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공해와 寓話

다 아는 ‘어느 부자(父子)와 당나귀’ 이야기다. 당나귀를 끌고 걸어가는 부자를 보고 사람들이 비웃었다. “타고가지 그냥 간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을 당나귀에 태웠다. 그러자 사람들은 “나이 많은 아버지를 걷게 한다”면서 아들을 불효자라고 나무랐다. 아버지는 아들을 내리게하고 자신이 당나귀를 탔으나 이번엔 “어린 아들을 걸린다”며 아버지를 탓했다. 궁리끝에 부자가 같이 당나귀를 탔다. 그래도 사람들의 욕을 들었다. “모진 부자가 짐승을 혹사한다”는 것이었다. 사람의 말이란 이처럼 묘하다. 이집트의 우화로 ‘악어의 논법’이란 게 있다. 나일강의 악어에게 어린 아들을 빼앗긴 어머니가 제발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악어는 그럼 내가 아이를 돌려줄 것인지, 안 돌려줄 것인지 내 마음을 맞추면 살려주겠다고 했다. 아이 어머니는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말하든 저렇게 말하든 틀렸다고 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여우꼬리’이야기는 이솝의 우화다. 한 여우가 함정에 빠져 발버둥치다가 그만 꼬리를 잘린 채 겨우 살아나왔다. 꼬리를 잃어 창피해진 그 여우는 동료들에게 “너희들도 꼬리가 없으면 늑대에게 쫓길때나 앉을 때나 방해가 안 되니까 잘라버리라”고 충동질했다. 우린 지금 이런 우화같은 논법이 범람하는 가운데서 산다. 현대 사회구조는 복잡하다. 의사 형성도 가지가지다. 의사전달 수단도 다양하다. 많은 말을 하고 많은 말을 듣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말들을 다 자기 입장에서만 한다. 남의 입장은 생각하질 않는다. 주관적 설득만 있을 뿐 객관적 이해는 외면한다. 사람이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은 어쩜 본능이긴 하지만 본능대로만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사회다. 그래서 법률이나 윤리 도덕 등의 규범이 있으나 이보다 앞서는 것이 일의 전후 사정을 참작하는 경우(境遇)다. 인간생활의 경우는 주관적 요소가 아닌 객관적 판단이다. 여기에는 원칙논리가 지배된다. 그런데 이마저 자기 좋을 대로 끌어다 붙인다. 이게 그때 그때 따라서 말이 달라지는 상황논리다. 상황논리가 원칙논리로 행세한다. 우린 지금 이런 말의 혼돈속에서 살고 있다. 정치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고, 심지어는 문화도 그렇다. 사회분야도 마찬가지다. 대통령도 그렇고, 정치인도 그렇고, 관료들도 그렇고, 지식인들도 그렇고, 언론도 그렇다 보니 범부(凡夫)들도 그렇다. 그러나 그 해악은 다르다. 다스리는 이의 헷갈린 말 한 마디는 다스림을 받는 이의 헷갈리는 말 천만 마디보다 해악이 더 심하다. 범부들의 헷갈리는 말이야 실언이나 농담으로 쳐도 당사자끼리의 이해관계에 그치지만 권력자 등은 그렇지 않다. 권력의 지위가 높거나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헷갈리는 말의 위해는 막심하다. 상황논리가 원칙논리로 둔갑하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된다. 지금 우린 이런 경우가 없는 사회속에서 산다. 하긴, 경우대로만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허물이 없는 사람은 없다. 사람마다 있는 허물을 자신은 없다고 우기는 것은 꼬리잘린 여우꼴이다. 허물엔 용서받을 게 있고 용서받지 못할 게 있다. 자신의 용서받지 못할 허물은 너그럽게 여기고 상대의 용서받을 허물엔 인색하게 구는 것은 ‘악어의 논법’과 같다. ‘악어의 논법’은 상관궤변법이다. ‘어느 부자와 당나귀’ 이야기에서 쏟아진 사람들의 비난은 측면적 일리는 다 있으나 원론적 논거는 모두 없다. 전후 사정을 살펴야 하는 것이 논거다. 가령 당나귀의 상태가 안 좋으면 부자가 걸어야하는 게 맞고, 당나귀가 건강하면 부자가 함께 타는 게 정답이다. 당나귀 사정을 봐주어 한 사람만 타기로 하면 서로 바꿔가며 타도 되고, 아버지나 아들 중 몸이 더 피로한 사람이 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측면적 일리도 없는 것은 군맹무상(群盲撫象)이다. 코끼리를 가리켜 배를 만진 사람은 벽과 같다하고 다리를 만진 사람은 기둥과 같다고 해서는 완전히 빗나간 얘기가 된다. 우린 어쩜 이런 빗나간 얘기가 지배하는 속에서 사는지도 모른다. 무성한 언어공해 사태로 우리의 정신환경이 점점 더 피폐해 간다. 이 칼럼 또한 그런 언어공해를 끼치지 않는 지 항상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정권은 유한하고 나라는 무한하다. 사회는 항상 시끄러울 것 같지만 언젠간 좀 조용한 날이 온다. 사람의 일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끝은 또 새로운 시작이다. 그 시작은 말에 질서가 있는 시대일 것 같으면 좋겠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이 시대의 ‘민족’ 개념

약 600만명의 해외동포가 140여개국에서 살고 있다. 정부 자료에서 이같이 나타난 지역별 구성비는 다음과 같다. 중국 37.11%, 미국 34.46%, 일본 13.33%, 독립국가연합 8.82%, 중남미 1.72%, 아시아·태평양 1.66%, 캐나다 1.4%, 유럽 1.26%, 중동 0.18%, 아프리카 0.06% 등 순이다. 국내 거주자 4천600만명에 비해 13%가 해외에서 산다. 해외 이민동포 중에는 혼혈인 후손이 적잖다. 국내엔 주한 미군을 통한 흑·백인 혼혈인이 있고, 베트남 전쟁을 통해 한국인이 씨를 뿌린 ‘라이따이한’들이 있다. 국내엔 또 외국인 여성이 내국인 남성과 결혼해서 낳은 혼혈인들도 많다. 한(韓)민족은 시베리아에서 동남아시아,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연해주에 이르는 광범위한 영역에 분포된 인종과 문화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융합하여 형성됐다. 역사적으로 상고해도 말갈, 거란, 여진 등 북방족들의 귀화가 있었고 이들의 혼혈인이 대동강을 넘어 한강 이남까지 남하했다. 중국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없애고 청천강 이남 등에 둔 한사군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폐한 것은 400여년 만이다. 국내 성씨 중엔 이밖에도 중국에서 망명해온 한(漢)족을 시조로하는 성씨가 많다. 고려 땐 몽고군의 7차에 걸친 침입으로 30년동안 이어지는 몽고항쟁이 있었고, 조선조에선 병자호란·임진왜란 등 장구한 전란을 겪었다. ‘배달’(倍達)은 상고시대의 나라 이름이다. 이런 상고시대적 배달민족의 순혈지상주의는 이제 신화로 보아야 한다. 한국전쟁으로 시작된 해외입양은 전란이 끝난지 반세기가 넘도록 지금도 계속된다. 나라밖 양부모 슬하에서 장성한 한국인이 친부모를 찾기위해 홀트아동복지회를 찾는 수가 해마다 5천명에 이른다. 우린 우리나라 사람이 낳은 아이를 우리가 키우지 못해 남의 나라 양부모에 맡겨오고 있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순혈지상주의 주장은 난센스다. 민족의 절대적 개념은 항일 독립운동으로 역할을 다 했다. 민족의 상대적 개념은 20세기로 끝났다. 21세기의 민족 개념은 다원화가 인정돼야 한다. 중국은 한족으로 대표되지만 소수족 등 50여 민족이 있다. 몽고족의 원나라, 만주족의 청나라 지배를 받았지만 이들 나라를 중국 역사로 친다. 미국은 말 그대로 지구촌의 인종시장이다. 영국, 프랑스에서도 흑인의 세가 늘고 오스트레일리아의 백호주의 또한 퇴색했다. 지구상의 심한 민족분쟁은 팔레스티나를 둘러싼 아랍과 유태민족 뿐이다. 국내에서 쓰는 민족의 단원적 개념은 두 가지 어폐가 있다. 첫째는 국민을 편 가른다. 대원군 때 처럼 나라의 대문을 빗장 걸고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미래사회는 갈수록 개방된다. 민족지상주의가 아닌 국민지상주의 시대다. 민족의 복리가 아니라 국민의 복리를 말하는 시대다. 이미 다른 나라가 그런것처럼 우리도 이런 시대의 문턱에 이미 들어섰다. 또 하나의 어폐는 정치적 주술 용어다. 특히 남북관계에서 많이 쓰인다. ‘민족자조’, ‘민족공조’는 북측이 아주 좋아하는 상투적 언어다. “우리 일을 외세개입 없이 우리 민족끼리 해결하자”는 것은 듣기엔 썩 좋지만 신뢰를 상실한 함정이 있다. 그토록 민족을 말한다면 동족을 죽이는 참혹한 전쟁을 일으키지 말았어야 한다. 그토록 민족을 말하자면 김구 선생의 남북협상 제의를 받아들였어야 한다. 그런데 평양에 간 그 분을 박대 해놓고는 전쟁을 일으켰다. 그땐 그 때고, 지금은 지금이라고 한다면 이야말로 남북간에 확실한 과거사 정리를 매듭짓고 나서 얘기를 새로 시작해야 한다. 그 옛날 배달의 순혈성을 찾기도 어렵지만 그런대로 쓰였던 단원적 민족 개념이 다원화해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추이다. 세상은 달라져가는 데 생각은 옛 생각에 머물러 있어서는 갈등만 있을 뿐 발전은 없다. 한국계 NFL의 영웅 하인스 워드의 방한으로 혼혈인에 대한 편견이 좀 달라지긴 했다. 그는 혼혈인을 위한 국내 재단설립을 다짐하고 떠났다. 정치권에서는 ‘혼혈인차별금지법안’ 입안에 나섰다. 자칫하면 예의 반짝 관심에 그쳐 늦춰질 진 몰라도 결국은 입법화된다. 어떻든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 것은 긍정적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국내 영주자격이 있으면서 일정 요건을 갖춘 외국인은 지역주민의 자격으로 투표권을 행사한다. 세상은 개개인의 편견에 상관없이 이렇게 달라져 간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재벌, 괴물인가

