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수와 ‘노무현’

“대통령의 업무 스타일을 두고 말하는 것은 좀 그렇지 않나?!”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수도권규제로 낙후된 오지를 직접 둘러봐달라는 요청에 노무현 대통령의 반응이 이랬다. 김 지사는 거듭 수도권규제완화의 필요성을 강조키 위해 말문을 열었다. 그러자 대통령은 “오늘의 주제만 얘기하자”며 막았다. 지난 번 청와대서 있었던 시·도지사회의에서다. 이 정권 들어 수도권규제완화를 처음 말한 것은 대통령이다. 취임 벽두 전국지 편집국장 초청간담회 자리에서 그랬다. 중간 중간 몇몇 사람의 입에서도 얘긴 나왔다. 최근엔 권오규 경제부총리가 수도권규제완화를 시사했다. 그러나 기대하지 않는 것은 말인즉슨 같은 말이지만 생각은 다르기 때문이다. 김 지사는 벼르고 간 청와대에서 그렇게 돌아온 후 한동안 의기가 좀 소침한 듯 해보였다. 그러나 수도권규제혁파의 열정은 식지않았을 것으로 보아 여전히 기대는 한다. 문제는 그 자신이 발설한 대수도권론으로 인해 수도권규제혁파가 더 어렵게 됐다는 사실이다. 수도권행정협의회의 개념인 것이 대수도권론이다. 과대 수식어의 과대포장일 뿐이다. 결국 김 지사와 함께하는 한나라당 당내에서도 이에 자극을 받아 수도권규제완화를 거부하는 반대세력을 더 키워놨다. 공연한 말로 불이익을 자초했다. 대체적으로 지사의 말이 신중치 못한 것은 유감이다. ‘전투형 도정’의 주문을 예로 든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직장에 나오는 도청 직업공무원들에게 과로사의 순직을 요구하는 것은 아무리 열심히 일하라는 뜻이라도 당치 않은 소리다. “그런 말이 문제가 될 줄 몰랐다”는 도정 질의 답변은 사려가 깊지못한 방증이다. 직업공무원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전투형’이 아니라 ‘신바람’이다. 신바람나게 일하도록 해줘야 한다. 시시콜콜한 간섭은 금물이다. 자신을 수행하는 공무원은 위압적으로 보이는 검정양복은 입지말라는 지시 같은 게 이러하다. 도청 공무원이 도지사의 취향이나 인생관을 강요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개개인의 인격체가 도지사에게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습관적 발설의 ‘재검토병’도 그렇다. 기존의 정책사업을 번복하는 재검토설은 기존의 의사결정기관을 경시하는 소리다. 후임 도지사 한 사람이 그럴 수 있는 위대한 단독 능력이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몇 가지만 사례를 든다. 영어마을 직영 재검토, 첨단산업 지원 재검토, 하남·연천환경교육센터 파주평화누리청소년수련원 재검토 등 이밖에도 있지만 지면상 영어마을만 한 두마디 더 하겠다. 비공권사업이므로 민간위탁해야 한다고 보는 것은 사교육비를 부추기는 단견이다. 경기도가 투자해놓고 업자만 배불리는 것이 민간위탁이다. 그 피해는 이용료 인상을 부담하는 학부형들에게 돌아간다. 연간 270억원의 적자가 미래 인재를 키우는 데 불합리하다고 보는 그 사고방식이 불합리하다. 민간위탁은 장차의 과제이긴 하나 지금은 아니다. 이른바 ‘1류론’은 듣기가 매우 거북하다. 측근을 10여 명이나 인사절차까지 도외시해가며 요직에 특채한 데 이어 도 산하 단체장은 단체장마다 팔도의 외인부대로 채워놨다. 그래놓고 한다는 소리가 “1류로만 진용을 짰다”는 것은 지역사회를 무시하는 심각한 편협증 노출이다. 외부 초빙을 거부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지역사회의 지방자치가 ‘외인자치’가 될 정도로 형평성을 잃어선 임명권자인 도지사의 인식에 결함이 없다할 수 없다. 코드인사를 1류로 여기는 독선은 ‘코드인사는 당연하다’고 우기는 노무현 대통령의 독선을 연상케 한다. 아닌게 아니라 그런 지역사회의 말이 있긴 있다. 김문수 도지사가 노무현 대통령을 닮았다는 것이다. ‘리틀 노’라고도 한다. 뭣이 닮고 뭣이 ‘리틀 노’냐고 하면 “말하는 게 그렇다”는 것이다. 좌중마다 이런 얘기가 있다보면 ‘딴은 맞는 얘기’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많다. 맞는 얘긴지 틀린 얘긴지는 더 두고 보아야겠지만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이건 알아둬야 한다. “당을 보고 찍었더니 사람이 어찌 이상하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당을 보고 찍었다는 것은 한나라당이 잘해서 표를 주었다는 게 아니다. 이 정부로부터 이탈된 민심의 반사이익이 한나라당에 덤으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김문수 후보가 다른 당으로 나오고 다른 후보가 한나라당으로 나왔다면 경기도지사 당선자는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김 지사의 임기는 이제 시작이다. 어찌 됐든 잘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사려가 깊으면 헷갈리는 말이 나올 수 없다. 처신에 좀 더 신중을 기하면 좋겠다. /임양은 주필

盧, 전작권의 노래

“우리 국군을 왜 미군이 지휘해?” “주권 침해다!” “에잇! 자존심 상해… 저네들 속국인가?” 전시 작전통제권을 둔 거부감의 정서 반응은 이런 것이다. 한미연합사 사령관은 미군이 되고 국군은 고작 부사령관에 머무르는 것도 불만이다. 이에 부아를 터뜨리지 않으면 그건 간이 없는 시러베다. 인민을 굶주리게 한 돈으로 화생방 분야의 대량살상 무기개발에 이어 역시 대량살상 무기로 가공할 장거리 미사일을 만들고 핵무기 실험을 서둔다. 북의 군사력은 세계적으로 막강하다. 선군정치를 내세워 강성대국으로 치닫고 있다. 이에 비해 남쪽은 아니다. 국방예산을 상대적으로 절감한 예산을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하고 사회복지비에 보탠다. 미군을 이용한 틈새 여유의 재원인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미군이 왜 이 땅에 있나?” “양코배기 군대를 몰아내자!”고 한다. 자주국방비가 대수냐고 한다. 이는 간이 부은 시러베다. 자주국방의 개념이 뭔가, 자주와 동맹은 동전의 앞뒤와 같아 한쪽만 보아선 안된다. 자주가 없는 동맹은 성립되지 않고 동맹없는 자주는 만용이다. 한미연합사 사령관이 미군이라고 해서 자주국방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의 군 통수권은 건재하다. 전작권이 뭐가 그리 급한가, 자주국방을 한다며 전작권을 돌려달라고 자꾸 보채니까 ‘그럼 옜다 가져가라’고 한다. 부시는 한 술 더 떠 ‘2012년에 가져갈 것 없이 아예 2009년에 가져가라’고 했다. 2012년에 맞춘 이 정부의 국방중기계획이 뒤틀릴 판이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도 50 대 50으로 하자고 한다. 이렇게 되면 연간 부담액이 당장 8천500억원으로 늘어 지금보다 1천700억원이 늘어난다. 이 정부의 ‘국방개혁 2020’에 따르면 총국방비가 무려 621조에 이른다. 국민 1인당 국방비 부담이 1천250만원으로 4인 기준 가구당 5천만원이 된다. 럼즈펠드 미국 국방장관은 괴이한 말을 했다. “북한은 한국에 군사적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은 굉장히 많은 능력을 갖고 있고 능력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추켜 올리기도 했다. “미국은 한국 국민이 주한미군 주둔을 원치 않으면 언제든지 철군할 준비가 돼있다”는 말과 상통한다. 철군설은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가 주한미국대사로 있을 적에 한 말을 칼럼자가 여럿이 함께 직접 들은 얘기다. 국방은 가상의 적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이 총부릴 맞대고 있다. 미국의 자국 군인 주한 배치는 전방 근무의 개념에 둔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터로 보는 것이다. 전쟁 발발은 물론 북의 재남침이다. 그러나 재남침의 우려를 말하면 정신병자로 보는 진짜 정신병자들이 있다.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 남북이 이렇게 왔다갔다 하는 판에 전쟁이라니 무슨 넋나간 소리”냐고 힐난한다. 냉전 꼴통 보수세력이 민족화해를 해치고 남북통일을 해친다며 민족반역자 보듯이 한다. 보수도 좋고 진보도 다 좋다. 참으로 걱정되는 것은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조국통일 이룩하자”는 사람이 있어도 이를 두둔하고 나서는 족속들이다. 심지어는 북이 핵 무기를 갖는 것을 민족자강으로 보아 당연시하기도 한다. 박정희·전두환의 군사독재는 온갖 욕설을 해대면서 군사우위의 선군정치 지배는 민족자주라고 입에 거품을 쏟아가며 칭찬한다. 주목되는 것은 이런 족속들이 전작권을 말하고, 미군 철수를 말하고, 민족공조를 말한다는 사실이다. 무서운 것이 세월이다. 이미 로동당이 수십년 전에 대남사업 전략의 일환으로 설정한 남반부 혁명의 결정적 시기가 성숙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결코 진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보수와 진보, 진보와 보수는 역사 발전의 동반자 관계다. 두려운 것은 진보를 위장, ‘우리식 사회주의’를 추종하는 친북세력이다. 대북지원이나 교류는 어디까지나 동포애의 협력관계이지 대북추종관계는 아닌 것이다. 꽤나 시끄럽게 전작권 소동을 빚은 진앙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지지도가 추락한 10% 대에서 관심을 끌어올릴 이슈로 문제를 제기한 것이 전작권을 둔 평지풍파의 안보장사다. ‘국군을 왜 미군이 지휘하느냐?’는 감상적 분노를 자극했다. 그래도 한미동맹에 이상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거짓말을 하면서도 미국을 이용하자고 하면 사대주의라고 우긴다. 국민의 국방비 부담이 무거워진다. 국민의 살림도, 나라 살림도 말이 아니다. 국민의 가계부채가 545조다. 가구당 3천500만원이다. 국가채무도 산더미다. 지난해말 248조이던 게 올 연말엔 280조, 이 정권 말기인 내년 말엔 300조원이 넘어설 전망이다. /임양은 주필

괴담 ‘바다이야기’

