 혜강(惠崗, 惠岡)·패동(浿東)·명남루(明南樓)이다. 초명은 최성득(崔聖得)이다. 그의 이름에는 사연이 있었다. ‘한(漢)’은 삭녕최씨 집안의 항렬 자이고 ‘기(綺)’자는 한(漢)나라의 유명한 은사(隱士) ‘기리계(綺里季)‘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기리계는 동원공(東園公), 녹리 선생(?里先生), 하황공(夏黃公)과 함께 상산사호(商山四皓)의 한 사람으로, 진(秦)나라 말기에 상산(商山)에서 자지(紫芝)를 캐 먹으면서 은거해 살았다. 이때 그들은 ‘채지조(採芝操)’ 노래를 불렀는데, 최한기의 자인 ‘지로’ 역시 채지조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1803년(순조 3)에 최치현(崔致鉉)과 청주 한씨[한경리(韓敬履)의 딸]의 외동아들로 개성에서 태어났으나, 큰 집 종숙부 최광현(崔光鉉)에게 입양되었다. 최광현 부부가 독자인 최한기를 양자로 맞이하게 된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부인[안동 김씨]의 꿈속에 남편 최광현이 자신의 집이 아닌 사촌동생 최치현의 집 담장 아래에 소나무를 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안동 김씨가 남편에게 그 연유를 묻자, “이곳에 심어 뿌리가 확고해지면 우리 집에 그림자를 비추어 그 음덕이 두텁게 될 것이다”는 이야기다. 이 집안은 영의정을 지낸 최항(崔恒)의 양후손(養後孫)이며 혈손은 아니다. 8대조 최의정(崔義貞)이 감찰을 지냈고 7대조 최덕룡(崔德龍)이 군수를 지냈다고 하지만 종증조부 최지종(崔之宗)이 무과에 급제하고 오위부장(五衛部將)을 거쳐 선전관(宣傳官)으로 승진하기 전까지 문무과 합격자는 물론 생원·진사 합격자를 한 사람도 배출하지 못하였다. 이 집안이 상층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이룬 때는 1862년(철종 13) 최한기의 장남 최병대(崔柄大)가 문과급제하고 장손 최준령(崔準寧)이 진사에 합격한 이후부터였다. 최한기는 1872년(고종 9)에 최병대가 고종의 시종이 되면서 첨지(僉知)의 벼슬에 올랐고, 사후에는 사헌부대사헌 겸 성균관좨주에 추증되었다. 조선 최고의 저술 활동으로 일생을 보낸 서울 지식인 생부 최치현은 몰락한 양반 가문을 일으킬 재목으로 촉망받았고 시고(詩稿) 10여권을 남길 만큼 개성에서 문예(文藝)로 소문이 났다. 그러나 1812년(순조 12)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양반으로 행세하기 어려운 생가와 달리 양가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무과 집안이었다. 양부 최광현은 무과 출신이었지만 거문고를 연주할 줄 알며, 금석(金石)·서첩(書帖) 등에 고상한 취미를 가진 데다 문집 1권을 저술할 정도로 교양 있는 식자층이었다. 양가의 경제적 안정과 생부·양부의 문식(文識)은 최한기의 학자적 자질과 함께 재야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최한기는 가르침[敎]과 배움[學]을 평생 종사해야 할 일로 생각하였다. “매번 기서(奇書)를 얻으면 즐거워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회고할 만큼 그는 동서고금의 외국 서적을 구입하여 연구에 몰두하는 독서광이었다. 이는 인정(人政)에서 자신의 학문 편력에 대해 “스승과 친구를 찾아 방문한 것은 천리를 멀다 하지 않았고, 서책을 연구하는 데에는 천금을 아끼지 않았다.”고 스스로 고백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폭넓은 독서와 연구 활동에 힘입어 1836년(헌종 2) 34세 때에 신기통(神氣通)과 추측록(推測錄)을 지었다. 그 후 그는 신기통의 ‘기(氣)’와 추측록의 ‘측(測)’을 따와서 기측체의(氣測體義)라 이름을 붙인 자신의 대표적인 저작물을 1860년 중반에 중국 북경 인화당(人和堂)에서 출간하였다. 이 책 앞부분에 ‘패동(浿東)’을 자신의 이름 뒤에 붙임으로써 세계 학계에 조선 사람인 자신의 학설을 밝혀 자기 학문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었다. 약 1천여 권(현존 15종 80여 권)을 저술하였다는 기록이 과장된 표현일지 모른다. 그러나 현재까지 확인되는 그의 저술을 살펴보면, 앞서 밝힌 저서 이외에 기학(氣學)·농정회요(農政會要)·육해법(陸海法)·만국경위지구도(萬國經緯地球圖)·의상리수(儀象理數)·심기도설(心器圖說)·우주책(宇宙策)·지구전요(地球典要) 등 철학, 정치, 사회, 천문, 지리, 수학, 의학, 농학, 공학 등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독보적인 학문적 업적을 남겼음은 분명하다. 동·서양의 화합을 꿈꾼 기철학자 사상은 그 시대의 거울이다. 최한기가 활동했던 19세기는 중세 봉건적 사회가 급속도로 해체 과정에 들어가면서 서세동점(西勢東漸, 밀려드는 외세와 열강을 말함)이라는 시대적 조류가 급속도로 밀려오던 시기였다. 