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영국의 ‘하드 브렉시트’와 헨리 8세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Brexit) 법안이 2월8일 하원에서 통과됐다. 이 법안은 리스본 조약 50조에 따라 EU 측에 영국의 탈퇴 의사를 공식 통보하고, Brexit 협상 권한을 총리에게 부여하는 내용이다. 이로써 지난해 6월 영국 국민들이 국민투표에서 51.9%의 찬성을 한 영국의 EU 탈퇴가 가시화되고 있다.영국의 테리사 메이 총리는 각종 연설을 통해 영국의 EU 탈퇴가 엉거주춤한 형태가 아닌 분명한 탈퇴가 될 것이라고 언급하여 Hard Brexit(강경 탈퇴)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Hard Brexit 는 국민투표가 실시되기 1년 전인 2015년 2월 HSBC(홍콩상하이은행) 보고서에 처음 등장한 개념으로 ‘위험성이 높고,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EU와의 단일시장협정(재화ㆍ서비스ㆍ자본과 인간의 자유이동), 공동관세 등 모든 관계를 청산하는 것이 Hard Brexit 이고, 이 중 일정부분을 유지하는 것이 Soft Brexit(온건 탈퇴)라고 보면 된다. 영국과 EU 간 관계단절의 강경, 온건 여부에 따른 것이다. EU 내 일부 회원국의 입장에서는 영국이 EU의 재정분담금을 일정부분 환수받고, 영어라는 소통 수단의 강점을 내세워 EU 내 많은 공무원을 파견하는 등 많은 혜택을 보면서도 화폐동맹에 가입하지 않고, 공동외교 안보정책 결정 시 미국을 편 드는 모습을 보이는 등 EU 정책에 빈번히 제동을 거는 것이 눈엣가시였다. EU 회원국들은 떠나는 영국에 대해 애증이 교차하는 심정일 것이다. 영국입장에서는 런던 금융시장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금융서비스의 자유를 확보하고, 국경통제를 통한 이민 유입을 억제하는 등 자국에 유리한 협상을 원한다. 하지만 EU는 영국-EU 간의 새로운 협정을 영국이 원하는 것을 고르듯이(cherry picking) 협상하는 것에 반대 입장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양측은 협상을 시작하기도 이전부터 기 싸움을 하고 있는 양상이다. 양측 간의 협상은 리스본 조약 50조에 따라 향후 2년간 진행될 예정이다. 2년 이내 협상이 완료되지 않으면 첫째, 자동 탈퇴, 둘째 협상기간 연장의 방법이 있다. EU 역사상 유례가 없는 탈퇴 협상에서 2년 이내에 EU 27개 회원국을 만족시키는 협상을 완료하는 것은 지난한 일로 보인다. 한때는 전 세계의 약 4분의 1을 통치하던 영국이 다시 섬으로 회귀하는 것 같다. 영국은 과거에도 유럽 대륙과의 전면적인 단절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6명의 왕비와 결혼한 왕으로 유명한 헨리 8세(Henry VIII, 재위기간 1509~1547) 영국 국왕은 부인이었던 캐서린(Catherine) 왕비와 이혼하고 앤 볼린(Anne boleyn)과 결혼하는 과정에서 그 당시 유럽을 대표하는 교황과 가톨릭의 권위를 부정하고 영국 종교개혁을 통해 성공회를 창설한다. 영국과 유럽과의 관계 단절의 역사를 보면서 문득 칼 마르크스의 말이 떠오른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김상일 道 국제관계대사·前 주시카고 총영사

[세계는 지금] 트럼프 대통령의 만리장성

베이징(北京) 대사관에 근무하면서 달에서도 보인다는 만리장성에 자주 가 볼 수 있어 좋았다. 만리장성은 외국인뿐만이 아니라 중국인도 꼭 가 보아야 할 명소로 여긴다. 베이징 시내에서 멀지 않은 빠다링(八達嶺)에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친필이 비석에 새겨져 있다. ‘만리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훌륭한 사나이가 아니다(不到長城 非好漢)’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그 길이가 만리(萬里)에 이른다고 ‘만리장성’이라고 부르지만 중국에서는 그냥 ‘장성(長城 창청)’이라 하고 영어식 표현도 ‘그레이트 월(Great Wall)’이다. 만리장성은 198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중국의 만리장성이 지구의 반대편에서도 건설될 것 같다. 새로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국경안보 강화를 이유로 멕시코와의 국경 3천144㎞에 국경장벽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한다. 불법 월경 이민자들이 미국인의 고용을 빼앗고 치안을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미국과의 경제격차로 멕시코와 과테말라 등 중남미 사람들이 좀 더 나은 인생을 위해 불법으로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넘는다. 미국의 불법 이민자가 1천100만 명에 이르고 그 절반이 멕시코 출신이다. 전문 브로커는 1인당 7천 달러로 불법 월경과 함께 미국 남부 주요 도시까지 안내해 준다. 돈이 없는 월경자는 내륙의 뜨거운 사막을 넘으면서 독사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기도 하고 해안가의 바다를 통해 건너다가 익사하기도 한다. 멕시코와의 국경 서쪽 끝인 캘리포니아에서 애리조나주까지 1천49㎞는 이미 나무 장벽에 철조망이 쳐져 있고 감시 카메라도 설치되어 있다. 동쪽 방향으로 뉴멕시코 주와 텍사스 주까지 나머지 2천95㎞는 리오 그란데 강을 따라 건설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장벽 건설에 소요될 수십조 원을 멕시코 정부에 부담시킨다고 하여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은 계획된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취소했다. 2천여 년 전 천하를 통일한 중국의 진시황(秦始皇)이 흉노족 등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고 하지만 성벽이 진나라를 지켜주지 못했다. 미국의 만리장성도 같은 운명에 빠질지 모른다. 지난 100년간 인력이 부족한 미국의 경제발전에는 멕시코에서 건너온 불법이민자들의 역할이 컸다. 값싼 노동력이 미국 각지의 농장이나 공장에 고용됐다.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기반의 하나인 텍사스주가 반 이민정책을 내세우지만 위험하고 힘든 이른바 3D 업종은 불법 이민자들에게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불법 이민자의 유입이 줄어들고 기존의 불법 이민자가 추방되면 텍사스 주민들의 불편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의 호언과 달리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과 존 켈리 국토안보장관은 최근 멕시코를 방문하여 불법 이민자의 대규모 추방은 없을 것이고, 불법 이민문제는 멕시코 정부와 긴밀한 협조 아래 해결해 나갈 것이라고 안심시키고 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미국과의 경제 격차가 있는 한 불법 이민이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일방적으로 장벽을 쌓기보다는 선린우호정책과 함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개선하여 이웃 나라를 부유하게 하면 불법 이민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것으로 생각된다. 유주열 前 베이징 총영사·㈔한중투자교역협회자문대사

[세계는 지금] 美 트럼프의 등장은 새로운 국제관계의 서막인가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은 영국의 EU탈퇴와 더불어 앞으로 세계의 정치, 경제적 지형에 커다란 변화의 바람을 촉발시킬 수 있다고 본다. 오는 4월 프랑스 대선에서 EU탈퇴를 공약하는 극우주의정당 지도자 ‘마리르펭’이 승리할 경우 반세계화를 추구하는 변화의 바람은 서방권에서 더욱 드세어질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이전의 미국대통령들이 표명했던 세계의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의 증진을 위한 미국정부의 결의(commitment)는 언급하지 않은 채 미국 우선주의를 강조하였다. 이는 역대 대통령들이 취임사에서 미국 건국이념의 충실한 이행 의지표명을 통해 미국의 정체성과 국민의 통합을 도모하는 전통과 결별한 것이다.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반이민 행정명령이 미국의 헌법 정신을 위배한 것이라고 비판이 비등한 가운데 동 행정명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가 50% 이상일 정도로 높아 이를 둘러싼 미국의 정체성에 관한 논쟁이 가열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러한 트럼프 행정부와도 전통적인 한미 우호협력 관계를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양국 간 논의 중인 사드배치는 북한의 핵위협 대처에 필요한 무기이나 중국이 강력한 반대의사 표시와 함께 다양한 압박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보여 국민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사드배치 문제는 우리의 주권적 결정사항이면서도 미·중의 동아시아지역의 군사적 전략이 교차하는 측면이 있어 이 문제의 해법 양상에 따라 우리의 미·중 관계가 새롭게 정립될 수 있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사드사태에서 우리가 얻는 교훈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고 본다. 첫째, 중국은 우리에게 기회의 나라이나 중국과의 경제, 문화, 관광 협력의 증대는 우리의 중국 의존성을 심화시켜 언젠가는 부메랑이 되어 우리를 억압하는 굴레가 되는 양날의 검이 될 수 있음을 체험하게 된 점이다.둘째, 중국은 우리와 양국 간 현안에서 대화를 통한 협상보다는 힘의 구사를 통해 자국의 입장을 강요하는 전형적인 강대국의 패도주의(覇道主義)를 추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도 중국 정부에게 사드 배치 결정을 친구의 나라에 걸맞게 성의를 갖추어 사전에 양해를 구하는 노력을 충분히 하였는가는 자성할 필요가 있으나 중국은 앞으로도 이와 같은 패도주의적 접근을 우리에게 구사할 개연성이 높다고 본다. 셋째,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우리의 안보를 한·미 동맹을 통해 확보하는 전략은 미국에 신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우리에 대한 미국의 안보공약이 변함없도록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넷째, 한미동맹에 의한 안보 확보 전략에 보완하여 우리가 스스로 주도권을 갖고 구사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추가적인 안보전략의 필요성이다. 이를 위해 남북대화의 재개와 관계증진을 통해 한반도 상황에 대한 우리의 통제능력을 제고하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본다.앞으로 강대국들의 자국 우선주의가 발호하는 새로운 국제 질서가 형성될 수 있음에 비추어 우리의 이익을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국력을 증강시키는 자강노력이 더욱 요망되는 시대에 들어가고 있다고 본다. 신길수 前 주그리스대사