‘바다이야기’의 발단이 기묘하다. “내 집권기에 발생한 것은 성인오락실과 상품권 문제 뿐인데 청와대가 직접 다룰 성격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바다이야기’로 온 나라가 떠들썩 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이런 말이 있고 나서다. 검찰 수사도, 감사원 감사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할 때까지만도 “대통령 역시 알긴 아는 모양이구나…” 이렇게만 여겼다. 도박장화한 성인오락실의 폐해는 한 해, 두 해의 일이 아닌 사회적 고질이다. 언론에서도 수차 거론했다. 이런데도 정부는 까닥도 하지 않았다. ‘바다이야기’는 더 번창하기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대통령은 민초들이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바다이야기’의 내막을 더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바다이야기’는 곪을대로 곪아 어차피 터질 지경이 됐던 모양이다. 청와대는 무작정 ‘게이트’가 아니라고만 하지 말고, 아니면 아는대로 국민에게 공개하는 것이 순리인 데도 고소만 일삼는다. “허위사실을 적시하여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고소 이야기를 하는 김에 한 마디 더 한다. ‘노사모’출신의 아무개 얘기는 그 계통에선 파다한 구문이다. 그 분 역시 명예훼손을 걸어 고소한 것 까진 그럴 수 있다해도 고소 당한 상대가 ‘성명 불상의 네티즌’인 것은 실소를 자아낸다. 성인오락실이란 이름의 도박이 어떻게 공공연하게 자행될 수 있었던 가는 평소의 사회적 의문이었다. 상품권으로 포장된 노름돈이 노골적으로 거래될 수 있었던 것 역시 사회적 의혹의 대상이었다. 사실상의 이런 도박장이 손쉽게 신고만으로 개설될 수 있었던 것 또한 사회적 지탄을 면치 못했다. 이에 영상등급을 내주고 상품권 발행을 하도록 해준 것이 이 정부다. 문화관광부는 영상물등급위원회에, 영상물등급위원회는 문화관광부에 서로 심의기준을 완화해 사행성을 조장시켰다고 우긴다. 이는 그렇다 쳐도 문제의 상품권은 문화관광부 처사가 심히 괴이하다. 상품권 지정 권한을 민간업체에 떠맡기면서 상품권 발행 자격마저 지나치게 완화했다. 법적 근거없이 재량권의 한계를 일탈했다. 피해는 도박 중독증 환자와 그 가정만이 아니다. 오락실 업주들은 비록 눈총을 받긴 했지만 공권이 허용한 업종을 생업으로 삼았다. ‘바다이야기’ 소동으로 장사가 안 된다. 상품권을 없애면 경품으로 상품권이 나오는 오락기도 쓸모가 없어진다. 상품권 발행사에 현금 상환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데도 이게 잘 안 된다. 민중사회에 이래저래 입힌 피해가 실로 막심하다. 정책실패라고 한다. 성인오락이 정책이랄 수 있는 건지 잘 알 수 없다. 설령 정책이라도 그렇다. 정책이 빗나가면 고치는 것이 정책이다. 그런데 고치기는 커녕 더 덧나게 만들었다. IMF가 생각난다. 환란을 가져온 정책 결함의 책임을 강 아무개 경제부총리에 지워 법정에 세웠으나 대법원은 무죄를 확정지었다. ‘정책 실패엔 형사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본 대법원의 판례를 생각해 정책 실패로 돌리는 지 모르겠다.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청와대는 정치공세니, 과장보도니하며 자꾸만 대수롭지 않은 일로 돌린다. 그러한 신경 과민의 대응이 되레 이상하게 보인다. ‘바다이야기’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상품권 발행은 굉장한 이권이다. ‘도박공화국’으로 만든 경위를 단순하게 안보는 민중 정서는 지극히 정상이다. 정책 실패로 보아 달라는 요구는 무리다. 치밀한 로비, 어마 어마한 뒷배가 없고서는 불가하다고 보는 것이 ‘바다이야기’다. 1972년 미국의 워터 게이트는 민주당 선거본부 사무실에 기도한 공화당 사람의 도청사건이다. 닉슨이 시킨 것은 아니다. 도청도 성공하지 못하고 미수에 그쳤다. 이런데도 닉슨이 사임한 것은 미수에 그친 도청 때문이 아니다. 뒤늦게 알고도 부인한 것이 도덕성의 치명적 결함으로 지탄됐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대국민사과를 진솔하게 했더라면 그토록 악화되진 않았을 것이다. 여우굴보다 깊고 이상한 ‘바다이야기’ 속내를 아직은 알지 못한다. 청와대가 거짓말을 한다는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정책 실패든 권력 협잡이든 그냥 넘어갈 순 없다는 점이다. ‘바다이야기’ 괴담의 출연진이 어디까지 번질 것인지를 민중은 지켜본다. /임양은 주필

‘민생대통령’으로 가는 ‘손학규’의 고행

민심의 바다는 고해(苦海)다. 이 고해의 바다에 온 몸과 맘을 던졌다. 민초속에 묻혔다. 함께 땀으로 멱을 감는다. 때론 함께 울분을 터뜨린다. 그러나 좌절을 거부한다. 손을 맞잡고 희망을 다짐한다. 손학규는 이렇게 민심의 복판에서 일하고 먹고 잔다. 열락과 고뇌가 점철한다. 구국제민을 향한 구도(求道)의 길을 걷는다. 지난 6월30일 오전 경기도지사 이임식을 마친 당일 낮이다. 수원역에서 호남선 열차에 올라 승강대서 전송객들에게 미소로 손을 흔들어 보이며 떠났다. ‘100일민심대장정’은 이렇게 시작됐다. 첫 기착지는 지난해 도청 직원들과 폭설 피해복구 봉사를 벌였던 전남 장성군 황룡면이다. 도착하자 마자 대파 다듬기로 첫 날을 보냈다. 대충 아는대로 꼽아본다. 해남·보성·광양·여수 등 전남지역에 이어 전북 김제·세만금간척지·고창, 그리고 충남 보령·홍성·당진, 경남 진주, 충북 단양·음성·충주, 강원 인제·강릉·삼척·속초, 제주도 등지를 들렀다. 이밖에 경북지역 등도 탐방한 것으로 아는데 어딘 진 잘 모르겠다. 그에게 올 여름은 유랑의 계절이다. 덥수룩한 수염, 점퍼 운동화 차림에다 배낭 하나만 덜렁 둘러맨 것이 전부다. 손이며 팔 다리는 온통 할퀴고 베이고 부딪쳐 상처투성이다. 두 차례에 겹친 수해는 시련을 더 했다. 7월13일 첫 수해 땐 충남 보령 방직공장에서 장갑 코팅작업 하다가 경남 진주로 달려가야 했다. 두번 째 수해 땐 충북 단양, 강원 인제서 복구작업을 벌였다. 어떤 사람들처럼 카메라에 찍히고 나면 삽을 놓는 시늉만 내는 작업이 아니다. 수재지역 세 군데서 꼬박 1주일을 수재민들과 같이 보냈다. 망가진 비닐하우스를 바로 세우기도 하고, 매몰된 흙더미를 삽으로 파내기도 하고, 제방을 응급복구하기도 했다. 진주에선 남강제방, 단양에서는 충주댐의 문제점이 뭔가도 파악했다. 수해복구에 열중한 구리빛 얼굴에 비지땀 범벅이 된 그를 보고 누가 (민선 경기)도지사를 지낸 이로 보겠는가, 삼척탄광 지하 170m 막장서 채탄 광원으로 진종일 일해 탄가루 범벅이 된 그를 보고 누가 (보건복지부)장관을 지낸 이로 보겠는가, 속초앞 동해의 고깃배 새벽 어부가 된 그를 보고 누가 3선 국회의원을 지냈다고 보겠는가, 제주 감귤농장의 돼지치기 농부가 된 그를 보고 누가 (옥스포드대학)정치학박사의 전직(인하대·서강대)교수라고 보겠는가, 그러나 민초를 스승삼아 민초의 민생현장으로 다가가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손학규, 그는 세상이 다 아는 한나라당 차기 대권주자의 한 사람이다. 그래서 흔히 있는 쇼라고 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하지만 세상에 이런 쇼는 없다. 쇼를 이토록 진솔하게 하는 정치인은 일찍이 못보았다. 그의 절반에 절반만큼도 할 엄두를 못낼 사람들 입노름은 입만 가지고 노는 정치인의 시새움이다. 경기도지사 재임 중 지구를 14바퀴 도는 해외 원정으로 100개 기업에서 138억달러의 외자를 유치, 약 5만명의 일자리를 직간접으로 만들어낸 민생도백(民生道伯)이다. 그리고 민생도백이 민생대통령으로 가는 민생수업이 바로 ‘100일민심대장정’이다. 구변정치가 아닌 실물정치를 추구하는 실사구시의 민생정치인 것이다. 조선조 후기 정조대왕은 실사구시의 실학사상을 꽃피워 르네상스시대를 이룩한 계몽군주다. 불행히도 의문의 병사(病死)를 하는 일 없이 더 재위했더라면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보다 100년 앞서 개화되어 역사가 달려졌을 것이다. 주관적 공리공론을 배제, 객관적 과학실체를 후생(민생)에 접목하는 것이 실사구시며, 형식화된 언어본위를 떠나 직관화된 경험본위를 추구하는 것이 실학사상이다. 손학규의 민생정치는 곧 정조대왕의 실학정치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민생의 고해에 몸과 맘을 던진 고행(苦行)은 또한 이 시대의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솔선수범의 실천능력이다. 보편가치에서 특수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조개가 거친 모래를 머금어 영롱한 진주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체험적 ‘100일민심대장정’이 내일이면 반환점인 50일 째가 된다. 농어촌 등 벽지 위주에서 대도시권의 민심탐방으로 가는 걸로 들린다. 그간의 민심탐방에서 그는 뭣을 얻었을까, 잘은 몰라도 평생의 긍지와 함께 거듭나는 정치인생을 실감할 것이다. 그렇지만 예정된 고행의 길은 아직도 험하고 멀다. 몸도 맘도 쇳덩어리란 생각을 갖는다. 구도의 남은 반환점도 건강한 몸과 맘으로 마쳐 민생의 고해를 해탈하는 득도(得道)가 있기를 바란다. 입 놀음 정치에 넌더리가 난 많은 국민들의 기대가 높다. /임양은 주필

盧 대통령이 뜬다고?

이 정권의 출범 초기다. 당정 분리의 시도는 신선해 보였다. 집권당 대표를 겸직한 역대 대통령만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평당원대통령’은 분명히 이채로웠다. 3년 여가 지났다. 유감이다. 당정 분리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닌 역기능을 보았다. 무엇보다 신선해 보였던 기대가 무산됐다. ‘평당원 대통령’은 역시 평당원이 아니다. 막강한 당의 ‘상왕’이다. 리모컨(측근)으로 또는 교지(말씀 서신) 등으로 당을 통제했다. 좋은 시기, 나쁜 시기에 따라 당 간의 거리를 고무줄처럼 적당히 줄였다 늘렸다 하기도 했다. ‘평당원 대통령’은 당에 책임지지 않으면서 대통령의 영향력으로 당을 지배하는 청와대 편의장치로 전락했다. 당 지도부와 자릴 함께한 8·6 청와대 오찬회동 또한 같은 맥락이다. 이 모임은 5·31 지방선거, 7·26 재보선 완패에 이은 김병준 교육부총리 논문의혹, 법무부 장관 인선파동을 계기로 가졌다. 이에 앞서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두 번이나 낸 대통령 면담 요청을 청와대는 묵묵부답으로 거부했다. 이래놓고 오찬회동 명목으로 당 지도부를 청와대로 부른 것은 사실상 노무현 대통령의 소집이다. 좌중은 김 의장에 대한 대통령의 질책성 면박이 있었다고도 하고, 김 의장의 직언 개진이 있었다고도 전한다. 긴장된 분위기였던 건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이런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대통령의 선장(차기 대권후보) 외부영입론과 (임기후의) 백의종군설이다. 청와대는 외부영입론은 원칙을 말한 것이라며 애써 의미를 축소하지만 단순히 개방형국민경선제(Open primay)를 말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선장을 외부에서 데려오면서 여당 중심의 정계개편을 모색하는 것으로 보는 관측이 있다. 눈여겨 볼 대목은 정동영 전 당의장과 함께 당내 차기 후보군으로 분류되어온 김근태 당의장 면전서 외부영입론이 ‘평당원 대통령’ 입에서 나온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당내 후보군을 부인하는 의식적 발언으로 보아지는 것이다. 그럼, 의중의 외부 사람이 있느냐는 것과 있으면 누구냐는 것, 이도 아니면 영입론은 정동영·김근태 두 전·현 의장이 아닌 제3의 내부 사람을 우회적으로 꼽는 연막일 공산이 높다. 대통령 임기를 마쳐도 탈당치 않겠다는 백의종군설은 좀 황당하다. 고향인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 퇴임하고나서 살 집을 짓기위해 땅을 물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첫 귀향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퇴임한 ‘평당원 전직대통령’으로도 당에 머물겠다면 서울에 눌러 앉는단 것인지, 귀향한단 것인지, 두 군데서 살겠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백의종군해서 더 할 것이 뭐냐는 것이다. 선장영입론, 백의종군설은 어떤 복선이 깔린 가운데 당을 확실히 장악할 의도인 경고성 메시지로 해석된다. 남은 재임기간 약 1년반에 레임덕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내가 싫어) 같이 당을 못하겠으면 못하겠단 사람이 당을 떠나야 한다는 것으로 전해진 게 그같은 관측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정치는 생명체다. 의도대로 되는 것도 있지만 안되는 것도 있다. 대통령도 예외일 순 없다. 더욱이 임기 말로 들어선다. 아무리 레임덕을 허용치 않고자하는 의지를 가져도 정치적 자연현상을 극복하는 덴 한계가 불가피하다. 외부선장론과 백의종군설은 함수관계다. 전자가 없는 후자는 있을 것 같지 않다. 만약 의도대로 되지않는 불가피한 상황이 오면 대통령이 당을 떠날 것으로 보는 전망을 배제할 수 없다. (지금은 비록 지지도가 20%지만) 언젠간 뜰날이 있을지 모른다는 대통령의 말은 흥미롭다. 가수 송대관씨가 생각난다. 노래 한 곡으로 ‘가수왕’까지 오른 게 ‘해뜰날’이다. (전략) ‘뛰고뛰고 뛰는 몸이라 괴로웁지만/힘겨운 나의 인생 구름 걷히고/산뜻하게 맑은날 돌아온단다/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후략) 이 노래가 선풍적 인기를 누렸던 것은 빈곤해방이 있었던 1970년대 경제성장의 민중 정서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뜰 때가 있을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선장영입론이나 백의종군설은 백 번을 강조해도 뜨지 않는단 사실이다. 민중은 그런 것엔 감동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떠서(레임덕을 크게 줄일 수 있는 것은) 정치술수에 있지 않다. 경제회생에 있다. 실패투성인 이념경제의 실험을 끝내야 한다. 전망이라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미래를 두고 혼자만 “멀리보자”는 것은 선무당의 주술이다. 조여서 어려워진 민생을 피게하기 위해서는 풀어야 한다. 길은 정치가 아닌 경제에 있다. 김 당의장이 회동에서 밝힌 규제 완화 요청은 근접한 처방이다. /임양은 주필

