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 주심의 ‘탈선’

노무현은 대통령직과 정치인의 한계 구분을 거부한다. 대통령도 정치인이기 때문에 대통령의 정치활동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우긴다.

운동 경기에서 공정한 경기 진행의 책임을 맡고 있는 심판도 인간이다. 심판 역시 어느 팀이 이기길 바라는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상정은 다 있다. 그렇지만 어느 팀이 이기도록 경기 진행에 편파적 판정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 심판의 직분이다. 심판이 이같은 직분을 어기고 승부 조작을 시도해선 경기는 한마디로 엉망이 된다.

민주주의에서 선거는 당락, 곧 승부를 전제한다. 여러가지 선거가 있다. 대통령 선거는 그중 최고의 선거다. 심판의 불공정 행위로 인한 재앙 역시 최고로 영향을 끼친다. 노 대통령은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공명정대하게 치를 최고의 책임이 있는 최고의 권부다. 그런데 최고의 책임은 내팽개친 채 최고의 권부인 것만 챙긴다.

대통령은 “세계 어느 나라가 대통령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있느냐”고 국무회의에서 말했다지만, 대통령직과 정치인의 한계를 구분치 않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그의 말대로라면 대통령이 연임을 위해 재출마하면, 자신의 재당선을 위한 현직 대통령직의 전횡이 가능하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하면서 그런 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있지 않다. 만약 있다면 독재국가에서나 용인된다.

현행 헌법의 단임제가 다행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만약 중임제라면, 행정권의 수반인 대통령의 지위를 연임을 위한 자신의 차기 후보 당선, 즉 정치인을 구실로 악용할 잘못된 논리를 강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임이 제한되어 자신이 선수 겸 심판으로 뛰지 못하는 대신, 차기 정권에 직계를 선수로 내세울 요량인 적자 계승을 위해 행정권 수반의 최고 심판 자릴 벌써부터 편파 판정으로 일삼고 있다.

대통령이 그들 팬클럽인 ‘참여정부평가포럼’에서 가진 네 시간의 이른바 특강 중엔 청와대측이 밝힌대로 참여정부의 정책 비판에 대한 반론인 부분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만의 열광된 모임에 들뜬 분위기 탓이었을까, 아무튼 “그놈의 헌법…” 어쩌고 한 실언을 낳은 것은 그같은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래서인 지 안해도 될 말을 너무 많이 했다. 예컨대 특정 야당의 집권을 노골적으로 저지하고, 특정 야당의 당내 후보를 폄훼하거나 공약을 공격하는 등 이밖에도 숱하게 쏟아낸 선거 개입 발언은 선거를 공정하게 이끌 최고 책임자로서는 할 말이 아니다.

대통령이 공무원으로서 지켜야 할 선거법상의 중립의무, 선거운동금지,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 금지 등에 대한 위반의 의문이 성립되는 것은 객관적 관점이다. 청와대측이 이에 ‘선거법 시비가 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중앙선관위에 낸 것은 이례적이긴 하나 인색하게 여길 생각은 없다.

그러나 선관위의 최종 결정에 앞서 변론 기회를 달라는 생뚱맞은 공식 요청은 괴이하다. 더욱 흉한 것은 헌법소원을 내겠다는 것이다. “선관위가 납득할 수 없는 결론을 내린다면 헌법소원 등 헌법과 법률이 정한 쟁송 절차를 밟겠다”는 것은 정치적 압력이다. 그런 걸, 두려워할 이유는 없지만 가히 협박 수준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헌법 기관이다. 선관위 심의에 앞서 압력을 서슴지 않는 저돌성은 또 무슨 일을 저지를 지 알 수 없다.

노 대통령의 대선 개입 의지는 거의 확고하다. 선거구도 그림도 이미 그려 놓은 것으로 보인다. 대선 정국을 자신의 구도대로 몰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난관도 정면 돌파하고자 하는 기류가 감지된다. 헌법소원 등은 선거 개입에 관한 시비를 미결로 끌어 법률적 가부의 최종 판단에 앞서, 선거 개입의 장시간을 최대한 확보할 심산이 깔린 게 분명하다. 일찍이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볼 수 없었던, 현직 대통령의 개입이 이번 대통령 선거의 전례없는 불행한 특징이 될 것 같다.

선거법 등의 구애를 외면하는 덴 내란,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가 아니고는 재직 중 소추를 받지않는 형사상 특권 때문일 수가 있다. 고발을 하고 수사를 해서 혐의가 인정된다 하여도 재직 중 기소는 불가능하다. 당장은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건 있을 수 있다. 퇴임 후의 일이다. 퇴임 후 수사를 재개하거나 해서 혐의가 성립되면 그땐 기소가 가능하다. 이미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법정에 선 바가 있다. 더는 법정에 서는 전직 대통령을 보고 싶지 않다. 대통령 선거를 공정하게 관리할 주심이 편파적 판정을 주도하는 걸 보는 사회적 우려의 연유가 이에 있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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