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한 아이들

예전에는 부부가 이혼할 때 자식만은 서로 자기가 키우겠다고 싸움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거의가 자식은 네가 키우라고 책임을 떠넘기는 이상한 세상이 되었다. 이혼도 하기 전에 ‘재혼이나 취업에 방해가 된다’고 미리 자식부터 보호시설에 맡기려고 하는 철부지 부모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보호시설에 맡겨진 지 3개월이 넘도록 부모의 연락이 없으면 아이들은 보육원으로 보내진다. 이 아이들은 엄연히 친권자가 있기 때문에 입양도 할수 없다. 경기남부아동일시보호소의 경우 최근 이곳에서 돌보고 있는 80여명도 대부분 부모가 ‘맡긴’ 아이들이다. “혼자 도저히 못기르겠다”“재혼한다”는 등 이유로 자식을 쉽게 포기하려는 부모들의 상담이 한달 평균 60여건씩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부모들에게 버림을 받는가 하면 학대받는 아이들도 많다. 지난해 11월말 생후 15개월된 딸이 “자는 도중 갑자기 숨졌다”는 아버지의 신고가 있었다. 단순변사로 처리하려던 경찰은 아이의 몸을 보고는 기가 막혔다. 앙증맞은 몸뚱아리가 피멍으로 뒤덮여 멀쩡한 곳이 한군데도 없었다. ‘구타에 의한 간파열’이었다. 1년 전 실직 당하고 아내마저 가출한 뒤 혼자 아이를 키워오던 아버지의 화풀이성 상습폭행이 원인이었다. 아버지라는 말이 무참해진다. 가정 형편이 어려우면 부부가 함께 노력해야지 주부는 왜 15개월된 딸을 놔두고 가출했는가. 이 역시 어머니라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 다섯살배기 아들을 폭행하며 거리로 내몰아 혹한 속에서 구걸행위를 강요해온 비정한 어머니도 있다. 7살배기 어떤 남자아이는 학대를 하도 받아 기억상실증에 걸려 제 이름도 잊었다. 공포증은 상실되지 않았는 지 어른만 보면 방 한 구석에 웅크리고 벌벌 떨기만 한다. 신체적 성장도 더뎌 대소변조차 가리지 못한다. 부모에게 학대를 받고 자란 어린이의 3분의 1은 정신지체 등 심각한 후유증을 앓는다. 더욱 무서운 것은 학대 받고 자란 어린이는 나중에 자신의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학대의 경험을 ‘세습’한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어떻게 천벌을 받으려고 부모들이 어리디 어린 자기 아들 딸을 학대하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다. 거리를 걸으며 빨리 따라오지 않는다고, 또는 유원지에서 먹을 것 사달란다고 어린 아이를 때리는 잔인한 엄마들을 가끔 본다. 학대 받는 어린이들이 불쌍하다. 자식을 학대하는 부모들이 원망스럽다. /淸河

오늘 오후부터 설맞이 대이동이 본격화한다. 징검다리 연휴를 이용, 그제 오후부터 설귀성에 나선 이들도 많다. IMF사태에 버금가는 경기침체로 어느 때보다 썰렁한 설명절을 맞고 있다. 아니 IMF때보다 더 어려운 설을 맞는다는 이들이 적잖다. 하지만 세월이 어떻든 명절은 명절이다. 예년보다 고향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나 고향을 가든 비록 못가든간에 설명절의 감회가 없을수는 없다. 설은 조상들 생활이 우리 핏줄에 면면한 전래 최대 명절이다. 세수의 개념은 양력 정초가 일상화됐다 하나, 정서적 정초는 역시 음력설인 것이 민족의 고유 전통이다. 양력 정초를 지나면 더욱 춥지만 음력 정초를 쇠고나면 겨울이 풀리기 시작한다. 올 겨울은 특히 그러하여 20년만의 대설과 강추위로 한바탕 치도곤을 치르고나서 설을 맞는다. 소한 대한을 지나 입춘을 앞두고 있다. 올 설은 설을 고비로 춘색이 더욱 완연할 것 같다. 벌어먹기 어려운 민초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계절이 겨울이어서 가는 겨울 오는 봄은 반갑다. 고향을 찾지 못하는 이들도 크게 실망할 것은 없다. 올 가을 추석도 있고 또 내년 설도 있다. 살다보면 우여곡절이 있는 것이 인생이다. 귀성길은 언제나 복잡하다. 어디를 어떻게 가든 어차피 차가 막힌다. 서둔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귀성길도 그렇고 귀경길도 여유있는 마음가짐으로 가족이 무사히 다녀오는 것이 곧 행복이다. 오랜만에 고향가서 재회하는 친·인척이나 친지들에게도 좋은 만남이 돼야 한다. 설명절에는 윗분, 친구 그리고 아랫사람들에게도 덕담이 제격이다. 제 자랑이나 일삼고 남을 헐뜯는 쓸데없는 말로 모처럼의 만남에 얼굴 붉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무슨 일을 두고 의견이나 생각이 달라도 자기 고집만 부리는 것은 어리석다. 남의 말도 들을줄 알아야 한다. 인사를 해야 하는 예의가 있는 것처럼 인사를 받을줄 아는 예의가 있다. 남에게 대접을 받으려면 먼저 남을 대접할줄 알아야 한다. 좋은 설명절이 되는 것은 물질도 중요하지만 그보단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 /白山

