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수가 ‘누굴’ 닮았다고?

경기도지사 김문수 재임 1년의 평가는 아무래도 유보된다. 종잡기 어려운 사람이다. 그의 말을 듣노라면 심리학에서 말하는 후광효과, 악마효과가 생각된다. 예쁘면 다 좋게 보는 게 후광효과다. 미우면 다 밉게 보는 것은 악마효과다. 그에겐 이런 증세가 발견된다. 내편, 네편을 가르는 사람은 아니다. 이런데도 편을 가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런 증세 때문이다. 또 좀처럼 해선 남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위임(委任)에 의한 분권(分權)보다 전권(專權)에 의한 전권(全權)을 선호한다. 예를 든다. 도 산하 단체장들과 성과제 경영협약을 맺었으면 적어도 평가 단위 기간인 1년은 전적으로 맡겨둬야 하는데도 무슨 자아 비판을 요구하는 것은 사족이다. 도청 실·국장 회의를 주재하는 것도 이런 분위기인 걸로 안다. 남을 잘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말을 강요한다. 도지사의 말이 과격한 연유가 이에 있다. 말인즉슨 맞는 말도 듣는 사람에게 거부감을 주곤한다. 예컨대 최근의 분도설에 대한 언급도 그렇다. 반대하는 것은 맞지만 “사기”니, “역사의 심판”이니 등 같은 말은 너무 앞서 나갔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지난 1년동안 현장 확인을 위해 많이 돌아다녔다고 과시한다. 그 가운덴 잦은 산하 단체 방문도 있다. 그렇지만 “오기만 하면 격려는 커녕 사람 속을 뒤집어 놓고 간다”면서 차라리 안오는 게 낫다는 사람들이 많다. 독선이다. 상대를 불신하기 때문에 선의의 거역을 수용할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한다. 자치단체의 의사 결정 형성 과정이 무시된 자치단체장, 즉 자신의 의사를 곧 자치단체 의사로 내세우기가 예사다. 어떤 지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간부 공무원을 “인사조치 하라”고 일갈하는 분위기에선 조직의 응집력에 상처를 내어 행정의 효율성을 떨어뜨린다. 그가 공무원들에게 불만이 있다면 개인만 보고 조직은 못보는 등 용병을 잘못한 그 자신의 책임인 것이다. 수도권 통합환승 할인제 한가지는 확실하게 해놨다. 낙후지역 등을 정비발전지구로 하는 수정법 일부 개정은 국회 꼬락서니로 보아 낙관이 어렵다. 만약 이번엔 안되어도 도지사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지난 한 해동안 요란했던 도지사의 운신에 비해 정작 손에 잡히는 건 아직은 별로다. 외자 유치는 상담(商談)이나 각서가 실적은 아니다. 투자 달러화가 과연 얼마나 떨어지느냐가 앞으로 두고 볼 과제다. 그리고 원래의 김문수 도정 목표치가 과장됐다. 도시·농촌 등 문제의 주요 지표가 근거없이 허황된 게 많았던 탓이다. 한 외신은 미국 콜로라도주의 휴양지에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자 소유의 1억3천500만달러(1천245억원 상당)짜리 저택을 매물로 내놨으나 1년이 지나도록 팔리지 않는다는 뉴욕타임스 보도를 전했다. 도지사 김문수의 이른바 명품도시는 미국으로 골프장 달린 고급 주택을 사러 가는만큼 우리도 고급주택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골프장 달린 미국의 고급주택이 아라비아 왕자 집만은 못하겠지만, 도대체 미국으로 집사러 가는 위인들이 얼마나 된다는 건지 알 수 없다. 그의 주택정책 기조가 이같은 환상에 있다면 깊이 고려해야 할 일이다. 상당히 소탈하다. 외식으로 점심을 먹어도 5천원짜리 추어탕을 즐긴다. 부인은 외부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남편을 가리켜 ‘도지사’라고 안한다. “애 아빠…”라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대통령 노무현을 닮았다고들 말한다. 도의회에서 누가 도지사를 대놓고 “노문수·김무현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은 것은 역시 그같이 보는 지역 정서의 반영이다. 안타까운 것은 하필이면 닮을 사람이 없어 그 사람을 닮았느냐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닮았다. 정제되지 않은 언어 구사, 돌출 행위, 허구적 독선 등이 영판 그 사람을 연상케 한다. 걱정되는 것은 앞으로 남은 경기도지사 임기3년을 헛되이 해선 안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 누굴 닮았다는 말은 유익하지 않다는 생각을 갖는다. 김문수가 말하는 ‘발상의 전환’론엔 동의한다. 그런데 전환을 해도 360도로 전환하면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 온다. 그의 발상의 전환은 이런 모양이 되어 전향적이지 못하고, 구시대적 권위 의식에 집착하는 게 아닌지 스스로가 성찰해볼만 하다. 뭣보다 심리학상의 후광효과, 악마효과의 편협증에서 탈피해야 한다. 머릿속 뜻은 큰데, 가슴속은 큰 뜻을 담을만큼 크지못한 단점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헤아릴 필요가 있다.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고 했다. 신약전서 디모데전서에 나오는 말로 오성(悟性)을 일깨우는 말이다. 이 칼럼도, 또 주제의 대상이 되는 이도 그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았는 지 다같이 돌아봐야 할 것으로 믿는다. /임 양 은 주필

노무현 대통령에게 노무현은 없다

대통령에게 개인은 없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노무현은 없는 것이다. 대통령과 노무현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다. 국가 안위의 대처에 판단을 내릴 최고, 유일의 권한을 지닌 직위가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하루 24시간 가운데 출퇴근시간이 따로 있을 수 없다. 국가 안위의 구체성이나 개연성은 24시간 상존하기 때문이다. 왕권시대에 임금의 잠자리를 장지문 하날 가운데 두고 지밀상궁이 밤새워 살핀 것은 최고, 유일의 통치권자의 건강, 유고에 대비키 위해서다. 최고, 유일의 통치권자에 대한 이같은 관심은 민권시대라고 다르지 않다. 비록 지밀상궁은 있을 수 없어도, 밤낮을 가리지 않는 최대 관심사가 유고를 우려하는 대통령의 건강이다. 이에 대통령과 개인이 구분될 수 없다. 사생활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에게 사생활은 없다. 대통령에겐 개인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되기 전의 사생활도 대통령이 되고나면 대통령의 것이 된다. 예컨대 대통령의 성장과정이 미친 성격적 영향은 대통령의 직무 수행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 노무현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신고한 재산 내역에 명륜동 집을 판 2억6천700만원을 빠뜨려 일으킨 논란은 대통령직이 요구하는 도덕성 문제였다. 그 도덕성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이 정권의 실세인 안희정과의 관계가 생수 동업자까지 소급되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권력 구조의 유착성 때문이다. 생수 동업의 사생활은 이미 개인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대통령의 뮤지컬 관람이 말썽이 된 적이 있다. 2003년 9월12일이다. 이날 저녁 그는 ‘인당수 사랑가’를 구경했다. 태풍 ‘매미’가 상륙했던 날이다. ‘매미’가 할퀸 피해는 참담했다. 130여 명이 죽거나 실종되고 수 조원 상당의 재산이 망가졌다. 대통령은 들끓는 비판 여론 속에 10여일이 지나 청와대 브리핑에 ‘국민들께 송구스럽다’고 사과했다. 윤리성 때문만이 아니다. 그에게 이처럼 사생활이 있을 수 없는 것은 역시 국가 안위의 대처에 판단을 내릴 최고, 유일의 직위에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가족은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가족 문젠 대통령 개인의 관계이지만, 대통령 노무현과 개인 노무현이 구분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청와대 밖에서 생활하는 그의 아들 딸들 가족이 관할 경찰의 경비를 받게된 관련법의 제정 취의가 이에 있다. 개인 노무현이 존재한다면 있을 수 없지만, 개인 노무현이 존재할 수 없으므로 그같은 경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하면서 황당한 말을 했다. “개인 자격으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 여러나라에선 그렇게 안 봤다. 총리로서의 개인 자격은 곧 총리 자격인 걸로 보았다. 그 역시 일본 최고, 유일의 실권자 직위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의 아베 일본 총리 역시 마찬가지다. 대통령 노무현 말대로라면 총리 개인 자격의 참배에 대한 비판이 불가하다. 그러나 그같은 참배가 앞으로도 계속 비판이 가능한 것은 대통령 노무현의 말이 틀렸기 때문인 것이다.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을 최전성기로 이끌었던 영명한 군주다. 그의 재위 64년은 대내적으로는 자유주의적 개혁,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 정책의 시장 획득으로 유니언 잭 깃발이 세계에서 지는 곳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알버트는 남편으로 고명한 지식과 교양을 바탕으로 여왕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던 사람이다. 그랬던 그가 아내에게 좀 화가 났던 날 밤 여왕이 안에서 잠근 침실문을 노크했다. 아무 응답이 없자 시종이 “폐하이십니다”라고 했으나 묵묵부답이어서 이번엔 직접 “알버트! 당신의 아내예요”하자 문이 열렸다. “부인! 그래도 당신은 이 순간에도 대영제국의 여왕이요” 한 것은 미소로 맞이하는 남편 알버트의 말이었다. 대통령 노무현은 토론을 좋아한다. 토론은 평등한 수평적 개념이다. 내가 말을 하면 남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의 토론이란 건 계급의식을 내세운 수직적 개념이다. 자기 말만 강요한다. 남의 말엔 건성이다. ‘평검사원의 토론’이 그랬고 ‘공무원과의 토론’이란 것이 그랬고, 근래 ‘언론인과의 토론’도 역시 그랬다. 엊그제 청와대서 가진 ‘대학 총장들과의 토론’도 그러했다. 총장들은 ‘사회적 강자·약자’ 등 여전히 이분법적 그의 인생관을 들어야 했고, 내신비율 강화를 강요받는 훈시를 경청해야만 했다. 대통령 계급장을 떼는 척 하면서도 대통령직 권세를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곤하는 그가 개인 노무현 자격으로 헌법소원을 냈다. 개인 노무현이 대통령 노무현의 선거 개입을 위해 낸 개인 자격이란 원천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노무현’은 있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盧의 ‘역주행’

역주행이다. 대단한 역주행이다. 헌정 질서가 위협받고 있다. 대통령 입에서 “그 놈…”이란 소릴 들은 헌법 경시 탓인지 헌법 정신이 실종돼간다. 청와대는 최고의 권부(權府)다. 최고의 권부 사람들이 헌법기구를 조롱한다. 중앙선관위를 비아냥거린다. 중앙선관위가 두 번째 경고한 대통령 노무현의 선거중립 위반 결정이 아무리 배알이 뒤틀리기로서니 그럴 순 없다. 입맛에 맞는 것은 법이 잘된 것이고, 입맛에 틀린 것은 법이 잘못이라는 논리는 시중의 ‘장삼이사’(張三李四)도 못할 소리다. 청와대는 선관위 결정에 “대통령의 입을 봉하라는 것이냐”며 씩씩댔다. 누가 입을 봉하라고 했나, 할 말 안할 말을 가려 법에 위반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지, 벽창호도 아니면서 말귀를 왜곡하는 억지가 가히 대단하다. “발언 전에 일일이 선관위에 묻겠다”니 이는 또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린가, 어린애 말 투정도 아니고 양식이 의심스럽다. 선관위는 ‘행위’에 대한 선거법 위반 여부를 해석하는 기관이지 ‘행위 예정’에 대해 심의해야 하는 의무는 갖지 않는다. 유권해석을 구하는 것도 어떤 구체적 의문 사실을 두고 말하는 것이지, 이런 말은 해서 안 되고 저런 말은 해도 괜찮느냐 등 말문을 묻거나 연설 원고를 사전 심의하는 것은 소임의 대상이 아니다. 글을 쓰다보니 말 같지 않은 말을 상대하려니 같이 유치해지는 생각이 들어 어쩌다 이런 저질에 이르렀나 싶다. 문제는 여기에 끝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대통령은 참으로 이상 야릇한 지시를 했다. 국무회의 자리에서 “대선후보들의 주요 공약에 대해 정부 연구기관들이 타당성을 조사해 국회가 자료 제출을 요구하면 장관들이 제출하라”고 엄명했다. 특히 야당의 선거공약이 집중타가 될 게 뻔하다. 눈감고 아웅하는 식이지, 정부기관이 부정적으로 결론 내린 공약을 몇 안 남은 열린우리당 의원으로 하여금 국회에서 공격 대상으로 삼을 요량인 것이다. “대통령의 명령이니 그렇게 하라, 위법이 되지 않는다”고 까지 했으니 꽤나 시끄럽게 할 모양이다. 국민에게 판단 자료를 제공하는 것은 정부의 의무라지만, 세상에 집권 말기에 야당의 대선 공약을 도마위에 올리는 지능적 선거개입이 또 어디에 있겠나 싶다. 걱정되는 것은 멈출 줄 모르는 대통령의 역주행이 계속 충돌할 것으로 보이는 점이다. 선관위에 미리 물어보든 안 물어보든 선거법 위반 시비의 사례가 더 나올 것은 분명하다. 만약 세 번째 경고처분을 받게 되면 참 난감한 게 있다. 한 경기에서 주심으로부터 옐로 카드를 세 번 받은 선수는 퇴장당한다. 그런데 대선을 두고 잇따라 세 번 경고처분 받아도 대통령을 퇴장시킬 수는 없고, 그렇다고 위반 사례가 또 나오면 묵과할 수도 없으니 난감한 일이다. 고발해도 재직 중엔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않는 특권이 있으므로 당장은 속수무책인 것이다. 이처럼 막강한 권한을 누리는 대통령은 모든 권력을 기술적 선거개입에 총동원할 태세가 역력하다. 그러면서 엄살을 피운다. ‘권력 없는 참여정부가 언론의 권력에 난도질 당한다’는 것은, 민심의 코너에 몰린 이 정권이 프로 레슬러가 코너에 몰려 엄살을 부리는거나 다름이 없다. 프로 레슬러는 엄살을 피우다가도 상대가 돌아서 틈을 주면 잽싸게 뒷덜미를 갈겨친다. 다스리는 자가 다스림을 받는 자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사회적 실력이 권력이다. 나라의 최고 권부가 권력을 무소불위(無所不爲)로 휘둘러 대면서 권력이 없다는 것도 난센스고, 언론이 무슨 권력이 있다는 것인지, 티끌만큼도 안 가진 권력을 가졌다고 우기는 강변도 엄살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대화체로 유명한 ‘국가’(國家) 등 30여편의 저서를 남겼다. “그런데 정말 우린 어리석었어.” “어째서요?” “글쎄, 이 사람아 그게 우리 발밑에서 처음부터 얼씬거리고 있었는데도 그걸 못보고 있었으니 참으로 어리석었지 뭐야!” ‘국가’편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한비자(韓非子)는 저서 ‘관행’(觀行)편에서 “관행이란 치자(治者)가 법치를 거울로 삼아 자신의 행동을 보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모두 나라의 통치자를 일깨우는 계명이다. 청와대는 발밑에 얼씬거리는 그 뭣을 간파해야 한다. 법치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를 돌아봐야 할 시기다. 저돌성을 앞세운 법치의 역주행이 헌정 파괴를 넘어 쿠데타적이라는 소릴 듣는 일이 있을 것을 크게 염려하는 것이다. /임양은 주필

