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회고록

김영삼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정치권에서 회자되고 있다. ‘DJ 비자금’ 문제로 민주당은 민주당대로, ‘이회창총리 파면설’에 한나라당은 한나라당대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 비자금은 DJ정부의 법무부장관을 지낸 김태정씨가 YS 밑에서 검찰총장으로 있을때 수사를 유보했던 사건이다. 김씨는 “사건을 수사하면 일부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나 (대통령) 선거를 못치를 것 같았다”고 유보이유를 후일담으로 술회한 적이 있다. 이 말은 지금 YS가 말하는 것과 거의 같다. DJ는 그러한 검찰총장(김태정)을 눈여겨 두었다가 법무부장관으로 발탁했다. ‘비자금’ 혐의가 성립되는 것인지 아닌지는 알수 없지만 (정치인치고 정치자금에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어떻든 수사를 안받게 된게 당시 DJ로선 고마울 것은 인지상정이다. YS는 회고록에서 “고맙다는 말을 몇번이나 했다”고 했다. 이에 청와대측은 ‘사실과 다르다’는 반론을 제기하고 민주당은 ‘법적대응’을 말했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도 무척 불쾌한 심기를 노출시켰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회창)총리가 헌법이 규정한 총리의 권한행사를 주장, 대통령인 YS와 사이가 나빠졌다는 얘기는 다 아는 일이지만 그 표현이 사실일지라도 듣기 거북하게 돼 있다.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해 한시간쯤 혼내주고 내보는데 나가면서 출입문을 제대로 못찾더라’는 식이다. 원래 회고록이란 참 쓰기가 어려운 것이다. 자화자찬의 과장이거나 남의 험담일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 사실도 꼭 밝혀야 할 것이 있고 공연히 밝히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하지만 민주당이 말하는 ‘법적대응’이란 것도 공허하다. 배포금지나 진실규명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저 그런 것이 나왔구나’하고 접어 생각하고 넘어가면 되는 일이다. 정치권이 지나치게 살벌하다. 좀 화날 일도 웃고 넘어갈줄 아는 대범함이 아쉽다. 뭣하면 발끈하고 신경질적 반응을 드러내는 것은 국민들이 보기에도 그리 좋은 것이 못된다. 해학과 기지와 여유가 있는 정치풍토가 됐으면 좋겠다. 영국수상을 지낸 윈스턴 처칠은 1953년 ‘회고록’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보기 좋고 듣기 좋으면서 할말은 다 하는 그런 ‘회고록’을 우리는 정녕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白山

한국가톨릭은 서운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오는 21일 오전 10시30분 로마 바티칸 교황청 성 베드로 광장에서 일반 공개 추기위원회를 소집, 44명의 새 추기경의 서임식을 진행한다. 1998년 이후 3년만에 열리는 새 추기경 서임식은 그 화려함만큼이나 전세계 가톨릭신자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하지만 한국 가톨릭 교회는 지금 겉으로 내색을 못하지만 속으로는 서운함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한국가톨릭의 위상을 상징하는 두번째 추기경의 탄생을 바라고 있었는데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1월21일 37명의 새 추기경 명단을 발표한데 이어 28일 다시 5명의 추기경 명단을 추가 발표했다. 또 1998년 1월 임명한 22명의 추기경 가운데 정치·사회적 파장을 염려해 ‘가슴에 품고’발표하지 않았던 2명의 추기경도 함께 발표했다. 이로써 전세계 추기경은 추기위원회의가 열리는 2월 21일 현재 135명이 된다. 제2의 추기경 탄생을 기대했었으면서도 가톨릭의 특성상 교회 차원의 공식 언급은 일절 없다. 추기경을 새로 임명하는 것은 전적으로 교황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추기경(cardinal)은 라틴어 ‘돌쩌귀(카르도·cardo)’에 어원을 두고 있다. 가톨릭 교회에서 교황에 버금가는 권위와 명예를 누리는 최고위 성직자이다. 추기경은 우선 교황선거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다만 80세 이하 추기경에 국한된 경우다. 또 추기경단을 구성해 교황이 소집하는 추기경회의에서 가톨릭 교회의 중요 문제를 논의하는 한편 바티칸 교황청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교황의 협조자요 보조자로서 사목활동을 수행한다. 한국 가톨릭은 1969년 4월30일 당시 47세이던 서울대교구장 김수환(스테파노) 대주교가 로마에서 추기경 서임을 받아 교회 창설 184년만에 최초로 추기경을 보유하게 됐다. 당시 국내 가톨릭 신자는 40여만명이었다. 30여년이 지난 한국 가톨릭은 430여만명의 신자를 보유하는 등 질과 양적인 면에서 엄청난 성장을 했다. 신자수만으로 따지더라도 필리핀에 이어 아시아 두번째이다. 세계적으로 9억 가톨릭 신자의 5%에 해당한다. 신자 40여만명 시절 김수환 추기경이 서임을 받았는데 신자가 430여만명인 오늘날도 추기경이 여전히 1명이라는 사실이 아닌게 아니라 서운하기는 하다. /淸河

타산지석, 경기연극계

지금 경기도 연극계가 표류하고 있는 상황은 매우 안타깝다. 경기도연극협회(한국연극협회 경기도지회)의 대표자가 당국에서 받은 지원금 일부를 유용했다고 하여 경기문화재단이 ‘예산지원 중단’이라는 초강수를 쓴 것은, 일견 이해는 가지만 너무 고압적이라는 생각과 함께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지원금을 부적절하게 집행한 이유로 경기문화재단이 문화예술진흥지원금 운용관리 및 규정에 따라 3년간 지원자격을 상실했다고 경기도 연극협회에 통보한데 이어 설상가상으로 경기도청 청소년과도 그동안 지원해온 경기도 청소년연극제 지원금을 중단했다고 한다. 경기도연극협회 대표자가 고의든 실수든 협회 공금을 횡령했다는 것을 부인하거나 또 아니었다고 두둔하는 게 아니다. 다만 단체장이 실수했다고 해서 그 단체와 전체 단원이 피해를 입는다는 것은 장래적인 안목으로 볼 때 아쉬운 점이 많다는 판단이다. 단체장, 또는 대표 한 사람이 과오를 범한 것이지 전체 단원이 동조하거나 잘못한 것은 아니다. 대표자의 비리 의혹 때문에 문화재단 등의 지원금이 일절 중단된 경기도연극협회의 경우, 예산 지원이 끊기면 연례적으로 주관했던 전국 연극제 경기도대회, 경기도 아마추어 연극인대회, 경기종합예술제 중 경기연극제, 경기도 어린이연극제, 경기도 청소년연극제 등 많은 공연이 무산된다. 경기문화재단은 지역문화 활성화를 위한 지원금을 본래의 용도로 사용하지 않은 것은 대표자 개인문제 뿐만 아니라 조직체계상의 문제여서 지원금을 중단키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표자의 개인비리로 인해 전체 회원 또는 단원이 모두 피해를 입는다면 곤란하다. 더구나 일개 단체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경기도, 나아가서는 한국의 연극발전을 생각할 때 경기도연극협회의 예산지원 중단은 재검토 됐으면 한다. 예술단체는 여타 단체와 다른 점이 많다. 대표의 일시적인 실수로 전체가 매도되어서는 안된다. 얼마 전 열린 예총경기도지회 총회에서도 연극협회 문제가 거론됐다. 대표자 한 사람의 문제로 전체가 희생되어서는 안되며 과거지사 때문에 예산지원을 안해 주겠다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는데 뜻을 같이 했다. 예총경기도지회장도 경기도, 경기문화재단 등과 협의하여 경기도연극협회가 실의에 빠지지 않게 선처(?)토록 노력해보겠다고 공언했다. 예술문화단체들이 정부의 도움없이 큰 소리 치지 못하는 현실이 아쉽기는 하지만, 연극계 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문화단체들도 ‘예술만 알고 행정은 모른다’는 말을 제발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淸河