거머리 개울과 콘크리트 벽

댓가지 끝에 철사를 둥근 모양으로 만들어 꽂은 잠자리채에 거미줄을 걷어 감는다. 동네 집집마다 다니며 초가 구석 구석에 거미가 쳐놓은 거미줄을 겹겹이 걷어 어지간히 감기면 개울로 달리는 발길이 쏜살같다. “휘이! 휘이!!” 신명이 난 소년의 흥얼거림이다. 개울가를 맴도는 고추잠자리를 향해 휘두르는 잠자리채 거미줄 바탕엔 영락없이 걸려 꼼짝달싹 못하는 고추잠자리가 다섯 마리고 여섯 마리고 이어진다. 손가락만한 왕잠자리가 걸려들면 꼬리를 실에 매달아 날리며 수컷을 유인하기도 한다. 걸친 것이라고는 하나뿐인 잠방이를 동댕이치듯이 벗어던지고 물에 첨벙 뛰어드는 것은 잠자리 잡기에 고만 싫증이 나고서다. 개헤엄을 치다가 발가락 새를 연방 파고드는 피라미 떼를 물이 옅은데로 몰아 돌맹이로 물살을 쳐 기절시키기도 하고 맨손으로 잡기도 한다. 한참 이러다 보면 사타귀고 어디고 여기 저기에 달라붙은 거머리를 보게된다. 모래를 한 옹큼 쥐어 “요놈의 새끼…”하며 싹싹 문질러 떼어내고는 피식 웃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해가 뉘엿뉘엿 져 어머니가 마을 어귀에서 들판에 대고 아무개야! 하고 대여섯 번 넘어 찾는 소릴 듣고 나서다. 꽁보리밥이다. 호박잎에 된장국으로 저녁밥을 먹고 나면 마당 대나무 평상이 식구들을 기다린다. 마른 풀섶 연기로 모기를 쫓아내는 모깃불, 갓 평상에선 그날 하루의 식구들 담소가 벌어진다. 하늘엔 별이 총총하다. 삶은 강냉이 고구마는 밤참이다. 수박이며 참외가 나오기도 한다. 샘에서 막 걷어올린 수박 참외는 냉기가 감돌만큼 시원하다. 뒤뜰 감나무가 보일 정도로 나무창살 통풍이 잘되는 광은 샘과 마찬가지인 또 하나의 냉장고다. 소년은 대청마루에서 감나무를 보며 늦가을 홍시를 생각하다가 잠들어 늘어지게 한잠 자고는 개울로 달렸던 것이다. 초저녁 평상 정담의 밤참 파티엔 더러 마실나온 이웃 남정네며 아낙네가 자릴 같이 하기도 한다. 모깃불 연기에도 날아든 억센 모기는 더위를 식히던 대나뭇살부채로 ‘탁’ 쳐내곤 한다. 알듯 모를듯한 어른들 얘기를 들으며 웬지 자꾸 시선이 쏠리는 측간쪽이 무서워 소년은 어른들 틈새를 비집고 평상 복판으로 파고 든다. 어느틈에 잠들어버린 이튿날 아침 깨어보면 평상이 아닌 방이다. 세상이 달라졌다. 거미줄도 보기 어렵고 거머리가 살 수 있는 개울도 없다. 삶은 강냉이나 고구마 보다는 피자에 더 맛들려 있다. 평상 정담은 자취를 감췄다. 텔레비전이 가족간의 대화를 빼앗았다. 이웃은 이방인이 됐다. 냉장고가 없어도 냉장할 줄 알았던 지혜는 간곳 없고, 그럴 수 있는 생활환경 또한 아니다. 농촌 도시 할 것 없이 다 마찬가지다. 선풍기를 호사롭게 알았던 시절에는 부채 하나로 여름철 더위를 이겨냈다. 부챈 이제 유물이다. 선풍기가 부채만큼 흔해지고 에어컨이 보편화되었다. 그래도 덥다고들 야단이다. 더운 건 맞다. 밤이나 낮이나 찜통 더위다. 더워야 한다. 장마가 길어져 올 더위는 짧다. 삼복엔 논 물이 쩔쩔 끓을만큼 더워야 오곡백과가 무럭 무럭 자란다. 올 여름은 중복을 지나고나서 비로소 찜통 더위가 시작됐다. 지구의 온난화 탓이라지만 현대 생활환경이 더위를 더 타게 돼 있다. 초가집이나 기와집이나 벽체는 황토벽이던 것이 시멘트벽 일색이다. 돈주고 황토찜질방에 가는 세태다. 이토록 아파트, 단독주택 할 것 없이 어딜 가도 콘크리트 더미에 묻혀 산다. 또 흙을 밟을 수 없다. 어딜가든 아스팔트 포장도로 뿐이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반사열기의 거대한 가마속에 더 찌드는 것이 현대인이다. 생존경쟁의 급진화는 심성의 상대적 피폐를 가져왔다. 생존경쟁이 지금보다 만성적이던 시절보다 마음의 여유가 그래서 좁아졌다. 뭣이든 빨리 시작하여 빨리 끝내려고만 하다보니 조급증이 심해졌다. 스트레스증후군에 시달리는 것이 현대인이다. 더위에 대한 내성이 약해져 찜통 더위는 곧 짜증인 것이다. 그러나 짜증을 낸다고 더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피서 가는 것도 좋지만 짜증을 스스로 달랠 줄 아는 생활의 지혜 역시 마음의 피서법이다. 산하가 오염된 진 오래됐다. 아이들이 뛰놀 수 있는 개울을 산업사회가 빼앗았다. 자연을 되찾아야 하는 것은 자연은 모든 생명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거머리가 사는 개울이 많으면 더 건강한 여름을 난다. /임양은 주필

말꾼, 쌈꾼만 있다

말꾼, 쌈꾼, 일꾼이 있다. 우린 지금 어떤 ‘꾼’ 속에서 사는 것인 지 생각해 본다. 민중은 아우성이다. 되는 장사가 없다고 야단들이다. 싹수도 안보인다. 건설경기가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침체상을 드러내면서 2분기 성장률이 급락, 더 수렁 깊은 하강 국면을 예고한다. 한국은행의 경제지표다. 원인은 처방이 잘못된 부동산 규제에 있다. 쇠뿔을 고치려다가 소를 죽이는 형국이다. 민초는 빚투성이다. 금융부채만도 가구당 평균 금액이 3천500만원 대다. 이 몇년 새에 약 60%가 늘었다. 나랏빚도 늘었다. 2002년말 134조원이던 나랏빚이 지난해말 248조원이 됐다. 약 85%가 불었다. 이 또한 가구당 금융부채 금액을 웃돈다. 국민의 세금은 갑근세 등이 크게 느는 등 조세부담률이 20.2%로 약 0.7% 포인트가 높아졌는 데도 나랏빚은 빚대로 느는 심각한 재정 악화를 가져왔다. 나라나 가계나 빚으로 살림을 꾸리는 빚더미 속에서 산다. 엄청난 나랏빚은 나라살림을 잘못산 대통령이 갚는 게 아니다. 이러고도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면 전직 대통령 예우 받으며 잘 먹고 잘 산다. 민중만 그가 남긴 나랏빚 갚으랴, 가계빚 갚으랴 허리가 더 휠 판이다. 이러고도 말은 번드레하게 한다. 대통령이란 사람은 ‘크게 보아 경제가 잘돼간다’고 했다. 경제부총리란 사람은 ‘그래도 좋아질 것’이라고 한다. 말꾼들이다. 일꾼은 없고 말꾼들만 설쳐대는 세상이다. ‘인사청탁하면 패가망신케 한다’더니, 이제 와서는 정부 산하 업체 자리란 자리는 다 낙하산부대로 채워 놓고는 ‘코드인사가 일을 더 잘한다’고 우긴다. 말 놀음이 마침내는 국무회의가 장관들 말 연습시키는 자리로까지 전락했다. 국회에서 ‘미국은 오류가 없느냐’고 반문하라고 예시하는 등 교지내린 이해찬식 되받아치기 답변교육을 제대로 이행못하는 장관은 이제 목이 위태로울 판이다. 미사일을 둘러싸고 사이가 더 벌어진 미국과도 그렇다. 미국은 다만 서로가 이용할 뿐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상대지만 더 큰 오류를 저지른 건 말꾼이다. ‘미사일이 아니고 위성일 것’이라며 헛다리 짚어놓고 부리는 안방 허세는 모양만 사납다. 일꾼의 말이 아닌 말꾼의 말이기 때문이다. 일꾼 아닌 쌈꾼의 말은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것이 특성이다. 불법파업을 일삼는 노동단체에 국민 세부담의 뒷돈을 대주는 것은 그 사례 중 하나다. 전교조 조직이 북의 ‘현대조선력사’ 책을 교재용 통일자료집으로 베껴쓴 이상한 풍조가 나온 것도 종잡을 수 없는 이상한 쌈꾼의 소치다. 공권력의 무중력 상태는 대북관계의 혼돈을 유발했다. 동포애의 대북지원이 인도주의를 넘어 맹종적 추종으로 가는 것은 그 종착역 이름이 뭣인지를 의심케 한다. 미사일 이후 쌀과 비료 지원을 중단한 것은 국민정서를 고려한 눈치보기일 뿐 무슨 구실로든 곧 주지못해 안달인 기색이 역연하다. 열린 민족공조가 아닌 닫힌 민족공조로 가는 대북 영합은 남쪽도 북과 마찬가지로 국제사회의 고립을 가져온다. 그 종국은 참담하다. 열린 민족공조를 거부하는 쌈꾼의 부단한 도전은 이래서 경계의 대상이다. 말꾼들은 인위적 경기부양책을 안쓴다고 한다. 권력의 우산 아래에서 저네들은 배가 부르기 때문이다. 하긴, 그렇다. 민중이 못사는 것은 돈 벌이가 안되는 탓이다. 굳이 인위적 경기부양책을 쓰기보단 인위적 기업규제를 푸는 것이 제대로 가는 처방이다. 뛰어난 기술경쟁력과 인적자원을 지닌 국내 기업이 권력의 과잉규제로 묶여있는 것을 풀어주면 설비투자의 활성화로 문젠 절로 해결된다. 이토록 부당하게 꽁꽁 묶인 각종 기업규제를 푸는 게 정당하다고 해도 쇠귀에 경 읽기다. 규제가 정당하고 해제는 부당하다고 보는 말꾼, 쌈꾼들이다. 이념경제 신앙의 주술에 중독된 사람들이다. 사회 양극화도 못사는 사람을 잘 살게 끌어올리는 양극화 해소가 아니고 잘사는 사람을 못살게 구는 것을 양극화 해소라고 한다. 공부 잘하는 학생을 끌어내려 공부 못하는 학생 만드는 것을 평등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경쟁은 기회 박탈이고 무경쟁이 기회의 균등이라고도 한다. 권력자들만 잘 사는 게 아니고 민초들이 잘 살아야 할 터인 데 걱정이다. 공부 잘하는 학생의 성장을 저해하는 평등관은 경쟁이 더욱 치열한 미래의 국제사회에선 북녘처럼 식량 거지노릇 하기가 십상이다. 일꾼은 없고 말꾼과 쌈꾼 뿐인 중심에 노무현 대통령이 딱 서 있다. /임양은 주필

김문수 도정과 ‘선거공약’