국민노릇 힘든 亂世

국민노릇 하기가 참 힘든다. 난세다. 민생경제가 엉망인 마당에 ‘멀쩡한 경제’라고 우기는 분, 나라의 가장 웃어른부터가 허튼 말씀을 일삼으니, 이들의 지배를 받는 민초들은 연못에 던지는 돌멩이에 맞는 개구리 형상이다. 혈세를 쥐어짜고도, 나라 살림의 국가부채나 집안 살림의 가계부채나 새삼 수치를 열거할 것도 없이 사상 최대 규모인 터에, 현대사회의 생필품에 준하는 휘발유 값을 정부가 바가지 씌우는 것은 저네 고관대작들은 제돈으로 안 사쓰는 탓일 게다. 물정 모른 기막힌 소린 “어디까지가 선거운동이고 어디부터가 정치적 중립인지 모호하다”면서 이같은 “위선은 위헌”이라는 말씀이다. 길이 아니면 가지말고 말이 아니면 탓하지 말라 했지만, 헌법재판소장의 판단 같은 역할까지 하니, 길게 대꾸할 것 없이 한 마디는 없을 수 없을 것 같다. 세상에 선거운동과 정치적 중립도 분간 못하는 분을 대통령으로 받들고 살자니 국민이 피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그런다는 게 아니고 그분 말씀 투를 빌려 해외에서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 노무현의 차기 의중을 위한 범여권 교통정리 작업은 정말 요지경 속내다. 100년 정당이라고 만든 열린우리당이 3년 새에 명함도 내밀지 못할 간판이 되어 절로 붕괴되는 것은, 이 정권의 실정이 얼마나 큰지를 가늠하고도 남는터, 하물며 죄업을 속죄는 커녕 되레 큰 소릴 치는 것은 도둑이 매를 드는 격이다. 하긴, 언젠 그가 열린우리당의 말을 들었나, 독주는 대통령이 해놓고 들러리노릇 한 열린우리당만 도매금으로 와해되는 판이니, 대통령은 이미 탈당했다 해서 나몰라라 하고 큰 소리치는 건진 모르겠다. 천억원 대의 금만가가 모집하는 데릴사위 공모에 270 명이나 몰렸다는 지원자들이 순진하지, 불순하다 못해 선거개입까지 서슴치 않는 직계 적자 옹립의 이합집산은 국민사횐 안중에 없는 것 같다. 두 세갈래의 범여권 통할에 꼼수 부릴 앞으로의 주술이 갈수록 가관일 것으로 보여 난세가 그치기는 틀린 것 같다. 이런 가운데 한나라당 이명박, 박근혜 두 경선 주자가 처절하게 벌이는 검증 공방을 틈타 친노진영의 저격수들이 가세하고 나섰다.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박영선이 이명박을 걸어 2001년 주가조작사건 연루 의혹을 제기한데 이어, 김혁규는 이명박 부인의 위장전입에 의한 부동산 투기설을 얽어매고 나섰다. 박근혜의 경우는 달라, 정수장학회와 유관한 부산의 실업인이 박근혜가 정수장학회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횡령, 탈세 등을 했다며 한나라당 검증위원회에 검증 요청서를 냈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올수록 별의별 희한한 주장과 폭로가 잇따라 나올 것이다. 다 좋다. 문제점이 있으면 파헤쳐야 하고, 헛소문을 냈으면 책임을 지우면 되는 것이다. 민중은 지켜본다. 말이 없다고 해서 생각도 없는 것은 아니다. 민초는 지도층의 스승이다. 어느 대학 교수가 페인트공에게 말했다. (화단에 세우는 자그마한 울타릴 가리키며) “굳이 대패질 할 건 없는데?” “아닙니다. 저는 거친 목재에 칠을 한 적이 없으니까요. 돈을 더 받진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인도되는 질서로 나라의 부(富)를 증대한다는 아담 스미스의 유명한 ‘국부론’은 그 페인트공의 말에서 일깨움을 받았던 것이다. 황희 정승은 태종이 양녕대군을 폐세자 할 적에 불가함을 죽기로 작정하고 간하다가 귀양까지 갔지만 평소의 언행은 모가 나지 않기로 소문났다. 그건 농부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두 마리의 소로 쟁기질하는 것을 보고 어느 소가 일을 더 잘하느냐고 묻자, 농부는 가까이 다가가선 귀엣말로 대답하고는 “비록 미물이지만 못하는 소가 들으면 안 됐습지요”했던 것이다. 국민의 여론, 즉 지지도를 의식하지 않는다는 대통령은 국민을 가르쳐 들려고 한다. 이러한 우민정책은 민중의 비판의식을 둔화시키려드는 지배계급의 기득권적 수단이다. 마구잡이식 좌충우돌속 장막은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이다. 그러나 이젠 그런 것에 현혹되지 않는 민중이다. 콩나물 시루에 붓는 물은 그대로 흘러내린다. 그대로 흘러내린다고 우습게 보아서는 안 된다. 물은 흘러내리면서도 좋은 콩은 건강한 콩나물로 키우고 나쁜 콩은 그만 썩힌다. 민중은 그러한 콩나물 시루의 물과 같다. 나라의 으뜸 윗분으로 이상한 이를 두어 국민노릇 하기에 고생하는 민중사회는 이를 반면교사 삼아 더는 말이 많은 지도자를 원치 않는다. 그래도 아직은 자리가 대통령이니까, 말이 아니어도 나무라기도 하지만, 그만 둔 뒤엔 대꾸할 가치조차 없게 되는 건 장차 고독을 자초하는 것이다. /임양은 주필

盧 주심의 ‘탈선’

노무현은 대통령직과 정치인의 한계 구분을 거부한다. 대통령도 정치인이기 때문에 대통령의 정치활동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우긴다. 운동 경기에서 공정한 경기 진행의 책임을 맡고 있는 심판도 인간이다. 심판 역시 어느 팀이 이기길 바라는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상정은 다 있다. 그렇지만 어느 팀이 이기도록 경기 진행에 편파적 판정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 심판의 직분이다. 심판이 이같은 직분을 어기고 승부 조작을 시도해선 경기는 한마디로 엉망이 된다. 민주주의에서 선거는 당락, 곧 승부를 전제한다. 여러가지 선거가 있다. 대통령 선거는 그중 최고의 선거다. 심판의 불공정 행위로 인한 재앙 역시 최고로 영향을 끼친다. 노 대통령은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공명정대하게 치를 최고의 책임이 있는 최고의 권부다. 그런데 최고의 책임은 내팽개친 채 최고의 권부인 것만 챙긴다. 대통령은 “세계 어느 나라가 대통령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있느냐”고 국무회의에서 말했다지만, 대통령직과 정치인의 한계를 구분치 않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그의 말대로라면 대통령이 연임을 위해 재출마하면, 자신의 재당선을 위한 현직 대통령직의 전횡이 가능하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하면서 그런 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있지 않다. 만약 있다면 독재국가에서나 용인된다. 현행 헌법의 단임제가 다행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만약 중임제라면, 행정권의 수반인 대통령의 지위를 연임을 위한 자신의 차기 후보 당선, 즉 정치인을 구실로 악용할 잘못된 논리를 강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임이 제한되어 자신이 선수 겸 심판으로 뛰지 못하는 대신, 차기 정권에 직계를 선수로 내세울 요량인 적자 계승을 위해 행정권 수반의 최고 심판 자릴 벌써부터 편파 판정으로 일삼고 있다. 대통령이 그들 팬클럽인 ‘참여정부평가포럼’에서 가진 네 시간의 이른바 특강 중엔 청와대측이 밝힌대로 참여정부의 정책 비판에 대한 반론인 부분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만의 열광된 모임에 들뜬 분위기 탓이었을까, 아무튼 “그놈의 헌법…” 어쩌고 한 실언을 낳은 것은 그같은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래서인 지 안해도 될 말을 너무 많이 했다. 예컨대 특정 야당의 집권을 노골적으로 저지하고, 특정 야당의 당내 후보를 폄훼하거나 공약을 공격하는 등 이밖에도 숱하게 쏟아낸 선거 개입 발언은 선거를 공정하게 이끌 최고 책임자로서는 할 말이 아니다. 대통령이 공무원으로서 지켜야 할 선거법상의 중립의무, 선거운동금지,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 금지 등에 대한 위반의 의문이 성립되는 것은 객관적 관점이다. 청와대측이 이에 ‘선거법 시비가 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중앙선관위에 낸 것은 이례적이긴 하나 인색하게 여길 생각은 없다. 그러나 선관위의 최종 결정에 앞서 변론 기회를 달라는 생뚱맞은 공식 요청은 괴이하다. 더욱 흉한 것은 헌법소원을 내겠다는 것이다. “선관위가 납득할 수 없는 결론을 내린다면 헌법소원 등 헌법과 법률이 정한 쟁송 절차를 밟겠다”는 것은 정치적 압력이다. 그런 걸, 두려워할 이유는 없지만 가히 협박 수준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헌법 기관이다. 선관위 심의에 앞서 압력을 서슴지 않는 저돌성은 또 무슨 일을 저지를 지 알 수 없다. 노 대통령의 대선 개입 의지는 거의 확고하다. 선거구도 그림도 이미 그려 놓은 것으로 보인다. 대선 정국을 자신의 구도대로 몰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난관도 정면 돌파하고자 하는 기류가 감지된다. 헌법소원 등은 선거 개입에 관한 시비를 미결로 끌어 법률적 가부의 최종 판단에 앞서, 선거 개입의 장시간을 최대한 확보할 심산이 깔린 게 분명하다. 일찍이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볼 수 없었던, 현직 대통령의 개입이 이번 대통령 선거의 전례없는 불행한 특징이 될 것 같다. 선거법 등의 구애를 외면하는 덴 내란,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가 아니고는 재직 중 소추를 받지않는 형사상 특권 때문일 수가 있다. 고발을 하고 수사를 해서 혐의가 인정된다 하여도 재직 중 기소는 불가능하다. 당장은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건 있을 수 있다. 퇴임 후의 일이다. 퇴임 후 수사를 재개하거나 해서 혐의가 성립되면 그땐 기소가 가능하다. 이미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법정에 선 바가 있다. 더는 법정에 서는 전직 대통령을 보고 싶지 않다. 대통령 선거를 공정하게 관리할 주심이 편파적 판정을 주도하는 걸 보는 사회적 우려의 연유가 이에 있다. /임양은 주필

