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피라미드에서 내려와 나무 한 그루 없는 죽은 자의 길을 따라 달의 피라미드로 향한다. 죽은 자의 길은 테오티우아칸의 중심이고 케찰파팔로틀 신전에서부터 태양의 피라미드를 거쳐 달의 피라미드까지 이어지며 유적의 전면은 모두 이 길을 향한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도로는 폭 40100m에 길이가 5.5㎞나 되나 현재 2.5km 정도 개방하고 있다. 이 길은 신에게 바칠 인간 제물을 운반했고 길옆에는 지배자의 분묘가 있었다고 하나 아직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아 알 수 없다. 재규어 신전 벽면에는 당시 숭배했던 재규어 벽화도 눈에 띄고 크고 작은 석조건축물을 볼 수 있어 거대한 유적을 걸으며 관람하는 야외박물관이다. 길옆에는 기둥 광장(Plaza de las columnas), 야후알로 궁전(Palace of Yahualo), 자쿠알라 궁전(Palace of Zacuala)의 기단석이 있고 주변에는 상하수도와 목욕탕 같은 유적 잔해도 200여 개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지역 특산물인 흑요석과 도자기를 메소아메리카 전역으로 교역하였던 장터 흔적이 있고 유적지 뒤편에는 멕시코의 상징인 키 큰 선인장이 보인다. 이곳 주산물인 흑요석은 철로 된 칼 못지않은 날카로움을 가지고 있어 전쟁 때는 칼과 화살촉 같은 무기 재료로 사용됐고 사냥한 동물의 가죽을 벗길 때도 유용하게 쓰였다. 그뿐만 아니라 인신공희를 위해 심장을 꺼낼 때도 흑요석 칼을 사용했으며 그 흔적은 가까운 곳에 있는 마누엘 가미오 박물관(Manuel Gamio Museum)에서 볼 수 있다. 박태수 수필가
다음으로 죽은 자의 길(La Calle de los Muertos)을 따라 유적지 중심인 태양의 피라미드로 간다. 중남미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이 피라미드는 한 변의 길이가 220x230m나 되고 높이도 66m나 된다. 쌓는 데에는 붉은 화산암을 포함해 76만5천㎥의 건설 재료가 사용됐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중앙에 있는 248개의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 피라미드 꼭대기를 향해 가파른 돌계단을 원숭이처럼 기어오른다. 멀리서 바라볼 땐 쉽게 오를 것 같았으나 생각보다 경사가 가파르고 들바람도 세차게 불어 숨이 차고 균형을 잡기 쉽지 않다. 오르고 쉬기를 반복하며 20여 분 정도 걸려 꼭대기에 다다른다. 정상에는 제례를 치르는 시설이 있었다고 고고학계는 추정하나 유적은 간데없고 오로지 광야에서 불어오는 세찬 들바람이 시원함을 선물한다. 피라미드 꼭대기는 유적지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테오티우아칸의 장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뷰포인트다. 발아래 죽은 자의 길 끝에는 달의 피라미드(Pyramid of the Moon)가 보이고 누구나 이곳에 오르면 길 좌우에 펼쳐진 석조 건축물의 규모에 놀라 경탄한다. 이곳에서는 곳곳의 발굴 현장을 볼 수 있고 개방하지 않은 지역의 크고 작은 피라미드와 석조건축물도 볼 수 있다. 태양의 피라미드는 5단의 방단형 구조로 작은 돌에 석회 반죽을 쌓아 단별로 좁혀가는 방식이다. 돌을 다듬어 차곡차곡 쌓은 정방형 일체형의 이집트 피라미드와는 차이가 있다. 세운 목적도 이집트는 왕이나 죽은 자의 무덤이었다면 테오티우아칸은 태양신에게 인신공희(人身供犧)를 올렸던 제단이었다. 1971년 인류학 및 역사연구소는 테오티우아칸을 유적지 정밀 발굴하는 과정에서 피라미드 내부로 들어가는 통로를 찾았다. 지하에는 제물로 희생된 사람의 뼈와 유물이 있었고 유골 형태를 볼 때 산 사람의 허리를 부러뜨려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심장을 꺼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지하는 발굴이 진행되고 있어 언제 일반인에게 공개할지 알 수 없다. 박태수 수필가