팔당호대책추진단, 수도권교통개선기획단, 뉴타운사업기획단 등이 가동되고 있다. 팔당호수질 1급수 개선, 뻥뚫린 1시간권 경기도만들기, 서울 강남 대체의 자족형 뉴타운건설 등의 선거공약 이행을 위해서다. 수도권정비계획법 철폐, 대수도권 건설, ‘케어맘’(영아돌보미)사업 등 공약도 있다.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크고 작은 선거공약은 이외에도 영어마을 민간위탁 등 90여 가지에 이른다. 경기도청은 이같은 선거공약의 실천 방안을 놓고 머리를 맞대가며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해당 부서의 공무원은 물론이고 외부의 전문 인력도 초빙됐다. 취임 100일이 되는 오는 10월10일까지 선거공약 이행백서 같은 걸 발표할 요량인 것 같다. 그런데 문젠 선거공약이 능사가 아닌데 있다. 노무현 정권은 선거공약으로 나라를 멍들게 했다. 이행해서 좋은 정치개혁 같은 공약은 팽개치고, 지방균형발전론 따위의 허구성 공약에만 매달렸다. 김문수 도정 역시 노 정권처럼 잘못된 공약까지 선거공약임을 내세워 절대시하는 아집을 가져서는 안된다. 김문수 도지사 후보의 선거공약 90여 가지를 다 알고 표를 준 유권자는 없다. 특히 간판 공약으로 내건 굵직한 공약 몇 가지만 해도 그렇다. 유권자들이 이를 다 좋게 보아 김문수를 도지사 시킨 것은 아니다. 선거공약 중엔 유권자마다의 입장에서는 좋게 본 것도 있지만, 안좋게 여긴 게 있어도 크게 보아 찍어준 표가 모아져 도지사가 된 것이다. 도지사 당선을 선거공약의 포괄적 인준으로 보는 것은 인식의 비약이다. 김문수 도지사 후보의 선거공약은 매니페스토운동의 영향인지 대체로 객관성이 없다할 순 없다. 그렇다고 공약이 걸러진 것은 아니다. 도청 밖에서 본 입장과 도청 안에서 본 입장은 또 다를 수가 있다. 미흡하거나 불가한 선거공약은 처음부터 과감하게 폐기하는 선별의 용기를 갖는 것이 선거공약을 제대로 이행하는 자세다. ‘경주돌이라고 다 옥돌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당선자의 선거공약이라고 다 ‘옥돌’은 아닌 것이다. 수도권규제해소는 현안의 과제다. 이를 위한 정치적·행정적 노력도 많이 해왔다. 논리 피력도 할 만큼 했다. 김 지사가 내놓은 당위설은 처음이 아니다. 김 지사는 처음이지만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정부에 들려 주었다. 그랬으나 쇠귀에 경 읽기다. 수도권행정협의의 개념을 기실 뛰어 넘지 못하는 大수도권론은 말잔치다. 공연한 구실만 주었다. 이른바 비수도권 지방이 똘똘 뭉쳐 수도권규제완화의 반대에 나섰다. 한나라당 국회의원들까지 가세하여 같은당 출신의 김문수 경기도지사를 압박하는 형상이 됐다. 경기개발연구원에 규제개혁추진단을 두어 대처할 모양이지만 경기개발연구원이 그동안 동면한 것은 아니다. 이미 개발해 놓은 수도권규제완화의 大이론이 정립돼 있다. 문제는 정치적·지역적 장벽에 겹쳐 같은 야당까지 완화는 커녕 더 규제해야 한다고 나선 판국이 된 사태 악화를 타개하는 해법이 무엇이냐에 있다. 팔당댐 1급수 수질개선을 마다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역시 난관은 방법이다. 준설작업은 여러가지 방안 중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경안천 준설만으로 효과가 있을 것인지는 미지수다. 더 깊은 검토가 요구된다. 뻥 뚫린 경기도교통소통을 위해 남북 그리고 동서로 2개축 2개 순환도로를 만드는 교통망 구축은 수십조원이 든다. 재원 조달이 관건이다. 무슨 돈으로 하느냐도 문제이지만 이 돈 같으면 차라리 경전철 사업을 추가하는 게 더 효과적이 아니냐는 의문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도내 신도시 개발은 건설부는 좋아할지 몰라도 경기도 지역사회 입장에선 달갑지 않다. 유입 인구를 끌어 들이고 난개발을 부추긴 것이 신도시 개발이다. 강남을 대체할 신도시를 판교말고 여러 군데에 또 세워야 할 구체적 연유가 뭣인지를 잘 모르겠다. 강남 대체의 신도시가 모자라 아파트가 도내에 무계획적으로 들어선다는 말은 설득력이 의심된다. ‘케어맘’은 취지는 좋지만 난점이 많다. 빈차 태워주기의 ‘카풀’이 이행안된 이유는 사고가 날 경우 배상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갓난 아기는 면역성이 낮아 걸핏하면 병치레 하기가 쉽다. 이에 대한 책임한계를 명확히 하기도 어렵다. 말썽이 다분한 뒷탈의 소지를 극복할 방안이 뭣이냐가 선행 과제다. 영어마을 민간위탁은 결과적으로 빈곤 가정 자녀의 추방으로 이어진다. 도의 재정에 비추어 연간 270억원의 적자를 당분한 보전하는 것을 낭비나 형평성 상실로 보는 것은 곤란하다. 몇가지 예시한 이상의 지적은 고려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는 선의의 충고다. 문제점이 많은 공약이라고 하여 반드시 그만 두라는 건 아니다. 고정 관념의 파괴가 필요하고, 좋은 공약 일수록 어려움이 많지만, 현명한 취사선택 또한 있어야 하는 게 선거공약이 지닌 본질이다. 무엇보다 실천방안이 객관화돼야 신뢰가 담긴다. 좋은 이행백서가 나오길 기대한다. /임양은 주필

일본, 원래 ‘선제공격’ 좋아한다

신라 백제 연안에 출몰, 민가의 인명 살상과 노략질을 일삼은 왜구는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들어서도 나라의 재앙거리였다. 고려말 더욱 극성을 부린 왜구 소탕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이성계다. 조선 세종조에서도 대대적인 왜구 소탕이 있었다. 하지만 왜구의 노략질은 이후에도 16세기까지 근절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왜구는 이 땅에서 7세기경부터 천년동안 살상과 약탈을 벌여왔다. 해적노릇한 일본의 민간 도적 떼들이 왜구다. 임진왜란 7년 전란은 일본의 막부(幕府), 즉 군벌 조정의 침략전쟁이다. 왜구의 출몰이 비공식 침략이랄 것 같으면 임진왜란은 공식 침략전쟁인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비공식 침략이 왜구에 그친 것은 아니다. 조선 고종조에 자행된 일본 낭인 패거리의 민비시해는 또다른 유형의 비공식 침략이다. 일본이 껄끄러운 조선의 정적을 유례없는 궁중 침입으로 제거한 이 선제공격은 일본 칼잡이 건달패들 소행으로 돌려 발을 뺀 것이 당시 일본 정부가 취한 내숭이었다. 공식 침략은 그 후 1910년에 강제로 조인된 한일합병조약이다. 돌이켜 보면 왜구의 출몰에서 임진왜란, 민비시해, 합병조약에 이르기까지의 일본 사람들이 저지른 공식·비공식 침략은 언제나 선제공격이었던 것이 공통된 특징이다. 돌아보면 나라밖에서도 일본은 그랬다. 중·일전쟁의 중국 침략 구실이 된 1937년 노구교 사건은 일본군대가 중국군대에 선제공격의 발포를 한 것이 발단이었다. 베이징 교외 영딩장(永定江)에 금나라 때 세운 대리석 다리가 그 수려함과는 달리 중·일전쟁 발발의 무대가 됐고, 중·일전쟁은 마침내 1941년 12월8일 제2차세계대전으로까지 번졌다. 제2차세계대전이 시작된 이날 미명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도 역시 예의 선제공격이었다. 노구교사건에선 일본군이 중국군을 선제공격하고는 반대로 중국군이 먼저 발포했다고 뒤집어 씌웠던 것에 비해 진주만 기습은 노골적인 선제공격이었던 것이다. 도조히데키(東條英機) 일본 정부가 루스벨트 미국 정부에 선전포고를 통고했을 땐 일본의 해군 항공기 편대, 잠항정 군단이 미 태평양함대를 거의 궤멸시켰을 무렵이다. 전통적으로 일본의 사무라이(武士)들은 예컨대 프랑스의 총사(銃士)와 달랐다. 칼싸움을 하다가 상대가 검을 놓치면 다시 쥐도록 한 것이 총사도였던 것과 달리 사무라이는 아니다. 검을 놓치는 것은 곧 죽음이었던 건 선제공격 정신이 사무라이의 무사도였기 때문이다. 중국 손무(孫武)의 손자병법 설흔 여섯가지 계략 중 삼십육계(三十六計)는 도망가야 할 땐 주저하지 말고 도망칠 줄 알아야 한다는 계략이다. 이와 반대가 되는 선제공격 또한 손자병법의 설흔 여섯가지 계략 중 하나이긴 하나 삼십육계와 마찬가지로 상책은 아니다. 삼십육계는 패전, 선제공격은 침략의식이 짙다. 북의 미사일 도발을 두고 나온 아베 일본 관방장관의 대북 선제공격론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의 선대와 조상들이 무척 즐겼던 침략 근성의 전략이다. 우리가 선제공격론을 용인할 수 없는 것은 헌법의 수호의무때문이다. 일본 사람이 말한 선제공격은 북을 말한 것이지만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는 것이 대한민국 헌법의 영토(3호) 조항이다. 즉 아베 일본 관방장관의 대북 선제공격론은 헌법상 대한민국 영토에 대한 선제공격인 것이다. 미사일 도발에 대한 응징은 마땅하지만, 일본의 망발은 대북 응징과는 별개로 대처해야 하는 이유가 이에 있다. 일본은 이미 군사대국화 하였다. 자위대 예산이 연간 400억 달러로 해마다 5~7%씩 증액해 왔다. 첨단기술 발달로 인한 첨예무기의 군수산업은 세계적이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는 방안으로 일본의 재무장을 은근히 돕고 있다. 평화헌법 위장만 걷어내면 일본의 육상·해상·항공자위대 30만 병력은 세계 3위의 육·해·공 황군(皇軍)으로 당장 면모가 바뀐다. 1950년대초 6·25 한국전쟁으로 군수산업의 재미를 톡톡히 본 일본이 이젠 북의 미사일을 이유로 잠재워 온 군사대국 근성을 노골화하고 있다. /임양은 주필

김 지사, ‘정치와 행정’

