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변하지 않은 '盧'

‘화합과 상생의 시대’, ‘분열 극복’, ‘사회통합으로 국력결집’, 이 시대에서 이보다 더 좋은 말이 있을 수 없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소추 기각 결정 이후 노무현 대통령은 이 며칠새 이토록 좋은 말을 했다. 그러나 처음 나온 말은 아니다. 전에도 종종 했던 말이다. 전에 했던 말을 되풀이 하는 것은 한 말이 말처럼 제대로 안되고 있는 탓이다. 이유가 뭘까? ‘화합상생’ ‘분열극복’ ‘사회통합’은 상대를 용서하고 포용해야 가능하다. 상대의 굴복을 요구하는 ‘화합상생’ ‘분열극복’ ‘사회통합’의 수사는 공허하다. 대통령은 원칙을 많이 강조한다. 원칙이란 상대가 인정하는 원칙이 되어야 설득력이 객관화한다. 내가 정한 원칙의 주관에 복종을 은유하는 자아 중심의 원칙 관념은 힘(권력)의 행사일 뿐이다. 예컨대 토론은 나의 생각을 상대의 말에 따라 바꿀 수도 있어야 토론이다. 상대의 생각을 나의 생각으로만 주입시킬 요량인 토론은 이미 토론이 아니다. 승부사의 기질은 타고 났다. 정치인의 입신 과정도 그렇지만 대통령 후보가 되기까지, 그리고 당선되기까지의 과정은 정말 숨가쁜 숱한 승부의 고비, 그리고 또 중첩된 관문의 돌파였다. 난관 돌파의 위기관리 뚝심은 국회의 탄핵소추 결의 전날에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적당히 사과해서 적당히 넘기라고 한다면 이는 원칙이 아니기 때문에 받아 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탄핵이 제기된 소추가 불발되어 업무에 복귀한 대통령을 두고 ‘날개를 달고 돌아왔다’고 하였다. 호랑이가 날개를 단 면모는 소추기각 결정 이튿날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정중하면서도 당당하였다. 다 좋다. 그러나 경제위기를 위기로 보는 것이 위기를 과포장하여 더 부추기는 것으로 인식한 것은 유감이다. 국고채 잔액은 94조4천억원으로 늘어 (경제정책의 버팀목인) 재정이 급속으로 악화되는 가운데, 워크아웃 기업은 절반 가까이 돈벌어 이자도 못내고, 신용불량 기업은 (경영난 심화로) 13만여개에 이르며, 서민들은 98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는 연속 4개월 째의 생필품값 폭등세로 비명이 속출하고, 가계부채가 가구당 평균 3천만원을 돌파한 가운데, (경제회복의 최대 걸림돌인) 신용불량자 370만명에 잠재신용불량자가 400만명에 달하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으며, (미국으로도 모자라) 중국 총리의 말 한마디에 경제가 휘청거리는 속에서 내수부진은 여전하고, 비정규직 차별 해소가 (올 노사문제의)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마당에 이를 위기라고 하는 게 위기를 부추긴다고 한다면 대통령이 보는 진짜 경제위기의 시각은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 대통령의 이런 인식은 객관화 되지 못한 자아 중심의 원칙 관념에 기인하고 이는 또 체질화한 승부사 기질에 기인한 것으로 보아진다. 하지만 개혁은 뚝심이 작용될 수 있는 정치가 아닌 건 개혁은 곧 민생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마다 할 이유가 없는) 개혁이 아니고 개혁에 대한 원칙의 객관화다. 그리고 이는 균형 감각이다. ‘화합상생’ ‘분열극복’ ‘사회통합’ 등 이 역시 다 균형감각의 판단인 것이다. 촛불시위의 평화적 모습에 감동받았다는 것은 능히 인정된다. 그렇다면 탄핵지지의 평화적 시위 모습에도 타산지석의 느낌을 가졌어야 한다.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탄핵 반대의 촛불을 든 군중도 대통령의 국민이고, 탄핵 지지의 피켓을 든 군중도 대통령의 국민인 것이다. 관저 칩거의 직무정지 63일은 실로 울분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중은 이런 것을 원했다. (업무에) 복귀하면 소신있는 변화가 있어 줄 것으로 기대했다.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은 그런 모습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당장의 경제난 타개 해법은 참으로 어렵다. 하지만 ‘화합상생’ ‘분열극복’ ‘사회통합’은 대통령이 작심만 하면 당장이라도 가능하다. 나만의 주장이 아니고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참다운) 화합과 상생의 시대를 여는 길이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헌재 선고를 앞두고...

아직도 기억한다. “나 모르게 그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다. 지난 3월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의결되기 바로 전날 대통령은 그랬다. 텔레비전으로 생중계 된 그 자리는 대국민 입장 표명의 자리였다. 측근비리를 말하면서 그가 재벌 기업에서 받은 돈의 일부로 아파트를 샀다는 검찰수사 보도는 사실과 다르다고 까지 해명했다. 새 아파트를 사면서 전에 살던 집의 매매대금이 제때 빠지지 않아 우선 기업에서 받은 돈으로 지불하고 나중에 받은 매매대금으로 충당했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내용의 측근비리와 선거법위반 그리고 경제파탄 등이 심판 사유로 된 헌법재판소 선고가 대통령 직무정지 60여일만인 내일 열린다. 법률심리, 사실심리, 정황심리의 심증형성이 어떻게 판단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재판관들의 자유심증주의 권한에 속한다. 그러나 소수의견을 개진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책임의 은둔이며 도피다. 소추를 인용하여 나라의 대통령을 파면하느냐, 소추를 기각 또는 각하하여 복귀시키느냐 하는 재판이다. 역사에 기록된다. 이토록 책임이 막중한 합의제 재판이 가부간에 전원 일치의 9대0이나 0대9가 아닌 이상에는 단 1명일 지라도 다른 소수의견이 있으면 결정문에 개진돼야 하는 것은 역사적 공식문서의 정확한 기록이 돼야하기 때문이다. 임명직의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민선직인 대통령을 심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정신나간 주장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헌법기관이다. 국회의원 등 각급 민선직의 비리를 임명직 법관이 재판하는 것도 법관 또한 헌법 기관이기 때문인 것이다.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탄핵소추가 계류된 뒤 경찰의 각별한 경호를 받았던 것으로 안다. 이 연유가 대중집회의 위세가 미친 신변 안전의 우려에 있었다면 참으로 불행한 사실이다. 물론 재판관들은 심증형성에 그런 영향을 받지 않겠지만, 객관적 관점이 그렇게 보일 수 있는 것은 선고의 권위와 무관하기 어려운 사실을 간과하기가 심히 어렵다. 선고를 예단하는 언행이나 일정을 잡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정이 이런 터에 소수 의견을 결정문에서 묵과키로 하는 것은 헌법재판소의 권위를 위해 더욱 바람직 하지 않다. 만약 소수 의견이 있는 데도 이를 밝히지 않아 비록 당장은 모른다 하여도 결국은 다 밝혀지게 마련이다. 기왕 이럴 바에는 재판관 누구는 이렇게 판단하였고 또 누구는 저렇게 판단하였다는 내용을 결정문을 통해 공개하는 것이 소신에 책임을 지는 재판관다운 당당한 자세인 것이다. 국론 분열을 우려한다는 해명은 설득력이 약하다. 오히려 무성한 추리와 루머로 혼돈을 더 할 우려가 높다. 불법과 부당함은 본질이 다르다. 탄핵 소추안의 국회 의결은 관점에 따라 부당하다는 비판은 있을 수 있으나 의결 자체를 불법으로 보는 주장은 참으로 황당하다. 더욱 가관인 것은 대통령 소추에 가결 표를 던진 국회의원이 역풍이 불자 ‘잘못했다’며 싹싹 비는 모습이다. 포퓰리즘에 영합하는 것이 반드시 진리인 것은 아니다. 역사의 이런 사례는 많지만 여기선 그만 둔다. 고독해도 소신과 신념을 가질 줄 아는 정치인의 정치생명이 대중영합주의 보다 멀리 보아 더 길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이를 탓하여 미래를 망치는 것은 어리석다. 헌법재판소의 선고가 어떻게 나든 이젠 탄핵정국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동을 걸어야 한다. 헌법재판소 선고에 불복의 시비를 거는 것도 소용없고 누굴 원망하는 것도 소용이 없다. 오만과 증오가 얼마나 불행한 가도 알아야 한다. 민중은 지금 말 못할 고초를 겪고 있다. 자성할 줄 몰랐던 그는 자성해야 할 것으로 안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박지원의 '통곡'

