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복리(福利)의 실학 사상가, 심대윤(沈大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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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리전서(규장각제공)
복리(福利)의 실학 사상가, 심대윤(沈大允)
심대윤(沈大允, 1806∼1872)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의 집안이 폐족(廢族)이었기 때문이다. 본디 소론 명문가였으나 증조부 심악(1702~1755)이 1755년(영조 31)에 을해옥사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심악의 부인과 딸은 욕을 당하지 않게 자결을 택했다. 살아남은 5세 고아의 손자가 심대윤이었다.  

 

심대윤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자는 진경(晉卿)이고, 호는 백운(白雲)‧석교(石橋)·동구자(東邱子) 등이다. 그는 폐족으로서 독서에 열심이었으나 동시에 생계를 꾸려야 했다. 안성에서 상업을 했던 그는 40세 무렵에 밥상을 만드는 공방을 운영헀고, 47세 때는 약방을 경영했다. 호구지책으로 노동을 하면서도 그의 선비(士)의식은 높았다.  

 

“천하 만세의 치란(治亂)은 선비[士]에게 달려 있다. 먹고 입는 것은 농업에서 나오고, 기물과 용구는 공업에서 나오며, 재화는 상업으로 유통된다. 선비만이 편안히 앉아 일이 없이 농민·공인·상인이 분주한 노력에 관여하지 않은 것은, 천하 만세의 치란의 책임을 맡기 때문이다.”(「自警文」)

 

심대윤은 유교 경전을 연구하고 <복리전서(福利全書)>, <백운문초(白雲文抄)>, <한중수필(閒中隨筆)>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복리전서>는 심대윤이 57세에(1862) 지은 글로서, 그의 대표 저서로 꼽힌다. 

 

그의 사상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욕(利欲)에 대한 태도였다. “음식이란 것은 이익의 근본이다. 이익이라는 것은 생양(生養)의 근원이다. 사람의 욕구보다 큰 것은 없다.”(「食戒」) 식욕과 색욕은 사람의 큰 욕구이며, 사람이 이익을 좋아하는 것과 명예를 좋아하는 것은 천성이고, 욕구는 하늘이 명한 본성이라 했다. 

 

“천지의 마음은 이로움을 위주로 하고 해로움을 버린다. 사람과 물(物)의 본성은 이로움을 좋아하고 해로움을 싫어한다. 성인의 도(道)는 그 본성을 말살하여 인의(仁義)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인의는 이롭게 하는 것이다.”(「柳君名字說」) 

 

도덕적 인간관을 벗어나 현실적 인간관을 보이고 있다. 이런 생각은 당시 주자학만 존숭했던 주류 사상과 판이했다. 주자 성리학에서는 의(義)와 이(利)를 구분하여 의를 중시하고 이를 경계했다. 즉 이(利)를 추구하는 것을 경계하고 사람의 욕(欲)을 억제하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그는 인간의 욕구에 대하여 추구하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의 욕구 충돌은 나쁜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심대윤은 <복리전서>에서 “사람들과 더불어 이익을 추구하는 것”, 즉 여인동리(與人同利)가 지공(至公)의 도(道)라고 했다. 남의 이해와 내 이해를 저울질하여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동리지공(同利至公)의 도(道)라는 것이다. 이욕을 추구하는 것이 본성이지만, 공적(公的)인 관점에서 한계를 제시한 것이다. 쟁리(爭利)가 아닌 동리(同利)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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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운문초(규장각제공)

선(善)과 악(惡)의 이분법적 사고에도 다른 견해를 취했다. “선이 지나치거나 부족한 경우에 악이 되니, 선과 악은 근본이 하나다.” “선과 이익이 지나치고 부족하게 되는 것은 자기 한 몸을 위해 사사롭기 때문이다. 만약 남에게 공변되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려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다.”(「善惡一本論」) 선도 지나치거나 부족하면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이욕 추구도 적정하면 선이 되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악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지나치는지의 여부는 공(公)이 기준이 되었다. 

 

복을 바라고 이로움을 얻으려 할 사람들을 향해 심대윤은 말했다. “무릇 선(善)을 행하는 사람에게 하늘이 복(福)으로 응답하고 사람이 이(利)로 갚아주는 것은, 하늘과 사람이 사적으로 사랑을 베풀기 때문이 아니요, 그의 행동이 저절로 복과 이를 부르는 것이다.” 결론으로 이렇게 마무리했다. “천하의 하고자 하는 바는 함께 이룰[同濟] 것이요, 혼자 취해서는[獨取] 안 된다. 함께 이루는 것은 공(公)이요, 혼자 취하는 것은 사(私)다. 

 

무릇 남들과 함께 선을 행하지 못하고 혼자 취하는 것은 허명(虛名)이지 실명(實名)이 아니다. 남들과 함께 이로움을 구하지 못하고 혼자 취하는 것은 편협한 이로움[偏利]이지 온전한 이로움[全利]이 아니어서 반드시 사람들은 원망하고 하늘을 노여워할 것이다. 이는 반드시 망하는 도(道)요, 함께 이루는 것이 반드시 흥하는 도다. 반드시 망하는 도는 선하지 않고, 반드시 흥하는 도는 선하다.”(「驗實篇」)

 

이러한 주장은 증조부가 화를 입고 집안이 불행에 빠진 것을 상기해보면, 의외의 논변이다. 이에 관해 심대윤은 필시 후세에 사람들이 모함을 입은 것을 알아줄 것이라 부기했다.   

 

심대윤이 이욕에 대해 획기적 접근을 하고 유가의 이분법적 틀을 극복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그의 사고체계는 기본적으로 유가적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의 저서는 주로 경학 관련이지만, <정법수록(政法隨錄)> 등의 경세서도 있다. 유형원·정약용 등 조선후기 경세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주례(周禮)>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독서와 노동을 병행했던 그의 사상은 서민적이다. 복을 구하고 명분과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긍정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읽힌다. 스스로 밝힌 공부 방법에서 장구(章句)의 의미 해석에 그치지 말고 실리(實理)와 실득(實得)에 치력(致力)할 것을 강조했다. 

 

주자학에 비판적인 그의 학문은 조선적 양명학의 계보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소론 집안에서 은밀히 양명학을 전수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사상은 서세동점의 시기에 서학에 대항하는 면이 있다. 그의 사상은 최근 학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일찍이 위당 정인보는 그를 19세기 사상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로 꼽았다. 

 

“근세의 학자로서 이익과 안정복은 역사학으로 빼어났고, 정약용은 정치학으로 뛰어났다. 그러나 심대윤은 적막한 가운데 외롭게 지켜, 명성이 파묻히게 되었다. 그러나 공정하게 논평하건대 정밀한 뜻과 빼어난 해석이 여러 학설 가운데에서 빼어났으니 삼한(三韓‧조선) 경학의 밝은 빛이라 하겠다.”

글_김태희 다산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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