테오티우아칸 유적지 입구에 서면 태양의 피라미드(Pyramid of the Sun)가 어서 빨리 오라고 손짓한다. 드론을 띄우지 않고서는 유적지를 한 번에 카메라에 담을 수 없을 정도라 규모에 압도당한다. 하루 일정으로 이곳을 찾았지만 오가는 시간을 고려하면 4시간 정도 머물 수 있다. 현장에 도착하고 보니 둘러볼 곳이 많고 규모도 커 중요 유적 5곳 정도 탐방하고 시간이 남으면 박물관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먼저 유적지에서 세 번째로 큰 깃털 달린 뱀의 피라미드(Feathered Serpent Pyramid)라는 별칭을 가진 케찰코아틀 신전(Templo de Quetzalcoatl)에 다다른다. 이 신전의 속살은 2003년 폭우 때 한 고고학자가 사방 1m 크기의 싱크 홀이 생긴 것을 찾았다. 그는 지하에서 기원후 50200년 사이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는 다수의 유골을 발굴했고 지하 터널은 200년에 이미 봉인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유적의 가치를 인정한 세계기념물감시위원회는 2004년 감시목록에 올렸고, 지금도 발굴 중이라 입구에는 출입을 제한하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아쉽지만 멕시코 국립 인류학 및 역사연구소 자료를 바탕으로 피라미드를 살핀다. 신전은 6단으로 다른 피라미드보다 높이가 낮고 전면 계단을 중심으로 각 층 좌우에 깃털 달린 뱀 머리와 몸통을 형상화한 섬세한 조각이 장식돼 있다. 1천500년 세월이 흘렀어도 그 위용과 정교함을 잃지 않았고 미려한 아름다움은 고대 조각품으로도 가치를 인정받는다. 신전 벽에는 선인장에 기생하는 연지벌레 코치니아를 재료로 만든 천연염료로 정교한 문양에 색을 칠한 아름다운 벽화가 남아 있다. 다신(多神)을 믿었던 고대 신앙에서 케찰코아틀은 비를 내리는 신으로 땅의 풍요를 상징한다. 멕시코 고대 문명을 이해하는 데 태양신과 더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신을 상징하는 문양은 테오티우아칸 시대 전사들이 착용하는 투구나 머리띠 중앙을 장식했던 심볼로 케찰코아틀은 후대 아스텍 시대 틀랄록(Tlaloc)과 같다. 신전은 150200년 사이에 조성된 초기 지하 기단 위에 450500년에 피라미드를 올렸고 종교와 정치 중심지였다. 박태수 수필가
피라미드라면 이집트를 연상하지만 멕시코에도 문명과 축조 시기가 다른 피라미드가 여러 지역에 분포한다. 오늘은 해발 2천300m 고지에 있는 신들의 고향 또는 죽은 자가 신이 되는 도시인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을 찾아간다. 이 유적은 태양과 달의 피라미드로 유명하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미스터리에 쌓여 있지만 멕시코에서는 가장 오래된 유적지다.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BC 1세기경이지만 밀집해 정착한 시기는 AD 1~7세기다. 이곳에 터를 잡은 고대인은 치밀한 계획을 세워 신의 대변자인 제사장이 믿음을 앞세워 통치하는 신정(神政) 형태의 도시국가를 건설했다. 하지만 7세기 후반 알 수 없는 재앙(화재와 전염병 추정)으로 폐망했고 그 후 600여 년 동안 밀림에 버려졌다. 테오티우아칸의 피라미드와 신전ㆍ궁전과 주택ㆍ대로와 광장ㆍ시장과 부속 건축물은 어울림과 통일성을 가지고 상호 연계해 건설한 계획도시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멕시코 고대 유물 중에서 가장 발전한 형태라고 고고학자들은 평가한다. 그러나 신비에 쌓인 이곳은 누가, 언제, 왜, 어떻게 건설했는지 알지 못한다. 숙소를 출발해 지하철로 북부버스터미널까지 이동, 시외버스를 타고 멕시코시티에서 북동쪽으로 약 50㎞ 떨어진 테오티우아칸으로 향한다. 시가지를 벗어나자 길옆 산비탈에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 같은 허름한 빈민촌이 산꼭대기까지 자리를 잡았다. 멕시코시티와 상반된 삶의 현장이 가감 없이 펼쳐진다. 1시간 남짓 달려 목적지에 도착한다. 박태수 수필가
