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주자들 TV출연

‘오른쪽 얼굴이 화면을 잘 받으니 잘 부탁한다.’ ‘머리 숱이 적으니 윗 조명을 약하게 해달라.’ ‘얼굴이 너무 크게 나오지 않게 해달라.’ 대권 예비주자들의 텔레비전 초청 연쇄토론회 출연을 두고 캠프측의 이런 주문이 방송사 스텝에게 잇따른다는 어느 신문보도가 흥미롭다. 기왕이면 시청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캠프진영의 심려는 있을법 하다. 텔레비전 카메라가 좋아하는 취향이 있긴 있다. 자주색이 아닌 아주 빨간 색깔은 색상이 화면에 퍼져 좋지 않다. 빨간 넥타이는 매지 않는 것이 좋다. 큰 얼굴보단 작은 얼굴이 카메라에 더 잘 받아 보기좋게 나온다. 얼굴이 큰 사람은 카메라의 작동에 따라 조정이 가능하다. 조명도 원근과 각도가 굉장한 영향을 미친다. 지금은 잘 모르겠으나 예전에는 이런 일이 가끔 있었다. 무슨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인사들을 스텝진이 골탕 먹이기는 어렵지 않다. 예컨대 스포트 라이트를 머리 꼭대기위에 바짝 갖다대면 출연자는 여간 곤욕이 아닐 수 없다. 스포트 라이트의 열량이 굉장하기 때문이다. 출연자는 땀이 절로 나지 않을 수 없다. 스텝진들 역시 인간적 감정을 가졌다. 더러는 출연 인사가 거들먹거리기를 좋아하거나 하여 스텝의 비위를 상하게 하면 이같은 골탕을 먹는다. 반대로 느낌이 좋은 출연 인사는 작품화 한다. 물론 프로그램은 다 작품이지만 작품도 작품 나름인 것이다. 방송사 출입때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다. 현대 사회에서 텔레비전은 마술 상자다. 대중 매개체로서의 영향력도 괴력적이고 연출도 가공할만한 힘을 지녔다. 텔레비전 시청 또한 국민생활화 하였다. 시청자의 취향에 따라 다름은 있어도 하루 24시간 가운데 상당한 시간을 텔레비전 시청에 할애하고 있는 것은 보편적 현상이다. 대권 예비주자 초청 토론회 역시 안보는 사람은 안봐도 보는 사람들은 열심히 볼 것이다. 대중적 이미지 형성의 실험 무대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겉모습 보다는 속모습이 더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같은 값이면 겉모습도 그럴싸 하게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캠프진의 주문이 지나치게 심하면 스텝진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든다. 과다한 요구는 되레 출연 인사 프로그램의 작품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하는 것이다. /白山

사람관리

정주영씨가 장년시절에 부하 직원들과 곧잘 씨름도 해 가며 어울려 놀기를 좋아 했다는 얘기는 잘 알려진 일이다. 주목할 점은 어울려 노는 모습과 어울려 일하는 모습은 전혀 딴 얼굴이었다는 사실이다. ‘놀땐 민망할 만큼 파탈하는 게 마치 아이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고 말하는 전직 현대가족들이 많다. 일할 때와 놀 때를 구별 못하는 상사는 정말 꼴불견이다. 가령 술 좌석에서도 상사의 위엄 갖추기에 골몰하는 것은 일에 자신이 없는 위인일수록 더 한다. 부하들에 대한 농담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 부하가 들어 부담이 가는 농담은 빵점이다. 억지 웃음이 아닌 절로 웃음이 폭발하는 농담이 되기 위해서는 농담 자체가 순수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끈 처칠 영국수상은 부담 없는 농담을 잘 하기로 유명했다. 전쟁이 긴박한 순간에도 기발한 농담으로 부하들의 마음을 매끄럽게 이끌곤 했던 사람관리의 천재였다. 모든 분야에 기계가 첨단을 치닫고 있지만 그래도 일을 하는 것은 사람이다. 같은 기계로 하는 같은 일도 사람들, 즉 팀워크에 따라 성패가 달라진다. 나쁜 조건에서도 사람 관리를 잘 하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반면에 사람 관리를 잘 못하면 좋은 조건에서도 실패를 가져오기 십상인 것이다. 사람관리는 또 족대긴다고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족대기면 시늉만 낼 뿐이다. 일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 나오도록 만드는게 유능한 사람관리이며, 이는 인간관계에서 싹트고 비공식 대화는 인간관계의 시작이다. 인간이 인간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술집 마담이 ‘성공하는 남자와 못하는 법을 구별하는 법’이란 색다른 책을 펴내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이야기다. 도쿄의 유흥가 긴자거리에서 고급 클럽을 경영하는 한 마담이 오랫동안 남자 손님을 지켜본 경험을 바탕으로 65가지 감정법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술자리에선 부하를 해방시켜라, 술 좌석에서까지 부하를 꾸짖는 상사는 최악이다’라면서 괜히 내가 화가 나서 술을 몰래 독하게 타 그런 사람은 일찍 취하게 만든다고 했다. 반대로 ‘이런 상사를 위해선 몸을 내 던져도 좋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관리자가 있다’고도 했다. 그런가 하면 마이크를 잡으면 똑같은 레퍼토리만 부르는 사람은 성공하기 힘든 케이스라고 했다. 사람을 관리하는 입장에 있는 이들은 자신은 어떤 케이스인지 한번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白山