방자한 일본

일본이라는 나라가 또 오만방자한 짓을 저질렀다. 2002년 월드컵대회 명칭을 제멋대로 변경, 일방적으로 한국에 통보한 것이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2002 FIFA Word Cup KOREA/JAPAN)’으로 정한 대회명칭을 ‘2002 FIFA 월드컵 일본·한국’으로 표기하겠다는 얄팍한 수단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월드컵 일본조직위의 엔도 사무총장이 한국측에 전화로 일방적으로 통보했다니 어이가 없다. 한국측을 무시하는 부도덕하고 몰상식한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지난 1996년 2002년 월드컵 대회국이 한국·일본으로 확정됐을 때 국제축구연맹을 비롯해 한국월드컵조직위원회와 일본월드컵조직위원회 등은 결승전을 일본에서 치르는 대신에 개막식은 한국에서 열고 공식명칭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으로 하기로 분명히 합의했었다. 그런데 일본이 이를 어기고 입장권과 각종 홍보물에 자국 이름을 앞세워 ‘2002 FIFA 월드컵 일본·한국’으로 표기하겠다는 것은 FIFA와 양국 월드컵조직위가 함께 정한 규약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처사인 동시에 한·일 공동개최의 기본정신도 크게 훼손하는 망상이다. 한국월드컵조직위 정몽준 공동위원장이 “만약 일본이 결승전을 양보하고 개막식과 대회명칭을 바꾸는 것을 제의한다면 이는 충분히 고려해 볼 수 있다”고 한 발언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월드컵 대회의 공식명칭을 바꾸기 위해 결승전 개최지를 한국에 양보하겠다는 뜻을 먼저 밝힌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전화통보’한 일본측의 간계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알고 보면 결승전보다는 개막식이 더 중요한 것이다. 결승전은 기량의 성패를 보이는 경기이지만 개막식은 목적을 세계만방에 선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일본에서 개막식을 먼저 하고 한국에서 결승전을 치른다 해도 효과는 개막식이 열린 나라가 훨씬 크다. 결승전이 어느 나라에서 열렸다는 데 관심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나라가 우승, 월드컵을 차지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명칭이 변경돼서는 절대로 안된다. ‘2002 월드컵 한국조직위원회’를 공동위원장체제로 운영하고 있는 것도 재삼 못마땅하다. 그래서 일본이 한국측을 얕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淸河

막가는 장삿속

요즘, 어린이들을 상대로 한 소위 ‘행운의 부적’과 점 보는 카드의 일종인 ‘타롯카드’를 문구점 등에서 판매하고 있어 걱정거리가 또 한가지 늘었다. 더구나 이러한 상품(?)에는 ‘애인얻는 부적’‘재물 생기는 부적’ 등 어린이들과 전혀 상관없는 문구가 표시돼 있어 오늘날 장삿속은 확실히 눈이 멀었다. 원래 부적(符籍)은 민속신앙과 같은 것으로 악귀를 쫓거나 부귀영광을 가져다 준다고 믿는 주술적 도구다. 일상적으로 쓰이는 글씨로부터 알 수 없는 그림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실로 다양하다. 부적의 기원은 인류가 바위나 동굴에 주술적인 그림을 그리던 원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암각화(岩刻畵)가 그런 주술적인 목적을 지닌 것으로 추측되지만 확실한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처용(處容)이 그의 아내를 범한 역귀를 노래와 춤으로 감복시킨 뒤 처용의 화상(畵像)을 그려서 벽에 붙인 곳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약속을 시켰다는 설화는 당시의 주문(呪文)과 주부(呪符)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동학혁명 때에 궁을부(弓乙符)를 사루어 먹으면 총과 화살을 피할 수 있다고 하여 부적이 쓰였다고 전한다. 현재 민간에서 사용되고 있는 부적이 어디서 온 것인지는 알수 없으나 한자로 엮어진 것 가운데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 있고, 불사(佛寺)에서 나온 것 중에는 인도의 영향을 받은 것이 있다. 부적을 황색 바탕에 붉은 색깔로 그린다는 것은 색채 상징에 비추어 그럴듯한 일이다. 황색은 광명이며 악귀들이 가장 싫어하는 빛을 뜻한다. 부적에 日·月·光자가 많은 것도 이에 비추어 이해할만 하다. 주색(朱色)은 중앙아시아 샤머니즘에서 특히 귀신을 내쫓는 힘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적색은 피·불 등과 대응하며 심리적으로 생명과 감정의 상징이기도 하다. 불은 정화하는 힘을 지닌 것이고 보면 주색이 악귀를 내쫓는데 적절한 주력(呪力)의 색깔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방에서 주사(朱砂)를 약재의 하나로 쓰이는 까닭의 일부를 여기서 찾을 수도 있겠다. 부적의 효험이 정말 있었다면 동학혁명군들이 죽었겠는가. 가난하고 원통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겠는가. 동심을 현혹, 멍들게 하는 우표 크기만한 부적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으니 어린이들을 보살피는 일에 부모들이 정말 정신 차려야겠다. /淸河

이상한 정부

우리나라는 청소년 기준 연령도 제대로 못 정하는 딱한 국가다. 지난 해 2월 국무총리실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는 청소년보호연령을 ‘만 19세 미만’에서 ‘연 나이 19세 미만’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연 나이’는 현재 연도 (2001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숫자이다. 그러니까 생년월일이 1982년 7월1일인 사람은 2001년에 연 나이로 19세가 됐지만 만 나이로는 7월1일이 지나야만 19세가 되는 것이다. 청소년보호위 개정안대로 법이 바뀌면 1982년생 모두가 태어난 달에 관계없이 ‘19세’를 인정받아 성인이 된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각종 문화관련 법안의 개정을 준비하던 정부규제개혁위원회가 애매한 보도자료를 냈었다. 현행 영화진흥법, 공연법, 음반·비디오물 및 게임물에 관한 법률 등 3개 문화관련법은 청소년보호법과 달리 ‘만 18세 미만’을 청소년으로 규정했다. 규제개혁위는 “문화관련법 연령규정을 청소년 보호법처럼 ‘19세’ 바꾸겠다”고 밝힌 것이다. 규제개혁위는 이 19세가 ‘만 19세’인지 ‘연 19세’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혼란은 올해 열린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법안심사 소위에서 가중됐다. 규제개혁위가 당초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았던 ‘19세’개념을 ‘연 나이 19세’로 바꾸어 제안하긴 했으나 국회 문광위 소위가 지난 5일 “대학 1학년생 중 연 19세가 안되는 사람도 많으므로 잘못하면 이들에게 문화 접촉의 기회를 박탈할 위험이 있다”며 정부안을 거절한 것이다. 그러면서 현행 ‘만 18세’규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만 19세’를 기준으로 청소년음주를 단속하고, 청소년보호위는 ‘연 19세’로 보호법 개정을 마련했으며, 국회는 ‘영화나 음반에 대해선만은 ‘만 18세’가 청소년 기준’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인으로서의 책무를 일깨워주며 성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부여하기 위해 지정된 ‘성년의 날’은 그해에 만 20세가 되는 사람을 위한 행사이다. 국어사전에는 ‘성년’을 “신체나 지능이 완전히 발달되어 완전한 행위능력이 있다고 간주되는 나이·만 20세이상·성인(成人)”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여야가 당리당략상 투쟁하는 것도 아니고 정부·여당이 규정하는 청소년 기준 연령 하나 통일안되는 판국이니 국론이 어떻게 일치되겠는가. 예산이 필요한 것도 아닌 청소년 연령 규정을 놓고 이렇게 각 부처의 협조가 이뤄지지 않는 국가에서 살고 있다는게 한심스럽다. /淸河