[세계는 지금] 일본의 대미 안보외교와 센카쿠 열도

지난해 11월 대통령 당선자 신분의 트럼프를 만나는 데 이어 지난 10일부터 아시아 정상으로는 처음으로 트럼프 미국대통령과 회담한 아베 일본총리. 트럼프가 일본이 공들였던 TPP(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를 무산시키고 일본의 무역흑자를 비난하는데도 싫은 소리 한번 않고 70억 달러 투자 보따리를 들고 미국을 찾아간 아베총리. 이렇게 아베가 트럼프를 만나 챙기려 했던 것은 안보였다. 안보와 경제를 맞바꿨다는 미일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은 미일 안전보장조약 5조(무력충돌 때 자동개입)의 대상에 센카쿠 열도가 해당한다는데 합의했다. 즉 중국이 센카쿠를 군사 공격하면 미국도 자동으로 방어에 나선다는 것이다. 미일 안전보장조약 5조의 대상지역에 센카쿠를 처음 포함시킨 것은 3년 전인 2014년 미국 오바마 정부 때였다. 센카쿠를 둘러싼 영토문제가 무력충돌 위기를 우려할 정도로 분쟁화 되자, 국가안보를 미일 동맹에 의존하는 일본이 미국을 설득해 센카쿠 방위공약을 받아냈던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가 지난해 대선 기간 중 미국의 전통적 동맹관계를 무시하는 말들을 쏟아내자 초조해진 일본은 트럼프 신정부로부터 같은 공약을 확인받는 것이 절실했고, 그래서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지난 3일 매티스 신임 미 국방장관이 도쿄를 방문했을 때 미국의 방위의무는 센카쿠에도 적용된다고 약속했다. 그래도 미덥지 못한 일본은 아베 총리가 미국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센카쿠 방위 공약을 재확인받은 것이다. 오키나와와 대만 사이에 8개 무인도와 암초로 이루어진 열도. 이 센카쿠는 일본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2010년대 들어 공세적인 해상활동으로 현상변경을 시도하면서 일본은 수세적인 입장에 처하게 된다. 일본은 1895년 1월 14일 센카쿠가 주인 없는 땅임을 확인했다면서 오키나와현에 정식 편입했고, 2차 대전 후 오키나와현은 오랫동안 미국의 시정권 하에 있다가 1972년 일본에 반환되었다. 그래서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중국은 1895년 청일전쟁 와중에 일본제국이 강제로 일본에 편입했기 때문에 당연히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1969년 센카쿠 부근에 대규모의 석유·가스 매장 사실이 알려지면서, 중국은 영유권 주장을 점차 강화해왔다. 중국은 현상변경을 추구하는 도전자로서 90년대 중반부터 센카쿠 주변에서 영해침범 등 해양활동을 시도했다. 일본 정부는 센카쿠의 분쟁지역화를 막기 위해 조용한 외교로 대응했다. 그러나 일본 우익세력들은 센카쿠에 상륙해 영토선언을 하고 조형물을 설치하곤 했다. 이에 중국이 더 강하게 대응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특히 대표적 우익정치인 이시하라 동경도지사가 2011년 4월 센카쿠를 민간소유자로부터 매입하여 각종 조형물을 설치할 계획을 발표한 것은 결정적이었다. 일본 정부가 상황통제를 위해 그해 11월 국유화를 단행했으나, 중국의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센카쿠 해역에서 중국 공선(公船)의 활동은 국유화 이전에 연간 0.3건이던 것이 그 이후에는 연간 3~5건으로 급증했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센카쿠 열도를 안정적으로 보유·관리하는 것이 더 어려워지고 미국의 방위공약에 더욱 의존하게 된 것이다. 서형원 前 주크로아티아대사

[세계는 지금] 유럽 포퓰리즘의 해결 방법은

2017년에는 유럽의 장래를 결정하는 많은 선거가 치러진다. 특히 프랑스의 4월 대통령선거는 영국에 이어 EU의 장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선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프랑스 국민의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분노와 실망감이 포퓰리즘 극우 정당인 National Front의 지지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National Front 당의 당수인 Marine Le Pen은 당선될 경우 프랑스의 EU의 탈퇴(Frexit)를 언급하고 있다. 프랑스가 만약 EU를 탈퇴한다면 이는 프랑스의 EU 내 위상 및 창립회원국인 점을 감안할 때 영국의 EU 탈퇴보다 더욱 큰 영향을 유럽에 미칠 것은 명확해 보인다. 유럽 정치가 다시 한번 중대한 전환점의 국면에 서 있는 것 같다. 유럽의 포퓰리즘 현상은 영국의 Brexit, 미국의 Trump 대통령 당선 이후 더욱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양상이다. 유럽 내 핀란드, 헝가리,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노르웨이, 스위스 등에서는 우파 포퓰리즘 정당들이 정권을 잡고 있으며, 정권을 잡지는 못했지만 영국의 UKIP, 프랑스의 National Front, 독일의 Alternative for Deutschland, 오스트리아의 Freedom party 등은 과거에 볼 수 없는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다. 또한 남유럽에서는 포퓰리즘을 내세운 좌파정권이 스페인과 그리스 등에서 선전하고 있다. 유럽에 포퓰리즘이 득세하는 현상은 왜 생긴 걸까? 유럽 시민들은 1945년 이래 유럽에서 평화와 안정 그리고 경제적 발전을 위해 자국의 주권과 권한을 제한하면서 유럽 공동체를 창립하고 발전시켜 왔다. 유럽 내 시민들에게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술한 것처럼 일정한 성과가 있어서 참아오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그런데 유럽시민들이 자신들을 희생하면서 지키고자 했던 안정이 최근 아프리카와 중동의 일련의 불안정한 사태로 인해 발생한 난민들의 유럽 내 유입이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도전을 받게 되고, 또한 설상가상으로 경제적 침체까지 더해지자 유럽 시민들의 EU에 대한 기대는 실망으로 또한 분노로 변하고 말았다.특히 남부 유럽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과 남부 프랑스 지역에서는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EU의 성과와 효용성에 대해 강하게 의문을 제기하고 나아가서 EU를 희생양으로 하는 경향이 농후해졌다. 폴 케네디는 ‘강대국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이란 저서에서 “21세기가 시작되면서 대부분의 통치기구(국가)에 요구되는 사항이 3가지 있는데 이는 국가안보, 국민의 사회적·경제적 욕구 충족 그리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이라고 설명하고 있다.지금 보이고 있는 전 세계적인 포퓰리즘은 국가가 국민의 사회적·경제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함으로써 이에 대한 국민의 반감과 불만이 표출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국민의 관심을 좀 더 귀담아듣고 국민이 행복한 국가가 유럽 포퓰리즘에 대한 답이다. 김상일 道 국제관계대사·前 주시카고 총영사