미꾸라지

며칠전 아침 출근 때의 일이다. 경기일보사앞 산업도로의 횡단보도를 건너는 참이었다. “어머!”하는 옆 여성 보행객의 탄성에 그녀의 시선을 따라서 보았다. 손가락만한 미꾸라지 한마리가 간밤에 내린비로 촉촉히 젖은 아스팔트위에서 미동하고 있었다. 어디서 온 것일까, 아스팔트위의 미꾸라지가 어쩐지 희한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냥 지나쳐 길을 건넜으니 순간의 상념이었다. 막상 사무실에 들렀다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비닐봉지를 들고 미꾸라지를 다시 찾아 나선 것은 5분 가까이 지나서였다. 만석공원 못에 넣어줄 요량으로 길에 그대로 있길 바랐으나 미꾸라지는 보이지 않았다. 보행신호를 세번 기다려 세차례에 걸쳐 오가며 횡단보도에서 보았던 곳 주변을 두리번 거렸지만 없었다. ‘?’산업도로에 차량은 좀 많이 다니나, 그런 가운데 용케도 다치지 않았던 미꾸라지가 조금만 더 그대로 있기를 바랐던 소망이 깨졌다. 추어탕집으로 팔려가는 미꾸라지 트럭에서 떨어진 것으로는 믿어지지 않는다. 미꾸라지는 비를 탄다고 한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으나 여름비가 내린 끝에 마당같은 엉뚱한 곳에 떨어져 있는 미꾸라지를 흔히 목격하는 경우가 있다. 한국 일본 중국에 분포된 미꾸라지는 국내에선 수질오염으로 많이 줄긴 했지만 옛적에는 흔했던 민물고기다. 가난한 백성들이 풍부한 단백질과 비타민A를 쉽게 섭취할 수 있었던 영양식이었다. 추어탕의 유래는 동의보감에서 미꾸라지를 가리켜 미꾸리추자를 써 ‘추어’(鰍魚)라고 한데서 유래한다. 원기를 보하고 장을 맑게한다고 하였다. 지금처럼 농약을 쓰지않는 청청농사를 지을 때다. 가을철 논에 날아드는 새를 보면서 논고랑에 쳐놓은 망태기로 잡곤 한 미꾸라지가 양철통이 가득한 날이 많았다. 그럴 때면 한데 가마솥에 끓여 동네 사람들이 포식하다시피 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미꾸라지는 입가에 난 다섯쌍의 수염도 재미있지만 아가미호흡과 함께 장호흡하는 특성이 있다. 겨울철엔 진흙속에서 겨울잠을 자며 봄을 기다린다. 겨울잠 자야할 미꾸라지가 봄처럼 따스한 이상난동으로 어쩌다가 잘못 나와 맨흙도 아닌 아스팔트 바닥 신세를 졌는지 모를 일이다. 추어탕으로 여러마리의 미꾸라지를 잘 먹어대면서 난데없이 길바닥의 미꾸라지 한마리를 찾아 헤맨 것은 그것도 맥없이 죽어선 안되는 생물이란 생각에서였다. /白山

사기

병법서 <손자(孫子)>에 ‘용병한다는 것은 적을 속이는 일이다’ ‘전투란 적을 속임으로써 성립된다’라는 말이 있다. 아군을 유리하게 하려면 적군을 속여야 한다는 병법이다. ‘사(詐)’하면 떠오르는 이름이 많지만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曹操)는 가히 ‘사(詐)의 명인(名人)’일 것이다. 조조에게는 ‘사’와 관계되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사람을 잘 속인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속는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말도 된다. ‘사’란 술수는 원래 상대방의 심정이라던가 욕망을 철두철미하게 읽지 못하면 성공할 수가 없을 것 아닌가. 사기꾼들이 장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상대방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 지를 숙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조는 적을 속이는 것은 물론이었고 아군, 측근까지도 속인 일이 많았다. 조조의 군대가 행군을 하던 중 물을 발견하지 못하여 전군이 갈증으로 괴로워 했다. 그 때 조조는 전군에게 전달하라고 말했다. “저 앞에는 큰 매화나무 숲이 있다. 달고 시큼한 매실이 주렁 주렁 매달려 있다. 그곳까지만 참고 견디며 가자.” 그 말을 듣는 순간 병사들의 입안에는 군침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샘을 발견할 때까지 병사들은 참고 견디며 행군했다. 조조는 매화나무 숲을 들먹임으로써 목이 타서 괴로워하며 물을 찾는 병사들의 욕망을 일시적이나마 가라앉혔다. 더구나 매실이라고 하는 말을 꺼냄으로써 병사들의 입에 군침이 돌도록 하여 순간적이기는 하지만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詐’도 이쯤되면 고등기술의 하나이다. ‘詐’하면 또 일순위로 연상되는 것이 ‘정치’다. 정치인이 무슨 동네북이냐 하겠으나 정치인들처럼 사기를 잘 치는 사람도 없다. 물론 모든 정치인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선거 당시 내놓은 공약을 지키지 않는 것도 ‘사기(詐欺)’다. 사기는 못된 꾀로 남을 속이거나, 남을 속이어 착오에 빠지게 하는 위법 행위가 아닌가. 국민을 잘 살게 하겠다고 해놓고 만일 곤궁에 빠지게 한다면 대단히 죄질이 나쁜 사기다. 조조처럼 군사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기라면 혹 모르거니와 금방 탄로날 사기성 감언이설을 일삼는 정치인들이 한국에는 너무 많다. /淸河

부부

중국 후한 때의 여인 맹광(孟光)은 ‘거안제미(擧案薺眉)’와 ‘형처(荊妻)’라는 말의 유래를 남긴 역사의 주인공이다. 맹광은 못 생긴 얼굴에 군살투성이의 커다란 몸집, 검은 피부를 지닌 여자였다고 한다.하지만 힘이 장사여서 무거운 돌절구를 거뜬히 들어 올리고 언행이 아주 착실했다. 도처에서 혼담이 들어왔지만 맹광은 번번이 거절했다. 혼기 놓칠 것을 염려하는 아버지에게 맹광은 양홍(梁鴻)이란 마을 젊은이에게 시집가겠다고 자청했다. 양홍은 소문난 가난뱅이에다가 돼지치기였다. 왜 하필이면 양홍이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맹광은 대답했다.“기개가 있는 분입니다. “사실 양홍은 평범한 돼지치기가 아니었다.높은 학식을 갖추었으나 어지러운 세상에서 벼슬하기가 싫어 숨어 사는 은둔자였다. 혼례를 올린 두 사람은 아주 가난하게 살았다. 양홍은 맷돌질하는 인부로 일하고, 맹광은 베를 짰다. 맹광은 매일 저녁 남편이 일을 마치고 돌아올 무렵이 되면 정성 들여 몸단장을 했다. 몸단장은 머리를 곱게 빗어 가시나무 가지로 만든 비녀를 꽂고 무명치마를 손질해 입는 것이 전부였다. 자기 아내를 남에게 낮춰 이야기 할 때 쓰는 말로 소박한 아내, 가난한 아내란 뜻을 지닌 ‘형처’는 이렇게 맹광에서 비롯됐다. 깨끗하게 몸단장한 맹광은 정성껏 차린 저녁상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려 남편에게 권했다. 이로부터 ‘거안제미’란 말이 유래했다. ‘거안제미’란 ‘밥상을 들어 눈썹에 가지런히 맞춘다’, 즉 남편을 지극히 섬긴다는 뜻이다. 양홍 역시 아내를 몹시 사랑했다. ‘난세를 헤쳐나갈 동반자’라고 아껴마지 않았다고 한다. 맹광은 참한 아내의 전형으로 황보밀(皇甫謐)이 쓴 ‘열녀전’에 기록됐다. 맹광의 얼굴은 비록 미모는 아니었지만 마음이 더함 없이 아름다웠던 것이다. 맹광 양홍 부부는 지혜와 인품을 닦아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꽃피웠고 스스로 원하는 남편을 선택하여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다. 전설이 아니다. 이혼율이 점점 늘어나는 오늘날의 부부들로 하여금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는 한 여자와 한 남자의 땀 냄새 향기로운 생애다. /淸河