누가 ‘비양심’ 집단인가

권력에 중독되면 듣기싫은 말은 싫어한다. 권력에 중독되면 듣기좋은 말만 좋아한다. 동서고금의 이치가 이렇다. 노무현 대통령은 기자실 통폐합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언론이 계속 터무니없는 특권을 주장한다면 정부도 원리원칙대로 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언론이 기자실 개혁 문제와 관련해 보도하면서 진실을 회피하고 숨기는 비양심적 보도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선진국처럼 브리핑룸 이외에 기사 송고실을 아예 제공하지 않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고 사실과 먼 예까지 들었다. 듣기싫은 소리가 많은 자유취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듣기좋은 소리뿐인 보도자료나 발표문만 받아 쓰라는 것이 이른바 정부가 말하는 기자실 개혁이다. 이를 위해 각 부처의 기자실을 없애고 세 군데의 합동브리핑룸으로 대체하는 것에 반발한 국민의 알 권리 박탈, 신종 언론통제라는 비판이 대통령의 비위에 또 거슬렸던 것 같다.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진(秦)나라 시황제의 언론말살이었다. 중국의 여섯 나라를 통일하여 중앙집권제를 최초로 이룩한 시황제는 가혹한 법규를 만들어 반대 세력을 탄압했다. 가장 골치아픈 유생(儒生)들을 붙잡아 구덩이에 생매장하고 유서(儒書)를 모조리 거둬 불태웠다. 당시의 유생들은 여론 조성층이었고 유서는 유생의 전범(典範)이었던 것이다. 진나라는 3세(世) 16년만에 망했다. 조선조 연산군은 폐모론(廢母論)에 항거하는 사간원을 귀찮게 여겨 아예 폐쇄했으나 중종반정으로 그 자신이 폐출됐다. 대원군은 그의 억압정책을 반대한 오피니언 리더의 본산인 전국의 서원(書院)을 철폐했지만 결국은 권좌에서 쫓겨났다.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은 정적 린빠오(林彪)가 즐겨 인용한 공자 사상을 귀족주의로 몰아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을 벌여 숙청했다. 그러나 공자는 오늘날 중국 전통문화의 대부(代父)로 찬란하게 부활했다. 여론을 부정한 이들 권력자의 억압은 언제나 혹세무민, 즉 진실을 왜곡한다는 것이었지만 정작 진실을 왜곡한 것은 그들 권력자들이었다. 최근 남미의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야당 성향의 한 텔레비전 방송을 공중파 방송 면허를 갱신해주지 않는 방법으로 폐쇄했다. 이에 ‘국경없는 기자회’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배”라고 우려를 표명하는 등 국제사회의 비난이 일자 개혁을 자칭하는 차베스 측근의 말이 가관이다. “과거 독재시절에 못하던 대통령의 비판이 자유로운 데 왜 언론탄압이냐”는 것이다. 베네수엘라는 지금 신문방송, 인터넷 할 것 없이 대통령 찬가의 베네수엘라판 ‘용비어천가’ 일색이다. 이를 개혁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노 대통령이 말한 ‘언론의 특권’이란 뭘 말하는 것일까, 중앙 부처에 용무가 있으면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것은 모든 국민의 임의에 속하는 자유다. 기자라고 하여 이같은 자유를 배척당할 이유가 없다. 기자의 부처 출입을 특권으로 보는 생각부터가 특권 의식이다. ‘원리원칙대로 한다’는 원리원칙이 주관적이어서는 원리원칙이 될 수 없다. 보편적 가치성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객관적 판단이 인정돼야 보편적 가치를 지닌 원리원칙으로 성립된다. 정부 부처니까, 정부가 기자실만이 아니고 송고실을 없애도 된다는 생각이라면 원리원칙이 아닌 역리적 반칙이다. 기자실 통폐합을 반대하는 게 “진실을 회피하는 비양심적 태도”라는 근거가 뭔지 의문이다. 언론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진 오래됐다. 대통령은 뭐가 비양심인 지 밝혀야 할 것이다. 오히려 되묻고싶은 것이 있다. 기자의 부처 출입을 제한하면서 자유취재가 가능하다 하고, 기자실을 없애는 것이 알 권리를 더 신장하는 것이라는 게 정부 당국자의 해명이다. 진실과 양심을 걸고 그같은 말을 하는 건지 알고 싶다. 판단은 국민이 할 것이다. 딱하다. 언론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이 어쩌다가 막가는 지경에 이르렀는 지 보기에 민망하다. 언론 역시 굴절됐던 과거가 없지 않다. 부끄러운 치부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정권 들어 권력에 의해 매도당할 만큼 과실이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영원한 권력은 없다. 이 정권이 자행하는 기상천외의 신종 언론통제는 벼슬을 마친 이 정권 사람들의 부메랑으로 되돌아갈 수가 있다. 기요틴은 결국 기요틴을 만든 사람들의 재앙이었다. 그러나 민중사회의 실신을 사는 편협스런 고집이 걱정일 뿐, 다른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권력에 중독된 언론 정책은 단명으로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임양은 주필

합동브리핑룸의 ‘함정’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사람은 손바닥만 본다. 중앙부처 기자실을 없애고 단 세 군데의 합동브리핑룸으로 대체하는 언론 통제정책을 이 정부는 ‘전향적 개편’이라고 강변한다. 해를 가린 손바닥만 보고 하는 소리다. 브리핑룸을 안해본 건 아니다. 브리핑이란 게 신문이 아닌 구문을 재탕하기가 일쑤다. 그나마 불리한 질문엔 동문서답이 아니면 ‘시간이 없다’며 뺑소니 치기가 예사다. 기사 공급을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라는 것이 브리핑룸이다. 그런데 이젠 세 군데의 브리핑룸만 언론사가 왔다 갔다 할 뿐, 기자의 정부 부처 출입을 통제하는 것이 엊그제 국무회의란 데서 의결한 새로운 브리핑룸 제도다. 공무원과의 대면취재를 엄금한다. 기자를 멋대로 만난 공무원은 작살을 낼 요량이다. 취재원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다. 이래놓고는 자유취재를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또 우긴다. 공보관실을 통한 자유취재는 편의를 도모한다지만 가당치 않다. 불리한 내용의 취재협조 의뢰엔 자료를 왜곡할 경우, 이를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아니면 자료 협조에 마냥 시간을 끌어 기사 작성을 제때 못하게 할 수가 있다. 취재협조이기 보다는 취재방해인 게 이른바 공보관실을 통한 자유취재인 것이다. 이같은 기자실 통폐합, 브리핑룸 운영이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하는 정보공개의 원칙에 합치된다고 말할 순 없다. 지금은 언론이 특권 의식을 가질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예컨대 언론사 자동차라고 교통법규 위반이 묵인될 수 없고 그렇게 여기지도 않는다. 오히려 더 조심해야 하는 것을 당연한 걸로 안다. 이 정부는 권력에 불리한 보도는 민·형사 문제 제기를 능사로 삼지만, 이를 두려워하면 이미 언론이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언론과의 전쟁’을 선포했던 사람이다. 이런 가운데도 대통령 당선 직후에는 “방송 덕분”이라며 “방송이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등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우호적인 친여 신문사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임기말 들어선 방송을 악담했다. 친여 신문도 불신한다. ‘언론과의 전쟁’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언론이 책임 질 일은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한다. 기자실에 문제가 있다고는 믿기지 않지만 문제가 있으면 시정해야 된다. 그러나 기자실 통폐합을 골자로 하는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은 방안이 아니다. 이런 선진화는 그 어느 선진국에도 없다. 기우일 진 모르지만 걱정되는 게 있다. 몹쓸 병은 빠르게 퍼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중앙정부를 모방한답시고 행여 지방에서도 엇비슷한 통제를 염두에 두는 지방자치단체장이 있을지 모른다. 만일 이의 시도를 생각해보는 자치단체장이 있으면 자충수임을 일러둔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 없기는 중앙이나 지방이나 다 마찬가지다. 노 대통령의 측근들은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은 앞서가는 생각을 하는 데 국민이 몰라준다”고 했다. ‘참여정부의 치적을 언론이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는다’는 건 언론에 대한 대통령의 불만이다.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헐뜯는다’고 보는 것이 대통령의 생각인 것 같다. 여기선 이에 대한 시시비비를 길게 가릴 계제가 아니어서 한 마디로 집약한다. 일찍이 ‘국민의 지지도에 개의치 않겠다’고 했던 대통령의 말은 대통령의 언론관이 잘못된 사실을 자인하는 반증인 것이다. 언론의 비판을 거부하는 권력은 독선에 빠진다. 상습벽은 결국 중독 증상을 드러낸다. 전두환 정권을 낳은 신군부의 언론사 통폐합은 물리적이었다. 노무현 정권의 기자실 통폐합은 지능적이다. 어떻게 보면 물리력보다 한 술 더 뜨는 것이 합리화를 위장한 지능적 수법이다. 기자실 통폐합은 지능적 언론 통폐합으로 비유된다. 브리핑룸에서 불러주는 대로 보도하는 것을 언론으로 보는 게 대통령의 생각이라면, 그같은 획일적 보도가 대통령이 바라는 언론의 합리화 성과라면, 북의 로동신문 등 기관지와 어떻게 다르다 할 수 있는지 자문해볼 일이다. 그렇기도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의 햇살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는 없다. 설령 오는 8월부터 합동브리핑룸이 실시된다 해도 1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다음 정권에서 누가 들어서든 없앨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슬픈것은 이를 주도한 청와대와 정부 관계자들이 언론인 출신이란 사실이다. 유신정권의 언론 통제, 신군부의 언론사 통폐합을 주도했던 사람들도 언론인 출신이었다. 이들에게 침을 뱉었던 언론인들이 잘못된 선배의 전철을 밟아 권력의 맛을 잘못 맛들인 것이다. 언론을 억압하는 권력의 하수인이 언론인 출신인 것은 정말 자괴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역시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는 없다. 대통령이 보는 것은 해가 아닌 자신의 손바닥이다. /임양은 주필

53회 경기도체전 개회식 관중석에서

박수가 드디어 터져나왔다. “큰 박수를 부탁합니다!”라는 진행자의 통사정에도 별로 움직이지 않던 관중석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치어리더 30여명이 그라운드에서 펼치는 응원 율동이 점점 고조됐다. 이에앞서 가진 염광여고 고적대의 마칭퍼레이드, 경찰대학 의장대의 의장대 시범, 경희대와 해피수원태권도가 벌인 태권도 시범 역시 화려 장쾌한 게 볼만했다. “꽤 잘하네!” 어느 장년의 부부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손은 박수 대신 빵 조각을 입에 넣기에 바빴다. 물병까지 든 빵 봉지엔 ‘경축 제53회 경기도체육대회 (협찬) IBK 기업은행’이라고 씌어 있었다. 수원종합운동장 메인스타디움은 서북쪽 코너만 자리가 좀 비었을 뿐 거의 꽉 찼다. 자원봉사자들이 관중석을 돌아다니며 나눠준 건 빵만이 아니다. 긴 수건도 나눠줘서 웬 것인가 했더니 알고보니 응원용이었다. 치어리더의 율동과 함께 장안원두를 펑펑 울리는 탱고조의 음악이 드높아지자 이윽고 관람객 응원전은 절정에 올랐다. ‘제53회 경기도체육대회 Happy Suwon’이 새겨진 빨갛고 파란 엠블렘을 모두 들고 일어나 좌우로 흔들면서 어깨를 둥실거리기도 했다. 이어 벌어진 정조대왕 능행차 재연은 역시 장관이었다. 트랙을 따라 돌아가며 장사진을 이룬 행차행렬은 카메라진들의 플래시 세례로 걸음을 종종 머물러야 했다. 정조의 도시, 유서깊은 화성을 알리는 남녀 사회자의 마이크 멘트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특전사의 고공낙하는 식전행사의 하이라이트였다. 먹구름을 머금어 잔뜩 찌푸린 하늘을 날던 헬리콥터가 토해내듯이 뛰쳐나온 공수부대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한참 뒤였다. “어머! 바람이 센데 엉뚱한데로 떨어지면 어쩌지?” 어느 아주머니의 걱정은 그럴법 하기도 했다. 바람이 많이 불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가 몇 명일까, 낙하산을 요리조리 운전해가며 가볍게 착지하고 나서 거수경례를 단아하게 붙이는 공수부대원들은 모두 열두 명이었다. 박수가 쏟아졌다. 고공낙하로 모든 식전행사가 끝나기 때문에 로열박스는 이 무렵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개회식이 오전 11시이긴 하지만 좀 더 일찍 와서 식전행사 관람을 관중들과 함께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고공낙하 때만 해도 관중석은 하늘을 바라보며 환성을 올리는데, 로열박스의 벼슬꾼들은 서로 악수하기에만 바빴다. 기왕 내친 김에 로열박스 얘길 더 해야겠다. 경기도체전은 경기도체육회가 주최하는 것이지만 이번 대회의 주관은 수원시다. 대회를 실질적으로 주관하는 사람보다 명의상의 기관장이 상급단체라 하여 독판으로 행세하는 것은 모양새가 보기에 안좋았다. 다음 대회가 열리는 안산에선 그 자신이 주관 단체장을 예우할 줄 알면 좋겠다. 31개 시·군 선수단의 입장식은 실로 현란했다. 시·군마다 고장 특색을 드러낸 입장식은 나름대로 다 의미가 깊은 가운데 기교가 만발하고 재치가 가득했다. 형형색색의 조형물이나 가지가지로 나타낸 지역 표상을 일일이 여기에 옮길 순 없고, 그렇다 해서 몇 가지를 예로 드는 것도 공평치 못해 그만 두지만, 사람의 생각이나 재주는 여러가지고 또 거의 무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입장식은 오색풍선이 스타디움을 뒤덮는 가운데 흥분의 도가니속에 잠겼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관중석의 마음이다. 입장식에서 시·군팀이 더러 볼을 관중석에 날려 보내는데 이를 낚아잡은 사람들은 여간 기뻐하는 게 아니다. 돈으로 치면 얼마나 될까만 행운으로 치는 것 같아 보였다. 볼이 자기 이마에 맞았는데도 잡지 못해 딴 곳으로 튄 것을 엉뚱한 사람이 잡는 등 갖가지 진풍경이 벌어져 웃음 바다가 되곤 했다. 그런데 행사 도중에 찌푸린 하늘에서 마침내 빗방울이 떨어지자 스타디움 관중석은 온통 하얀색으로 일변했다. 모두가 비닐 비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대회를 주관하는 데서 자원봉사자를 통해 나눠준 것은 빵이나 수건 엠블렘만이 아니고 비닐로 만든 비옷도 들어 있었던 것이다. 몇 푼 안되는 것이지만 여간 긴요한 게 아니다. 그러찮아도 날씨가 좋지 않은 것으로 예보되어 염려했던 비가 좀 뿌리다가 이내 그치더니 개회식이 본격화하면서 ‘후두둑’하고 빗방울이 굵어졌다. 관중석의 걱정은 그라운드에 서있는 선수단이었는데, 그들도 역시 비닐비옷을 입는 것이었다. 연이나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나눠준 용의주도함이 돋보였다. 어제부터 시작된 대회 열전은 내일 끝난다. 31개 시·군 1만200여 명의 선수단이 30개 경기장에서 20개 종목에 걸쳐 자웅을 겨룬다. 육상 같은 실외경기를 생각해서 날씨가 개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아울러 선수들에게 최선을 당부한다. 승부는 그 다음이다. 자신이 최선을 다하면 그 자체가 이긴거나 다름이 없다. 관중석에서 보였던 관중들의 범시민적 관심이 또한 좋은 대회를 만든다. /임 양 은 주필

