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메이지 유신과 아리타 자기

19세기까지 동아시아는 중국(淸)의 세력권에 있었으나 오랜 평화에 나태해진 중국은 영국과의 아편전쟁을 계기로 점차 쇠퇴한다. 섬나라 일본은 농업사회였으나 메이지(明治) 유신과 함께 산업혁명을 성공시켜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근대국가가 된다.

 

일본의 규슈 지방을 여행하면서 일본의 근대화를 가져온 메이지 유신은 임진왜란 때 납치된 조선 도공의 자기(瓷器)와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고대 중국에서 옥(玉)은 생전에는 부귀(富貴)를 가져오고 사후에는 영생을 보장해 준다고 믿고 있었다. 당시 지배계급에서는 살아서는 옥기(玉器)를 사용하고 죽어서는 옥의(玉衣)를 입고 매장되기를 원했다. 옥의 생산지는 중국의 서부, 지금의 신장(新疆)이었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이 옥의 생산지를 지배하자 중국에는 옥의 공급이 끊어졌다.

 

중국 사람들은 옥의 대체품을 찾아야 했다. 옥과 비슷한 자기(瓷器)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자기는 도자기의 일종으로 도기와 달리 상당한 고열에 특수 흙인 자토(瓷土)가 필요하다.

 

중국 자기의 중심은 징더진(景德鎭)이다. 징더진이 자기 생산의 중심이 된 것은 인근의 카오링산(高嶺山)에 자기를 만들 수 있는 자토가 풍부했기 때문이다. 세계 어디서나 자토를 카오링이라고 부르는 것은 징더진 인근의 카오링산에서 유래된다.

 

징더진의 자기는 ‘옥처럼 희고 종이처럼 얇으며 거울처럼 밝다(白如玉 薄如紙 明如鏡)’는 명성을 얻어 유럽 왕실과 귀족들이 선호해 왔다. 17세기 후반 명청(明淸) 교체기의 전란에 징더진의 도공은 피난가고 자기를 굽는 가마는 파괴되었다.

 

징더진의 자기를 유럽 왕실에 공급해 온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주문받은 자기를 다른 곳에서 구해야 했다. 일본 나가사키(長崎) 데지마(出島)에도 상관을 가지고 있던 동인도 회사 상인들은 인근의 아리타(有田)를 찾았다.

 

일본 규슈(九州) 사가현(佐賀縣)의 아리타에는 도조(陶祖) 이삼평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조선의 도공 이삼평은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공주 인근에서 납치되어 왔다. 이삼평은 아리타에서 자토 카오링을 발견하여 조선식 자기를 만들었다.

 

네덜란드 상인이 아리타를 찾았을 때 이삼평의 후손들이 징더진보다 더 아름다운 자기를 만들고 있었다.

 

‘아리타 야끼모노’로 불린 아리타 자기는 이마리(伊万里)항을 통해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아리타 자기는 유럽 왕실과 귀족들의 인기를 얻어 황금처럼 비싸게 거래되었다고 한다. 사가현의 나베시마(鍋島)영주는 아리타 자기로 큰 재부(財富)를 형성할 수 있었다.

 

1853년 미국의 흑선내항(黑船來港)으로 250년 이상 일본을 지배해 온 도쿠가와(德川)의 에도(江戶) 막부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베시마 등 규슈의 영주들은 도자기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제철소를 만들고 서양의 신무기를 구입하여 도쿠가와(에도) 막부를 전복시키는 반란에 참가한다.

 

보신(戊辰)전쟁(1868~1869)이라고 일컬어지는 일본의 내전에서 규슈 중심의 반군이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왕정복고 즉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이면에는 조선 도공이 만든 자기가 있었다.

 

유주열 前 베이징 총영사·㈔한중투자교역협회자문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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