기업은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이미 사회에 기여한다는 것이 재수정 단계의 자본주의 개념이다. 고용 증대에 적정 수준의 임금으로 소득을 재분배한다. 소비재 및 자본재의 상호 유통으로 기업간의 활성화를 기한다. 국가 및 공공단체가 창출하는 국익 및 공익의 원동력이 될 세원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기업에 기업 이익의 준조세적 사회환원을 강요하는 것은 확대재생산을 저해한다. 정치자금을 손벌리는 것은 고질적 정경유착이다. 정치단체나 시민단체가 지원을 요청하는 것은 개평 떼기다. 기업은 이래서 부정한 방법으로 비자금을 만든다. 기왕 만드는 김에 더 만들어 쌈짓돈처럼 쓴다. 두산 형제 일가가 수백억원의 비자금을 만들어 흥청망청 쓴 것이 이같은 예다. 기업의 회계부정은 소비자 부담으로 돌아간다. 가령 현대차의 거액 회계부정이 없었다면 수요자는 보다 싼 값으로 차를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기업의 존재는 실로 위대하다. 나라가 국민을 먹여살리는 것이 아니고 기업이 먹여살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정권의 실정이 가져온 양극화를 해소하는 방안 역시 기업활성화로 민생경제를 살리는 것이 제대로 가는 길이다. 잘 살고 못 사는 사람은 어느 나라, 어느 사회나 다 있게 마련이다. 문제는 중산층이 무너진 데 있다. 이 정부는 시혜적 사회복지시책으로 양극화를 해소한다지만 세금만 축내는 그런 방법으로 붕괴된 중산층이 되살아 나는 것은 아니다. 서민층이 스스로 잘 벌어 저축도 할 수 있는 중산층이 되도록 해야하고, 이는 기업이 중심이 되는 민생경제가 잘 돌아가야 한다. 이처럼 막중한 기업, 특히 대기업이 대체로 국민경제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현상은 불행하다. 삼성이나 현대차는 국내 재벌의 랭킹 1·2위다. 그 총수들은 수 십조, 수 조원 대의 재산을 갖고 있다. 그 많은 재산을 지녔으면서 상속세를 포탈하기 위해 삼성이 편법을 쓴데 이어 현대차가 비슷한 혐의로 검찰수사를 받고 있는 것은 도덕성 상실의 몰염치다. 다른 재벌급 대기업도 거의 마찬가지지만 삼성이나 현대차 집은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이병철·정주영 등의 창업은 물론 본인의 능력이 탁월하기도 하였지만 개발독재 시절에 외국자본에 대항키위한 국민경제의 대표격으로 정권이 급조한 재벌이다. 국내 재벌은 태생적으로 이렇게 정경유착을 타고 났다. 그러나 총수가 바뀌고 또 바뀔 것에 대비할만큼 많은 세월이 지나 시대가 달라진 이 마당에서는 체질 또한 바뀌어야 한다. 권력의 부당한 기업규제 투성인 것이 문제이긴 해도, 체질변화없이 이를 탓만하는 것은 부질없다. 앞으로는 무슨 의연금 모금 때만 되면 기업이익의 사회환원이란 허울로 당연히 모금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고, 또 기업은 이를 생색내는 기형적 풍조는 사라져야 한다. 선거때만 되면 안 그런다면서도 보험금조의 정치자금이 거래되는 폐습도 추방돼야 한다. 정치단체나 시민단체의 개평 떼기도 수치로 알아야하고, 기업은 또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 기업이 이토록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사회에 기여하는 본연의 인식이 객관화하기 위해서는 경영이 투명해야 한다. 법대로 해서는, 즉 기업이 투명해선 경영이 안 된다면 안 되는 실정을 낱낱이 공개해서라도 그 모든 제도를 바꿀 필요가 있다. 어렵겠지만 이래야 한다. 그러지 않고 지금처럼 원초적 죄악에 기생하는 것을 즐기면서, 외부의 권력과 결탁하는 공생을 탐닉하면서, 어떤 사단이 벌어지면 그제야 죽는 시늉을 해서는 사회 기여의 평가를 제대로 받기가 어렵다. 현대차에 대한 검찰수사가 보기에 무척 착잡하다. 당초 발단이 된 희대의 금융브로커 김재록 로비의혹은 간데 없고 현대차와 산하 업체가 완전히 타깃이 됐다. 정치적 저의가 있다고도 하고 복선이 깔렸다는 말도 나온다. 그런데 들리는 말이 아주 고약하다. 거액의 비자금을 해외에 세탁한 뒤에 국내로 들여와 투자회사를 통해 천억원대의 부당이득을 챙겼다고도 하고, 전의 기아 부실 계열사를 팔았다가 되사는 편법인수방법으로 500억원의 공적자금을 탕감했다는 소리가 나왔다. 검찰수사를 더 지켜봐야겠지만, 저의나 복선이 어떻든 간에 철저히 밝혀내야 할 일이다. 대기업의 경영 비리에 메스를 대면 마치 뿔을 고치려다가 소가 죽는 것처럼 엄살을 부리지만 당치 않다. 기업의 사회 기여와 비리는 완전히 별개다. 국내 재벌 기업은 외국의 재벌이 자국민의 사랑을 받는 것과 같이 왜 국민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지, 그 연유를 스스로 반성하여야 한다. 재벌 기업은 괴물이 되어선 안 된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徐花潭과 知足선사

겉으로만 착한 채 하는 위선과 짐짓 악한 채 하는 위악의 반사회성 차이는 뭘까, 인간의 삶엔 때때로 두가지가 다 필요악의 공동선일 수가 있다. 여기선 위선을 예로 든다. 인격형 위선은 필요악의 공동선이다. 가령, 본심과 다른 어느 정도의 체면치레 겸손은 인간생활의 에티켓이다. 감정을 절제할 줄 아는 것도 인간생활에 필요한 예절이다. 자신을 위하면서 상대를 위한다. 위선의 폐악은 불손한 비인격형 위선에 있다. 자신만을 위하여 상대에겐 피해를 준다. 사회생활은 이런 인격형 위선과 비인격형 위선이 엇갈려 돌아가는 파노라마와 같다. 인격·비인격형 구분은 무슨 고매한 학식이 기준인 것은 아니다. 학식이 높은 사람도 사람답지 못한 사람이 많다. 학식이 옅은 사람도 사람다운 사람이 많다. 인격·비인격형은 사람이 사람다움에 따라 구분된다. 국회의원직 사퇴권고결의안이 제기된 최연희 의원의 예를 다시 든다. 그의 여기자 성추행은 순간적이다. 취기에 성적 충동을 느꼈다면 부교감 신경의 반응이다. 십계명으로 다스리지 않는한 이런 내재적 반응을 지탄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같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분출한 데 있다. 한 순간의 찰나였지만 그것은 인격형 위선자가 되지못한 비인격형 위선의 폐악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사람이 사람답고, 사람답지 못한 행위는 이처럼 순간적으로 객관화 되는 것이 인간생활이다. 십년공부가 나무아미타불이 된 지족 선사 역시 마찬가지다. 송도 송악산 암자에서 십년동안 면벽 참선한 지족 선사를 한 순간에 파계시킨 황진이의 유혹은 남성의 비인격형 위선에 대한 일종의 실험적 도전이었다. 황진이는 당대의 도학자 서화담에게도 같은 공세를 폈다. 여름철 비에 온 몸이 흠뻑 젖은 옷차림으로 두 남성의 품에 각기 뛰어 들었으나 서화담에겐 실패하고 지족 선사에게는 성공했다. 이런 생각은 해볼 수 있다. 서화담은 속세에 있었고 지족 선사는 속세를 떠나 금욕생활을 한 차이가 있다고는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어떻든 서화담은 자기 감정을 절제해 보인 반면에 지족 선사는 자기 감정을 절제치 못한 객관적 평가는 판이하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었는다 /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이를 슬어 하노라’ 풍류시인 임백호가 뒷날 황진이 묘소에서 읊은 고시조다. 황진이의 그같은 실험적 도전은 남성 우월사회에 대한 항거였던 것이다. 인간의 품격 값어치가 높아진 현대사회는 전처럼 남성이 여성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대구에서 법조출입했을 때의 실화다. 각 검사 방마다 오전 오후로 두 차례씩 순회취재하는 것은 당시 법조 출입기자의 일과였다. 한 번은 같이 도는 기자 가운데 유별나게 더듬기를 좋아하는 동료가 있었다. 어느 방에 들르자 검사 앞에서 보온병을 따는 여성의 뒷모습을 본 그는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다짜고짜로 껴안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커피배달 나온 다방 종업원인 줄 알고 그랬지만 그게 아니다. 새파랗게 질린 여성은 남편의 한약을 집에서 가져온 검사 부인이었다. “여보! 인사하지”하면서 “제 집사람이다”라는 말로 검사 남편은 재빠르게 좌중을 관대히 수습했지만 동료의 황당무례함에 같이간 사람들조차 무안하여 얼굴이 달아 올랐다. 아득한 이 옛 얘기를 하는 덴 이유가 있다. 그 무렵은 다방 종업원이었을 것 같으면 으레 그럴 수 있는 것으로 아는 것이 사회통념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다방 종업원일 지라도 성추행으로 처벌되는 것이 현대사회의 통념이다. 그 친구는 백배사죄하고 끝났지만 지금 같으면 현행범으로 체포될만 하다. 국회의원직 사퇴권고안이 나오도록 사퇴를 거부하는 최연희 의원은 옛날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남자가 술먹고 뭣,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그만한 일로 그만 두라고 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보는 구시대 인식이 아직도 몸에 밴 것 같다. 그러면서 ‘안그런 남자 있으면 나와 보라!’는 행티로 보인다. 착각이다. 장합이란 것도 있다. 오는 4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할 최 의원 안건을 두고 여성 의원들은 기명투표를 추진하는 데 비해 일부 남성 의원은 난색을 보인다는 소식이다. 국회법상 인사에 관한 안건은 무기명 비밀투표가 원칙이라는 것이다. 국회의원을 못하는 범부들도 이성에 공동선의 위선을 가질 줄 아는데, 명색이 국회의원이 공동악의 폐악을 저지르고도 버티는 강심장이 정말 대단하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여성의 인격권, 인간의 존엄성

젖가슴 한 번 만졌다고 국회의원 감투까지 내놔야 하느냐는 의문이 없지 않은 것 같다. 당자인 최 아무개 국회의원도 그렇고, 비슷한 생각을 갖는 남성들도 아주 없진 않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궁중 누각에서 중신들과 밤에 주연을 갖던 중 회오리 바람이 일어 등이 모두 꺼졌다. 이 때 어느 신하의 손더듬이 희롱을 받은 총희가 환공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신첩을 희롱하는 자가 있어 옷섶을 쨌사오니 속히 등촉을 밝히소서.” 그러나 환공의 말은 달랐다. “등촉을 밝힐 것 없다. 야심했으니 이대로 자리를 파하자”며 일어섰다. 환공의 고사를 예로 든 것은 상황의 비유를 위해서다. 주연의 자린 같다. 등은 꺼지지 않고 촉광은 현란했다. 벼락같이 뒤에서 두 팔로 껴안으며 앞가슴을 주물럭거리는 손길이 누군지 모른 괴한의 손이었다. 질겁하여 놀라지 않을 여성이 없다. 상대가 여기자라 말썽이 된 건 아니다. 피해자가 만만치 않은 여기자인 점은 있다. 그러나 그 국회의원이 착각했다는 말도 아닌 말 그대로 상대가 음식점 주인이었을 지라도 국회의원 감투를 내놔야 한다. 중인환시(衆人環視)속에 당한 이런 봉변을 용서하는 것은 관대함이 아닌 인권과 인격의 포기다. 그래도 국회의원직까지 내놓는 건 가혹하단 동정론은 낡은 윤리관이다. 윤리관은 삶에 따라 변한다. 수치로 알았던 여성의 개가(改嫁)가 당당한 시대다. 개화기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이 거리를 활보하면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또 미친 여잘 이상하게 보는 남성의 눈길은 당연한 거였을 것이다. 지금은 반대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은 당당하고, 그걸 눈여겨 보는 남성의 눈은 치한(癡漢)으로 몰린다. 춘천지검 차장검사까지 지낸 그 국회의원이 초임검사 시절 무렵 같았으면 아마 국회의원직까지 내놓진 않아도 될 지 모른다. 추문으로 흘려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남자가 술먹고 그럴수도 있는거지…’하는 남성 특권론은 ‘홍도가 울던 시대’에 이어 ‘영자의 시대’로 시효가 끝난 유물적 관념이다. 성추행, 성희롱을 엄단하는 것은 여성인권의 회복이다. 그리고 이런 여성인권 회복은 여성만이 아닌 인간의 존엄성 신장이다. 여성가족이 없는 남성이 없다. 남의 여성가족은 추행이나 희롱으로부터 개방되고 자신의 여성가족은 보호돼야 한다는 생각은 성립될 수 없는 부등식(不等式)이다. 남의 여성가족 손목을 옛 유행가 가사처럼 ‘전찻간의 손잡이’로 안다면 자신의 여성가족 손목도 ‘전찻간의 손잡이’로 내놔야 한다. 최 아무개는 이래서 국회의원 감투를 내놔야 하는 것이다. 남성들은 손 버릇을 정말 조심해야 한다. 어느 횟집에서다. 홀 서빙하는 아주머니와 가벼운 농담 끝에 남자 손님이 엉덩이를 탁 쳤다. 그 아주머니는 갑자기 고함을 크게 질러 역정을 내면서 성희롱으로 고소했다. 손님은 결국 500만원을 주고 화해해야 했다. 그 아주머니는 그 집을 그만 두고 다른데로 갔다. 성희롱 전문의 화해금 상습 소득자라는 후문이었다. 한 번은 택시기사가 “재수가 없으려니 별꼴을 다 봤다”며 푸념을 했다. 웬 여자 손님이 앞좌석에 타더니 성추행 당했다고 고소한 바람에 한나절동안 일도 못하고 경찰서에 가서 시달리다 나온 길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손가락 하나 까닥 안 한 성추행도 있느냐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해가 뉘엿 뉘엿 질 무렵 수원대 근교에서 어떤 여인이 손을 드는데도 핸들을 잡은 친구는 승용차를 그대로 몰았다. “버스도 없는데 좀 태워주지 그랬느냐”니까 “저런 사람 잘못 태웠다간 봉변당하기 십상”이라는 게 친구 말이었다. 그렇다. 성희롱, 성추행이란 게 있다보니 무고(誣告)가 두렵기도 하는 세태이긴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해도 성희롱, 성추행을 엄히 다스리는 세태가 인간다움의 공동체사회라는 사실이다. 엉덩이 한 번 만지고 500만원을 물어준 본인은 억울할지 몰라도 남의 여자 엉덩일 함부로 손 댄 반사회성은 응징되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 가령 시대를 의제적(擬制的)으로 바꾸면 그 땐 환공이 아무리 그러했을 지라도 그 또한 지금의 최 아무개 같은 사례엔 용서할래야 용서할 수 없는 상황으로 판단할 것이라는 가상 비유가 도출된다. 시대상을 바로 봐야 한다. 민초는 사소한 실수에도 무거운 책임을 지는 판에, 명색이 국회의원이란 남자가 딸 자식 같은 여성에게 차마 못할짓을 해놓고 법정심판을 받겠다니, 겉치레 사과일 뿐 본심은 책임을 가볍게 여기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여성의 인격권, 즉 인간의 존엄성 신장을 거부하는 그는 그래서 점점 더 추악해지는 면모가 보기에 참 딱하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한나라당, 전략공천으로 가나?