비정규직

한국 전체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선 ‘비정규직’이란 기간을 정하지 않고 전일제(Full-time)로 일하는 정규직 노동자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통계청은 고용계약 기간이 1개월∼1년 미만인 임시직과 1개월 미만인 일용직을 비정규직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노동계는 학습지 교사 등 특수고용노동자, 파견 등 간접고용노동자, 고용기간 1년 이상의 계약직까지 비정규직으로 본다. 비정규직이 최소한 1천만명은 넘을 것이라는 노동계의 주장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IMF사태 이후 금융·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상당수 정규직이 비정규직으로 대체된 것도 비정규직 양산의 한 원인이다. 지난 1998년 금융 구조조정 당시 은행들은 정규직 10∼20%를 정리해고한 뒤 대부분 계약직 형태로 재고용했다. 금융계뿐만 아니라 많은 직장들이 봉급을 삭감하면서 비슷하게 정규직을 하루 아침에 비정규직으로 추락시켰다. 비정규직은 주로 여성과 저학력층, 24세 이하 및 55세 이상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는데 서비스직, 기능직 등 저숙련 직종에 집중돼 있다. 임금은 정규직의 72.1% 정도에 불과하고 근로기준법 등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해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 무엇보다도 해고위협에 따른 고용불안에 떨고 있는게 가장 큰 문제점이다. 전문직·사무직도 ‘계약직’으로 내몰렸고 언제 실업자가 될지 모르는 신세에 처해 있다. ‘法 밖의 근로자’인 비정규직의 서러움과 공포는 월평균 80만원대의 봉급생활도 ‘싫으면 말고’라는 경영자의 위협이다. 흔히 하는 말로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중이 싫어한다고 절을 옮기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사회는 오래 가지 못한다. ‘하자는 대로 따라오면 된다’는 기업은 예전에도 있었다. 그러한 경영자가 기업을 망치고 근로자를 굶주리게 한 사실을 과거는 물론 지금도 말해 주고 있다. 진정한 자본주의는 ‘나 벌어 나 먹는다’가 아니라 공유하는 것이다. 기업주가 근로자를 무시하고 경시하면 지진보다, 화산폭발보다 더 가공할 재앙을 자초한다. 사각지대에 살고 있는 비정규직, 그리고 일자리가 없는 실업자들 가슴은 용암과 같다. 수많은 기업들이 경영부실의 원인을 규명하지 않는 무책임한 짓을 계속 자행하고 있어 걱정이 된다. /淸河

코미디드라마

창극은 오페라, 개그는 만담과 같다. 전래의 우리 공연문화는 그 장르가 서양과 별 다름이 없다. 고금을 비교해도 역시 비슷하다. 버라이어티쇼는 이를테면 남사당놀이와 맥을 같이한다. 현대 연극의 효시는 신파다. 재래형식을 벗어나 현대의 풍습과 인정가화 등 통속을 소재로 하는 공연이 신파극이다. 1909년 이인직의 신소설 ‘설중매’를 각색, 상연한 것이 처음이다. 윤백남, 조중환 등이 발전시켰다. 신파가 대중문화의 총아로 등장하면서 악극단이 주축이 되는 종합 공연문화가 한동안 성행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상영은 외화다. 1900년대말 서울 정동에 있었던 독일여성 경영의 손탁호텔에서 상류층 인사들을 대상으로 상영하곤 했다. 우리 영화는 1923년 윤백남 감독이 만든 극영화 ‘월하의 맹서’가 처음이다. 한국영화 초창기의 귀재로 손꼽히는 나운규를 윤백남이 발탁한 것이 그 이듬해 제작한 ‘운영전’에서였다. 텔레비전방송의 발달과 함께 TV드라마가 대중문화로 크게 작용하고 있다. 연출기법도 영화와 가까워져 드라마와 영화의 간격이 좁아졌다. 공연문화를 주도하는 텔레비전방송이 드라마의 개념을 코미디와 굳이 구분하는 것은 큰 오류다. 코미디는 곧 코미디드라마를 줄인 말일뿐 똑같은 영상연기의 범주의 속한다. 예를들면 메디컬드라마처럼 코미디드라마인 것이다. 코미디드라마 연기자들 가운데도 코미디언이라기보다는 개그맨으로 불리워야 더 격상되는 것처럼 여기는 풍조는 잘못된 인식이다. 개그는 코미디드라마의 한 분야에 불과하다. 만담이 희극의 한 분야였던거와 같다. 코미디언 김병조씨가 무명시절에 동사무소 주민등록 직업란에 ‘코미디언’이라고 적기가 저어해서 ‘방송인’이라고 했다는 말을 그가 하며 웃은 적이 있다. 코미디드라마는 이유없이 바보스럽고 넘어지고 해야 되는 것으로만 아는 것은 코미디드라마 발전을 크게 저해한다. 또 희극요소가 가미된 드라마를 ‘코믹드라마’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아니다. 코믹드라마가 아니고 그것이 바로 코미디드라마인 것이다. 비극배우만이 배우가 아니고 희극배우도 배우다. 마찬가지로 연기의 한 분야인 코미디언도 탤런트다. 시청자들에게 개념의 혼란을 주는 방송은 대중문화를 오도하고 있다.

