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가슴 한 번 만졌다고 국회의원 감투까지 내놔야 하느냐는 의문이 없지 않은 것 같다. 당자인 최 아무개 국회의원도 그렇고, 비슷한 생각을 갖는 남성들도 아주 없진 않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궁중 누각에서 중신들과 밤에 주연을 갖던 중 회오리 바람이 일어 등이 모두 꺼졌다. 이 때 어느 신하의 손더듬이 희롱을 받은 총희가 환공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신첩을 희롱하는 자가 있어 옷섶을 쨌사오니 속히 등촉을 밝히소서.” 그러나 환공의 말은 달랐다. “등촉을 밝힐 것 없다. 야심했으니 이대로 자리를 파하자”며 일어섰다.
환공의 고사를 예로 든 것은 상황의 비유를 위해서다. 주연의 자린 같다. 등은 꺼지지 않고 촉광은 현란했다. 벼락같이 뒤에서 두 팔로 껴안으며 앞가슴을 주물럭거리는 손길이 누군지 모른 괴한의 손이었다. 질겁하여 놀라지 않을 여성이 없다. 상대가 여기자라 말썽이 된 건 아니다. 피해자가 만만치 않은 여기자인 점은 있다. 그러나 그 국회의원이 착각했다는 말도 아닌 말 그대로 상대가 음식점 주인이었을 지라도 국회의원 감투를 내놔야 한다. 중인환시(衆人環視)속에 당한 이런 봉변을 용서하는 것은 관대함이 아닌 인권과 인격의 포기다.
그래도 국회의원직까지 내놓는 건 가혹하단 동정론은 낡은 윤리관이다. 윤리관은 삶에 따라 변한다. 수치로 알았던 여성의 개가(改嫁)가 당당한 시대다. 개화기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이 거리를 활보하면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또 미친 여잘 이상하게 보는 남성의 눈길은 당연한 거였을 것이다. 지금은 반대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은 당당하고, 그걸 눈여겨 보는 남성의 눈은 치한(癡漢)으로 몰린다.
춘천지검 차장검사까지 지낸 그 국회의원이 초임검사 시절 무렵 같았으면 아마 국회의원직까지 내놓진 않아도 될 지 모른다. 추문으로 흘려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남자가 술먹고 그럴수도 있는거지…’하는 남성 특권론은 ‘홍도가 울던 시대’에 이어 ‘영자의 시대’로 시효가 끝난 유물적 관념이다.
성추행, 성희롱을 엄단하는 것은 여성인권의 회복이다. 그리고 이런 여성인권 회복은 여성만이 아닌 인간의 존엄성 신장이다. 여성가족이 없는 남성이 없다. 남의 여성가족은 추행이나 희롱으로부터 개방되고 자신의 여성가족은 보호돼야 한다는 생각은 성립될 수 없는 부등식(不等式)이다. 남의 여성가족 손목을 옛 유행가 가사처럼 ‘전찻간의 손잡이’로 안다면 자신의 여성가족 손목도 ‘전찻간의 손잡이’로 내놔야 한다. 최 아무개는 이래서 국회의원 감투를 내놔야 하는 것이다.
남성들은 손 버릇을 정말 조심해야 한다. 어느 횟집에서다. 홀 서빙하는 아주머니와 가벼운 농담 끝에 남자 손님이 엉덩이를 탁 쳤다. 그 아주머니는 갑자기 고함을 크게 질러 역정을 내면서 성희롱으로 고소했다. 손님은 결국 500만원을 주고 화해해야 했다. 그 아주머니는 그 집을 그만 두고 다른데로 갔다. 성희롱 전문의 화해금 상습 소득자라는 후문이었다. 한 번은 택시기사가 “재수가 없으려니 별꼴을 다 봤다”며 푸념을 했다. 웬 여자 손님이 앞좌석에 타더니 성추행 당했다고 고소한 바람에 한나절동안 일도 못하고 경찰서에 가서 시달리다 나온 길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손가락 하나 까닥 안 한 성추행도 있느냐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해가 뉘엿 뉘엿 질 무렵 수원대 근교에서 어떤 여인이 손을 드는데도 핸들을 잡은 친구는 승용차를 그대로 몰았다. “버스도 없는데 좀 태워주지 그랬느냐”니까 “저런 사람 잘못 태웠다간 봉변당하기 십상”이라는 게 친구 말이었다.
그렇다. 성희롱, 성추행이란 게 있다보니 무고(誣告)가 두렵기도 하는 세태이긴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해도 성희롱, 성추행을 엄히 다스리는 세태가 인간다움의 공동체사회라는 사실이다. 엉덩이 한 번 만지고 500만원을 물어준 본인은 억울할지 몰라도 남의 여자 엉덩일 함부로 손 댄 반사회성은 응징되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
가령 시대를 의제적(擬制的)으로 바꾸면 그 땐 환공이 아무리 그러했을 지라도 그 또한 지금의 최 아무개 같은 사례엔 용서할래야 용서할 수 없는 상황으로 판단할 것이라는 가상 비유가 도출된다. 시대상을 바로 봐야 한다. 민초는 사소한 실수에도 무거운 책임을 지는 판에, 명색이 국회의원이란 남자가 딸 자식 같은 여성에게 차마 못할짓을 해놓고 법정심판을 받겠다니, 겉치레 사과일 뿐 본심은 책임을 가볍게 여기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여성의 인격권, 즉 인간의 존엄성 신장을 거부하는 그는 그래서 점점 더 추악해지는 면모가 보기에 참 딱하다.
/임 양 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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