절대주의시대엔 정치와 행정이 분화되지 않았다. 분화된 건 근대민주주의 들어서다. 행정이 ‘행정학’의 새로운 학문 분야로 독립한 것은 근대 이후인 현대다. 이 과정에서 정치와 행정의 관계에 이원론이 일원론으로 갔다가 신이원론이 나오는 등 학설이 분분하다. 경기도지사 자리는 지방정치의 정상이면서 중앙정치와 연계되는 다구도 역학 관계를 가졌다. 김문수 신임 경기도지사 역시 이에 예외일 수는 없다. 하지만 도지사 자리가 정치인인 것 만은 아니다. 행정인이다. 지방행정, 그도 지방자치행정의 수장이다. 정치가이면서 행정가의 자질을 요구받는 것이 광역단체장이다. 김문수 경기도지사에게 지켜보고자 하는 게 있다. 도정은 지방행정의 요인이 대부분이다. 지방정치의 요인은 거의 없다. 지방행정과 중앙정치는 거리가 멀다. 김 지사가 도청 직원들에게 행여라도 정치행위를 강요하는 것은 금기사항이다. 지방행정은 행정행위를 하는 기관이며 행정행위는 어디까지나 법규에 의존한다. 새삼 이런 얘길 하는 것은 만일의 노파심 때문이다. 삶의 상당 부분을 들국화처럼 살았다. 들국화도 잡초라면 잡초다. 1996년 4월 제15대 국회에 입성하면서 비로소 제도권의 전환을 가졌다. 당시 부천 소사구 선거구는 일대 격전지였다. 노동운동가 김문수는 떠오른 별 박지원을 우여곡절 끝에 눌렀다. 누구보다 안타깝게 여긴 것은 김대중이다. “지원이가 떨어졌어? 됐어야 하는 건데…”하고 수차 되뇌었다. 이젠 3선 국회의원 출신의 도백이다. ‘특위’ 위원으로 날카로운 송곳활동을 했다. 텔레비전 토론에서는 정곡을 찌르는 달변으로 명성을 떨쳤다. 정치인으로서는 명성이나 행정경험은 제로다. 행정을 우격다짐의 정치로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리해서 일이 된다면 그래도 괜찮다. 일은 되지 않으면서 도청 직원들만 피곤하게 만든다. 기관장이 바뀌면 다시 새롭게 출발하고자 하는 긴장을 갖는 것이 공무원 사회다. 시동이 걸린 엔진을 신명나게 돌아가도록 하면 제풀에 가속도가 붙는다. 반대로 엔진을 꺼뜨려서는 좀처럼 불꽃을 되살리기가 어렵다. 이미 그간 알려진 일들을 여기에 중복해 일일이 들 것은 없다. 김 지사의 신임 청사진은 포괄적으로 보아 의욕적이다. 견해를 같이 한다. 문제는 현행 법규에 걸린 게 많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사안별로 전문기구의 싱크 탱크를 둔 것은 잘 했다. 난해한 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면 좋은 줄을 몰라서가 아니고 고양이 목에 어떻게 방울을 다느냐다. 해법은 논리개발과 접근법을 새롭게 찾아내는 데 있다. 김 지사가 매사에 직접 행정을 할 것 까진 없다. 도청 직원들의 행정능률이 극대화하도록 신바람 나게만 해주면 된다. 중앙정치에 때로는 방패가 되고 때로는 창이 되는 것은 김 지사의 몫이다. 취임사에서 밝힌 ‘분서갱유론’은 충격이다. ‘수도권정비계획법’을 비롯한 이 정부의 규제 강화를 겨냥한 ‘분서갱유’ 비판은 사실적 비유가 아닌 의제적 비유는 능히 가능하다. 김 지사의 정치적 역량과 행정적 역량은 별개다. 한고조 유방이 대장군 한신과 나눈 대화다. “짐은 몇 만 군사를 통솔하는 장수의 자격이 있소” “잘 해야 십만 정도일 것입니다.” “대장군은 어떠하오” “소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럼, 왜 과인 휘하에 있는거요?” “폐하는 장수로 거느리는 병사는 적지만 장수는 많이 거느릴수록 잘 거느리는 장수의 장수인 것이 소장과 다릅니다.” ‘십팔사략’이 전하는 고사다. 경기도정은 중첩된 파란을 예고한다. 이를 돌파하는 내공은 도청 공무원들이 행정으로 받쳐준다. 김 지사의 중앙정치에 대한 장악력이 이 내공에 의해 좌우된다. 소리만 요란한 빈수레 정치보단 소리없이 속이 꽉 차는 행정을 더 원하지만 행정의 한계를 극복해내는 것이 또한 정치다. 행정과 정칠 구분할 줄 알면서 속찬 정치를 적절히 구사해내는 것이 김문수 도정의 요체다. 현대 행정학에서 정치와 행정의 관계를 신이원론으로 보는 것은 법규의 집행과 법규의 제정으로 나눈 개념의 차이가 근원이다. 김문수 도지사가 가야할 길은 이의 균형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임양은 주필

손학규, 한국의 ‘클린턴’

황소다. 서둘지도 멈추지도 않는다. 내일 이임식을 앞둔 경기도지사 공식 일정이 오늘 하루도 빽빽하다. 온화하다. 담소에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청년시절 구로공단 위장취업 때 사귄 근로자 중엔 지금도 소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세상 물정 얘기를 나누는 옛 친구가 있다. 작가 황석영씨의 자전소설 ‘들판에서 마을을 보았네’의 줄거리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 당시 함께 위장취업하여 한 방에서 지낸 손학규는 곧 경찰에 깡그리 붙잡힐 판인데도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아 ‘너는 영판 서생’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서생은 그러나 안위를 초월한 뚝심이 있었고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서생이긴 마찬가지지만 강단은 여전하다. 작년이던가, 이해찬 국무총리의 수도권문제회의 주재 방식에 독선을 지적하며 자릴 박차고 일어난 불참 선언을 끝내 지켰다. 사람을 부릴 줄 안다. 일을 신명나게 하도록 하고, 신명나게 하는 것은 최선을 다 하는 효율의 극대화다. 일의 초점은 하나도 열도 민생행정으로 모아진다. ‘10대 정책분야 51개 역점사업’은 경기도지사 취임 1년 성과와 함께 발표된 ‘경기비전 2006’이다. 이제 임기 4년을 마치는 시점에서 보는 ‘경기비전 2006’의 등급은 확실히 ‘수’는 아니다. 미진한 분야도 있고 미흡한 사업도 많다. 하지만 아무리 인색하게 보아도 ‘우’는 분명하다. 이런 가운데 그래도 더 돋보이는 것은 인간 능력의 한계가 완전함은 이를 수 없는데도 있겠지만, 최선을 다 했다고 보는 평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출판기념회에 공전의 성황을 이룬 ‘손학규와 찍새 딱새’는 수원 인계동 동양문고에서 하루에 300권 이상이 팔리기도 했다. 일본 미국 유럽 등지를 이웃 집 드나들듯이 뛰면서 이룩한 외자유치는 손꼽히는 업적 중 하나다. 책 이름은 원래가 조선일보 양상훈 정치부장이 쓴 지난 3월 29일자 ‘손학규와 경기도의 찍새·딱새들’로, 찍새가 외국기업을 찍어 데려오면 딱새가 행정지원을 제공하는 일사불란한 팀워크를 지칭한 것이다. 칼럼엔 ‘경기도 외자유치 100건 140억달러·일자리 3만개 손지사·경기도 공무원들 땀과 눈물에 박수를’ 이런 멘트형 부제가 달렸다. 이젠 곧 경기도지사가 아니다. 대권을 향한 백의종군으로 ‘100일 민심 대장정’이 시작된다. 농어촌 불우시설 영세공장 등 사회 각계 각층의 저변을 몸으로 터득하는 민심의 바다속에 뛰어든다. 철저한 실사구시의 중용지도(中庸之道) 추구는 시대가 요구하는 차기 면모와 일치한다고 보아 장점이다. 중용은 기회주의적 무임승차가 아니다. 주변의 모순을 최대한 수용하는 사회통합의 구심점이다. 민생을 위한 국익, 국익을 통한 민생의 ‘민생행정’ 제일주의에서 ‘민생정치’ 제일주의로 용틀임하는 웅지를 펼쳐 보인다. 사회주의는 방법상 실패했지만 뜻은 유효하고 자본주의는 방법상 성공했지만 흠을 무효화해야 할 이 시대에서 중용지도는 새 치도(治道)의 길이다. 국토분단에 이어 내부분열이 심하다. 돌아보면 사회양극화 해소는 분배도 분배지만 성장을 통해 서민층 소득을 끌어올리고, 영호남 갈등 같은 고질이나 우심한 세대간의 마찰을 푸는 등 이밖에도 산적한 현안이 절실하다. 이의 가장 정확한 중심 위치에 서야할 차기가 누구여야 하는가를 생각해 본다. 남북관계도 예컨대 평양 근교에 조성한 ‘경기도합작농장’은 새로운 경협의 모델인 것이다. 보편적 가치의 추구로 특수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조개가 모래를 머금어 진주를 만드는 것과 같지만, 사람들은 껍질속에 든 진주를 알지 못한다. 빌 클린턴 지사가 미합중국 대통령에 도전한 아칸소주는 남부의 작은 지방정부다. 이에 비하면 경기도는 서울 못지않은 웅도다. 정치인 손학규 도지사의 강점은 좋은 친구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클린턴이다. ‘아칸소사단’과 같은 ‘경기사단’의 대장정이 요구된다. 한나라당 당내 후보 선출이 약 1년 남았다.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함을 고집하는 그를 도와야 할 사람들은 주변이다. 가야할 길은 산 넘어 산이다. 당내 후보를 거머쥐는 것도 가시밭 길이지만 당 후보에 그쳐서도 안 된다. 범야권 단일화를 이룩하는 길 역시 험난하다. 서둘지도, 멈추지도 않는 중용의 황소 여유와 뚝심을 지켜보고자 한다. /임양은 주필

월드컵행복설

2006년 6월19일 아침 5시30분, 대한민국이 일시의 함성으로 폭발했다. 그건 환희의 탄성이다. 강호 프랑스 골문을 작렬한 박지성의 동점골은 한국의 축구를 수렁에서 구했다. 순간, 수원월드컵축구장에서 터진 함성이 동문 고개를 넘어 연무동까지 울려퍼졌다.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그들은 밤을 하얗게 샜다. 프랑스는 1998년 월드컵축구대회 우승국이다. 이들에게 후반전이 불과 10분도 안 남은 시각까지 한 골 차이로 리드 당하는 경기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여대생은 동점골이 터지자 불끈 일어나 두 팔을 번쩍 들어 보이며 사슴 눈을 닮은 눈망울에 이슬을 고였다. 그만이 아니다. 거리의 ‘붉은악마’들은 하나같이 용수철처럼 튀듯이 일어나 우레와 같은 함성을 쏟았다. “대~한민국”을 외쳤다. 월드컵축구대회는 우리를 이처럼 하나로 뭉치게 한다. 세대, 신분의 차이나 빈부의 차이를 초월한다. 영호남 등 지역의 구별도 없다. 6·25전쟁의 남침 방어, 그리고 빈곤 추방의 새마을운동 이후에 이토록 사회대통합을 이룬 적이 없다. 월드컵이 도대체 뭣이길래 그토록 환장하느냐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은 월드컵을 빼면 우릴 미치도록 감격시킬 일이 뭐가 있느냐는 반문이 성립된다. 월드컵 때문에 6·15 축전이나 평택 대추리 시위같은 뉴스가 제대로 빛을 못본다는 투덜거림을 본다. 하지만 그같은 이념꾼들의 생각은 민중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 행사를 위해 가로변 전주에 꽂은 태극기가 무더기로 없어진다고 수원시는 걱정이지만 참 좋은 일이다. ‘붉은악마’들이 펄럭이며 응원 물결을 이루는 것은 태극기지 한반도기가 아니다. 한국 축구는 우리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2002년 대회에선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무너뜨렸고 이번 대회에서는 프랑스에게 일격을 가한 필적의 충격을 안겼다. 자신감속의 사회대통합이 이처럼 요원의 불길같은 응원 열기로 나타난 건, 우리 스스로에 대한 자애의 발현이며 새로운 희망의 염원이다. 6·25전쟁 휴전 이듬해인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축구 대회에 첫 출전, 헝가리에 0-9로 대패했을 당시엔 못살아도 참 지지리 못살았다. 출전 전날 밤 숙소에서 유니폼의 등 번호를 헝겊에 손으로 써 바늘로 꿰맬 지경이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났다. 지난 대회에선 4강에 들면서 유럽축구에 대한 꿇림도 없어졌다. 월드컵 무대의 영화는 지난 반세기 동안 축적된 피땀 어린 노력의 결정체다. 그리고 더 도약된 새로운 희망을 우린 지금 월드컵을 통해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월드컵이 밥먹여주느냐는 소릴 더러 듣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본선 경기의 성적에 따라 FIFA가 지급하는 배당금도 배당금이지만 지구촌에 과시되는 국위선양은 가히 메가톤급이다. ‘한국 축구가 부럽고 질투난다’는 것은 일본 언론의 보도다. 중국 국영방송 CCTV는 ‘한국 축구는 아시아의 자랑’이라고 극찬했다. 축구 말고 다른 것으로 이처럼 국위를 빛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린 답답하다 못해 꽉 막힌 가슴을 월드컵 축구를 통해 뻥 뚫고 있는 것이다. 1970년대의 한국 축구 수준을 높인 것은 MBC-TV가 독점 방영한 서독축구경기였다. 근래엔 월드컵 경기를 자주 보게 되면서 웬만한 축구팬 치고 해설못하는 사람이 없다. 여기에 4강 맛 여운이 아직도 진하게 남았다. 오는 24일 새벽 4시다. 스위스와 16강 진출을 다투는 G조 마지막 건곤일척의 대결전이 벌어진다. 우리나 상대나 자력 진출을 위해서는 서로가 져선 안 되는 경기다. 수원이 낳은 세계적 축구 신예 스타 박지성은 FIFA 연구기술진이 선정한 연구대상의 선수다. 한국 축구의 압박 전술이 정평난 덴 이유가 있다. 그가 볼 길목과 상대 선수 움직임을 미리 알아 대비하는 폭넓은 안목의 부지런한 활약이 주효한 탓이다. 조선 중앙텔레비젼의 중계 방송에서 해설자는 박지성의 이런 활약을 ‘팔방돌이’라고 말했다. 우린 박지성과 함께하는 월드컵이 있어 이 6월이 행복하다. /임양은 주필