[세계는 지금] 정유재란의 재조명

설 명절을 지나면서 정유년(丁酉年)을 새삼 느낀다. 금년은 12지 간지로 60년 만에 찾아오는 정유년으로 420년 전 정유재란(1597)의 7주갑이 되는 해이다. 임진왜란(1592~1596)은 잘 알려져 있지만 정유재란(1597~1598)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일부로 생각하여 관심이 많지 않은 것이 아쉽다. 임진왜란이 일본군에 의해 침략을 당한 전쟁이라면, 정유재란은 일본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낸 승리의 전쟁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은 모두 정유재란 중에 일어난 전쟁이다. 임진왜란이 경상도 전쟁이라면 정유재란은 전라도(호남) 전쟁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정권의 일본군은 임진왜란의 종전협상이 결렬됨에 따라 1597년 재차 조선을 침공하였다. 도요토미는 반드시 전라도를 점령 호남지방을 장악할 것을 명령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이므로 “만약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을 것이다(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신념으로 바다에서 일본군의 호남 진입을 막았다. 조선을 재침한 일본은 정보전을 통해 조선 조정을 교란시켜 공포의 대상이었던 이순신 장군을 파직시키는 데 성공한다. 일본군은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을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대패시키고 일거에 남해안의 제해권을 확보하였다. 일본군은 계획대로 남원과 전주성을 함락 호남을 점령하였으나 충청도 직산에서 조명연합군에 의해 북상이 저지되었다. 전쟁이 뜻대로 안 되자 일본군은 전라도를 중심으로 양민을 납치 학살하고 전승의 증거로 코와 귀를 베어 가는 등 만행을 자행하였다. 일본 교토(京都)의 귀무덤(耳塚)은 대부분 전라도에서 베어 온 코와 귀를 묻은 곳이라고 한다. 일본군의 만행으로 정유재란(丁酉災亂)으로도 부르고 있다. 1597년 9월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 장군은 명량(鳴梁)해전에서 소수의 배로 133척의 적선을 막아내는 기적적인 승리로 일본군을 다시 공포에 떨게 하였다. 사실 선조는 원균에 의해 수군이 궤멸한 것을 전해 듣고 수군의 해체를 지시했으나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라는 유명한 장계로 선조를 설득했다. 이순신 장군은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必死卽生 必生卽死)”라는 리더십과 민초들의 활약으로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1598년 8월 도요토미의 사망으로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의 철수 명령이 떨어진다. 순천 왜성에서 철군을 준비 중이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군을 봉쇄하고 있던 이순신 장군은 고니시군을 엄호하러 광양만으로 들어오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군을 노량(露梁)에서 맞이하여 대패시켰다. “전황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戰方急 愼勿言我死)”라는 유언을 남기고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금년 정유년은 국내외 상황이 어려운 한 해가 될 것 같다.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일본의 아베(安倍晉三) 총리 등 근육질의 지도자로 가득 찬 동아시아의 지정학은 약육강식의 정글로 변해 가고 있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의 국내외 정세 속에서 나라는 탄핵 정국과 대선 정국으로 분열되고 있다. 정유재란을 재조명하여 420년 전 국난 극복의 역사에서 오늘의 내우외환(內憂外患) 위기를 벗어나는 지혜를 찾아야 할 것 같다. 유주열 前 베이징 총영사·㈔한중투자교역협회자문대사

[세계는 지금] 부산 소녀상과 한일 관계

연초부터 부산 소녀상 설치를 둘러싸고 한ㆍ일 관계가 경색돼 안타깝다. 금번 사태의 원인은 양국 정부가 작년 12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 미래를 지향하는 대국적 관점에서 합의를 도출하였으나, 불행히도 정부 간 합의가 위안부 문제를 종식하기에는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과가 불완전한 내용으로 되어 있는 점이다. 우려되는 것은 일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 앞으로도 한국 측이 희망하는 수준의 진정성이 담긴 사과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며, 한국의 여론도 2016년 12월 정부 간 합의에 관해 비판적 시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금번과 같은 합의 이행에 관한 갈등은 구조화돼 있다고 보인다. 양국정부는 12월 합의에 관해 이러한 구조화된 갈등이 양국 관계의 전반적 악화로 발전되지 않도록 관리할 공동책임이 있다. 특히, 일 정부가 평화치유재단 출연금 10억 엔의 제공에 상응하여 우리 정부에게 소녀상의 철거를 요구하는 것은 문제점이 있다고 본다. 첫째, 양측간 합의 발표문 안에 비추어 일측 요구는 일 측만의 일방적 주장임에 불과하다고 본다. 소녀상 문안은 외교협상적 관점에서 본다면 한ㆍ일 간의 입장 차이가 매우 커 합의도달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타결을 도모키 위해 소위 창조적 모호성(creative ambiguity)에 의존한 것으로 보인다. 일 정부는 합의 후 소녀상 철거에 관한 당위성을 강조하였고, 일 언론은 정부 간 마치 이면 합의가 있는 것처럼 시사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둘째, 신의 성실의 원칙에서도, 부산 소녀상 설치 문제는 지역주민들의 의사를 반영한 지방자치 정부의 정치적 결정으로서 지방분권 원칙상 중앙정부의 개입 여지는 제한적이다. 더욱이 국내적으로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의 부재에 관해 여론이 비등한 상황에서 한국 정부의 운신 폭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셋째, 일 정부가 부산소녀상 설치를 양국 간 외교문제로 갈등 수위를 높여가는 것은 일 정부에게 자충수가 되는 측면이 있다. 양국 간 갈등 상황이 고조되어 세계 언론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끌게 될 경우 일본이 감추고 싶어하는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세계에 재조명되는 결과로 귀결될 수 있음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일 정부는 진정성 있는 사과 없이는 12월 합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결과는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 정부와는 달리 일본 내 양심적인 지식인과 시민단체들은 소녀상의 철거는 일본의 성의 있는 사과로 한국민의 마음이 움직여진 후에야 가능하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일본 내 소수 양심세력의 견해는 일본 사회의 우익적 역사관과 윤리관에 변화를 가져오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나 앞으로 계속 성장하여 언젠가는 일본사회에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를 가져본다. 일본 양심세력이 주류사회로 확대되어 일본인적이 아닌 인류 공동의 역사관을 수용할 때 진정한 일본의 근대화가 완결된다고 보며, 그때까지는 한ㆍ일 간 과거사는 최종적 해결이 어렵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과거사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인내심을 갖고 한ㆍ일 관계를 냉철하게 이끌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신길수 前 주그리스 대사

[세계는 지금] 과거사 함정에 빠진 이웃나라 관계

최근 부산 일본총영사관 앞에 설치된 위안부소녀상 문제로 한·일 관계에 또다시 파란이 일고 있다. 과연 한일관계가 과거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사실 한일관계만이 아니라 과거사에 발목이 잡혀 상호 협력의 이익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양국관계들이 적지 않다. 우리에게도 인기 많은 아름다운 나라 크로아티아와 그 이웃나라 세르비아의 관계도 그중 하나다. 이 두 나라 관계는 참으로 곡절이 많다. 두 민족은 남슬라브 형제족으로 언어도 거의 같으나, 크로아티아는 로마자를, 세르비아는 키릴 문자를 쓴다. 말로는 서로 통하나, 문자로는 통하지 않는다. 종교적으로 크로아티아는 가톨릭, 세르비아는 정교의 전통이 강하다. 15세기경 크로아티아는 합스부르크 제국, 세르비아는 터키 제국의 지배를 받는다.당시 이슬람 터키의 지배를 피해,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크로아티아 남부에 거주하게 된다. 세르비아는 터키가 쇠퇴하면서 1878년 왕국으로 독립하고, 1차 대전 후 합스부르크와 터키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남슬라브 군소국들이 세르비아를 맹주로 하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통합한다. 이 왕국은 2차 대전시 독일과 이태리에 분할 점령되었고, 이때 빨치산 운동을 펼친 티토(Tito)에 의해 1945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공화국 연방으로 재건된다. 유고연방은 연방권력을 장악한 세르비아 공화국과 자치를 요구하는 나머지 5개 공화국들 간 갈등을 내포하고 있었다. 강력한 리더십으로 통치해온 티토 대통령이 1980년 서거하자, 연방은 붕괴과정을 겪는다. 1991년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는 유고연방군을 움직여 이를 저지하려 한다. 연방군은 유럽의 진주라 불리는 ‘두브로브니크’를 무차별 포격하고,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계 반군을 지원하여 독립을 선언케 한다. 이 반군은 크로아티아 국토의 1/3을 차지하고, 동 지역내 크로아티아계 주민에 대한 인종청소를 자행한다.사망자와 행불자는 1만2천명, 반군지역에서 떠난 난민은 20여만 명으로 그 피해는 처참했다. 1995년 크로아티아는 서방의 지원으로 반군을 진압하고 국토를 회복한다. 이때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자의 또는 타의로 크로아티아를 대탈출하여, 당시 크로아티아 인구의 12%에 달했던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이제는 4% 남짓에 불과할 정도다. 실질적인 인종청소가 이루어진 셈이다. 종전 후 1996년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는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관계를 점차 개선해왔지만, 과거사의 질곡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의 전쟁책임·대량학살 책임과 사죄를,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계 주민 학살과 추방 책임을 요구하며, 법리 논쟁과 감정 충돌을 반복하고 있다. 서로 대량살상 책임의 원죄를 상대에 전가하며 사죄를 거부하는 악순환. 이 배경에는 피해의식과 결합된 포퓰리즘도 크게 작용한다.그래서 2014년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과거사 문제의 성격은 논리적·이성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다. 문제의 해결은 결국 정치적 리더십에 달려 있다. 그러나 정치 리더는 과거사 해결 결단에 대한 국민의 반응을 두려워한다”라고. 과거사 문제 해결은 이래서 어렵다. 서형원 前 주크로아티아대사