최한기는 이와 같은 시대의 경사(傾斜) 속에 나서 자라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의 학문과 사상은 이러한 사회 상황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19세기 서양 세력의 침탈을 인식하여 새로운 길을 찾고자 했던 그는 누구보다도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데에 열정적이었다. 그는 학문의 주류였던 사서삼경(四書三經) 중심의 성리학이 아니라 십삼경(十三經)에 학문적 관심을 두었고, 기학이라는 학문체계를 형성하면서 서구의 근대과학기술에서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최한기가 제창한 기학은 소통의 학문이자 화합의 학문이다. 소통의 학문 체계를 토대로 그는 세계 각국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지구촌 인류의 화합을 설계하였다. 이로써 기화(氣和)를 강조하면서 궁극적으로 인화(人和)를 중시하였고 만세의 영원한 평화를 갈망하였다. 특히 그는 유교의 윤리강상인 오륜(五倫)을 세계 화합 이론으로 보편화시켰다. 더 나아가 지구촌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위해 종래의 오륜에다 ‘조민유화(兆民有和)’의 새 강령을 추가하였다. 화합과 소통, 통합과 통일을 지향한 최한기의 학문 구상이야말로 19세기에 이미 세계화를 꿈꾼 것이다. 최한기는 성리학적 사고에 사로잡힌 유학자들과 달리 열린 마음의 소유자였다. 그가 다양한 학문 분야에 관심이 많고 저술활동이 왕성했던 것은 성리학의 배타성을 비판하고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학문이 생활에 있으면 실(實)의 학문이 되고, 생활에 있지 않으면 허(虛)의 학문이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19세기 격변기에 실증적 태도와 동양의 유학 정신을 바탕으로 서양의 과학적 지식을 수용한 그는 동·서양 학문의 가교자 역할을 한 근대 지향적 철학자임에 틀림없다. 글_이미선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ㆍ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서수원 칠보체육관서 종교화합 어울림 한마당

불교, 천주교, 개신교 등 종교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화합과 다짐하며 소통하는 뜻깊은 자리를 가졌다. 1일 경기도에 따르면 불교와 천주교, 개신교 등 종교 간 화합과 소통을 위한 제6회 ‘종교화합 어울림 한마당’ 축제가 이날 서수원 칠보체육관에서 개최됐다. 행사에는 이용훈 천주교 수원교구 교구장, 성무 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 총무국장, 보인 조계종 제25교구 봉선사 기획국장, 김영진 경기도 종교지도자협의회 회장, 고흥식 경기도 기독교 총연합회 대표회장을 비롯한 3대 종교계 지도자와 신도 등 600여 명이 참석했다. 종교화합 어울림 한마당은 경기도 종교지도자 협의회가 주최하고 해마다 개신교, 불교, 천주교 순으로 번갈아 주관한다. 올해는 천주교 주관으로 열렸다. 행사는 1부 식전공연과 개회식, 2부 큰 공 띄우기, 행운 박 터트리기 등 ‘도전 한마당’, 3부 대동 기차여행 등 연합 친선경기 ‘화합의 한마당’ 순서로 진행됐다. 각 프로그램에는 3대 종교의 성직자가 종교를 떠나 고르게 섞여 연합팀을 구성, 화합을 실천했다. 특히 이날 행사에서는 천주교 수원교구가 개신교 복지시설인 ‘기독교 문화원’에, 경기도기독교총연합회는 불교 복지시설인 ‘아르딤장애인복지관’에, 용주사, 봉선사는 천주교 산하 노숙인 시설인 ‘해 뜨는 집’에 각 300만 원씩 성금을 교차 전달해 의미를 더했다. 김영진 경기도 종교지도자협의회 회장은 “종교화합 어울림 한마당이 낮은 곳을 향해 떨어지는 시냇물처럼 사랑과 용서, 화해의 메신저가 돼 경기도를 하나로 만드는 소통의 징검다리가 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호준기자

[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재덕을 겸비한 실천적 지식인, 권철신