아스텍 시대에는 태양신의 생명력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제물로 공양하던 태양숭배 신앙이었지만 누에바 에스파냐 시대에는 침략자 에르난 코르테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매일매일 여러분을 위해 피를 대신 흘려주기 때문에 태양은 절대 사그라지지 않는다라는 말로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독려했다. 식민 초기 원주민들은 개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생각만큼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성모 마리아가 후안 디에고에게 발현한 후 빠른 속도로 개종이 이루어져 태양에 영원한 생명력을 공급하기 위한 명분의 인신 공양은 사라졌다. 그 후 도시에는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고 지금의 콜로니얼 건축물의 상당 부분이 교회다. 과달루페 성모 발현 이후 가톨릭은 멕시코 전역에 뿌리를 내렸고 원주민 토착 문화와도 자연스럽게 혼합되며 새로운 종교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실례로 과달루페의 성모 그림 속 마리아도 원주민 인디오 피부색을 가진 모습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친밀감을 높였다. 이 기적은 원주민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에스파냐는 종교적 일체감을 바탕으로 중남미 식민지 건설에 발판을 구축했다. 때로는 좋은 꿈을 꾸고 산 복권이 1등으로 당첨되는 기적 같은 행운이 일어난다. 신학적 개념의 기적은 종교적 상황에서 믿는 신이 자신의 기도나 일상에서 초자연적인 상징으로서 발생하는 일이다. 몇 년 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시골 성당에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로 변한 기적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체의 기적은 깊은 기도 속에서 인식되는 신앙적 기적이다. 과달루페 성모 발현처럼 불가사의한 형상이나 상징도 신앙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오고 교회 안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의미가 부여된다. 여행은 이처럼 현지인의 일상을 넘어 종교적 신념과 믿는 신앙의 깊은 곳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 받는 것보다 베풀었을 때 기억이 오래 남듯이 책이나 영상으로 보는 것보다 현지에서 생생한 현장을 보면 이해도 빠르고 밤하늘에 수놓은 별처럼 촘촘히 뇌리에 기억되며 느낀 감정을 글로 정리할 때 여행의 추억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박태수 수필가
옛 성당을 둘러보고 체육관처럼 원형으로 신축한 대성당으로 간다. 성당의 규모는 상상했던 것보다 크다. 이곳을 찾는 순례자를 고려해 크기가 정해졌다고 한다. 1만명이 동시에 미사를 드릴 수 있는 규모지만 천장을 바치는 기둥이 없는 건축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성당에는 과달루페 성모 그림과 기적의 망토를 보려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특히 망토가 보관된 곳에서는 한 사람이 오랫동안 그 앞에 서 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빙워크를 설치해 놓고 누구나 지나면서 봐야만 한다. 한번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순례자는 돌아가서 다시 무빙워크에 올라야 하지만 차례를 기다리는 줄이 너무 길어 그마저도 쉽지 않다. 과달루페 성지의 중심인 교회 두 곳을 둘러본 후 옛 성당 옆에 있는 수도회수련 학교 성당인 카푸친 교회를 둘러본다. 이 성당을 새로 지을 때 바로 옆에 있는 옛 성당에 심한 지반 침하 피해를 줬다. 