[세계는 지금] 선물 뭐가 좋을까

요즘 공무원들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김영란법의 시행으로 인해 연말연시 선물, 구정 선물, 승진 등 축하 선물 관련해서 많은 고민과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우리사회가 맑아진다는 의미에서 기쁘다. 다만 이로 인해 우리 중소기업이나 지역경제에 주름이 가지 않길 바란다. 필자가 유럽 근무 당시에 전해 들은 선물 관련 에피소드가 있다. 영국 처칠 수상이 와인을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어 런던에 주재하는 각국 대사들은 자국의 와인을 연말연시 선물로 수상실에 보냈다고 한다. 어느 날 외교단 리셉션에 참석한 처칠 수상이 영국주재 이탈리아 대사에게 다가와 보내준 와인이 좋았다고 감사표시를 했다. 이탈리아 대사는 예전과 같은 와인을 선물로 보냈는데 왜 그럴까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연유를 알아보았다. 사실인즉 처칠 수상이 언급한 와인은 베가 시실리아(Vega scilia)라는 스페인에서 생산한 와인으로 스페인 대사가 선물한 것이었다. 처칠 수상이 와인 이름에 시실리아가 들어가 있어 착각한 것이다. 그 이후 베가 시실리아는 명품와인으로 더욱 명성을 높이고 있다. 선물의 유래는 어디에서 시작했을까?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필자는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황금, 유황, 몰약을 선물한 것이 가장 오랜 선물의 유래가 아닐까 생각한다. 선물 관련해서 재미있는 과거 경험을 몇 가지 더 소개한다. 이명박 대통령 당시 일이다. 한미 정상이 2008년 4월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서 처음 회동할 때 부시 대통령에 대한 선물을 어떤 것으로 할지에 대해 한국 참모진들은 고민이 많았다. 그렇게 고민 끝에 고른 선물로 고려시대 전통 활인 각궁을 부시 대통령에게 그리고 백자 커피잔 세트를 로라 여사에게 각각 선물했다. 하지만 그 당시 선물의 백미는 다름 아닌 부시 대통령 애완견인 ‘바니’에게 개 목걸이를 선물한 것이다.로라 부시여사가 상당히 흡족해했다고 한다. 당시 관계자에 따르면 개 목걸이를 국내에서 구입할 수 없어서 워싱턴에서 구입해서 준비했다고 한다. 또 하나의 경우는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2009년 11월 방한했을 당시 선물 선정과 관련된 에피소드이다.고민 끝에 결국 태권도복을 준비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과거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시절 태권도를 즐겨 배웠던 점에 착안해 태권도복과 명예 유단자 증서를 선물로 증정했는데 선물을 받은 오바마 대통령이 환하게 웃으면서 태권도의 정권 찌르기 자세를 시현해 보였다. 그 사진이 다음날 온통 신문을 장식했던 기억이 난다. 연말연시가 되면 선물과 관련해서 생각나는 소설이 있다.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단편소설이다. 가난한 부부인 짐과 델라는 서로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위해 자신들이 아끼던 시계를 팔아 머리빗을, 그리고 긴 머리채를 잘라 시곗줄을 각각 선물한다.선물의 효용성은 없어졌지만 서로는 상대방의 마음에 감사하고 서로 행복해한다는 내용이다. 선물에는 주는 사람의 정성과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한다. 이런 선물 하나가 상대방을 감동시키면 우리도 함께 행복해진다. 김상일 道 국제관계대사·前 주시카고 총영사

[세계는 지금] 정유년의 동아시아 체스판

새해가 밝았으나 나라 안팎은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고 있다. 어느 외지에서는 “2017년은 혁명의 기운이 감돈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초불확실성(Hyper-Uncertainty)의 한 해가 예고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됨으로 강대국이 힘을 내세우는 이른바 ‘스트롱맨(strong man)’시대가 열렸다고 한다. 스트롱맨들은 트럼프의 ‘미국우선주의(America First)’처럼 각자 자국 우선주의를 내 세우고 있다. 차이잉원(蔡英文) 타이완 총통과 전화 한 통으로 ‘하나의 중국 원칙(One China Policy)‘을 협상카드로 만들어 북핵문제 등 중국의 협조를 끌어내려는 트럼프 대통령, 핵능력 강화를 주장하여 핵 군비경쟁을 점화시킨 세계 영향력 1위의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일대일로(一帶一路)와 남중국해 영유권 강화 등 ‘중국의 꿈(中國夢)’을 이루려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그리고 새로운 국가 즉 보통국가를 만들어 일본을 세계 한복판에서 빛나게 하겠다는 아베신조(安倍晉三) 일본 총리 등 스트롱맨들은 과거 조국의 영광을 살리는 각자의 꿈을 찾아 도전하고 있다. 2017년도는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역학관계가 크게 흔들리고 있음이 감지된다. 나는 동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국제관계가 심상치 않게 전개되고 있음을 보고 지난해 말 평소의 생각을 정리하여 ‘동아시아 체스판이 흔들린다’는 졸저를 출간한 바 있다. 서양장기인 체스판은 국제정치학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교수의 저서 ‘거대한 체스판(Grand Chessboard)’을 원용한 것이다.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등 4강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운명이 100 여 년 전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체스판 위에 놓여 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시험발사를 포함 핵과 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과시하는 광인 ‘크레이지맨’ 김정은을 머리에 이고, 주변 4강의 스트롱맨들에 낀 한국은 국력을 모아야 할 때다. 그러나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정국에 이은 조기 대선으로 우리는 리더십의 공백에다 국력마저 분산되고 있다. 내우외환(內憂外患)이 따로 없다. 트럼프는 푸틴과 오랜 친구사이인 렉스 틸러슨 엑손 모빌 최고경영자를 외교 수장인 국무장관으로 내정하여 오바마 정권 시기의 중러 밀월관계를 이간 시키려 한다. 트럼프의 친러 반중 색채로 볼 때 금년 한해 공격적 대중외교가 예상되어 미중관계가 어느 때보다 험난하리라 예상된다. 미국을 겨냥하여 영토주권과 해양권익을 결연히 수호하겠다는 시진핑 주석의 2기 체제를 결정하는 19차 공산당 대회가 금년 하반기에 예정되어 있다. 1인 지배를 강화하려는 시진핑 주석으로서도 양보할 수 없는 한 해가 될 것 같다. 트럼프의 당선으로 촉발된 스트롱맨들의 합종연횡으로 동아시아의 체스판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자신의 나침반(compass)을 만들어 국가전략을 추진하고 방향을 잡아야 한다. 유주열 前 베이징 총영사·㈔한중투자교역협회자문대사