한나라당의 지방선거 싹수는 정말 노란가, 이렇게 악평하는 이들이 많다. 열린우리당쪽은 조용하다. 공천 대상자를 구하기에 바쁘다. 한나라당쪽은 시끄럽다. 공천 잡음이 요란하다. 공천만 되면 당선은 따 놓은 당상으로 보는 오만함이다. 지금은 제2공화국 같던 때가 아니다. 1960년 7·29총선에선 민주당(구 민주당)간판만 업고 나오면 막대기를 꽂아놔도 당선됐다. 국회의석을 싹쓸이 하다보니 신파·구파 싸움으로 영일이 없다가 5·16군사혁명을 당했다. 총선 싹쓸이는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린 4·19 의거의 반사이익이었다. 반사이익은 거품과 같다. 한나라당 사람들이 이 정권의 민심 이반으로 불로소득하는 반사이익을 끝내 철밥통으로 알고 정신 못차리면 거품처럼 사라진다. 철밥통이 아닌 거품밥통인 것이 반사이익이다. 한나라당 공천 잡음은 상궤를 넘어서 중앙당의 암행감찰단이 가동됐다. 경기도당 역시 이에 예외가 아닌 것 같다. ‘공천심사위원회’ 자체가 상처 투성이다. 심사위원으로 피선거권이 없는 사람을 앉혔던 것 부터가 심상치 않더니 심사위원장까지 덧났다. 도당 위원장이며 공천심사위원장이란 사람이 어느 지역의 광역·기초의원 후보들과 식사한 것을 상대 후보가 문제삼아 감찰단의 조사 대상에 올랐다. 또 의정부시의 한 시의원이 공천심사위원장 대리인 행세를 하여 공천 희망자 두 명에게 각 천만원을 받고 돌려줬다는 제보가 있어 당이 진상조사에 나섰다. 공천 심사엔 높은 가치 수준의 품격과 도덕성을 요구받는다. 객관적 신뢰를 위해서다. 이래도 구체적 심사엔 문제점이 되는 속사정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속사정은 고사하고 겉모양부터 상처가 나서는 유권자들을 설득하기가 어렵다. 한나라당의 취약점은 폐쇄성이다. 거품밥통을 철밥통으로 알고 기득권자들끼리 나눠 독식하려고만 든다. 외부의 공천 신청을 트집잡을 게 없어 공직생활의 정상적 업무 집행까지 트집잡아 입당 보류라는 기상천외의 역발상으로 배제하려 든다. 국회의원을 하겠다고 해서 유권자들로부터 표를 얻어 당선된 사람들이 임기 중반에 도지사를 하겠다고 야단이다. 국회의원이 되어 외도하면서 국회의원직은 그대로 지키는 양다리 놀음을 걸치고 있다. 폐쇄형 철밥통의 현상이다. 5·31 지방선거가 중요한 것은 지방자치의 성숙을 위해서다. 지방선거의 승패는 민심의 반영이긴 하나 중앙정권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차기 대선의 전초전은 되지만, 지방선거의 승패가 대선의 승패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치는 살아 숨쉬는 무형체의 유형 동물과 같다. 흐르는 강물과 같다. 다만 때로는 정체되고 때로는 천천히 흐르거나 빨리 흐를 뿐이다. 이 칼럼은 차기 대선에서 범야권의 단일 후보가 안 되면 정권 교체는 불가능한 사실을 밝힌 바가 있다. 지금 다음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서는 야권 사람들이 무척 많지만, 단일화가 안 되면 그 누구도 대통령이 될 수 없다. 한나라당의 폐쇄성이 우려되는 것은 지방선거도 지방선거지만 차기 대선에 혼선을 가져올 것으로 보아지기 때문이다. 제일야당의 문호가 개방되지 못해 빗장을 꼭꼭 걸어잠가선 범야 단일화는 기대할 수가 없다. 한나라당은 무형체의 유형동물이 되지 못해 식물화해가고, 흐르는 강물이 되지못한 고인 웅덩이가 되어 썩기 시작한다. 이 정권이 독선의 오만에 심취해 있다면 한나라당은 반사이익에 심취하여 제 정신이 아니다. 한 치 앞을 못내다 보고 텃세로 눈앞의 밥그릇 챙기기에만 바쁘다. 노무현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탈당 카드는 언젠간 터질 묻어둔 지뢰다. 정치권 개편의 폭풍에 한나라당은 얼마나 무사할 것인지엔 전혀 생각지 않는 정당이다. 한나라당 지도부의 결단이 있어야 할 때다. 공천 잡음이 심한 곳은 중앙당이 전략공천할 것으로 전해진 건 그런 결단의 하나로 보아진다.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말썽많은 이해찬 총리를 대통령을 졸라 총리직에서 밀어내고는 한나라당이 쫓기는 수세로 몰렸다. 정 의장은 자신의 정치적 명운이 걸린 5·31 지방선거에 혼신의 힘을 다 할 것이다. 이 판에 한나라당이 공천 잡음에 시달리는 것은 지나치게 안일하다. 지방선거 싹수가 정말 노란가를 좀 더 두고 지켜볼 일이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이해찬’ 살리기, 안 말린다

의혹의 이해찬 총리 골프 파문을 두 가지 관점으로 본다. 골프 로비의 사실관계와 여권 내부의 기류다. 로비 의혹의 사실 관계는 우렁이 속 만큼이나 깊다. 이 총리의 부산길에 수행비서 역할을 한 이기우 교육부 차관은 “3·1절 골프 모임에서 과징금 얘기는 안나왔다”며 로비 의혹을 부인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골프회동을 함께한 Y 회장의 Y기업에 부과한 과징금은 35억원이다. 골프장에서 그런 얘기가 공개될 수 없는 것은 상식이다. 이 차관의 해명은 상식 밖이다. 한국교직원공제협회의 부적절한 Y기업 투자는 배경이 있을 것이다. 그 배경이 베일에 가려 있다. 이 총리와 Y 회장은 공생의 관계다. 의문의 사실관계에 이 총리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아직 검찰수사 단계로 볼 수 없는지 있는진 모르겠다. 언젠간 그런 단계가 되어 가해지는 사직 당국의 힘에 의하지 않고는 진실 규명이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런 단계가 영 오지 않으면 진실은 묻힐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악은 구악을 뺨친다. 겉으로는 구악을 지탄하면서 속으로는 구악의 악습을 더 지능적으로 답습하는 것이 교활한 신악이다. 신악은 그리하여 신종 악의 중시조가 되는 새로운 구악으로 변모한다. 그런데도 아니라고 한다. 이것이 ‘구악+신악’이 갖는 특성이다. 이 정권의 도덕성에 이런 의문을 갖는 것이 세평이다. 이 총리 골프 의혹 파문은 여권 내부의 이상기류를 감지케 한다. 평소의 묻힌 저류를 드러내 보이는 계기가 됐다. 청와대가 총리 살리기 시도에 나선 것은 해외에 나가있는 노무현 대통령의 리모컨 작동으로 보아진다. 이병완 청와대 비서실장은 “난감한 상황”이라면서 “그러나 사실관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중요하다는 사실관계의 실체는 묻어둔 채 로비는 없었다고만 무작정 우긴다. 열린우리당의 사정도 기묘하다. 정동영 의장 등 주류는 사퇴 굳히기로 나가는 반면에 김두관 최고위원 등 비주류는 살리기 방향에 긍정적이다. 문제는 5·31 지방선거다. 이 총리 골프 의혹 파문은 치명적 악재라고 보는 것이 주류의 입장이다. 지방선거 일선에서 여권의 총대를 메고 있는 정 의장 처지에서는 더욱 절실하다. 그러나 청와대나 비주류측은 좀 다른 것 같다. 노 대통령이 이 총리를 ‘천생연분’으로 보는 생각을 옹위하려는 태세가 역력하다. 대통령이 보기엔 여권내에 이해찬 만큼 잘 할 총리감이 없고, 또 여론에 밀리면 또 밀려 레임덕의 조기화가 닥칠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러므로 예의 뚝심으로 밀어붙일 속셈인 걸로 보는 것이 객관적 관측이다. 물론 지방선거의 승리를 외면한다 할 순 없다. 이 총리도 살리고, 승리를 쟁취하는 일거양득이 되면 더욱 좋겠지만, 이에 못지않게 차기 후보에 신경을 쓰는 것이 이 정권 핵심부의 계산인 게 분명하다. 난처한 것은 정동영 의장이다. 의혹의 골프 사건만으로도 악재인 마당에 유임까지 시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 하여 만약 선거에서 패배해도 이해찬 때문에 졌다고 터놓고 항변하기도 어렵다. 바가지를 고스란히 뒤집어 쓰기 십상이다. 이 총리는 생각하는 것이나 성격이나 대통령과 거의 똑같다. 이 총리가 잠재적 대권 후보인 점은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그리고 당에서 보는 주류·비주류와 청와대 주변에서 보는 주류·비주류는 차이점이 있다. 예컨대 정 의장은 당에서는 주류이지만, 청와대 주변의 시각으로 보면 비주류로 분류된다. 노 대통령이 차기 대선을 지금의 열린우리당으로 치르도록 놔둘 것인가 하는 의문의 전망도 없지 않다. 이 총리의 골프 의혹 파문은 사실관계의 실체가 어떻든 간에, 예정보다 빠른 이 정권 내부의 단면적 저류의 노정을 유발했다. 총리의 거취 결정은 대통령이 귀국하기까지 일주일 남았다. 여론이 수그러들기를 기다리면서 떠 볼 시간은 있다. 살리기 시도의 성공을 단정하긴 어렵지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총리는 물론 퇴진해야 한다. 퇴진해야 하는데도 굳이 놔두겠다면 할 수 없다. 어차피 총리가 바뀐다고 이 정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총리를 살리고자 하는 게 뚝심의 오기이든 계산된 저의이든 간에 말리지 않고자 하는 역발상을 가져 본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월급 저축해가며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