실책

중국 송대(宋代)에서 재상까지 지낸 명신 여공저(呂公著·1018∼1089)는 학문과 식견이 탁월하여 황제의 교육도 담당했다. 여공저가 ‘논어’를 강의하다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면 그 또한 어찌 군자라 하겠느냐’라는 대목에서 황제에게 아뢰었다. “아랫사람으로서 웃사람의 이해를 얻지 못하는 자 얼마든지 있습니다. 한편 웃사람 또한 아랫사람으로부터 충분히 이해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옛날의 군주는 정령(政令)이 엄수되지 않고 인심장악도 할 수 없을 때는 우선 자기 자신을 반성하여 덕을 닦는 것이 제일이라 생각하여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성왕(聖王) 순(舜)이 그렇고, 주(周)의 문왕(文王) 또한 그렇습니다!” 송대는 고도로 조직화된 사회이며, 오늘날의 사회와 공통되는 점이 적지 않다고 전한다. 여공저의 말은 그래서 더욱 지금도 귀담아 들을만 하다. 여공저는 북송(北宋)의 제7대 황제 철종(哲宗·재위 1085∼1100년)에게 제왕의 수칙십개조(守則十個條)라는 상주문(上奏文)을 바쳤다. ‘외천(畏天), ‘애민(愛民)’‘수신(修身)’등 두 글자가 1개 조로 된 간결한 것인데 첫째가 ‘하늘을 두려워한다’이다. 둘째, 백성을 사랑한다. 셋째, 수신을 한다. 넷째, 학문을 닦는다. 다섯째, 현명한 사람을 등용한다. 여섯째, 간언(諫言)을 듣는다. 일곱째, 가렴(苛斂)하지 않는다. 여덟째, 사치를 멀리한다. 아홉째, 형(刑)을 줄인다. 열째가 ‘안일하지 않는다’인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소위 최고지도자가 명심 또 명심해야 될 수칙이다. 지난 14일 김대중 대통령은 내외신 연두기자회견에서 시종 어두운 표정으로 “국민 여러분께 죄송한 심정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고 사과했다. 대통령이 국민들 살기 어렵게 하고 고위 공직자에게 나쁜 짓 시켰겠는가. 대권 꿈에 취한 민주당원들 까지도 김대통령의 인사방침을 비판하고,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는 신문칼럼을 통해 “이게 ‘정치 9단’입니까”하고 충고하는 판국이니 더더욱 민망스럽다. 대통령이 제왕적이라면, 여공저가 제시한 다섯째 수칙인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지 못한 게 실로 큰 실책이다. /淸河

호랑이

“호랑이가 밖에 와 있다”는 할머니의 으름장에도 울어대던 손자가 “곶감이 있다”는 말에 울음을 뚝 그쳤다. 마침 그 때 정말로 할머니집 마당에 가 있던 호랑이는 나보다 더 무서운 곶감이 대체 뭔가 하고 궁금했다. 옛날 이야기의 한 토막이다. 우리의 전래 설화, 고담 등에는 이처럼 호랑이와 얽힌 얘기가 많다. 호환을 당하는 내용도 있지만 호랑이에게 도움을 받는 내용도 많다. 예를 들어 호랑이 등에 업혀 쏜살처럼 달려가 누굴 구했다는 얘기같은게 그러하다. 호랑이는 두려운 존재였기도 하지만 영적인 동물로 쳤다. 이 때문에 민화 등 선인들의 그림에는 호랑이를 즐겨 그렸던 것을 볼 수가 있다. 한국전쟁 이후 특히 남한의 산야에는 멸종설이 일반화된 가운데 호랑이 출현설이 종종 나와 진위에 논란이 되곤 했다. 지난해엔 대구문화방송이 무인카메라로 찍었다는 경북 청송의 야간 호랑이 사진을 놓고 논란이 있었다. 그동안의 호랑이 출현설은 거의가 호랑이가 아닌 삵괭이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북녘 땅에도 호랑이가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백두산을 중심으로 장백산맥에 호랑이가 좀 있을 것으로 보는 추정설이 유력할 뿐이다. 산세로 보아 호랑이의 생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인 것이다. 전래의 국산 호랑이는 시베리아나 다른 지역의 호랑이와 또 다르다. 두상의 생김새부터 몸체가 당당한데다 호피의 색깔이 영롱한게 다른 지역의 호랑이와 비할 바가 아니다. 총명하고 민첩한 것 역시 다른 지역 호랑이 보다 월등하다. 이처럼 자랑스런 국내산 호랑이가 몇군데의 동물원에 의해 간신히 명맥만 이어가는 것은 안타까운 노릇이다.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한국야생호랑이연구소 임순남소장(49)이 강원도 등지로 호랑이 수색에 나서 화제가 됐다. 1998년 2월 화천에서는 길이 9.5cm의 호랑이 발자국을 발견했으나 막상 실물은 찾지못해 수색의 집념을 계속 불태운다는 것이다. 그는 일제시대 조선총독부가 국내 호랑이 110마리를 일본으로 사냥해 갔다며 일본 법정에 10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제기할 것이라고 한다. 자연 다큐멘터리 작가이기도 한 그의 호랑이 수색활동은 벌써 4년째다. 우리의 호랑이에 남다른 애착으로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임순남씨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白山