광란의 6월

“배달민족의 피가 흐려져서 걱정입네다” 지난 5월 남북장성급회담에서 북측 대표가 한 말이다. 회담에 앞서 가진 환담에서 농촌 얘기가 나온 끝에 남측 대표가 중국 베트남 필리핀 등지 여성이 국제결혼으로 우리 농촌에 많이 와 있다는 말을 하자 그같이 되받아 쳤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와 한국대학총학생연합 등이 어제부터 모레까지 광주에서 북측 대표단과 함께 갖는 ‘6·15 공동선언발표 6돌 기념 민족통일 대축제’는 민족이 주제다. “우리 민족끼리의 날, 3대 애국운동(자주통일·반전평화·민족대단합) 결의대회를 민족공조의 의지로 다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의 공산주의엔 국제공산당만 있을 뿐 민족은 없다. 공산당선언과 코민테른은 민족의 개념은 되레 공산주의운동의 방해물로 보았다. 오직 국제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1국1당 체제의 개방만이 있을 뿐 민족의 개념은 저해 요인으로 말살을 강요 받았다. 광복직후 독립을 미루는 강대국의 신탁통치안을 우익 진영과 함께 반탁에 나섰던 좌익 세력이 하루 아침에 찬탁으로 돌아섰던 게 모스크바에서 날아든 지령 때문이었다. 그 무렵에는 우익을 민족진영이라고 했고 좌익을 개방세력으로 보았다. 김일성 장군에게 붙은 ‘인민의 태양이시며’ ‘강철의 영장이시며’ 등 여러가지 수식어 외에 또 한 가지가 더 있었던 게 ‘국제공산주의운동의 탁월한 영도자 중 한 분이시며…’란 말이 있었다. 이토록 공산주의운동에서 금기시됐던 민족이란 용어를 금과옥조로 삼게 된건 ‘우리식 체제’ ‘우리식 사회주의’를 시작하면서다. 권력 승계의 ‘우리식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폐쇄사회가 불가피했고, 폐쇄사회를 합리화하기 위해 남반부 혁명과 함께 반미운동의 구심적으로 내세운 게 민족이다. 물론 민족이란 말은 더 할 수 없이 좋다. 민족자주, 민족공조 참으로 좋은 말이다. 나쁜 것은 그 말 자체가 아니라 이를 인도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왜곡하는 정치 공작이다. ‘반전평화를 위해 남조선을 강점하고 있는 미군을 몰아내야 한다’고 한다. 미군을 몰아내야만 반전평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미군이 있다고 반전평화가 없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미군을 불러들인 게 6·25 전쟁을 일으킨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다. 도대체 6·25 전쟁과 6·15 남북정상회담의 차이는 뭔가를 생각해 본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잘못된 정보로 무고한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전범이다. 6·25 전쟁의 전범은 누구로 보는가 궁금하다. 민족자주 민족공조를 말하자면 이를 먼저 짚고 넘어가는 것이 순리다. 매듭을 풀지않고 어떻게 진정한 민족 화해가 성립되겠는 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6·25가 없었으면 굳이 6·15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전쟁을 하지 않았으면 불신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과 함께 남북조절위원회가 가동됐다. 적십자회담은 이때부터 시작됐었다. 김영삼 정권 시절 김일성 주석의 돌연한 변고가 없었던들 남북정상회담은 이미 그때 성사됐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6·15 정상회담 이면엔 이처럼 7·4 공동성명, 김영삼·김일성 ‘양김회담’ 합의의 전력이 밑거름으로 깔렸다. 6·15 이후 남북관계가 활발한 것은 사실이지만 천문학적 수치의 각종 물품과 달러가 북녘에 지원됐다. 이러면서도 좋은 소릴 듣기는 커녕 매사를 북측에 끌려만 다닌다. 문제가 많지만 참는 데, 참기 어려운 게 있다. 1994년 박영수 조평통 부국장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든다”고 했던 것은 6·15 이전이니까 그렇다 쳐도, 며칠 전 안경호 조평통 서기국장이 “전쟁의 화염에 휩싸이게 될 것”이라고 한 말은 정말 고약하다. 이토록 대놓고 협박한 사람이 정중한 대접을 받는 평화의 손님으로 광주에 초대 됐다. 오늘의 남북관계에서 거북한 과거의 상처가 덧나지 않기 위해 아직은 미완의 봉합을 손대지 않는 것이 좋다면 서로가 인도적 동포애로만 가야 한다. 그런데 동포애를 민족론으로 이념화시켜 순수성을 희석시키는 것은 매우 우려스런 현상이다. 이념적으로 편향된 사람들이 갖는 6·15 이념행사는 6·15 정신이 아니다. 6·25를 외면한 6·15의 모순은 광란의 6월이다. /임양은 주필

보수필패론(保守必敗論)

5·31 지방선거가 끝나기 바쁘게 (전 총리) 고건이 고개를 내들었다. 치명상을 입은 열린우리당은 초상집같은 공기속에 전열 정비로 설왕설래한다. 기대 이상의 압승을 거둔 한나라당은 다음달 전당대회를 앞두고 각 계파가 표정관리 하느라고 바쁘다. 이런 가운데 그동안 꽁무니를 뺐다가 한판 씨름의 지방선거가 반여권 정서로 끝나자 새 명함을 내민 고건의 7월 ‘희망한국국민연대’ 발족설은 일종의 대세 무임 승차다. 내년 대선 엔진의 예열 시동은 고건 만은 아니다. 열린우리당 (전 의장) 정동영, (전 최고위원) 김근태는 여전히 후보군이다. 키워드도 가지가지다. 고건의 국민연대는 연대 대상으로 열린우리당·민주당·국민중심당·한나라당을 꼽고, 정동영은 ‘민주평화개혁세력통합’을 표방, 민주당과 외곽세력연대를, 김근태는 ‘범민주양심세력대연합’을 내걸며 민주당·고건·시민사회측과의 연대를 모색하고 있다. (민주당 대표) 한화갑은 후보군이 아니지만 ‘중도개혁세력통합연대’의 킹 메이커로 고건·열린우리당·국민중심당과의 연대를 점치고 있다. (보건복지부 장관) 유시민 또한 복병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총애가 각별하다. 완전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개혁 순혈세력과의 연대가 가능하다. 한나라당의 (당대표) 박근혜, (서울시장) 이명박, (경기도지사) 손학규는 세상이 다 아는 당내 후보군의 빅3이다. 박근혜는 지방선거 압승의 견인력, 이명박은 청계천 효험, 손학규는 민생투자에 의한 국부 기여의 이미지가 강하다. 이들 세 명은 차이는 있지만 크게 보아 ‘중도실용주의 개혁’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인물이 많은 것인지, 대통령 감이 그토록 많은 건지 아무튼 대통령하겠다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러나 딱 한 마디로 나누면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다. 보수도 꼴통 우파가 있어 문제고, 진보도 급진 좌파가 있어 문제이긴 하지만 보수와 진보·진보와 보수의 구도로 압축된다. 그런데 대선 구도는 이런 양대 진영이 아니고 두 진영 인물들이 제각기 다 잘 나서인지 난립이다. 대선 예비 구도만이 아니고 본선 구도도 그래왔고 내년 역시 그럴 전망이다. 묘한 건 진보진영의 비단일화로 인한 당선권 잠식보다는 보수진영의 비단일화로 인한 당선권 잠식이 치명적이라는 사실이다. 가령 진보진영의 대선 출마자가 둘이면 누가 되든 큰 영향이 없지만 보수진영의 출마자가 둘이면 공멸하는 것이 그간 보아온 경험법칙이다. 내년 대선에서는 보수진영의 출마가 둘도 아니고 그 이상 나올 전망이다. 이래선 백전백패로 진보세력에 정권을 또 헌납한다. 지방선거에서 진보진영의 득표가 위축됐다 하여 진보세력이 위축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유사시엔 이내 뭉칠만큼 응집력이 강하다. 그러나 보수진영의 응집력은 거의 모래와 같다. 진보세력이 지방선거 대패에도 불구하고 재집권을 낙관하는 연유가 이런 보수진영의 속성을 잘 아는 데도 있다. 보수진영이 더 이상 이 정권과 같은 실험적 농락에서 벗어나 안정적 개혁으로 나라 경영을 하고자 한다면 뭉쳐야 한다. 물론 한나라당이 당내 경선결과에 불복하는 돌출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나라당만이 그런다 해서 되는 건 아니다. 민주당, 국민중심당 등이 보수정당이 맞다면 함께 연대하여야 한다. 고건의 ‘희망한국국민연대’도 마찬가지다. 중용(中庸)은 기회주의적 중간파가 아니다. 주변의 기(氣)와 세(勢)와 의(意)를 다 수용하는 것이 중용의 진수다. 한나라당과 당내 후보는 범야권 단일화를 이룩할만한 중용의 도(道)를 유효화 할 수 있어야 한다. 쇠꼬리보단 닭대가리 노릇을 더 좋아했던 보수정당 지도자들은 이제 그런 치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보수정당끼리의 대합당이 있으면 더욱 좋다. 대보수정당의 신당안에 한나라파, 민주파, 국민중심파, 국민연대파, 기타 파벌이 있을 때 있을지라도 하나의 정당으로 뭉치는 것이 정치 발전이다. 보수정당만이 아니다. 열린우리당도 어정쩡한 모임의 형태를 더 지속하기 보단 환골탈태한 진보정당의 제 모습을 보여 합당할 당이 있으면 합당하여야 한다. 보수·진보, 진보·보수의 양대정당 체제로 가는 것이 진정한 정계개편인 것이다. /임양은 주필

시각장애인들의 ‘절규’

선거판이어서 그랬을까, 선거 때라 해도 그렇지 언론은 거의 무심했다. 그 많은 글 가운데서도 언급하는 이가 없었다. 듣기 좋은 말이면 다 쏟아내는 선거판에서조차 한 마디 말이 없었다. 그들의 절박한 호소는 이렇게 고독하게 묻혔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부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생계가 위협받는 그들의 사정은 자살을 생각할만큼 절박했다. 강물에 몸을 던졌다. ‘시각장애인 4명 한강 투신’ ‘시각장애 안마사 4명 한강 투신… 곧바로 구조돼’ 1~2단으로 보도됐다. 그나마 나지않은 중앙지도 있다. 일본은 안마사 자격을 일반인에게도 준다. 우리처럼 시각장애인으로 국한하지 않는다. 대신, 시각장애인에 대한 다른 복지가 그만큼 발달하였다. 예를 들면 시각장애인 공무원도 있다. 우린 사회복지 제도가 아직 못미쳐 시각장애인 복지 역시 아주 열악하다. 안마사 관련 법률이 시각장애인에 한해 자격을 주도록 한 것은 일종의 묵계에 의한 사회적 합의로 보는 해석이 가능하다. 신체장애가 어디이든 장애가 일상생활에 끼치는 불편이 막심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가운데 겪는 빛 잃은 시각장애의 고통 또한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브라운관에서 활약했던 연기파 배우 홍성민씨가 실명 이후에 연극 무대에 선 감동적 소감을 밝히면서 “당해보지 않고는 모른다”고 어둠의 고통을 말했다. 헌법재판소가 사회적 합의의 해석을 깬 위헌 판결은 기계적 판결이다. 위헌의 이유로 든 직업선택의 침해나 평등권 위배는 개념의 전제가 잘못됐다. 안마사 직업이 사회 구성원으로 필요한 것은 물론이지만 기능을 익히는데 까다로운 요건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고소득 수준이어서 일반인들이 다퉈 선호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안마사 자격을 제한받았다 해서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받았다거나 평등권을 위배당했다고 보는 일반인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 사회 인식이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은 실체적 사실로는 없는 법익의 침해가 있는 것 처럼 의제화 한 허구적 이론의 오류를 범하였다. 설령, 위헌의 요소가 있다고 판단됐을 지라도 헌재 재판관들은 신중한 고려가 있어야 했다. 위헌보단 최소한 헌법 불합치로 경과조치를 두는 주의 의무가 있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위헌으로 시각장애인들 생계를 단칼에 끊어놨다. 법리로나 사리로나 정황으로나 다 이토록 의심이 가는 판결이지만 단심의 헌법재판소 판결은 이의를 호소할 곳도 없다. 시각장애인들의 저항적 절규는 이래서 보기에 더 답답하다. 이의 주무부처는 보건복지부다. 누구보다 분배를 우선시하는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이 이례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 헌법재판소를 자극하고 싶지 않은 요량은 짐작이 가지만, 시각장애인들의 몸부림을 외면한 채 입을 봉하고만 있는 것은 책임있는 자세가 아니다. 미국의 여류 문필가며 사회사업가 켈러(1880~1969)는 두 살 때 앓은 성홍열로 빛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듣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삼중고를 극복, 맹농아자 교육·복지사업에 초인적 기여를 했다. ‘나의 생애’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우리들 가운데서도 언젠간 이런 분이 나오겠지만 당장은 생계문제가 급하다. 그래서 생각해 보는 것은 묵시에 의한 과거의 사회적 합의를 그대로 이어가자는 것이다. 관련 법규야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바뀌겠지만 운용의 묘로 안마사 직업을 시각장애인 몫으로 지속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갖는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우리 역시 안마사 직업을 굳이 시각장애인 몫으로 안 남겨놔도 될만큼 시각장애인 복지가 발달해야 하는 것이지만 지금은 그런 계제가 아니다. 시각장애인들이 더 이상 항의 시위에 나서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사회의 책임이다. 정부는 분명한 입장을 보여야하고 정치권 역시 대책을 제시해야 한다. 소수의 민생도 민생이다. 이미 끝난 선거타령으로 민생을 계속 외면해서는 안 된다. /임양은 주필