입춘(4일)이 벌써 지나고 우수(18일)를 앞두어서인지 대기에 춘색이 완연하다. ‘우수 경첩이 지나면 대동강 물(얼음)도 풀린다’고 했다. 올엔 절후가 빨라 겨울을 일찍 넘긴 탓으로 우수 경첩전인 지금쯤에도 아마 대동강의 얼음이 풀렸음직 하다. 지난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눈도 많이 내렸다. 예전 같으면 그만한 추위나 눈은 으레 있었던 일이지만 겨울답지 않은 겨울이 많았던 근래에는 오랜만에 보는 동장군의 매서운 맛을 단단히 치렀다. 20년만의 폭설이라고 했으니 고등학생 또레엔 생전 처음보는 눈이 내린 것이다. 절기는 생활과 참으로 민감하다. 길가의 군고구마 장수도 음력 대보름에서 하루만 지나도 그만 사람들 입맛이 변해 매상이 뚝 끊긴다고 말한다. 봄은 서민들에겐 희망의 계절이다. 가진것 없는 사람들은 무서운 것이 겨울철이다. 가진 이들은 오히려 겨울이 지내기 좋다지만 없는 사람들은 정말 힘들고 지겨운 것이 겨울넘기기다. 난방이다 뭐다 하여 생활비는 더 많이 들면서 벌이는 신통치 않는 것이 겨울이다. 높은 정액소득자 말고는 대개의 서민층 겨우살이가 이러하다. 대지가 기지개를 펴기시작하는 봄은 이래서 서민들 가슴에도 막연하나마 새로운 삶의 희망이 싹튼다. 뭔가 일꺼리가 많아져 벌이가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것이 봄이다. 봄이라지만 아직은 꽃샘추위가 남아 있어 때론 겨울의 마지막 뒷맛이 없진 않을 것이다. ‘이삼월(음력)에도 장독 깬다’는 옛 속담이 있다. 그렇긴 하지만 이젠 추워봤댔자 봄이다. 성미급한 개나리가 잎보다 먼저 터뜨리는 꽃망울이며 땅김을 타고 솟아오르는 봄나물의 생동을 막을 수는 없다. 대자연의 섭리, 봄의 약동은 이래서 우리들에게 더욱 친근감 있게 다가온다. 해마다 맞는 것이 봄이지만 올 봄이 더욱 반가운 것은 지난 겨울에 치룬 치도곤이 유별났기 때문인 것처럼, 어려운 겨울을 넘긴 것 만큼 좋은 봄이 됐으면 좋겠다. 만물이 소생하고 약동하는 이 봄에 매마른 우리의 가슴과 생활에도 새로운 윤택과 광명이 움트는 그런 봄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白山

인구 1000만평 시대

인구 1000만평 시대 용인시 수지 아파트단지에 사는 A씨는 시장이 누구인지 모른다. 시·도의원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지방선거에 나가 투표한 적이 없다. 굳이 누가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럴 필요가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국회의원 선거는 투표했지만 사람은 역시 잘 모르므로 소속 정당만 보고 투표했다. A씨 뿐만이 아니다. 많은 아파트 주민들이 대개는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수지뿐만이 아니다. 수원 시내에 빽빽히 들어선 신규아파트를 비롯, 도내 대단위 아파트 주민들이 거의 비슷하다. 살기는 도내에 살지만 생활은 도외에서 한다. 대부분은 서울이 생활권이다. 아침 일찍 나가고 저녁 늦게 집에 돌아오곤 한다. 가장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부인네들도 그렇고 고등학교나 대학다니는 아이들도 서울인 경우가 많다. 경기도 집은 이를테면 잠만 자는 곳이다. 지역사회에 대한 이들의 무관심은 어쩜 자연현상일 수 있다. 생활권에서 겪는 일만으로도 골치아픈 판에 가정에까지 돌아와 머릴 썩히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나, 경기도 인구의 베드타운화는 실로 큰 부작용을 낳고 있다. 지역사회의 소속감을 근간으로 하는 지방자치 발전의 저해요인이 된다. 행정수요 유발도 큰 문제다. 이들이 내는 취득세 재산세 주민세 자동차세 같은 지방세 세입보다 몇배 더 높은 쓰레기처리 상·하수도 등 환경비 교통시설비 경상비 등이 나간다. 이렇긴 하지만 베드타운 인구도 경기도 도민이긴 마찬가지다. 자치단체마다 이젠 유입인구가 지역사회에 흥미를 가질 수 있는 특별 프로그램개발이 요청된다. 지역사회에 정을 붙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경기도 인구가 작년말 현재 928만13만명으로 1천만명을 내다본다는 보도가 있었다. 서울 인구의 역류로 서울은 감소, 경기도는 증가경향을 보이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정부의 수도권 인구증가 억제 정책에도 불구하고 도내 인구는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도권정비계획법을 고집만 하지 말고 탄력성있는 개정으로 1천만명시대에 효과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정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인구증가가 물론 반가운 현상은 아니긴 하나 1천명시대예고는 여러가지로 시사하는 의미가 많다. /白山

야생동물 사랑

현재 적멸 직전의 동물들은 지구상에 5천종류가 넘는다. 한반도도 그 멸종의 현장에서 예외지대는 아니다. 1600년 이후 오늘날까지 분명한 기록이 남아 있는 멸종 생물 종(種)의 수는 알려져 있는 것만 726종이나 된다. 그 가운데 포유동물이 59종이다. 또 멸종위기에 처해 있는 포유동물은 505종에 이른다. 멸종한 포유동물의 대다수가 1900년 이후 100년 동안에 집중적으로 사라졌다. 지역적으로는 최근 400년간 기록적인 인구확대가 있었던 북미, 카리브제도, 오스트레일리아, 태평양의 섬들이다. 멸종 이유는 대개 인간활동에서 비롯된다. 확실한 멸종원인은 수렵 10%, 서식지파괴 16%, 경쟁과 천적 동물의 유입 17% 등이다. 한반도에서도 1900년 이후 수 많은 생물이 우리의 무관심속에 멸종했다. 기록에만 있을 뿐 아직까지 그 서식이 확인되지 않은 동물도 있으며 이제 더 이상 우리나라에서 번식하지 않고 겨울에만 찾아오는 손님이 된 동물들도 수십종에 이른다. 현재 한반도에서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동물들은 늑대, 표범, 반달가슴곰, 수달, 사향노루, 대륙사슴(일명 꽃사슴), 산양 등인데 늑대는 1980년대 이후 서식정보가 두절된 대표적 포유동물이다. 북한에서도 그 수가 줄어들고 있으며 국제적으로 보호동물로 지정돼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밀렵이 야생동물들을 특히 위협하고 있다. 야생동물이 몸에 좋다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밀렵이 횡행하는 것이다. 정부의 대책은 있으나 마나한 밀렵의 심각성은 국내만의 문제에서 벗어나 국제적으로 한국이라는 국가의 위신을 떨어트린다. 파주지역 민통선 내에서의 독수리 집단 폐사 사건, 구미 낙동강변에서의 재두루미 농약 중독 사건, 캐나다·미국 지역 야생 곰 밀렵에 한국인 관련 사건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몸에 좋다면 체면도 가리지 않고 먹어대기 때문이다. 우리 곁을 떠나는 생물 종류가 많아질수록 우리의 미래도 어두워진다. 나뭇잎에 붙어 있는 10㎝의 작은 대벌레로부터 30m가 넘는 흰긴수염고래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이 주눅들지 않고 공존하는 세상이 돼야 한다. 우리가 환경을 파괴하고 생물들의 목숨을 가벼히 여긴다면 우리의 미래도 멸종된 동물들의 운명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야생동물들이 떠나면 인간도 결국 이 지구상에서 사라져가는 종말을 우리는 잊고 살고 있다. 야생동물이 사라진 지구에서는 인간도 살아갈 수없다. /淸河