작지만 아름다운 카푸친 성당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건축적으로 외적 아름다움 못지않게 내부도 밝고 아늑해 기도하는 순례자들이 즐겨찾는 성당이다. 언덕을 올라 후안 디에고가 성모 마리아를 만났던 장소에 지은 작은 예배당인 세리토 성당(Capilla del Ceritto)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별 모양의 창틀과 밝은 타일로 꾸민 돔형식의 지붕이 예쁜 원형의 포시토 성당(Templo del Pocito)을 둘러본다. 그리고 언덕에 있는 발현 모습과 개종해 기도하는 원주민의 조형물을 감상하고 순례를 마친다. 멕시코는 고대로부터 태양신을 받드는 아스테카 문명으로 샤머니즘적 신앙을 믿었다. 그러나 1521년 에스파냐가 지배하던 초기에는 원주민을 가톨릭으로 개종 시켜 종교적 일체감을 이루고자 했다. 본국 교구에서 파견한 사제들에 의한 선교 활동이 활발했던 식민과 포교의 시기였으나 쉽지 않았다. 박태수 수필가
심하게 기울어진 옛 교회는 1974년에 보수 공사를 시작해 1976년에 완공했으나 안전을 담보할 수 없자 잠시 폐쇄됐다. 1979년 멕시코 고고학 및 역사연구소(INAH)에서 기단과 벽체를 강화하는 복구 계획을 세워 복원 기간을 길게 잡고 안전하게 공사를 마친 후 2000년에야 문을 다시 열 수 있었다. 옛 교회는 지난 세월의 무수한 자연 재앙의 고난과 시련을 간직하고 있어 이곳을 찾는 순례자에게 신앙적으로 여전히 ??방문할 가치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성지의 상징성과 콜로니얼 시대 중세 교회 건축물을 이해하기에는 종교를 떠나 충분한 가치가 있으며 예술적으로도 매우 아름답다. 과달루페 성지에는 성모 마리아 발현 당시 후안 디에고가 입었던 망토가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망토의 천은 보통 20~30년 정도 수명이나 50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완전한 상태다. 그뿐만 아니라 1791년 망토에 암모니아가 쏟아졌던 일이 있었으나 저절로 복원됐고 1921년 폭탄 테러 때에도 전혀 손상을 입지 않자 멕시코 사람들은 과달루페 성지에 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믿는다. 옛 성당에서 신축한 대성당으로 옮겨 보관 중인 성모 그림은 현대 과학으로도 풀 수 없는 신비를 지닌 그림으로 유명하다. 1979년 미국 과학자가 적외선을 이용해 성화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붓질한 적도 없고 직물에 화학적 처리도 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사람의 손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다는 믿기 어려운 결과가 있었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반천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섬유조직의 형태와 색감에도 변화가 없다. 이외에도 옛 교회에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과달루페 기적을 본 후안 디에고 성인의 청동 조각상이 있다. 그의 망토에는 성모 마리아가 기도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1921년 테러범이 중앙 제단 옆에 폭탄을 터뜨려 성당 내부가 대부분 파괴됐으나 기도하는 성모 마리아 모습이 그려진 후안 디에고의 망토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박태수 수필가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생전에 과달루페 성지를 다섯 번이나 방문했고 2002년에는 후안 디에고를 성인품에 올렸다. 대성당 광장에 도착해 십자가 형상의 조형물을 통해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기적 이야기를 인형극으로 표현하는 퍼포먼스를 본다. 성지에는 크고 작은 성당 일곱 곳이 저마다 목적을 가지고 곳곳에 세워졌고 성모 발현 모습을 재현한 성상은 테페익 언덕에 조성돼 있다. 