노무현의 ‘착각’

그가 또 말이 많아졌다. 김근태의 말을 빌리면 “지지율 좀 올랐다고…” 그런지 모르겠다. 그의 요즘 말은 대통령이 아니라, 정치인 노무현을 보는 것 같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열린우리당 당수처럼 보인다. ‘복당설’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의 심지는 이미 복당한 것 같다. “구태정치를 한다”고 공격받은 정동영이나 김근태는 열린우리당 의장 출신이다. 당의장에 통일부 장관,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만들기에 기여했고, 대통령이 된 뒤엔 은총을 받았다. 서로 도왔던 사이가 임기말 들어서는 원수지간이 됐다. “잔꾀 정치를 한다”는 것은 노무현에 대한 정·김의 포문이다. 그의 무차별 독설은 그야말로 무차별이다. 손학규는 “보따리 장수”, 정운찬은 “기회주의자”라고 해댔다. 이명박, 박근혜에게도 뭐라고 또 할 것이다. 대선 주자마다 돌아가며 힐난하는 이유가 있다. 점지해둔 후계자를 위해서다. 열린우리당 해체나 탈당은 창당 정신에 위배된다고 한다. “지역주의 타파, 국민통합 정치”가 열린우리당의 창당 정신이라지만, 지역주의 타파와 국민통합 정치를 부정하는 정당은 없다. 열린우리당의 태생이 민주당의 분당이고 보면, 그리고 그가 주도한 것이고 보면, 그도 그가 말하는 ‘보따리 장수’고 ‘기회주의자’인 것이다. 그에게 이즈음의 우군은 오로지 친노계열인 친위부대 뿐이다. 이해찬·한명숙·김혁규 트리오를 비롯한 ‘참정연’ ‘의정연’ 계파와 ‘노사모’ 출신 등이 골수를 형성한다. 이들 직계를 토대로 자신의 의중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청와대를 물려줄 요량인 속셈을 간파치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같은 속셈엔 나름대로 자신을 가질만한 이유가 있다. 대통령 노무현이 아무리 지지도가 낮고 열린우리당의 인기가 땅에 떨어졌을 지라도, 절대적 지지 세력의 부동층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같은 지지 세력을 15%로 보고, 선거운동 과정에서 알파를 생성하면 승산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대선 양상이 다자 구도로 전망되는 것은 그들에겐 고무적이다. 절대적 부동층(不動層)이 아닌 상대적 부동층(浮動層)의 분열은 자신들의 승리를 담보하는 요인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게 착각하고 있다. 박정희는 심복 중 심복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을 당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운명을 같이한 신군부의 혈맹이다. 전두환은 청와대를 노태우에게 물려주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노태우는 청와대에 들어가자 마자 전두환을 백담사로 유배 보냈다. 노태우는 3당을 합당한 같은 민자당의 김영삼에게 정권을 물려주는 게 무난할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노태우와 전두환은 김영삼 치하에서 법정에 서야 했다. 김영삼은 그래도 민주화 동지인 김대중에게 자릴 물려주고 싶어 뜻을 이루었다. 그러나 김영삼, 김대중은 여전히 앙숙이다. 김대중은 대북정책의 계승자로 노무현을 청와대 주인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김대중이 기대만큼 썩 기분 좋은 대접을 받고있는 입장은 아니다. 이제 노무현이 자기 사람으로 다음 대통령을 만든다고 해서 대접받을 것으로 여기면 이 역시 오산이다. 그가 퇴임 후에도 정치활동을 하겠다는 덴 더 그렇다. 전임 대통령이 ‘상왕’ 노릇하는 것을 좋아할 현직 대통령은 그가 누구이든 있을 리 없다. 그의 자기 사람 대통령 만들기가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지만, 성공한다고 해도 청와대 주인이 되고나면 자기 사람이 아닌 게 세상사 이치다. 정치판은 더욱 그러하다. 직함없는 ‘당수’ 노릇 해가며, 적전 상륙에 앞서 일전불사의 친노계 전열 정비에 몰두해도 나중에 보면 다 허망지사다. 되레 품격을 떨어뜨리기 십상이다. 딴 생각에 열중 하다가 언행에 주관적 구체성이 불거지면 말썽을 살 공산이 많다. 헌정사상 유례가 없는 현직 대통령의 현저한 ‘선거법’ 위반 시비가 벌어지는 불행한 사태는 없어야 한다. 그의 지지도가 한동안 오름세를 보인 덴, 그 자신의 말이 없었던 사실을 그는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같은 지지도 상승은 보기가 좋았다. 대통령이 욕 얻어 먹는 것을 보는 것도 넌더리가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걱정이다. 바뀌는 무대는 자신의 무대가 아니다. 정치판이라고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더 한다. 이것이 역사의 보편적 가치성이다. 예컨대 나폴레옹은 엘바섬에서 탈출, 파리에 재입성했으나 이내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다시 유배됐다. /임양은 주필

大選 도깨비들

도깨비판이다. 대선정국이 이 모양이다. 역대 대선에서 없었던 도깨비 현상이 이번 대선의 특성이다. 국어대사전은 도깨비를 가리켜 ‘동물이나 사람 형상의 잡귀로서 사람을 호리는 괴상한 재주를 가졌다’고 풀이해 놨다. 대통령 자릴 따 놓은 당상처럼 거들먹거리던 한나라당이 4·25 재보선 몰락으로 초상집이 됐다. 당내 주자가 당의 눈칠 살피지 않고, 당이 대선 주자의 눈치를 보아온 취약성이 분열의 위기를 가져왔다. 당 대표와 두 주자의 강(姜재섭)·이(李명박)·박(朴근혜)등 3자 회동으로 일단은 위기를 봉합할 것이다. 그러나 의문이다. 봉합된 수술 자국 흉터는 우주 공간에선 째진다. 대선의 공간이 본격화되면 이·박의 봉합은 결국 실밥이 터질 공산이 높다. 이들의 대통령병은 이미 불치의 단계에 들어섰다. 도깨비 놀음이긴 했지만, 대중 동원의 대통령병 맛 또한 길들어졌다. 한나라당 자체가 두 동강으로 벌써 균열이 가 있다. 이·박의 본선 대결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는 전망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다만 그 형태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대선을 앞둔 제일 야당이 이토록 비실비실한 전례가 없다. 여권 사정은 더 도깨비판이다. 대체로 정세균의 열린우리당, 김한길의 탈당파 통합신당 모임, 박상천의 민주당, 한명숙 등 친노그룹으로 구분된다. 김근태의 ‘민평련’계보, 천정배의 ‘민생정치모임’이 또 있다. 손학규의 ‘선진평화포럼’이 태풍의 눈으로 출범했다. 이번 재보선에서 민주당은 전남 무안·신안, 국민중심당은 대전 서구을 등 각자의 텃밭에서 국회의원을 한 명씩 냈다. 민주당과 국민중심당은 이를 “승리”라며 자축해 들떴다. 국민중심당의 심대평은 ‘독자노선’, 민주당의 김홍업은 ‘중도통합’을 당선 일성으로 내놨다. 심대평은 상대가 누구든 대선의 ‘충청 러브 콜’에 자기 당 몫을 단단히 챙긴다는 의도다. 김홍업은 정치 입문생이다. 입문생 주제에 말하는 ‘중도통합’ 주도는 아버지 되는 김대중의 호남 영향력을 두고 하는 소리다. 국회의원 1석 차지를 ‘승리의 잔치’로 보고, 이의 초선 당선자가 큰 소릴 쳐 웃기는 상황이 범여권의 복잡한 속사정이다. 주목되는 것은 친노그룹의 부활이다. 정운찬의 중도 하차 이후 이해찬, 한명숙, 김혁규 등의 세력화가 추진되고 있다. 한명숙은 대선 의사를 밝혔고, 이해찬은 대통령 노무현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 사람이다. 친노그룹의 계산은 이렇다. 대통령 지지의 절대적 핵심세력 15%를 넘겨받고, 여기에 알파를 생성하는 가운데 야권이 분열하면 승산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물론 대통령이나 청와대측은 함구로 일관한다. 대통령의 함구는 그에게 적잖은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되고 있다. 한미자유무역(FTA) 협상을 강단있게 타결한 이후, 반전된 지지도가 돌출 발언의 침묵으로 상승세를 타고 있는 것은 눈여겨볼 현상이다. 범여권의 대선 주자 판도는 노무현의 ‘盧心’과 김대중의 ‘金心’이 어떻게 의기투합하느냐에 달렸다. 친노그룹이 아무리 ‘盧心’의 뒷배를 업을지라도 정치세력화, 즉 정당의 배경없이는 본선이 불가능하다.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에 미련이 있겠지만 각자가 헤쳐모여야 할 처지에 있는 것이 열린우리당의 형편이다. 김근태나 천정배는 FTA 단식으로 대통령과는 또 담을 쌓은 상태다. 그렇다고 노무현이 지역주의 정당이라고 비판한 민주당에 회귀할 수도 없는 일이다. 사정은 ‘金心’도 비슷하다. 민주당만의 리모컨 작동으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김대중은 잘 안다. 민주당 대표 박상천은 ‘민주당 중심 통합론’을 말하고 있지만 민주당에 흡수될 당은 있을 것 같지 않다. ‘제3지대 신당론’이 이래서 나온다. 탈당파인 통합신당 모임은 열린우리당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것에 기다리다 못해 오는 7일 중앙당 창당대회를 갖기로 했다. 독자적 신당 창당을 해놓고 민주당, 국민중심당과 통합 협상을 벌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얽힌 범여권의 내부 사정은 앞으로 대통령 후보로 누굴 내세우느냐에 따라 이합집산의 형세가 달라질 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여권이 이토록 복잡했던 전례 역시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관심의 초점은 여권 또한 분열의 여부다. 즉 단일 후보의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느냐는 것이다. 도깨비 놀음에서 이상한 것은 결코 그렇게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이 너도 나도 ‘중도개혁’을 표방하고 나서는 사실이다. 중도개혁은 좋지만 이도 양면이 있다. 차라리 여야할 것 없이 모두 보수·진보의 개혁적 양대 정당으로 헤쳐 모이면 좋겠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린 지금 도깨비도 보통이 아닌 낮도깨비들의 포위속에 갇혀있다. 도깨비 중에도 착한 도깨비, 나쁜 도깨비가 있다. 이들이 누군가를 잘 봐둬야 한다. /임양은 주필

산자의 오만?