신문고가 울고 있다

신문고(申聞鼓)는 왕권시대에 백성이 원통한 일을 호소할 때 치게 한 큰 북이다. 조선조 태종2년(1402)부터 대궐문루에 달아 놓은 이 신문고를 치면 당부에서 고충을 알아 처리했다. 태종원년(1401)에 처음으로 설치할 때는 등문고(登聞鼓)라고 하였다. 조선 세종16년(1434)에 승문고(升聞鼓)로 잠시 이름을 고쳤었는데 아무튼 신문고의 위력은 대단하였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다. 신문고의 설치목적은 왕권시대에도 백성의 고충을 직접 듣는 민주적인 제도였지만 억울한 사정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문제점도 있었다. 오늘날이나 옛날이나 백성이 통치자에게 호소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권력있는 자, 금력있는 자들로부터 받는 억압과 서러움 밖에 더 있겠는가. 지난 1994년 4월 발족한 국민고충처리위원회는 ‘현대판 신문고’라고 할수 있는데 그동안 위법·부당한 행정처분 등 국민들의 크고 작은 억울함과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그러나 일부 지방자치단체와 행정기관들이 국민고충처리위원회가 시정권고권만 갖고 있고 집행권이 없는 점을 악용, 고충처리위의 시정권고 조치를 묵살하고 수용치 않는 사례가 빈발한다고 한다. 공무원 사회의 관료적인 폐해를 지적하는 3무(無)형태(선례가 없다, 규정이 없다, 재정이 없다는 핑계)가 국민고충처리 과정에도 예외가 없는 것이다. 특히 지방자치단체들은 민선시대 이후 고충처리위의 시정권고조치를 외면하는 사례가 크게 늘어 정부행정이 중앙과 지방정부가 손발이 맞지 않음을 입증한다. 문제는 고충처리위에 행정집행권이 없다는 점이다. 민원사무처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시정권고권과 언론공표권, 대통령보고권을 갖고 있지만 제대로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그렇게 질타해도 시큰둥한 판국에 공문서로 전달되는 시정권고조치가 무슨 힘을 받겠는가. 대통령이 호령 호령하고 감사원이 들쑤셔놔도 위법과 부당한 행정처분이 계속 자행되는 실정이다. 공직사회에도 위계질서가 무너진지 오래됐다는 이야기가 들려 나온다. 옛날 대궐에처럼 청와대 정문에 신문고를 매달아 놓으면 청와대 사람들이 가슴을 열고 국민의 쓴소리를 들을 것인가. 지금 현대판 신문고는 전국 도처에서 밤낮으로 울고 있다. 위정자들은 그 아픈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답답하고 또 답답하다.

홍역

지난해 말부터 크게 유행하던 홍역(紅疫)이 올해에도 여전히 번지고 있어 어린 자녀를 둔 가정에 비상이 걸렸다. 주로 어린이들이 앓는 홍역은 처음에는 발열·기침·콧물·눈곱이 끼다가 얼굴·목·가슴·몸통의 순서로 온 몸에 붉은 반점이 생긴다. 환자 1천명 중 1명은 사망하는 것으로 알려진 홍역은 40여년전만 해도 많은 어린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주범이었다. 전염병으로 인한 비극은 동서고금이 비슷하지만 우리나라도 참혹했다. 조선시대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약 200년간 전염병이 무려 79차례나 휘몰아쳤고 그 결과 어떤 해에는 인구의 7.8%인 50만명 이상이 죽기도 했다. 전염병이 ‘오랑캐보다 더 무섭다’는 말은 그래서 생겼다. 그 전염병을 역병(疫病) 또는 염병(染病)이라고도 했으며 반 우리말로는 ‘돌림병(病)’이라고도 했다. 이 돌림병이 한번 ‘돌고’ 지나가면 삼천리 강산이 온통 죽음의 강토로 변하곤 했다. 시체가 도처에 널리지만 행여 옮을까 치우기도 겁이 나 아예 정든 고향을 등지고 멀리 타향으로 떠났다. 당시 전염병은 콜레라나 장티푸스, 이질, 홍역 등이 있었는데 그 중 홍역은 특히 무서웠다. 누구나 한 번은 걸린다고 하는 이 홍역은 일단 발생하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돼 갔다. 조선 숙종 33년(1694)의 경우, 초봄에 평안도에서 발생하기 시작하여 1만여명이 죽었고 그해 가을에는 전국적으로 만연돼 죽은 자가 이루 셀수 없을 정도로 많아 ‘동네 골목에 어린아이가 드물었고, 한 집안이 몰수한 경우도 부지기수’에 이르렀다. 요행히 홍역에서 살아 남아도 사후(事後)에 겪는 고통은 죽은 자나 별반 다름없었다. 역병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었으므로 기근이 그림자처럼 따랐고 주위의 소나무는 모두 벗겨지고 풀뿌리조차 남아나지 않을 정도였다. 초근목피로 연명한 것이다. 그래서 ‘홍역을 치렀다’는 표현은 비참의 극을 형용하는 말이 되었다. 최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는지 정부가 4월말까지 전국의 모든 초등 1년생에서 고등 1년생 600여만명을 대상으로 일시에 무료로 홍역 백신을 접종하는 캐치업(catch-up)을 한다고 발표했다. 예방은 하지 않고 꼭 큰 일이 터져야만 허둥지둥대는 게 정부가 하는 일이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싶다. 홍역은 ‘평생에 안 걸리면 무덤에서라도 앓는다’는 전염병이다. 자녀는 국가가 키워주는 게 아니다. 먼저 부모들이 미리 미리 예방해주는 게 도리이다. /淸河

