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비양심’ 집단인가

권력에 중독되면 듣기싫은 말은 싫어한다. 권력에 중독되면 듣기좋은 말만 좋아한다. 동서고금의 이치가 이렇다.

노무현 대통령은 기자실 통폐합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언론이 계속 터무니없는 특권을 주장한다면 정부도 원리원칙대로 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언론이 기자실 개혁 문제와 관련해 보도하면서 진실을 회피하고 숨기는 비양심적 보도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선진국처럼 브리핑룸 이외에 기사 송고실을 아예 제공하지 않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고 사실과 먼 예까지 들었다.

듣기싫은 소리가 많은 자유취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듣기좋은 소리뿐인 보도자료나 발표문만 받아 쓰라는 것이 이른바 정부가 말하는 기자실 개혁이다. 이를 위해 각 부처의 기자실을 없애고 세 군데의 합동브리핑룸으로 대체하는 것에 반발한 국민의 알 권리 박탈, 신종 언론통제라는 비판이 대통령의 비위에 또 거슬렸던 것 같다.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진(秦)나라 시황제의 언론말살이었다. 중국의 여섯 나라를 통일하여 중앙집권제를 최초로 이룩한 시황제는 가혹한 법규를 만들어 반대 세력을 탄압했다. 가장 골치아픈 유생(儒生)들을 붙잡아 구덩이에 생매장하고 유서(儒書)를 모조리 거둬 불태웠다. 당시의 유생들은 여론 조성층이었고 유서는 유생의 전범(典範)이었던 것이다. 진나라는 3세(世) 16년만에 망했다.

조선조 연산군은 폐모론(廢母論)에 항거하는 사간원을 귀찮게 여겨 아예 폐쇄했으나 중종반정으로 그 자신이 폐출됐다. 대원군은 그의 억압정책을 반대한 오피니언 리더의 본산인 전국의 서원(書院)을 철폐했지만 결국은 권좌에서 쫓겨났다.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은 정적 린빠오(林彪)가 즐겨 인용한 공자 사상을 귀족주의로 몰아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을 벌여 숙청했다. 그러나 공자는 오늘날 중국 전통문화의 대부(代父)로 찬란하게 부활했다. 여론을 부정한 이들 권력자의 억압은 언제나 혹세무민, 즉 진실을 왜곡한다는 것이었지만 정작 진실을 왜곡한 것은 그들 권력자들이었다.

최근 남미의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야당 성향의 한 텔레비전 방송을 공중파 방송 면허를 갱신해주지 않는 방법으로 폐쇄했다. 이에 ‘국경없는 기자회’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배”라고 우려를 표명하는 등 국제사회의 비난이 일자 개혁을 자칭하는 차베스 측근의 말이 가관이다. “과거 독재시절에 못하던 대통령의 비판이 자유로운 데 왜 언론탄압이냐”는 것이다. 베네수엘라는 지금 신문방송, 인터넷 할 것 없이 대통령 찬가의 베네수엘라판 ‘용비어천가’ 일색이다. 이를 개혁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노 대통령이 말한 ‘언론의 특권’이란 뭘 말하는 것일까, 중앙 부처에 용무가 있으면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것은 모든 국민의 임의에 속하는 자유다. 기자라고 하여 이같은 자유를 배척당할 이유가 없다. 기자의 부처 출입을 특권으로 보는 생각부터가 특권 의식이다. ‘원리원칙대로 한다’는 원리원칙이 주관적이어서는 원리원칙이 될 수 없다. 보편적 가치성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객관적 판단이 인정돼야 보편적 가치를 지닌 원리원칙으로 성립된다. 정부 부처니까, 정부가 기자실만이 아니고 송고실을 없애도 된다는 생각이라면 원리원칙이 아닌 역리적 반칙이다.

기자실 통폐합을 반대하는 게 “진실을 회피하는 비양심적 태도”라는 근거가 뭔지 의문이다. 언론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진 오래됐다. 대통령은 뭐가 비양심인 지 밝혀야 할 것이다. 오히려 되묻고싶은 것이 있다. 기자의 부처 출입을 제한하면서 자유취재가 가능하다 하고, 기자실을 없애는 것이 알 권리를 더 신장하는 것이라는 게 정부 당국자의 해명이다. 진실과 양심을 걸고 그같은 말을 하는 건지 알고 싶다. 판단은 국민이 할 것이다.

딱하다. 언론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이 어쩌다가 막가는 지경에 이르렀는 지 보기에 민망하다. 언론 역시 굴절됐던 과거가 없지 않다. 부끄러운 치부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정권 들어 권력에 의해 매도당할 만큼 과실이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영원한 권력은 없다. 이 정권이 자행하는 기상천외의 신종 언론통제는 벼슬을 마친 이 정권 사람들의 부메랑으로 되돌아갈 수가 있다. 기요틴은 결국 기요틴을 만든 사람들의 재앙이었다. 그러나 민중사회의 실신을 사는 편협스런 고집이 걱정일 뿐, 다른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권력에 중독된 언론 정책은 단명으로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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