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성시산림 조성기, 시대변화를 읽다

허생전에 등장하는 불우한 선비 연암 박지원은 소설 허생전에서 언급하기를 ‘때를 만나지 못한 선비’의 대표적인 인물로 반계 유형원과 함께 졸수재 조성기를 꼽았고, 그 능력은 적국에 사신 보낼만하다고 높이 평가했다.사신으로 가서 명분과 국익을 함께 지킬 수 있는 능력이란 풍부한 학식과 언변이 요구된다. 박지원의 관점에서 볼 때 조성기와 유형원은 가장 혁신적인 사상을 지녔으나, 체제에 용납되지 못했던 학자였던 셈이다. 졸수재(拙修齋) 조성기(趙聖期, 1638~1689)는 17세기 서울에 거주했던 관료가문인 임천 조씨 출신의 인물이다. 그의 평생은 불우했다. 20세 무렵 찾아온 앉은뱅이 병으로 과거를 폐한 이후,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서재에서 공부하기를 30여년에 천지만물의 이치에 통달하였다고 한다.그는 자신의 처지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대 상황과 제반 모순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스승과 제자라는 학문적 계보에 얽매이지 않았고, 주자학의 교조주의에 갇혀 있기보다는 자유로운 정신적인 탐색을 시도하였다. 서울학계와 성시산림의 등장 조성기가 성장했던 서울학계는 17세기 이래 수도권의 도시화가 서서히 진행되면서 서울과 근교에 생활권을 가진 성시산림(城市山林)의 출현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주자성리학의 학풍을 고집하기 보다는 변화하는 서울이라는 공간위에 당색을 초월한 학문적 공감대를 형성해 나갔던 일군의 학자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변화하는 사회경제적 현실에 대한 방책 제시와 박학(博學)으로 표현되는 폭넓은 관심을 통해 개방적인 서울학계의 학풍을 만들어 갔던 그룹들이었다. 조성기와 함께 성장했던 그의 형제들도 이러한 학풍의 세례를 받았다. 조원기(황해도 관찰사), 조현기(인천부사), 조창기(사간원 사간), 조형기(경기도관찰사)는 실무관료로 활동하면서 재정과 경제 분야에 능력이 있다고 스스로 자부했다. 그리고 이들은 잠곡 김육을 종주로 하는 한당(漢黨)계열의 중심인물들이었다. 대동법과 호포론, 균평의 실현 조성기의 사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중국 남송대의 학자 소옹(邵雍, 1011~1077)과 여조겸(呂祖謙, 1137~1181)이었다. 주자학이 점차 현실과 괴리되어 가는 점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위의 두 학자를 학문적 스승으로 삼았다. 소옹의 《황극경세서》에서 조성기는 일리(一理)의 보편성을 인식하였다. 기(氣)의 제약성을 넘어 이(理)의 능동성을 강하게 주장했다는 측면에서 18세기 조선사상계에서 진행된 호락논쟁의 과정에서 그의 학술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경세학은 여조겸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조성기는 기존 주자학에서 내세우는 중국 요·순·우왕시대의 이상론으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하에 한당(漢唐)의 국가 규모론을 시대변화에 대응할 대안으로 주장하였다. 조성기는 국가에 일정한 규모가 없이 단지 일인(一人)의 세력과 일심(一心)의 힘만으로 사업을 미봉하고자 한다면 끝내 붕괴되는 세상을 구할 수 없을 것이라 보았다. 당시 정치 사상계에서 주류를 형성한 세력은 송시열 등이 주도했던 산당(山黨)계열이었다. 산당세력은 국왕도 보편적 원리에 귀속되는 수신(修身)의 존재로 규정했고, 이럴 경우 의리의 주인인 산림(山林)이 국왕의 스승으로서 위상을 강화해야 한다는 정국 운영론을 주장했다. 이를 조성기는 비판한 것이다. 국가규모의 설정과 함께 조성기는 균평(均平)한 제도와 양민(養民)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당시 가장 중요한 개혁 현안으로 논의되던 대동법(大同法)과 호포론(戶布論)에 대한 지지는 이러한 경세이념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대동법은 공납제의 개혁을 위한 방안이었다. 지방의 토산물을 현물로 내는 세금제도인 공납의 폐해를 해소하기 위해 토지 1결을 기준으로 동일한 세금을 걷게 하자는 제도이다. 또한 일반 백성들에게 부담이 집중되었던 군역(軍役)에 대한 개혁방안으로 제시한 호포론 역시 양반을 비롯하여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동일하게 포(布)를 거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모두 균평과 양민의 이념에 바탕한 개혁이었다. 