야구 심판 얘기를 다시 해야겠다. 주심의 오심을 전제해두고 하는 경기가 야구다. 프로든 아마든 다 같다. 주심이 보는 스트라이크존은 심판마다 각기 다르다. 투수의 투구는 시속 120㎞ 이상이다. 이를 스트라이크나 볼로 보는 순간의 판단도 어렵지만 다이아몬드 표지판을 기준으로 판별하는 공간의 차이 또한 주심의 시각에 따라 다르다. 높은 공, 또는 낮은 공을 좋아하는가 하면 안쪽, 바깥쪽을 보는 각도 역시 차이가 있다. 대개 야구공 반만의 차이는 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니까 주심의 심판엔 야구공 반만한 오심은 있는 것으로 치고 경기를 치른다. 세상에 이처럼 불공정한 경기가 어디에 있겠나 싶지만 공정한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주심마다의 오심을 모든 선수들에게 차별없이 똑같이 적용하기 때문에 비록 오심이라도 경기는 공정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상대 선수에 따라 누구에겐 이렇게 또 누구에겐 저렇게 적용하거나 상대 팀에 따라 들쭉날쭉하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인이 된 김동엽씨는 프로야구 청룡팀 감독시절 “야구는 이래서 신용을 담보로 한 가장 신사적인 운동”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야구의 이런 오묘함은 사회의 일상생활에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사회생활은 경우란 것이 있다. 경우의 가치기준을 상대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해서는 공평하다 할수 없다. 법과 원칙도 사람을 봐가며 적용을 달리해서는 역시 공평치 못하다. 비록 잘못된 법이나 잘못된 적용일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하면 공평하다. 그러나 좋은 법, 잘된 적용일지라도 사람에 따라 달리 해서는 공평치 못하다. 법의 위엄이 많이 떨어진다고 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간다. 이는 법 자체의 잘못이 아니다. 법을 적용하는 이들의 잘못이다. 권력을 가진 이들이 제 좋을대로 법과 원칙을 갖다대는 신뢰의 상실이 법과 원칙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있다. 이처럼 사회규범에 혼란이 오면 사회생활이 어려워진다. 가치관의 혼돈 때문이다. 법은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것이 아니다. 법 운용을 자의적으로 하면 언젠가는 그 또한 자의적 운용의 대상이 되는 악순환을 되풀이 한다. ‘형명(법)의 적용은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이 막힘이 없고 유연해야 한다’고 했다. 한비자의 말이다. /白山

두 故事

한비자 십과편에 나오는 기록이다. ‘무엇을 작은 충성이라 말하는가. 초나라 공왕과 진나라 여공이 연릉에서 싸웠다. 초군은 패색이 짙고 공왕은 눈을 다쳤다. 한창 싸울 때 초나라 장군 자반이 목이 말라 마실 것을 구했다. 심복 곡양이 술을 올렸다. ‘술은 치워라’하였으나 ‘술이 아닙니다’고 했다. 자반은 원래 술을 즐겼으므로 물이 아니고 술인줄 알게 됐으나 그만 입을 떼지 못하고 다 마셔 취하고 말았다. 전쟁은 초군의 대페로 끝났다. 공왕이 설욕차 다시 싸우려 했으나 속병을 핑게대고 나타나지 않는 자반의 군막을 직접 찾아보니 술냄새가 진동했다. (중략) 자반은 큰 죄로 다스러져 목을 베이었다. (중략) 그러고보니 곡양의 작은 충성이 자반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큰 충성을 해치는 작은 충성의 폐악이 이러하다’ 사마천 사기열전 평원군편엔 또 이런 고사가 전한다. 조나라 공자 평원군은 어진 선비를 좋아하여 문객이 많았다. 한번은 그의 애첩이 집 2층에서 내려다보인 사가의 절뚝발이를 보고 허리가 끊어지게 웃었다. 이튿날 절뚝발이가 평원군을 찾아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첩이 나를 보고 웃은 것은 당신의 덕에 흠을 입힌 것입니다. 원컨대 조소한 분의 목을 주십시오.” 평원군은 “알았다”며 돌려 보내놓고 “저 사람이 한번 웃었다해서 애첩을 죽이라고 하니 정신이 있는 놈인가”하고 비웃었다. 얼마후 선비들이 거의 다 떠나버려 평원군은 비로소 애첩을 편애한 소치임을 알고 그녀를 죽이고 절뚝발이집까지 찾아가 정중히 사과했다. 그랬더니 선비들이 다시 모여들어 전보다 더한 총명을 찾을 수 있게 됐다. 장군 자반의 얘기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 대한 충성의 자세, 평원군의 이야기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자세를 일깨우는 고사라 할 것이다. 또 사람이 무엇을 하며 살든간에 누구에게나 다 귀담아 들어둘만한 경종이 되기도 한다. 어제 열린 한빛은행 부정대출사건의 국회특별조사위원회 텔레비전 중계를 보면서 국민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전 청와대 공보수석으로 대출 외압여부의 증인으로 나온 박지원씨에 대한 진실규명은 이끌어내지 못했다. 생사람 잡는 억울함인지, 외압의 실체인지 여부는 수년후에야 가려질 것 같다. 권력의 세계에서는 처신에 두 고사가 의미하는 바를 특히 새겨들을만 하다.