[세계는 지금] 트럼프 美대통령과 한·미관계

트럼프 당선자가 전세계에 던지는 메시지는 변화 그리고 불확실성이다. 미 정계의 아웃사이더인 트럼프 신정부의 주요정책 방향은 과거의 공화당 정부와는 달리 당 강령보다는 대통령의 개성에 의해 결정되는 변화된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 변화의 핵심은 트럼프 당선인이 표방한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미국우선주의(America first)이다. 트럼프 당선자의 대외정책 기조에 관해 미국우선주의는 외교는 신고립주의 그리고 통상은 보호무역주의로 나타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으나 신고립주의는 외교사안에 따라 미국의 이익 증진에 필요한 경우는 오히려 적극적 개입 정책을 구사할 수도 있다고 보인다. 즉 미국의 이익에 관한 판단 여하에 따라 사안별로 신고립주의적(non-engagement) 또는 적극적 개입(active engagement) 태도를 보일 것으로 생각된다. 최근 미ㆍ대만 정상통화로 유발된 하나의 중국 원칙에 관한 미ㆍ중간 긴장 조성이 트럼프 당선인이 보여준 미국우선주의 추구에 따른 외교적 사례이다. 미국우선주의는 한ㆍ미 관계에 있어서도 북한 핵위기 대처를 위한 양국 간 공조, 주한미군 경비 분담문제, 그리고 한ㆍ미 FTA 유지 등의 현안을 불확실성의 영역에 놓이게 한다. 북한 핵에 대처하는 트럼프 신정부의 선택지는 1. 현상유지(UN 결의안을 중심으로 한 대북제재체제 유지) 2. 신고립주의(북핵문제의 중국의 적극적 개입 책임 강조 및 미국의 개입축소) 3. 적극개입(북한과의 직접대화 또는 군사적 강경대응) 등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미 신정부의 선택은 북한 핵 문제에 관한 미국의 이익을 어떻게 판단할 것이냐가 관건이며 명분적 측면과 함께 실리적 측면도 보다 많이 고려될 가능성이 있다. 우리로서는 중국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한 북핵문제 해결은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상 불확실한 것으로 보이고, 또한 우리 자체의 핵무장은 국제법과 한미동맹 차원에서 바람직하지 않음을 고려할 때 미국의 핵 확장 억제 전략으로 공조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으로 보인다. 북한 핵위협에 대처하는 방어적 사드 배치는 한·미 간 합의대로 추진하되 중국 측에 배치의 불가피성을 설득하여야 할 것이다. 트럼프 당선자는 한미동맹은 양국의 귀중한 자산이며 변함없이 굳건히 유지될 것임을 정상통화에서 천명하였다. 6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한미동맹은 안보적, 가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의 공유를 바탕으로 앞으로도 계속 발전해 나갈 것이다. 한미동맹의 상징인 주한미군 유지경비는 한미 양국의 안보적 이해관계에 따라 적절히 공동 분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ㆍ미자유무역협정(FTA)은 양국의 산업발전과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고 있다. 동협정은 양국 간 상품과 서비스의 교역 전 분야에 걸쳐 상호이익의 균형을 맞춰 합의된 내용이다. 협정의 일방이 협정내용의 수정을 제안한다면, 양측은 쌍방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새로운 이익 균형점을 모색하여 상호 윈윈하는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양국은 동맹관계를 대내외적 변화에 따라 진화시켜 나갈 수 있는 상호 간 신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길수 前 주그리스대사

[세계는 지금] 달리는 이웃 일본, 아베의 리더십

이달 초 오랜만에 일본 도쿄를 찾았다. 새로 개발되거나 단장된 도심지역의 밤거리는 화려한 일루미네이션으로 환상적이었다. 상점가들은 붐비고 사람들 표정도 밝아 보였다. 민심을 말한다는 택시기사에게 “아베노믹스(아베 총리의 경제정책)로 경제가 좋아졌나요?”라고 말을 건넸더니 “글쎄, 나랏빚이 많아져 걱정되는 점도 있지만 변화와 활력이 생긴 것은 확실하지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3년 반 전 일본 근무를 마치고 떠날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그때는 “이제 일본은 가망 없어요. 그런데 한국은 대단하네요”라는 말을 흔히 듣곤 했다. 일본은 90년대 이래 ‘잃어버린 20년’의 장기 불황을 겪는 가운데 2011년 미증유의 대지진을 만나, 일본인들의 심리는 결정적 타격을 받은 듯했다. 게다가 정치까지 혼미해 거의 매년 총리가 바뀌는 바람에 국민들이 의지할 국가 리더십도 없었다. 일본의 국제적 위상도 G20 서울 정상회의 후 평가가 높아진 한국에 밀린 듯했다. 그랬던 한국과 일본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지난 4년 사이 무엇이 작용했을까. 정치리더십이 아닌가 싶다. 2012년 12월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즈음 일본에서는 아베 신조 총리가 취임했다. 4년이 지난 지금, 한 자릿수 지지율의 박 대통령과는 달리 아베 총리는 60% 전후의 높은 지지율을 누리고 있다. 아베 총리는 2006년 9월 당시 고이즈미 총리의 후광으로 54세 젊은 나이에 총리가 되었다. 평화헌법 개정 같은 우익정치 아젠다 외에는 정책비전도 모호했고 경륜도 부족했다. 개인적 인연으로 각료들을 발탁해서 ‘친구 내각’으로 조롱당하기도 하고 각료 스캔들도 끊이지 않았다. 건강도 악화되어 결국 1년 만에 하차했고 그의 정치생명은 끝났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5년 후 2012년 12월 그가 총리로 재등장했다. 일본 내 반응은 1차 집권 때처럼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관측이 흔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일본은 아베의 리더십에 놀라게 되었다. 그가 내건 경제성장정책-아베노믹스는 많은 회의와 비판에도 변화의 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강한 리더십으로 집권당은 물론 야당을 제압하며 TPP협상 참여와 농업개혁 등 다양한 정책들을 추진했다. 아베 리더십의 성공요인은 인사와 소통이라고 한다. 당내 유력 경쟁자들을 당·정의 요직에 앉혀 총리를 지지할 수밖에 없는 탕평판을 짠 것이다. 자신의 주변엔 ‘스가’ 관방장관과 같은 실용적이고 균형감 있는 참모들을 두고 그들의 견제와 쓴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또한 저녁에는 각계각층 사람들과 만나 의견을 듣고 허심탄회하게 소통한다. 1차 집권 때 참담하게 물러난 아베에게서 어떻게 이런 리더십이 나왔을까. 2007년 중도 하차 후 그는 재기를 꿈꾸며 제반 국정문제에 대해 각계 전문가들과 꾸준히 토론하며 공부했다는 것이다. 일본 관료들은 아베 총리의 제반 문제에 대한 적확한 이해와 지적 앞에서 얼버무리거나 거짓을 보고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실패를 거울삼아 준비된 총리로 거듭났던 것이다. 서형원 前 주크로아티아 대사

[세계는 지금] 독일 경제가 강한 이유

필자는 최근 경기도지사를 수행하여 독일을 방문한 계기에 한국의 중견기업과 독일의 중견기업이 협력 MOU를 서명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필자가 독일기업 대표로 나온 부사장에게 축하인사를 건네면서 히든 챔피언 기업이라고 했더니 반응이 없어, 부사장이 알아듣지 못한 것으로 이해하고 큰소리를 내어 다시 히든 챔피언이라고 말했더니 부사장은 자사가 이제는 히든 챔피언이 아닌 시장의 대표기업(market leader)이라고 답변해서 머쓱해진 경험이 있다. 독일에는 히든 챔피언 기업이 너무나도 많은 것이다. 필자는 또 다른 기회에 독일 주요 인사들과의 오찬에 참석했다. 오찬에는 슈뢰더 전 총리와 가브리엘 현 독일연방 부총리가 참석했다. 평소 독일이 꾸준한 경제발전을 이어오고 있는 이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필자는 이날 독일 경제가 강한 이유에 대한 가브리엘 부총리의 설명에 관심을 기울였다. 독일 경제의 첫 번째 강점은 중견기업이 강하다는 것이다. 독일은 2012년 기준으로 전 세계 2천734개 히든 챔피언 중 절반인 1천307개를 보유하고 있다. 독일이 히든 챔피언이 많은 이유는 한 분야에서 수십 년간 집중하는 전문성을 보유하고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는 가족 경영의 특징, 창업 초기부터 해외시장 진출을 생각하여 해외에 생산시설을 설립하는 국제화, 꾸준한 연구개발 투자와 연구소와 협업을 통한 기술혁신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또한 중견기업이 대기업과의 종속관계에서 탈피하여 협업하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독일의 대표적인 히든 챔피언은 Brita(정수기), Henckels(주방용 칼), Karl Storz(내시경) 등이 있다. 두 번째 강점은 연구개발 분야가 강하다는 것이다. 독일 기업의 연구개발비 지출은 2012년 기준으로 538억 유로로 세계최고 수준이다. 연구개발 분야 종사자는 약 35만7천명이며, 연간 독일에서 출원되는 특허는 약 6만여 개에 달한다.주요 연구기관으로는 1948년 이래 17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막스프랑크 연구소, 프라운호퍼 연구소, 라이프니츠 연구소, 핼름홀츠 연구소 등이 있다. 이러한 연구소와 대학들이 중견기업들의 요구에 관심을 갖고 중견기업들과 함께 기술연구개발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세 번째 강점은 직업교육의 발달에 있다. 독일은 현장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원화 직업교육’(Duale Berufsausbildung)을 통해 직업교육생 60%를 배출하고 있다. 이원화 직업교육은 총 교육기간 2~3.5년 중 3분의 1은 직업학교에서 이론을 학습하고, 3분의 2는 국가가 인정한 기업에서 실무를 익히는 현장중심 교육방식이다. 취업 준비생은 교육 이수 후에 해당기업에 취업할 기회가 높을 뿐만 아니라, 기업 입장에서도 인력수급난 속에서도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인력을 양성하고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양자에게 모두 win-win 인 것이다. 우리 중소,중견기업들이 한국경제의 성장엔진이 되어 잘 펼쳐진 고속도로를 달리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김상일 경기도 국제관계대사·前 주시카고 총영사