정치권력은 쟁취의 전리품인가, 아니다. 권력 장악은 쟁취의 모진 과정을 거치긴 한다. 하지만 처분이 자유로운 전리품일 수는 없다. 정치권력의 장악은 책임을 수반한다. 영원한 정치권력은 동서고금 그 어디에도 없다. 거머쥔 권력을 놓았을 때가 거머쥘 때 못지않게 중요하다. 권좌에서 내려오는 게 홀가분한 마음은 책임의 고통에서 풀려나는 것이며, 권좌에서 내려오는 게 두려운 마음은 남용의 발목으로부터 붙잡히는 공포다. 이를 모르지 않으면서 남용의 유혹을 좀처럼 뿌리치지 못하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권좌를 생전 누릴 것 같은 착각속에 빠지는 것이 또한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그를 가리켜 세인은 ‘부통령’이라고 했고 ‘소통령’이라고도 했다. 새천년민주당 정권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누구보다 가까운 지근에서 항상 실세의 중심에 섰다. 문화관광부 장관을 하면서 직명과는 거리가 먼 6·15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비밀 특사로 평양에 다녀온 것은 DJ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 가를 말해 준다. 그리고는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기용됐다. 그가 곁에 보이지 않으면 DJ가 불안해 했다는 말이 과히 틀린 게 아니다. 그의 충성심은 실로 대단하였다. 그래서 대북송금에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사법처리에도 후회없는 역사관과 함께 여전히 불변의 충성심을 보였다. 그러한 그가 현대 비자금 150억원을 받은 특가법상의 뇌물수수 혐의로 항소심이 계류중인 법정에서 마침내 눈물을 흘렸다. “생명보다도(소중한) 하나 남은 제 오른쪽 눈을 (제발) 지키게 해주십시오….” 재판장에게 이렇게 20여분간 호소했다고 (신문)보도는 전했다. 녹내장으로 30년 전 실명하여 의안을 한 왼쪽 눈에 이어 근래 오른쪽 눈마저 녹내장이 악화됐다며 장기 입원치료를 위한 구속집행정지를 읍소했다. 영어의 몸으로 과거의 여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수인에 불과하다. 밥 못 먹는 것을 딱하게 여긴 어느 모범수가 사준 빵을 보고 울었다는 나약한 여느 인간에 불과하다. 이제 ‘부통령’도 ‘소통령’도 아닌 병자에 불과한 지난 영화가 그리 먼 세월인 것은 아니다. 겨우 1년 남짓 된다. DJ조차 그의 절규를 들어주는 데 아무 힘이 되지 못하고 방관만 하는 처지가 됐다. 권력이란 원래가 이런 것이다. 권력을 행사함에 있어 흠이 없어도 권좌에서 물러나면 줄 떨어진 두레박이다. 하물며 흠이 있으면 추궁을 받음에 있어 더욱 가혹한 건 마땅하다. 권좌와 수인의 나락은 하늘과 땅 사이지만 그 길은 결코 먼 게 아니다. 멀지 않는데도 자기만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으로 알고 자만을 버리기가 어려운 것이 바로 권력의 잘못된 맛이다. 노무현 정권의 뒤끝은 어떨지가 궁금하다. 하긴, 이미 드러난 것도 있다. 이른바 측근비리는 무척 슬프게 한다. 그들이 텔레비전 화면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조금도 뉘우침이 없이 당당해 보이는 모습은 정말 뻔뻔스럽다는 생각을 갖게 하여 슬프다. 권력을 정권 쟁취의 전리품으로 여겨 그러는 것 같다. 구태의 이런 해묵은 생각으로는 감히 개혁을 말할 수가 없다. 박지원의 법정 눈물이 호가호위의 소치라면 이 정권에서의 호가호위 역시 피눈물을 쏟게 된다. 그의 실명 위기가 사실인 지 엄살인 지는 외부에선 확인이 어렵다. 법은 그의 죄값에 상응하다면 그 어떤 중형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에게 빛을 잃게할 권리는 어느 법에도 없다. 재판을 마치고 병원으로 돌아가는 앰뷸런스 안에서 감정이 복받친 듯 대성통곡했다고 (신문) 보도는 전했다. 이 정권에서도 뒷날 대성통곡하는 불행한 권력이 없기 위해서는 그 통곡의 의미를 자신의 일처럼 되새겨 보아야 한다. 당부하는 이유가 있다. 불행한 정권을 두는 것은 곧 민중의 불행이기 때문인 것이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당신 웃는가, 당신 우는가

당신 웃는가, 당신 우는가, 웃을 만도 하고 울 만도 하다. 실컷 웃으라, 실컷 울으라, 어차피 시대의 윤회인 것을, 이도 국운이므로 받아 들여 새로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명심할 게 있다. 승자의 웃음도, 패자의 울음도 영원한 것은 아니다. 기껏 반십년의 세월이다. 승자의 오만이나 패자의 한풀이는 타임머신을 다시 과거로 되돌리는 저주다. 더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말 한마디로 하늘을 날으는 새도 떨어 뜨릴만큼 위세가 당당했던 그들이 대를 이어 영어의 몸이 된 전철을 지금 웃는자들은 가슴 깊이 새겨 경계하여야 한다. 뼈저린 서러움으로 고독에 떨던 그들이 영광을 되찾고 나선 객기를 일삼은 잘못된 전철을 지금 우는자들은 마음속 깊이 새겨 두어야 한다. 격동의 시대다. 가치관의 변화는 참으로 힘든 진통을 동반한다. 모험은 도약과 위기의 고비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기대와 불안이 엇갈리는 혼돈의 시대다. 좀 더 시야를 넓게 보고, 좀 더 멀리 보아야 한다. 이를 보지 못하고 웃는 웃음은 공허하고, 이를 외면하고 우는 울음은 의미가 없다. 이제 다 웃고난 승자는 뭘 할 것인가, 이제 다 울고 난 패자는 뭘 할 것인지가 큰 과제다. 승자든 패자든 해야할 일은 다 있다. 민초는 지금 웃는 자들의 말이 너무 많아 헷갈리고 우는 자들의 말이 너무 적어 어리둥절하다. 그래서 갈피를 못잡는 민초들은 마치 시험지 배부를 기다리는 수험생 같은 심정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고 한다. 민초들이 살기좋은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이다. 민초가 피땀을 흘리지 않게하는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은 아니다. 이런 세상은 그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민초는 더 많은 피땀을 흘릴 기회가 있어야 하고 이런 피땀이 조금도 헛되지 않게하는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이다. 웃는 자에게도 우는 자에게도 들려주어야 할 말이 있다. 더 나은 세상을 빙자하여 당신들은 민초들 위에 군림해 왔다. 선거란 이름의 행사만 치르고 나면 다시 오만해져 마치 철 지난 옷 대하듯 했다. 우리의 민초는 당신들 지배계급의 지배수단으로만 이용됐다. 이제는 안 그러겠다고 한다. 안 그러기 위하여 개혁을 한다고 한다. 믿어달라고 한다. 뭘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민초는 언제나 믿어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배신 당했다. 당신들이 믿으라고 하기 이전에 먼저 믿게끔 해보여야 한다. 말로서는 안된다. 말엔 이제 넌더리가 났다.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실행해 보여야 한다. 어려움이 많음을 모르진 않는다. 다원화사회의 이해 충돌은 참으로 난해한 문제점이 많다. 이러므로 당신들이 먼저 손해를 감수해 보여야 한다. 그래야 승복한다. 참다운 개혁은 승자의 전리품 같은 편익시설이 아니다. 웃는 자에게도 불편한 개혁이 되어야 우는 패자들도 따른다. 그래야 민초들 역시 공감한다. 기득권 포기는 지금 우는 자들만의 것은 결코 아니다. 지금 웃는 자들에게도 포기해야 할 기득권은 아주 많다. 세상이 이렇게 위에서부터 달라질 때 비로소 세상은 정말로 달라진다. 아래서부터 달라지길 바라는 세상은 맨날 그 세상이다. 과거가 그래 왔다. 이러므로 당신이 세상을 달라지게 하려면은 당신부터 스스로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열린우리당은 4·15총선의 정치적 승리로 웃음꽃이 만발하다. 청와대도 ‘정중동’의 활기를 띤다. 텔레비전 화면에 당신의 모습이 갑자기 많이 비추기 시작한다. 좌파가 득세한 총선이기도 하다. 총선 패배를 자위하는 정당도 있고 쑥대밭이 된 정당들도 있다. 시대의 반영이다. 시대는 멈추지 않는다. 관객은 무대를 바꾼다. 언젠가는 변하는 게 또한 시대다. 당신은 지금 웃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울고 있는가.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시민혁명관의 '함정'

이 공동체사회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 이른바 시민혁명관이다. 특정의 목적을 위해서는 거추장스런 법 따윈 무시해도 된다고 보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전공노나 전교조의 돌출된 탈법행위가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번 선거에서 총선연대가 낙선자 명단이란 것을 발표한 것도 비슷하다. 오늘 실시되는 제17대 총선 투표함에 무슨 정치 구호의 쪽지를 투입하겠다는 것도 역시 같은 양상이다. 일곱개의 인권·사회운동 단체로 구성됐다는 ‘국민발의권·국민소환권 쟁취를 위한 네트워크’라는 모임이 그 주체다. 이들이 투표함에 쪽지로 넣겠다는 ▲국민발의권 및 국민소환권 도입 ▲청년실업 해소 ▲이라크 파병철회 등 메시지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문제는 방법에 법치를 어기는 독선적 의식이다. “투표지 외에 이물질을 투입하는 것은 투·개표의 방해행위에 해당하므로 단속 대상”이라는 선관위측 지적에 ‘민주적 요구’임을 우기는 것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위험한 목적지상주의 관념이다. 목적의 가치성 못지않게 방법의 합리성을 요구하는 게 자유민주주의의 덕목인 것은 이것이 공동체사회의 공동선이기 때문이다. 방법에 합리성을 잃으면 목적의 가치성도 상실된다. 아호가 도올이라는 어느 학자가 ‘거리의 함성이 바로 헌법’이라고 지칭했다는 탄핵반대 촛불집회를 범국민행동측은 광화문에서 모래부터 재개하겠다고 밝혔다. 경찰의 불법집회 단속을 물리력으로 무력화시켜 강행하겠다는 생각 역시 법질서 절차가 생략된 시민혁명관이다. 범국민행동은 더욱이 “탄핵시국의 조기 종결을 바라는 대다수 국민의 뜻과 달리 헌법재판소는 정치적 고려에 휘둘려 미루고 있다”면서 “하루라도 빨리 신속하고도 분명한 탄핵기각을 결정해야 한다”고 압박, 재판에 노골적으로 적극 간여하고 나섰다. (개인적 견해로는 16대 국회의 탄핵소추안 의결은 의회쿠데타라는 정치 공세와는 달리 합법이었으며, 다만 사유가 파면에 이르기는 직무관련의 증거능력이 미흡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무게를 두고 있다.) 어떻든 촛불집회 재개의 그같은 주장이야말로 국민의 뜻 임을 빙자하여 재판을 법절차 없이 자기네 입맛에 맞추어 뚝딱 해치우는 정치적 판결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민혁명관이 부당한 것은 헌재 독립의 공정성을 현저히 침해하기 때문이다. 도올의 말대로 ‘헌법은 조문이 아니고 역사성’이고 ‘거리의 촛불함성이 바로 헌법’이라면 침묵하고 있는 다수의 군중도 잇따라 들고 나서 결국 길거리는 함성의 충돌이 범람한다. 이같은 무법천지가 민주주의는 아니다. 듣기좋은 함성은 정의고 듣기싫은 함성은 불의로 매도하는 이분법적 독재 또한 민주정치가 아니다. 편리한 법은 이용하고 불편한 법은 무시하는 것이 법치주의는 아니다. 불편하고 어렵고 멀더라도 따르면서 잘못된 법은 고쳐가는 것이 민주주의고 민주정치며 법치사회다. 참으로 희한한 것은 이 정권들어 두드러지게 나타난 시민혁명관이 권력을 비판하는 게 아니고 옹호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권력을 비판하든 옹호하든 시민혁명관이 부당한 것은 법치질서를 일탈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그랬다. 국회의 탄핵소추안 의결이 합법이라니깐 “히틀러의 나치정권도 법상으로는 합법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면 히틀러 역시 열광적인 군중의 교조적 숭배 대상이었지만, 논리를 이렇게 히틀러에 비유해 본질 밖으로 비약시키면 안 된다. 개혁은 혁명이 아니다. 만약 시민혁명관이 이에 생각의 뿌리를 두고 있다면 위험스런 오류다. 개혁 또한 법질서에 의한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강점이다. 데모로 잡은 정권은 데모로 쇠퇴하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이것이 이번 총선 결과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점으로 시민혁명관이 안고 있는 함정이다. 우리는 이같은 함정의 불행을 거부하고자 하는 것이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가슴을 열고 창공을!