쓰레기 봉투값

일부 자치단체의 쓰레기 봉투값 인상이 시민단체와 마찰을 빚고 있다. 다툼의 쟁점은 쓰레기 봉투값으로 부담하는 쓰레기 수거의 기준을 어디까지로 보느냐에 있는 것 같다. 쓰레기처리의 종량제는 수익자 부담의 원칙으로 보아 봉투값 현실화는 타당성이 있다. 종래 봉투값이 수거비의 30%밖에 안될땐 나머지 70%는 일반회계에서 충당했다. 이 경우, 일반회계는 시민의 세부담이므로 종량제는 사실상 30%밖에 실시되지 않았다고 말할수 있다. 그러나 현실화 기준이 수거 인력 및 장비의 운영비를 넘어 처리비용등 모든 경비를 포함한다면 문제가 다르다. 이같은 광의의 쓰레기 봉투값 적용에 대해 환경부지침이 그렇게 돼 있다고 말하는 것 같지만 정말 그런 지침이 있는지, 아니면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 것이 아닌지 궁금하다. 만약에 그런 지침이 있었다해도 지역주민을 위해 적용을 배제해야 할 자치단체가 ‘얼씨구나’하는 생각으로 앞장서는 것은 유감이다. 쓰레기 매립이나 소각시설등은 도시기반 시설의 일종이다. 도시기반 시설은 자치단체의 의무에 속한다. 이런 도시기반 시설을 하라고 주민들이 세금을 내는터에 처리비용에 포함시켜 이중으로 받는 것은 부당하다. 예를들면 주민등록등·초본 발급수수료같은 것도 수익자부담이다. 이의 수수료 산정에 단순 산출기초를 넘어 행정장비로 당연히 갖춰야 하는 전산시스템 비용까지 분담시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지방재정확충방안의 하나로 수익자부담을 현실화하는 추세이긴 하다. 그러나 현실화는 어디까지나 협의의 개념을 기준삼아야 하는 것이 또한 자치단체가 부하받고 있는 조장행정이다. 자치단체마다 쓰레기 봉투값이 들쭉날쭉하여 말이 많곤 하지만 차이가 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자치단체의 방침과 능력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차이점이 있는 것이 관치단체의 천편일률적 행정과 다른 자치행정의 특징이라 할수 있다. 하지만 자치단체는 이제 쓰레기 봉투값의 자체산정기준이 무엇인지를 주민들에게 공개할 필요가 있게 됐다. 생활행정인 자치행정은 투명행정이다. 지역주민들이 잘 납득할 수 없는 쓰레기 봉투값 인상에 수거마저 불편이 많은 청소행정이 되어서는 안된다. /白山

눈(雪)

속담에 “함박눈이 내리면 따뜻하고 가루눈이 내리면 추워질 징조”라는 말이 있다. 이는 눈의 상태를 보고 날씨를 예상하는 것으로서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 함박눈은 온도가 비교적 높은 온대지방에서나 상층의 온도가 그다지 낮지 않은 곳에서 내리는 습기가 많은 반면에, 가루눈은 기온이 낮은 한대지방이나 상층으로부터 지표면 부근까지의 기온이 매우 낮은 곳에서 눈의 결정이 서로 부딪쳐도 달라붙지 않고 그대로 내리기 때문에 형성되는 건성(乾性)의 눈이다. 이처럼 눈은 상층대기의 온도분포에 따라 그 성질이 달라지기 때문에 온도가 낮을 때는 가루눈이 내리고 온도가 높을 때는 함박눈이 내리게 된다. 따라서 떡가루와 같이 고운 싸락눈이 내리면 상층으로부터 한기가 가라앉기 때문에 추워질 징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눈은 녹아서 수분을 공급하는 이로운 점도 있으나 여러가지 피해를 주기도 한다. “납설(臘雪)은 보리를 잘 익게 하고 춘설(春雪)은 보리를 죽인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납설, 즉 음력 12월의 눈은 한겨울에 내리는 눈이므로 추위로부터 보리를 보호하여 주는데 반하여, 춘설은 기온이 높아지는 봄에 내리는 눈이기 때문에 한창 자라고 있는 보리에 동해(凍害)를 주어 죽게 한다는 뜻이다. 요 며칠 사이에 전국적으로 납설이 내려 교통대란은 있었지만, 그건 정부의 무능한 교통대책 탓이고 산천에 쌓인 백설은 고맙기까지 하다. 납설이 내리면 더러워진 수분이 맑아지고 풍년까지 든다고하니 이 또한 얼마나 좋은가.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서글픈 옛 자췬 양 흰눈이 나려//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희미한 눈발/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싸늘한 추회(追悔)이리 기쁘게 설레이느뇨.//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흰 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산천초목에, 메마른 도시에도 쌓인 백설을 보면 잠시나마 세상사 시름을 잊게 하는 김광균(金光均)의 詩 ‘설야(雪夜)’가 생각난다. /淸河

무다언(毋多言)

거짓말 잘 하는 사람은 정치가들만이 아니다. 공직자들도 거짓말을 곧잘 한다. 고위층일수록 더욱 심하다. 거짓말을 한번도 안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들은 거짓말과 공약을 밥먹 듯 한다. 그래도 이제 만성이 되었는지 그저 또 속았구나하면 어느정도 분통이 가라 앉는다. 그런데 공직자의 경우는 좀 다르다. 공직자의 거짓말이나 헛소리가 문제가 되는 것은 국가정책에 대한 불신감을 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금융권 구조조정을 하면서 공적자금이 투입된 은행에 대한 감자(減資)조치가 결정되자, 지난 1998년 “감자는 없을 것”이라던 재정경제부장관의 약속을 믿고 투자했던 국민은 그야말로 환장할 지경이 되었다. 이근영(李瑾榮) 금감위 위원장은 지난 9월 현대건설 사태 때 “4대 그룹 계열사도 출자전환 대상에 포함된다”고 밝혔으나 이튿날 진념(陣稔) 재경부장관이 “4대 그룹 계열사에 대한 은행의 출자전환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정반대로 발언했었다.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제대로 한다고 했다. 거짓말도 앞뒤가 맞아야 속아 넘어가는데 도대체 철없는 아이들의 말씨름 같아 한심하다. 국민의 정부 집권이후 수많은 개혁안을 내놓았지만 제대로 지켜지는 것이 없자 예전에는 별생각없이 정부정책을 따르던 국민이 이제는 정부를 믿지 못하는 딱한 형편이 되었다. 농민들이 “정부에서 권장한 농작물과 반대되는 것을 심어야 이익이 된다”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 것은 비극이다. 공직자의 몸가짐 가운데 말조심에 대한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공직자가 한마디 말 때문에 ‘설화’사건에 연루돼 불명예 사퇴하거나 정부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야기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일찍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은 ‘목민심서(牧民心書) 제2편 율기육조(律己六條)에서 공직자들이 지녀야 할 덕목과 품행을 ‘무다언(毋多言)’이라고 적었다. 공직자는 “말을 많이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또 목민심서 제5편에 “어중지도(馭衆之道)는 위신이이(威信而已)”라는 구절이 있다. 대중을 통솔하는 방법은 위엄과 믿음 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공무원들은 그러하지가 못해 아닌게 아니라 큰일이다. /淸河