이 같은 입론 하에 국왕과 국가라는 보편적인 존재는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균평의 이념으로 제도의 개혁을 추진할 때 그 운영의 주체는 왕과 국가였다. 제도를 통해 왕과 국가의 위상을 보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원기는 국왕의 위상을 강화했고 정치적 결단을 강조했다. 제도개혁의 과정에서 당색을 고려하지 않고 재주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나게 하면 자연스럽게 권력은 국왕에게 귀결될 것이고, 당시 고질적인 병폐인 붕당(朋黨)도 혁파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정치세력의 분기와 갈등을 모두 부정적으로 인식했고 이러한 생각은 국왕 주도의 탕평론(蕩平論)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기반을 마련했다. 탕평정치의 이론적 기반 조성기는 보편적인 일리(一理)가 고금과 현우(賢愚)를 넘어서 모든 사람과 사물에 존재하는 것임을 주장했다. 이후 이 사유는 18세기 노론학계를 양분하게 되는 호락논쟁의 과정에서 서울지역 낙론학맥의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낙론의 종사였던 김창협, 김창흡 등이 조성기의 학문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그의 경세론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왕도론을 강조했던 조선의 주자학자들은 주자의 논지에 반하는 한당국가규모론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조성기는 국가정책·국방·재정·민생의 안정 등 사회 정치적인 문제의 해결을 우선했다. 이를 위한 대안으로 균평한 기준이 시행되는 국가운영의 규모를 주장했다. 또한 이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으로 국왕권의 강화와 붕당의 혁파 나아가 궁극적으로 탕평책의 시행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러한 경세론은 서울·경기지역 실무관료집단인 한당(漢黨)의 정국 운영론으로 실현되었고, 18세기 탕평정치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글_조준호 실학박물관 학예팀장

“수해복구 현장, 일손부족 농가에 힘 보탭니다”

집중호우로 침수 피해가 속출한 충북지역에서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 신자들이 힘을 보탰다. 폭염을 무릅쓰고 지난 17일부터 26일 사이 닷새에 걸쳐 연인원 700여 명의 봉사자들이 두 팔을 걷고 나선 것.■ 절망을 걷어낸 자리에 희망의 씨앗을하나님의 교회가 복구작업을 펼친 지역은 청주시 상당구 중앙동, 탑동, 미원면, 흥덕구 복대동, 오송읍 호계리, 청원구 오창읍의 수해 가정, 상가, 농가 등지다. 그중 호계리 일대는 청주 내 176헥타르에 달하는 침수 농가 중 피해가 가장 심각한 곳이었다. 폭우가 내릴 당시 인근 병천천 제방 세 곳이 무너지면서 농장으로 물이 범람해 비닐하우스 100여 동이 휩쓸려가고 마을이 삽시간에 진흙밭으로 변하는 등 막대한 피해가 있었다. 상당구 미원면 일대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이곳은 여름마다 피서객들로 붐비는 휴양지인 만큼 펜션이 밀집되어 있다. 수해를 입은 펜션 주인들은 한철 장사를 망치게 됐다며 막막함을 토로했다. 물이 천장까지 차올라 가전제품, 가구, 살림살이 등 대부분을 버리게 된 일반 가정집과 상품이 물에 젖어 생업이 힘들어진 상가 역시 도움의 손길이 절실했다.수해민들의 참담한 마음을 헤아리며 하나님의 교회 봉사자들은 복구에 진척을 내기 위해 애썼다. 가정집 집기를 모두 꺼내 젖어서 못 쓰게 된 물건들을 다 버리고 녹아내린 연탄을 삽으로 퍼내며 호수를 연결해 집안 청소를 하는 등 이웃의 보금자리를 복구하는 작업에 정성을 쏟았다. 봉사자들은 피해 농작물과 폭우에 떠밀려온 쓰레기, 대형 비닐하우스의 파손된 비닐을 걷어내고 휘어진 철근을 복구시키는 작업을 이어갔다. 고된 작업에 잠깐씩 휴식하면서도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나 봉사를 재기했다. 봉사자 신성희(40) 씨는 “가정집 복구작업도 만만치 않았는데 농장 작업에는 비할 바 못된다”며 “비닐하우스 안에서, 그것도 차양 없이 일하려니 숨 쉬기도 힘들다. 더 많이 못 도와드린 게 너무 안타깝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전했다.