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바뀌고 있다. 20여년 전의 금지곡이 대통령의 애창곡이 될 만큼 바뀌었다. 그릇된 권력에 항거하는 현장마다 목청껏 외치던 ‘상록수’가 권력의 정점인 대통령 취임식에 울려 퍼졌다. 대한민국은 정지되어 있다. ‘야인시대’에서의 좌익은 여전히 빨갱이에 머물러 있다. 폭력으로 집약되는 한 인물의 일생이, 영웅이 실종된 시대의 대체영웅으로 화려하게 재등장하고 있다. 지난달 21일, 몽양 여운형의 고향 양평의 군민회관에서 ‘2003년에 돌이켜보는 몽양 여운형’ 세미나가 열렸다. 필자는 말석에서 그 준비를 거들었다. 개최 이틀 전, 점잖은 어른에게서 지엄한 꾸중을 들었다. 왜 빨갱이를 모시느냐, 는 질타를 한참 듣고 조심스레 그리 여기는 까닭을 여쭸다. ‘야인시대’도 안 보느냐, 는 반문에 깊이 머리 숙여 사죄하는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점잖은 어른에게, 더불어 몽양 여운형 선생에게. 점잖은 어른에게는, 편협한 시각을 밑천 삼아 수백 수천만을 대상으로 붓을 휘두르는 글쟁이의 객기에 대해 동일 업종에 종사하는 한 사람으로서 사죄를 올렸으며, 몽양 선생에게는 반세기가 훌쩍 넘었음에도 여태 존함 석자 떳떳이 모시지 못하는 고향 후배의 한 사람으로서 사죄를 올렸다. 대중문화는 시대의 거울이다. ‘야인시대’와 ‘상록수’가 동시에 각광받는 작금의 풍토는 2003년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반영하고 있다. 관행에 안주하려는 기운과 개혁으로 내닫는 기운이 어느 쪽이 더 강하다 할 수 없을 만큼 공존하고 있음을 또렷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근대사는 비극으로 점철돼 있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생각이 다른 사람은 곧 적이 되는, 지극히 단순하고 위험한 이분법이 사회전반을 장악한 때문이다. 몽양 여운형은 그 이분법에 저항했으며, 그 이분법에 희생당한 사람이다. 마치 바둑판에서처럼 흑 아니면 필히 백을 쥐어야 하는, 극좌와 극우만이 존재하던 지극히 단순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흑과 백을 모두 쥐었으며, 흑과 백을 모두 물리친 사람이다. 2003년 오늘, 그 이분법은 여전히 건재하다. 극렬한 反美가 아니면 줏대 없는 親美로 분류되고, 무작정의 통일지상주의자 아니면 피도 눈물로 없는 반민족주의자로 분류되고 있다. 다만, 예전처럼 총칼로 대립하지 않는다는 게 그나마 역사의 진보랄까. 새로운 정부의 탄생을 지켜보며, 아주 오래된 꿈을 다시 꿔본다. 보수파는 역사가 남긴 교훈으로 진보파의 서두름을 지혜롭게 제어하고, 진보파는 보수파의 신중함을 디딤돌 삼아 높이 도약하는 꿈을. ‘생각이 다른 사람’의 定義가 ‘무슨 수를 쓰든 교정, 혹은 말살의 대상’에서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친구, 혹은 합의도출의 대상’으로 개혁되기를 꿈꿔본다. 더불어 일찍이 이러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 몽양 여운형 선생을 비롯한 숱한 선각자들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예우가 뒤따르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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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일보
2003-03-11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