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

노무현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 내용에 새로운 건 없다. 평소의 생각이나 했던 말을 강조했을 뿐이다.

경제를 비판한다 하여 경제가 잘못되기를 바라고 그러는 건 아니다. 대통령은 마치 잘못되기를 바라고 비판하는 것 처럼 말했지만 그럴 사람은 없다. 그렇게 들린 것은 듣기 싫은 말을 한 데 대한 대통령의 거부감일 것이다. 비판은 예컨대 기업친화정서와 함께 시장주의가 존중돼야 하는 것으로 집약된다. 현실은 크게 보아 이의 역주행으로 가고 있다. 여전히 우려되는 바가 많으나 경제를 낙관하는 대통령의 전망을 좀 더 두고 봐야할 것 같다.

대통령의 화술은 종잡기 어려운 ‘악어의 논법’을 연상케 한다. 사회양극화 해소의 해법을 증세에 둔 것이 며칠 전에 있었던 신년 연설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신년 기자회견 모두 연설에서는 당장 증세를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이것이 ‘모순되지 않느냐’는 기자 질문에 ‘증세를 따지기 전에 감세를 먼저 따져야 한다’고 답변했다.

독일의 대연정 사례를 들면서 타협과 대화의 정치를 역설했다. 그러고는 이어 유시민 입각 갈등에는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이를테면 입각을 당장 결정하지 않고 떠본 것이 되레 문제를 키우는 실수였다는 것이다. 인사는 인사권자의 권한이라는 생각을 부정할 마음은 없다. 다만 덧붙인다면 인사권은 인사권자의 권한이면서 책임이라는 사실이다.

대통령은 어떤 정책이나 문제에 대통령이 정답을 내놓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국민이 답을 제시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간의 경험으로 보아 그렇게 여겨지 지 않는다. 대통령은 미리 답을 정해 놓는다. 그 답이 정답이든 오답이든 간에 자신의 답에 필요한 말만 거둬 들인다.

예를 들면 무척 좋아해 보이는 토론이란 것도 그렇다. 미리 결론을 내린 자신의 생각을 주입시킨다. 이 때문에 남의 말을 듣기 보다는 자신의 말을 앞세우기에 바쁘다. 생각을 주고 받다가 보면 자신의 견해가 상대의 견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진정한 토론문화다. 대통령에겐 상대에 대한 승복의 토론은 한 번도 발견할 수 없었다.

회견 중 이런저런 일을 두고 ‘시대적 요구’란 말을 많이 썼다. 무엇이 시대적 요구일까, 사회적 합의의 대세이지만 이를 정확히 객관화하기는 어렵다. 내 생각은 시대적 요구에 합당하고, 네 생각은 시대적 요구에 역행하는 것으로 보는 독선은 참으로 위험하다. 국정의 난맥상, 측근비리, 정실인사, 낙하산부대 투입 등은 누가 봐도 ‘시대적 요구’라 할 수 없다. 이 정권이 원칙에 충실했다는 원칙 중엔 변칙이 너무 많다.

타협의 정치도 내가 양보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가 양보하는 것만이 타협이고, 원칙도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이 되는 상황논리는 신뢰성이 빈곤하다. 열린우리당의 잦은 ‘탈당’발설을 가리켜 ‘내가 탈당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당내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그렇게 말한 과거 형’이라는 황당한 얘기는 그같은 상황논리다. 그러한 아집은 신념이 아니다.

한·미공조에 이상이 없다는 대통령의 말을 곧이 들을 사람은 아마 있을 것 같지 않다. 미국의 대북정책 일환인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 등 PSI협력대책, 한국에 재정적 고립을 요청한 북달러화 위조대책은 도하 신문에 보도되기는 어제지만 이미 알려진 일이다. 중국·일본 등 주변 국가들마저 6자회담 재개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여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런 마당에 유독 대통령만 이상이 없다고 하는 것은 국민에 대해 책임있는 자세가 아니다. 부시 행정부의 강경 대북정책은 이미 정해진 기정 사실이다. 이에 대통령이 “북한의 체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압박을 가하고… 그와 같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한·미간에 이견이 생길 수 있다”고 밝힌 가정론은 오히려 국민의 불안을 증폭시킨다. 북의 고립을 막으려는 것은 이해하지만 북의 눈치보기와 달래기에 과연 끝은 없는 것인가 하는 핵심적 문제점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을 분명하게 밝힐 책임이 있다.

신년 기자회견은 별 알맹이 없이 끝났다. 엉뚱한 말이 튀어나오지 않은 게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엉뚱한 말은 안 나오긴 했지만 올 한 해도 순탄할 것 같진 않다.

/임 양 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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