이러한 모습에 박노문 흥덕구청장은 “하나님의 교회가 수해 가정에서 청소하는 모습을 봤다. 종교 단체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에 감사를 전한다”고 말했다.■ 바쁜 농가에 철마다 일손 보태젊은이들이 떠나가 일손 부족으로 발을 동동 구르는 농가들이 하나님의 교회 신자들의 도움으로 한시름 놓고 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일손이 필요한 때 농가를 찾아가 포도 가지치기·봉지 씌우기·곁순 제거 작업, 키위·블루베리·마늘·감자·쪽파 수확, 사과·복숭아 열매솎기 등을 도우며 지역사회의 유익과 이웃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지난 23일에도 문경 하나님의 교회 목회자와 성도 등 30여 명이 동로면 석항리 아로니아 밭에서 열매를 수확하고 포장하는 일에 일손을 보탰다. 앞서 10일에도 화성봉담 하나님의 교회에서 송산면 독지리 포도 농가를 찾아 곁순 제거작업을 도왔다.교회 관계자는 “무더운 날씨 속에서도 싱싱한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 쉼 없이 수고하는 농민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성도들이 봉사에 나섰다. 작은 손길이나마 농가에 힘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한편 하나님의 교회는 도심, 바다, 강, 산림 등지에서 환경정화활동을 전개하고 독거노인, 모자가정 등 소외이웃 지원, 헌혈운동, 지역행사 서포터즈, 재난 피해복구, 이·미용 봉사, 김장나누기 등 여러 자원봉사를 통해 이웃과 사회를 향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송시연기자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 선교협회, 가족행복·이웃화목 위한 사랑과 봉사로 세계적 성장

‘혼자 가면 빨리 가고 함께 가면 멀리 간다’는 아프리카 속담은 실생활에서 실천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빛난다.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 여정을 타인과 ‘함께’ 가려면 스스로를 낮추고 상대를 존중하며 배려하고 희생하는 것이 필수다.각박한 세상이지만 이를 실천하며 가치 있는 삶의 본을 보여주는 이들이 있다. 성경대로 실천하는 순수 신앙을 기반으로 세계 175개국 각지에서 사랑과 봉사를 실행하는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약칭 하나님의 교회, 총회장 김주철 목사) 사람들이다. 이 교회는 세계적인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면서 영국 여왕자원봉사상과 미국 대통령자원봉사상 수상 등 세계적인 찬사를 받고 있다. 그 성장세와 사회적 활동 면에서 “고요하며 강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세계 유수의 도시들은 물론 히말라야 산맥 해발 4천 미터 고산지대에 위치한 네팔 세르퉁, 아마존 밀림지역인 브라질 타루마, 남극과 인접해 펭귄 서식지가 있는 세계 최남단 도시인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등 그야말로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교회가 설립되면서 세계인들의 영적 안식처가 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활발한 성장세는 국내에서도 그 열기가 뜨겁다. 지난 25일에도 경기도 평택과 충청도 천안, 공주 등에 새 성전 헌당식이 잇따라 개최됐다. ■ 경기·충청권 헌당식 성황 이날 하루에만 경기도 평택과 충남 공주, 천안 3개 도시에서 새 성전 헌당식이 열렸다. 해당 지역은 물론 인근 지역 성도들까지 총 3천500명가량이 참여해 성황을 이뤘다. 삼성·LG 산업단지, 주한미군기지 등이 있으며 경제성장도시로 각광받는 평택의 경우 소사벌 신도시에서 헌당식이 열렸다. 성전 정문에는 각계각층이 보내온 축하 화환이 즐비했고, 평택과 안성, 오산, 화성에서 2천명가량이 참석했다. 24만여㎡ 규모의 배다리생태공원이 내려다보이는 평택소사벌 하나님의 교회는 자연과 어우러져 멋진 경관을 이룬다. 대지면적 2,118㎡, 연면적 7,066㎡에 지하 2층과 지상 5층 구조로 외관과 내부 모두 단정하고 정갈하다. 대예배실과 소예배실, 교육실, 시청각실, 다목적실, 유아실, 휴게실, 식당 등 다양한 공간들이 있어 예배 및 성경 공부, 모임, 가족과 이웃 간 화합의 장소로 이용된다. 교회 관계자는 “새 성전으로 이사한 지 한 달도 채 안된 요즘, 외부에서 지켜본 교회 모습과 성경 본위의 신앙으로 선행을 실천하는 성도들을 보고 입교하는 사례가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다”고 밝혔다. 