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부산 일본총영사관 앞에 설치된 위안부소녀상 문제로 한·일 관계에 또다시 파란이 일고 있다. 과연 한일관계가 과거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사실 한일관계만이 아니라 과거사에 발목이 잡혀 상호 협력의 이익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양국관계들이 적지 않다. 우리에게도 인기 많은 아름다운 나라 크로아티아와 그 이웃나라 세르비아의 관계도 그중 하나다. 이 두 나라 관계는 참으로 곡절이 많다. 두 민족은 남슬라브 형제족으로 언어도 거의 같으나, 크로아티아는 로마자를, 세르비아는 키릴 문자를 쓴다. 말로는 서로 통하나, 문자로는 통하지 않는다. 종교적으로 크로아티아는 가톨릭, 세르비아는 정교의 전통이 강하다. 15세기경 크로아티아는 합스부르크 제국, 세르비아는 터키 제국의 지배를 받는다.당시 이슬람 터키의 지배를 피해,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크로아티아 남부에 거주하게 된다. 세르비아는 터키가 쇠퇴하면서 1878년 왕국으로 독립하고, 1차 대전 후 합스부르크와 터키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남슬라브 군소국들이 세르비아를 맹주로 하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통합한다. 이 왕국은 2차 대전시 독일과 이태리에 분할 점령되었고, 이때 빨치산 운동을 펼친 티토(Tito)에 의해 1945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공화국 연방으로 재건된다. 유고연방은 연방권력을 장악한 세르비아 공화국과 자치를 요구하는 나머지 5개 공화국들 간 갈등을 내포하고 있었다. 강력한 리더십으로 통치해온 티토 대통령이 1980년 서거하자, 연방은 붕괴과정을 겪는다. 1991년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는 유고연방군을 움직여 이를 저지하려 한다. 연방군은 유럽의 진주라 불리는 ‘두브로브니크’를 무차별 포격하고,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계 반군을 지원하여 독립을 선언케 한다. 이 반군은 크로아티아 국토의 1/3을 차지하고, 동 지역내 크로아티아계 주민에 대한 인종청소를 자행한다.사망자와 행불자는 1만2천명, 반군지역에서 떠난 난민은 20여만 명으로 그 피해는 처참했다. 1995년 크로아티아는 서방의 지원으로 반군을 진압하고 국토를 회복한다. 이때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자의 또는 타의로 크로아티아를 대탈출하여, 당시 크로아티아 인구의 12%에 달했던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이제는 4% 남짓에 불과할 정도다. 실질적인 인종청소가 이루어진 셈이다. 종전 후 1996년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는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관계를 점차 개선해왔지만, 과거사의 질곡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의 전쟁책임·대량학살 책임과 사죄를,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계 주민 학살과 추방 책임을 요구하며, 법리 논쟁과 감정 충돌을 반복하고 있다. 서로 대량살상 책임의 원죄를 상대에 전가하며 사죄를 거부하는 악순환. 이 배경에는 피해의식과 결합된 포퓰리즘도 크게 작용한다.그래서 2014년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과거사 문제의 성격은 논리적·이성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다. 문제의 해결은 결국 정치적 리더십에 달려 있다. 그러나 정치 리더는 과거사 해결 결단에 대한 국민의 반응을 두려워한다”라고. 과거사 문제 해결은 이래서 어렵다. 서형원 前 주크로아티아대사
오피니언
서형원
2017-01-17 2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