“울화통이 치솟아요!” “그만 맥이 빠져요” “그러려니 하다가도 막상 듣고보면 화딱지 나요!” 올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에 대한 서민층의 반응이 대충 이렇다. 연례적 재산 공개 대상의 고위 공무원 중 약 80%가 지난해에 비해 재산이 늘었다. 그것도 불과 한 해동안에 수천만원은 약과고 수억, 수십억원을 늘린 공직자들이 수두룩하다. 한 해에 단 돈 몇 백만원, 아니 저축은 고사하고 당장 코 앞의 집안 살림에 쫓기는 서민층은 신기루같은 공직자들의 재산 증식에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집값을 잡는다’고 했다. ‘땅 투기를 막겠다’고 한다. 이래서 ‘부동산과의 전쟁’을 벌이는 이 정권의 어느 연금공단 이사장은 집이 무려 13채나 된다. 8·31 부동산 대책을 주도했던 청·정·당(靑·政·?)의 주역들 중 상당수는 임야 등 상당한 재산을, 이 정권이 사갈시(蛇蝎視)하는 강남에 갖고 있는 강남 부자들이다. 재산 증식의 큰 요인이 ‘부동산과의 전쟁’속에서도 부동산 가격이 치솟은 시세 차익인 건 아이러니컬 하다. 이런 가운데 국회의원들은 21억짜리 아파트를 4억에 신고하는 등 부실신고가 적잖지만, 원래가 ‘부자동네’라 재산이 많다 치더라도 이 정권 핵심의 재산 증식은 불가사의하다. 예컨대 청와대 수석들 평균 재산이 8억원 대로 지난 한 해동안에 수천만원씩 늘렸다. 그런데 재산이 는 연유가 고약하다. “월급을 저축하고 보유 주식을 매각했다”고 전해진 게 맞다면 부도덕하다. 월급을 저축했다면 도대체 생활은 뭘로 했다는 말인가, 빠듯한 월급을 동전 단위까지 쪼개 쓰고도 적자가계를 면치 못하는 서민층은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괴담이다. 권력을 거머쥔 청와대 사람들이 주식을 지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있어선 안 되는 불공정 행위다. 국무위원 중에도 이해찬 국무총리를 비롯한 9명이 급여 저축을 했다. 월급이나 적나, 이런 월급을 꼬박 꼬박 쌓아둘 지경이면 뭘 먹고 살았는 지 궁금하다. 노무현 대통령 일가도 7억3천485원이 늘었다. 청와대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게 되어 있으므로 월급 저축은 그런다 하지만 주식형 펀드 투자 수익은 처신이 옳지 않다. 국가 살림이 말이 아니다. 국가 채무가 279조원에 이른다. 국민 1인당 66만원 꼴이다. 서민 살림이 엉망이다. 국민의 금융 부채가 가구당 평균 3천300만원 대를 넘어섰다. 이런 형편에서 이 정권의 지도층은 흥청망청이다. 사회양극화 해소를 말한다. 양극화 심화를 자기네들이 만들어놓고, 마치 남의 탓인양 양극화 해소를 무슨 자랑삼 듯이 떠든다. 이도 처방이 틀렸다. 경제정책 실패, 반기업정서 조장, 실업자 양산이 양극화를 가져왔다. 그럼, 이를 거꾸로 푸는 것이 해소 방안인 데도 ‘청개구리형’ 오진(誤診)을 우긴다. 경제정책은 여전히 규제 일색이고, 기업 친화는 멀고, 실업자 흡수를 위한 일자리 창출보단,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 분배식 사회정책으로만 가려고 든다. 시중 경기가 독약 먹은 새처럼 늘어져 불황이 지속되어선 양극화 해소는 요원한다. 양극화의 상층구조는 해마다 불로소득으로 재산을 늘려가는 이 정권의 핵심층이다. 이들은 흔히 양극화 대립각으로 서민층과 부호층을 내세우지만 당치 않다. 서민층은 그보단 정권 핵심층을 더 대립각으로 본다. 기업 재벌은 그래도 땀흘려 그만한 노력을 해가며 돈을 번다. 그러나 권력 재벌은 땀 흘리지 않은 채 월급 없이도 잘 사는 선택된 귀족들이다. 이 정권은 ‘주인이 배부르니까, 머슴 배 곯은줄 모른다’는 속담을 연상케 한다. 자기네들이 잘 먹고 잘 사니까 민초들 속사정을 모른다. 말로는 안다고 하지만 건성이다. 발가락이 가려운 곳을 긁어 준다는 게 양말도 벗기지 않은 채 구두위를 긁기가 일쑤다. 나라 살림을 아낄 줄 모르고, 검소한 공·사 생활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오만이 심신에 배었기 때문이다.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가 11년째 입고 있는 겨울 점퍼를 두고 중국 인민들은 “우리는 이런 총리가 있어 행복하다. 조국과 인민에게 희망이 있다”라며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이 정권의 핵심 권력층은 조국과 국민에게 과연 희망을 주고 있는 지, 냉정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울화통이 치솟아요!” “그만 맥이 빠져요” “그러려니 하다가도 막상 듣고보면 화딱지 나요!” 이 정권 핵심층에 대한 국민사회의 드높은 분노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거지父子의 ‘우화’

옷가지 상인이 도·소매업을 하다가 망하고 나서 할수 없이 법원에 파산선고 신청을 냈다. 이윽고 면책결정을 받고 나선 “노무현이 이런 것(면책결정)을 둔 것 하나는 잘 했다”고 말했다. 뭣 한 가지 제대로 되는 장사가 없다고 아우성들이다. 이 정부의 높은 이들은 경제가 잘 돌아간다고 하는 데 시중 서민의 체감경기는 여전히 바닥을 긴다. ‘면책결정’은 갚을 수 없는 빚을 합법적으로 떼어먹는 빚잔치다. 그 옷가지 상인은 당장 빚더미 귀신으로부터 풀린 게 우선 살것 같아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장사가 안 되어 망한 것이 전례없는 경기불황탓인 것을 염두에 두고도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민법상의 파산제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온 것을 몰랐다는 사실이다. 그는 왜 ‘면책결정’을 이 정권이 둔 것으로 착각했을까, 망하지 않으면 알 필요가 없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파산 신청이 불티난 것은 이 정권 들어서다. 전엔 이에 관심조차 없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법원에 줄을 대고 있다. 법원마다 담당 판사들이 심리에 쫓길 정도로 신청이 폭주하고 ‘면책결정’ 공고가 범람한다. ‘면책결정’이 나면 채권이 법익의 우산에서 밀려나는 피해자가 생긴다. 면책된 사람에게 돈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은 또 그가 제3자에게 줄 채무 이행에까지 지장이 연쇄적으로 파급된다. 기막히는 현상이다. 서민층은 이토록 살기가 어려운 데 정부 발표는 언제나 장밋빛이다. 예컨대 한국은행의 지난해 상반기 매출액 증가율은 1분기 4.9%에서 2분기엔 1.7%로 뚝 떨어졌는 데도, 정부는 제조업 생산이 7.2% 증가했다며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 체감경기와 동떨어진 정부의 경제지표 발표는 지금도 다를 바가 없다. 백성들 살림만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나라 살림 또한 엉망이다. 이 정권의 누적된 적자예산 편성은 재원마련을 위한 적자국채 등의 무분별한 발행으로 나라 빚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당장 올 연말이면 지난해 246조원이던 국가채무가 국민 1인당 66만원 꼴인 279조원으로 13%(33조원)나 늘어날 전망이다. 세금은 세금대로 짜내면서 이 모양새로 나라 살림을 외상으로 꾸려간다. 이런 가운데 정부기구는 비만형이 되어가고, 사회복지 시책은 수치 통계를 위한 나열식일 뿐 실효성 있는 대책은 별로 찾을 길이 없다. 그러면서 말로는 온갖 큰 소린 다 친다. ‘자주국방’을 예로 든다. ‘자주국방’이야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인가, 원론적으로 이를 부정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돈이다. 2020년까지의 자주국방을 위한 국방개혁에 무려 623조원이 소요된다. (윤광웅 국방의 말) 한데, 구체적 예산 확보방안은 무대책이다. 구호일 뿐 현실성이 없다. 이런 국방개혁을 두고 언필칭 ‘자주국방’을 내세워 한·미동맹의 경제적 효과를 해친다. 백성들 살림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면서 이상하게 사회불안까지 조성하는 것이 이 정권이다. 교과서만 해도 그렇다. 남쪽은 장기집권·부정부패 등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북쪽은 사회주의 경제건설·주체사상 등을 긍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남쪽의 새마을운동은 깎아 내리고 북쪽의 천리마운동은 추켜 세웠다. 이런 교과서가 어떻게 우리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지 의심스럽다. ‘만경대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고 한 교수란 사람이 되레 큰 소리치는 세상이 됐다. 개혁은 개혁의 주체가 먼저 도덕성을 갖춰야 탄력을 받는다. 노무현 대통령 측근이 삼성에서 받은 7억원을 대선자금으로 쓴 것은 당연시하고, 청와대가 누구 사돈의 음주운전을 무마키 위한 경찰수사 개입설이 나온 것에 무감각해서는 개혁의 도덕성을 갖췄다 할 수 없다. 나라 안 권력층이라는 권력층에 손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윤상림 게이트’는 또 뭔가, 이해찬 국무총리가 총리가 되고 나선 그와 골프를 친적이 없다고 한 말이 되레 괴이하다. 개혁은 해야 한다. 하지만 이 정권을 겪은 3년은 국정 전반에 구악은 구악대로 답습하면서 구악 뺨치는 신악이 판친다. 개혁은 이미 물건너 갔다. 자기 눈의 눈엣가시는 손으로 가리며, 남의 눈엣가시는 손가락을 후벼넣어 파내려 든다. 비록 노무현 후보에게 표를 안 주었던 사람들도, 기왕 됐으면 잘 해주기를 바랐던 기대가 무산된 건 나라의 불행이다. 이 정권은 언젠간 또 한 번의 깜짝쇼를 벌이겠지만 면역이 된 국민사회는 무덤덤하다. 처 자식들 데리고 먹고 살기에 바쁜 것이 이 정권치하의 서민층이다. “노무현이 ‘면책결정’을 둔 건 잘 한 것”이란 착각, 그것은 아들이 불난 집을 가리키자 “아버지 덕에 우린 저런 걱정없다”고 했다는 잘 난 거지 아버지의 부자 우화를 생각나게 한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4월의 ‘北風’

북풍, 4월의 북풍이다. 4월은 봄철이다. 때아닌 북풍이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방북 추진은 표면상 그 개인이 희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김기남 북측 노동당 비서가 세브란스병원을 찾아 입원 중인 DJ에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좋은 계절에 오시라고 했는데 지금도 유효하다”고 한 말을 방북의 근거로 삼는다. 김 비서는 지난해 8·15 민족대축전 때 서울에 와 문병을 갔었다. 그러나 구체적 내용의 정식 초청은 아직 없다. 이래서 정부가 물밑 작업을 하는 것 같다. 4월 북풍의 시동이 걸릴 진 더 두고 봐야겠지만 가능성은 짙다. 김 비서는 좋은 계절이라고 했다. 4월은 좋은 계절이다. 봄철이다. 북측은 이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김일성 주석의 15일 생일 ‘태양절’이 든 축제의 달이다. 북녘은 사후 10년이 넘은 그를 지금도 주석으로 두고 있다. 유해는 금수산 궁전에 안치됐다. DJ의 4월 방북은 이 정권 역시 적기인 좋은 계절이다. 5·31 지방선거와 근접하기 때문이다. 이번 지방선거의 결과에 따라 정계 재편 여부가 시도될 것이다. 이에 DJ 4월 방북의 북풍을 호재로 보는 것 같다. 평양정권 역시 노무현 정권을 도울 수 있는 북풍에 인색할 이유는 있지 않다. 그러나 평양정권이 DJ 4월 방북을 성사시킨다면 더 큰 이유는 다른데 있다. ‘태양절’이 든 4월의 축제를 DJ 방북으로 더욱 빛낼 수 있다고 보는 속셈이 깔렸다. 그 예로 금수산궁전 참배를 요청할 수가 있다. 경의선을 오는 3월에 시범 개통하는데 이어 4월에 개통하는 것으로 들린다. 4월 개통이라는 게 설령 DJ 방북의 기차편을 위한 것으로 단발에 그친다 해도 이벤트임엔 틀림이 없다. 4월의 북풍이 매우 세 찰만 하다. 때 아닌 이런 북풍을 둔 지방선거 관련의 이성적 판단은 유권자들 몫이지만, 이 정권은 적어도 손해는 없다고 보는 감성적 계산을 하고 있는 지 모른다. 그러나 DJ 방북이 반드시 호재인 것 만은 아니다. 통일방안의 낮은 단계 연방제 협의설은 실로 위험하다. 단계가 낮든 높든 연방제는 어디까지나 연방제고 연합제는 연합제다. 남북 연합제가 아닌 남북 연방제 통일방안의 함정이 뭣인가는 이 정권이 더 잘 알 것이다. 국민투표로 국민적 합의를 가져야 하는 통일방안에 구체적 밀실(흥정) 협의는 국민사회가 용납지 않는다. 아니면 DJ가 남북 정상회담을 이끌어 내는 또 하나의 이벤트를 이 정권은 기대할 것이나 이도 별로다. 남북의 ‘노·김’ 정상회담이 빅뉴스인 건 사실이다. 그러나 ‘소문난 잔치(실속) 먹을 게 없다’는 속담 같은 경험을 이미 했다. ‘김·김’ 6·15 정상회담의 역사적 의미, 그것은 비유컨데 사랑에 의한 남녀관계 같은 게 아니다. 사실상 돈을 주고 산 것이다. 6·15 직전부터 시작해 수 십조원의 돈이 북에 무작정 흘러 들어갔다. DJ 방북에 기대하는 것이 있긴 있다. 핵 문제 해결이다. 그리하여 남북 공존공영의 길을 함께 가야 한다. 전쟁 위험의 응달이 없는 양달의 평화를 뿌리내려야 한다. 이를 위해 꼬인 6자회담의 매듭을 푸는 것이 방북의 소임이다. 매사에 탈도 많고 까닭도 많은 북녘 사람들이 호락 호락하게 잘 들어줄 리는 없지만, 그래도 가겠다 하고 보내겠다 하는 것을 말려서는 안 된다. 지방선거용이긴 해도 이를 이유로 못가게 해선 안 된다. 통일방안의 밀실 협의를 우려해서 방북 자체를 지레 막아서도 안 된다. 금수산궁전 참배도 안할 것으로 믿고 가도록 해야 된다. 소리만 요란한 채 빈 손으로 돌아오기 십상인 데 뭐하러 가느냐고 해서도 안 된다. 저자세 방북이라고 말려서도 안 된다. 제갈량(전설)은 조조의 수군 선단을 주유와 함께 섬멸한 화공에 불지않는 겨울철 동남풍을 칠성단에 밤낮 사흘동안 빌어 불러 일으켜 성공했다. 봄에 불지않는 북풍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북에 한결같이 치성하는 이 정권의 ‘제갈량’이 바람은 일으킬 지는 몰라도 성공적 소득은 미궁이다. 문제는 평양에서의 처신과 돌아올 때의 결과에 달렸다. 4월의 봄에 부는 북풍이 되레 이 정권에 부메랑이 되는 악재일 수 있는 것이 DJ 방북이다. 사정이 그렇게 되면 이 정권은 DJ 개인의 일로 돌려 악재에서 발을 빼려고 할 것이다. 분명히 해 둬야 할 게 있다. DJ 방북은 노무현 대통령의 특사 자격이어야 한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고건, 한나라당 가는가?