위치적으로 평택시청과 가깝고 주한 미8군의 새 기지인 캠프 험프리스와도 인접해 지역민은 물론 외국인들의 방문도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캠프 험프리스는 주한 미군과 그 가족들, 공무원 등 총 4만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미군 해외기지 중 최대 규모다. 하나님의 교회 신자이자 주한 미군인 조나단 씨는 헌당식 참석소감을 이렇게 전했다. “아름다운 성전을 보니 항상 남을 먼저 배려하고 위해주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영의 형제자매들이 연상된다. 교회에 오면 하나님께서 늘 위로와 응원을 해주시는 것 같아 힘을 얻는다. 이국땅에서 고생하는 동료들에게도 내가 얻은 행복을 전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공주 하나님의 교회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공산성과 금강 줄기가 인접한 공주시 금성동에 위치했다. 그 일대에 국립공주박물관, 공주한옥마을, 교육지원청, 경찰서, 보건소 등이 있어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지역이다. 성전은 대지면적과 연면적이 각각 1,820㎡, 2,202㎡로 총 4층 규모다. 흡사 고전적인 궁전을 연상시키는 외경으로 보는 이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천안직산 하나님의 교회는 외관과 내부 모두 온화한 분위기가 특색이다. 전체 4층 규모인데 대지면적 2,170㎡, 연면적 1,438㎡로 앞서 성전들과 같이 주차장이 넓어 교회를 방문하는 이들이 편리하게 다녀갈 수 있다. 천안과 수도권을 잇는 직산역이 인접한데다 서북구청, 직산읍사무소, 직산저수지, 아파트 단지 등이 가까이 있어 많은 이들이 찾을 것으로 보인다. 총회장 김주철 목사는 헌당식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 지역에 새 성전이 마련된 특별한 날”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의 근원인 어머니 하나님을 통해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 진리의 전당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이어 “모든 생명체가 어머니에게서 생명을 얻도록 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인류는 영의 어머니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설명하며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어머니 하나님을 만났기에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얻는 멋진 운명을 얻게 된 것처럼, 기쁘고 행복한 삶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주자”고 강조했다. ■ 진실된 선행, 세계가 그 공로 인정 하나님의 교회 새 성전 마련이 지속되면서 전국 각지에서는 “교회가 설립된 후 주변 분위기가 밝고 환해졌다”는 반응이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려 일상에서 선행과 봉사를 하는 게 주된 이유다. 이들은 환경정화, 헌혈릴레이, 소외이웃돕기, 재난구호, 농촌일손돕기, 서포터즈 등 다양한 자원봉사를 꾸준히 하고 있다. 각 교회별로 이웃초청잔치, 오케스트라 연주회, 전시회 등을 개최해 이웃과 사회를 위한 열린 공간 역할도 담당한다. 이처럼 헌신적인 봉사는 국내를 넘어 세계적으로 이뤄진다. 7~8월 방학을 맞은 국내 하나님의 교회 대학생들이 미국, 영국, 호주, 스페인,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 싱가포르, 인도, 몽골,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각국으로 날아가 현지의 대학생들과 함께 문화 교류, 환경포럼 개최, 환경정화, 복지시설 위문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1월에는 한국,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세계 각국 80여 개 대학 캠퍼스에서 환경정화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같은 공로로 하나님의 교회는 지난해 영국 여왕 자원봉사상 수상을 비롯해 미국 대통령자원봉사상 금상(단체 최고상, 5회) 등 세계 각국 정부와 기관으로부터 2,000여 회 수상의 영예를 얻었다. 또한 작년 12월에는 유엔 중앙긴급구호기금(CERF) 고위급회담에 교회로서 최초로 초청받아 총회장 김주철 목사가 연설해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김주철 목사는 “하나님의 교회의 모든 인도주의적 활동은 어머니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며 향후 지구촌 곳곳의 어려운 이웃을 위한 지속적인 도움을 기약했다. 송시연기자