庶民別曲

거액의 남의 돈을 받은 사실에 처벌을 승복지 않는 풍조는 누구는 그런 일이 없었느냐는 생각을 갖기 때문이다. 법의 집행이 권위를 갖지 못한다. 현대 사회의 불행이다.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는 식이다. 먼지를 터는 사람 또한 털면 먼지가 나오므로. 다만 터는 입장과 털리는 입장의 차이지만 이런 입장 역시 영원한 것은 아니다. 희극인지 비극인지…. 해서, 위법사실이 새삼 문제되는 것만 걱정할뿐 위법사실에 수치를 모른다. 불운하게 문제가 된 사람도, 행운으로 문제가 안된 사람도 모두 자신의 문제거리엔 막상 수치심을 갖지 않는다. 법치는 중요한 것이지만 윤리성을 상실한 법치는 이처럼 사람들을 몰염치하게 만드는 허점이 있다. 우리의 역대 대통령들은 내각제 대통령이었던 윤보선, 신군부에 의해 하야한 최규하, 두분을 제외하고는 절대권력자들이다. 법보다 더 막강한 힘을 갖는 것이 이른바 ‘대통령의 분부사항’이다. 절대권력이 절대부패를 낳는 것은 불변의 정치철학이다. 절대권력의 압제를 받은이도 절대권력을 쥐고나면 그 역시 풀줄을 모르고 절대권력을 행사한다. 기이한 악순환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억! 하면 억대더니 이젠 몇조, 몇십조라니 참 ×같은 세상이네!” 김우중 전 대우그룹회장의 비리를 보도하는 라디오뉴스를 듣던 한 택시기사의 한숨섞인 탄식이다. 1억원만 해도 서민들에겐 꿈같은 금액이다. 생전에 만져보기는 커녕 구경조차 하기 어려운 돈이다. 그 택시기사의 말은 다음이 더 걸작이다. “지금 난다 긴다 하는 정치인치고 과거에 김우중돈 안먹은 사람 있겠어요?” 대답을 요구받는다고 여긴 승객이 ‘그럼, 차라리 일이 안터진 것보다 못하네요…”하자 기사는 펄쩍 뛰었다. “안터지다뇨? 언제 터져도 터지지 안터질수 있습니까.” 우리의 미래가 과거의 족쇄로부터 해방될 날은 과연 언제쯤일는지. 열심히 살려는 서민대중에게 절망의 무력감을 안겨주는 절대권력의 횡포, 염치모른 부패를 청산할 날은 정녕 있을수 없는 것일까. /白山

인문과학

학문은 생활법칙의 체계화다. 정치 종교등 기타의 여러 권력지배로부터 학문의 해방과 독립을 주장한 것이 학문의 자유다. 유럽은 르네상스 이후 중세기 제권력의 속박으로부터 이탈, 학문연구의 자유와 수학의 자유를 구가하였다. 그 이전, 학문의 속박은 인문과학은 물론이고 자연과학에까지 자행됐다.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는 종교재판에서 자신의 주장을 부인하는 진술을 강요받았다.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와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것은 교회와의 마찰을 피하여 죽음 직전에 남긴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역사 학예등 인류문화에 관련하는 정신과학의 총칭이 인문과학이며, 물리 화학 생물 천체 지학등 자연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의 총칭이 자연과학이다. 인문 및 자연과학은 학문의 쌍벽으로 인간생활의 두 수레바퀴와 같다. 인문과학은 정신생활의 풍요, 자연과학은 기술생활의 풍요를 가져온다. 그 어느것도 소홀히 할수 없는 인간생활의 두 견인차인 것이다. 만약 인문과학에만 치중하면 생활의 빈곤, 반대로 자연과학에만 치중하면 정신의 빈곤을 유발한다. 학문의 두 분야가 균형있게 성장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나 꼭 그렇지만은 않는 것이 또한 시대상이다. 1945년 해방이후 70년대까지는 인문과학이 왕성했던 것이 70년대 후반 테크노크라시가 고개를 들면서 자연과학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인문과학 출신위주의 관료에 이젠 테크노크라트가 당당한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IMF이후 요즘 경제가 더 어려워지면서 대학의 진학 성향이 자연과학쪽으로 두드러지게 편중하는 것 같다. 4년제 대학도 비슷한 경향이지만 특히 전문대학은 자연과학 학과 일색이어서 수십대의 경쟁률을 나타내고 있다. 인문계 졸업으로는 취업난을 뚫기가 어려워 기술을 배워두고자 하는 세태의 반영으로 보여진다. ‘기술입국’이란 말이 있다.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자연과학 선호경향도 좋지만 인문과학 선호의 쇠퇴경향은 심히 우려스런 현상이다.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이 고루 선호되고 발전하는 세상이 빨리 오면 좋겠다. /白山

김우중

‘국내에서 완성한 대우차를 우크라이나 국경으로 가져가 부품으로 해체, 현지 공장에서 재조립해 마치 자동차를 새로 생산해낸 것처럼 위장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회장에 대한 보도내용의 한 대목이다. 그의 은행대출, 재산도피등 수조, 수십조원의 천문학적 비리를 듣다보면 기업인이 아니고 사기꾼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 일각에선 그룹 부실경영에 책임을 지고 물러날 당시, 그래도 한동안 경제에 기여했던 공로를 생각해 일말의 동정심을 가졌던 것이 철저히 배신당한 기분이라고들 말한다. ‘김우중’을 놓고 보면 재벌개혁이 왜 필요하고 재벌은 왜 해체돼야 하는가를 실감나게 한다. 장기불황에 허덕이는 일본 경제에도 도산되는 은행이 있고 망한 대기업이 있다. 다만 우리와 다른 것은 그들은 책임을 진다는 사실이다. 은행이 도산되면 은행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머리를 깊이 조아려 국민에게 사죄하는 것을 볼수 있었다. 망한 기업의 사장 가운데는 자살을 하기도 했다. 사죄가 능사일 수 없고 자살이 미화될 수는 물론 없다. 하지만 공적자금을 낭비하고도 뻔뻔스런 우리네 은행장들, 기업을 망쳐 근로자들 임금을 떼어먹고도 당당한 우리의 일부 기업인들에 비하면 차이가 나도 너무 난다. 한국경제와 일본경제의 차이, 그것은 한국에선 ‘기업은 망해도 기업인은 살고’ 일본경제는 ‘기업이 망하면 기업인도 망한다’는 기업정신의 차이점이라 할 것이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회장은 곧 전형적 한국형 악덕기업인이다. 갖가지 사기행각으로 국내경제와 대우근로자들은 수렁으로 몰아넣고 자신은 해외도피시킨 달러로 호사스런 외국 은거생활을 보내고 있다. 그렇긴 하나, 아마 지금쯤은 그 많은 훔친 돈도, 남부럽지 않은 호사에도 결코 행복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의 경제공신이던 그가 한국의 경제역적으로 변신된 것을 보면서 생각되는 것은 ‘제2·제3의 김우중’이 또 없다고 과연 장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정치인들도 정신 차려야 하지만 재벌 기업인들은 제발 정신 차려야 한다. 국민이 알아주는 부, 시장이 인정하는 부를 추구하지 못하는 재벌은 결국 언젠가는 그 마각을 드러낸다. /白山