"그는 이렇게 질타했다. “젊은이들은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도전에 너무 무관심하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좋은 일자리와 높은 소득과 근사한 집 뿐이다”라고 했다. 고촉통(吳作棟) 싱가포르 수상의 말이다. 어느 삼류 영화의 장면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힘을 내세운 남자의 폭력에 전전긍긍하던 여자가 재빨리 주방의 칼을 낚아 움켜잡고 남자의 목에 들이댔다. 상황은 역전됐다. 여자는 복수심에서 자신의 발등을 혀로 개처럼 핥으라 했고, 예리한 칼끝의 감촉을 목덜미에 느낀 남자는 ‘킹킹’대는 소리를 내며 시키는대로 했다. 형편이 불리하면 이런 수모도 감내하면서 위압적 폭력을 앞세우는 것은 정말 못난 짓이다. 말로는 큰 소리치는 젊은이들이 좋은 일자리와 높은 소득과 근사한 집을 갖기위해 패기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싱가포르의 사정인 것 같다. 잘난 척 하다가도 어떤 잇속에서는 한량없이 비겁할 만큼 나약한 폐쇄적 현실 탐닉을 싱가포르 수상은 개탄한 것이다. 이는 남의 얘기만은 아니다.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도전에 너무 무관심하기는 우리의 젊은이들 역시 거의 다를 바가 없다. 신시대의 주역임을 자처하면서도 새로운 비전은 커녕 구시대가 개척해 놓은 지식산업의 먹거리만 축내고 있다. 개혁을 말하면서도 남이 안보는 데선 여자의 발등을 개처럼 핥아낸 그 남자 못지않은 추악한 짓을 일삼는다. 앞으로 10년, 20년 뒤엔 뭘 수출해 먹고 살 것인 지 지금의 처지로는 실로 막막하다. 중국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끝내고 나면 거대한 경제공룡의 면모를 드러낼 것이다. 이를 위해 버릴 것은 미련없이 버리고 끌어들일 것은 과감히 끌어들이고 있다. 중국에 대해 갖는 국내 일부의 우월감은 큰 착각이다. 일본은 10년 뒤면 완전히 우경화한다. 세계 정상급 장비로 무장된 강병의 자위대는 ‘자위대’ 명칭의 허물을 벗어던지고 정식 군대로 개편될 것이다. 일본의 장래를 평화적 시각으로 보는 것은 큰 오산이다. 토인비는 일찍이 ‘역사는(나사 모양의) 나선형(螺旋型)으로 발전한다’고 하였다. 북 핵 관련의 6자회담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불가피하긴 하다. 하지만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의 참여는 마치 100여년 전에 있었던 열강의 각축을 연상케 한다. 또 반미·친미니 하는 가운데 들먹이는 자주·민족공조의 어휘 범람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방불케 하고 있다. 한마디로 모순의 시대다. 지난 19세기 말에 겪었던 모순의 시대를 21세기 초 들어 토인비의 말과 같이 한 단계 더 올라 제자리에 돌아온 나선형처럼 또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에 당했던 나라의 불운을 절대로 되풀이 할 수는 없고, 이를 거부해야 하는 것이 지금의 젊은이들이다. 탄핵정국의 찬·반이 어떻게 끝나든 이로 인하여 나라가 거덜나진 않는다. 젊은이들이 시대의 정체성을 잃을때 나라의 미래는 어둡다. 좋은 일자리와 높은 소득과 근사한 집을 갖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이므로 젊은이들의 이런 현실 추구를 탓할 수는 없다. 설령 당장은 백수일지라도 젊은 인생이 그대로 끝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삼류 영화의 남자 주인공 같은 젊은이가 되어선 도태의 표적이 된다. 진보는 개혁이고 보수는 수구인 것처럼 말하는 세태이지만, 반면에 진보의 수구세력이 있는가 하면 보수의 개혁세력도 있다. 이를 잘 헤아리는 것이 이 시대의 시대적 정체성이다. 시대의 변화는 감성적 변화가 아닌 이성적 변화다. 이를 가리지 못하면 진보도 보수도 말 할 수가 없다. 우물안 개구리가 되어서는 미로만을 헤맨다. 좀 더 나라안 일을 통찰하고, 좀 더 나라밖 사정을 관찰할 줄 아는 깊은 시각과 넓은 시야와 도전 정신을 가져야 한다. 젊은이들이여! 가슴을 열고 창공을 바라보라! 그 속에 자신의 젊음이 존재함을 발견할 것이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예수의 구유와 십자가

오늘은 예수 탄생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다. 신·구교를 망라한 기독교인은 물론이고 이밖의 많은 사람들이 경외심을 갖는 세계적인 경축일이다. 불교 조계종의 본산 조계사가 절앞에 내건 ‘아기 예수 탄신을 경축합니다’라는 축하 현수막이 무척 좋아 보인다. X-mas는 원래 ‘성찬’이란 뜻이다. 두문자 X는 희랍어 Xristo(그리스토)에서 유래됐다. 아기 예수 탄생의 정설은 물론 2003년 전이다. 이보다 4년 앞선다는 일설도 있다. 분명한 탄생일이 아직 기록상으로는 없다. 성탄을 축하한 것 역시 2세기 무렵부터다. 이땐 성탄일이 5월20일이었다. 12월하순이 된 것은 3세기 들어서다. 북유럽에서는 순수한 종교적 행사로 치렀던 데 비해 남유럽에서는 추수를 마친뒤에 갖는 사육제의 성격이 강했다. AD 325년은 기독교도를 탄압하던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처음으로 공인한 해다. 이 해 가진 제1차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크리스마스를 정식으로 정한 것이 12월25일이다. 다만 이땐 크리스마스날(12월25일) 이라기 보다는 크리스마스 기간으로 하여 기간을 이듬해 1월6일까지로 했다. 1월6일은 세명의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참배한 공현축일인 것이다. 그때 아기 예수는 구유에 누워 계셨다. 구유란 말이나 소의 먹이를 담아두기 위해 나무토막을 파서 만든 큰 그릇이다. 이렇게 온 아기 예수는 나이 설흔에 시작된 공생애 3년을 마지막으로 가르바리오 언덕에서 바리새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혔다.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입었던 마포로된 성의는 이탈리아 서북부 토리노 대성당에 안치돼 있다. 예수는 이토록 구유에서 태어나 갈릴리지방 나자렛에서 양부 요셉의 목수일을 돕다가 시작된 공생애를 끝으로 십자가를 지기까지 호사와는 먼 가시밭길의 생애를 보냈다. 국내에선 19세기 후반 흥선대원군 집권시 허다한 천주교도들이 신용산 새남터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동굴에 숨어 미사를 올렸으므로 하여 오늘의 명맥을 잇게 했다. 20세기 초반 외국 선교사들의 포교로 신문화를 이룩한 예수교는 간곤한 계몽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오늘날 성당이나 교회의 높다란 십자가는 하늘을 찌른다. 이 웅장한 건물속에서 올리는 미사나 예배가 과연 개척기 같은 성령의 축복이 충만한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유다가 예수를 바리세인들에게 밀고하면서 받은 은화 설흔냥은 노예 한 사람 값이었다. 그러나 유다는 결국 이 돈을 그들의 신전에 냅다 던지고는 예수가 못박히는 날 스스로 목을 매어 회개해 보였다. 얼마전 외지 뉴스위크에서 그녀는 창녀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부활을 최초로 지켜본 증인이다. 창녀가 맞다 아니다가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를 세번이나 부인하였다. 그리고도 회개 함으로써 부활 40일만에 승천하는 예수를 다른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서 지켜볼 수가 있었다. 예수의 박애정신은 포용이다. 우리는 얼마나 이같은 삶을 영위하고 있는가를 돌아본다. 신도는 아니지만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가르친 성경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는 못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늘 되새기곤 한다. 성탄절은 연말의 문턱이기도 하다. 어언간 2003년 올 한해가 다 되어간다. 좋은 성탄절 보내기는 자기 성찰의 보람에 있다고 믿는다. /임양은 주필

대통령의 눈물

설흔 여덟살의 정리해고 대상을 일컫는 38선은 평생직장관을 무너뜨렸다. 젊어서 들어간 직장을 천직으로 알고 백발이 되도록 내집 일처럼 땀흘려 일하는 평생직장관은 사회의 미덕이었다. 이런 사회의 미덕이 직장의 장애가 되어 공직에서, 기업에서 정년을 맞기가 무척 어렵게 된 이변속에서 살고있다. IMF사태때 오륙도에서 시작된 정리해고가 사오정으로 가더니 이젠 38선 명퇴가 예사가 돼버렸다. 이른바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뿌려진 눈물이 이루 말할 수 없다.후세인은 체포 당시에 10만달러를 지녔고 해외에 저축한 돈이 400억달러에 이른다. 그 어떤 이유로든 30년 독재의 부정축재를 합리화할 수 는 없다. 그러고도 구차하게 살기를 바라는 후세인, 부시의 침략의도가 어디에 있든 후세인 같은 정치지도자는 말살돼야 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노무현 대통령이 당선 1주년을 기념하는 노사모 모임에서 눈물을 글썽거렸다더니 엊그제 또 눈물을 글썽거렸다고 한다. 우체국 집배원 그리고 환경미화원 등을 청와대에 초청해 뭔가를 같이 하면서 말을 하다가 그러 했다는 것이다. 집배원, 미화원 등이 고생을 하는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눈물은 청와대에 초청한 이들의 고생을 생각 하기 보다는 말하다 보니 자신이 불우했던 어린시절의 감정이 복받쳐 나왔을 것으로 짐작된다.언젠가 집배원이나 미화원들이 일하는 현장에 가서 손목을 잡아 주겠다는 쇼맨십이 이들을 위하는 길은 아니다. 미화원 모집에 대졸 백수들이 왜 대거 응모하는가를 먼저 깊이 돌이켜야 한다.민중은 지금 죽을 맛이다. 대통령은 한가한 정치도박을 일삼는다. 대통령이 어떤 자리에서 눈물을 보였다고 하여 민중의 지지를 받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대통령의 눈물에 노빠들은 덩달아 감격할 지 모르지만 민중은 전혀 감격하지 않는다. 민중은 사이비 종교 같은 광신도가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임양은 주필