하지만 성지의 중심은 광장 앞 기울어진 그리스도 왕 속죄 교회(Templo Expiatorio a Critro Rey)다. 교회 건축은 누에바 에스파냐 건축가 페드로 데 아리에타(Pedro de Arrieta)가 1695년에 착공, 1709년에 완공했다. 구조는 각 모서리에 4개의 팔각형 탑을 세워 그 중앙에 커다란 돔이 있는 전통적인 스페인 바로크 양식이다. 교회는 완공 후 지반 침하로 크고 작은 손상을 입었고 특히 1887년에는 카푸친(Capuchin) 수녀원 건설 때 심각한 피해를 봤다. 그 후 몇 차례 복구 과정을 거치면서 바로크 양식은 대부분 사라졌고 1895년 완공 때에는 지금 모습인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바뀌었다. 성모 발현을 상징하는 신학적 의미를 담은 5개의 성화가 있는 옛 교회는 1921년 폭탄 테러로 대파됐다. 여러 차례 복구했어도 지반 침하로 기울어지자 교회 당국은 현대식으로 새 성전을 지었고 성지의 상징인 과달루페 성모상은 옛 교회에서 신축한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새로운 대성당이 지어지고 옛 교회의 이름은 처음 사용했던 과달루페 옛 대성당(Antigua Basilica de Guadalupe)에서 그리스도 왕 속죄 교회로 바뀌면서 대성당을 상징하는 바실리카(Basilica)라는 명칭도 이름에서 빠졌다. 박태수 수필가
멕시코에는 두 곳의 상징적인 가톨릭교회가 있다. 첫 번째는 멕시코 대성당이고 두 번째는 과달루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다. 이곳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개종한 원주민 후안 디에고(Juan Diego)에게 나타난 기적을 기리고자 1709년에 세웠다. 멕시코 대성당은 아스테카 제국의 왕궁과 신전을 파괴하고 누에바 에스파냐를 건설할 때 가톨릭을 전파하기 위해 테노치티틀란 터전에 세운 상징적인 식민지 교회였다. 그러나 과달루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가톨릭이 전파된 지 10년 후 후안 디에고 에게 발현한 성모가 전한 메시지에 따라 세운 교회로 신앙의 중심이자 안식처다. 과달루페 성지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아스텍 출신 후안 디에고가 1531년 테페익(Tepeyac) 언덕을 지나가다 우연히 성모를 만났다. 마리아는 디에고에게 주교에게 가서 이곳에 교회를 지으라고 몇 차례 전했으나 스페인 출신 주교는 천한 원주민이 전하는 메시지를 믿지 않았다. 성모는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를 주교가 믿지 않자 이번에는 디에고에게 바위산 언덕에 올라가 장미꽃을 꺾어오라고 했다. 성모가 말한 곳에 오르자 겨울철임에도 장미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꽃을 꺾어 망토에 싸서 내려온 디에고에게 성모는 주교에게 이 꽃을 전하며 자신의 메시지를 다시 전하라고 했다. 그동안 디에고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던 주교는 망토에 싸 온 자신의 고향 카스티야 장미꽃과 망토에 새겨진 기도하는 성모의 모습을 보고서야 발현을 믿고 그 장소에 성당을 지었다. 이후 태양신을 믿던 많은 원주민이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디에고도 죽은 후 이곳에 묻혔으며 그는 가톨릭 성인품에 올랐다. 성지는 멕시코시티 북쪽 테페익 언덕에 있다. 프랑스 루르드ㆍ포르투갈 파티마와 함께 세계 3대 성모 발현지다. 과달루페 성지는 멕시코뿐만 아니라 중남미 가톨릭 인에게는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처럼 일생에 한 번은 찾아야 하는 순례지로 생각한다. 박태수 수필가
