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시민혁명관의 '함정'

이 공동체사회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 이른바 시민혁명관이다. 특정의 목적을 위해서는 거추장스런 법 따윈 무시해도 된다고 보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전공노나 전교조의 돌출된 탈법행위가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번 선거에서 총선연대가 낙선자 명단이란 것을 발표한 것도 비슷하다. 오늘 실시되는 제17대 총선 투표함에 무슨 정치 구호의 쪽지를 투입하겠다는 것도 역시 같은 양상이다. 일곱개의 인권·사회운동 단체로 구성됐다는 ‘국민발의권·국민소환권 쟁취를 위한 네트워크’라는 모임이 그 주체다. 이들이 투표함에 쪽지로 넣겠다는 ▲국민발의권 및 국민소환권 도입 ▲청년실업 해소 ▲이라크 파병철회 등 메시지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문제는 방법에 법치를 어기는 독선적 의식이다. “투표지 외에 이물질을 투입하는 것은 투·개표의 방해행위에 해당하므로 단속 대상”이라는 선관위측 지적에 ‘민주적 요구’임을 우기는 것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위험한 목적지상주의 관념이다.

목적의 가치성 못지않게 방법의 합리성을 요구하는 게 자유민주주의의 덕목인 것은 이것이 공동체사회의 공동선이기 때문이다. 방법에 합리성을 잃으면 목적의 가치성도 상실된다.

아호가 도올이라는 어느 학자가 ‘거리의 함성이 바로 헌법’이라고 지칭했다는 탄핵반대 촛불집회를 범국민행동측은 광화문에서 모래부터 재개하겠다고 밝혔다. 경찰의 불법집회 단속을 물리력으로 무력화시켜 강행하겠다는 생각 역시 법질서 절차가 생략된 시민혁명관이다.

범국민행동은 더욱이 “탄핵시국의 조기 종결을 바라는 대다수 국민의 뜻과 달리 헌법재판소는 정치적 고려에 휘둘려 미루고 있다”면서 “하루라도 빨리 신속하고도 분명한 탄핵기각을 결정해야 한다”고 압박, 재판에 노골적으로 적극 간여하고 나섰다. (개인적 견해로는 16대 국회의 탄핵소추안 의결은 의회쿠데타라는 정치 공세와는 달리 합법이었으며, 다만 사유가 파면에 이르기는 직무관련의 증거능력이 미흡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무게를 두고 있다.)

어떻든 촛불집회 재개의 그같은 주장이야말로 국민의 뜻 임을 빙자하여 재판을 법절차 없이 자기네 입맛에 맞추어 뚝딱 해치우는 정치적 판결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민혁명관이 부당한 것은 헌재 독립의 공정성을 현저히 침해하기 때문이다.

도올의 말대로 ‘헌법은 조문이 아니고 역사성’이고 ‘거리의 촛불함성이 바로 헌법’이라면 침묵하고 있는 다수의 군중도 잇따라 들고 나서 결국 길거리는 함성의 충돌이 범람한다. 이같은 무법천지가 민주주의는 아니다. 듣기좋은 함성은 정의고 듣기싫은 함성은 불의로 매도하는 이분법적 독재 또한 민주정치가 아니다. 편리한 법은 이용하고 불편한 법은 무시하는 것이 법치주의는 아니다. 불편하고 어렵고 멀더라도 따르면서 잘못된 법은 고쳐가는 것이 민주주의고 민주정치며 법치사회다.

참으로 희한한 것은 이 정권들어 두드러지게 나타난 시민혁명관이 권력을 비판하는 게 아니고 옹호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권력을 비판하든 옹호하든 시민혁명관이 부당한 것은 법치질서를 일탈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그랬다. 국회의 탄핵소추안 의결이 합법이라니깐 “히틀러의 나치정권도 법상으로는 합법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면 히틀러 역시 열광적인 군중의 교조적 숭배 대상이었지만, 논리를 이렇게 히틀러에 비유해 본질 밖으로 비약시키면 안 된다.

개혁은 혁명이 아니다. 만약 시민혁명관이 이에 생각의 뿌리를 두고 있다면 위험스런 오류다. 개혁 또한 법질서에 의한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강점이다. 데모로 잡은 정권은 데모로 쇠퇴하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이것이 이번 총선 결과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점으로 시민혁명관이 안고 있는 함정이다. 우리는 이같은 함정의 불행을 거부하고자 하는 것이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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