大雪

20년만에 대설이 내려 겨울 가뭄이 해갈됐다. 눈(雪)은 우리의 생활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예부터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의 강설량 측정은 길이의 단위인 자(尺)를 사용했으며 눈(雪)·대설(大雪)로 나누어 구별하였다. 특히 눈이 없었던 겨울의 무설(無雪)의 기록이 13회나 되며, 철에 맞지 않는 눈·대설의 기록도 있다. 철이 이른 가을철의 눈과 대설에 대한 기록은 3회, 철이 늦은 봄철의 눈·대설은 7회의 기록을 보이고 있다. 더욱이 초여름의 눈이나 여름철의 눈은 이변(異變)으로 볼수 있는데 이에 대한 기록으로는 신라 벌휴이사금 9년(192년) 음력 4월 초여름 경도(京都)에 석자의 눈이 내렸고, 신문왕 3년(683년) 음력 4월 여름에 한자의 눈이 내렸으며, 신라 헌덕왕 7년(815년) 음력 5월 여름에 눈이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대설, 폭설에 관한 기록 중에는 ▲조선조 태종 9년(1409년) 4월21일 “영흥부(永興府)에 석자나 되는 눈이 내려 나뭇가지가 눌려 꺾어졌다.” ▲세종 3년(1422년) 2월6일 “제주에는 기르는 말이 1만마리가 넘는다. 이전까지 이 섬은 따뜻한 곳이어서 겨울에 적설이 없었다. 그런데 금년은 추위가 매우 심하고 눈이 5∼6자나 쌓여 많은 말이 얼어 죽었다.” ▲단종 1년(1453년) 1월29일 “큰눈이 내려서 3∼4자나 쌓이는 까닭에 새나 짐승들이 굶주려서 집 안으로 들어 왔다.” ▲중종 20년(1526년) 1월24일 “길주(吉州)·명천(明川)·경성(鏡城) 등지에 12월3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큰 눈이 내려 평지의 눈 깊이는 4∼5자에 달하였고 밤중에는 광풍이 불어 해수가 밀려와 바닷가의 인가가 물에 잠겨 집을 비우고 도망가거나 눈속에 빠져 동사하는 자가 대단히 많았다”고 한다. 1924년 만석꾼의 사재를 투자하여 ‘조선문단’이라는 순문예지를 창간, 이광수(李光洙)로 하여금 주재케하여 한국신문학 발전과 민족주의 옹호에 힘쓰며 ‘인생극장’‘마도의 향불’ 등 많은 명작을 발표했으면서도 말년에 대중작가라고 하여 문단에서 외면당한 방인근(方仁根·1899∼1975) 선생이 생전에 서울 근처 송추의 회음자리에서 “지금 계룡산에 대설이 내리고 있다. 나는 그곳에 가야겠다”고 한 옛일이 생각난다. 동석했던 지지대子는 그때 취중언행으로 생각했었는데 여름에도 눈이 내린 것은 문인의 마음속에서만은 아닌 모양이다. 옛날이긴 하지만 여름에도 대설이 내렸다니 자연의 조화는 경외스럽다. /淸河

강창희

▲강창희(姜昌熙) ▲1946년 대전출생 ▲대전고졸업 ▲육사25기 ▲육군대학 교수 ▲중령예편 ▲민정당 발기인 ▲총리 비서실장 ▲11·12·14·15·16대 국회의원 ▲자민련 부총재 ▲저서 ‘한반도의 국제환경’ 등.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환상의 섬 소인국에 가면 정상인이 비정상인이 된다. 그리스의 신화 가운데 이런게 있다. 눈이 하나만 있는 사람들 가운데 들어간 두 눈의 사람은 비정상인 취급을 당한다. 강창희의원이 마침내 자민련에서 왕따를 당했다. 엊그제 당기위원회에서 제명이 의결됐다. 의정사상 초유의 의원빌려주기로 민주당에서 배기선(부천 원미을) 송석찬(대전 유성) 송영진의원(충남 당진) 등 세 의원의 자민련 입양에도 불구하고 강의원의 반대로 원내 교섭단체 구성을 못한 앙갚음이다. 강의원은 “방법이 틀렸다. 내가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만나서라도 국회법개정의 정도를 찾겠다”고 말했으나 틈을 주지 않고 제명했다. 자민련은 “당을 괴뢰정당이라며 교섭단체 등록에 서명을 거부한 것은 해당행위”라고 제명 이유를 밝혔다. 구차하기 짝이 없는 의원빌려주기가 떳떳한 방법이 아님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입양의원은 자민련의 당원이기보단 수가 틀리면 어느때든 친정으로 되돌아가 교섭단체를 무산시킬 수 있는 민주당의 감시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취약점을 안고 있는 김종필 명예총재가 DJP공조 복원에도 독자노선을 걷겠다고 하는 것은 차라리 의원을 빌리지 않은 것보다 못한 허세에 불과하다. 의원임대에 감격하는 것이 당을 위한 것이고 정공법 주장은 과연 해당 행위가 되는 것인지 남의 일이지만 정말 헷갈린다. 교섭단체 등록 문턱에서 막상 1명이 모자라 애간장을 태우는 자민련은 그렇다해서 더 빌릴수도 없고 외부영입도 여의치 않아 김 명예총재의 엄명으로 마지막 압박용 카드를 선택한 것이 제명이다. 당기위원회의 제명결의는 이한동총재의 결재가 나야 효력이 발생하므로 강의원은 아직까진 당원이다. 총재결재는 강의원과 김 명예총재의 면담결과에 따라 향배가 정해질 것이다. 마지막 면담에서도 소신을 끝내 굽히지 않을 것인지, 아니면 굴복할 것인지가 매우 주목된다. 고군분투에 대한 평가는 그때까지 유보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강창희, 그는 누구일는지? 소인국이나 애꾸눈이 판도의 사람인지 아닌지가 궁금하다. /白山