며칠 동안 잠이 부족해 피곤하다. 호텔은 힐튼 체인으로 수준급에 속하지만 서비스와 아침 식사는 그저 그렇다. 하지만 호텔 위치가 소칼로 광장과 가깝고 교통이 편리하며, 특히 누에바 에스파냐 때 지은 콜로니얼 건물을 리모델링해 지어진 만큼 중세의 중후한 멋이 있고 건축적으로도 아름답다. 식사를 마치고 과달루페 성모 발현 성지로 가는 방법을 알아본다. 광장 옆 소칼로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과달루페 성모 마리아 대성당(Basilica de Santa Maria de Guadalupe)으로 간다. 치안 유지 때문인지 멕시코시티에는 길거리와 지하철역에서 중무장한 경찰을 쉽게 볼 수 있다. 한 경찰관에게 지도를 보여주고 과달루페 성지로 가는 방법을 묻자 그는 갈아탈 역과 내릴 역을 자세히 알려준다. 떠나기 전 멕시코시티는 치안이 불안하고 버스와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출근 시간이라 지하철은 복잡하고 다양한 연령대의 서민이 함께하는 인간 시장 같다. 메트로 2호선에서 메트로 6호선을 갈아타고 La Villa Vasilica 역에 내려 10분 정도 걸어 과달루페 성지에 도착한다. 역에 내려 성지로 가는 길은 누구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 내린 사람 대부분은 성지 순례자라 따라가면 된다. 그들은 멕시코인이거나 아니면 중남미에서 온 순례자이고 여행자도 그 속에 섞여 있다. 멕시코는 에스파냐의 식민지 영향으로 가톨릭 신자가 전체 인구의 80% 이상 차지할 만큼 교세가 크고 교구와 교회도 많다. 그뿐만 아니라 가톨릭에 대한 믿음만큼 교회 행사 또한 성대하고 특히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는 우리나라 명절처럼 중요하게 생각한다. 박태수 수필가
최근에는 멕시코 토속 음식을 주된 메뉴로 하는 고급 레스토랑이 광장 주변에 생겨 타코와 부리또를 비싼 가격으로 서비스한다. 하지만 서민 음식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현지인처럼 길거리에서 손으로 들고 먹어야 한다. 콜로니얼 시절 귀족에게 무시 받던 원주민 음식이 지금은 멕시코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사랑받고 그들의 정체성을 알리는 중요한 음식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시장을 돌다 보니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식욕을 돋우는 냄새와 조금 전 느낀 타코 맛이 입안에 맴돌며 침샘을 자극한다. 코끝을 자극한 냄새에 이끌려 가던 발길을 멈추고 부리또를 또 먹는다. 매콤한 멕시코 고추 맛은 입안에서 우리네 매운맛과 소통하며 또 다른 맛의 진미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피로가 몰려들고 체크인 시간이 되어 호텔로 돌아간다. 가는 길에 씨티은행 현금인출기에서 여행경비를 인출한다. 미국이 가깝고 미국 경제권이라 그런지 사용하기도 쉽고 환율도 괜찮으며 도시 곳곳에 현금 인출기가 있어 편리하다. 수많은 여행자가 멕시코시티를 방문하는 대표적인 이유는 아스테카 제국 고대 문명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고 에스파냐 식민 지배와 그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혁명 시대를 거치며 변모한 다양한 역사와 문화를 모두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멕시코 원주민은 16세기 초 에스파냐에 정복되기 전까지는 멕시코 전역에 기원전부터 발달한 올메카 마야 톨테카 아스테카로 이어진 토착 문명을 가진 고대 문명국가였다. 하지만 1521년 코르테스가 이곳을 점령한 후 멕시코 사회는 에스파냐 국왕이 파견한 부왕(副王, Viceroy)에 의하여 빠르게 식민 사회로 재편되면서 새로운 혼합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멕시코는 에스파냐에서 파견된 식민 관료, 멕시코에서 출생한 백인(Criollo), 원주민과 백인의 혼혈(Mestizo) 그리고 원주민으로 이어지는 네 계층 간 계급 사회가 형성된다. 식민 관료는 멕시코 사회의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고 크리올료는 대토지 소유제에 기반을 둔 경제력을 차지한다. 하지만 메스티소와 원주민은 대농장(hacienda)에서 혹사당하는 노예(peon)로 전락한다. 