저주의 狂氣

저주의 광기가 전율을 느끼게 한다. “박 대표의 자작극이다” “차라리 죽었어야 했다” ‘박근혜’ 피습 직후에 보인 일부 네티즌의 반응이다. 정반대의 반응도 있다. “여당의 기획이다” “빨갱이를 때려잡을 절호의 기회다” 양쪽 다 광기다. 인터넷이 광기로 도배됐다. 부모를 흉탄에 여읜 그녀 자신마저 칼 부림 당해 목숨을 잃을 뻔 한 중상의 기구한 운명을 개탄하는가 하면 반대의 글이 있다. “박근혜씨를 표적으로 삼은 것에는 사회적 의미가 있게 마련”이란 글이 실린 ‘노사모’ 홈페이지는 또 이렇게 말했다. “사회적 부적응자나 어떤 사적 불만을 아무데나 표출하고 싶은 사람의 소행이 아니라 박정희를 증오하는 어떤 사람들이 저지른 일일 것이라고 유추해 본다”라고 주장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인 어느 시인은 인터넷 문학사이트 ‘문학의 즐거움’에서 (박 대표 부모의 죽음과 이번 피습 사건을 연관시켜) “인과응보다. 이 정도의 테러를 다행으로 여겨야 될 것이다”라고 한데 이어 비속어와 성적 표현으로 일관하는 풍자시를 썼다. ‘저주받은 아비 뒤를 기를 쓰고 따르는 갸륵한 유신 효녀야, 아비를 개처럼 쏘아죽인 미국에 치마폭을 들어 보이는 더러운 창녀야…’ 지난 3월15일 ‘우리 민족끼리’ 사이트에 실린 ‘박근혜’ 비방 시다. 이 사이트는 북의 ‘조평통’에서 운영한다. 지난 2002년 5월 박 대표가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난뒤 ‘여사’라고 했던 호칭이 이처럼 바뀐 것은 올 신년 공동 사설에서 ‘반보수 연합전선 구축’을 강조하면서 부터다. 조선중앙방송은 1월4일 “유신 독재자의 후예인 한나라당 대표는 아비의 비극적인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입을 다물고 조용히 물러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박 대표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군사독재를 하고 개발독재를 하고 유신독재를 한 것은 틀림이 없다. 1961년 5월16일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장악, 1979년 10월26일 타계할 때까지 18년을 장기 집권했다. 그같은 장기 집권에도 죽으면서 가족에게 남긴 재산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국 근대화’ ‘경제부흥’의 성과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여기서 말할 계제가 아니다. 어떻든 박 대통령 치하에서 많은 사람이 억울한 고초를 겪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은 건 사실이다. 박 대표가 오늘의 정치인이 되기까진 자신의 노력도 많았지만 박 대통령 후광의 영향이 크다. 정치인 ‘박근혜’는 이래서 아버지의 영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정치인으로서는 부녀가 평생 연좌제를 면치 못하는 입장에서 아버지 때문에 득을 보는 것도, 아버지 때문에 욕을 먹는 것도 딸의 숙명이다. 문젠 욕도 욕 나름이다. 북쪽 사람들이 막말 욕을 하는 것이야 그런다손 쳐도 남쪽 사람들의 막말 욕은 그래선 안 된다. 박 대표 부녀에 대한 정치적 비판은 뭐라고 해도 좋지만, 딸이 칼부림 당해도 싸다는 식의 막말은 민주주의의 반역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박정희’가 총들고 정권 빼앗은 것을 욕할 수 없다. 테러리즘이긴 같은 류이기 때문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북엔 화해를 해야한다는 사람들이 왜 같은 남쪽 사람들끼린 화해를 거부하느냐는 것이다. ‘박정희’가 아무리 독재를 하고 사람을 많이 다치게 했어도 6·25 전쟁의 동족상잔 참상과는 비교가 안 된다. 비교가 안 되는 그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용서를 하자는 사람들이 ‘박정희’는 끝까지 매도하는 연유가 뭣인지 궁금하다. 박 대표가 비록 아버지 후광을 입긴 했어도 권력의 자리를 물려 받은 건 아니다. 아버지 자릴 세습받은 김 위원장과는 다르다. 김 위원장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박 대표를 부정하는 것은 그 근거가 뭣인지 의문이다. 북쪽 사람들과 등지고 살자는 게 아니다. 요점은 저들은 용서하면서 이쪽은 저주하는 것이 민족화해라면 그건 얘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정말 두렵다. 5·31 지방선거가 끝나면 저주의 광기가 더할 공산이 높다. 분단보다 더 심각한 것이 분열이다. 그런데 우린 분단국가에 겹쳐 분열사회로 치닫는 광기의 지배속에서 살고 있다. /임양은 주필

5·31 ‘別曲’

어떤 일이 100명에서 51명의 찬성으로 결정됐다하여 꼭 잘된 결정인 것은 아니다. 다수결은 다만 의사 결정의 보편적 수단일 뿐, 절대적 진리로 보긴 어려울 때가 많다. 조병옥은 이승만 독재에 저항한 정치가로 민주화 운동의 거목이다. 그는 저서 ‘민주주의와 나’에서 ‘나폴레옹은 국민투표로 황제가 됐고, 히틀러의 독재 또한 국민투표를 악용했다’며 투표의 맹점을 ‘민주주의는 역행하는가?’라고 반문하며 개탄했다. 키케로(BC 106~43)는 정치가며 철학가로 당대의 지성인이었다. 제3차 삼두정치 확립후 안토니우스에게 추방당해 결국은 살해된 게 알고보면 지성이 화근이었다. 그런 키케로의 ‘의무론’ 중엔 ‘가장 고약한 풍습은 벼슬하겠다고 선거운동하며 다투는 일이다’라고 한 대목이 있다. 그리스 아테네에선 패각추방이 있었다. 국외로 추방할 독재자를 투표로 가려내는 것이다. 그 무렵은 종이가 귀해 이집트에서 수입했으므로 조개껍질에 이름을 써넣었다. 그런데 후세에 시민광장으로 투표가 실시된 아고라 발굴작업에서 똑같은 필체의 조개껍질이 무더기 무더기로 무수히 발견됐다. 부정투표가 있었던 것이다. 영국은 산업혁명후 허허벌판이 신흥도시가 되고 반대로 소도시가 폐허화 됐는가 하면 심지어는 물에 잠긴 지역이 있는데도 선거구 정비가 안되어 선거의 맹점을 빚은 적이 있었다. 5·31 지방선거가 각급 후보자 등록을 마쳐 본격화됐으나 유권자의 관심을 제대로 끌지 못하고 있다. 투표한 사람 중에 제비 뽑아 도서상품권 등을 주는 해외토픽 감의 투표용지복권제 도입이 검토되는 판이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은 호남지역정서를 노골적으로 부추기고 있다.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나 한화갑 민주당 대표가 현지에 가 살다시피 해가며 갖는 ‘호남 민심의 적자’ 경쟁이 치열하다. “참여정부는 부산 정권인데 왜 부산에서 지지해 주지 않느냐”는 것은 문재인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별난 투정이다.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은 좌충우돌이다. 지방선거후 특검으로 비리 단체장을 솎아내겠다며 엄포를 토하더니, 여당의 독선과 오만을 반성한다며 갑자기 납작 엎드려 보이는 게 또 언제 돌아설지 모른다. 한나라당은 ‘공천장사’의 오명속에 자만하지 않는다며 민심 이반의 반사이득을 표정관리 하기에 바쁘다. 이런 가운데 김대중 전 대통령의 6월말 방북을 위한 경의선 개통 문제를 둔 북풍이 예사롭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 생각난다. 지난 2월26일 청와대 기자들과 가진 북악산 산행길에서 한 말이다. “선거라는 게 속셈을 뻔히 알면서도 비실비실 웃으면서 나가서 시비하고, 선수들끼리 알면서도 부분적으로 국민을 속이는 게임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라고 했다. 작금의 5·31 지방선거 상황이 바로 이런 것 같다. 중우정치는 민주정치를 비꼬는 말이다. 패각추방이 있었던 고대 아테네 민주정치의 타락에서 유래된 말이다. 민주적인 선거라 하여 민주적인 결과가 출산되는 것은 아니다. 의외의 기형아도 출산된다. 그런데도 선거에 의존하는 것은 더 나은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영국의 산업혁명 직후같은 엉터리 선거구는 우리에겐 없지만 지방의원 선거구가 잘못된 곳은 많다. 그래도 선거를 해야하는 것은 당장은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선거란 2천 수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모양이다. 키케로의 말처럼 벼슬하겠다고 선거운동하며 다투는 고약함은 옛과 같은데, 지금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은 선거운동비란 이름의 돈이다. 고대 선거엔 선거운동비가 별로 안들어갔던 것인지 궁금하다. 지금의 선거에서도 궁금한 것은 역시 돈이다. 당선된다 하여도 4년동안 받을 월급 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선거운동비로 들이는 돈놀음은 두렵다. 냉소주의는 민주정치를 중우정치로 만드는 주요인이 된다. 선거를 애써 외면하는 것은 고상한 은둔이 아닌 비겁한 회피다. 유권자들이 출마족들보다 못해 그들 중에서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선택이 책임이므로 표를 찍어야 하는 것이다. 정치권을 나무라고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서도 투표권을 행사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임양은 주필