목요칼럼/퇴임후 재판도 각오해야

인간 노무현도 그렇고 정치인 노무현도 그렇게 살아왔다. 부딪치면 일단 치고 빠지고는 되받곤 했다. 불우한 환경에서는 그게 유일한 생존수단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다분히 주관적이며 도전적이고 편협적이면서도 포퓰리즘이 강하다. 대통령 자리도 이렇게 하여 올라섰다. 그러나 대통령 노릇을 이렇게 해선 좋은 대통령이 못된다. 정상의 자리에서는 투쟁의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불신의 망령, 피해 의식 등 이런 좁쌀스런 생각은 버려야 한다. 정상의 자리는 투쟁의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잘 하려고 하는 데 국회와 일부 언론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다고 힐난한다. 그러나 잘 하려고 한다는 인식은 대체로 그 자신과 아류 중심의 자아 변론이다. 독선인 것이다. 예컨대 그는 무슨 일에 말을 하면 문제해결을 돕기 보다는 더 어렵게 만들곤 한다. 마음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한시 바삐 자폐증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마음의 문을 닫아놓은 상태에서 갖는 4당대표 회동이나 기자 회견은 아무리 해보아야 국정과 민중에게 도움을 못준다. 그는 상대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런 면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먼저 열어 보이는 것이 순서다.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상의 포용력이다. 국정 최고책임자의 자질이기도 하다. 국정에는 말 연습이 또 있을 수 없다.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무가 오나라 왕 합려로부터 병서의 시범을 보여달라는 청을 받았으나 궁중에 남정네가 적어 궁녀 180명을 양편으로 나누어 창검을 들려 진을 쳤다. 그러나 두 주장부터가 엄명에도 불구하고 히죽거려 군율이 서지않자 왕의 총희인 주장들을 참함으로써 비로소 기강을 세워 군졸도 아닌 궁녀들로 육진도법을 성공해 보였다. 대만의 장개석이 보석 밀수와 관련된 며느리 인가를 공개 처형함으로써 부패의 고질병을 청산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다 아는 일이다. 엊그제 대통령이 가진 기자회견이 문자 그대로 ‘특별기자회견’이었다면 말이 좀 달랐어야 ‘특별’의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대선자금이나 측근비리에 검찰조사를 직접 받아 혐의가 성립되면 퇴임후에 재판을 받겠다’는 자세를 보였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큰 틀을 보고싶어 하는 민중에게 불법자금 10분의 1 설은 귀에 들리지도 않는다. 승자의 작은 비리가 패자의 큰 비리로 인해 덮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승자든 패자든 혐의가 있으면 다 법정에 서야 한다. 대통령은 스스로가 승자의 그늘에서 벗어나 승자의 프리미엄을 내던져야 한다. 그래야 온통 진흙 구덩이 속이었던 선거판에서 어쩔 수 없이 묻혔다는 흙탕물에 대한 민중의 도덕적 용서를 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 그러한 고백성사가 앞서야 추악한 대통령 선거를 영구 추방하는 정치개혁이 가능하다. 지금처럼 혀 짧은 훈장이 자신은 “바담풍…”이라고 하면서 학동들에게는 “바람풍”이라고 하라는 식이어서는 아무 공감대가 형성될 수 없다. ‘집 나간다는 여편네 아이 셋 낳고 주저 앉는다’는 속담과 같이 걸핏하면 그만 둔다는 허언은 뚝심도 아니고 자신감도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달라져야 한다. 마음의 문을 열면 넓은 길이 보일 것이다. 앞으로도 남은 장장 4년 2개월을 지난 10개월처럼 살게 해서는 민중을 가혹하게 해도 너무 하는 것이 된다. 닉슨은 워터게이트사건 자체보다 거짓말했던 것이 치명상이었다. 대통령을 칭송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대통령을 공격한다는 것은 참으로 괴롭고 불행한 일이다. 공격받는 분은 대통령이므로 어떻게 여길 지 모르겠으나, 불행한 대통령을 가진 민중은 대통령과는 비할 수 없이 더욱 더 불행하기 때문이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신행정수도, 가당치않다

나라의 수도를 은근슬쩍 옮기려 하는 희대의 마술극이 벌어지고 있다. ‘신행정수도’란 말부터가 당치않다. 청와대와 정부 부처는 물론이고 국회도 옮기고 대법원도 옮기려고 한다. 이건 수도를 옮기는 것이다. 이런데도 노무현 대통령은 ‘신행정수도를 만든다’고 한다. 개념 정립부터 국민에게 최면을 걸고 있는 말농간이다. ‘수도이전 건설 특별법안’이라고 하면 알기는 쉽지만 듣기에 저항감이 강하다. 이래서 ‘신행정수도 건설 특별법안’이라는 둔사로 얼렁뚱땅 해치우려고 한다. 수도 서울이 비대해져 도시공학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정부 예산의 40~50%에 해당하는 45조에서 60조원을 들여 인구 50만명의 신 수도를 만들어 천도하기 보다는 열배 백배나 더 낫다. ‘천도’를 ‘신행정수도’로 포장한 기막힌 주술은 충청권엔 뭔가 기대감을 부풀게 하고 비충청권에는 설마하는 둔감 속에 대선을 치르게 만들었다. 노 대통령 그 자신의 말처럼 정치적으로 재미를 톡톡히 보았다. 이제 그 재미를 내년 총선까지 두벌 수확 타작을 해 맛보려고 한다. 한심한 것은 정치권이다. 열린우리당은 노무현당이니까 그런다손 치더라도 명색이 제1야당인 한나라당이 엉거주춤 끌려가고 있다. 자민련이야 충청도당이니까 또 그런다손 치더라도 민주당마저 수서양단의 눈치놀음에 바쁘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의 이런 작태는 충청권의 총선 민심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무소신의 처세주의로 더 큰 손실을 보는 자충수가 된다. 대통령은 지역구도를 낡은 정치로 매도하면서 이처럼 낡은 정치를 교묘히 역이용한다. 또 충청권 전 지역을 대상으로 미끼삼은 신행정수도가 가령 총선이후 어느 지점에 막상 낙점된다 해도 충청권 전역에 고루 혜택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충청권의 발전은 신행정 수도라는 신기루 같은 꿈과 꿈의 좌절이 아닌 가시적인 다른 실질대책으로 대체돼야 한다. 신행정수도를 반대하는 데 대해 어떤 비난도 두렵지 않는 것은 일국의 수도는 정략이나 편견에 의해 옮길 수 없다고 보는 부동의 확신 때문이다. 이 정권은 대선공약을 금과옥조처럼 내세우지만 당치않다. 당선자의 공약은 어디까지나 포괄적 사항일 뿐, 개별적으로 다 용인된 것은 아니다. 공약 중 손도 안된 게 수두룩하면서도 신행정수도를 우기는 것 부터가 다분히 정략이다. 이 정권이 그래도 강행하고 싶다면 먼저 국민적 합의를 구해야 하고 국민투표는 이를 묻는 좋은 방법이다. 천도 문제야 말로 헌법이 정하고 있는 국가안위에 관한 주요 정책 사항인 것이다. 무슨 위원회를 두는 관제 들러리 구성은 구색 맞추기일 뿐, 국민적 합의 도출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대통령은 되지도 않는 재신임 국민투표 같은 것 보다는 천도에 대해 정작 국민투표를 통해 물어야 한다. ‘신행정수도 건설 특별법안’은 마땅히 폐기 돼야 하는 것으로, 다루어도 다음 17대 국회에 넘기는 것이 좋다. 만약 이 법안이 이번 임시국회에서 처리된다면 소신없는 그들이 누구인지를 유권자들은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 국내외에 화급한 현안이 산적해 있다. 국민총소득은 외환위기 직후인 1988년 이후 처음으로 전년에 비해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였다. 이런 판에 천도를 화두삼는 소모적 논쟁을 벌여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신행정수도’란 게 지닌 상황적 함정을 말하다 보니 ‘신행정수도’ 자체의 원칙적 허점에 대한 이론 전개가 미흡한 대목은 나중에 따로 더 언급하겠다. 다만 한가지 이 시대의 남행 천도 정략은 민족적 죄업임을 분명하게 밝혀 둔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청와대 편지- '답답합니다'