이런 폐단이 쌓여 1810년 9월 신분 해방을 원하는 메스티소와 정치권력을 원하는 크리올료가 힘을 합쳐 전쟁을 일으켰고 이들은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다. 이때 독립 전쟁을 이끈 이뚜르비데(Iturbide)를 중심으로 잠시 왕정으로 복귀하였으나 3년 만에 종식되고 1824년에는 공화제 헌법이 선포되어 오늘날 멕시코합중국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독립과 함께 노예 해방을 형식적으로 선언하였고 1세기 동안 대토지소유제가 폐지되지 않음으로써 노예제도는 오히려 더 광범위하게 자리 잡았고 그 후유증은 지금까지 이어져 빈부격차가 심한 사회구조가 형성되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언어 소통 문화 차이 음식과 잠자리 불편도 있지만, 몸에는 엔도르핀이 솟는다. 여행지에서 접한 생생한 현장 체험은 눈과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차게 할 뿐만 아니라 명작처럼 깊은 감동의 울림을 받는다. 여행길에서 눈길 닿아 느낀 감정을 뇌리에 차곡차곡 쌓아 여행에서 돌아와 느낀 감동의 울림을 마디마디 글로 엮어 정리한다. 이렇게 쓴 에세이는 한 편의 드라마가 되어 다시 새록새록 떠오르고 세월이 지나면 지울 수 없는 인연처럼 굽이굽이 곡수처럼 아름답게 이어진다. 박태수 수필가
성당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와 대통령 궁 옆길을 걷는다. 궁은 원래 아스테카 제국의 왕궁이 있던 자리에 누에바 에스파냐 시절 총독부 건물로 지었으나 지금은 대통령 궁으로 사용하고 있다. 광장 집회 때문에 궁 주변은 경찰 경비가 삼엄해 내부 구경을 포기하고 골목길로 들어선다. 대통령 궁 뒷길에는 보따리상들이 여행자를 상대로 짝퉁 물건을 파는 노점상이 많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외마디 외침에 순식간에 모두 사라진다. 대통령 궁 부근이라 보따리 장사를 할 수 없는 곳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경찰 단속 때문이다. 어려운 사람들의 삶이 있는 현장을 이곳에서도 본다. 모네다 골목길을 따라 걷다 산티시마 거리와 만나는 모퉁이에서 오래된 성당을 만난다. 멕시코대성당에 비해 초라하고 누추하나 성당 안에는 오래된 세월이 축적된 흔적이 남아 있어 카메라에 담는다. 월요일은 성직자에겐 휴일이지만 복사가 제대에 촛불을 켜는 것을 보니 곧 11시 미사가 시작될 것 같다. 멕시코에서 첫 미사를 드리자는 아내의 제안으로 미사에 참례한다. 미사를 마치고 신부는 우리 부부에게 다가와 성수로 축복해 준다. 여행지에서 뜻하지 않게 축복을 받는다. 몇 년 전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순례자를 위한 저녁 미사 후 받았던 축복을 이곳에서도 받고 보니 심적으로 편안하다. 관리인에게서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성당이라는 이름을 받아 적고 발길을 재래시장으로 옮긴다. 인구가 1억5천만 명이 넘고 국토 면적이 한반도의 9배나 되는 나라의 수도에 걸맞게 시장 규모가 대단하다. 미국 오리건 ESL에서 함께 공부한 멕시코 친구의 조언에 따라 길거리 식당에서 타코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한다. 가격도 저렴하지만 매콤하면서도 독특한 맛과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향이 일품이다. 현지인이 즐겨 찾는 재래시장은 그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고 그곳에서 맛보는 토속 음식은 여행의 즐거움이 배가 된다. 특히 멕시코 음식 중 타코와 부리또는 대중 음식으로 각종 고기와 다양한 채소를 넣어 볶은 후 옥수수 가루로 만든 토르티야로 쌈처럼 싸서 먹는다. 내용물은 지역 특산물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비슷하고 가격은 우리 돈 천 원 정도로 저렴하다. 최근에는 멕시코 토속 음식을 주된 메뉴로 하는 고급 레스토랑이 광장 주변에 생겨 타코와 부리또를 비싼 가격으로 서비스한다. 하지만 서민 음식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현지인처럼 길거리에서 손으로 들고 먹어야 한다. 콜로니얼 시절 귀족에게 무시 받던 원주민 음식이 지금은 멕시코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사랑받고 그들의 정체성을 알리는 중요한 음식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박태수 수필가