경기도 도시계획위원회 회의 장소가 도청이 아닌 곳으로 바뀌었다. 내일 열릴 예정인 도시계획위원회는 화장시설 안건을 다룬다. 주차난 때문에 옮겼다고도 하고, 주민들 반대 시위가 있을 것에 대비해 옮겼다고도 한다. 하남·용인·광명·부천 등지의 장묘시설 추진이 곳곳마다 갈등을 겪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초상을 당하면 빚 내서라도 제대로 장례를 치렀던 시절의 상여 행렬은 자전거를 타고가던 일제 순사도 피해 갔다. ‘우는 아기도 울음을 그친다’고 했을만큼 무서운 일제 순사도 그랬다. “북망산천이 머다더니 내 집앞이 북망일세 /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실 날이나 일러주오” 하는 메긴 소리에 상두꾼들의 “너허 너허 너화 너 / 너이가지 넘자 너화 너”하는 받는 소리가 이어지곤 했다. 허례허식이라 하여 없어진지가 오래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이기도 하다. 장례에 빚을 내는 것도, 일제 순사가 자전거를 비켜 서는 것도 알고 보면 죽은 이에 대한 산자의 예의범절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상여를 내라고 해도 못한다. 상두꾼 노릇 해줄 이웃도 없고, 차량 홍수로 길도 막힌다. 장례식장에서 운구차로 뚝딱 떠나는 죽은 이의 저승길에 산자들 말도 많고 탈도 참 많다. 대저 삶과 죽음의 경계는 뭣일까, 잠 드는 줄 모르고 잠든 순간과 같은 것일까, 분명한 것은 잠은 휴식이지만 죽음은 소멸이란 사실이다. 혼령이 떠나 털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육신은 그가 누구든 한 인생의 엄숙한 종말이다. 사(死)는 우연이 아닌 생(生)의 필연이다. 죽음엔 노소가 없다. 나이는 다만 확률일 뿐이다. 죽음 앞엔 이래서 그 누구도 오만할 수가 없다. 죽은 육신의 매장은 물리적 변화를 가져오고, 화장은 화학적 변화를 가져온다. 국토의 산야가 묘지화한다는 우려가 높다. 이렇기도 하지만 한 지관(地官)의 말이 생각난다. 명당, 명당하지만 명당은 99.9%가 없다는 것이다. 또 명당일지라도 잘못쓰면 효험이 없다고 한다. 지세에 따른 하관 시각, 깊이 그리고 방위 등이 모두 맞아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매장보단 화장을 권장한다. 매장은 잘못하면 화가 미치지만, 화장은 무해무득 하므로 무난하다는 것이다. 그 지관은 누구라고 하면 대체로 알만한 고명한 이다. 백년도 살기 어려운 것이 인간이다. 사람은 많다. 화장시설의 가수요층이 인간인 것이다. 그렇긴 해도 화장시설을 좋아할 산 사람은 없다. 본능이기 때문이다. 내집 근처가 아니고 네집 근처니까 그런 시설을 해도 된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 집값이 떨어진다고 한다. 정서상 안 좋다고 한다. 해법이 참 어려운 난제다. 갈등은 더 깊어지고 죽은 이의 저승길은 점점 난감해진다. 인식의 문제다. 파리에는 공동묘역이 시내에 있고, 일본은 도심지에 화장시설이 있는 곳이 적잖다. 여긴 프랑스도 일본도 아닌 한국이기 때문에 그같은 인식을 강요할 수는 물론 없다. 이런 건 생각해볼 수가 있다. 곳곳마다 갈등을 겪는 시설이 다 그토록 유해환경이냐는 것이다. 감성에 의한 개연성보다는 이성에 의한 구체성이 제시돼야 설득력을 지닌다. 자치단체가 만약 들어서선 안 될 지역에 흉하게 세운다면 백번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렇지 않고 아예 없는것이 있는 것 보다 낫다는 관념적 시비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현대적 장례시설은 공원화가 추세다. 그래도 장례시설이긴 하지만, 거부감을 덜 갖게 하는 건 사실이다. 공원화는 인간친화의 노력이다. 산자가 유명을 달리하여 죽은 이에 갖는 어쩔 수 없는 거부감은 자신의 죽음을 거부코자 하는 원초적 욕구다. 그러나 삶은 유한하다. 죽은 이 앞에서 결코 오만할 수 없는 산자의 경건함을 일깨우는 것이 장례시설의 공원화인 것이다. 엄격히 따지면 그같은 시설 추진이 문제이기 보다는 어떻게 시설하느냐가 문제일 수가 있다. 사람들은 즐거움으로만 인생을 추구하려고 들지만, 슬픔은 더 큰 인생의 중요 부분이다. 죽음은 가족중에도 있고 자신에게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죽음은 가장 불행한 슬픔이지만 누구에게나 닥칠 인생의 중요 부분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승의 종착이 곧 화장시설이다. 이를 욕되게 할 수 없는 연유가 뭣인가를 한 번 되새겨 볼만도 하다. 못살던 시절에도 죽음에 대한 인간의 가치를 존중했다. 하물며 그 시절보다 잘사는 이 시대 죽음에 대한 인간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큰 불행이다. 도시계획위원회 회의 장소를 비록 바꾸긴했어도 인간의 인성은 모든 사람마다 살아 있다. 마지막 이승의 길목이 편하도록 다 같이 노력해야 한다. 오기는 삶의 일을 저해하고 아량은 삶의 일을 도모한다. /임양은 주필

그가 ‘한국인’이라니,

지난 16일 광란의 총성이 세계를 경악시켰다. 미 역사상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인 피해 현장은 피와 주검이 무더기로 얼룩졌다. 교수를 포함한 학생 등 32명을 쏴 죽이고 29명이 다친 버지니아공대는 야차가 휩쓴 지옥을 방불케 했다. 쌍권총을 80여발이나 무차별로 쏘아댄 범인이 하필이면 한국인이라니 참담하다. 조승희라는 이름을 가진 스물세살의 이 학교 영문과 학생은 그 자신도 목숨을 끊었다. 자폐증에서 그랬든, 여자 친구 때문에 그랬든, 아니면 다른 뭣 때문에 그랬든 간에 그가 한국인이란 사실이 부끄럽다. 처음 범인이 아시아계로 알려졌을 때만 해도 자괴감이 들더니, 중국인으로 다시 알려졌을 땐 같은 황색 인종으로 수치심이 들었다. 그런데 한국인이라니 완전 충격이다. 한국인은 원래 이토록 잔인 무도한 것인가, 아니다. 비명에 숨진 희생자와 유족, 그리고 다친 이들에겐 뭐라고 변명할 말도 없지만 한국인은 잔인하지 않다. 눈물도 많고 동정심이 많아 한(恨)을 흥(興)으로 발효시키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그가 한국인이라니 정말 이런 낭패가 없다. 뜻밖의 순간, 청천벽력 같은 경악속에 영문 모르고 죽어간 교수와 학생들의 혼령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너무도 억울해 구천을 맴돌지나 않을까, 또 뭐라고 할 것인지, 위로의 말조차 찾을 길이 없다. 백배사죄할 따름이다. 가정마다 다 소중한 자녀이고 아버지다. 누구도 그것을 빼앗을 권리는 없다. 열심히 배우고 가르친 그들 또한 행복을 빼앗길 이유가 없다. 이런데도 한꺼번에 모든 것을 잃었다. 그 비인도적 가해자가 한국인이라니, 같은 한국인으로서 황당하고 송구스럽다.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인이 울린 한 방의 총성은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다.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쏜 그 역시 젊은 학생이다. 버지니아 주 블랙스버그 시 버지니아공대 참사의 총성 또한 상상할 수 없었던 비극이다. 그러나 한미 관계로 확대될 것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다. 외교 관계로까진 번지지 않아도, 미치는 파장은 클 것이다. 외교는 협상의 길이 있어 타결이 가능하다. 미국 사회에서 내연(內燃)하는 반한인(反韓人) 정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외교 문제보다 어쩌면 더 심각하다. 가뜩이나 망연자실해 고개를 못드는 교민들이 ‘어글리 코리안’으로 보는 따가운 미국 사회의 눈총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세계가 지켜본다. 여러 나라 정상이 보내는 애도의 물결이 일고 있다. 이란은 이미 일곱해 동안 미국과 국교가 끊긴 나라다. 이러한 이란의 외교부 대변인은 “어떤 명분을 앞세워도 무고한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은 신성과 인간적인 가치에 어긋난다”며 “미국 정부와 희생자 유족들을 위로한다”고 밝혔다. 영국 왕실에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참사 소식에 충격을 받았으며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표시한다”는 성명을 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위로를 전하며 용서와 희망, 화해로 폭력을 꺾을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주시길 하느님께 기도 드린다”는 전문을 보냈다. 호주도, 중국도, 일본 등도 애도의 뜻을 표했다. 청와대도 백악관으로 깊은 위로를 전하는 두 정상 간의 교감이 있긴 있었다. 그래도 뭔가 미흡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미국이 겁나서가 아니다. 비록 한국인의 개인적 소행이지만, 같은 한국인의 입장에서 인도주의적 부담을 지울 수 없는 순박한 심성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또 한번 생각해 본다. 미국만이 아니다. 지구촌 도처에 한국인이 나가 사는 것은 환영한다. 하지만 분별없는 이민이나 유학은 불행을 싹 틔운다. 버지니아공대 총성의 참변은 상상밖의 극단적인 것이지만, 사려깊지 못한 이민이나 유학으로 가정이 불행해지거나 한국인을 망신시키는 예가 허다하다. 자신이 스스로 책임지지 못하는 외국 생활로 모국을 욕되게 하는 무작정 출국은 개인을 위해서도 자제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미국은 오는 22일까지를 버지니아공대 희생자의 애도 기간으로 갖는다. 산 사람의 애도가 어찌 혼령을 다 위로한다 할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이렇게 밖에 더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산 사람의 예의다. 한국인들 또한 이래서 가슴 저미는 애도의 심정을 같이 갖는다. 억울한 것으로 치자면 어찌 저승길을 쉽게 떠나겠는가, 허나 이미 유명을 달리해 되돌아 올 수 없고 보면 원혼(寃魂)이 되기보단 천국으로 인도되기를 빌고 또 비는 것이다. 희생된 교수 그리고 학생들이여!! 편히 쉬소서, 부디 편히 쉬소서. 부상자들의 쾌유를 빈다. /임양은 주필

盧, 안과 밖의 ‘모순’

수저를 들었으면 젓가락 아니면 포크를 들어야 한다. 한가지로는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없다. 성찬일 것 같으면 더욱 그렇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 타결은 몇 가지 고비와 보완할 일이 적잖게 남긴했으나 어차피 가야할 길이다. 중국도 일본도 협상을 갖자고 한다. 유럽연합(EU)도 마찬가지다. 남미 칠레와는 이미 협정을 체결했다. 엊그제 성남 SK텔레콤 액세스연구원 등을 찾은 원자바오 중국 총리의 방한은 FTA를 위한 탐색이다. 그는 “오늘 비행기에서 내리자 마자 이곳으로 달려왔다”고 말했다. 경제4단체 주최 오찬 간담회 시간도 가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이다. 자유무역은 경쟁력이 생명이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경쟁력 강화가 더 더욱 절박하다. 경쟁력이 살아나면 거의 무한한 이윤을 추구한다. 반면에 경쟁력을 상실하면 쪽박차는 손실을 가져온다. 경쟁력은 기업 활성화와 인재 양성 두 가지로 집약된다. FTA와 경쟁력은 수저와 젓가락 같은 관계인 것이다. 노 대통령이 한미자유무역협상 타결을 이끌어낸 뚝심은 알아줄만 하다. 그랬으면 이젠 경쟁력 강화에 눈을 돌려야 한다. 그런데 무관심한 게 그런 것 같지 않다. 여전히 경쟁력 저해 요인을 고집하는 것 역시 뚝심인 것은 정말 안타깝다. 수도권정비계획법이나 출자총액제한제 같은 건 성장동력을 잠식한다. 자유무역으로 가면 기업도 자유롭게 해줘야 한다. 갖가지로 얽어놓은 규제를 풀어야 하는 것이다. 집안에서 부모에게 주눅 든 아이가 바깥에 나가 기를 쓸 순 없다. 나쁜 버릇은 꾸중할 때 하더라도 기를 살려야 한다. 기업, 특히 대기업은 몸에 밴 나쁜 버릇이 있긴 있다. 편법 상속, 분식회계, 비자금 조성 등 이밖에도 또 있다. 이런 버르장머리엔 매질을 하더라도, 경제질서의 기본인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는 최대한 살려줘야 하는 것이다. 때마침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06년도판 ‘글로벌 경제에서의 도시 경쟁력 보고서’가 나왔다. 보고서는 월드 스타, 내셔널 스타, 전환기의 도시 등 1·2·3 등급으로 구분했다. 런던·뉴욕·파리·도쿄·보스턴·밀라노·뮌헨 등은 월드 스타로 1등급에 올랐다. 서울은 전환기의 도시로 3등급이다. 즉 3류도시인 것이다. 런던 등 1급은 다국적 기업의 전초기지 등으로 분석된 반면에, 3급인 서울은 성장 엔진역할 미흡 등이 지적된 것은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런던이나 파리, 도쿄는 수도다. 이의 글로벌 도시는 비단 수부도시에 국한하지 않는 수도권이다. 즉 서울이 3류인 것은 나라 경제의 심장과 같은 수도권 성장 엔진이 제대로 작동치 못하는 경제의 심장병 질환 탓이다. 문제의 수도권정비계획법은 1982년에 제정된 법률이다. 산업사회의 굴뚝산업에 맞춰 만든 법률을 정보화시대의 지식산업에 적용을 강요하는 것은 모순도 이만 저만이 아니다. 공장입지는 기업경영의 자유에 속하는 판단이다. 정부가 간여할 성격이 아니다. KOREA의 수출품이면 국내 어느 지역에서 만들었든 수출효과는 온 국민의 것이다. 참다운 지방균형 발전은 되지도 않는 공장의 강제 배급이 아니다. 지역마다 갖는 특화산업을 개발하고 육성을 지원하는 것이 다양하고 조화로운 지방균형 발전인 것이다. 인재 배양은 당대만이 아닌 미래의 경쟁력을 좌우한다. 학생은 미래의 주역이며 학교는 잠재된 인재의 보고다. 하향평준화는 경쟁력을 저해, 영재를 범재로 만들기 십상이다. 경쟁력 박탈은 영재의 기회 박탈이다. 이토록 불공평해서는 인재 양성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한 명의 인재가 수만, 수십만 명을 먹고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지식산업이다. 수능·내신 등급화로는 점수 차이를 구분하기가 어렵다. 대학이 수험생 능력을 변별코자 하는 것은 입시의 본질적 수단이다. 장차는 대학교육도 개방돼야 한다. 입시 등 대학의 학사관리에 정부가 시시콜콜 개입하는 것은 시류에 당치않다. 인재 양성에 힘써야 할 정부가 되레 훼방놓고 있다. 한미자유무역협상 타결을 성공시킨 대통령이 경쟁력의 요체인 기업규제 완화, 수도권정비계획법 폐지, 고교등급제 및 대입 본고사 부활 등을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것은 이렇게 보아진다. 먹고 사는 문제를 나라 밖으로 보는덴 그의 말대로 이념에서 눈을 떴지만, 먹고 사는 문젤 나라 안으로 보는덴 아직 이념에 사로 잡혔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기득권층에 대한 원한이 풀리지 않아 그러는진 몰라도 그도 이젠 기득권, 신기득권층이다. 민중생활을 보는 시각이 닫힌 마음에서 열린 마음으로 새롭게 보는 변화가 있길 기대하는 것이다. /임양은 주필