아리랑

‘아리랑’의 어원이 무엇이며 유래가 어떤 것인지를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조선조말 대원군의 경복궁공사 때 궁중에서 ‘아리랑’을 불렀다는 대목이 당시의 우국문인이었던 황현의 ‘매천야록’에 간략하게 전할 뿐이다. 고려의 망국유신들에 의해 비롯됐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치 않다. ‘아리랑’의 어원과 유래는 모르지만 ‘아리랑’은 이미 겨레의 소리다. 오대주 육대양의 세계 어디서든 ‘아리랑가락’이 들리면 혈류의 요동이 가슴에 와 닿는게 우리들 백의민족의 정서다. ‘아리랑가락’을 처음 듣는 중앙아시아 카자흐 벽촌의 한인 4세 꼬마 아이들도 이같은 겨레의 정서를 나타내더라는 한 여행객의 후일담을 들은적이 있다. ‘아리랑’은 그만큼 우리 민족의 핏속에 짙게 용해된 정서의 가락인 것이다. ‘아리랑가락’은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 ‘연변아리랑’이 있고 ‘독립군아리랑’등도 있다. 이런 가운데 ‘정선아이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을 3대 아리랑으로 친다. 여기에는 예컨대 ‘진도아이랑’의 경우 육자배기토리에 드는등 토속적 특성이 다 있다. ‘아리랑가락’도 세월과 함께 변천했다. 전통민요의 3대 아이랑에 이어 ‘경기아리랑’은 신민요 아리랑의 효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고 하는 ‘경기아리랑’은 대표적인 신민요 ‘아리랑가락’이 된 지 오래다. 그런가 하면 대중가요의 ‘아리랑가락’도 있다. ‘영암아리랑’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아리랑의 감정은 무엇일까, 그것은 민족의 흥(興)이기도 하고 민족의 한(恨)이기도 하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숱한 기복을 거듭하였다. 수난이 많았기 때문에 원한도 많고 재기도 많았기 때문에 감흥도 많다. 때로는 한을 흥으로 승화시키는 슬기를 갖기도 했다. 민족사에서 이토록 질기고 굵은 맥을 지닌 정서적 가락을 다른 민족에서는 찾아 보기가 힘들다. 평양에 아리랑 바람이 일고 있다. 오는 12월16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60회 생일을 시작으로 4월15일 김일성주석 90회 생일, 4월25일 인민군 창설 70주년 기념일을 거쳐 6월15일 남북정상회담 2주년까지 계속될 ‘아리랑축제’행사 준비로 평양 시가지가 온통 들떠 있는 것으로 전한다. 10만명 규모의 집단체조 등 학생 예술가들이 총동원된다. ‘아리랑’의 돌연변이다. /白山

‘임오군란기’

1930년에 덕흥서림에서 간행한 ‘임오군란기(壬午軍亂記)라는 작자·연대미상의 실기소설이 있다. 임오군란의 전말을 여섯 단락으로 나누어 실기체 형식으로 기록했다. 대원군의 섭정으로 인하여 부국강병에 힘입어 군기가 일신되지만, 민씨(閔氏)일족이 정권을 잡으면서 차츰 국고가 탕진되어 군사들의 봉급도 주지 못할 형편이 된다. 일본과 통상을 체결하여 공사가 거주하게 되고 정부는 일본의 제도를 모방하게 된다. 1882년 임오년(고종 19)6월9일 조정이 밀린 군량을 배급하면서 썩은 쌀에 모래까지 섞어 배급하게 되자 화가 극에 달한 군사들은 특히 창리(倉吏)가 민씨일가 민겸호의 하인이라는데 격분하여 창리를 죽이고 난을 일으킨다. 민겸호가 군사들의 처형을 명하자 이들은 대원군의 힘을 빌려 일본공사관을 습격, 공사 하나부사는 인천으로 피란하고 민비는 상궁복장으로 변복하여 충주 장호원 산중에 숨는다. 군사들은 민씨일족을 해치고 영의정이며 대원군의 형인 흥인군도 죽인다. 민비는 역관 변원규를 경성에 보내 왕에게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도록 한다. 청나라는 위안스카이 등의 인솔로 남양만에 상륙한 후 대원군을 청나라로 잡아가고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킨다. 청나라가 일본의 세력을 제어하자 일본은 군란중 입은 피해보상을 요구하게 되고 공사관 보호를 구실로 군대를 끌어들인다. 군란이 민왕후와 대원군의 싸움으로 그치지 않고 대원군이 환란을 수습한 뒤에도 민왕후가 청나라를 끌어들여 자망자멸(自亡自滅)을 자초한다. 임오군란의 시말을 흥미 본위로 기술한 이 작품은 말미에서 “임오군란이 대원군의 진무(鎭撫)로 이미 평정되었거늘 민파(閔派)들은 무슨 까닭으로 청병(淸兵)을 불러 왔는고?”라고 했다. 작가가 대원군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기술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요즘 KBS-TV에서 방영중인 사극 ‘명성황후’가 임오군란의 격변기를 그리고 있다. 명성황후가 군란을 피하여 장호원으로 피신했다. 사실(史實)과 차이가 있다고 하여 시비가 있는데도 인기는 여전하다. 대원군이 1882년 7월 13일 청군에 의하여 강제로 납치돼 남양만의 마산포(馬山浦)에서 청국으로 이송되며 대원군 정권은 무너지지만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공과는 아직도 분분하다. 2002년 임오년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淸河

캔 공기

제주도의 중앙에 솟아 있는 높이 1천950m의 한라산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라산이라는 이름에서 한(漢)은 은하수를 뜻하며 라(拏)는 맞당길나(相牽引) 또는 잡을 나(捕)로서, 산이 높으므로 산정에 서면 은하수를 잡아당길 수 있다는 뜻이다. 예로부터 산 정상에 오르면 멀리 남쪽 하늘에 노인성(老人星)을 볼 수 있으며, 이 별을 본 사람은 장수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많고 많은 한라산 전설 중에 이런 이야기도 전해온다. 옛날에 한 사냥꾼이 산에서 사냥을 하다가 잘못하여 활 끝으로 천제(天帝)의 배꼽을 건드렸는데, 이에 화가 난 천제가 한라산 꼭대기를 뽑아 멀리 던져 버렸다. 이 산정부가 던져진 곳이 지금의 산방산(山房山)이고, 뽑혀서 음푹 팬 곳은 백록담(白鹿潭)이 되었다고 한다. 북제주군 애월읍 어음리의 빌레못 동굴유적에서 긁개·첨기·흠날석기·돌날 등의 타제석기와 갈색곰·순록 등의 화석과 뼈가 발견되었고, 조천읍 북촌리 유적에서 삼각형 점렬(點列)무늬토기와 원형 점렬무늬 토기가 발견돼 제주도에는 구석기 때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11세기 초에 두 차례의 화산폭발이 있었지만 한라산은 제주민의 성스러운 부성(父性)이며 종교로서 가장 빼어난 명산으로 칭송되고 있다. 서정주 시인은 ‘한라산 산신여인상’이라는 시(詩)에서 “그 네 나이는 구백억세/그 자디잔 구백억개 산도화빛 이쁜 주름살속에/나는 흡수되어 딩굴어 내려가다”라는 말로 한라산의 아름다움을 묘사했다. 그런데 최근 실로 희한한 소식이 들려온다. 제주도 환경보건연구원에서 한라산의 청정공기를 오는 3월부터 시판한다는 것이다. ‘한라산 맑은 공기’란 이름으로 출시될 휴대용 캔형 압축공기는 제주도에서 청정지대로 유명한 천아오름(해발 700m)부근 속칭 ‘Y계곡’에서 공기를 채집, 50분의 1로 압축했다는데 이 캔에는 한라산 고산지대의 대표적인 구상나무와 비자나무 향이 첨가돼 더욱 청량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든다고 한다. 아니, 한라산 공기가 얼마나 신선하길래 캔에 담아 판매하는가. 한라산 기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淸河