여로

가난한 집안의 분녀(태현실)가 양반집 저능아 도령 영구(장욱제)와 혼인한다. 영구는 “아부지(아버지)야, 제기차자…” 할만큼 지능이 낮다. 분녀는 짖궂은 시어머니(박주아), 시누이(권미혜) 등쌀에 고된 시집살이를 한다. 분녀를 사모하는 동네건달 달중(김무영)의 추근댐, 흉계는 그녀를 가끔 어려운 처지에 빠뜨리게 하곤 한다. 그러면서도 신랑을 감싸며 항상 최선을 다하는 인내와 슬기를 잃지 않은 가운데 8·15 해방과 6·25 전쟁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몰락한 시댁을 분녀 혼자의 힘으로 꾸려간다. 마침내 재산을 모아 병든 시부모에겐 효부로서, “색시야, 색시야!”하는 남편에게는 내·외조를 다한 아내로서의 부덕을 보여주는 인간승리의 드라마다. 1972년 4월 3일부터 그해 12월 29일까지 KTV가 방영한 드라마 ‘여로’의 줄거리가 이렇다. 이미 작고한 이남섭씨가 극본을 쓰고 연출하면서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다. 그 무렵, ‘여로’가 방영되던 오후 7시부터 7시 40분까지는 택시탈 손님이 없다시피 거리가 한산했을 만큼 공전의 히트를 쳤다. 시청률이 90%를 돌파했었다. 주연을 맡은 영구역의 장욱제씨는 바보역 인상이 너무 깊게 남아 연기생활을 더 못하고 제주도 허니문하우스의 사장으로 전업했다. 벌써 29년이 지났다. 드라마 ‘여로’가 극단 세령에 의해 악극으로 다시 무대에 오른다고 한다. 수원공연은 2월 중순쯤인 것 같다. 그때 그 연기진들이 대부분 다시 무대에 서지만 고인이 된 달중역의 김무영씨는 손호균이 맡는다. 분녀역에 원래의 태현실과 함께 귀순배우 김혜영이 더블캐스팅된 것은 태현실의 나이때문인 듯 싶다. 시어머니역의 독신녀 박주아는 당초 20대 후반에 역할을 맡았으므로 그간의 경력에 겹친 지금의 나이가 아주 제격일 것이다. 그러나 50대 후반의 장욱제가 신랑역을 하는 것은 드라마가 아니고 연극이기 때문에 하긴 하지만 아무리 분장해도 조명에 세심한 신경이 쓰일 것이다. ‘여로’는 작품 자체가 신파조여서 신파극의 모태인 악극으로 구성하는 것은 아주 안성맞춤이다. 올드팬들에게는 추억을 되새길수 있는 무대가 될 것이다. 신파조이긴 하나 휴머니티가 살아 숨쉬는 현대극이나 다름이 없다. 궁금한 것은 지금의 젊은이들이 분녀를 어떻게 보고 해석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여로’의 악극공연은 이 점에서 관객의 반응이 무척 주목된다. /白山

여로

가난한 집안의 분녀(태현실)가 양반집 저능아 도령 영구(장욱제)와 혼인한다. 영구는 “아부지(아버지)야, 제기차자…” 할만큼 지능이 낮다. 분녀는 짖궂은 시어머니(박주아), 시누이(권미혜) 등쌀에 고된 시집살이를 한다. 분녀를 사모하는 동네건달 달중(김무영)의 추근댐, 흉계는 그녀를 가끔 어려운 처지에 빠뜨리게 하곤 한다. 그러면서도 신랑을 감싸며 항상 최선을 다하는 인내와 슬기를 잃지 않은 가운데 8·15 해방과 6·25 전쟁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몰락한 시댁을 분녀 혼자의 힘으로 꾸려간다. 마침내 재산을 모아 병든 시부모에겐 효부로서, “색시야, 색시야!”하는 남편에게는 내·외조를 다한 아내로서의 부덕을 보여주는 인간승리의 드라마다. 1972년 4월 3일부터 그해 12월 29일까지 KTV가 방영한 드라마 ‘여로’의 줄거리가 이렇다. 이미 작고한 이남섭씨가 극본을 쓰고 연출하면서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다. 그 무렵, ‘여로’가 방영되던 오후 7시부터 7시 40분까지는 택시탈 손님이 없다시피 거리가 한산했을 만큼 공전의 히트를 쳤다. 시청률이 90%를 돌파했었다. 주연을 맡은 영구역의 장욱제씨는 바보역 인상이 너무 깊게 남아 연기생활을 더 못하고 제주도 허니문하우스의 사장으로 전업했다. 벌써 29년이 지났다. 드라마 ‘여로’가 극단 세령에 의해 악극으로 다시 무대에 오른다고 한다. 수원공연은 2월 중순쯤인 것 같다. 그때 그 연기진들이 대부분 다시 무대에 서지만 고인이 된 달중역의 김무영씨는 손호균이 맡는다. 분녀역에 원래의 태현실과 함께 귀순배우 김혜영이 더블캐스팅된 것은 태현실의 나이때문인 듯 싶다. 시어머니역의 독신녀 박주아는 당초 20대 후반에 역할을 맡았으므로 그간의 경력에 겹친 지금의 나이가 아주 제격일 것이다. 그러나 50대 후반의 장욱제가 신랑역을 하는 것은 드라마가 아니고 연극이기 때문에 하긴 하지만 아무리 분장해도 조명에 세심한 신경이 쓰일 것이다. ‘여로’는 작품 자체가 신파조여서 신파극의 모태인 악극으로 구성하는 것은 아주 안성맞춤이다. 올드팬들에게는 추억을 되새길수 있는 무대가 될 것이다. 신파조이긴 하나 휴머니티가 살아 숨쉬는 현대극이나 다름이 없다. 궁금한 것은 지금의 젊은이들이 분녀를 어떻게 보고 해석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여로’의 악극공연은 이 점에서 관객의 반응이 무척 주목된다. /白山

구조조정

경제를 살리기 위해선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불가피한 선택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는 쉬워도 구조조정을 당할 입장을 생각하는 것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구조조정과 관련이 없는 사람, 구조조정을 해도 자신은 당하지 않을 사람들은 구조조정을 목소리 높여 외친다. 남의 일이므로. 하지만 구조조정을 당할 입장에 있는 근로자들은 마냥 초조하다. 그렇다고 거부할수도 없으므로. 대우자동차만 해도 자진 퇴직신청이 구조조정 규모의 26%에 머물고 있다. 나머지 74%는 강제로 쫓겨날 판이다. 2차 금융계 구조조정으로 또 5만명여명이 직장을 잃게 된다. 이래저래 실업자 수가 재차 100만명을 돌파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실직자 1명의 부양가족을 4명으로 잡아도 400만명이 생계의 터전을 잃는다. 구조조정 바람에 노사간에 갈등의 골이 깊어 서로 도청을 경계하는 불신사태까지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전한다. 가장 절실한 공기업의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한 것은 아이로니컬한 현상이다. 방만한 예산운용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공기업이야말로 시급히 군살을 도려내야 한다. 누구보다 정권쟁취의 전리품삼아 낙하산 인사로 임원진에 앉혀놓은 비전문가들부터 쫓아내고 수도 줄여야 한다. 어느 공기업엔 사장을 포함한 임원진 8명 가운데 전문가는 겨우 1명이다. 특히 기술분야의 비전문가는 자리만 높을수록이 잔소리가 더욱 심해 전문가의 의욕을 꺾기가 일쑤다. 앞으로 있을 공기업의 구조조정은 비전문가의 추방으로 상층구조의 능률화를 기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리를 잃어도 다 먹고 살만한 처지다. 구조조정으로 막상 불쌍한 사람들은 일반 근로자들이다. 자본주의의 경제구조에 따라 발생하는 구조적 실업은 장기적 실업인 것이 특징이다. 구조조정도 이젠 달라져야 한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무턱댄 인원감축보단 기업수익성 개선에 중점을 두어야 하고 특히 공적자금을 손실낸 경제사범은 일벌백계로 엄중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난 집에서 도둑질 하는 것처럼 공적자금 투입의 와중을 틈타 못된 짓을 했거나 방관한 책임자는 본보기로 중형에 처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구조조정을 당한 사람만이 너무 억울해서는 사회정의가 살아있다 할수 없다.