노무현, FTA와 ‘大選’

노무현이 달리 보였다는 세평은 많은 걸 생각케 한다. 지난 2일 한미자유무역(FTA) 협상 타결이 있었던 날 밤 9시50분께다. 노 대통령의 FTA 타결 관련, 대국민 담화 발표를 텔레비전 생중계로 지켜본 세인의 반응이 대체로 그러했다. 평소 대통령을 달갑게 여기던 사람은 대국민 담화를 혹평하고, 달갑지않게 여겼던 사람들은 호평하는 경향이 많다. 세간의 반응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대통령 담화는 양쪽 반응이 다 그를 달리보는 계기가 된 것은 괄목할만하다. 만약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이 아닌 국회의원이나 재야 정치인이라면 누구보다 FTA를 앞장서 반대했을 사람이다. 민주당 당내 후보시절 영남대 특강에선 “반미면 어떠냐?”고까지 극언했다. 그랬던 그가 대미 FTA 협상 타결에 전례없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지만, 그렇다고 진보주의 성향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나라 운용을 책임지는 대통령 자리에 있다보니 그같은 판단이 절실했던 것으로 보는 촌탁이 가능하다. “FTA는 이념의 문제가 아닌 먹고 사는 문제”라는 그의 말은 미래 지향적 절규다. 신랄한 비난이 쏟아졌다. ‘매국노’라고 했다. FTA는 미국 의회에서도 반대하는 측이 있다. 매국이란 당치않다. 일본은 자국의 미국 시장에 미칠 타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중국 또한 충격을 받았다. 이웃 나라가 이런 걱정을 하는 매국노는 있을 수 없다. ‘서민경제를 망친다’고 했다. 서민경제를 말하자면 미국쌀을 개방하면 우리 쌀값보다 3분의 1이면 사먹을 수가 있다. 하지만 쌀은 제외됐다. 다른 시장바구니는 더 싸진다. 대신 예컨대 감귤을 개방했다. ‘광우병 쇠고기를 먹인다’고도 했다. 쇠고기 수입을 개방해도 검역은 별개의 문제다. 광우병 쇠고기란 무책임한 선동이다. 선동보단 제주 감귤보다 싼 미국산 감귤이 들어와도 제주 감귤을 살 줄도 아는 것이 애국 소비다. 척화비(斥和碑)는 흥선대원군이 내건 쇄국정책의 징표다. 일본은 메이지(明治) 유신으로 개방으로 치달을 때 조선은 나라문 빗장을 굳게 닫아 걸었다. 자고로 국수주의가 잘된 나라는 역사에 없다. 예를들어 자동차 수출은 전략산업이다. 미국은 주력시장이다. 자동차 수출 증대는 국내 경제와 절대적 관계다. 여의치 못하면 대량 실업 등 도미노 파급 효과가 치명적이다. 현대판 국수주의자들이 이를 책임질 수는 없을 것이다. 내친 김에 교육·의료 분야가 이번에 빠진 것은 유감이다. 미국의 유수한 대학이나 의료시설이 국내에 들어와야 한다. 이래야 국내 대학, 병원들이 정신을 차려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다. 소비자들도 굳이 현지에 안가도 되므로 미국까지 가서 공부하거나 치료받을 경비가 절감된다. 물론 FTA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게 마련이다. 희비가 엇갈리는 업종이 많다. 하지만 개방돼야 한다. 가장 취약산업인 농업 부문도 그렇다. 무작정 언제까지고 과보호만 해서는 발전이 있을 수 없다. 농민이 아닌 농업인에 의한 농업의 전문경영화 시대로 가야 된다. 예컨대 세분화된 전문 경영의 농업인들로 구성되는 대단위 기업이 앞으로 나와야 한다. 한미FTA협상 타결은 결론이 아니다. 새로운 문제 제기의 시작이다. 농업분야 지원을 비롯한 각 분야의 이해득실에 따른 손실보전, 그리고 대미 후속 대책 등도 문제가 산적해 있다. 이의 과정에 흐렸다 개었다 하기가 숱해 난관이 겹치고 또 겹쳐도 어차피 가야할 길이다. 시련이 두려워 도전을 포기하면 미래가 있을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차세대를 위한 경제구조의 전진적 개편 선상에 서 있다. 기류가 기묘한 것은 정치권이다. 쉽게 말해서 노 대통령의 지지도가 좀 오른 모양이다. 이렇다 보니 FTA 협상 타결을 적극 지지했던 한나라당이 뜨끔한 것 같다. “꼼꼼히 따져 신중을 기하겠다”는 등 국회 비준을 두고 한발 물러서는 태세다. 꼼꼼히 따져야 하는 것은 말할 것 없다. 문제는 정략화다. 오는 대통령 선거를 의식해 비준을 정략화 해서는 책임있는 공당의 면모가 아니다. 따지는 게 아니고 트집을 잡거나 시일을 일부러 질질 끌어선 대선에 오히려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범여권도 입장은 마찬가지다. 군웅이 할거하는 가운데 중구난방인 것은 각자의 정치적 입지를 점치는 눈치놀음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바탕인 다원화 사회에서 이유있는 반대는 마땅하다. 범여권에 할거하는 군웅들은 자신의 처신이 과연 이에 합치되는 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분명한 것은 한미FTA 협상 타결은 대선과 유관해도 별개란 사실이다. 대통령의 결단은 평가된다. 그리고 대권 주자들이 표명하는 이의 찬반이 표에 영향을 주는 것은 맞겠지만, 대통령 노무현은 어디까지나 노무현인 것이다. /임양은 주필

화성행궁의 봄, 개혁의 요람

인심은 무상하다. 인심은 무상해도 대자연의 봄은 역시 강산을 찾아든다. 수원 화성행궁에도 강산의 봄이 깃들었다. 2007년 화성행궁 상설 한마당 개막공연이 있었던 게 지난 24일 일요일이다. 관광 시즌을 맞이하여 수원예총 등 주관으로 올 상설 행사의 오픈이 화성홍보관 개관과 함께 있었다. 수원은 정조대왕의 도시다. 조선조 유일의 행정도시며 근대적 개혁의 의지가 담겼던 도시다. 화성은 그같은 요충적 개념이 담긴 성곽이다. 200여년이 흘렀다. 세월이 흘렀어도 수원은 정조의 시대정신이 살아있는 도시다. 화성 성곽에 낀 이끼엔 대왕의 정신이 서려 숨쉰다. 불세출의 걸출한 계몽군주, 정조대왕 그리고 대왕에게 그러한 품성을 배양시킨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자애는 수원의 모태다. 수원시가 선발한 대왕과 혜경궁 홍씨의 의제에서도 그같은 ‘온고지신’의 옛것으로부터 새로움을 발견한다. 지난 일요일이 그러했다. 정조와 혜경궁 마마가 참석한 가운데 가진 상설 한마당 개막공연 또한 새로운 소회를 일깨웠다. 정조의 친위대든 장용영의 수위의식, 무예24기, 궁중무용 등 재현은 ‘온고지신’의 교훈과 더불어 올 관광시즌에서 외국인을 비롯한 관광객들에게 매주 주말마다 보기드문 명품으로 각광받을 것이다. 이날 개관된 화성홍보관은 아흔아홉 칸의 행궁에 걸맞는 조선식 건물의 외양이 아닌 현대식이어서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래도 시설 내용은 훌륭하다. 행궁의 연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갖가지 고증적 전시물이 돋보인다. 영화관 상영물 중 화성의 공심돈서 쏘아대는 철환이 마치 관객을 겨냥하며 달려오듯이 하는 입체감은 현장감을 더했다. 행궁을 포함한 화성은 유네스코에 등록된 세계문화유산이다. 그러나 그같은 형태적 가치보다 더한 것이 앞서 밝힌 정조대왕의 개혁 정신이다. 대왕은 실사구시의 실학을 꽃피웠다. 북학파를 통한 서구 문명의 도입을 권장하였다. 이 때가 18세기 말엽이다. 청나라 멸망을 가져온 신해혁명으로 중국의 근대화가 본격화한 것이 1911년이다. 일본의 에도 막부가 붕괴되면서 근대 국가를 이룩한 것이 19세기 후반의 명치유신이다. 정조대왕의 근대화 이상은 중국이나 일본보다 훨씬 앞선다. 대왕은 1800년 재위 23년만에 승하하였다. 당시의 보령이 연부역강한 마흔여덟이었다. 그 무렵 실학의 개혁은 수구파의 강한 반발이 있었다. 만약 대왕의 갑작스런 의문의 죽음이 없었던들 조선의 개화는 중국이나 일본을 앞질러 동북아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역사에서 가설은 부질없다. 가설은 부질 없지만 역사의 교훈은 얻을 수 있다. 화성성역화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국책사업으로 추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국비 지원 등을 위한 제도적 법률 장치는 필연적이다. 화성홍보관 개관식에서 이런 장면이 있었다.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김용서 수원시장이 참석한 가운데 가진 식장에서 홍기헌 수원시의회 의장, 남경필 국회의원은 김 지사가 일찍이 운을 띄운바가 있는 도비 보조 100억원을 거듭 다짐하자 김문수 도지사는 “헛허… 참!”하면서 그 역시 긍정적으로 다짐했다. 도비 지원은 국비를 끌어오기 위한 선행 조건으로 경기도가 앞장서는 것이다. 화성은 일제 강점기,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상처를 입었다. 오는 2020년까지를 목표 연도로 추진하는 성역화복원사업은 민자를 포함, 약 2조원 가까운 예산이 소요 되지만 후대를 위해 이 세대가 해야할 시대적 소명이다. 바로 엊그제다. 이의 관련 자료를 얻기위해 수원시화성사업소엘 들렀다. 종이컵으로 대접받은 커피를 다 마시지 못한 채 복사기로 복사된 일부의 자료를 받아들고 나선 그 시각에도 대부분의 직원이 자리잡은 1,2층 사무실엔 불이 켜져 있었다. 이 때가 이미 초저녁으로 접어든 오후 7시30분께다. 화성행궁 앞 마당 6천755평에는 명당수와 신풍교 복원사업이며 주변 경관 조경사업이 한창이다. 기존의 많은 건물이 철거된 가운데 유독 남아있는 수원우체국 건물도 오는 연말까지 시내 천천동에 신축되는 새 건물로 이전하면 마저 철거된다. 광장 조성사업과 함께 추진되는 종로 거리의 종루 등 복원은 또 하나의 명품으로 등장할 것이다. 화성행궁은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로 명성을 떨친 ‘대장금’, ‘왕의 남자’ 등 촬영 장소였으나 이만으로 유명한 것은 아니다. 인심은 무상해도 시대는 언제나 더 나은 미래 지향의 개혁을 요구한다. 정조대왕의 생생한 개혁 정신의 요람인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반추되고 있는 것이다. /임양은 주필