식자우환

사람이 배우지 못하여 무지하면 대개 억지를 쓴다. 분별력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우지 못했다 해서 다 그러는 것은 아니다. 비록 배우진 못했어도 사리판단이 밝은 이들도 많다. 반대로 배운 사람이라 하여 반드시 경우가 바른 것 만은 아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올바른 처신은 배우고 안 배운 것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분별력이 있으면서 사리를 왜곡하는 배운 이들의 횡포는 배우지 못해 몰라서 억지를 쓰는 것 보다 더 무섭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은 몰라서 떼를 쓰는 배우지 못한 이들보다, 배운 지식을 밑천삼아 나쁜 짓을 저지르는 몹쓸 유식인들 때문에 더욱 더 각박해진다. 정상배들이 그렇고, 어용교수들이 그렇고, 악덕기업인이 그러하며, 부패관료들이 그렇고, 곡필언론인 등이 그러하다. 영국의 제임스1세는 스튜어트 왕조를 창시한 아주 유식한 왕이다. 많이 배우고 책을 많이 읽어 박식하여 그 스스로 논문을 자주 썼다. 왕권신수설은 그가 주창한 것으로 국가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사람은 국왕뿐이며, 국민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국왕의 절대권력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앞세워 의회의 승인이 없는 과세를 일삼아 의회와 충돌이 잦았고 국교주의를 강조함으로써 신·구 두 교도들의 신망을 잃어 1605년엔 구교도에 의한 화약음모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하여 왕을 비판한 의회는 제임스1세를 가리켜 “유식하면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책속에서만 얻은 잘못된 탁상 공론이나 지식을 왜곡한 이론은 경험축적으로 단련된 바른 지혜보다 더 못하여 유식이 곧 현자가 아님을 설파한 것이다. 아테네의 소피스트, 이른바 궤변학파가 있었는가 하면 진시황의 갱유분서(坑儒焚書)가 있었다. 시황제의 지식인 탄압은 국정의 비판을 금지키 위한 것이니, 일종의 중국판 소피스트적 명분이었으며 그 역시 지식인 이었으니 식자우환의 폭거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모르는 것을 아는 것보다 아는 것을 제대로 행사하는 것이 얼마나 더 중요한가를 일깨워 준다. 세상이 해가 갈수록 두려워 지는 것은 알량한 지식인들의 횡포 때문이다.

단연의 변

끽연권은 그 어디에도 없다. 혐연권만 있다. 담배 피우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 구박만 받는다. 애연가들의 끽연권 주창운동이 있었지만 천대는 여전하다. 버스안에서도 당당하게 담배를 피웠던 예전에 비해 지금 금연구역 투성인 것은 격세지감을 갖게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담배는 폐암 발병률이 높다는 등 끊임없는 인체유해론이 쏟아져 나와 애연가들을 위협한다. 담배를 전매품으로 팔아먹는 정부의 기구에서도 담배 유해설을 거들고 나선다. 그처럼 국민건강을 염려한다면 전매품 취급을 말든지 해야 할 터인데도 팔면서 해로움을 부각하는 것은 이율배반으로 애연가들의 실소를 산다. 어떻든 담배가 몸에 백해무익한 것은 사실이어서 인체적 유해와 사회적 괄시를 받아가면서도 국고수입을 올려주는 것이 애연가들의 입장이다. 물론 끊지 못해서 피우는 것이지만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여야가 통합, 분리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던 건강보험의 적자 보전책으로 담배부담금이 또 거론됐다. 직장·지역건보의 통합은 1년6개월 유예하기로 했으나 재정통합이 어떻든간에 재정안정 대책이 당장 발등의 불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건보는 올해 국고에서 총지출의 50%에 해당하는 3조2천335억원을 지원, 적자에서 벗어날 계획이나, 연간 적자가 7천억원인 직장건보의 안정대책은 뾰족한 수가 없어 당초 지역에 전액 주기로 한 담배부담금을 직장에 반반씩 나눠주기로 한 것이다. 이에따라 지역건보, 직장건보에 각 4천억원씩 지원할 8천억원의 담배부담금을 조달하기 위해 정부는 갑당 150원씩 부과할 예정이었던 담배부담금을 180원으로 올릴 계획인 것이다. 건강보험 재정을 위하는 것은 나쁘다 할 수 없으나 몸에 해로운 담배부담금으로 건강보험을 돕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그나저나 담배부담금을 올려 받자면 조만간에 담뱃값을 또 올려야 하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하다. 마치 애연가가 무슨 봉인 것처럼, 만만한 게 담배 피우는 사람 호주머니냐는 게 애연가들의 생각인 듯 싶다. “이래도 저래도 참고 담배를 피워 왔는데 이젠 담뱃값 올리는 것 꼴보기 싫어 끊었다”고 한다. 애연가였던 어느 단연가의 말이다. /白山

