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공중의 장소에서 처음으로 담배를 피운 곳이 버스칸 안이었다. 대학 입학식을 앞 둔 그 사이에 더 참지 못하고 어른 흉내를 낸다는 게 고작 그 짓거리였었다. 그 무렵엔 버스 안 같은데서도 담배를 마음대로 피울 수 있었다. 비좁은 틈새에서 담배 연기를 너도 나도 내뿜는 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얌체같은 짓이었지만 그땐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끽연권은 공공연하고 혐연권은 개인 사정이었던 것이다.
기차를 타도 금연칸은 고작 객차 한 칸으로 국한했을 뿐 객차 안에서 담배를 태우기가 예사였다. 금연칸도 잘 봐주어서 내주었던 게 요즘은 기차의 전 객차가 다 금연칸이 됐다. 그렇다고 흡연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기차만이 아니다. 지금 버스 안에서 담배를 피우다가는 아마 십중 팔구는 쫓겨날 것이다.
신문기자가 되고 나서다. 법조출입 시절이다. 큰 사건이 터지면 더러 밤을 새우기도 하는 취재경쟁에 녹초가 될 때가 있지만 재미 또한 있었다. 재벌급 대기업이 수사 대상에 오르면 기자실에 촌지 보따리를 싸들고 오는 것이 관행화 된 의례였었다. 그렇다고 쓸 걸 안쓰는 것도 아니고 집안살림에 보태는 것도 아니어서 술 마시고 ‘옛다 너도 너도 먹어라’하고 후배들에게 나눠주곤하는 객기를 부리기가 일쑤였지만 아무튼 그런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재벌 대상의 수사는 여전히 많다. 하지만 촌지 보따리를 싸들고 기자실을 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 그런 돈을 바라는 기자도 있을리 없다. 수사 중인 사건으로 촌지란 이름의 돈을 먹었다가는 영락없이 같이 떼 들어가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기업인에게 돈 받는 것 쯤은 당연한 것으로 치부했었다. 요즘 말로 대가성이 있던 없던, 뇌물이든 아니든 간에 정치자금으로 받았다고 하면 더 추궁하지 않았다. 정치인의 ‘정치자금’은 곧 기업인 돈 줄의 ‘면피’ 용어로 이렇게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정치자금에 영수증이나 합법, 불법이 따로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용서받지 못하는 세상이 됐다. 영수증을 떼어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불법 정치자금은 꼭 들통나 기업이 상처받고 정치권이 수렁에 빠지곤 한다. 전 같으면 정권과 가까운 정치인에 대한 수사는 으레 노골적으로 봐주던 검찰도 지금은 적어도 엄정 수사의 흔적을 드러내 보인다.
세상이 달라지긴 달라졌다. 아직도 달라진 것 보단 달라지 지 않은 게 더 많고, 달라져도 미흡한 게 많지만 세상이 그래도 적잖게 달라진 것은 맞다. 돌아보면 청수는 흘러가고 자갈만 남는 것처럼, 이민 안가는 사람이 마치 못나 보일만큼 이 사회가 절망의 땅으로 비칠 때가 없지 않긴 하다. 그러나 알고보면 암담한 가운데도 희망의 길로 가고 있다. 그 변화의 걸음 걸이가 비록 느려 답답한 가운데, 이마저 가시밭 길이긴 하여도 이 사회의 향방은 절망이 아닌 희망을 향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가 누구이든 듣기싫은 소릴 해야할 사람에겐 듣기싫은 말도 하고, 심지어 욕 먹을 일에는 욕도 퍼부어야 하겠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희망은 있다. 계절에 상관없이 사시사철 결식 아동이 늘어가고 수업료를 내지못해 교실에서 쫓겨나기도 한다는 소식은, 타임머신을 타고 춘궁기를 연례 행사로 겪던 신문기자 초년병 시절로 돌아가는 듯한 전율을 갖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보다 더 나은 세상에 살고 있다. 훨씬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희망은 그냥 다가 오는 것이 아니다. 희망은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호미로 밭두렁 김을 매는 이의 눈은 게으르고 손은 부지런하다. 눈으로 바라만 보는 희망은 너무도 멀리 있어 보이지만, 이를 향해 노를 젓는 손은 어느덧 희망에 접근시켜 준다. 세상은 달라져 간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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