“노심(盧心)은 한마디로 초사(焦思)다.”(한 386 핵심참모의 발언) 이러한 보도가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답답합니다. 정말 답답합니다. 대통령께서만 답답한 게 아닙니다. 대통령께서는 그래도 청와대의 영광을 누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민중은 더 답답합니다.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측근비리의 요지경속 실체는 무엇이며, 이라크 파병은 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며, 미군 한강이남 재배치는 또 무엇이며, 북핵은 어떻게 돌아갈 것이며, 신용위기가 위협하는 금융대란 조짐의 전망은 어떻게 보아야 하며, 민노총은 왜 반노 투쟁을 일삼는 것입니까. 부안 사태는 비단 부안 군민만이 아닌 민중적 불안의 요인이 되고, 제조업 분야의 공동화는 국민경제를 피폐화하고, 상인들마다 장사가 안된다는 아우성 속에 사회위기 수준은 더욱 높아가고 있습니다. 정부가 하는 일은 또 예컨대 대입수능이 말썽을 빚는 등 사사건건 왜 매끄럽지 못해 신뢰 추락을 자초하는 것입니까. 안희정이란 사람하고 청와대에서 정말 식사를 가끔 하는지오. 이를 자랑삼는 그 사람은 총칼 대신 노사모가 노란 목도리를 매고 한강 다리를 건너 5·16 정변후 40년만에 젊은 세대가 정권을 잡았다고 큰소리 친다는 데 맞습니까. 정권을 잡은 것은 자연인으로 말하면 노무현 대통령님이고 정당으로 말하면 민주당입니다.(노무현당으로 열린우리당이 분가하여 민주당은 이제 야당이 된 세계 정치사에 찾아볼 수 없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만 당초의 법통은 그런 것 아닙니까) 어떻게 감히 안희정이란 사람이, 젊은 사람들이 정권을 잡았다고 기염을 뿜어댈 수 있는지오. 뭘 잘했다고 말입니다. 코드가 그토록 대단한 건가요. 젊은 측근정치로 이스라엘을 위기에 빠뜨린 어리석은 왕 르흐브암이 생각 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통령께서 답답한 게 남의 탓으로만 생각하는지오. 내탓이라고 생각한 적이 얼마나 되는 지 궁금합니다. 다 대통령님 탓입니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회, 가장 강력한 야당을 만나서 정부가 힘이 드는 것’만은 아닙니다. 대통령 선거는 패거리로 해도 국정은 패거리로는 안됩니다. 김대중 정권이 실패한 연유가 코드, 즉 패거리정치를 한데 있잖습니까. 그 패거리들이 지금 감옥에 가 있습니다. 코드정치는 다르다고 무엇으로 보장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DJ 측근은 간곤한 민주화 투쟁의 역정에 섰던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의 대통령님 측근은 도대체 뭘 했던 사람들입니까. 선거공신이기 때문에 치부도하고 영화도 누려야겠다는 사람들은 단호히 잘라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듣는 욕은 아무리 먹어도 괜찮습니다. 그래야 대통령님이 살고 나라가 사니까요. 측근들의 ‘독만두’(일본에선 요즘 권력에 대한 아부를 이렇게 표현한다더군요)에 취하면 민중에게 욕을 얻어먹고 ‘독만두’를 버리면 민중의 지지를 받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통령님이 내년 4월15일 총선에서 안정세력을 얻기엔 무척 힘들 것 같습니다. 쉬운 길이라고 샛길로 가지 마십시오. 어렵더라도 큰길로 가십시오. 이것이 대통령님의 국정에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회’의 협력을 유도해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왜 편 가르기를 그리도 좋아 하십니까. 편 가르기가 사회 통합은 아니잖습니까. 청와대가 호남향우회를 왜 찾아다니는지오. 자신에게 좋은 것은 지역화합하고 나쁜 것은 지역감정이란 주관적 논리는 당치 않습니다. 지역이나 계층으로도 모자라 수도권 대 비수도권으로, 또 신행정수도지역(충청도) 대 비지역 등 이렇게 갈래갈래 갈라놓는 법이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신행정수도 문제엔 추후에 또 말씀 드리겠습니다) 대통령님을 공격하기 위해 이런 말씀을 하는 게 아닙니다. 민중이 존경하는 대통령을 갖는 것이 나라의 홍복이라고 보는 게 소신이니까요. 이런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어주시기를 바라는 뜻에 밝히는 충정입니다. 꼬일대로 꼬인 갖가지 현실 문제의 답답함이 다 대통령님 탓이라는 겸허한 마음으로 변화의 단안을 보여주십시오. 민중의 답답함을 풀어주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까요.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노무현의 ‘才勝德’

노무현 대통령(이하 노무현 또는 대통령)은 위기 타개의 귀재다. 그로서는 황무지 같았던 정치 역정의 입신 과정에서 나름대로 터득한 생존 방식일 것이다. 귀재같은 돌파력은 자신의 측근비리마저 최대한 원용하는 상상불허의 놀라운 솜씨를 보였다. 도대체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지낸 최도술이란 사람은 누군가. 이광재, 양길승, 이영로, 강금원이란 이름의 그들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최도술 비리가 불거지자 “눈앞이 캄캄했다”는 대통령은 재신임 카드를 불쑥 내밀었다. 이것이 노무현 스타일의 역공법이다.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이하 최병렬)는 노무현보다 선배이긴 하지만 단수는 아마 몇단쯤 떨어지는 것 같다. 재신임 카드의 낚시밥을 덜컥 물었던 최병렬이 뒤늦게 낚시인 줄 알고 낚시 바늘에서 빠져 나오는덴 한참 걸렸다. 상황은 대통령의 궁지 탈출에 이용당한 것으로 끝났다. 측근비리 특검법안의 거부도 그렇다. 대통령 입에서 (최병렬의) ‘협박정치’라는 말이 나왔을 때, 그의 머리엔 거부권 행사를 해도 좋겠다는 계산이 이미 서 있었을 것이다. 어떻든 특검법안은 떠났다. 정류장을 떠난 버스 뒷통수에 대고 항의하는 최병렬의 단식은 뭘 위해서인지 초점이 분명치 않다. 정기국회의 참여를 거부하는 전면투쟁이라는 것이 뭘 목표한 것인 지 알 수 없다. 공연히 국정을 발목 잡는다는 똥바가지만 뒤집어 쓰기가 십상이다. 이 또한 노무현식 노림수인 것이다. 최병렬이 아무리 배가 고파 기진맥진한다 해도 자신만 손해일 뿐, 체면을 세워줄 일이 생기기는 어렵다. 등원 거부에 명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역공의 암수에, 정공의 노림수에 이용만 당하는 제1 야당의 졸전은 실로 한심하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대해 퍼붓는 비난은 ‘의회주의 부정의 폭거’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뭐라고 해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원내 투쟁이어야 한다. 장내가 아닌 링밖의 장외로 뛰쳐나간 선수에게 눈길을 돌리는 건 옵션이 짜인 프로레슬링 이외엔 없다. 꾀로 말하면 ‘꾀가 조조같다’는 속언이 있지만 꾀도 여러가지다. 그 중에도 잔재주와 큰 재주로 나누면 노무현의 재주는 임기응변에 능한 잔재주에 속한다. 잔재주도 재주이긴 하나 민중을 감복시킬 수는 없다. 그것은 언제나 미봉책이기 때문이다. 잔재주엔 또 말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그때 그때의 장합에 따라 임시방편으로 말을 둘러대야 하기 때문이다. 이래서 대통령이 말이 많으면 큰 정치를 펴기가 어렵다. 노무현이 이에 해당된다면 그래서 말이 많은 지 모르겠다. 대통령은 이를 알아야 한다. 측근비리의 의미를 몇몇 코드의 개인 비리로 덮어 씌우려 한다면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민중은 측근들 비리가 노무현과 어떤 관계이냐를 알고 싶어 한다. 민중의 이런 시각에서 보면 대통령은 죄인의 심정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한데, 조금도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큰소리 친다. 자신의 재주를 믿기 때문인 것 같다. ‘재승덕(才勝德)’이란 말이 있다. 재주가 덕을 이긴다는 뜻이다. 덕으로 대하지 않고 재주(요령) 피우기만을 일삼는데 대한 선인들의 경구다. 일상의 생활도 이러 하지만 치자의 경우는 더욱 새겨 들어야 한다. 국가사회가 왜 이리 혼란한가. 대통령의 말에 덕이 빈곤하기 때문이다. 치자가 지녀야 할 덕성의 덕목은 경륜과 신뢰와 친화력 등 세가지다. 이래서 덕이 있는 치자에겐 적이 많지 않지만 재주만 많은 치자에겐 적이 많은 법이다. 대통령의 편협증, 최병렬의 졸열성 이런 기싸움으로 인해 민중이 심히 답답해들 한다. 대통령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걱정할 것 없다’는 식이지만 민중은 나라를 무척 걱정한다. 덕성스런 대통령을 갖고 싶다. 큰 정치를 보고 싶다. 노무현에게 이런 대통령상의 변화를 기대하는 건 불가능한 것인가?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노무현과 케네디

우리에겐 왜 이런 대통령이 없을까. 미국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 그가 1963년 11월22일 텍사스주 댈러스시에서 오스월드의 총탄에 맞고 암살된 지 40년이 된다. 미국의 지성들이 40주기 행사로 들뜬 추모 열기는 무엇인가, 미국의 자존심을 극대화한 그의 지도력을 아쉬워하는 회고 열풍이다. 역사학자 로버트 댈럭 보스턴대 교수는 케네디를 미국 역사가 위인 대통령으로 꼽는 워싱턴, 링컨, 루스벨트와 같은 반열의 지도자로 평가하고 있다. 그의 뉴프론티어, 국민의 자존심에 호소하는 국내 개혁과 자유 세계의 지도력 확립은 실로 위대한 리더십이었다. 카리브해의 해안봉쇄에 이어 쿠바에서 소련 기지를 강제 철거하는 용기있는 결단을 보였다. 이런 위기를 겪으면서도 냉전 해소에 주력하는 미·소협조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현실과 비유해 본다. 케네디나 부시는 다 같이 힘을 구사했다. 그러나 쿠바 기지의 강제 철거는 매끄럽게 마무리된데 비해 이라크 문제는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했다. 부시에게 실망한 미국 지성인들은 이래서 케네디를 더욱 흠모한다. 케네디를 돌아보는 것은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가 1960년 대통령 당선후 국민에게 충격을 준 것은 브레인 스태프의 의외성이었다. 백악관과 행정부를 젊은 지성인들로 꽉 채운 것은 우려를 낳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강력한 개혁정책은 참신한 돌풍을 일으키면서 크게 성공했다. 예컨대 인권법안을 의회에 통과시켜 인종 차별을 철폐한 인도주의적 결단은 영원한 우상이다. 노무현 청와대의 386세대 같은 잡음따윈 나질 않았다. 아마추어 브레인이라는 소리도 나지 않았으며, 개혁세력을 자처하는 젊은 사람들이 수구세력 뺨칠만큼 돈을 좋아한다는 소리도 나지 안했다. 케네디의 개혁정책은 젊은 브레인들에 의해 박진감있게 추진된 반면에 노무현의 개혁정책은 무식한 젊은 코드들로 인해 허공속에 실종됐다. 대통령부터가 ‘국가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생각하기 이전에 국민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라’고 했던 케네디처럼 당당하지 못하다. 그저 측근당의 표가 될성싶으면 농촌 부채도 깎아주고 신용불량자 빚도 탕감한다는 등 당치않은 선심만 남발한다. 어느 선무당으로부터 가만히 있어도 부자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들은 바보가 그 말만 믿고 일도 않다가 되레 쫄딱 망하고 나서 무당을 찾아가 항의했다는 우화가 있다. 케네디는 진보주의자다. 그러면서도 당시 소련의 팽창주의에는 강경하게 대처했다. 그것은 평화를 위해서였다. 그는 온건파 진보주의자였던 것이다. 대통령 역시 진보주의자다. 지금은 소련이 없다. 잘 알 수 없는 것은 대북관계에서 어떤 진보주의냐라는 것이다. 미국은 케네디 40주기를 앞두고 텔레비전 특집, 학회발표, 전시행사 등이 추진되는 한편 수많은 관련 책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으로 전한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이처럼 그리워할 전직 대통령이 없다는 사실이다. 흔히 박정희를 말한다. 굳이 꼽자면 그럴만 하다. 오늘의 경제성장이 있게 된 것은 그의 근대화 위업 덕분이다. 그래서 개발독재는 인정된다. 하지만 유신독재는 인정될 수 없다. 권좌에서 치부할 줄도 몰랐던 그였으나 드러내 놓고 추모할 수 없는 갈등이 이에 연유한다. 케네디가 살았으면 여든여섯살의 노옹이다. 그런데도 미국민들에게는 아직도 마흔여섯의 패기넘친 젊은 대통령으로 각인돼 있다. 그가 대통령이 재임한 것은 임기 4년도 다 못채운 3년인데도 이토록 신뢰받는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다. “나는 국민에게 더욱 강도 높은 인고와 땀을 요구한다. 그 대신 땀의 결실을 국민의 영광으로 반드시 돌려 주겠다”는 대통령 말을 듣고 싶다. 두려운 것은 인고와 땀이 아니라, 민중의 노력이 헛되고 있는 무능한 현실이다.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선무당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대입 수험생들에게!