제 17대 대통령선거가 내년 12월19일이다. 건국 이후 59년 동안에 적잖은 선수(選數)의 대(代)를 맞이한다. 이 가운덴 직선이 아닌 국회의 간선, 심지어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니 대통령선거인단의 선거니 하는 변칙이 있었지만, 어쨌든 상당한 역대 대통령의 대를 쌓았다. 앞으로 21개월 남짓 남았다. 차기 후보의 윤곽이 잡히기엔 무척 이르다. 또 그간의 우여곡절, 즉 정계 재편의 변수나 이변 또한 배제하기 어렵다. 대세론이 결과로 이어지는 것을 별로 경험하지 못한 과거를 지니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적어도 10년은 정권을 재창출해야 한다”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3주년 워크숍에서 당시 정세균 당 의장이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수구 우파가 다음에 집권한다면 역사의 후퇴이며 재앙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재집권 의욕에 비해선 차기의 수면위 부상이 조용하다. 노 대통령의 레임덕 방지를 위해 조기 가시화를 피하는 탓도 있지만, 복잡한 속내가 없지않아 보인다. 오는 18일 열리는 전당대회에서 의장 자릴 놓고 치열한 경합을 벌이는 정동영, 김근태 두 전 장관은 일찌감치 당내 차기 후보로 분류되고는 있다. 하지만 관측통은 누가 당 의장이 되든 의장 자리가 차기 공천이 보장되는 것으로 보는 전망엔 회의적이다. 열린우리당에 비해 차기론이 활발한 것은 한나라당이다. 박근혜 대표, 손학규 경기도지사, 이명박 서울시장 등 ‘빅3’가 형성된 지 오래다. 이런 가운데 확인된 고건 전 총리의 영입 추진은 쇼킹하다.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지낸 고 전 총리는 여러 경로의 여론조사 때마다 차기 물망의 수위에 올랐다. 그의 향방은 차기 선거와 관련, 정치권의 최대 관심사였다. 이러한 그가 한나라당에 간다면 당권이 아닌 대권을 위한 것임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궁금한 것은 ‘빅3’의 일원인 박 대표의 입장 변화다. 박 대표 스스로가 ‘빅3’의 위치를 내놨다는 얘기가 된다. 이에 이렇게 전해졌다. “정권교체를 위해서라면 더 한 것도 내놓을 각오가 돼 있다”는 것이다. 정권교체만이 나라의 정체성을 살리고, 민생경제를 살리는 것으로 확신한다는 것이다. 자신부터의 기득권 포기로 신앙화한 정권교체의 결연한 의지를 다지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물론 고건 전 총리의 영입이 수면위로 떠오르는 덴 몇 가지 과정이 남아있어 예측을 단정키는 어렵다. 그러나 이만으로도 시사하는 의미는 있다. 박 대표의 한나라당 대선후보 외부 영입 시도는 두 가지 점에서 주목된다. 우선 당의 개방화다. 비록 야당일 지라도 제1야당인 점에 자족하여 안주하고자 한다면 당의 폐쇄성을 이어가도 괜찮다. 하지만 정권교체를 추구하고자 한다면 다르다. 중앙, 지방 할 것 없이 당의 문호를 크게 개방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의 객관적 판단이다. 대선 후보의 외부 물색은 그같은 중앙 영입의 정점으로 보아 주목된다. 그리고 사정은 지방도 다르지 않다. 같은 지역사회에서 둥지를 먼저 튼 옹졸한 폐쇄감으로 개방을 거부해서는 먼저 튼 둥지마저 언젠간 잃을 수가 있다. 당장은 하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다. 당당한 직책이 있고, 또 있을 사람들이 지방선거 영입에 토를 다는 것은 공당다운 조직의 면모가 아니다. 인재 영입은 비단 한나라당만이 아닌, 열린우리당 역시 부하받고 있는 절실한 경쟁적 과제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정권교체 열망은 소신공양(燒身供養)의 결의에도 솔직히 전망이 어려워 보인다. 일차적 난관은 외부영입의 소화다. 당내 후유증을 잘 극복해낼 수 있을것인 지가 의문이다. 또 잘 극복해내도 더 큰 문제점이 있다. 보수정당의 난립이 있어서는 너도 나도 안 된다. 범야권 아니면 적어도 보수정당만이라도 단일화가 되어야 가능성이 있다. 물론 진보세력의 난립도 예상은 된다. 그러나 진보세력의 난립에 의한 열린우리당 득표 잠식보다는, 보수정당 난립에 의한 한나라당 득표 잠식이 비교가 안 될만큼 더 치명적이다. 단일화 없이는 당내 ‘빅3’이든 고건 전 총리든, 그 누가 후보가 되든 간에 정권교체는 난망하다. 한나라당의 정권 탈환은 당의 개방화, 당의 융합화, 그리고 야권 단일화를 위한 정치적 포용력과 지도력 표출에 얼마나 강한 의지력을 보이는 가에 따라 비례한다 할 것이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5·31 지방선거와 ‘건달들’

건달이 국회의원은 할 수 있다. 아는 건 쥐뿔도 없으면서 행세하는 건달 정치꾼이 있다. 안건 심의는 상임위 처리에 맡기면 된다. 본회의 표결은 당론에 따라가면 된다. 이런 건달 정치꾼일수록 처세는 능하다. 이래도 티가 잘 안 나는 것이 국회의원의 의정생활이다. 대통령이 유식하지 않아도 대통령노릇을 할 수 있다. 실례로 전두환 장군을 박식하다 할 순 없다. 대통령 자릴 차고 앉다시피 했다. 그랬어도 그의 재임 중에 ‘물가가 가장 안정됐다’는 말이 주부들 입에서 나왔다. 물가안정엔 3저(底) 효과의 행운이 따른 건 사실이지만, 그보다 사람을 잘 부린 작용이 크다. 전문 분야마다 전문가들에게 책임을 지워 맡겼던 것이 그의 인재 관리 요령이었다. 어설프게 아는 지식을 밑천삼아 물덤벙 술덤벙 아는 체 하며, 간섭 안 하는 데가 없는 것 보단 낫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원은 다르다. 무식한 자치단체장은 시·도지사나 시장·구청장·군수를 제대로 할 수 없고, 무식한 시·도의원이나 시·구·군의원은 지방의원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예를 든 국회의원이 크게 보아 지방의원보다 막중하긴 하다. 그런 큰 물에서 놀기 때문에 한편 건달노릇을 해도 티가 잘 안나 묻혀 지나간다. 그러나 지방의원은 아니다. 건달의원은 티가 난다. 지방의정은 주민생활과 피부를 맞대기 때문이다. 지방선거가 총선보다 중요하다고 보는 역설이 이래서 성립된다.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뜨거운 열기가 벌써부터 감지된다. 네번 째 실시되는 지방선거다. 이제는 지방자치가 겉무늬만이 아니고 실속있게 제대로 뿌릴 내려야 할 때가 됐다. 그간의 시행착오는 지방자치의 경험이 낮았던 탓으로 치자, 하지만 이젠 그같은 경험을 살려 제대로 가는 지방자치를 해야 된다. 특히 이번 지방선거는 엄청난 지역주민의 세부담이 든다. 선거를 치르는 데 드는 기본 행정비용이 2천681억원으로 2002년의 1천320억원 보다 2배 가량 증가했지만 이건 약과다. 선관위가 자치단체에서 돈을 받아 집행할 선거비 보전 비용이 3천545억원으로 2002년의 644억원보다 5.5배나 불어날 전망이다. 선거비 보전은 선거공영제에 따른 입후보자의 유인물 등 선거비용을 자치단체가 보태주는 것으로, 유효 투표수 15% 이상의 득표자에게만 전액 보전해주던 것을 10% 이상 15% 미만 득표자에게도 절반을 보전해주도록 지난해 6월에 법이 고쳐져 부담이 더 늘게 됐다. 결국 올 지방선거의 주민부담은 6천226억원으로 경기도내 주민부담은 무려 1천160억3천300만원에 이른다. 이만이 아니다. 더 엄청난 주민부담은 지방의원의 월급 돈이다. 의정활동비 등 외에 지급되는 유급제에 따라 지방의원들은 부단체장급 대우를 요구한다. 부단체장 연봉이면 광역 6천800만원, 기초 5천800만원이다. 행정구조조정이다 뭐다하여 하급 공무원들을 감원한 게 언젠 데, 부단체장급까진 몰라도 상당한 월급을 줄 지방의원을 무더기로 두게되는 것이 이번 지방선거다. 이토록 비싸게 치르는 5·31 지방선거에 건달들을 뽑을 수는 없다. 유권자들의 책임이 그 어느 때보다 크다. 때맞춰 한국정치학회장을 지낸 김영래 아주대 교수 등이 주축이 된 ‘5·31 매니페스토선거추진본부’가 어제 서울 세종회관에서 출범한 것은 매우 주목된다. 매니페스토(Manifesto)운동은 정당이나 후보자의 선거공약을 목표·우선순위·기간·공정·예산 등에 수치적 검증과 평가를 가해 정책선거를 유도하는 것으로, 1997년 영국의 블레어 노동당 정권이 시작한 이후 2003년 일본의 지방선거에 파급됐다. 국내에 이 운동이 본격화되면 ‘믿거나 말거나, 되든 말든’식의 무책임한 전시성 이벤트 ‘빌공자’ 공약에 대한 비판이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단체장 다운 단체장을 뽑기 위해서는 우선 행정과 법률을 잘 알고 강단력과 포용력있는 리더십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지방의원은 되도록이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다방면으로 많이 진출하는 것이 좋다. 이런 사람들 같으면 적어도 건달은 아니다. 5·31 지방선거에선 아는 것 없이 허세나 부리고 트러블을 일삼으며 자기 욕심만 챙기는 건달꾼들은 발을 못 붙이도록 옥석을 가려야 한다. 이는 막대한 지방자치비를 부담하는 유권자들의 권리이며 의무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