덕 담

‘덕담(德談)’에 대하여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이제 그렇게 되라’고 축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 ‘벌써 그렇게 되셨다니 고맙습니다’라고 단정해서 경하하는 것이 특색이라고 하였다. 이를테면 “금년에는 승진하셨다지요”, “올해에는 부자가 되셨다지요”하는 식으로 축하를 해주는 것이다. 예전에는 각 가정에서 서로 사람을 보내서 전갈로 덕담을 교환하기도 하고, 멀리 있는 사람들과는 서신으로 덕담을 주고 받았다. 요즈음은 어른을 직접 찾아뵙고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하고 예를 갖추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연하장, 전화, 휴대폰 문자 메시지, 인터넷 등으로 덕담을 대신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하지만 육당의 말처럼 “벌써····그렇게 되셨다지요”라는 표현으로 축하해 주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 이렇게 서로간의 소원성취를 축원해주는 세시인사에는 두 가지의 원시심리적 근거가 있다. 첫째가 언령관념(言靈觀念)이다. 우리 선인들은 음성 내지 언어에 신비한 힘이 들어 있어서 ‘무엇이 어떻다’하면 말 자체가 그대로 실현되어지는 영력(靈力)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덕담은 곧 그러한 언령적 효과를 기대한 데서 생긴 세시풍속이다. 또 한가지는 점복관념(占卜觀念)에서 찾을 수 있다. 만사만물에 길흉의 예조(預兆)가 있다 하여 그것을 알려고 여러가지 점복술이 생겼는데 그 중의 하나가 청참(聽讖)이다. 새해 첫 새벽 거리에 나가서 방향도 없이 발 닿는대로 돌아다니다가 사람의 소리든 짐승의 소리든 물성(物聲)이든 처음 듣는 그 소리로써 그 해의 신수를 점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덕담은 일종의 청참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세수(歲首)에 처음 듣는 소리로 일년의 신수를 점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조청(鳥聽), 경청(鏡聽) 등 청참법이 생겼고 사람 대 사람이나 집안끼리 처음 교환하는 인사에 덕담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말띠 해 임오년 세초(歲初)에 착한 사람들끼리는 이미 덕담을 주고 받았을 터이니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에게나 한 마디 해야겠다. “국민을 위해 금년에는 체통을 지키셨다지요.”

사무관

벼슬아치란 말은 많이 듣지만 구실아치라 말은 좀 생소하다. 벼슬아치 밑에서 일을 보는 사람을 구실아치라고 한다. 아전(衙前)이다. 예를 들면 관아의 사또는 벼슬아치지만 그밑의 이방 호방 형방등 아전은 구실아치인 것이다. 공무원을 ‘관리’라고 하는 것은 관료(官僚)의 ‘관’자와 이속(吏屬)의 ‘이’(리)자 합성어다. 그러니까 관료는 벼슬아치고 이속은 이를테면 구실아치다. 지금 말로 하면 관리관(1급) 이사관(2급) 부이사관(3급) 서기관(4급) 사무관(5급)은 관료이며, 주사(6급) 주사보(7급) 서기(8급) 서기보(9급)는 이속에 속한다. 요즘 세상에는 9급도 관리라고 하는데 이의가 없으나 따지자면 어원의 고사는 그러하다. 그렇지만 고인이 되어 후손이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지방(紙榜)에는 역시 이속의 직급은 올리지 않는다. 벼슬아치, 즉 ‘관’자가 들어가는 사무관 이상을 지냈어야 ‘○○관 신위’라는 지방을 쓸 수가 있다. 지방얘기를 꺼낸 김에 더 말하자면 가령 대기업 경영자 일지라도 ‘학생부군’을 면치 못한다. 나라가 부여한 사무관 이상의 고등관 출신이거나, 아니면 예컨대 나라(교육인적자원부)에 등록해 인정된 ‘박사’같은 경우는 지방에 올릴 수가 있다. 공무원노조 출범을 두고 사무관을 가입대상에 포함하느냐 제외하느냐가 큰 쟁점이 된 모양이다. 전공련측은 행정의 업무기능이 ‘주사행정’ 중심에서 점차 ‘사무관행정’중심으로 변화하는 추세에 있다며 사무관도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반해 정부측은 사무관이 관리직이니 만큼 관리직은 노조가입을 허용하지 않는 기업의 관행을 들어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세다. 공무원노조와 관련한 행자부 및 노동계의 양자 이견은 이밖에도 또 있다. 조직형태, 교섭대상자, 교섭사항, 노동권, 노조전임자 등 문제에 서로 거리가 먼 주장을 하고 있다. 노동권의 경우, 행자부는 단결권과 단체교섭권만 인정하겠다는데 비해 노동계는 교섭결과에 대한 단체협약 체결권까지 요구하고 있다. 이에 다른 것은 더 두고 지켜볼 일이나 가입대상에 사무관을 포함시키자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다. 공무원의 직급 체제상 이치에 맞지 않다. 업무중심이 어디인가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중앙부처는 사무관 중심이라기 보다는 서기관 중심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白山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山은 숭배의 대상으로 신성시돼 왔다. 산악숭배의 숭산사상(崇山思想)은 산에는 반드시 신령이 있다고 믿는 일종의 원시신앙이었다. 중국의 오악(五嶽), 티베트의 카이라스산, 네팔의 히말라야, 그리스의 올림포스산, 바빌로니아의 에크르산, 유태인의 시나이산에 대한 신앙이 모두 이에 속한다. 우리나라의 산에 대한 애니미즘(animism)적인 경향은 오늘날까지도 우리 생활에 일부로 남아 있다. 그중에도 건국에 관한 단군신화는 한민족의 발상과 건국이 산에서부터 비롯했음을 말해준다. 숭산사상은 산에 대한 신앙으로 전해져왔다. 백제때는 선사신기급산곡지신(先祀神祇及山谷之神)으로 숭앙하였고 신라때부터는 삼신산(三神山)·오악에 제사 지냈다. 삼신산은 봉래산(금강산)·방장산(지리산)·영주산(한라산)으로 정하였고, 오악은 토함산·계룡산·태백산·부악산·지리산을 칭하였다. 고려때는 사악신(四嶽神)으로 지리산·삼각산(북한산)·송악산·비백산을 정하여 제사 지냈다. 또 치악산·죽령산·주흘산·금성산·한라산·오관산·마니산·감악산·백두산 등에 제단을 만들고 나라의 제사를 지냈다. 조선조에 와서 오악은 금강산·묘향산· 백두산·지리산·삼각산으로 삼았다. 이러한 삼신산과 오악에 대한 자연 신제는 높은 곳, 즉 산에 제단을 마련하여 제사한 것만이 아니라 태양신에 접근하려고 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오늘날 인류가 생존하는데 산의 소중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특히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일컬어 온 우리나라는 국토의 70% 이상이 산지인데다 구릉성의 야산이 많기 때문에 예로부터 그 지역주민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쳐왔다. 바다를 매립하여 지도모형이 바뀌듯이 무분별한 개발과 벌채, 오염 등으로 산지면적도 줄고 산의 환경이 위기에 처했다.이러한 때 유엔이 2002년을 ‘산의 해’로 정하고 지난 11일 뉴욕본부에서 공식 출범식을 가진 것은 인류를 구원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선인(仙人)의 ‘선(仙)’자에 사람과 산이 함께 있는 까닭은 의미가 심장하다. 2002년 새해 첫날 새벽 인근에 있는 산 정상에서 가족들과 함께 일출을 맞이하는 것도 뜻 깊은 일이다.