[세계는 지금] 베이징과 도쿄 그리고 서울

한때 베세토라는 말이 유행했다. 베이징-서울-도쿄의 영문 앞글자를 딴 조어이다. 베이징과 도쿄는 우리의 이웃 중국과 일본의 수도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필자는 외교관으로서 우리나라와 과거뿐만이 아니라 현재 그리고 미래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두 나라의 수도에 주재하는 대사관에서 3년 내지 6년간 근무하면서 시대는 다르지만 두 도시의 공통점이 많음을 느꼈다. 첫째, 두 도시는 애초에 수도로서 기능을 할 도시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변방의 군사 도시가 어쩌다 연고를 가진 실력자에 의해 수도로 격상된 경우이다. 실력자라면 베이징의 경우 명 태조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 무용이 뛰어난 주체(朱 후에 영락제)였고 도쿄의 경우 천하를 통일하여 쇼군(將軍 군의 최고 사령관)의 지위에 오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였다. 도쿄는 일본 왕(天皇)이 거주하는 교토(京都)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변방 지역이다. 도쿄는 본래 에도(江戶)라는 이름의 작은 어촌이었으나 도쿠가와에 의해 군사도시로 개척되었다. 베이징도 정치 문화의 중심지 난징(南京)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지역이다. 몽골이 세운 원(元)의 수도를 점령한 주원장은 원의 권토중래를 막기 위해 강력한 군대를 주둔시켰다. 둘째, 두 도시가 변방에 위치하다 보니 전통적인 수도 기능을 가지고 있던 라이벌 도시가 언제라도 수도의 기능을 되찾아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도쿄의 경우 라이벌 도시 교토가 있고 베이징의 경우 난징에 의해 수도가 바뀔 수 있었지만 그 위치의 중요성으로 왕조가 바뀌고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 셋째, 두 도시가 전통적인 정치 사회의 중심지에서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수도의 기능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보이지만 오히려 인근의 미개척 지역을 크게 확장하는 역할을 하였다. 일본의 경우 도쿄에 수도를 정함으로써 도호쿠(東北)지방과 홋카이도(北海道)를 안을 수 있었고 베이징의 경우에는 중국의 둥베이(東北 옛 만주지역)지방을 지배하는데 유리한 위치가 되었다. 일본은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에도 일본 왕의 왕궁이 있는 교토로 돌아가지 않고 도쿠가와 정권의 중심이었던 에도를 ‘동쪽의 서울’이라는 의미의 도쿄(東京)로 이름을 바꾸고 수도로 사용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에도 마오쩌둥(毛澤東)이 난징을 수도로 한 장제스(蔣介石)를 타이완으로 쫓아냈지만 베이핑(北平)으로 불리었던 자신의 근거지를 베이징(北京)으로 이름을 바꾸고 수도로 유지하고 있다. 일본은 우리의 서울을 ‘소우루’로 외래어 표기로 부르고 있지만 중국은 조선시대의 명칭인 한청(漢城 한강 변의 도시)으로 부르고 있었다. 중국과 수교 이후 서울시가 서울이 일개 도시가 아니고 수도라는 의미를 강조하여 유사한 발음과 뜻을 찾아 중국어 표기를 ‘서우얼(首爾)’로 확정했고 중국도 이를 따르고 있다. 베이징과 도쿄 두 도시가 서울에서 북과 동으로 1~2시간의 비행거리에 있다. 한반도가 통일이 되고 나면 한중일 동북아시아의 중심은 북쪽의 서울(北京)도 아니고 동편의 서울(東京)도 아닌, 이름 그대로 진짜 ‘서울’이 될 것으로 기대해 본다. 유주열 前 베이징 총영사·㈔한중투자교역협회자문대사

[세계는 지금] 유럽연합(EU)의 미래

EU의 통합과정은 인간의 상상력이 창조한 이상향(理想鄕)을 추구하는 열정이 현실세계의 제약을 극복해가는 반세기를 넘어 1세기를 향해가는 장편의 드라마이다. 1951년 유럽통합의 대장정을 출범시킨 상상력에는 르네상스,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 그리고 산업혁명을 일으켜 근대 문명을 선도한 유럽의 자부심이 담겨있다. 그러나 최근 유럽통합호(號)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 오디세이가 험난한 지중해에서 고난의 항해를 겪는 것과 같은 형국에 처해 있다. 첫째, EU가입 후에도 파운드화 사용을 고수하면서 유럽통합에 한발만 담그고 있던 영국은 결국 공동의 번영에 대한 신뢰를 철회하고 시장개방과 유럽표준화 대신 영국의 정체성 보존과 노동유입 제한을 선호함으로써 유럽통합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영국의 탈퇴는 오디세이를 항해에서 이탈케 한 사이렌의 미성(美聲)처럼 EU의 해체를 유혹하는 항구적인 원심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둘째, 그리스는 3차례 구제금융(bail-out)의 조건으로 EU채권국들이 제시한 가혹한 재정긴축조치를 이행중에 있으나 IMF의 권고대로 채권국들이 그리스의 대외부채를 현재의 GNP 180% 수준에서 120% 정도로 탕감해주지 않는 한, 그리스의 재정위기와 구제금융의 악순환은 종결될 전망이 희박하다. 그리스정부는 긴축조치를 성실히 이행하여 부채경감 조치를 기대하고 있으나 채권단은 포르투갈 등 다른 구제금융 수혜국들과의 형평성 및 국내 정치적 부담으로 인해 부정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앞으로 그리스의 재정긴축의 성과가 미미하여 구제금융이 실패할 경우 채권국정부들은 그리스가 EU를 탈퇴토록 권고하거나, 그리스정부가 국민에게 더 이상 긴축정책의 고통과 희생을 설득할 수 없게 되어 EU의 자진탈퇴를 고려할 가능성도 있다. 그리스의 경제위기에서 유로화 사용의 위험을 목도한 동구의 신규 회원국들은 자국화폐 사용을 유지한 채 유로존 가입시기에 관해 장기간 결정을 연기하고 있다. 셋째, EU는 시리아 등 중동지역 난민들을 분담 수용하는 난민쿼터제에 합의하여 인도주의적 대의를 추구하고 있으나 EU 및 미국의 시리아 내전에의 적극적인 개입의지가 부족하여 난민의 EU유입 사태는 조속히 해결될 전망이 높지 않다. 앞으로 난민 수용에 관한 회원국들의 국내 정치적 부담이 가중되면 회원국간 이견 봉합이 더욱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다. 난민과 이민문제는 유럽 대륙에 극우 정당이 급격하게 부상하고 있는 배경이 되고 있다. 프랑스, 오스트리아의 극우정당 지도자들은 선거에 임하는 주요 정강으로 반이민과 EU탈퇴를 표방하면서 대중에게 영합하고 있다. 유럽통합의 역사는 지금까지 수차례 위기를 겪을 때마다 오히려 통합이 심화되어 체제가 강화되는 특이한 반전의 양상을 보여왔다고 한다. 금번에도 EU가 그리스 경제위기 와중에서 구조적 결함으로 노출된 재정적 통합을 진전시켜 통합의 복원력을 회복하여 오디세이의 신화(神話)적 항해가 계속될 지가 주목된다. 이는 EU를 모델로 하는 한국, 중국, 일본간 동북아 등 지역협력의 가능성 검토에 귀중한 교훈을 줄 것이다. 신길수 前 주그리스대사