누님같이 생긴 꽃

유부녀의 夫자는 지아비부자인 반면에 유부남의 婦자는 며느리부자인 점이 특이하다. 아내가 있는 남자를 가리키는 말 그대로 하면 ‘부인부’라든지 ‘지어미부’라야 하는데도 ‘며느리부’라고 한다. 여자가 시집을 가면 한 남자의 아내가 되는 것이지만 그보단 한 집안의 며느리로 보는 것이 시댁과 더 일체감을 갖는 것으로 해석된 연유가 아닌가 생각된다. 유교사상의 여필종부 관념은 많은 여권을 제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레짐작하는 것처럼 말살된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출가한 딸의 상속권이 있었으며 집안의 어른이 된 노마님은 대소사에 막강한 재량권을 행사했다. 무엇보다 타고난 성씨를 바꾸는 일이 없다. 세계에서 여성이 남편의 성씨를 따르지 않는 나라는 우리와 중국밖에 없다. 서구는 물론이고 일본도 결혼하면 남편의 성씨로 따라 바꾼다. 서구사회 여성이라고 하여 예전부터 우리 사회보다 별로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모파상의 소설 ‘여자의 일생’,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이 나온 것은 다 19세기후반의 사회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또 여성의 문밖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조선시대에도 자유분방한 여인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성종조에 천민과도 교접을 가리지 않을만큼 수많은 분방자재의 훼절로 조정을 발칵 뒤집은 어우동은 대감반열의 딸이며 종실의 부인네였다. 전래 설화에 나오는 옹녀는 색녀로 유명하지만 그만의 책임이랄수는 없을 것이다. 변강쇠같은 남자가 있었기 때문에 옹녀같은 여자가 등장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근래 아내의 부정에 의한 이혼률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남편의 부정에 의한 이혼률도 마찬가지다. 여기엔 양쪽 모두 이유가 있겠지만 어떻든 남편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보는 것이 상궤다. 이혼률이 높아지는 사회가 결코 건강한 사회랄수 없다. 요즘 여성의 자유분방함을 개탄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렇긴하나 우리 고유의 정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묵묵히 가정을 지켜가고 있다. 이는 전통적 부덕이다. 얼마전 타계한 미당 서정주시인의 ‘국화 옆에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인제는 돌아와 거울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白山

문단 선거

문인들만의 사회에서 치러지는 ‘문단 선거’는 정치판처럼 혼탁하지는 않다. 후보로 나선 문인들이야 속이 타겠지만 한 표를 행사하는 쪽은 느긋하다. 오는 14일 치러지는 한국문인협회 제22대 이사장 선거의 경우 현 이사장과 부이사장이 경합을 벌이고 있는데 선거운동은 후보자 본인과 후보자를 지지하는 문인들이 주로 전화통화로 한다. 이번 문인협회 임원 선거에 참가할 수 있는 문인은 5천103명인데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은 서울 종로구 동숭동 소재 예총회관에서 직접 투표를 하고, 전국 각 지역에 거주하는 문인들은 투표용지를 선거 하루 전까지 도착할 수 있도록 우송한다. 문인협회 회원은 5천103명을 훨씬 넘지만 연회비를 납부하지 않은 사람은 투표에 참가할 수 없는 게 특징이다. 이사장 1명, 부이사장 5명, 시, 시조, 소설, 평론, 수필, 아동문학, 희곡, 번역 등 각 분과회장을 1명씩 선출하는 문협선거는 투표할 때 두 가지로 생각한다. 문명(文名)이 높은 사람 아니면 인화력이 있는 사람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이사장이나 부이사장, 분과회장이 된다고 해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도지사, 시장, 군수처럼 특혜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당선되면 오히려 사비를 더 써야 하는 자리인데도 입후보한다. 1961년 12월30일 창립한 한국문인협회는 제1대 전영택, 제2대 소설가 박종화, 소설가 김동리, 문학평론가 조연현, 시인 서정주, 시인 조병화, 시인 황명 선생이 이사장을 역임했는다. 같은 장르의 문학단체, 한국현대시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등은 거의가 회장은 추대하는데 문인협회 경우 2명이 경합을 벌여 서로 서로 잘 알고 지내는 문인들은 실상은 곤혹스럽다. 문인협회는 본부 이사장, 시·도지회장, 시·군 지부장들이 모두 동격이다. 선거는 거의 추대형식이고 경합을 할 경우 1∼2표차로 낙선돼도 정치판처럼 재검표를 하는 등의 사례는 한번도 없었다. 만일 문단선거에서 조차 정치판처럼 공약(空約)이 남발되고 인신공격이 난무한다면 문인 전체의 망신이다. 또 선거가 화기애애하게 치러지기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淸河