아기 울음소리

섹스는 좋지만 출산은 싫다. 지난해 국내 출산율이 인구 감소세의 1.08명으로 떨어진 이유가 이런 성 풍속에 연유한다. 출산율이 계속 이렇게 떨어지면서 이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면 약 25%의 교실이 비게 된다. 이런 현상은 국민생활 각 분야에 마이너스형 재편을 가져와 상상을 초월하는 일대 혼란을 유발한다. 세계 최저의 우리 출산율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걱정한다. 대한민국의 ‘노인민국’화를 불과 십 수년 앞두고 있다. 생산은 낮아지면서 소비만 높아져 경쟁력 없는 이상한 나라가 된다.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는 자연의 섭리며 신의 축복이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가정엔 미래의 기약이 없다. 마찬가지로 아기의 울음소리가 귀한 나라엔 미래가 어둡다. 중국이나 일본은 출산 장려가 한창이다. 독신이 많기로 유명한 프랑스 사회는 독신남이든 독신녀든 혼외 아이를 얻는 게 새로운 유행이다. 모텔마다 불황을 모른다는 그 많은 손님이 객지잠을 자려고 투숙하는 건 아니다. 거의가 남녀의 잠자리 장소로 이용하는 손님들이며 부부가 굳이 모텔을 찾지는 않을 것이다. 부부 간에도 유산을 위한 수술실을 찾는 예가 신생아실을 찾는 수 보다 더한 부부가 많다. 섹스는 이토록 탐닉하면서 아이 낳길 거부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고유의 은총에 대한 배덕이다. 암컷이 발정하는 일정 시기에만 수컷의 교미가 딱 한 차례 가능한 동물과 달리, 인간은 언제나 섹스가 가능한 것은 신이 여성에게만 멘스를 선물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인류의 이런 특권을 종족 보존의 책임은 소홀히 하며 즐기는 데만 열중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대반역이다. 종국엔 재앙의 원인이 된다. 우린 참 뻔뻔스런 데가 있다. 한국전쟁부터 반세기 이상 국내에서 낳은 우리 아이를 피부 색깔이 다른 해외 양부모에게 입양시켜 키우면서 피부 색깔이 다른 우리의 혼혈아는 대체로 홀대해왔다. 섹스와 출산의 함수관계에서 부등식의 편차가 이렇게 심하게 된덴 이유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아이를 가지면 벌어먹기가 어렵고, 아이 하나 더 갖는데 드는 교육비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장가 시집 보내는 것도 큰 걱정이다. 이 험난한 세태에 무자식이 상팔자란 생각도 들만하다. 과거 개발도상국 시절 산아제한의 영향도 아주 없진 않다. 가족계획이란 이름으로 ‘아들 딸 구별말고 둘 만 낳아 잘 기르자’고 했던 구호가 하나가 되고 이젠 하나도 안 낳는 세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앞으로 두고보면 알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자녀를 많이 둔 집, 형제자매가 많은 가정이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먹이고 키우고 가르칠 것을 미리 걱정하는 게 가장 현명한 것 같지만 가장 우매한 생각이다. ‘제 명과 먹을 건 타고 난다’는 옛말을 믿으란 것은 아니지만 지금보다 살기가 어려웠던 시절에도 생기는 아이마다 낳아 그런대로 다 잘 길렀다. 세계 최저의 출산율 문제를 두고 별의 별 유식한 말들을 많이 내놓는다. 맞는 말이다. 정부도 정신을 차리고 자치단체도 긴장해야 된다. 아일 낳도록 유도하는 인센티브도 좋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사회의 인식이다. 아이를 낳아야 할 부부들이 아이를 많이 낳고자하는 새로운 인식이 확산돼야 한다. 아이가 많으면 키울걸 너무 걱정하는 것은 게으른 생각이다. 한 명의 자녀보단 두 명, 두 명의 자녀보단 세 명, 세 명의 자녀보단 그 이상의 자녀를 두면 부모도 말년이 다복하지만, 무엇보다 많은 수의 자녀들 저희끼리 외롭지 않아 좋다. 출산율 저하는 ‘위기의 국난’이다. 국난의 타개책은 섹스와 출산의 비례가 근접하는데 있다. 임시방편이아닌 근본적 대책은 이 길 뿐이다. 길에서 가끔 보는 임신부가 존경스럽다. 만삭의 모습은 성스럽기까지 한다. 국난타개를 실천하는 국회의원보다 가치가 더한 애국자들이다. 가정의 행복 제조자이기도 하다. 아일 많이 낳는 다산은 더 큰 행복 예약이다. 신생아실마다 날이면 날마다 갓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우렁찰 때, 가정이나 나라의 미래가 그만큼 밝고 더 건강하다. /임 양 은 주필

지방자치 미완성 교향곡

관광·교육·의료 청정산업과 정보기술(IT) 생명공학(BT) 등 첨단산업 동북아 중심의 핵심 거점으로 육성한다. 이를 위해 외교·국방 등을 제외한 모든 권한을 자치사무로 넘긴다. 외국의 얘기가 아닌 국내 얘기다. 제주도가 이렇게 된다. ‘제주특별자치도법안’은 연방주에 버금가는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한다. 국무총리실이 주축이 되어 추진하고 있다. 제주도를 홍콩이나 싱가포르 같은 국제자유도시로 건설한다는 것이다. 잘하는 일이다. 그러나 더 잘하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을 뛰어 넘어야 한다. 제주도 섬만이 아니라 내륙 전반에 걸쳐 ‘특별자치’는 몰라도 ‘확대자치’는 실시돼야 한다. 현행 지방자치는 민선의 겉모양만 갖췄을 뿐, 알맹이는 중앙자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지방자치가 지역주민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이유가 이에 연유한다.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방정치권은 안달이지만 지역주민은 담담하다. 지방선거와 직·간접의 이해관계가 있는 지역사회 인사들의 관심사일 뿐, 정작 표를 거머쥔 지역사회 주민은 강 건너 불구경이다. 지방자치가 선거를 통한 ‘사람중심’ 위주가 되어 왔으므로 서민층은 ‘사람중심’의 당락에 아무 관계가 없는 입장에서 흥미를 느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예를 든 제주도 같으면 다르다. 주민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제도중심’의 지방자치이기 때문이다. “지방선거가 국회의원 선거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말인즉슨 그렇다는 것이지 현실이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매니페스토 정책선거 참 좋지요. 그런데 뭐가 참 공약입니까? 막상 들여다 보면 법규의 제약 투성이어서 제한을 많이 받습니다” 이래도 참 공약을 해야겠지만 어려움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는 어느 후보의 토로다. 요컨대 문제는 지방자치 수단인 지방행정이 중앙정부에 의해 획일화한데 있다. 가령 식품영업 허가가 내륙산간지역과 섬의 해안지역이 그 내용에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그런데 한 법규에 의해 기계적으로 처리된다. 식품위생법, 동시행령, 시행규칙 등 그러니까 모법에서 대통령령, 부령에 이르기까지 중앙에서 다 규제하다 보니 지방의 자치단체가 조례로 정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이 없거나 좁다. 비근한 식품영업허가 하나만 예를 들어도 이렇지만 기업·관광·학교 등 이밖의 다른 분야 역시 마찬가지다. 지방자치제도는 전국이 국수틀에 뽑은 국수처럼 규격화한 가운데 국수를 관리할 사람만 뽑아서 하라는 지방자치는 지방자치 미완성 교향곡이다. 지방자치는 자치단체마다 지방행정의 차별화가 있어야 한다. 차별화는 경쟁이다. 광역자치단체는 광역끼리, 기초자치단체는 기초끼리의 치열한 차별화 다툼이 이어져야 서로 비교평가하는 가운데 지방자치가 제대로 발전한다. 이에따른 주민생활의 부단한 창의행정은 지방자치에 대한 주민의 관심을 부단히 유발한다. 새로 이사온 전입 주민은 그 자치단체의 일상적 제도를 스스로 알고자할 정도의 생동하는 지방자치가 돼야 한다. 그것은 주민을 귀찮게 하는 것이 아니고 주민 편익을 증진하는 자치행정의 참 면모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국가사무의 대폭 지방 이양이다. 건수만 채우는 껍데기 이관이 아니고 한 건이라도 실질 이양을 해야 한다. 중앙은 내치의 상당 부분을 법률로 정한 수준으로 전국의 지방자치를 통제하고, 시행령 수준의 통제는 광역자치단체가 행사하는 융통성 있는 지방자치가 되어야 한다. 지방행정엔 지방의 특수성이 있다. 지방행정의 매사를 지방의 특수성에 맞추는 맞춤형 지방자치가 지방자치의 진수인 것이다. 이같은 지방자치에선 주민의 무관심이 있기 어려운 게 무관심 했다가는 손해가 나기 때문이다. 물론 일시에 많은 변화를 기대할 순 없다. 비교적 빠른 속도의 점진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변화의 조짐은 없다. 지방마다 정책 경쟁의 토양이 성숙되지 못한 지방자치는 생기잃은 풀뿌리다. 넓지않은 국토에서 뭐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어선 안 된다. 그런 우문은 넓지않은 국토에서 뭐 꼭 지방자치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우답을 유발한다. 기왕하는 지방자치 같으면 이제 제대로 해야 한다. /임 양 은 주필

검사와 재벌과 변호사

범인을 비호하는 변호사란 직업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렸을 적에 가진 이런 의문은 그 앙금이 지금도 아주 없진 않다. 물론 안다. 부당한 인권 침해를 방어하고 억울한 피의자나 피고인의 혐의사실 및 공소사실로부터 무혐의나 무죄를 이끌어내는 변호사업의 순기능을 인정은 한다. 그러나 역기능도 있다. 가령 민사사건의 소송 당사자인 원·피고가 법정대리인을 선임할 변호사를 고를 땐 원·피고 자신들은 모르지만 같은 한 변호사에게 상담하는 우연이 존재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그 변호사는 원·피고 모두에게 승소의 최선을 다짐한다. 결국 변호사의 사건 수임은 소송다툼 내용이 지닌 정의가 아니라, 성공보수가 유리한 쪽으로 결정되는 수가 많다. 이와 비슷한 의문은 형사사건에도 없지 않다. 이번 현대차·기아그룹 사건에서 보여준 변호인단 구성 면모는 이를 실감케 한다. 유재만 변호사는 대검 중수부 2과장 당시, 이회창 후보측에 현대차그룹이 현금 100억원을 전달한 세칭 ‘차떼기’를 적발해낸 2003년 대선자금 수사의 민완 검사다. 이병석 변호사는 현대그룹의 150억원 뇌물사건을 수사했던 전 대검중수부 검사다.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부자가 검찰수사의 초점인 경영권 승계, 비자금 조성, 계열사 부당거래 혐의에 대한 방어를 위해 변호인을 선임하는 것은 기본적 권리다. 또 변호인은 예컨대 ‘증거인멸과 도주의 우려가 없는데도 영장을 청구하는 것은 인신구속의 남용’이라는 주장 제기가 가능하다. 그룹측은 이밖에도 최경원 전 법무부장관, 이명재 전 검찰총장, 김희선 전 서울서부지검장, 이승섭 전 서울지검 첨단범죄수사부장 등 주로 검찰 출신의 매머드급 변호인단을 20여명의 변호사들로 구성했다. 변호사 비용이 무려 100억원 대일 것이라는 설이 파다한 것으로 들리고 있지만 확인되진 않았다. 어떻든 ‘현대 킬러’가 아니면 적어도 재벌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중견 간부 검찰출신이 대거 변호인으로 선임된 것은 아이로니컬한 현상이다. 이외에도 김재기 전 수원지검장은 그룹 상임법률고문으로, 신건수 전 서울고검 형사부장은 기아차 사외이사로 있다. 분명한 것은 사건수임, 취업의 자유에 의해 현대차·기아그룹과 맺어진 검찰출신의 이같은 인연은 돈과 연관된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정몽구 현대차·기아그룹 회장 부자 수사에 심혈을 기울여 고군분투하고 있는 대검중수부 수사팀은 더러는 변호인단의 후배들이다. 박영수 중수부장 외에 채동욱 수사기획관이 있고, 최재경 1과장 여환섭 검사 등은 정 회장 신문을 직접 맡았다. 총장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서류작성 보고는 재벌 비리의 과보호가 재벌 비리의 악순환을 낳고 있다고 보는 사회정서와 대체로 맥을 같이 한다. 정 회장 구속이 곧 현대차 위기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수사팀은 오히려 이번 기회가 전문경영인을 키우는 여건 조성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아무튼 경제위기의 상습적 추론을 내세워 재벌 비리를 더 이상 관대하게 넘겨선 만민평등의 법치주의가 유린된다. ‘재벌공화국’의 오만을 이젠 끝내야 존경받는 탄탄한 재벌로 거듭난다. 그런데 정상명 검찰총장은 최종 결정을 놓고 고심했다. 수사팀의 패기있는 혁신적 명분과 예의 수구적 위기논리 사이에서 고민한 것으로 안다. 천정배 법무부 장관은 자신이 밝힌 화이트칼라 범죄 엄단에 첫 시험케이스가 됐다. 정 회장을 겨냥한 후배 수사팀의 예봉에 방패로 나선 선배 변호사들의 진심은 뭘까,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내심 어떻게 보는 것인지 궁금하다. 민주주의의 다원화사회는 각기의 직분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지만 실체적 진실은 둘 일 수 없다. 다만 다름이 있다면 견해 차이만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정몽구 현대차·기아그룹 회장의 속내다. 변호사비용 100억원 대 설이 설사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에겐 아무것도 아니다. 그룹 차원에서 부담할 것이고 또 사재로 댄다 하여도 재산이 두 자리 조 단위인 그로서는 코끼리 비스킷 정도밖에 안 된다. ‘유전가사귀’(有錢可使鬼)란 빗댄 말이 있다. 돈이 있으면 귀신도 부린다는 것이다. 무당 귀신을 부리는 게 아니고 사람 귀신을 부리는 것이다. 검사는 사회공익의 대표자이고 변호사는 사회정의 실현을 사명으로 한다. 역시 대쪽 검사 출신으로 고인이 된 최대교 변호사는 정의롭지 않은 사건은 선임료의 다과를 불문하고 맡지 않기로 유명했던 분이다. 짐작컨대 정 회장은 이번에 검찰조사를 받으면서 속으로는 ‘당신들도 옷을 벗으면 내가 고용한다’는 자만심을 가졌을 수가 있다. 재벌이 국민자본으로 온갖 비리를 저지르며 부정축재를 거듭한 돈으로 경제위기설의 우산 보호속에 부리는 농간을 언제까지 인내해야 하는 건지, 냉정히 생각해봐야 할 때다. /임 양 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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