북·미관계의 변화

평양정권이 살판났다. 외무성 부상 김계관은 뉴욕에서 미 국무부의 칙사 대접을 받았다. 떡대같은 장정의 두 경호원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정중히 대했다. 북·미관계 회복을 위한 미 국무부 차관보 크리스토퍼 힐과 이틀간의 비밀회담이 있었다. 귀국하는 김계관은 만면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현안의 동결자금이 풀렸다.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묶였던 자금이 해제된 것이다. 그러나 북측은 지난 20일 예정된 이틀째 6자회담을 공전시켰다. BDA에 갇힌 2천500만 달러가 먼저 손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정상화를 위한 북·미 수교관계 수립의 논의가 있었다. 연락사무소 설치를 거치느냐, 바로 공관을 두느냐가 앞으로의 과제다. 부시가 평양정권을 ‘악의 축’으로 매도한지가 언젠데, 놀라운 변화다. 북·미관계의 전환은 2·13 베이징 합의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물밑 접촉은 그 이전에 있었다. 지난 1월 미국은 북측과 베를린에서 집중적 회담을 가졌다. 양자협상은 있을 수 없다는 종전의 강경책에서 부시 스스로 한발 물러선 것이다. 핵 무기가 과연 무섭긴 하다. 2006년 10월9일 핵 폭탄 실험을 성공한 이후, 결국 이같은 변화를 가져왔다. 미국 만이 아니다. 나라안 한나라당도 대북정책의 강경 기조를 수정할 것 같다. 대북 사절을 보내겠다고 한다. 평양정권의 요구는 그러나 이제부터다. 테러지원국 해제, 적성교역법 조속 해제 등은 북·미 뉴욕회담의 합의 사항이다. 중유 100만t 상당의 에너지 등 지원은 2·13 합의다. 경수로 완공을 요구할 공산도 높다. 뭣보다 미국이 공화국을 적대시하는 법률적 제도적 장치가 제거돼야 한다고 말한다. 핵 불능화 시한을 최대한 늘리면서 다양한 대미 협상카드를 구사할 작심인 것이다. 대남 정책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초강대국이다. 그런데도 평양정권에 마냥 끌려만 간다. 베이징 외교가에서도 같은 얘기가 나오는 모양이다. ‘위대한 김정일 장군의 영도로 미 제국주의자들이 공화국에 무릎을 꿇고 들어왔다’며 쾌재를 부를 것 같다. 부시의 변화는 자존심을 포기한 것이다. 대북 압박의 강경책이 먹혀들질 않았다. 미국의 대북정책이 강경할 수록 커지는 것은 중국의 동북아권 영향력이다. 부시는 이게 싫은 것이다. 자존심을 버리는 대신 외교적 실리의 포석으로 나온 것이 대북정책의 변화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무작정 끌려다니진 않을 것이다. 핵 불능화 조치의 시한으로 보는 앞으로의 약 1년이 고비로 보인다. 바둑에서 별 부담을 갖지않는 일방적인 패가 꽃놀이패다. 작금의 북·미관계는 미국이 더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북이 즐기는 꽃놀이 패가 마냥 지속되긴 어렵다. ‘세계식량계획’(WFP)은 며칠전 북녘의 식량난을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식량난은 여전하고, 인민의 이탈, 즉 탈북자는 사태가 나도 국제사회를 당당하게 주무른다. 여기 같으면 폭동이나 민란이 일어나도 벌써 일어났을 터인데, 끄덕없는 것을 보면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다. 장기 집권도 그렇다.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12년 집권의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해야 했고, 18년의 박정희는 비명에 가고, 8년의 전두환은 백담사엘 가야 했다. 하물며 대를 이은 59년의 집권에도 요지부동인 것은 정치학의 연구 과제가 될만하다. 그러나 실체(實體)야 어떻든 실재(實在)한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과거도 마찬가지다. 제네바 합의, 더 나아가 6·25 남침전쟁을 지금 말하는 것은 핵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된다. 이게 현실이다. 부시는 핵 문젤 실재한 정권의 실체로 보고 좋든 굳든 북측과 이마를 맞대고 있는 것이다. 2·13 합의는 남쪽 부담이 크다. 크지만 북이 이 합의로 주변국의 도움을 극대화하는 것은 좋다. 바라는 것은 정녕 핵으로 남쪽을 위협할 요량이 아니면 핵 장사는 이번 6자회담으로 끝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설령 평양을 공격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 남쪽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미동맹이 낡았긴 해도 그만한 안전 장치는 살아 있다. 북·미관계의 밀월이 핵의 시류에 떠밀려서 갖는 억지 춘향이긴 해도 막말을 주고 받는 것보단 훨씬 낫다. 남북이 공존공영의 길목에 서 있다. 북·미의 해빙 무드가 만약 실패로 돌아가 다시 얼어붙으면 한반도든, 조선반도든 이 땅은 주변의 열강들 각축 속에 평화가 멀어진다. /임양은 주필

김문수가 ‘누굴 닮는다’고?

“당 바람에 됐다”고들 말했다. “사람으로 보면 진대제가 못할 것도 없다”고도 했다. 그러니까 이 정권의 실정으로 인한 민심 이반의 반사이익을 톡톡히 봤다는 얘기가 된다. 한나라당 김문수 경기도지사 후보가 당선됐을 당시에 나돈 선거 민심이 이랬다. 그런데 이즈음 들어 “진대제 같으면 안 그럴 건데…”하는 소리가 가끔 나온다. 도청안에서도 그런다. ‘꼴통’이라고 하는 소리도 들려 정확한 낱말 풀이를 알기위해 국어대사전을 찾아 보았다. 흔히 쓰이는 말이긴 한데 사전에는 안 나왔다. “하필이면 노무현 대통령을 닮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있다. 그런가 싶더니 한 인터넷 언론에서 “김문수 ‘제2 노무현 꿈’ 돌입… 도 혈세 쏟아붓기”라는 보도가 있었다. ‘혈세를 쏟아 붓는다’는 건 잘 모르겠다. ‘노무현 꿈 돌입’은 ‘노무현을 닮아간다’는 말이 연상된다. 심리학에 ‘내적귀인’과 ‘외적귀인’이란 게 있다. 앞말은 잘 된 것은 다 내탓이고, 뒷말은 안 된 것은 다 남탓으로 돌리는 심리 현상이다. 아마 이 점에서 노 대통령과 닮았다는 말이 나온 것 같다. ‘허구적 독선’이란 것도 있다. 정리되지 않은 가공적 결론을 우격다짐으로 우기는 것이다. 완력있는 사람이 ‘허구적 독선’에 빠지면 폭력형이고, 돈있는 사람이 그러면 금전형이 되고, 권세있는 사람이 그러하면 권력형이 되는 것이다. 김문수 도지사가 권력형의 ‘허구적 독선’에 빠졌는지, 안 그런지는 독자가 판단할 몫이다. 이런 건 있다. ‘소리는 요란한데 눈에 보이는 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김 지사의 공과를 따지기엔 아직 이르다. 선거공약중엔 중앙정부와 정치권의 법령 개정, 비수도권의 반발, 수 조원대의 재원 조달 등 걸림돌이 많아 해법 찾기가 난감하단 말은 ‘도지사직 인수위’의 인수단계에서 부터 나왔지만 더 두고 볼 일이다. ‘소리가 요란하다’는 말은 또 업무스타일을 둔 얘기일 것 같다. 예컨대 김 지사가 바지런한 건 사실이다. 산하조직 등 이런 저런 현장에 많이 다닌다. 많이 다니긴 한데, 갔다하면 사람들 속을 긁어 뒤집어놓고 만다. 아예 안 온 것보다 못하단 말이 이래서 나오곤 한다. 물론 잘 하라는 말이고, 말인즉슨 맞는 말이지만 그도 말하기 나름이다. ‘잘하지 못하겠으면 그만 두라’거나 아니면 ‘폐쇄하겠다’는 투가 능사는 아니다. 충격 요법도 한두 번이지 상습벽이어서는 되레 경망스럽게 보인다. 원래부터 지역사회의 공공조직을 믿지 못해 이토록 무시해대는 것으로 보이는 기색이 만약 그의 본심이라면 고약해도 아주 고약하다. 측근을 11명이나 요직에 무더기로 정실 임용했다. 도 산하 단체장은 깡그리 외인부대로 채웠다. 그 자신이 “일류들만 모였다”고 자화자찬한 적이 있다. 일류 감독이 일류 선수 출신인 것만은 아니다. 도립 예술단의 난맥상이 김 지사의 잘못된 일류병 인식에 기인한다. 일류 단체장들은 또 뭐하는지 모르겠다. 정실 임용된 측근들이 각별히 기여하는 게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인사에서 용빼는 재주를 부릴듯이 해보인 시작이 용두사미로 그치면 이무기보다 못하다. 곱지않은 말에 대해 더 얘기할 차례인 것 같다. 두 가지 사례만 들겠다. 연천선사박물관 건립 예정지에서 “돌 쪼가리나 고인돌 조각을 누가 보러 오겠느냐”고 한 것은 할 소리가 아니다. 세계적인 선사유적지를 모를만큼 무지하다고는 믿지 않는다. 유물 확보, 박물관 규모에 대해 말하다 보니 그렇게 말했겠지만 말엔 품위란 게 있다. 특히 전문분야는 전문가, 즉 고고학 분야는 고고학 전문가들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아는 것이 금도다. 도립 의료원에 가서 잘 안 되면 문을 닫겠다는 것은 책임 전가다. 대학병원이나 민간병원에 버금가는 수준의 지원이 먼저다. 첨단장비, 양질의 의술 조건을 갖춰놓고 그런 말을 해도 해야 된다. 서울시지방공사 의료원의 성공이 경쟁력있는 선 투자에 시작된 사실을 타산지석 삼아야 한다. 누구처럼 언론을 탓하는 것도 닮긴 닮았다. “경기도는 천지개벽이 일어나도(특히 중앙언론의)관심을 끌지 못한다”면서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처럼 알려지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국민에게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말인데 도대체가 궁금하다. 김 지사가 한 일 가운데, 천지개벽은 뭣이고 비단옷은 또 뭣인지 알 수 없다. ‘허구적 독선’의 자기 만족은 뉴스의 가치가 없다. 언론은 굳이 자기과시를 안 해도 가치있는 ‘천지개벽’이나 ‘비단옷’엔 오지 말라고 해도 기를 쓰고 쫓아간다. 지역사회가 바라는 것은 일에 소리만 내지말고 눈에 드러나도록 보여달라는 것이다. 도지사의 말에 품격이 떨어지는 게 유감인 것은 경기도의 품격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기도의 공무원조직은 중앙부처 공무원의 자질에 비해 손색이 없다. 다만 일부의 무능공무원이 없지않긴 한데, 울산에서 시작된 퇴출제 시행은 모방이라며 우정 시큰둥 하는 건 ‘꼴통’이다. 아무튼 대부분의 경기도 공직사회는 구조적으로 양질이다. 그런데 김문수 운전기사는 이를 너무 거칠게 몰아 고장내면서 남 탓만 한다. /임양은 주필

김대중의 ‘과욕’