노무현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 내용에 새로운 건 없다. 평소의 생각이나 했던 말을 강조했을 뿐이다. 경제를 비판한다 하여 경제가 잘못되기를 바라고 그러는 건 아니다. 대통령은 마치 잘못되기를 바라고 비판하는 것 처럼 말했지만 그럴 사람은 없다. 그렇게 들린 것은 듣기 싫은 말을 한 데 대한 대통령의 거부감일 것이다. 비판은 예컨대 기업친화정서와 함께 시장주의가 존중돼야 하는 것으로 집약된다. 현실은 크게 보아 이의 역주행으로 가고 있다. 여전히 우려되는 바가 많으나 경제를 낙관하는 대통령의 전망을 좀 더 두고 봐야할 것 같다. 대통령의 화술은 종잡기 어려운 ‘악어의 논법’을 연상케 한다. 사회양극화 해소의 해법을 증세에 둔 것이 며칠 전에 있었던 신년 연설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신년 기자회견 모두 연설에서는 당장 증세를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이것이 ‘모순되지 않느냐’는 기자 질문에 ‘증세를 따지기 전에 감세를 먼저 따져야 한다’고 답변했다. 독일의 대연정 사례를 들면서 타협과 대화의 정치를 역설했다. 그러고는 이어 유시민 입각 갈등에는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이를테면 입각을 당장 결정하지 않고 떠본 것이 되레 문제를 키우는 실수였다는 것이다. 인사는 인사권자의 권한이라는 생각을 부정할 마음은 없다. 다만 덧붙인다면 인사권은 인사권자의 권한이면서 책임이라는 사실이다. 대통령은 어떤 정책이나 문제에 대통령이 정답을 내놓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국민이 답을 제시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간의 경험으로 보아 그렇게 여겨지 지 않는다. 대통령은 미리 답을 정해 놓는다. 그 답이 정답이든 오답이든 간에 자신의 답에 필요한 말만 거둬 들인다. 예를 들면 무척 좋아해 보이는 토론이란 것도 그렇다. 미리 결론을 내린 자신의 생각을 주입시킨다. 이 때문에 남의 말을 듣기 보다는 자신의 말을 앞세우기에 바쁘다. 생각을 주고 받다가 보면 자신의 견해가 상대의 견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진정한 토론문화다. 대통령에겐 상대에 대한 승복의 토론은 한 번도 발견할 수 없었다. 회견 중 이런저런 일을 두고 ‘시대적 요구’란 말을 많이 썼다. 무엇이 시대적 요구일까, 사회적 합의의 대세이지만 이를 정확히 객관화하기는 어렵다. 내 생각은 시대적 요구에 합당하고, 네 생각은 시대적 요구에 역행하는 것으로 보는 독선은 참으로 위험하다. 국정의 난맥상, 측근비리, 정실인사, 낙하산부대 투입 등은 누가 봐도 ‘시대적 요구’라 할 수 없다. 이 정권이 원칙에 충실했다는 원칙 중엔 변칙이 너무 많다. 타협의 정치도 내가 양보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가 양보하는 것만이 타협이고, 원칙도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이 되는 상황논리는 신뢰성이 빈곤하다. 열린우리당의 잦은 ‘탈당’발설을 가리켜 ‘내가 탈당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당내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그렇게 말한 과거 형’이라는 황당한 얘기는 그같은 상황논리다. 그러한 아집은 신념이 아니다. 한·미공조에 이상이 없다는 대통령의 말을 곧이 들을 사람은 아마 있을 것 같지 않다. 미국의 대북정책 일환인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 등 PSI협력대책, 한국에 재정적 고립을 요청한 북달러화 위조대책은 도하 신문에 보도되기는 어제지만 이미 알려진 일이다. 중국·일본 등 주변 국가들마저 6자회담 재개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여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런 마당에 유독 대통령만 이상이 없다고 하는 것은 국민에 대해 책임있는 자세가 아니다. 부시 행정부의 강경 대북정책은 이미 정해진 기정 사실이다. 이에 대통령이 “북한의 체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압박을 가하고… 그와 같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한·미간에 이견이 생길 수 있다”고 밝힌 가정론은 오히려 국민의 불안을 증폭시킨다. 북의 고립을 막으려는 것은 이해하지만 북의 눈치보기와 달래기에 과연 끝은 없는 것인가 하는 핵심적 문제점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을 분명하게 밝힐 책임이 있다. 신년 기자회견은 별 알맹이 없이 끝났다. 엉뚱한 말이 튀어나오지 않은 게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엉뚱한 말은 안 나오긴 했지만 올 한 해도 순탄할 것 같진 않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한나라당, 수원시장 후보 영입설

행정행위와 행정처분이 지닌 차이의 개념과 실제는 뭣일까? 행정관청의 지위에 있으면 필히 알아야 할 기초적 소양이다. 민선단체장에 대한 지방관아의 부정적 평가 가운데 이런게 있다. ‘모르면서 우긴다’는 것이다. 물론 긍정적 평가를 받는 단체장도 있다. 경선은 당내 민주주의의 꽃이다. 합리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내 민주주의의 독 일 수도 있다. 패거리 작당의 경선은 합리성을 잃기 때문이다. 당내 경선, 단체장의 민선이 갖는 강점이 이런 취약성에 발목을 잡히면 맹점이 된다. 한나라당이 오는 5·31 지방선거에서 자치단체장 후보 공천을 절반 정도 물갈이하고자 하는 것은 이같은 맥락의 관점으로 풀이된다. 이런 가운데이긴 하나 수원시장 후보의 영입설이 강하게 제기된 것은 의외다. 영입 대상에 오른 그는 아직껏 세간의 하마평에 한 번도 오른적이 없다. 신년 벽두에 여러 매체의 지면이 장식한 그 많은 예상자 가운데, 한 군데서도 거명된 적이 없다. 그러나 거의가 또 알만한 사람이다. 평생을 도내 지방행정에 몸담은 수원 출신이다. 이인제 전 민선지사가 국민신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서 생긴 빈 자리를 임창열 민선지사가 나올 때까지 지켰다. 당시 행정부지사였던 임수복 전 경기도지사 직무대리의 영입설은 지방정가에선 예기치 못했던 충격이다. 그의 도지사 직무대리 11개월은 과도기의 도정을 무난히 안정되게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관직을 떠난 뒤엔 학계의 길을 걸었다. 연세대에서 초빙교수로 강의를 하는 것으로 들었던 그가 어떻게 정당과 인연을 갖게 됐는 진 알 수 없다. 다만 영입 대상에 오른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로 확인됐다. 알고 보면 수원시장 공천 후보만이 아니다. 적잖은 단체장 후보의 영입 징후가 진하다. 기초자치단체장만도 아니다. 광역자치단체장 역시 사정은 같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게 텃세다. ‘외부의 영입은 당의 정체성을 해친다’고들 말한다. 개방의 폐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폐쇄의 폐해도 있다. 끼리끼리 돌아가며 자릴 나눠 갖는 건 정당이 아닌 붕당이다. 붕당의 폐쇄성은 발전을 정체시켜 식상케 한다. 인체의 새 성분을 만들기 위해 노폐물을 배설하여 영양물로 채우는 합성과정이 신진대사이다. 인간의 혈액 순환은 끊임이 없는 신진대사의 연속이다. 묵은 피를 새로운 피로 바꾸는 신진대사가 끊기면 그건 곧 사망이다. 창당 당원이 아닌 당원은 다 중간에 들어간 영입 케이스다. 먼저 들어간 당원이 뒤에 들어가는 당원을 영입은 부당하다며 거부하는 것은 텃세다. 공당에서는 있을 수 없는 면모다. 5·31 지방선거의 영입은 한나라당만이 있는 건 아니다. 열린우리당도 이밖의 군소 정당에서도 영입이 있는 것으로 안다. 이런 생각은 할 수가 있다. 잘못된 수혈은 되레 몸을 망친다. 영입은 신중해야 하는 연유가 이에 있다. 옥석을 구분할 줄 아는 형안이 이래서 중요하다. 요즘 여·야 할 것 없이 여성후보의 인물난 때문에 고민한다. 여성후보의 30% 할당은 각 당마다 당의 얼굴이다. 그런데 단체장의 여성후보 영입은 거의가 무망한 상태인데다가 지방의회 의원 후보 영입마저 여의치 않은 것으로 것으로 들린다. 할만한 여성들은 마다하고 시답지않은 여성들은 시켜달라고 졸라댄다는 것이다. 지방자치는 지역주민들이 막대한 자치비 부담을 세금으로 지출한다. 국내 지방자치도 이젠 정착할 때가 됐다. 더 이상 지방자치가 일천하다는 이유로 실험적 실패를 용인할 여유가 없다. 오는 5·31 지방선거는 단체장, 지방의원 할 것 없이 진일보의 모습으로 성숙되는 지방자치 모델이 형성되어야 한다. 한나라당이 수원시장 후보 공천을 영입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순전히 당이 알아서 처리할 당내 문제다. 최종 선택은 유권자들의 권한이다. 지방선거는 한나라당 후보만이 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성과 능률성을 도모하며, 생활행정을 통해 지역발전과 주민복리를 이룩하는 것이 지방자치 행정이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사학법 파동과 陳大濟 대타설

사학의 화두를 쉽게 풀어본다. 학원법인을 만들어 학교를 세우는 데 들인 수 천억원은 출연자 개인의 돈이다. 그렇다 하여 그 학교가 출연한 설립자 개인의 것은 아니지만, 설립자의 손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누가 학교를 세우겠는가. 사학은 육영의 공익사업이 지, 선심성 자선사업은 아니다. 학원법인의 이사진을 가급적 혈족으로 구성하는 것은 인지상정상 당연하다. 학원법인이 아닌 일반의 사단법인도 이사진의 상당 수를 혈족으로 채우는 것이 통례다. 그러지 않으면 설립자인 이사장이 이사회의 결의로 주객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학원법인은 더 말할 게 없다. 땡전 한 푼 안낸 개방형 이사가 수 천억원을 들인 학교 설립자를 괴롭힐 수 있는 것이 개정된 사학법이다. 개방형 이사의 수가 문제가 아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탕물을 다 일으킨다’고 했다. 박힌 돌이 굴러온 돌에 밀려나는 최악의 사태가 있을 수 있다. 설립자의 입장이 아닌 교육의 수요자인 학생들 입장에서도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학원법인의 안정을 해쳐서는 학교의 안정이 있을 수 없다. 학원의 불안은 그 피해가 학생들에게 곧바로 돌아간다. 사학의 비리를 용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학의 비리는 척결돼야 하고 학원법인의 운영은 투명해야 한다. 그러나 쇠뿔을 고치려다가 소를 다치게 만드는 사학법 개정은 방법이 될 수 없다. 국내 교육의 70%를 맡고 있는 사학이 일제히 반발하자 이 정부는 전가의 보도를 꺼내 들었다. 비종교계 사학비리 전면수사 선언의 초강수는 협박이다. 이 으름장이 먹혀들어 갔다고 보는 청와대측 수법은 교활하다. 사학비리의 개연성을 저인망식으로 훑어 그물에 걸리는 구체적 혐의를 잡아보겠다는 생각은 인권 침해다. 이도 건들면 벌집이 될 것 같은 종교계 사학은 제외하고 일반 사학을 대상으로 한다고 했다. 인심 쓸 것은 쓰면서, 이 또한 사학을 종교계 사학·비종교계 사학으로 편가르는 분열 책동이다. 그런데 이 정권 권력의 핵심부에서 새로운 고민이 생긴 것으로 들린다. 건곤일척의 사학법 파동이 오는 5·31 지방선거의 변수가 된 것은 흥미롭다. 김진표 교육부총리의 열린우리당 경기도지사 후보는 부동의 기정사실로 알려졌었다. 이것이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바뀔 공산이 높아졌다. 이에 신중한 검토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사학법 파동의 주역이 김 부총리다. 그의 악역이 얼마나 본인의 진의였는 진 알 수 없다. 경제부 총리였을 때다. 주택거래 신고제인 가를 두고 허가제론이 제기됐다. 그러자 그는 “한 걸음 더 나가면 사회주의”라며 반대했다. 개정된 사학법의 자율권 침해 역시 일종의 사회주의식 발상이다. 김 교육부총리의 악역이 그의 신념이었는 지, 아니면 정부 조직상 수장으로서 책임에 충실했는 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사학법 파동의 악역이 경기도지사 후보로 도움이 안되는 마이너스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정권 핵심부의 저울질에도 고민이 있는 것으로 안다. 진 장관이 삼성과 인연이 있는 정보통신 분야의 아무리 권위자라 하여도 경남 의령 사람이다. 수원 사람으로 경기도 토박이 출신의 김 부총리 보다 득표력이 더 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 대타의 난점인 것 같다. 진대제의 김진표 대타 검토는 장관직 사퇴의 법정 시일이 3월 말까지이므로 여유는 있다. 유동적 상황의 관찰이 크게 작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사학법 파동의 추이가 함수 관계일 것 같다. 야구에서 대타의 적시 기용은 감독의 능력이긴 하다. 그러나 기용된 대타가 반드시 히트를 날리는 것은 아니다. 비정규 멤버보단 정규 멤버로 가는 것이 순리일 때가 많다. 주목되는 것은 이 정권이 사학법 파동에 부담을 갖는 사실이다. 사립학교법 개정은 그간 내세운 이른바 개혁입법의 하나다. 소신을 가져야 할 개혁입법에 부담을 갖는 것은 앞뒤가 안맞는다. 그러지 않고 신념을 갖는다면 굳이 대타를 검토하여 피해갈 이유가 없다. 그동안 악역을 맡은 사람을 내세우는 것이 오히려 떳떳하다. 사학법 개정에 국민의 심판을 묻는 상징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孫 지사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