TV 드라마

드라마는 인간사회에서 생길 수 있는 이야기를 작품으로 꾸미는 종합예술이다. 실화도 있고 가상적인 내용도 있다. 특히 TV 드라마는 ‘안방극장’다웁게 시청자에게 ‘실감’을 준다. 드라마를 전개할 때 모범답안지 형식의 이야기만을 집필한다면 아마 ‘흥미’를 주지 못할 것이다. 모범가정의 부모여야하며 서로 알뜰살뜰 사랑하는 부부에, 효성이 지극하고 학교에서는 모범생인 자녀이야기만을 계속한다면 독자나 시청자들은 ‘재미’를 별로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안방극장에서 방영되는 TV 드라마를 보면 우려스러운 내용이 너무 많다. 대부분 가정파괴적인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태양은 가득히’는 재력가인 서병천이 첩에서 낳은 딸(가흔)이 뒤늦게 생부집으로 들어와 정실에서 낳은 오빠와 갈등을 빚는다. 출세욕에 눈먼 강민기는 죽마고우의 애인인 서가흔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박지숙을 버린다. ‘온달왕자들’은 젊은 첩을 두명이나 거느리며 세집 살림을 하다 사망한 여재만의 남은 가족들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다. 회갑이 넘은 나이에 여비서 사이에서 젖먹이 막내를 보고, 여재만이 사망하자 여비서는 두번째 여자에게 자신이 낳은 아기를 떠맡기는 등 상식을 벗어난 일탈적 가족상황을 거리낌없이 보여주고 있다. ‘좋은 걸 어떡해’는 이혼녀와 미혼남의 결혼을 소재로 삼았다. 극중 수경이 전남편 아이를 임신한지도 모른채 전남편 친구와 재혼한다. 병원의 약사로 근무하는 수경이 임신한 사실도 모르느냐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축첩에 미혼모, 대리모를 이용해 아들을 출산하는가 하면 “아버지는 폭군에 축첩에…” 등의 패륜에 가까운 말과 욕설섞인 대사들도 거침없이 쏟아진다. 한 마디로 자녀들과는 말할 것도 못되고 부부가 함께 시청하기도 난처한 이야기들이 드라마라는 형식을 통해 매일 텔레비전에서 쏟아져 나온다. 정상적인 가정, 건전하고 당연한 관계만을 드라마로 꾸민다면 드라마틱한 요소는 적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TV 드라마는 온 가족이 함께 본다는 특수성이 있다. 또 가상적인 이야기를 실제 현상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불륜과 가족파괴적, 엽기적인 내용이 시청률을 올린다고 방송국이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건전한 시청자들에게 가치관의 혼돈을 주어서는 안된다. /淸河

철새

우리나라는 지역적으로 열대와 한대의 중간지역이어서 세계적으로 드물게 많은 철새들이 머물거나 지나간다. 우리나라에 찾아오는 겨울철새는 오리류, 고니류, 두루미류 등 모두 116여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들 겨울 철새들은 중국 동북지방과 시베리아 등지에서 여름 동안 번식과 새끼 키우기를 마친 뒤, 혹한이 몰아 닥치는 겨울이면 생존을 위해 따뜻한 남쪽나라로 내려온다. 그러나 봄이 되면 다시 번식지인 북쪽으로 긴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철새들은 그 먼 거리를 한 치도 틀리지 않고 방향을 잡아 날아간다고 한다. 낮에 주로 이동하는 철새들의 경우, 자신들의 생체 시계속에 내장돼 있는 정보로 빛의 방향을 판단하여 자신들이 날아갈 방향을 정한다는 것이다. 밤에 주로 이동하는 철새들은 별자리를 이용하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또 철새들은 지구 자기장(磁氣場)을 감지하여 이동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대개 철새들의 장거리 이동은 남북 방향을 따라 이루어지고 있으며, 철새들이 지구 자기(磁氣)를 감지하여 방향을 잡는다고 한다. 실제로 비둘기의 머리에서 나침반 역할을 하는 1㎜×2㎜의 자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러한 겨울철새들이 지금 한국에서 방황하고 있다. 이들의 서식지가 파괴·훼손되고 있기 때문이다. 매년 겨울이면 찾아오던 유명한 낙동강 넓은 하구의 을숙도주변은 하구언댐과 빌딩, 도로 소음, 공해때문에 매년 철새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 경남 창원 주남 저수지도 온갖 큰 공장들이 들어서 아주 찾아오지 않거나 과거에 비해 줄어 들었다. 4∼5년 전만 해도 주남 저수지에서만 장관을 이루던 가창오리 무리들도 충남 서산 천수만으로 옮기더니 그 곳에서도 살수 없는지 2∼3년전 부터는 전남 해남 황산면 바다갯벌을 막는 고천암 간척지 호수에 날아온다는 소식이다. 철새가 찾아오지 않는 환경은 인간도 살기 힘들게 된다. 그러나 죽음의 호수였던 시화호에 다시 청둥오리가 찾아온 일은 신기할 정도이다. 철원 평야에서 펼치는 두루미들의 군무도 장관이다. 그동안 환경·시민단체들이 기울여온 눈물겨운 노력의 대가이다. 4일 입춘이 지나면 철새들은 다시 북쪽으로 서서히 떠날 것이다. 겨울철새들이 다시 한국으로 날아오도록 환경보호와 습지생태계 보전에 주력해야 한다.