천진암 계곡. 다산 정약용이 가을의 단풍이 아름답다고 노래했던 곳이다. “화랑방 그 안에서 술을 사오고 /앵자봉 그늘에서 수레 멈추니, /하룻밤 부슬부슬 비 내린 뒤에 /두 기슭 단풍들어 붉은 숲이네.” 천진암 터에 암자는 사라지고, 대신 천주교에서 기리는 다섯 분의 묘가 놓여 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권철신(權哲身, 1736~1801), 권일신(權日身, ?~1791), 이벽(李檗, 1754~1785), 이승훈(李承薰, 1756~1801), 정약종(丁若鍾, 1760~1801)의 묘다. 지금은 조선 천주교의 발상지로 기념되고 있지만, 그때는 권철신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했던 젊은이들이 모여들던 곳이다. 권철신의 호는 녹암(鹿庵)이다. 조선 초 인물인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후손이다. 권철신은 성호학파의 한 사람이었다. “성호 선생이 늘그막에 이르러서 한 제자를 얻었으니 바로 녹암이었다. 그는 영특한 재주에 인자하고 화평하여 재덕을 모두 갖추었다. 성호선생이 녹암을 몹시 아꼈다.” 사교를 전파한 역적으로 죽음을 당했기에 그의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다산 정약용이 쓴 그의 묘지명에서 그의 삶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권철신의 학문 경향은 도덕적 실천을 중요시했다. 양명학적 경향이 있었는데, 주자학 독존의 당시 분위기상 양명학은 이단시되었다. 그는 학문적으로 뛰어났을 뿐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고매했다. 정약용이 쓴 묘지명에 의하면, 그의 효우(孝友)와 독행(篤行)을 모두 인정했다고 한다. 그의 집안에 들면 화기(和氣)가 가득 차있어서 마치 향기가 사람을 엄습하는 것 같았고 난초 향기가 그윽한 방에 들어간 듯했다고 했다. 그의 학문과 인격의 명망을 보고, 주위에서 공부하러 찾아오는 젊은이가 많았다. 해마다 겨울이면 권철신의 집에서 가까운 주어사와 천진암에서 그의 문도들이 강학모임을 갖곤 했다. 정약용의 둘째형인 정약전도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언젠가 겨울에 주어사에 머물면서 학문을 강습하였는데, 정약용은 그때의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 “녹암이 직접 규정을 정했는데, 새벽에 일어나서 냉수로 세수한 다음 숙야잠(夙夜箴)을 외고, 해 뜰 무렵에는 경재잠(敬齋箴)을 외고, 정오에는 사물잠(四勿箴)을 외고, 해질녘에는 서명(西銘)을 외게 하였는데, 장엄하고 경건하여 법도를 잃지 않았다.” 모두 유학 관련 서적이었다. 유학자 권철신에게 새로운 사조의 충격은 이벽으로부터 왔다. 이벽은 자생적으로 한국 천주교를 일으킨 사람이었다. 그는 혼자서 천주교를 공부하여 감화되었다. 1783년 겨울 이승훈이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되었을 때, 그는 이벽이 시킨 대로 북경의 성당에 찾아가 세례를 받고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이듬해 봄에 귀국했다. 이벽은 이승훈으로부터 세례자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벽은 효과적인 전도활동을 위해 권철신을 찾아갔다. ‘권철신은 모든 선비들이 우러러보는 명망 있는 분이니, 그분이 우리 교에 들어오면 다른 사람들도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벽은 권철신의 집에 10여 일을 묵었다 갔는데, 권철신은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그의 동생 권일신은 이벽의 전도에 감화되어 열렬한 천주교도가 되었다. 1785년, 명례방 김범우 집에서 이벽의 주재로 모임을 하다 포졸들에게 적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이었다. 형조판서 김화진은 이 사건을 비교적 간단하게 처리했다. 그러나 그 여파는 간단치 않았다. 유생들 사이에서는 이런 동향을 불온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관련자의 집안에서는 놀라 집안 단속에 들어갔다. 이벽은 사실상 집안 연금 상태에 있다가 병으로 죽고 말았다. 주저했던 권철신은 나중에 동생으로부터 천주교 서적을 구해서 읽고 암브로시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제 권철신과 그의 가족들은 천주교를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천주교도의 앞길엔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해년 진산사건으로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정치 이슈화되었다. 동생 권일신이 1791년 신해박해 때 고문당한 여파로 유배 길에서 세상을 떴다. 권철신은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집에 들어앉았다. 정조가 죽자 신유옥사가 일어났다(1801).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채제공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천주교를 명분으로 삼았다. 