‘더 큰 땅으로 나가게 된 호랑이가 자신이 누렸던 영토의 새 주인으로 여러 마리의 토끼들에 저마다 따로 눈치를 주었다가 여러 마리의 토끼들로부터 인심을 잃었다’는 우화가 있다. 북유럽의 어느 나란 가에 전래된 것으로 기억한다. 정치적으로 전임자가 후임자를 배출시켜 잘 된 전례가 없다. 예컨대 노태우를 밀었던 전두환은 백담사에서 3년의 유배생활을 했다. 김대중을 선택했던 김영삼은 아직껏 좋지않은 사이다. 노무현을 낙점했던 김대중은 말 못할 속앓이를 앓고 있다. 손학규 경기도지사의 대권 도전은 이미 돌아서기 어려운 강을 건넜다. 괄목할 외자유치 등 도지사 재임 성적 평가 또한 우수하다.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을 포용한다. 중도 우파의 개혁주의자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한다. 이 시대에 절실한 사회통합의 구심적 인물이 될만하다. 공리공론(空理空論)의 말 재주에 식상한 국민층에 새로운 기대를 갖게할만 하다. 흠집도 있다. 행정수도 건설과 공공기업 이전은 바늘과 실이다. 공공기업 이전은 반대한다면서 행정도시 건설을 찬성한 것은 모순이다. 이 정권에 영합하여 총리를 꿈꾸는 국민중심당의 심 아무개와 교감한 것은 배덕이다. 상생의 명분은 상호 실리가 수반돼야 한다. 실리가 없는 명분은 구실일 뿐이다. 구실은 정치적 농간이다. 손학규는 고독하다. 박근혜는 당 대표로, 이명박은 서울시장으로 상승세다. 당내 경선에서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도전의 마라톤 레이스는 아직도 여유가 많다. 박근혜의 사학법 반대투쟁은 방법이 좋지 않다. 이명박의 청계천 신드롬은 토목사업일 뿐이다. 여론조사란 것 마다 손학규는 최하위다. 하지만 뒤집힐 가능성은 있다. 백수 노무현이 민주당 당내 경선에 나섰을 때 그가 되리라고 믿었던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당 후보가 되고 나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우리가 될 게 됐느냐!”는 것은 노 후보의 선대위원장을 맡았던 정대철의 말이다. 노 대통령도 “대통령이 된 게 신비롭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손학규의 강점은 좋은 친구들이 많다는 점이다. 경기도지사 선거 때 많은 도움을 주고도 당선시키고 나서는 곁을 떠나 부담을 주지않은 친구들이 있다. 이들이 대선 예비캠프에 모였고 또 모일 것이다. 손학규가 덫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연유가 이들 때문이기도 하다. 한현규 전 경기개발원장은 손 지사의 측근이었을 뿐 친구는 아니다. 관측통은 한현규 비리는 마땅히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만 손학규를 겨냥해 쏜 화살로 보았다. 이런 관측이 맞다면 그것은 잘못 쏘아졌다. 되레 정찬룡 전 청와대 인사수석과 추병직 건설교통부장관이 무혐의 처분이 되긴 했으나 검찰조사를 받아야 했다. 관측통은 덫을 놓은 또 한 번의 화살이 시도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지만 역시 오발로 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손 지사가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앞을 향해 전진하기 위해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오는 5·31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경기도지사 후보에 누가 될 것인 가를 두고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행사할 수 있는 기미를 보이는 것은 그 자신을 위해 결코 유익하지 않다. 여러 마리의 토끼를 이용하려다가 오히려 여러 마리의 토끼들에 무더기로 인심을 잃은 우화와 비유될 수가 있다. 당의 새로운 수혈을 위한 후보 영입이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해서 당선시켜준 유권자와의 약속을 중도에서 헌 신짝 버리듯이 그만 두고 도지사 후보로 나서는 것보다 못할 게 없다. 개방되지 못한 폐쇄적 텃세가 한나라당의 불행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손 지사는 당내 차기 도지사 후보는 당과 당사자들에게 맡기고 자신이 가야할 길을 가야만 한다. 호랑이는 혼자 다니는 것이 고독해도 혼자 다닌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 것은 노루 떼나 참새 떼 등이다. 진실로 대권에 야망을 갖는다면 좁쌀스런 얘기보다 더 큰 경륜을 펼쳐보여야 한다. 당내 경선에서 후보자릴 거머쥔다 해도 보수정당의 범야권연합이 없고서는 대선 승리가 어렵다. 열린우리당에서 앞으로 10년은 더 집권한다는 큰 소리가 이래서 나온다. 경선 이후의 당 단합은 어떻게 하고, 범야권 후보 단일화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설득력있는 말이 그의 심장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황 교수 사태’ 나의 시말서

서울대조사위원회가 황우석 교수의 2005년 논문을 조작으로 발표한 지난 23일, 많은 국민이 슬퍼했다. “오늘은 슬픈 날”이라며 모두들 침통해 했다. 이런 가운데 나는 한 가지를 더 해 ‘부끄러운 날’이기도 했다. 벌써 일주일이 됐지만 그 날의 부끄러움을 잊을 수가 없다. 줄기세포 연구를 돕기 위해 자신의 난자를 제공하겠다고 흔쾌히 나선 천명이 넘는 여성들, 그가 입원한 서울대병원 현관에서 층층이 오르는 입원실까지 진달래 꽃길을 깔아, 빨리 건강한 몸으로 즈려 밟고 퇴원하기를 기원했던 천사같은 여성들에게 정말 부끄러웠다. 어린이들에게 잘못 심어준 환상을 빼앗은 것도 부끄러웠다. 신문 독자들에게 말 바꾸기가 부끄러웠다. MBC ‘PD수첩’ 팀에게도 부끄러웠다. ‘PD수첩’은 진실 규명에 기여했다. 취재상의 윤리결함은 분명한 흠결이지만 기여도가 훨씬 더 높다. 이런 것을 두고 나는 ‘PD수첩’ 팀을 공격했다. 힐난했다. 그 중엔 지금도 유효한 대목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많은 과오를 범했다. 진실을 모른 채 독자를 오도했다. 그의 연구발표를 두둔했다. 조작을 비호했다. 국민적 영웅의 허상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내 신문기자 평생에 씻을 수 없는 최대의 오보를 했다. 지방언론의 한 모퉁이에 있는 나의 오보가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 진 모르겠다. 하지만 책임을 모면할 수는 없다. 생각하면 ‘미생지신’(尾生之信)이었다. ‘사기’(史記)등에 나오는 노(魯) 나라 미생이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한 여인을 믿고 강물이 불어나는 데도 그대로 기다리다가 익사했다는 맹신(盲信)을 빗댄 고사처럼 옳고 그름을 따지 지 못했다. 황 교술 믿었던 게 잘못이라는 핑계로 언론이 오보의 책임을 모면할 순 없다. 생명공학이 좀 어려운가, ‘체세포 주입’ ‘난자핵 제거’ ‘계대배양’ ‘줄기세포 주입’ 등 독자가 모를 용어를 나도 잘 이해 못하면서 오도한 책임은 분명히 이를 보도한 언론에 있다. 따지고 보면 황 교수를 그렇게 만든 것도 언론이다. 학문 분야의 경쟁적 뻥튀기 보도에 그치지 않고, 전설적 입신의 이인(異人)으로 다투어 과장 보도를 일삼았다. 줄기세포주를 속인 논문 조작은 그러지 않고 사실대로 했어도 자랑할만 했다고 생각한다. 이런데도 그는 2개의 줄기세포주를 11개로 조작했다. 조만간 밝혀질 DNA검사 결과가 환자 맞춤형이 맞을 지라도 실용화 단계는 멀었다. 이런데 언론은 당장 뭣이 되는 것처럼 난치병 환자들에게 신기루를 만들어 보였다. 언론의 조작에 강박감을 느껴 서둘러 가져온 것이 결국 논문 조작으로 보는 관점이 가능하다. 언론도 물론 알고 그런 것은 아니다. 어느 나라든 언론은 때때로 시대적 영웅을 만든다. 가슴 답답한 이 시대에서 ‘황우석 뉴스’는 신선한 암울의 돌파구였다. 문제는 언론의 과포장을 반성하면서 학문에는 왕도가 없는 사실을 곱씹어 본다. BC 3세기경의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정립한 기하학의 원조다. 이런 그가 헬레니즘문화를 꽃피운 이집트의 프롤레마이오스 1세의 수학 개인 교습을 했다. 이 때 배움에 어려움을 느낀 프롤레마이오스 1세가 빨리 배우는 방법을 묻자 유클리드가 대답한 게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라는 말이었다. 언론은 황 교수에게 왕도를 독촉했고 끝내는 버렸다. 그래도 그만한 생명공학자가 국내에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 하다. 하지만 만신창이의 거짓말쟁이로 전락한 그가 재기의 용기를 가질 수 있을는 지는 심히 의문이다. 언론은 책임을 정부에 돌리고 청와대로 돌린다. 서울대에도 문책의 화살을 쏘아 댄다. 물론 책임이 없지 않다. 황 교수도 책임이 있고, 청와대도·정부도·서울대도 다 응분의 책임은 있다. 그렇다 하여 언론이 책임이 없다할 순 없다. ‘황우석 사태’에 관한한 언론은 면책이 허용되는 성역이 아니다. 진실 규명의 계기가 언론이 아닌 ‘PD저널리즘’인 사실을 언론은 참으로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나는 내가 쓴 사설이나 칼럼이나 단평 등을 모아 오려 붙인다. 자료로 쓰기 위해서다. 그런데 뒤적거려 보기가 싫어졌다. 황 교수에 관한 글을 보면 내가 나 자신에게 부끄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억지로 보는 것은 스스로를 고문하고자 해서다. ‘황교수 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복이 또 있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갖는 그날의 많은 국민들 슬픔속에서, 뼈저리게 느낀 나의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것은 이 해를 보내면서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카멜레온의 ‘보호색’