일왕의 뿌리

평양서 발행되는 통일신보가 올 11월 24일자에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 ‘동국여지승람’에 기술된 ‘일본’의 국호가 만들어진 유래를 소개한 바 있다.“일본이라는 말은 고조선 때부터 우리 선조들이 국호로서가 아니라 일본땅 자체를 가리켜 지은 것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이라는 국호를 처음 만든 것은 ‘조선사람’이라는 주장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옛 선조들이 우리나라 국호를 동쪽에서 해가 솟는 땅이므로 ‘조선(朝鮮)’이라 지었으며 “동쪽에 있는 일본땅을 해가 돋는 곳의 밑이라는 의미에서 태양을 의미하는 ‘일(日)’자에 밑을 의미하는 ‘본(本)’자를 결합하여 일본이라고 불렀다”고 기술돼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 사람들도 잘 알고 있다고 한다. 그 구체적인 근거로 일본의 지명 유래와 정치 연혁 등을 다룬 ‘대일본지명사서’의 기록을 들었다. 이 책 ‘국호편’에 일본이라는 국호의 유래가 기술돼 있는데‘일본’이라는 말은 ‘조선 사람’들이 처음 만든 것이며 “일본사람들이 그 이름이 아름답고 어울린다고 하여 만고불변의 국호로 삼았다”고 돼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23일 68세 생일을 맞은 아키히토(明仁) 일본 국왕이 특별기자회견에서 한·일 양국의 인적·문화적 교류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記)에 기록된 것과 관련해 한국과의 연(緣)을 느낀다”고 말해 한·일 양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간무’는 재위 기간 781∼806년의 제50대 일왕이다. 일왕의 뿌리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다. 대체로 ‘대륙계 기마민족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백제왕실계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는 학설은 그 중 한 갈래다. 최근에는 가야왕실이 일본 왕실의 바탕이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다 알려진 사실이어서 공개적 언급에 의미를 두고 있지만 일본 국내는 일왕의 발언을 엄청난 총력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이다. 일본 왕실의 뿌리가 한반도계에 있고, 국호 ‘일본’을 고조선 때의 한국인들이 지어준 사실을 일본사람들은 잊어서는 안된다. /淸河

우리의 음주문화는 양 위주다. 예전에 막걸리를 많이 마셨던 탓인 것 같다. 막걸리는 요기로 먹기도 했다. 지금은 양주 소주 민속주 등 여러가지 술이 있다. 술은 여러가지지만 공통점이 있다. 어떤 술이든 많이 먹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1·3·5·7·9로 나가는 술병의 숫자관념, 후참벌주삼배, 자작금기 등이 다 술을 많이 먹기 위한 구실로 지어낸 말 들이다. 주선(酒仙), 주호(酒豪), 주장(酒將)이니 하는 말도 있다. ‘두주불사’라고도 한다. 폭탄주가 성행하고 1차 2차 3차로 가는 주벽도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가운데 우리나라가 가장 술을 많이 먹는 나라로 꼽혔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조사결과 알코올농도 20도 이상의 독주만도 다른 회원국의 평균 소비량에 비해 5배이상 마시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보도가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국내 텔레비전 광고를 보면 술 광고가 유난히 많다. 온통 술꾼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인 것처럼 보인다. 역시 주류시장 규모가 해마다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올해만 해도 지난해에 비해 맥주 10%, 소주 14.1%, 위스키는 21.7%가 늘었다. 한국사회가 마치 술독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실제로 술을 못마시면 축에 못끼는 듯한 분위기의 좌석이 적잖은 게 사실이다. 반대로 술을 잘 마시면 무슨 호걸풍으로 과시되기도 한다.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술 자리가 늘고 있다. 망년회, 송년모임 등이 이런 연줄 저런 연줄로 겹치는 이들이 많다. 술은 덜 마시거나 안마신다 하면서도 일단 입에 대기 시작하면 폭음하게 되는 것이 술꾼들의 어쩔 수 없는 버릇이다. 주류업계는 이런 술꾼들의 연말특수를 노려 업체마다 공장을 풀가동하는 호황을 누린다고 한다. 알코올 공급 총력전으로 떼돈을 버는 모양이다. 알코올로 인한 사회·경제적 연간 손실액이 국민총생산(GNP)의 4%인 17조원대에 육박, 교통사고로 인한 사회적 비용 13조원을 능가한다는 어느 통계가 있다. 굳이 이같은 통계가 아니더라도 술은 먹어도 절제있게 먹어야 한다. 세태가 술을 안먹고는 못배기게 만든다 하여도 과음한다 하여 해결되는 게 아니다. 과음하지 않는 망년회, 송년회 등으로 좋은 세모가 되면 좋겠다. /白山