정순왕후가 척사하교를 내리고,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을 잡아들였다. 이때 권철신도 잡혀갔다. 그에게 혹독한 추궁이 가해졌다. 그는 동생이 죽은 신해박해 이후 천주교를 멀리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그러나 가혹한 고문에 견디지 못하고 권철신은 66세의 나이로 옥사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거리에 버려졌다. 정약용은 훗날 권철신의 묘지명에서 이렇게 슬퍼했다. “오호라! 인후하기가 기린 같고, 자효하기를 호랑이나 원숭이 같고, 영특한 지혜는 샛별과 같고, 얼굴 모습은 봄날 구름의 밝은 태양 같았는데, 형틀에서 죽어 시체가 저자의 구경거리로 널렸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정약용이 권철신의 묘지명을 쓴 것은 그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권철신 본인의 죄는 언급함이 없이 그의 집안과 이웃의 죄를 권철신에게 덮어씌웠으니 제대로 법을 적용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정약용이 보기에는, 천주교는 구실이었을 뿐, 훌륭한 선비인 권철신이 정적들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기록과 연구는 권철신이 은밀하게 신앙 활동을 계속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정약용에 따르면, 권철신의 저서로는 “시칭(時稱) 2권이 있고, 대학설 1권이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흩어져버려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전하고 있다. 정약용은 희정당에 입대하여 대학을 강론했을 때, 그 학설을 권철신이 읽어보고 칭찬해주었다고 했는데, 그의 학문은 정약용에게도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이 그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했지만 그가 천주교도였는지 아녔는지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권철신이 주위 사람을 보살피는 고매한 인격을 지니고, 덕행과 실천을 추구한 학문적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억압적 사회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지만 그의 자유로운 영혼을 가두진 못했다. 글_김태희 다산연구소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무덤 일반인에 전면 개방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1912∼1989)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1877∼1955)의 무덤이 일반인에 개방된다. 문화재청은 남양주 ‘홍릉과 유릉’(사적 제207호)에 있는 덕혜옹주묘와 의친왕묘를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을 기념해 오는 16일부터 일반에 공개한다고 11일 밝혔다. 단, 전 문제를 고려해 겨울철인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는 관람을 통제할 예정이다. 홍릉(洪陵)과 유릉(裕陵)은 대한제국 황실 가족의 무덤 7기가 모여 있는 곳이다. 이중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모신 홍릉, 순종과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를 모신 유릉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황제릉의 격식에 따라 조성됐다. 또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과 영친왕비가 잠든 ‘영원(英園)’, 황세손 이구의 묘인 ‘회인원(懷仁園)’의 원(園) 2기, 덕혜옹주묘와 의친왕묘 등이 있다. 이번 전면 개방을 기념해 덕혜옹주묘로 향하는 산책로에서 사진전 왕릉공감(王陵共感)-세계유산 조선왕릉을 진행한다. 덕혜옹주와 의친왕의 일대기를 담은 사진 자료 36점을 전시한다. 관계자는 “관람객들이 대한제국 황실의 역사와 의미를 되새겨보는 뜻깊은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조선왕릉의 역사성과 가치를 더 많은 국민과 공유하도록 더욱 힘쓰겠다”고 밝혔다. 류설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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