자연법칙은 거의가 불변성이다. 거의란 더러 이변이 있었기 때문이다. 빙하시대를 예로 든다. 지구의 북반구 대부분을 빙하로 뒤덮었던 때가 70만~80만년전에 있었다. 인류가 생긴 이후에도 홍적세(洪積世)까지 네 번이나 있었다. 그러나 자연법칙의 대부분은 불변성이다. 지구가 생긴 지 약 35억년이 되도록 밤과 낮은 ‘나노’ 수치의 한 점 차이 없이 약 2조2천775억일을 한 해를 주기삼아 되풀이하며 지속해 왔다. 인간사의 인간법칙은 자연법칙의 반대다. 불변성보다 가변성이 대부분이다. 아마 100년 전에 가슴살이 드러나는 드레스나 허벅지살이 보이는 미니 스커트를 입고 다녔으면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러한 옷차림이 당당하다. 오히려 가슴살이나 허벅지살을 눈 여겨보는 남성은 치한(癡漢)으로 몰린다. 이는 가치관의 변화다. 인간사는 이처럼 변하지 않는 게 거의 없다. 시류의 변화가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온다. 그리고 시류의 변화는 곧 인간생활의 발달과정이다. 인간생활은 정체를 거부하므로 이에 수반하는 발달의 과정은 필수적이다. 정치도 변화를 수반하는 인간사의 한 생활 분야다. 생동하는 정치는 제자리 걸음이나 뒷걸음이 아니고 앞으로 나아간다.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발전이 있을 수 없다. 이 정권은 많은 변화를 시도한다. 진보주의가 보수주의의 과오를 상당히 일깨워 준 사실은 시인되어야 한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이 나라의 건국을 폄훼하는 근대적 민족·민중사관의 교과서는 용인될 수 없다. 대한민국이 광복 직후 미 군정하에서 이승만 등의 정치세력에 의해 건국된 것은 맞다. 마찬가지로 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시 소련 군정하에 김일성 등의 정치세력에 의해 건국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교육부의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수 학습자료’는 남쪽은 장기집권 및 독재정치·강압통치 및 부정부패 등 부정적으로 일관되고, 북쪽은 사회주의 경제건설·주체사상 옹위확립 등 긍정적으로 일관된 것은 어느 나라 교과인 지 알 수 없다. 무려 57년에 걸친 부자 세습정치, 6·25전쟁 발발 책임, 인민들의 기아 실상은 묵과됐다. 이런 반남찬북(反南讚北)으로 편향된 근현대사를 고등학생들에게 가르치라는 정부가 대한민국의 정부라 할 수 있는 지 의아스럽다. 대한민국이 있어 그 헌법에 의해 선출된 노무현 정권이 나라의 정체성을 이토록 왜곡한다면 국기를 부정하는 그 저의를 이해할 수 없다. 일본과 중국의 역사 교과서 왜곡을 연상케하는 자국의 국내 교과서 왜곡은 국가적 범죄다. 비록 분단의 태생적 불행은 있었으나 자유민주주의를 천명한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제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의 법통을 외면하는 정부의 ‘근현대사 교수 학습자료’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제국주의 침략자들을 반대하며 조국의 광복과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영광스런 혁명투쟁에서 이룩한 빛나는 전통을 이어받은 혁명적인 정권이다’(북 헌법 2조)라는 말과 어떻게 다른 것인 지 묻는다. 노무현 대통령은 신임 사무관 특강에서 진보와 보수의 구도를 언급하면서 “극단주의자가 있다”며 극단주의의 폐해를 지적했다. 열린우리당 정세균 의장은 노 대통령 당선 3주년 워크숍에서 “과격한 구 좌파 세력이나 소수 기득권 세력만을 위한 수구 우파 세력은 역사의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나 정 의장의 말은 되들려주고 싶을 만큼 적절하다. 되들려주고 싶은 것은 말과 행동이 다르기 때문이다. 흔히 친북(親北) 세력을 좌경시하지만 여기선 그렇게 안 본다. 이쪽 주관을 갖고 대하는 친북은 있어야 한다. 문제는 친북을 위장하여 저쪽 주관에 동조하는 찬북(讚北) 세력이다. 찬북세력의 ‘근현대사 교수 학습자료’는 당장 바로 잡아야 한다. 동족상잔의 전쟁은 한 번으로 끝내야 한다. 평화통일은 절대적이다. 언젠가는 평화통일 방안의 마지막 단계로 대한민국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없애고(흡수통일이 아닌)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는 일이 있다 하여도 정체(政體)는 자유민주주의여야 하는 것은 불변의 상궤다. 대한민국 건국의 자유민주주의 이상은 이래서 훼손될 수 없는 영원한 시류다. 변하는 게 인간사이지만 이만은 변할 수 없는 자연법적 법칙이다. 이를 수호하기 위해선 편의적 궤변으로 카멜레온의 보호색을 띠고 있는 ‘반남찬북’세력을 주시해야 한다. 사회주의(김일성주의) 이념은 이미 검증된 인간사회의 빙하기를 가져오는 시대적 유물이기 때문이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차기 경기도지사 선거?

손학규 경기도지사의 단임은 확정적이다. 불과 5개월여 앞둔 무주공산의 차기 도지사 후보군이 꽤나 많다. 열린우리당에서는 문희상 전 당의장, 유시민 의원 등이 꼽힌다. 재선의 유시민 의원은 한동안 당내에서조차 말이 흘러나왔을 만큼 차기 도지사 도전의 꿈을 키웠다. 문희상 전 의장은 경기도의 분도를 추진한 적이 있다. ‘경기북도’를 만들어 광역단체장이 되고 싶어 했다고 보는 게 그 무렵의 객관적 관측이었다. 분도는 당치않다. 그래서 이젠 도전키로 하면 ‘경기도’ 도지사 자릴 겨냥해야 하는 것이 불가피해졌지만 불투명하다. 내년 2월의 전당대회 이후에 거취가 정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식통은 가장 유력한 인사를 따로 꼽는다. 경제부총리를 지내고 지금은 교육부총리를 겸하고 있는 김진표 의원이다. “상대 당 후보를 제압할 수 있는 여러가지 강점을 지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김 의원의 입지로 보아 공천 또한 당내 분위기상 무난할 것이라는 덧붙임도 들렸다. 국회의원이 광역단체장에 출마할 경우에는 등록 직전에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면 된다. 그러나 장관은 다른 공무원직과 마찬가지로 60일 전에 사퇴해야 된다. 그러니까 김 교육부총리의 도지사 출마를 위한 부총리직 사퇴 시한은 내년 4월1일이다. 내년 경기도지사 선거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만의 싸움이 아닌 큰 변수가 또 있다. 역시 경제부총리를 지낸 민주당 임창열 전 경기도지사의 재출마설이 탄력을 받고 있다. 전해진 바로는 문제점을 적극 검토하는 것으로 들었다. 언젠간 국무총리가 되기를 바랐던 임 전 지사의 재도전은 항로 전환을 뜻한다. 한나라당이 손학규 도지사의 당선에 이어 연거푸 당선자를 낼 것인지는 관심사다. 4선의 이규택 의원, 3선의 남경필·김문수 의원, 그리고 전재희 의원이 당내 후보군으로 분류된 지는 이미 오래다. 전재희 의원은 선수는 비록 재선이지만 중앙과 지방의 행정 경험이 풍부한 장점을 지녔다. 그러나 거명된 이들 당내 후보군 가운데 공천이 있을 것으로 낙관하기는 어렵다. 소식통이 전하는 전망은 아주 다르다. 한나라당이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외부 인사를 대거 영입하기로 한 것은 이미 알려진 기정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기초단체장만이 아니라, 광역단체장 또한 외부 인사의 영입이 많을 것이라는 것이 소식통의 전언이다. 이미 윤곽이 잡힌 곳도 있다. 윤곽이 잡힌 곳으로 한나라당 경기도지사 후보가 포함된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의중의 인물로 둔 영입인사는 여주 출신의 원로 법조인이다. 왜 낙점하고 있는 진 알 길이 없다. 알려진 건 고등검찰청 검사장을 지낸 영입 대상의 그는 온후하면서도 곧은 성품을 지녔다는 것이 법조계의 평가다. 영입 인사의 공천은 당내 마찰이 없을 수 없다. 하나, 당 대표라고 당권을 자의적으로 행사할 순 없지만 또 대표가 의중을 관철못할 것도 없다. 한나라당 경기도지사 후보 공천은 이 점에서 앞으로 자못 주목된다. 어떻든 내년 경기도지사 선거는 5·31 지방선거 중 단연 전국의 이목이 쏠릴만 하다. 그 어느 광역자치단체 지역보다 더한 거물급의 한 판 승부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각 정당 또한 정치적 명운을 걸고 총력전을 펼칠 것이다. 경기도지사 자리가 역대 민선 도지사의 정치적 입지의 발판이 된 것은 웅도이기 때문이다. 인구가 1천만여 명이다. 웬만한 광역자치단체쯤은 몇 개를 합칠만 하다. 경기도의 역할과 기능이 또 각별하다. 수출산업의 절대적 영향력을 갖는 첨단 업종의 대기업이 집약돼 있다. 중소기업은 전국의 약 50%를 차지한다. 국민경제의 심장부가 경기도다. 대북 및 대중국 교류의 관문이다. 장차 통일 한반도의 중핵 지대다. 접경지역의 대비가 중요하다. 수도권 행정은 행정수요의 첨단을 걷는다. 사회복지·교통·환경·도시문제 및 건설 등 다방면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안목을 요구받는다. 경기도 지방행정은 중앙행정 못지않는 고품질의 행정을 구사한다. 경기도정은 곧 국정에 버금간다.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각축전이 치열할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각축전과 선거부정은 별개의 문제다. 국내의 뭇 시선이 쏠린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무엇보다 부정선거 시비로 지역사회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상씨름판다운 페어플레이의 공명선거가 이뤄져야 한다. /임 양 은 주필

목요칼럼/‘2006 독일월드컵’의 영광을 위하여

월드컵축구대회는 올림픽에 버금가는 세계인의 축제다. 그리고 국가적 위상과 국민적 자존심이 걸린 ‘스포츠 세계대전’이다. 상업적 효과도 천문학적이어서 국가 브랜드를 걸고 4년마다 펼치는 대결전이다. 특히 오늘날 축구는 선수들의 현란한 움직임과 투혼에 감동을 받으면서 감독의 노력과 의지에까지 관심이 구체화됐다. 그래서 축구는 삶에 신선한 활력을 넣어주는 국민의 스포츠로 각광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제 새벽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2006 독일월드컵축구대회 조 편성 결과 대한민국이 유럽의 프랑스와 스위스, 아프리카의 토고와 함께 G조에 배정된 것은 당초 경계하여 마지 않았던 최악의 시나리오는 일단 면했기 때문에 전망을 밝게 해준다. 알려진대로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5위의 프랑스는 1998년 월드컵 우승국이다. FIFA 랭킹 29위의 대한민국에는 사실 만만치 않은 상대다. 그러나 2002 한·일월드컵 직전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비록 2-3으로 패배하기는 했지만 당시의 접전은 한국 축구국가대표팀의 투지를 새삼 환기시켰었다. 스위스와 토고는 FIFA 랭킹이 각각 36위, 56위로 대한민국보다 몇 수 아래로 짚인다. 게다가 스위스는 독일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14개 유럽팀 가운데 약체로 평가되고 있고, 토고는 월드컵 처녀진출국이다. G조가 이렇게 배정된 것은 대한민국의 16강 진입, 나아가 2002 월드컵에 못지 않은 성적을 거둘 수 있으리라는 꿈을 갖게 해 준다. 이제 한국 축구국가대표팀은 내년 6월 14일 새벽 4시 독일 프랑크푸르트 발터스타디움에서 토고와 1차전, 6월 19일 새벽 4시 라이프치히 젠트랄 스타디움에서 프랑스와 2차전, 6월 23일 밤 11시 하노버 니더작센 스타디움에서 스위스와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를 갖게 됐다. 대한민국이 무난한 조에 편성되고 또 경기 일정이 비교적 좋은 것이 우선 안심이 된다. 월드컵에 처녀출전한 토고와 첫 경기를 치르는 것과 스위스와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를 갖게된 것이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이 역대 국제대회에서 첫 경기를 힘들게 치렀던 징크스가 있는 만큼 , 상대적으로 약체로 평가되는 토고와의 첫 경기를 갖게 된 것은 좋은 출발을 할 가능성을 높여 준다. 물론 낙관과 자만은 절대 금물이지만 불안한 출발보다는 심정적으로 훨씬 낫다. 그러나 월드컵 모든 조가 ‘죽음의 조’라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된다. ‘행운의 조’는 없기 때문이다. 모두 치열한 예선을 거친 세계 각 지역의 강자들이다. 그들 역시 대한민국과 한 조에 편성된 것을 내심 반기지 않을 리 없다. 그들도 대한민국을 16강 진출의 제물로 삼으려 할 것이다. 마땅히 경계로 삼아야 한다. 딕 아드보카트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은 조 배정 직후 “재미있는 조 추첨식이었다. 결과가 더 나쁠 수도 있었는데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다. 세 팀 중 가장 경계해야 할 팀은 프랑스다. 프랑스와 스위스는 정보가 충분하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잘 안다. 토고에 대해서도 6개월 동안 철저히 분석하겠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한때 국민을 조금은 실망케했던 한국 축구대표팀을 다시 일으켜 세운 명장이어서 믿음직스럽다. “누구든 덤벼라!”하는 호령이 한국축구의 앞날에 더욱 희망을 준다. 10일 새벽 조추첨 TV 생중계를 보기 위해 전날 새벽부터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에 모여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한국축구 국가대표팀 서포터스 붉은 악마 회원 등 축구팬들의 열성과 같은 시간 전국에서 환호한 국민들의 축구사랑도 월드컵 정상을 향하여 가는 길에 청신호를 켜주었다. 월드컵은 흘린 땀 만큼의 결실이다. 딕 아드보카트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의 리더십과 선수들의 건강, 그리고 뛰어난 기량 연마를 기원해 마지 않는다. 2006 독일월드컵축구대회에서 대한민국을 온 세계에 빛낼 한국축구의 영광을 위하여 국민적·국가적인 협조와 응원이 국내외에서 넘쳐나야 한다. 모든 국민이 한마음으로 뜨거운 성원의 박수를 보내야 한다. 한국 축구국가대표팀 파이팅! /임 병 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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