[세계는 지금] 수에즈 운하사건과 EU 탄생 에피소드

영국이 지난 6월23일 국민투표를 통해 EU 탈퇴를 결정했다. 메이(MAY) 영국총리는 내년 봄부터 영국과 EU간 탈퇴 협상을 시작하여 2년 후인 2019년 봄이면 영국의 EU 탈퇴가 현실화될 것으로 전망했다.영국은 1958년 1월1일 출범한 EU의 전신인 EEC(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으나 프랑스의 반대로 가입하지 못하고 있다가 1973년에야 가입하게 된다. 영국이 어렵게 가입했던 EU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민문제로 인해 탈퇴하는 과정을 보면서 과거 수에즈 운하사건으로 인해 EU가 탄생하는 에피소드를 다룬 2006년 7월27일자 더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의 기사를 떠 올려본다. 1956년 7월26일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최된 대중 연설을 통해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한다. 이에 대해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3국은 반대 입장을 공유하면서 수에즈 운하를 침공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영국은 최근까지 점령하고 있던 수에즈 운하를 이집트에 넘겨준 것에 불만이었던 차에 원유 수송 등 중요한 해상통로인 수에즈 운하를 위협하는 이집트를 묵과할 수 없었다. 프랑스는 당시 알제리에서 식민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 아랍의 민족주의 확산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이스라엘은 가지지역으로부터 침투하는 세력들을 방조하는 이집트를 손볼 기회를 찾고 있었다.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1월 대통령선거에서 연임을 앞두고 외국에서의 분규에 휩싸이고 싶지 않고, 또한 영국과 프랑스의 이집트 침공으로 인해 아랍 등 제3세계국가들이 공산주의 진영으로 선회하는 것을 우려하여 3국에 의한 이집트 침공에 반대 입장이었다. 미국의 반대 입장도 불구하고 3국은 사전에 협의한 시나리오에 따라 이스라엘의 공수부대가 10·29 시나이 반도를 침공하고, 이어 영국과 프랑스가 이스라엘과 이집트를 중재한다는 명분으로 수에즈 운하 인근 해안에 상륙한다. 사전에 3국의 비밀 협의를 모르고 있었던 미국은 영국의 IMF 구제금융 지원을 빌미로 영국을 압박하여 영국을 수에즈 운하 군사작전에서 손을 떼게 한다. 1956년 11월6일 저녁 독일 아데나워(Adenaur) 총리와 함께 있던 프랑스 모레(Mollet) 총리는 영국 이든(Eden) 총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전화에 따르면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수에즈 운하에 무력 침공키로 했던 계획을 포기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아데나워 총리는 “향후 프랑스와 영국은 미국에 비견되는 강대국이 절대 될 수 없다.독일은 말할 것도 없다” 라고 말하고 “국제무대에서 유럽국가들이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유럽을 통합하는 것이다. 통합된 유럽이 프랑스의 미국에 대한 복수가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과정을 통해 유럽경제공동체(EEC)의 탄생을 알리는 로마조약(Treaty of Rome)이 바로 다음해인 1957년 3월25일 서명된다. 이후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사건으로 경험한 영국에 대한 배신감으로 인해 1973년까지 영국의 EU 가입에 철저하게 반대한다. 수에즈 운하사건이 EU 탄생의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회상하면서 영국의 EU 탈퇴는 과연 유럽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해진다. 더 나아가 우리 경제와 외교에는 순풍으로 작용할지 역풍으로 작용할지… 지금부터 대비해 나가야 하겠다. 새삼 오늘따라 세계가 더 작게만 보인다. 김상일 道 국제관계대사·前 주시카고총영사

[세계는 지금] 아베 일본총리와 메이지 유신

최근 일본정가(政街)의 주목되는 동향은 집권 자민당에 의한 아베 총리의 임기연장 추진이다. 내년 3월 적어도 3연임은 가능토록 당규가 개정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어 아베 총리가 2018년 9월 3연임에 성공하여 일 역사상 최장수 총리가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일국민은 왜 이렇게 아베 총리를 지지하고 있는 것일까? 일본 유수의 증권사 최고위직을 지낸 후 유럽지역에 근무했던 한 일본대사는 일국민의 아베 총리 지지 배경에는 ‘일본이 지금 때를 놓치면 더 이상 경제의 재기는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라는 절박한 위기 의식을 일국민들이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지난 ‘잃어버린 20년’에 대한 좌절감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이 일본사회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가운데, 아베총리와 자민당은 아베노믹스를 통한 경제부활과 과거의 일본 위상 회복을 천명하면서 이에 대한 일국민의 지지를 배경으로 일본을 보수우경화로 이끌어 가는 것으로 평가된다. 아베 총리는 임기가 연장되면 정치적 소신인 ‘평화헌법’의 개정을 완수할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된다. 아베 총리가 추진하는 개헌방향이 ‘국가 비상시 국민의 국가 순종의무’ 등 국민의무 6개조 신설 및 일왕(日王)을 현재의 상징적 지위에서 국가원수화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베 총리의 구상대로 개헌이 되면 새 헌법은 1890년 ‘이토 히로부미’가 주역이 되어 반포된 ‘일본제국헌법’이 일왕을 막부 시대의 명목적 지위에서 국가원수로 복원시킨 것과 취지가 유사하게 보여 과거사가 상기된다. 일본제국헌법에서 명문화된 일왕의 국가 최고통수권자로서의 권위는 메이지 정부가 추진한 근대화노선 대열에 국민들을 결집시켜 일본 근대화 성취에는 기여하였다고 보나, 이후의 군국주의 체제는 일왕의 현인신(現人神)적 절대권위를 내세워 일국민을 대외적 침략전쟁으로 끌고 가는 노선의 정당성 확보에 활용한 문제점이 있다.이러한 역사적 맥락에 비추어, 아베 총리의 개헌 배경에는 자신의 보수우경화 정책에 대한 폭넓은 국민적 통합과 지지를 도모키 위해 일왕의 국가원수적 권위를 활용하기 위한 의도가 있지 않는가 추론된다. 아베 총리의 평화헌법 개정에 대해 일국민의 부정적 여론은 여전히 매우 높은 편이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는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도자인 ‘요시다 쇼인’을 흠모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메이지 유신 시대는 일국민들에게 희망과 열정과 영광의 시대로서 향수(鄕愁)의 대상이다. 메이지 유신의 시대정신이 ‘잃어버린 20년’을 극복코자 하는 일국민들의 노력에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우려스러운 것은 메이지 유신은 정한론(征韓論)에 이어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을 명분으로 한 침략전쟁으로 귀결되는 불행한 근세사를 보였음을 감안할 때, 아베 총리가 대외정책에서 메이지 시대정신을 현재에 보편타당성 있게 담아낼 수 있을지가 중요한데 미지수로 보이는 점이다.역사인식에서 보편적 성찰이 요망되는 보수우경세력 하의 일본과의 협력관계를 우리가 현명하게 이끌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지혜와 인내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신길수 前 주그리스대사

[세계는 지금] 메이지 유신과 아리타 자기

19세기까지 동아시아는 중국(淸)의 세력권에 있었으나 오랜 평화에 나태해진 중국은 영국과의 아편전쟁을 계기로 점차 쇠퇴한다. 섬나라 일본은 농업사회였으나 메이지(明治) 유신과 함께 산업혁명을 성공시켜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근대국가가 된다. 일본의 규슈 지방을 여행하면서 일본의 근대화를 가져온 메이지 유신은 임진왜란 때 납치된 조선 도공의 자기(瓷器)와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고대 중국에서 옥(玉)은 생전에는 부귀(富貴)를 가져오고 사후에는 영생을 보장해 준다고 믿고 있었다. 당시 지배계급에서는 살아서는 옥기(玉器)를 사용하고 죽어서는 옥의(玉衣)를 입고 매장되기를 원했다. 옥의 생산지는 중국의 서부, 지금의 신장(新疆)이었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이 옥의 생산지를 지배하자 중국에는 옥의 공급이 끊어졌다. 중국 사람들은 옥의 대체품을 찾아야 했다. 옥과 비슷한 자기(瓷器)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자기는 도자기의 일종으로 도기와 달리 상당한 고열에 특수 흙인 자토(瓷土)가 필요하다. 중국 자기의 중심은 징더진(景德鎭)이다. 징더진이 자기 생산의 중심이 된 것은 인근의 카오링산(高嶺山)에 자기를 만들 수 있는 자토가 풍부했기 때문이다. 세계 어디서나 자토를 카오링이라고 부르는 것은 징더진 인근의 카오링산에서 유래된다. 징더진의 자기는 ‘옥처럼 희고 종이처럼 얇으며 거울처럼 밝다(白如玉 薄如紙 明如鏡)’는 명성을 얻어 유럽 왕실과 귀족들이 선호해 왔다. 17세기 후반 명청(明淸) 교체기의 전란에 징더진의 도공은 피난가고 자기를 굽는 가마는 파괴되었다. 징더진의 자기를 유럽 왕실에 공급해 온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주문받은 자기를 다른 곳에서 구해야 했다. 일본 나가사키(長崎) 데지마(出島)에도 상관을 가지고 있던 동인도 회사 상인들은 인근의 아리타(有田)를 찾았다. 일본 규슈(九州) 사가현(佐賀縣)의 아리타에는 도조(陶祖) 이삼평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조선의 도공 이삼평은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공주 인근에서 납치되어 왔다. 이삼평은 아리타에서 자토 카오링을 발견하여 조선식 자기를 만들었다. 네덜란드 상인이 아리타를 찾았을 때 이삼평의 후손들이 징더진보다 더 아름다운 자기를 만들고 있었다. ‘아리타 야끼모노’로 불린 아리타 자기는 이마리(伊万里)항을 통해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아리타 자기는 유럽 왕실과 귀족들의 인기를 얻어 황금처럼 비싸게 거래되었다고 한다. 사가현의 나베시마(鍋島)영주는 아리타 자기로 큰 재부(財富)를 형성할 수 있었다. 1853년 미국의 흑선내항(黑船來港)으로 250년 이상 일본을 지배해 온 도쿠가와(德川)의 에도(江戶) 막부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베시마 등 규슈의 영주들은 도자기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제철소를 만들고 서양의 신무기를 구입하여 도쿠가와(에도) 막부를 전복시키는 반란에 참가한다. 보신(戊辰)전쟁(1868~1869)이라고 일컬어지는 일본의 내전에서 규슈 중심의 반군이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왕정복고 즉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이면에는 조선 도공이 만든 자기가 있었다. 유주열 前 베이징 총영사·㈔한중투자교역협회자문대사