聖夜

Xmas의 X는 그리스어로 그리도스(Xritos)의 두문자에서 유래했다. 원래는 예수의 탄생은 BC 4년이며 탄신일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일설이 있다. 성탄을 축하하기 시작한 것은 AD 200년경이나 이 무렵의 성탄일은 5월20일 이었던 것으로 전한다. 성탄절을 12월25일로 공식화 한 것은 AD 325년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그해 열린 니케아 종교회의에서다.12월25일부터 세 동방박사의 아기예수 참배를 기념하는 이듬해 1월6일 공현축일까지의 12일간을 크리스마스 기간으로 정했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생명의 나무’를 상징한다. 16세기 무렵 독일의 북부지대에서 이를 장식했다는 설이 있으나 19세기 영국 디킨즈의 작품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영향으로 크리스마스 트리가 퍼지기 시작해 마침내 미국에서 크게 일반화 하게 됐다. 산타클로스는 어린이 보호의 성인으로 추앙된 이탈리아 미라노사교(司敎) 성 니콜라스의 애칭이다. 당시 12월6일 성 니콜라스 축일전날 선물을 교환하던 풍습이 영국 청교도에 의해 미국으로 전파되면서 북극의 순록썰매를 타고와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전하는 지금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로 발전했다. 역시 디킨즈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1834년 간행)은 크리스마스 때면 생각나는 유명한 작품이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하는 성탄축하 찬송의 메아리가 온 거리에 가득한 가운데도 탐욕덩어리인 수전노 스크루우지는 조카의 축복도, 노신사의 빈민구제 기부 제의도 매정하게 뿌리친 채 돈 헤아리기에만 바쁘다. 그러다가 7년전 죽은 고리대금업 동업자의 망령이 나타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처참한 미래의 모습을 보게 함으로써 비로소 개심하여 밝은 인성으로 크리스마스 아침을 맞이한다는 내용이다. ‘하늘에는 영광을, 땅에서는 평화를’찬양하는 성탄일이다. 한데도 세상은 나라 안팎으로 심히 어지럽고 사회는 서로간에 이웃 인심이 척박하다. 탐욕과 불신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오늘 밤은 크리스마스 이브다. 기독교도든 아니든 오늘 밤을 집에서 가족과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보내는 게 좋을 것이다. 스크루우지가 마음의 눈을 뜬 것처럼 저마다 가슴속 사탄을 몰아내고 맑은 인간의 심성을 회복하여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그런 성야(聖夜)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白山

길조

익조라고 하여 나라새(國鳥)로 까지 지정됐던 까치가 천대받고, 흉조로 알려졌던 까마귀가 오히려 길조로 부각되는 세상(世相)이 되었다. 사실 까마귀는 중국 지안(集安)에 있는 고구려 고분에도 신성한 날짐승으로 나타난다. 천장벽화 태양 가운데 검은 색으로 그려진 것이 있는데 자세히 보면 다리가 세개 달린 까마귀다. 이를 삼족오(三足烏)라고 한다. 이처럼 태양을 까마귀로 상징화하는 것은 고대 문화에서 많이 나타난다. 신라의 ‘연오랑(延烏郞) 세오녀(細烏女)’에서도 까마귀가 태양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동해가에 살고 있던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일본으로 건너 가면서 신라에는 해와 달이 없어지는 괴변이 생겨났다. 왕이 사신을 보내 연오랑을 찾았더니, 하늘의 뜻으로 바다를 건너 왔다고 하면서 세오녀가 짠 비단을 건네 주었다. 사신이 신라로 돌아와 이를 제사했더니 다시 해와 달이 생겨났다고 한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둘 다 이름에 까마귀 오(烏)를 쓰고 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까마귀를 밝음의 상징으로 이해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새끼 때 어미가 키워준 은혜를 잊지 않고 늙은 어미새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는 까마귀는 효의 상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불효를 반성하기 위해서 까마귀를 등장시킨 시조가 많이 남은 연유도 그 때문이다. 까마귀가 죽음을 알려주거나 또는 불길함의 상징으로 전락한 이유는 색깔탓인 듯 하다. 북쪽을 가리키는 색은 검정색이다. 죽은 사람을 저승으로 데려간다는 저승사자가 입은 옷의 색도 그래서 검정으로 나타내는 모양이다. 검정색의 이미지가 그대로 투영된 새가 바로 까마귀다.이런 관념은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확실히 정착되었다. 그 이유는 주자가 <시경> ‘북풍’에 나오는 까마귀를 불길한 새로 여긴 것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 <주자가례>를 의례의 근간으로 삼은 유학자들은 주자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지대자도 수년 전 중국 지안 고분벽화에서 삼족오를 봤을 때는 몰랐는데 일본 도쿄호텔 인근 아침 공원에서 비둘기처럼 노닐고 있는 까마귀들을 보고는 섬쩍지근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신라 때 일본으로 건너 갔다는 세오랑 세오녀의 이야기가 마치 사실처럼 여겨진다. 민속학적으로도 까마귀가 길조로 인식돼 가고 있다. 이 또한 세태의 한 변화다. /淸河

집배원

“아저씨 아저씨 우체부 아저씨/큰 가방 메고 어디 가세요/옳지 옳지 왔구나 편지가 왔구나/시집 간 언니가 내일 온대요”동요에도 나오듯 우체부는 몇년전까지만 하여도 거의 우편물을 커다란 가방에 넣고 배달했다. 약 10년전부터 ‘집배원’으로 호칭이 바뀌었는데 아침에 우체국에 출근, 자신이 배달할 우편물을 정리하고 기타 세부적인 계획을 세운다. 집배원은 걸어서, 혹은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수취인에게 배달을 하거나 도로변 우체통에서 수거한 우편물을 우체국으로 가져오는 일을 주로 한다. 우리나라에서 집배원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895년(고종 32년)이다. 그러나 근대식 우편사업은 이보다 앞선 1884년이었다. 이때 서울에 우정총국을 두고 인천에 분국을 설치하였으나 갑신정변으로 곧 폐쇄되었다. 그뒤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나면서 우편업무를 재개하였으며, 이듬해 을미개혁으로 관제가 개편됨에 따라 우체부 8명을 선정하여 진고개에 있는 일본 우편국에서 우편업무를 견습시키게 되었다. 이들이 우리나라 집배원의 효시이다. 집배원은 공무원이기 때문에 공채시험에 합격하여야 한다. 집배원의 평균학력은 고등학교 졸업자가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며 나머지는 전문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다. 최근에는 대학교 졸업자들도 많이 응시하고 있어 응시자들의 학력수준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집배원들은 대부분 이른 아침부터 일을 시작하며 우편물을 배달할 때에는 날씨와 관계없이 항상 실외근무를 하여야 하기 때문에 어느 직업보다 애환이 많다. 직무수행 의식이 철저하여 폭설 속에서 동사하는 등 순직 사례도 허다하다. 연말연시를 맞은 경기도와 인천의 집배원들이 요즘 과중한 업무로 인해 순직 직전이라고 한다. 경기도의 경우 정규집배원 1천222명, 상시집배원 651명이고, 인천은 정규집배원 263명, 상시집배원은 141명으로 업무량에 비해 인원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루 15시간 이상을 우편물 분류와 배달작업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소방관의 순직처럼 무슨 대형 불상사가 터진 뒤에 야단법석을 피우지 말고 집배원들의 인력확충은 물론 상시집배원들의 처우 개선에도 제발 신경 좀 썼으면 좋겠다. / 淸河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