[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고대사에서 찾은 이상사회의 전통, ‘동사(東史)’

▲ 그림 수산집 내 동사 단군본기(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 가계와 관력 수산(修山) 이종휘(李種徽, 1731~1797)의 선계는 종친인 양녕대군파이다. 그의 큰아버지 이정걸(李廷傑)이 윤증(尹拯)의 문인인 것으로 보아 소론의 당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의 남산아래에서 성장했고, 1771년 41세에 늦은 나이에 진사가 되었다. 이후 옥과현감, 공주판관 등을 역임하는데 그쳤지만, 그의 아들 이동직(李東稷)은 순조년간 대사헌을 역임하며 현달하였다. 거의 평생을 재야의 학자로 지낸 이종휘의 학문적 성장 배경에는 18세기 서울학계의 학풍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울은 당시 사회경제적인 변화위에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다.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서울학계는 경직된 학문 자세에서 벗어나 구급의 방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했고, 폭넓은 개방성을 특징으로 하는 자유로운 학풍이 확산하고 있었다. 이러한 학문의 세례를 받은 이종휘는 특히 문학에서 정통의 문장을 알기 위해 이단으로 배척되는 문장까지 알아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주자학의 폐쇄성을 벗어나 양명학은 실천에 장점이 있다고 인식하였다. 왜 고대사에 관심을 가졌는가? 조선중기 사림세력이 등장하면서 성리학의 가치를 가장 잘 드러내는 역사서술인 강목체(綱目體)가 역사서술에 적극적으로 적용되었고, 중화주의의 상징적 존재라 할 수 있는 기자(箕子)를 재해석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성리학적 보편주의가 확대되는 과정이었다. 이후 양란과 명·청의 교체라는 배경 아래에서 한국사로서 ‘동국(東國)’에 대한 탐구는 강화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은 고대사의 발견, 기자의 재인식, 발해의 재발견, 새로운 한국사 공간의 확대, 역사연구 방법론의 진전으로 나타났다. 이종휘는 새로운 문명사회의 이상을 찾기 위해 과거 고대사로 학문적 탐구를 진행하였다. 그는 소중화의 문화국가 건립을 위해서는 기자의 문화를 제대로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식하였다. 중국은 이미 청나라의 등장으로 ‘중국=중화’의 지위를 상실했으므로 그 이상사회의 전통을 한국사에서 찾았던 것이다. 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 이종휘의 대표저술은 기전체 사서인 동사이다. 그는 이 책에서 단군본기와 기자본기를 나란히 설정하므로 써 단군과 기자를 통합적으로 이해했다. 단군과 기자에 대한 관심은 당시에 유행했던 소중화주의 내지 조선중화주의와 관련이 있다. 중국의 중화민족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단군을 주목했고, 이것이 이어져 단군에서 부여와 고구려에 연결되었던 것이다. 곧 단군과 기자에 주목하면서 우리 고대사의 강역[영토]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 때문에 삼국 중에도 단군과 기자의 영역에 가장 많이 포함되었던 고구려까지 상대적으로 중시하였던 것이다. 이런 관점은 이종휘의 역사인식으로 자리 잡았다. 문화적으로 이종휘는 기자가 조선에서 문화를 일으킨 것으로 평가했다. 기자의 유풍이 고구려에 계승됨으로서 고대의 유교 문화가 꽃피웠던 것으로 보았다. 또 고구려는 부여와 함께 단군의 혈통을 계승했으므로 단군의 혈통과 기자의 문화를 동시에 계승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 점에서 고구려를 중심으로 삼국사를 인식하게 된 근거가 나온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18세기 단계에서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이것을 조선의 관점에서 창조적으로 소화하여 새롭게 만든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때문에 동사에는 열전에 고구려인이 많이 수록되었고, 9개 항목의 지(志)도 고구려 중심으로 되어 있다. 