대입 수험생들은 고민하는가, 고민해야 한다. 수능시험 성적이 발표되면 더더욱 고민할 것이다. 고민해야 한다. 명색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려하는 데 고민이 없을 수 없다. 마땅히 고민해야 한다. 이러한 고민은 전에도 있어왔다. 지금의 수험생들에게만 주어진 고민이 아니다. 나의 세대에도 책갈피에 코피를 흘리면서 고민한 경험이 있다. 대입 수험생들이여,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 말라, 예컨대 앞으로 발표될 수능시험 성적이 마음에 들건 안들건 간에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다. 행여라도 성적이 마음에 들지않는 것을 남의 탓으로 돌려 엉뚱한 잘못을 저지르는 비겁한 순간적 착각이 있어선 안된다. 멀리 보아라, 그리고 크게 보아라. 수능시험은 새로운 인생의 출발일 뿐, 너의 인생의 결과는 아니다. 성적이 좋아서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물론 축복받을 일이다. 하지만 성적이 좋지 못해 마음먹은 대학에 가지 못하는 것은 고사하고, 아예 대학 진학조차 못한다 해도 너의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청춘을 마음껏 즐겨라, 청춘의 고민을 또 뼈저리게 경험하라, 이것이 청춘의 특권이다. 그러나 이건 알아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너의 인생은 너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부모가 아무리 대입 걱정을 하고, 자녀의 장래를 걱정한다 하여도 너의 인생을 대신하여 살 수는 없다. 부모를 탓하거나 남을 탓할 수 없는 이유가 이에 연유한다. 너희들도 장차 자식을 갖게되면 알겠지만, 그보다 앞서 바라는 것은 그 이 전에 이같은 인생의 지혜를 조금이나마 터득하는 것이 너희들 인생에 도움이 될 것으로 알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녀의 갈등, 기성세대와 잠재세대의 갈등, 이런 것은 너희들 부모, 아니 조상 대대로부터 있어온 인류발전의 성장동력이다. 신문화와 구문화의 갈등은 필연적 숙명인 것이 인류문화다. 신세대들이 새삼 이를 핑계 삼아 노력을 게을리 할 이유가 못된다. 생각해 보자, 너희들 세대의 20~30년 뒤의 생활문화는 어떤 변화를 가져 올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감히 상상도 못한다. 분명한 것은 국제사회나 국내사회나 경쟁이 더욱 치열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너희들 나이 때 커서 무엇을 해먹고 살 것인가를 두고 밤새워 잠을 못이루면서 번민하곤 한 경험이 있다. 너희들 역시 이런 번민을 해야 한다. 돌파구는 있다. 너희들의 돌파구는 너희들 자신의 것이다.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은 너희들 같은 잠재세대 특유의 몫이다. 마땅히 기성문화에 대한 불만을 갖는 것이 시대의 발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만을 불만으로 그치는 것은 불만할 자격이 없다. 도전 정신이 이래서 요구된다. 생각컨대 대학에 진학하는 수험생도 있을 것이고 진학이 좌절되는 수험생도 있을 것이다. 그 무엇이 어떻든, 그게 인생의 성적표는 아니다. 주어진 조건이 무엇인가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조건에 굴복하지 않는 도전 정신이다. 너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상으로 더 우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리하여 저마다 자기 행복의 노력에 충실하는 노력이 결국은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수험생들이여, 대학에 가도 자기 인생의 좌표를 찾지 못하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반대로 대학에 못가도 자기 인생의 좌표만 찾으면 불행하려 해도 결코 불행할 수 없다. 젊은이 들이여, 조건이 큰 문제는 아니다. 젊은이다운 야심으로 주어진 조건을 극복하고자 하는 최선의 노력을 가지면 인생의 행복은 결국 너희들 것이다. 게으른자일 수록이 남을 탓하고 부지런한자일 수록이 자신을 탓한다. 미래의 희망을 미래의 주역인 모든 너희들에게 기대한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대통령도 예외는 아닙니다

미래의 역사 전진이 언제까지 과거의 족쇄에 묶여야 합니까. 좋습니다. 끝장을 내고 말겠다는 것 말입니다. 대선자금의 족쇄는 정말 넌더리가 나니까요. 정치판에 핵 폭풍이 닥쳐 빅뱅이 나건, 싹쓸이를 하든 상관 없습니다. 어차피 썩을대로 썩어 문드러진 정치권이니까요. 문제는 노무현 대통령님의 각오에 달렸습니다. 대통령께서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1급수는 아니어도…”란 말씀을 한 적이 있습니다. 비록 1급수는 아니어도 2급수에선 놀았기 때문에 3급수의 잡어를 탓할 권리가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일찍이 논 물이 차별이 가능한 2급수인지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 그렇다 해도 다 오십보 백보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대통령께서 자신에게 먼저 가혹해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족쇄로부터의 완전 해방이 비로소 가능하니까요. 궁금한 게 있습니다. 검찰수사 가운데 유독 최도술씨 비리 부문은 이해가 안갑니다. “눈 앞이 캄캄했다”고 하신 말씀이 도대체 무슨 뜻이었습니까. 엄살 한번 또 피운 것입니까. 아니면 관련은 없어도 그토록 충격받는 양심을 건다는 것입니까, 뭡니까. 양심 때문이라고 믿을 민중은 별로 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검찰수사가 미진하면 스스로 고해하는 용단을 갖는 것이 이 시대의 민중이 기대하는 참다운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세가지만 당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형사상의 특권에 대해서입니다. 내란·외환의 죄가 아니면 대통령 재임 중 형사 소추가 불가한 지위로 인해 대선자금의 전면 수사가 불신받을 수 있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칼자루를 쥔 사람과 칼날을 쥔 사람의 승패가 뻔한 것과 같은 대선자금 수사가 되어서는 민중은 박수를 치기는 커녕 냉소를 보낼 것입니다. 대통령께서도 결코 예외가 아닌, 그래서 재임 중이라도 조사받을 것은 받고 기소할 것이 있으면 퇴임후 재판을 받겠다는 다짐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법적·인적 청산보단 정치개혁에 의한 인적청산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썩어 문드러진 정치꾼들을 다 감옥에서 썩게해도 시원치 않은 감정이지만 그럴 수도 없지 않습니까. 무엇 묻은 것이나 뭐 묻은 거나 그게 그것이니까요. 완전선거공영제, 중대선거구제 도입, 지구당 폐지 및 중앙당 기구축소 등 이런 얘기는 전부터 나온 것이긴 하나, 재론되는 정치개혁의 방향은 제대로 틀을 잡고 있습니다. 돈 덜 드는 정치, 불법 정치자금을 엄단하는 정치제도 개혁은 이밖에도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떻든 이런 제도적 장치에 의한 정치개혁으로 물러가야할 정치꾼들은 점차 도태되도록 하는 것이 순리라는 판단을 갖습니다. 사법적 조치도 물론 있어야 하겠지만 제도적 청산이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만약 정치제도의 개혁이 병행되지 않거나 또 대통령께서 형사상 특권에 안주하는 대선자금 수사가 되어서는 정치 보복이란 비난을 듣기 십상인 사실을 깊이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대체 언제까지 이런 얘기를 해야 하는 것입니까. 추악한 과거에 얽매이기 보다는 전망있는 미래를 화두에 올리고 싶습니다. 대선자금 수사는 되도록이면 빨리 끝내고, 정치제도의 개혁 또한 이번에는 반드시 매듭을 지어야 합니다. 내년 봄 총선부터는 새로운 제도에 의해 새로운 역량을 결집하는 선거가 실시되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정치권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떠넘길 일만이 아닌 이 또한 대통령의 책임입니다. 우리에겐 시일이 없습니다. 우리의 하루는 아마 경쟁국의 사흘과 맞먹을 만큼 모든 실정이 절박합니다. 세번째 당부는 이래서 정치 얘기보단 우린 장차 뭘 먹고 살 것인가 하는, 잘 살 수 있는 미래 지향적 얘길 대통령께서 앞으로 많이 들려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뜬구름 잡는 말잔치 얘기가 아니고 신뢰가 객관화된 정책으로 말입니다. 또 뵙겠습니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지방언론, 지방지

