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백제 연안에 출몰, 민가의 인명 살상과 노략질을 일삼은 왜구는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들어서도 나라의 재앙거리였다. 고려말 더욱 극성을 부린 왜구 소탕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이성계다. 조선 세종조에서도 대대적인 왜구 소탕이 있었다. 하지만 왜구의 노략질은 이후에도 16세기까지 근절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왜구는 이 땅에서 7세기경부터 천년동안 살상과 약탈을 벌여왔다. 해적노릇한 일본의 민간 도적 떼들이 왜구다.
임진왜란 7년 전란은 일본의 막부(幕府), 즉 군벌 조정의 침략전쟁이다. 왜구의 출몰이 비공식 침략이랄 것 같으면 임진왜란은 공식 침략전쟁인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비공식 침략이 왜구에 그친 것은 아니다. 조선 고종조에 자행된 일본 낭인 패거리의 민비시해는 또다른 유형의 비공식 침략이다. 일본이 껄끄러운 조선의 정적을 유례없는 궁중 침입으로 제거한 이 선제공격은 일본 칼잡이 건달패들 소행으로 돌려 발을 뺀 것이 당시 일본 정부가 취한 내숭이었다. 공식 침략은 그 후 1910년에 강제로 조인된 한일합병조약이다.
돌이켜 보면 왜구의 출몰에서 임진왜란, 민비시해, 합병조약에 이르기까지의 일본 사람들이 저지른 공식·비공식 침략은 언제나 선제공격이었던 것이 공통된 특징이다.
돌아보면 나라밖에서도 일본은 그랬다. 중·일전쟁의 중국 침략 구실이 된 1937년 노구교 사건은 일본군대가 중국군대에 선제공격의 발포를 한 것이 발단이었다. 베이징 교외 영딩장(永定江)에 금나라 때 세운 대리석 다리가 그 수려함과는 달리 중·일전쟁 발발의 무대가 됐고, 중·일전쟁은 마침내 1941년 12월8일 제2차세계대전으로까지 번졌다.
제2차세계대전이 시작된 이날 미명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도 역시 예의 선제공격이었다. 노구교사건에선 일본군이 중국군을 선제공격하고는 반대로 중국군이 먼저 발포했다고 뒤집어 씌웠던 것에 비해 진주만 기습은 노골적인 선제공격이었던 것이다. 도조히데키(東條英機) 일본 정부가 루스벨트 미국 정부에 선전포고를 통고했을 땐 일본의 해군 항공기 편대, 잠항정 군단이 미 태평양함대를 거의 궤멸시켰을 무렵이다.
전통적으로 일본의 사무라이(武士)들은 예컨대 프랑스의 총사(銃士)와 달랐다. 칼싸움을 하다가 상대가 검을 놓치면 다시 쥐도록 한 것이 총사도였던 것과 달리 사무라이는 아니다. 검을 놓치는 것은 곧 죽음이었던 건 선제공격 정신이 사무라이의 무사도였기 때문이다.
중국 손무(孫武)의 손자병법 설흔 여섯가지 계략 중 삼십육계(三十六計)는 도망가야 할 땐 주저하지 말고 도망칠 줄 알아야 한다는 계략이다. 이와 반대가 되는 선제공격 또한 손자병법의 설흔 여섯가지 계략 중 하나이긴 하나 삼십육계와 마찬가지로 상책은 아니다. 삼십육계는 패전, 선제공격은 침략의식이 짙다.
북의 미사일 도발을 두고 나온 아베 일본 관방장관의 대북 선제공격론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의 선대와 조상들이 무척 즐겼던 침략 근성의 전략이다. 우리가 선제공격론을 용인할 수 없는 것은 헌법의 수호의무때문이다. 일본 사람이 말한 선제공격은 북을 말한 것이지만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는 것이 대한민국 헌법의 영토(3호) 조항이다. 즉 아베 일본 관방장관의 대북 선제공격론은 헌법상 대한민국 영토에 대한 선제공격인 것이다. 미사일 도발에 대한 응징은 마땅하지만, 일본의 망발은 대북 응징과는 별개로 대처해야 하는 이유가 이에 있다.
일본은 이미 군사대국화 하였다. 자위대 예산이 연간 400억 달러로 해마다 5~7%씩 증액해 왔다. 첨단기술 발달로 인한 첨예무기의 군수산업은 세계적이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는 방안으로 일본의 재무장을 은근히 돕고 있다. 평화헌법 위장만 걷어내면 일본의 육상·해상·항공자위대 30만 병력은 세계 3위의 육·해·공 황군(皇軍)으로 당장 면모가 바뀐다.
1950년대초 6·25 한국전쟁으로 군수산업의 재미를 톡톡히 본 일본이 이젠 북의 미사일을 이유로 잠재워 온 군사대국 근성을 노골화하고 있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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