중학생의 ‘性’

우리나라 중학생의 성교육에 대한 개선책이 시급해졌다. 중학생의 성지식이 100점 만점 기준 46.6점으로 매우 낮을뿐 아니라 10명중 4명이 이성교제를 하며 성(性)을 ‘남녀간의 성적관계’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여자 중학생의 경우 83.3%가 “성관계를 하더라도 꼭 결혼할 필요가 없다”고 응답하는 등 혼전 성관계에도 개방적인 인식을 갖고 있어 걱정스럽다. 국무총리실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가 경기대 교육대학원 김상원 교수 등에 의뢰, 최근 발표한 ‘중학생의 성의식 조사 및 성교육자료집 개발연구’결과를 보면 한마디로 의식은 개방적, 지식은 낙제점이다. 지난해 7∼12월 전국 중학교 1,2,3학년 학생 2천82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성과 교제중인 학생은 41.3%이며 가장 큰 고민이 이성교제, 성충동, 임신·인공유산, 성행위, 자위행위 순으로 나타난 것이다. 첫 성경험 시기는 중2때(32.9%)가 가장 많고 중1, 중3순이었으며 성관계시 76.8%가 피임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학생의 0.8%가 임신 경험이 있고 임신했을 때는 인공유산과 출산 후 입양으로 나뉘었으며 성추행·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22.3%나 된다. 문제는 중학생들의 이성교제는 늘어나고 있으나 성지식은 평균 50점에도 못미친다는 점이다. 또 PC보급과 인터넷 음란물 등의 접촉으로 학년이 낮을수록 성에 대한 개방적 성향이 높다는 것이다. 중학생이 고교생보다 오히려 부모에 더 저항적이라고 한다. 앞으로 중학생들의 성의식은 더 개방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모들은 이를 사회적 현상으로는 인정하려 하지만 자기 자녀의 문제로는 받아 들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도 성문제에 직접 노출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정신적·현실적인 준비를 해야 된다. 성을 아름답게 가꿔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면서 자녀들의 실수를 막아주고 차선책으로 실수는 따뜻하게 치료해주는 자세를 갖는 것이 이 시대 부모들이 할 일이다. 올바른 성가치관 교육을 위해 초·중·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 당연히 성교육을 정규과목으로 삼아야 한다. /淸河

이수현씨의 죽음

우리에게 이수현씨(27)의 죽음은 무엇일까. ‘일본 열도를 울린 의인’이란 말을 듣는다. 고려대 무역학과를 휴학하고 일본에 건너가 유학중이던 일본어학교 아카몬카이에서 학교장으로 지난 29일 영결식을 치렀다. 영결식장은 모리 일본총리등 각료를 비롯한 각계인사 1천여명이 조문하고 이씨의 홈페이지 게시판은 추모의 글이 2천100여건이나 올라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일본 언론은 이씨가 지난 26일 도쿄시내 전철역에서 철로에 떨어진 일본인 취객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져 살려내고 자신은 숨진날부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일본인을 구하기 위해 소중한 목숨을 던진 한국유학생의 죽음을 헛되이 말자’고 했다. ‘한·일 우호증진’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씨의 의로운 죽음은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시각을 새롭게 한 것은 사실이다. 일본에 의해 희생당한 이씨의 4대에 걸친 사연은 그의 죽음에 애도의 정을 더욱 절실하게 했다. 살신성인의 의로운 죽음은 우리 주변에서도 더러 있는 일이다. 입장을 바꾸어 일본인 한국유학생이 서울시내 전철역에서 위험에 처한 한국인을 구하고 자신은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는 일이 있을 수도 있다. 만약에 그런 경우가 이수현씨에 앞에 서울에서 먼저 일어났다면 우리 언론은 어떻게 보도했을까. 의인, 이씨에 대한 일본열도의 후한 조의는 어디까지나 인간정신의 발현이다. 일본 사회 역시 점차 삭막해지는 결핍된 인간정신을 한 이국인의 의로운 죽음을 통해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역땅에서 목숨을 던진 젊은 의인은 우리들에게 한국인의 긍지를 갖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렇다하여 일본의 국익을 한국의 국익으로 양보하는 일은 조금도 없다는 사실이다. 부산에 사는 이씨의 여자친구는 ‘수현아! 넌 지워지지 않아. 항상 널 위해 노래부를게. 천국에서 들으렴…’하고는 흐느꼈다고 전한다. 생떼같은 아들을 놓친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일본으로 달려간 이씨부모는 한줌 재로 변한 유해를 저미는 가슴에 품고 귀국했다. 다시 살아 돌아올수만 있다면 ‘한국인의 긍지’, ‘일본인의 후의’를 다 반납해도 좋다. 그래서 다시 살아날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것이 인생사다. /白山

브레이즈델 목사

약 5년전인가. 그 무렵에 개봉된 ‘쉰들러’란 영화가 있었다. 제작사, 감독, 주연배우등 이름은 잊었지만 미국영화임은 분명하다. 쉰들러는 독일사람 이름이다. 2차대전이 한창인때 독일군을 상대로 군수품장사를 했다. 돈버는 일이라면 이것저것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던 쉰들러가 인간애에 눈을 뜬 것은 유태인들이 대량 학살당하는 것을 보고나서였다. 죽음의 현장으로 끌려가는 벌거벗은 유태인들 가운데 남자는 멀리 성기까지 노출됐으나 혐오스럽기보단 처참한 장면이 리얼리티하게 연출된 명화였다. 쉰들러는 이토록 불행한 유태인들을 한사람이라도 더 빼돌려 살려내기 위해 독일군 장성들에게 번 돈을 다 털어 뇌물로 바친다. 쉰들러는 실존 인물의 실화다. 50년전 한국전쟁판 쉰들러로 불리는 러셀 브레이즈델씨(91) 방한이 무척 감동적이다. 전쟁 당시 미공군중령으로 군목이던 그는 전쟁고아 1천여명을 미군 당국에서도 불가하다는 것을 끝내 설득시켜 제주도로 무사히 피란시킨 전쟁고아의 아버지다. 그제는 반세기만에 양주군 장흥면 한국보육원을 찾아 황온순원장(101세·여)을 비롯 30여명의 전쟁고아들과 뜻깊은 만남을 가진데 이어 어제는 고양시에서 역시 전쟁고아들과 해후했다는 보도가 눈길을 끈다. 벌써 60대를 바라보는 전쟁고아 20여명과 일일이 손을 맞잡으며 재회의 감격을 나누고 스님이 된 황병진 장안사주지(고양시 일산구 풍동)는 큰 절을 올렸다고 본지기사는 전한다. 그에게 큰 절을 올리고 싶은 당시의 전국 전쟁고아들을 다 만날수 없겠지만 치열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국에 꽃피운 인간애는 아마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이미 아흔을 넘긴 브레이즈델 목사가 방한한 것은 생전에 전쟁고아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직접 보고 싶어서이겠지만 전쟁고아들 역시 다시 보고싶었던 여간 고마운 은인이 아닐수 없다. 아니 우리 모두의 은인이다. 전쟁은 인간을 추하게 만든다. 인성을 잃게 해 자신만 살기위해 어쩔수 없이 사악해지기 쉬운 것이 전쟁이다. 이런 가운데서 인간애를 살린 박애정신은 쉰들러 이상이다. 우리는 그의 방한으로 전쟁의 참화와 사람이 더불어사는 인간정신에 다시 한번 일깨움을 받는다. 브레이즈델 목사의 남은 여정이 아무쪼록 편안하고 귀국후에도 하느님 뜻을 이루는 여생이 되기를 빈다. /白山