지방언론의 주축인 지방지 효시는 국내 최초 신문인 독립신문이 서재필 등에 의해 1896년 창간된 13년 뒤 1909년 진주서 발간한 구 慶南日報(경남일보)다.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보호조약을 개탄하여 황성신문에 유명한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의 사설을 쓴 국내 최초의 신문논객 장지연 등이 창간했다. 그러나 한·일합병 후 1914년 일제가 慶南日報를 폐간한 뒤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중앙지는 생겼으나 지방지는 맥이 끊겼다. 일제 때 木浦日報(목포일보)같은 지방지가 더러 있긴 하였지만 모두 우리 말이 아닌 일어로 간행되어 국내 신문의 정통 명맥으로 인정되지 못한다. 지방지가 활성화한 것은 1945년 광복이 되고 나서다. 중요한 것은 지방지도 중앙지와 마찬가지로 시대적 변화를 동반한 사실이다. 한국의 신문은 크게 계몽·저항지(전기 1896~1914·후기 1920~1936), 이념지(1945~1950), 독재저항지(1960년대), 상업지(현재)로 나눌 수 있다. 1970년대 산업사회 들어 두드러지기 시작한 상업지화는 1999년까지를 1기로 친다면 정보사회로 치닫는 금세기는 상업지 2기다. 상업지의 특성은 매우 예민하다. 계몽·저항지, 이념지, 독재저항지 시절의 신문기자는 일종의 동지적 관념이었다. 월급이 적거나 밀려도 개의치 않았다. 상업지 들어서는 완전히 달라졌다. 직업적 관념이 뚜렷하여 처우를 따진다. 논조 역시 비상업지 시절엔 ‘천인공노’니 ‘통탄’이니 해도 독자에게 먹혀 들어갔다. 그러나 상업지 들어 지금 그같은 개탄만으로는 통하지 않는다. 비분강개하기 보다는 논리가 앞서야 한다. 이러므로 신문기자 역시 전문화·세분화하는 프로 의식을 요구받는다. 여기에 지방지는 지역사회와 피부를 맞댄다. 지역사회와 한다리가 건너뛰는 중앙지하고 달라서 지역에 더 강도 높은 윤리성을 압박받는다. 지방지의 소명인 지역사회 문제의 심층 보도는 외면의 사실보도 보다는 내면의 진실보도에 있다. 사실 중엔 작위적 사실이 있으나 실체적 진실은 허구가 용납될 수 없다. 예컨대 주민행정·생활행정·참여행정으로 집약되는 지방자치 이후 넘쳐나는 님비현상을 사실보도에 그쳐서는 갈등만 부추긴다. 진실보도를 추구해야 한다. 해결의 실마리가 그래야 제시된다. 단순보도 만으로 밥이 끓든 죽이 끓든 방임하는 것은 중앙지 같으면 그럴만 하다. 그러나 적어도 지방지가 그처럼 무사안일해서는 지역사회로부터 멀어진다. 자치행정의 커뮤니케이션 활성화는 지방언론의 책임이다. 아담 스미스는 ‘나라를 부강케 하는 것은 개인의 자비심이 아니라 이기심’이라고 했다. 행정수요의 다변화, 주민계층의 다양화로 야기되는 이기적 갈등을 지역사회 공동체 이익의 극대화로 여과시킬 줄 아는 지방지가 지역주민의 관심을 끈다. 어느 지방지고 할 것 없이 정치·경제·사회·문화·체육면 등으로 획일화한 제작 관행은 이제 새롭게 검토할 만 하다. 좀 더 지방지답기 위해서는 좀 더 폭넓게 그리고 좀 더 깊이있게 전 지면이 지역 대중에게 새로운 틀로 밀착되어야 한다. 지역주민이 지방지를 안보면 주민생활에 손해를 본다는 인식을 갖게할 만큼의 정보가 풍부한 지방지를 만드는 게 말처럼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지방지 천국인 일본이나 독일의 지방지 모델이 전혀 남의 것만은 아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다 같은 상업지이기 때문이다. 중앙지와 또다른 지방지 특유의 프로의식이 얼마나 철저하느냐가 관건이다. 언론연구원 조사는 외부 요인보다 내부 요인에 문제가 훨씬 더 많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한국신문 107년 사상 새로운 위상 개척의 시점에 서있다. 지방언론의 주축인 지방지는 이를 정보사회와 걸맞게 잘 극복하여야 미래가 있다. /임양은 주필 ※이 원고는 경기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행정이론을 강의하는 우호태 화성시장님으로부터 지방자치와 관련한 ‘지방언론’ 주제의 초청 강의를 요청받고 한 내용을 요약한 것임. ※강의 말미에 정부의 ‘지방언론지원에 관한 특별법안’에 대한 질문을 받고 사견임을 전제, 언론사가 정부 지원을 받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며, 정부예산을 이런데 쓰라고 국민이 세금을 낸 것은 아니라는 답변을 하였음. 아울러 지방언론 육성은 일간지 설립에 자본·시설·처우 등 분야에 상응한 수준을 요건화한 정간법 강화가 첩경임을 피력한바 있음.

목요칼럼/싸가지 없는 것들

불한당은 사기쳐서 해먹고 정치꾼은 등쳐서 해먹는다. 불한당은 땀흘리지 않고 남의 돈을 해먹는 것들이고 정치꾼은 권력을 팔아 돈을 해먹는 것들이다. 정치꾼 것들의 변명엔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다. “단돈 1원도 받은 사실이 없다”고 처음엔 딱 잡아 떼다가 “받기는 받았어도 대가성이 없다”면서 나중에는 “억울하다”는 소릴 늘어 놓는다. 남의 돈 먹은 정치꾼 것들 치고 처음부터 시인하는 예는 한번도 못보았다. SK 비자금만 해도 이렇다.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한나라당 최돈웅 국회의원 역시 “단돈 1원도 안받았다”더니 결국 최 전 비서관은 11억원, 최 의원은 100억원의 수수 혐의사실을 검찰에서 시인했다. 하나는 대통령 당선 축하금이고 또 하나는 대선자금이다. 최의원이 받은 돈은 노무현·정몽준 두 후보가 단일화 되기 이전에 이회창 후보가 한창 잘 나가던 때였으므로 그렇다고 쳐도 이상한 게 있다. 당에서 시큰둥하는 걸로 보아 100억원의 행방이 묘연한 모양이다. 현찰 1억원씩 든 쇼핑백으로 100개를 받았다는 돈이다. 사조직에 썼다고손 쳐도 그렇지 참으로 조화속이다. ‘정치자금으로 자식들에게 재산 물려주고 외국에 빌딩까지 산 사람이 있다’는 한 검찰 고위간부의 말이 누굴 누굴 지칭한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현대 비자금 200억원을 받은 혐의로 재판 중인 권노갑씨와 관련이 깊은 김영완씨 집 파출부는 “100만원짜리 수표 등 돈다발이 집안에 널려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는 말을 같은 파출부로 부터 들은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해외에 도피중인 김씨는 떼강도에게 수억원을 털리고도 경찰에 신고조차 할 수 없었고, 일선 경찰이 어떻게 알고 수사에 나서자 윗 선에서 수사를 중단케한 베일속 장본인이다. 대우의 어느 임원 부인이 대우가 DJ에게 줄 돈을 집안 건넌방 가득히 쌓아둔 돈 냄새 바람에 골치가 아파 혼났다는 말이 생각난다. 단돈 만원짜리 한장을 들고 발발 떠는 서민들은 정말 환장할 노릇이지만 돌아보면 기막힌 불한당 수법이 또 있다. 잇따른 게이트 시리즈가 이 모양이다. 진도 보물사업을 빙자하여 DJ 처조카 등을 끌어들인 이용호 게이트를 비롯, 진승현 게이트·정현준 게이트·최규선 게이트·윤창렬 게이트·윤태식 게이트가 그렇고 분당판 수서비리라 할 분당 백궁·정자지구 용도변경 특혜가 그러했다. 무일푼이 아니면 기껏 소자본으로 정·관계에 줄을 대어 수천억원씩 대출받은 돈 가운데 상당액을 요로에 다시 뿌려 코를 꿴 권력의 영향력을 확대 재생산하는 것이 이들의 공통 수법이었다. 이 바람에 장관도 날아가고 수석비서관도 날아가고 DJ 아들들도 갇히긴 하였지만 어떻든 서민들은 상상도 못할 요지경 속이다. 이 정권 들어 지난 4월의 일이다. 나라종금 사건으로 안희정 전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이 2억원을 받고 염동연 인사위원이 또 얼마를 받은 혐의로 검찰의 예봉을 피할 수 없을 때다. 당시 대통령의 한 측근 비서관은 “이런 식으로 하면 어느 당 할 것 없이 안걸릴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며 흥분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해먹은 게 많든 적든 모두가 한통속으로 그 밥에 그 나물이다. 이래서 권력은 곧 돈인가, 이래선 사회에 희망이 없다. 착한 민초들만 무력감을 갖는다. 상식을 파괴하여 축재해 보이는 권력의 시범은 사회상식을 파괴한다. 자살자가 날로 늘고 범죄가 판을 친다. 현금 수송차가 털려도 ‘누군가 잘 해먹었다’고도 하는 참으로 잘 못된 냉소의 사회병리가 다 이에 연유한다. 돈이라면 불가사리처럼 남의 돈 뭉치를 물 불을 가리지 않고 탐내는 싸가지 없는 정치인 권력자들, 이들은 민중의 공적이다. 싸가지 없는 것들은 신·구 권력 주변에 아직도 많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대통령 탓 입니다'