농업자격증

자격증은 농업분야에도 있다. 농업자격시험은 과수재배기능사, 농화학기술사, 산림경영기술사, 시설원예기술사, 식물보호기능사, 원예종묘기사, 종자산업기사, 축산기능사, 버섯종묘기능사, 임산가공기능사, 채소재배기능사 등 각 분야마다 기능사·산업기사·기사·기술사 등 단계별 등급시험이 응시제한 없이 해마다 치러지고 있다. 이와 같은 자격증 시험은 관련분야에 상당한 지식과 재배기술 등을 습득할 수 있어 우수한 품질의 농산물을 생산하는 좋은 기회로 활용이 훌륭하다. 그러나 농업자격증 시험에는 극소수의 농민들만 응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자격증제도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농민이 많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산업분야와 달리 자격증 취득 농민에 대한 혜택이 전무하다시피하기 때문이다. 다른 분야와 달리 응시생이 적다 보니 교재가 충분치 못해 시험을 준비하는 농민들의 고충이 크고 한해에 고작 한 두번 시행되고 있다. 원인은 또 있다. 농업계 고교나 대학생들이 농업분야의 자격증을 취득한다 해도 영농정착에 아무런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박사학위 소지자들도 실업자가 수두룩한 세상이니 유독 농업자격증만 갖고 따질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은 농업기술의 선진화와 신지식 전문농업인 육성이 화급하고도 절실한 과제이다. 선진 기술농업의 육성은 구호만으로 그치고 계획만으로는 안된다. 농산물 생산은 물론 농산물유통 개선과 가공부문의 활성화를 위한 법제의 개혁도 중요하다. 지난 수천년을 고난과 역경을 숙명처럼 알고 끈질기고 슬기롭게 이 땅을 지켜온 이들이 바로 농민들이다. 이제 농민들에게 인내만을 강요하는 시대는 지났다. 농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어야 한다. 농민들은 그동안 정부와 국회의 경시속에서 살아왔다. 농민을, 그리고 농촌을 사랑한다는 달콤한 말에 속아 왔다. 농정당국과 지자체, 학계, 연구지도기관 단체들은 ‘내가 농사를 짓는다’는 심정으로 일해야 한다. 인건비도 건지지 못하는 가격폭락에 농작물을 그대로 놔둔채 밭을 갈아 엎는 농민들이, 그리고 영농부채에 시달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농민들이 더 이상 나와서는 안된다.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점점 사라져가는 농토를 가슴에 품고 사는 농민들의 아픔을 국가가 외면하면 민심과 천심이 좌시하지 않는다. 농업자격증을 적어도 사법고시 합격증처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우대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淸河

성과급제 是非

성과급제 是非 행정의 기업 경영기법 도입이란 말이 있다. 좋은 말이다. 기업인이 본 행정관리면엔 낭비요소가 지극히 많다고 보는 것이 공통적 관점이다. 그러나 기업 경영기법을 행정에 그대로 적용하는덴 많은 문제가 따른 것이 또한 현실이다. 행정은 기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직업공무원은 승진이 보수못지 않는 명예충족 요건이다. 이에 장애를 주는 전문직 공무원 계약제가 적잖은 부작용을 가져오고 있다. 외부채용으로 승진의 폭이 그만큼 좁아지는 것은 계약제가 성공만하면 이론이 있을 수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또한 현실이다. 아무리 전문가라 하여도 행정의 문외한은 행정을 제대로 할수 없기 때문이다. 지방공무원의 성과급제 확대가 실효성에 의문이 있어 적잖은 논란이 있는 것 같다. 말인즉슨, 일한만큼 성과급을 준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성과급의 근무성적평정에 있다. 평정의 방법으로 도표식, 강제배분식, 산출기록법, 대인비교법, 순위법, 체크리스트법, 업무보고법 등이 있다. 여기에 운영상의 유의점이 또 있다. 우선 작성상의 주의점으로 평정요소의 선택, 평정요소의 수, 평정요소의 비중이 있으며 이용상의 주의점으로는 평정계열, 평정자의 수, 평정결과의 공개, 소청 등이 있다. 이러고도 현직이 아닌 다른 직책의 잠재능력을 파악하는데는 역시 어려움이 따르는 맹점이 없지 않다. 성과급제의 성패는 근무성적 평정이 얼마나 체계적 정기적 객관적 평가가 가능하느냐에 달려 있다. 객관화되지 못하고 공개화되지 못하면 아예 안하는 것보다 못하단 말이 나온다. 올해부터 전 지방공무원에 실시하기로 한 성과급제에 아직 평가기준조차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라면 지극히 우려되는 점이 많다. 근무성적 성과급제가 단체장에 대한 충성도 성과급제로 변질될 요소가 다분하다. 행정의 기업경영 기법도입, 전문가의 계약공무원제, 근무성적의 성과급제가 다 좋은 말인데도 이처럼 역기능이 있는 것은 우리의 행정토양과 분위기가 그같은 제도가 뿌리내린 나라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나름대로 건국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지녀온 행정문화가 있다. 좋든 궂든 이 행정문화속에서 행정가치의 창출 및 배분이 이루어온 사실을 일시에 부인하려 해서는 엄청난 무리가 따른다. 행정개혁은 행정문화의 변화를 유도해야지 기존의 행정문화를 송두리채 부인해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제주 감귤을 서울에 옮겨심는 것처럼 섯부른 제도이식만이 능사가 아니다. /白山

걱정없는 세상을

“한국인들은 대부분이 정치·경제·북한문제 전문가들이다.” 어느 미국인의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80년대 일본 신문의 서울특파원 가운데 “한국인들의 정치에 대한 높은 관심은 놀랍다”고 말한 기자가 있었다. 우리가 생각해도 정치얘기를 꽤나 많이 한다. 해방직후의 좌·우익 충돌, 자유당 독재, 유신정권, 신군부정권, 3김정치등이 그렇게 만들었다. 태평성대가 없었으므로. 경제문제 역시 이 몇년 사이에 국민의 적극적 관심사가 됐다. 민초들은 평소 별로 듣지 못했던 IMF(국제통화기금)란 말이 초등학생의 귀에까지 못이 박히도록 널리 쓰이기 시작하더니 근래엔 ‘감자’란 말이 대중화됐다. 웬만한 지식인들조차 용어공부를 안하면 신문기사를 제대로 읽지 못할만큼 경제전문 용어가 생활화 되다시피 한다. 국민들 저마다가 떼밀려 전문가가 돼가고 있다. 경제불안의 심화가 여전하므로. 남북관계 관심은 6·15 이후 갑자기 더 심해졌다. 북한이 어떠니, 통일이 어떠니하는 자신의 생각을 나름대로 갖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가 돼간다. 대북관계에 국민의 출혈이 지나치므로. 이는 국민들이 그만큼 더 많은 걱정을 한다는 얘기가 된다. 정치걱정을 하고, 경제걱정을 하고, 대북관계걱정을 하다보니 전문가 아닌 전문가 소릴 외국인들에게까지 듣고 있다. 긍정적 측면보단 부정적 측면이 더 많은 사회위기 현상이다. 국민들은 저마다 본업이 있고 전문분야가 따로 있다. 정치걱정, 경제걱정, 대북걱정 같은 것은 안해도 되는 세상이 돼야 한다. 올해는 제발 민초들이 자기일만 걱정하며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국가사회가 돼야 할텐데, 그렇게 되기가 어려울 것 같아 또한 걱정이다. /白山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