개헌론

‘능서불택지필’(能書不擇紙筆)이라고 했다. 글씨 잘 쓰는 사람은 종이나 붓타박을 않는다는 뜻이다. 서양속담에도 ‘서투른 목수가 연장만 나무란다’는 말이 있다. 당나라의 명필가로 저수량, 우세남, 구양순이 있었다. 어느날 저수량이 우세남을 찾아가 자신과 구양순을 비교해 물었다. 우세남은 “그대와 나는 붓과 종이를 가려서 글씨를 쓰지만 구양순은 붓과 종이를 가리지 않고 글씨를 쓰니 어찌 그와 비유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우세남은 자신을 아는 사람이었고 저수량은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개헌론이 모락모락 연기를 피운다. 김중권민주당대표에 이어 한화갑최고위원이 대통령 4년 중임제, 정부통령제 개헌을 주장하고 나섰다. 4년 중임제도 해봤고 정부통령제도 이미 해봤다. 4년 중임은 촉박하게 겹치는 대통령선거가 미국 정치토양과 다름으로써 빚는 지나친 폐단으로 인해 1980년 10월 7차 개헌에 의해 5년 단임제가 됐다. 이승만, 박정희대통령의 3선 개헌 장기집권에 질려 단임제를 채택한 면도 없지 않다. 이 헌법에 의해 전두환정권의 5공이 생겼고 6공은 1987년 10월 직선제를 골자로 한 8차 개헌에 의해 노태우정권부터 시작해서 지금에 이른다. 부통령은 이시영 초대부통령이 ‘하는 일 없이 국록만 축낸다’는 뜻으로 ‘시위소찬(尸位素餐)의 자리’란 유명한 말을 남기고 자진 사퇴했다. 이승만대통령시절엔 야당출신의 장면부통령이 고령의 이승만 유고시 대통령직을 승계할 것이 두려워 장부통령의 권총암살을 기도, 손바닥을 관통시키는 부상을 입혔다. 이밖에 4·19 의거후 제2공화국시절에는 참의원(상원), 민의원(하원)의 국회 양원제도 해보았다. 현행 5년 단임제, 부통령제 배제가 절대적으로 좋은 정치 제도라고는 물론 말할순 없다. 그러나 어떤 정치제도든 장·단점이란게 다 있다. 요체는 운용의 묘에 있다. 여권의 개헌론배경이 상대적 장기집권(5년 단임보단 8년 중임), 그리고 정부통령후보의 지역안배로 지역감정에 의한 득표공작에 있는 것으로 보는 관점이 맞다면 동기부터가 순수치 않다. 개선 명분으로 단임제가 조기 레임덕을 말하는 것은 한낱 구실에 불과하다. 정치를 잘하는 사람은 글씨를 잘 쓰는 선비가 붓타박을 않는 것처럼 헌법을 탓하지 않을 것이다. 경제가 어렵고 민생이 도탄인 지경에 개헌을 입에 담을 때가 아니다. 지필묵을 가리는 저수량처럼 자신을 모르는 위인들이다. /白山

자살

미국에서는 자동차 사고 다음으로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 자살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자살률도 최근 들어 세계 평균을 웃돌기 시작했으며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자살률이 높은 나라인 일본에서는 ‘자살’이라는 검색어로 무려 몇 만개의 웹사이트를 건져 올릴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우리나라도 촉탁살인에 까지 이르는 자살사이트들이 유행(?)하는 지경이 되었다. 쥐, 다람쥐, 토끼 등 설치류에 속하는 ‘레밍’은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 중 유일하게 자살을 한다고 알려졌었다. 주로 북구에 서식하는 이 작은 동물들은 이른 봄 미처 얼음이 채 녹지도 않은 차디찬 강물에 엄청난 숫자가 함께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처럼 보였다. 생물학자들은 이러한 광경을 먹이와 공간이 부족한 상황에서 모두가 살겠다고 발버둥치다보면 함께 몰락할 수 있기 때문에 레밍들의 일부가 다른 동료들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는 환상적인 논리를 부여했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레밍들은 그저 미끄러운 얼음판을 달리다 미처 멈추지 못해 익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니까 자살하는 유일한 동물은 인간뿐인 것이다. 유교에서는 어버이로부터 받은 자기 몸을 함부로 해 칠 수 없다고 가르친다. 기독교도 자살이란 살인과 마찬가지이며 영혼에 큰 벌이 내린다고 경고했다. 그런데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살은 끊이지 않고 있다. 자살로 인생의 종말을 장식함으로써 오히려 유명해진 예술가들도 많다. 요즘에는 부정부패 관련 혐의를 받고 결백을 증명한다는 명분으로 자살한 사람들도 있다. 학교성적이 올라가지 않는다고 고층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하는 가엾은 여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꾸어 쓴 돈 몇 만원을 값지 못해 괴로워 연탄불을 피워놓고 유서를 남긴 여공들도 있었다. 얼마 전엔 80대 노부부와 장애인이 생활고와 자신의 처지를 비관, 극약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 사실 자살충동을 한번도 안느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좋아 죽겠다, 슬퍼 죽겠다, 기분나빠 죽겠다는 등 사람들은 자살 가능성을 무심코 시사한다. 그러나 너무 행복해서 죽은 사람은 없다. 자살을 택한 사람은 아파서, 배고파서, 억울해서 죽은 것이다.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했다. 고생스럽고 천하게 살더라도 죽는 것 보다는 사는 것이 낫다고 한다. ‘개똥 밭에 이슬 내릴 때가 있다’‘개똥 밭에 인물 난다’는 말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배고파서 자살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은 언제쯤 오려는가. /淸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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