불행한 대통령을 가진 국민은 대통령보다 더 불행합니다. 왜 재신임을 묻겠다고 했습니까. 국정 마비라니 이해가 안갑니다. 김두관씨가 행자부 장관 해임건의 당한 게, 윤성식 감사원장 후보가 인준거부 당한 게 국정 마비가 되는 것입니까. 국회가 발목을 잡는다고요. 또 발목 좀 잡힌들 뭐가 어떻습니까. 국회가 고분 고분해야 정부를 돕는다고 할 수도 없거니와 사사건건 발목을 비틀어 잡았다고도 판단되지 않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대통령께 잘하라고 하면 했지, 누가 물러나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이 무슨 평지풍파입니까. 노무현식 충격요법의 정면돌파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국민을 괴롭히는 처사입니다. 갈 길은 바쁘고 해야할 일은 나라 안팎으로 많습니다. 돈을 1천억원이나 엉뚱한 데 써가며 국민투표 소동을 벌여야 하는 것입니까. 실수하신 겁니다. 설사, 재신임 투표에서 대통령께서 이긴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것도 아닙니다. 나랏 일을 여전히 전처럼 하면 상황은 역시 악순환될 뿐입니다. 그렇다고 내년 총선 결과가 크게 달라 질 전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상합니다. 굳이 재신임을 묻겠다면 1년도 안되어 왜 이 지경이 됐는 지를 생각해 봅니다. 대통령 탓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말씀하시는 게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 같습니다. 마치 뱃심 부리기로 보입니다. 국정을 볼모로 하여 나라를 이렇게 이끌어 가선 안됩니다. 평양 공작원으로 보이는 사람도 관용하자는 분이 어찌하여 같은 나라 안 사람이 비위가 틀린데는 왜 그토록 협량한 것입니까. 코드 때문인가요. 궁금한 게 있습니다. 대체 최도술씨 비리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요. 최씨가 SK 돈 11억원을 먹은 사실이 드러난 게 어찌해서 “앞이 캄캄하고” “양심의 자신감을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설마 시키지는 안했을 것 아닙니까. 세간의 추측대로 대선자금 청산 때문인가요. 그래도 그렇지 대선자금이 어디 몇십억 가지고 치른 것입니까. ‘양심의 자신감’이란 게 그만큼 1급수는 못되어도 2급수임을 스스로 방증해 보이자는 심산인 지, 뭔지 도시 이해가 안갑니다. 검찰수사와는 별개로 국민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의 상당한 고해가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 그래야 재신임을 하든 불신임을 하든 국민이 제대로 표를 찍을 것 아닙니까. 이 기회에 충심으로 말씀 드립니다. 모든 것은 대통령께서 하시기에 달렸습니다. 무슨 말씀마다 자신은 다 잘하고 허물은 남의 일로만 돌리는 그런 논리가 어떻게 성립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독선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노무현문화’를 전이 시키려 하는 웅지라 할까, 야심이라 할까 아무튼 그런 뜻은 짐작합니다. 그렇지만 ‘노무현문화’를 거부할 권리도 있습니다. 이를 거부한다고 해서 무조건 수구세력, 반개혁으로 매도하는 것은 이만저만한 비문화적 행태가 아닙니다. 개혁도 그렇습니다. 대통령부터, 측근부터 개혁의 ‘칼자루’ 괄호안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뼈를 깎는듯한 개혁의 자세를 먼저 보여 주십시오. 칼자루를 쥔 개혁의 주체부터 칼날에 서는 개혁의 객체가 되어 보여야 비로소 개혁의 공감대가 형성됩니다. 구악 청산의 개혁은 해야 하는 게 맞습니다. 이런데도 지금까지의 개혁이 입잔치에 그친 연유가 이에 부응하기는 커녕 개혁을 빙자한 신악의 발호에 있습니다. 면죄부 수단으로 여기면 큰 착각입니다. 만약 재신임을 받는다 해도 그간의 국정 실정이나 대통령 주변의 비리가 용인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서 처음엔 철회하시길 바랐지만 굳이 우기는 덴 국민투표 외엔 다른 대안이 없다고 보는 것은 대통령의 생각과 일치합니다. 다만 뒷말의 소지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먼저 구하는 것이 순리며 상책이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불행한 대통령을 가진 국민은 대통령보다 더 불행합니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그래도 희망을 갖자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공중의 장소에서 처음으로 담배를 피운 곳이 버스칸 안이었다. 대학 입학식을 앞 둔 그 사이에 더 참지 못하고 어른 흉내를 낸다는 게 고작 그 짓거리였었다. 그 무렵엔 버스 안 같은데서도 담배를 마음대로 피울 수 있었다. 비좁은 틈새에서 담배 연기를 너도 나도 내뿜는 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얌체같은 짓이었지만 그땐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끽연권은 공공연하고 혐연권은 개인 사정이었던 것이다. 기차를 타도 금연칸은 고작 객차 한 칸으로 국한했을 뿐 객차 안에서 담배를 태우기가 예사였다. 금연칸도 잘 봐주어서 내주었던 게 요즘은 기차의 전 객차가 다 금연칸이 됐다. 그렇다고 흡연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기차만이 아니다. 지금 버스 안에서 담배를 피우다가는 아마 십중 팔구는 쫓겨날 것이다. 신문기자가 되고 나서다. 법조출입 시절이다. 큰 사건이 터지면 더러 밤을 새우기도 하는 취재경쟁에 녹초가 될 때가 있지만 재미 또한 있었다. 재벌급 대기업이 수사 대상에 오르면 기자실에 촌지 보따리를 싸들고 오는 것이 관행화 된 의례였었다. 그렇다고 쓸 걸 안쓰는 것도 아니고 집안살림에 보태는 것도 아니어서 술 마시고 ‘옛다 너도 너도 먹어라’하고 후배들에게 나눠주곤하는 객기를 부리기가 일쑤였지만 아무튼 그런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재벌 대상의 수사는 여전히 많다. 하지만 촌지 보따리를 싸들고 기자실을 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 그런 돈을 바라는 기자도 있을리 없다. 수사 중인 사건으로 촌지란 이름의 돈을 먹었다가는 영락없이 같이 떼 들어가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기업인에게 돈 받는 것 쯤은 당연한 것으로 치부했었다. 요즘 말로 대가성이 있던 없던, 뇌물이든 아니든 간에 정치자금으로 받았다고 하면 더 추궁하지 않았다. 정치인의 ‘정치자금’은 곧 기업인 돈 줄의 ‘면피’ 용어로 이렇게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정치자금에 영수증이나 합법, 불법이 따로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용서받지 못하는 세상이 됐다. 영수증을 떼어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불법 정치자금은 꼭 들통나 기업이 상처받고 정치권이 수렁에 빠지곤 한다. 전 같으면 정권과 가까운 정치인에 대한 수사는 으레 노골적으로 봐주던 검찰도 지금은 적어도 엄정 수사의 흔적을 드러내 보인다. 세상이 달라지긴 달라졌다. 아직도 달라진 것 보단 달라지 지 않은 게 더 많고, 달라져도 미흡한 게 많지만 세상이 그래도 적잖게 달라진 것은 맞다. 돌아보면 청수는 흘러가고 자갈만 남는 것처럼, 이민 안가는 사람이 마치 못나 보일만큼 이 사회가 절망의 땅으로 비칠 때가 없지 않긴 하다. 그러나 알고보면 암담한 가운데도 희망의 길로 가고 있다. 그 변화의 걸음 걸이가 비록 느려 답답한 가운데, 이마저 가시밭 길이긴 하여도 이 사회의 향방은 절망이 아닌 희망을 향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가 누구이든 듣기싫은 소릴 해야할 사람에겐 듣기싫은 말도 하고, 심지어 욕 먹을 일에는 욕도 퍼부어야 하겠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희망은 있다. 계절에 상관없이 사시사철 결식 아동이 늘어가고 수업료를 내지못해 교실에서 쫓겨나기도 한다는 소식은, 타임머신을 타고 춘궁기를 연례 행사로 겪던 신문기자 초년병 시절로 돌아가는 듯한 전율을 갖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보다 더 나은 세상에 살고 있다. 훨씬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희망은 그냥 다가 오는 것이 아니다. 희망은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호미로 밭두렁 김을 매는 이의 눈은 게으르고 손은 부지런하다. 눈으로 바라만 보는 희망은 너무도 멀리 있어 보이지만, 이를 향해 노를 젓는 손은 어느덧 희망에 접근시켜 준다. 세상은 달라져 간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가을의 광교산에서

하늘 높고 물 맑은 가을이라 하였다. 여름 비가 진저리 나도록 퍼붓더니, 가을인 데도 하늘은 높지않고 물 맑은 곳도 좀처럼 찾아 보기기 힘들다. 이래서 광교산 자락의 생수같은 개울 물이 더욱 정겹다. 속 살이 명경 알보다 더 투명한 물 속을 응시하고 있노라면 마음 속 찌꺼기가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다. 높지않은 하늘이야 자연의 투정이라 어쩔 수 없지만 찾아가면 맑은 물이 반겨주는 광교산은 이리하여 참으로 소중하다. 가을은 정리의 계절이다. 올핸 흉년이 들어 농사 얘길 하기가 뭣하지만 그래도 수확을 정리하게 되는 가을이다. 올 한 해를 돌아보는 삶의 정리는 뭣인가를 생각해 본다. 역시 내놓을 게 별로 없다. 올 가을이 유난히 을씨년스런 것은 흉년이 들어서만도 아니고 날씨가 쾌청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저 덧 없이 또 한 해를 보냈다는 자괴지심 때문이다. 노인 자살률이 높아진다는 기사가 눈에 띄는 가운데 또 한 켠에서는 젊은이들의 이승엽 56호 홈런공 낚아채기 열풍이 세차게 불고 있다. 교통사고 왕국으로 소문난 이 사회에서 자살자가 교통사고 사망자 수보다 많고, 이것이 노인 자살자 수의 증가에 기인한다니 노인들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는 지 남의 일 같지 않다. 오죽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마는 살면 얼마를 더 산다고 많이 남지도 않은 삶을 앞장서 포기하는 것인 지 안타깝기만 하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노인이 되면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한 노령화사회가 된다. 노인을 잔소리꾼 뒷방 늙은이로만 치부하여 능히 가능한 사회참여를 거부해서는 장차의 노령화사회는 더욱 어두울 수밖에 없다. 인생이 구만리 같은 젊은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물론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 연유가 어떻든 노인 자살이 늘어가는 것 또한 결코 건강한 사회는 아니다. 프로야구 삼성 경기만을 쫓아 다니는 야구 팬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알고 보았더니 관전은 뒷전이고 대박꿈에 치우친 젊은이들이 많다. 직장인은 더러 연월차 휴가까지 내가며 어디고 할 것 없이 원정경기를 따라 다니는 이들은 이승엽의 홈런이 잘 터지는 ‘이승엽존’ 오른쪽 외약석을 찾는 바람에 암표상까지 나온 모양이다. 아시아 신기록의 56호 타구만 잡으면 큰 돈이 된다는 일념에서 다투어 크고 길고 탄탄하게 준비하는 뜰채 군단이 동원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6월22일 이승엽이 세운 세계 최연소 300호 홈런공이 1억2천만원에 팔렸으므로 아시아 신기록 홈런 공은 최고 5억원까지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는 게 이들의 대박꿈이다. 이에 구단측이 56호 홈런공을 사지는 않고 다만 기증하면 사례하는 것으로 공식 입장을 정리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다. 노인의 자살 증가나 젊은 층의 홈런공 대박꿈이나 다 사회병리 현상이다. 뿌리 없이는 나무가 서있을 수 없고 새 순이 돋아 뻗어가지 않으면 나무가 자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뿌리는 새 순의 생명이며 새 순은 뿌리의 희망이다. 동일체의 운명이다. 다만 뿌리는 땅속에서 새순은 공중에서 그 소임을 다 할 뿐이다. 인간사회 역시 다를 바가 없다. 연륜이 쌓인 뿌리일 수록이 튼튼하고, 건실한 새 순일 수록이 폭넓은 그늘을 드리운다. 광교산의 수목들, 단풍을 띠며 겨울을 채비하는 나무들마다 어울리는 뿌리와 새 순의 조화가 맑디 맑은 개울 물을 뿜어내고 있다. 몇 억겁에도 한치의 변함이 없는 대자연의 섭리가 외경스럽다. 이 사회의 뿌리와 새 순이 다 광교산 숲만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는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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