“대통령 아들인 김현철을 구속하라”고 했다. 김영삼 정권 때 김대중 야당 총재는 국회에서 김현철 게이트를 대통령의 측근 비리로 몰아 붙였다. 결국 구속됐다. 양 김은 1960년대부터 구 민주당에서 정치인 생활을 같이 했다. 평생의 라이벌 관계는 서로의 정치적 성장에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플러스 요인이 됐다. 전두환 정권에서는 재야를 망라한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을 맡았다. 양 김은 친구 사이다. 어차피 사법처리될 친구의 아들을 구속하라고 목청 높였던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자신의 세 아들이 모두 비리에 연루되어 구속됐다. 이에 앞서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엔 김영삼의 배려가 컸다. 1997년 대선에서 만약 이인제가 중도에 사퇴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이인제가 얻은 약 500만표가 30만표 차이로 당락이 갈라진 김대중·이회창 두 후보에게 분산됐겠지만 이회창의 당선이 분명했을 것으로 보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미 대통령 자리에 오른 김영삼은 그래도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김대중에게 대통령을 물려주고 싶은 인간적 연민의 정을 가졌던 것이다. 반대로 이회창에 대한 괘씸죄는 깊어져 정치적 양자인 이인제가 끝까지 버티는 것을 김영삼이 묵과했던 게 당시의 대선 판도다. 일설에는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차기엔 이인제를 보장하는 김대중의 각서가 있었다지만 확인되진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대선후 이인제의 국민신당이 김대중의 민주당과 합당이 있긴 있었으나, 이인제는 합당의 막바지 시점에 국민신당 총재인 이만섭의 강력한 권고가 있기까지 심각하게 고민했던 점에 비추어 홀로서기를 하려 했던 것으로 보는 설이 있었다. 어떻든 민주당의 차기로 꼽혔고, 경선에서 초반 승세를 탔던 이인제가 전남·광주지역 당내 경선에서 복병 노무현에게 대패하기 시작한 역전 쿠데타를 극복하지 못하고 중도 하차하게 된 배후는 김대중의 의중이 작용된 것으로 보는 눈이 유력하다. 중도우파, 대북 관계의 상호주의를 강조하는 이인제가 김대중으로서는 미덥지 않게 보였던 것이다. “남북 관계만 잘 되면 다른 건 다 깽판나도 좋다”는 노무현의 말이 나온 게 이 무렵이다. 이인제의 청와대 면담 요청이 비서실장 박지원에게 철저하게 봉쇄된 것도 같은 무렵이다. 이인제의 얘길하려는 것이 아니고 김대중을 말하려다 보니 이인제 얘기가 빗대졌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킹 메이커 역할을 한 김대중이 퇴임하고 나서도 킹 메이커 노릇을 하려는 것은 주목할 대목이다. 범여권의 단합, 범여권의 단일화를 거듭 거듭 강조하며 오는 12월 대선을 앞두고 노골적으로 개입하고 나서더니, 엊그젠 의문의 방북 길에 찾은 전 국무총리 이해찬에게 역시 대선과 무관하지 않는 훈수를 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둘째 아들 김홍업을 전 민주당 대표 한화갑이 국회의원 자격을 상실한 전남 무안·신안 선거구의 4·25 보궐선거에 출마케 하는 것이다. 김홍업을 국회의원으로 만들어 범여권의 호남 결속을 위한 구심점으로 삼을 요량이라는 것이다. 김대중의 욕심은 정말 끝이 없다. 두 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96~97%의 호남 몰표가 나와 자신이 대통령이 됐고, 노무현을 대통령 시켰으면 이젠 그만 둘 때가 됐다. 세 번째로 또 한번의 몰표를 챙기려는 영향력이 먹힐지 안먹힐진 모르겠으나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 전직 대통령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참 볼썽사납다. 현직 대통령 노무현 역시 전직 대통령 김대중을 닮아서인지 퇴임 후에도 정치 활동을 하겠다지만 전직 대통령이 설 정규무대는 없다. 하물며 전직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 ‘감놔라 배놔라’ 해가며 시시콜콜하게 나서는 것을 보기좋게 여길 국민은 별로 있을 것 같지 않다. 김대중이 현해탄에 수장될 뻔 했고, 감옥을 집처럼 드나들며 사형 선고를 몇 차례 받으면서 간곤하게 일관한 민주화 투쟁의 기여를 모를 사람은 없다. 아버지 바람에 큰 아들도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자유스럽지 못한 몸이 되고 둘째 아들 또한 고생한 사실도 다 안다. 주요한 것은 이렇기 때문에 김대중은 퇴임 후에도 정치를 하거나 선거에 개입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김대중이 미련 갖는 남북 관계도 길을 열어 놨으면 닦는 것은 뒷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역사의 흐름이다. 김대중과 그 일가는 이미 희생에 부응하는 대가를 받았다면 받았다 할 수가 있다. 제1야당인 한나라당의 허물이 없다할 수 없다. 전직 대통령 김대중이 이토록 원로의 한계를 일탈한 현실 정치 개입은 한나라당의 인재 빈곤과 정책 부재로 인해 우심하다. 한나라당은 탄력성 없는 자폐증에 걸린 채, 패거리 작당으로 미리 한 자리 얻을 줄서기에 바쁘지만 아니다. 지금 같은 거품 인기로는 오는 대선을 낙관하기 어렵다. 김대중을 견제하는 것도 한나라당의 역량이며 앞으로 나올 대선 후보의 경쟁력이다. /임양은 주필

한나라당과 ‘환격’

노무현 대통령은 엊그제 열린우리당 조기 탈당으로 막바지 정치 복선을 깔았다. “당에서 자꾸 나가라는 사람이 있으니까 항상 시비가 된다. 그래서 당적을 정리했다”고 말했지만 암수다. 여권의 소식통에 의해 관측되는 전망은 이렇다. 오는 6월쯤 열린우리당은 탈당파와 통합신당을 창당한다. 호남세의 민주당이 합류할 것이며, 국민중심당도 대상이다. 신당 창당의 이같은 합류는 특히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당이 저마다 체면을 세운다. 열린우리당이 말한 민주당 회귀 불가, 민주당이 주장한 열린우리당 복귀 요구의 대타협점이 신당 창당의 합류인 것이다. 이엔 김대중의 햇볕정책 계승자인 노무현과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물린 가운데, 친노·반노 할 것 없이 일단은 대통령을 우군으로 정권 재창출을 지상과제 삼는 대통합신당이 출범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탈당으로 여당은 없어졌지만 여권은 이래서 실재하다. 여권은 대선 후보 경선은커녕, 전열도 정비치 못한 가운데 한나라당은 대선 후보 경선이 불을 뿜는다. 당내에서 들려오는 말을 들으면 벌써 대세론에 심취한 것 같다. 한나라당은 과연 정권을 쟁취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여론조사에서 지지도가 40%를 웃도는 당내 주자가 있다고 해서 낙관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한나라당은 지금 혼자 뛰고 있다. 뒤늦게나마 상대가 되는 여권의 통합신당이 출현하면 판센 혼자 뛰는 것과는 판이해진다. 한나라당은 대세론이 대세로 굳어지지 못하고, 여론조사에서의 1등이 당선으로 이어지지 못했던 체험을 교훈삼아 반추해야 된다. 노무현 대통령의 실정으로 얻고 있는 지금의 반사 이익이 대선에서도 반영될 것으로 보는 기대감 역시 어리석다. 여권의 통합신당 신장개업이 대통령의 실정에 자유로울 수 없는 건 사실이다. 하나, 변할 수 있는 것이 또한 민심이다. 더욱이 통합신당의 후보가 누구냐에 따라선 노무현의 실정과는 별개가 될 공산이 없지 않다. 정치는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체다. 한나라당은 이를 간과한 채 지금의 여권이 일시 그로기 상태에 빠진 것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한나라당 경선규정이 시비가 됐다. 이를 개정해야 한다고도 하고 개정은 불가하다고도 한다. 어떻게 하든 그것은 당내 문제다. 그러나 분명한 게 있다. 경선은 어디까지나 수평적 정권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규정은 방법일 뿐이다. 경선규정을 원칙으로 보는 것은 가치판단의 오류다. 정권 교체의 원칙을 위해선 방법은 정황에 따라 고려하는 탄력성이 필요하다. 두 가지가 문제인 것 같다. 일반국민선거인단의 참여비율과 당 후보 선출 시기다. 물론 현행 규정에도 일반 국민의 참여는 있다. 문젠 비율이다. 비율을 더 늘리자는 것과 완전국민경선에 근사치로 가자는 견해가 있다. 선거는 독불장군이 아니다. 상대가 있다. 상대가 되는 통합신당은 완전국민경선제로 개방할 것이 분명하다. 이를 범국민적 후보의 간판 명분으로 삼을 때, 한나라당은 객관적 대응 논리를 어떻게 내세울 것인지 궁금하다. 통합신당은 대선 후보를 9월쯤 내세운다. 이에 비해 한나라당은 당내 규정대로 하면 오는 6월20일까지 뽑아야 한다. 근 3개월의 시차가 있다. 한나라당은 상대 당의 경쟁 후보를 암중 모색하는 가운데, 한나라당 후보는 상대당인 통합신당의 일방적 집중타의 샌드백이 될 것이다. 만약 한나라당 후보가 도덕성이 의심되는 점이 많거나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라면 집중타는 더 난타전이 될 게 뻔하다. 이렇게 되고 나서 성할 후보는 있을 것 같지 않다. 당 후보의 조기 선출이 전략상 과연 좋은 건지 알 수 없다. 대선은 보통 전략적으로 보아 3단계로 구분된다. 오는 12월19일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의 법정 선거운동 기간은 본선이다. 정당별 후보가 선출되고 나서 공식 법정 선거운동 기간으로 들어가기까지는 제2차 예선이다. 당내 후보를 위한 예비 주자들 싸움은 제1차 예선이다. 정치권에서의 제1차 예선은 한나라당 독판이다. 독판이다 보니 언론이 뒤따라가며 조명을 비추는 폴로라이트의 대상이 되어 착각하기 쉽지만 오는 6월이면 사정이 달라진다. 되레 지금의 제1차 예선 독판을 잘못 치르면 2차 예선이나 본선에 가서 빠져 나오기 힘든 함정을 파기 십상이다. 바둑은 무한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한다. 결코 서둘지 않은 것은 지공의 전략이며 환격은 돌려치기 전술이다. 서둘지 않으면서도 공격의 고삐를 재는 게 지공이고, 상대가 내 바둑알을 먹이로 따먹게 만든 그 자리에서 상대의 바둑을 왕창 더 많이 되잡는 전술이 환격이다. 한나라당은 지금 지공과 환격의 노림 수를 당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을 탈당했어도 여권은 역시 건재한다. /임양은 주필

성씨는 인간의 존엄성

아버지는 김씨, 어머니는 이씨다. 여기서 태어난 아이를 어머니(아내) 성씨 따라 이씨로 한 아들이 최씨를 아내로 맞아 낳은 남자 아이를 역시 어머니(아내) 성씨 따라 최씨로 했다. 이 남자 아이가 커서 정씨 아내 사이에 낳은 아이 성씨를 또 어머니(아내) 따라 정씨로 했다. 성씨가 자자손손마다 달라졌다. 자자손손이 아니라 같은 친부모의 형제자매끼리도 선택에 따라 성이 부모 성으로 갈라질 수가 있다. 2005년 3월 개정된 민법 781조(자의 입적, 성과 본) 조항이다. 내년 1월1일부터 시행된다. 헌법재판소가 2005년 2월 현행 민법 조항 1항 ‘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르고 부가에 입적한다’는 규정이 양성 평등에 합당치 않다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려 단서 조문을 넣어 개정한 것이다. 내년에 시행될 개정 조문은 현행 781조 1항 뒤에 ‘다만 부모가 혼인신고 시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고 했다. 그러니까 아버지(남편) 성씨 계승을 원칙으로 하면서 어머니(아내) 성씨도 따를 수 있도록 선택의 문을 열어놓은 것이다. 이런 규정이 사회에서 실제로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는 내년부터 두고 볼 일이다. 물론 첫머리에 든 자자손손의 경우는 극단적인 사례지만 덜 극단적이어도 성씨의 근본을 헤아릴 수 없기는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도 또 남녀 평등에 위배된다며 아예 민법 781조 1항을 삭제하는 민법 개정이 법제처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즉 자녀가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원칙 외에 협의에 의해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있는 예외 규정의 조항 등을 모두 없애버리자는 것이다. 자녀의 성씨 문제에 법률적 규제를 가할 것 없이 부모가 마음대로 하고, 또 아이가 커서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러잖아도 아버지 성씨 계승의 강제규정이 협의규정이 되어 혼선이 우려되는 마당에, 성씨의 법률적 규제 철폐의 임의화는 아예 성씨가 지닌 존립의 의의마저 사라진다. 물론 모·조모·증조모·고조모 더 위로 올라가는 모계로 보면 모든 성씨가 섞여 지금의 성씨는 부계의 반쪽 혈통밖에 안 된다. 그러나 인류가 지닌 성씨가 인간다운 인간의 존엄성인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반쪽 혈통으로나마 핏줄을 가리는 것 또한 인간의 존엄성이다. 인간됨의 존엄성을 외면하는 ‘자의 성과 본’ 조항 삭제의 민법 개정은 일가친척끼리도 성씨가 달라 예컨대 족보도 만들 수 없게 된다. 일상생활은 물론, 법률 관계에도 큰 혼란을 빚어 이만저만이 아닌 사회적 손실을 유발한다. 법제처가 추진하는 이같은 민법 개정은 이미 개정된 민법이 내년 1월1일 시행되기 앞서 재개정하자는 것이다. 시행도 안 된 법을 재개정하는 것은 여성가족부로부터 넘겨받은 남녀 차별 개선의 요구이고, 여성가족부는 무슨 여성개발원의 연구 용역을 통한 보고서에서 작업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여성가족부는 정부의 부처다. 공연한 일 벌이길 좋아하는 호사가라 해도 그렇지, 참 하릴 없는 여성단체고 정부 부처인 것 같다. 서구나 일본 같은 선진국의 여성문화에서도 자녀가 남편 성씨 따라가는 것을 두고 평등에 위배된다는 주장이 있었다는 소린 일찍이 듣도 보도 못했다. 자녀 성씨를 어머니(아내) 성씨로 하는 것은 고사하고, 결혼하면 아내는 남편 성씨를 따라가는 것이 선진국 사회다. 세계에서 남편이 아내의 성씨를 빼앗지 않는 나라는 우리와 중국 뿐이지만, 미국이나 일본 여성계가 남편 성씨로 바꾸는 것을 두고 불평 불만이 있었다는 말 또한 듣도 보도 못했다. 남녀 평등은 남자와 여자의 입장에서 보는 협량한 눈보단, 인간의 눈으로 보는 열린 안목으로 판단돼야 한다. 여성이라고 여성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있고 아들이 있다. 남성도 마찬가지다. 어머니도 있고 딸이 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어떻게 아들과 딸을 두고 여자와 남자만의 입장에서 인권을 차별할 수 있겠는가, 사람의 입장에서 말할 줄 알아야 한다. 남녀의 대립 관계가 아닌 살기좋은 인간사회가 추구돼야 한다. 실질적인 인간사 문제를 찾아 접근해야 하는 것으로 아직도 이런 것이 없는 게 아니다. 예를 들면 ‘이혼 후 300일 이내에 태어난 아이는 전부(전 남편)의 아이로 추정한다’는 민법 조항의 일괄 규정은 재혼 임신의 조기출산을 무시한 여성의 인권 침해다. 법제처의 민법 개정 추진에 주무부처인 법무부가 회의적 판단을 갖는 것은 다행이다. 마땅히 철회돼야 한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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