부여세가 등에 보면 고구려의 종족상의 계통은 단군으로 올라간다. 또한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인식은 단군 기자이래의 도읍이었던 평양에 고구려가 수도를 삼았다는 점도 작용한다. 신라와 백제는 조선의 변방이고 고구려만이 조선을 차지했기 때문에 신라와 백제에 대해서도 큰 줄기만을 언급했다는 표현에서 고구려 중심 인식이 드러난다. 또한 고구려는 동방의 대국이었으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기 때문에 그 영토가 패수(浿水)를 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적하였다. 유교문화의 전승차원에서도 고구려는 예의와 의관·문물과 음악이 정비된 나라로 파악하였다. 기자의 유풍을 계승함으로서 신라 백제에 비해 유교 문화가 발달했고 때문에 고대사의 중심으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에까지 이어졌다. 발해는 5천리의 땅을 차지했으며 백성들에게 의관·예악을 갖추게 하여 소중화의 나라가 되었다. 이에 시조 대조영은 기자이래로 으뜸가는 인물로 평가했다. 동사를 둘러싼 평가 이종휘는 당시 문명의 중심인 중원대륙이 오랑캐의 차지가 된 상황을 고대사의 강역에 대한 확장과 기자에 대한 재인식을 통해 이를 넘어서려 하였다. 청나라에 맞서는 과정에서 종래 부정적으로 보았던 고구려의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여 실학시대 역사 연구의 중요한 업적이자 근대 민족사관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동사에 나타난 역사인식은 한국사에서 첨예한 해석의 지점으로 볼 수 있는 ‘주체와 사대’, ‘민족과 보편’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담고 있었다. 때문에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이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종희는 단군 이래 조선의 고유한 독립문화를 영가(詠歌)하여 김부식이래 역사가의 노예사상을 갈파하여 특유한 발명과 채집이 없다하여도 다만 이 한가지로도 불후에 치(置)할 것이다. 이처럼 동사는 신채호 등 근대민족주의 역사학에서 주목을 받았다. 전근대와 근대를 연결하는 역사학의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지점을 차지했던 것이다. 글_조준호 실학박물관 학예팀장

[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안정복이 편찬한 우리 역사서, ‘동사강목’

성호학파의 계승자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호는 순암(順菴)이다. 그는 숙종 후반기에서 정조 중반기를 살다간 인물로, 학문적으로 성호 이익을 중심으로 한 근기 남인의 학맥을 계승한 인물이다. 그의 가문은 18세기이후 재야의 정치세력으로 머물렀다. 울산부사를 역임한 할아버지 안서우(安瑞羽)는 영조가 즉위한 후 노론의 배척을 받아 파직 당했고, 전라도 무주에 은둔하였다. 무주에서 성장했던 안정복은 후일 부친 안극(安極)을 따라 25세 때에 경기도 광주 덕곡리(德谷里)로 옮겨왔다. 안정복은 일찍이 성리대전에 접하면서 성리학에 침잠하였다. 29세에 자신의 학문적 입장을 정립한 하학지남(下學指南)을 편찬했고, 35세에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게 되는 성호 이익을 방문하여 제자의 예를 올렸다. 이익의 졸 후 안정복은 천주교에 대한 비판에 앞장서 일부 후배들의 급진적인 학풍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순조초년 천주교 사옥의 혼란 중에서 성호학파의 명맥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짧았던 관직 생활, 지방제도 개혁을 실천하다 안정복은 젊은 시절 지방행정에 관심을 가지고 임관정요(臨官政要)를 집필했다. 이 책은 농민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목민관의 통치덕목과 민폐의 시정내용을 정리한 내용이다. 후일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편찬에도 많은 부분 영향을 주었다. 