[세계는 지금] 유엔 사무총장 선출과정과 원더우먼

필자가 시카고에서 총영사를 하고 있던 2014년 12월 초. 국제항공기구(ICAO) 총회 참석차 시카고를 방문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께 인사드릴 기회가 있었다. 반 사무총장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미국 주류인사를 만날 때마다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 신임 유엔사무총장과 업무인계인수를 시작한다. 2006년 1월1일 취임한 반기문 제8대 유엔사무총장은 금년 12월31일로 임기를 마치게 된다. 2017년 1월1일부터 임기를 개시하는 제9대 유엔사무총장 선출과 관련해서 유엔은 지난 7월 말부터 선정 절차를 진행해 왔다. 유엔 헌장 97조는 ‘유엔 사무총장은 안전보장이사회의 추천으로 총회에서 선출된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에 따라 유엔 사무총장은 안보리 추천과 총회 결정 절차를 거쳐 최종 선출된다. 안보리의 유엔 사무총장 후보 추천은 5개 상임이사국(미국,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의 거부권행사의 대상이다. 종종 유력한 후보가 5개 상임이사국 중 일부가 거부권을 행사해 탈락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대신 5개 상임이사국들은 유엔 내 권력 집중을 방지하기 위해 유엔 사무총장 후보를 낼 수 없게 돼 있다. 또한 유엔 총회는 1997년 결의 51241을 통해 유엔 사무총장을 선출하는 데 있어 지역순환과 양성평등을 적절히 고려토록 하고 있다. 지금까지 유엔 사무총장은 서유럽 3명(트뤼그베 리, 다그 함마슐트, 쿠르트 발트하임), 아시아 2명(우 탄드, 반기문), 아프리카 2명(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코피 아난), 라틴아메리카 1명(하비에르 페레스 데 케야르) 등이며 여성이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 동구권출신 특히 여성후보가 당선된 적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 금번 유엔 사무총장 후보로 여성후보가 7명이나 입후보했다. 여성 후보 선출에 대한 기대가 상당히 높았지만 궁극적으로는 국제무대에서 강대국 정치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으로 마감했다.10월5일 실시된 안보리 투표에서 안토니오 구테흐스(전 포르투갈 총리)를 제외한 나머지 9명의 후보들(13명 중 3명은 중도에 사퇴)은 5개 상임이사국으로부터 거부권을 받았고, 1995~2002년간 포르투갈 총리로 역임한 이후 2005~2015년간 유엔난민기구 대표를 역임하면서 난민전문가로 활동한 구테흐스 후보가 선출됐다. 금번 유엔 사무총장 선거에서 여러 국가들이 양성평등을 주창하는 유엔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면서 여성후보를 사무총장으로 선출하자는 여론을 표명했으나 결과는 5개 상임이사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제적인 관심과 여론을 도외시하는 모양으로 나타났다. 이에 머쓱해진 유엔은 쿠테흐스 전 포르투갈 총리가 유엔 사무총장으로 확정되자 곧바로 ‘원더우먼’을 여성권한 강화를 위한 명예홍보대사로 임명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2017년 1월1일부터 5년 임기를 시작하는 신임 유엔 사무총장이 유엔 헌장 1조에 나와 있듯이 세계의 평화와 안보를 유지하고, 국가 간의 우호관계를 증진하고, 국제문제를 해결하는 국제협력을 달성하는 역할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원더우먼과 함께 여성권한 강화에도 기여하길 기대해 본다. 김상일 경기도 국제관계대사·前 주시카고 총영사

[세계는지금] 김영란법, 기업문화 투명화로 한국 이미지 제고되길

부정 청탁 및 금품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소위 김영란법. 긴 해외근무 후 지난 5월 귀국한 이래 어느 모임에 가든 어김없이 나오는 단골 화두다. 다들 할 말이 많고 의견이 분분했다. 지난 9월 법이 시행되면서, 우리사회에 와야 할 것이 왔다며 법 취지가 잘 지켜져야 한다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듯하다. 그럼에도,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비즈니스 풍토 속에서 청탁은 더 은밀해지고 그 비용도 더 커질 것이라는 회의론도 여전히 적지 않다. 이런 논란을 접하면서, 필자가 해외근무 중에 겪은 부끄러운 기억들이 떠올랐다. 우리의 부조리한 행태들에 대한 충고 또는 따끔한 지적들이다. 1990년대 우리가 일본 기업들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공들여 노력할 때였다. 어느 한국투자설명회에서 일본기업인들은 투자관련 인센티브 제도보다는 한반도안보문제와 노사문제에 관해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질문했다. 그런데, 설명회 후 비공식 모임에서 옆자리 일본기업인이 필자에게 일본 기업들이 한국투자를 주저하는 실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한국에서 투자기업이 인허가를 받는 각 단계마다 누구에게 어느 정도의 향응이나 금품을 제공해야 하는지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접대비용도 비용이라서 이게 불확실하니 외국기업으로서는 총 투자비용을 산정하기 곤란하다는 것이다. 불투명한 청탁·접대 관행은 양질의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는데도 걸림돌이라는 것이다. 또, 90년대 초반 리비아에서, 공관장을 수행하여 태권도 용품들을 기증하러 리비아 태권도 회장을 방문했을 때이다. 경찰수장이기도 했던 그는 우선 감사의 뜻을 표한 뒤, 수년 전 모 한국기업이 태권도장을 지어준다고 약속했는데 아직 이행되지 않고 있다고 운을 뗐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은 한국기업이 대수로 공사 등 건설참여를 통해 리비아의 경제발전에 기여해왔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한국기업들이 오히려 리비아에서 더 큰 이익을 얻었다고 강조했다. 그런 한국 기업들이 문화사업 등에 건전하게 기여해주기 보다는 관료들에게 유형무형의 각종 편익을 제공하면서 자기들 관료 사회를 부패시키는데 기여했다고 일침을 놓았다. 그 때 얼굴이 화끈해졌던 기억이 잊혀 지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의 크로아티아 근무 시절. 2014년 11월 한 정부각료가 한국을 방문했다. 얼마 후 주요언론은 그 장관 소속기관의 프로젝트에 관심 있는 한국기업이 초청하여 특급호텔 등 편익을 제공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결국 그는 국회의 이해상충(conflict of interest)위원회에 회부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다. 최종적으로는 면책으로 결말이 났지만, 조사가 진행되는 상당기간 동안 언론과 외교가에 친한적인 정부각료는 물론 한국기업의 이름이 불미한 혐의로 오르내리는 게 무척 꺼림칙했다. 배경에는 다른 나라 경쟁기업의 신고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해외시장에서 우리기업의 활동방식에도 문제가 있어 보였다. 기업들의 해외 진출이 확대되면서, 우리기업들의 비즈니스 활동이 해당 국가의 여러 분야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래서 우리기업의 영업행태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김영란법이 개선코자하는 부정청탁 행위도 그 중의 하나인 것이다. 법 시행초기 기술적 문제나 혼란도 있겠지만, 법이 의도하는 투명한 비즈니스 관행이 문화로서 정착되는 변곡점이 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서형원 前 주크로아티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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