안정복은 40세에 가까워서 참봉을 비롯한 하급관료로 나아갔다. 65세가 되는 1776년 충청도 목천현감으로 나아가 목민행정을 펼칠 기회를 얻었다. 현감 재임시 지방의 실정을 파악하기 위해 목천현의 지리지인 대록지(大麓志)를 편찬했고, 향약을 시행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이후 안정복이 목천현을 떠나자 백성들은 거사비를 세웠다. 후일 이 사실을 알았던 안정복은 백성의 마음이 고맙고 한편 부끄러워하면서 한편의 시를 지었다. 삼년간이나 목천의 밥으로 배를 채우지 못하면서도 재주없이 먹기만 한다고 부끄럽게 여겼는데 우습게도 복귀정에 세워진 한 조각 돌 거기에다 내 이름 남겨 후인들에게 보이다니 최고의 역사서 동사강목의 편찬안정복의 학문적 성과는 역사 서술에서 두드러진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동사강목(東史綱目)은 조선후기 한국사 연구가 거둔 최고의 성과이다. 동사강목은 1754년에 착수하여 5년만에 초고를 완성했다. 안정복은 처음 이 책을 집에서 보관하는 용도로 생각했으나, 이후 남인계 신료 채제공의 천거로 세손[정조]의 서연에 참여하면서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후 정조년간 동사강목은 조정에 올려 져 널리 그 존재를 알렸다. 마침내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통사로 자리를 굳혔던 것이다. 동사강목은 모두 20권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상고시기에서 고려에 이르는 우리의 역사를 기록했다. 정통·찬역·시비·충절의 문제를 다루어 지극히 유교 이념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나, 철저한 고증을 통해 완성도 높은 서술을 이루었다. 안정복은 지리 고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역사를 연구하는 자는 반드시 영토[강역]를 정한 후에야 점거(占據)의 상태를 알 수 있고, 전벌(戰伐)의 득실을 살필 수 있으며, 분합(分合)의 연혁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지리에 대한 관심은 지리고의 작성과 역사지도의 제작 등으로 나타났다. 지리고를 통해 요동 지역을 단군조선·기자조선·부여의 영역으로 비정했고, 국경 문제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천하의 요충지인 옛 영토 요동을 잃어버린 것이 약소국이 된 중요한 원인으로 보았다. 이처럼 그의 북방에 대한 관심은 옛 영토 회복 의식과 잇닿아 있었다. 동사강목에 나타난 지리고증과 이설(異說)에 대한 논증은 한백겸 이래 조선후기 역사지리 연구의 축적된 성과를 종합하고, 여기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한 단계 발전시킨 것으로 의미를 갖는다. 후대에 미친 영향 사론(史論)은 역사서 편찬자의 비평적 주장을 의미한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기존 역사서의 사론을 당색을 가리지 않고 수용했고, 미흡한 부분은 새로 작성하였다. 이 책에서 도덕과 군신 관계, 외교와 국방, 과거와 지방제도, 상례와 음악 등을 주제로 비평적인 사론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의 독자성을 전제로 하여 조공을 통한 평화 질서 유지를 사대교린이라 생각하고, 이를 가장 이상적인 국제 질서로 옹호하였다. 때문에 조공적 질서위에 형성된 국제관계를 무력으로 변경하는 행위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한사군의 설치, 고려 때 원에서 설치한 정동행성의 설치 등과 고구려가 중국을 자주 침략하면서 나라를 잃은 화근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좋은 예이다. 동사강목은 특히 역사 인식의 측면에서 앞서 시도된 강목법(綱目法)을 세련되게 하고 정통의 부각이라는 측면에서 우리 역사를 재구성하였다. 기존에 제기되었던 단군정통론, 기자-마한 정통론 등을 각각 수용하고 체계화했다. 때문에 동사강목은 조선후기 정통론적 역사 인식과 고증적 학문태도에 의한 서술이라는 양면적인 성격을 지닌 저술로 조선후기 역사학의 발전선상에서 하나의 정점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위상으로 역사가 안정복은 후일 개화기 교과서류는 물론이고 한말 일제 강점기의 역사가들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조준호 실학박물관 학예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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