광장에서 5분 거리에는 지금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고대 아스테카 유적 템플로 마요르 가 있다. 광장 주변 지역을 걸어다니다 보면 즐비한 콜로니얼 건축물 때문에 시각적으로도 이곳이 중세 역사지구라는 것을 직감한다. 소칼로 광장에서 가장 돋보이는 멕시코대성당에 도착한다. 멀리서 바라본 대성당의 예술적 아름다움을 한 발치 앞에서 감상한다. 대성당은 멕시코 대지진에 조금 기울어졌지만, 내부는 16세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유럽 어느 대성당과 비추어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미적 아름다움과 예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인구의 9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인 멕시코에서 대성당은 문화 정체성의 중심이고 역사적으로는 누에바 에스파냐의 상징이다. 이 성당은 스페인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클라우디오 데 아르시니에가(Claudio de Arciniega)가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하엔 산타 마리아 대성당과 바야돌리드에 있는 성모 마리아 대성당을 벤치마킹하여 1573년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계획하여 1581년에 벽을 세우며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 후 1813년까지 여러 차례 증ㆍ개축했으며 250년 동안 수많은 건축가, 화가, 조각가, 금도금 예술가들이 고딕, 스페인식 바로크 양식, 신고전주의 양식을 모두 동원하여 지금 모습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중앙 대제단의 검은 예수상은 현지인의 피부색을 바탕으로 조각한 모습으로 이색적이다. 대성당은 두 개의 종탑과 중앙 돔 그리고 세 개의 큰 구획으로 나누고 74개의 아치와 40개의 이오니아식 돌기둥으로 천정을 받치는 건축적 특징이 있다. 내부는 중앙에 큰 제단이 있고 좌우에 작은 제단이 두 개 있으며 통로의 아치와 기둥 사이에는 16개의 기도할 수 있는 예배당도 있다. 유럽의 대성당처럼 이곳에도 지하 묘지가 있는데 교구장을 맡았던 고위 성직자의 유골이 묻혀 있다. 계획대로 여행을 순조롭게 할 수 있도록 의자에 앉아 중앙 제단을 향하여 기도한다. 감미로운 파이프 오르간에서 흘러나오는 성가를 들으며 깜박 졸다 보니 어젯밤 비행기에서 지친 피로가 풀린다. 성당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와 대통령 궁 옆길을 걷는다. 궁은 원래 아스테카 제국의 왕궁이 있던 자리에 누에바 에스파냐 시절 총독부 건물로 지었으나 지금은 대통령 궁으로 사용하고 있다. 광장 집회 때문에 궁 주변은 경찰 경비가 삼엄하여 내부 구경을 포기하고 골목길로 들어선다. 박태수 수필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소칼로 광장은 콜로니얼 시대 건축된 건물로 둘러싸여 있다. 기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소칼로 광장의 최초 이름은 Plaza Real이었으나 1843년 산타아나 대통령이 독립기념탑을 세우면서 소칼로로 바꾸었다. 현재 공식 명칭은 헌법 광장이지만 이곳은 멕시코를 대표하는 역사성과 상징성을 갖춘 장소로 멕시코인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정복자 코르테스는 아스테카 왕조의 템플로 마요르와 왕궁을 부수고 그 돌을 사용하여 총독 관저와 관청을 지어 식민 지배를 위한 초석을 놓았다. 그리고 에스파냐의 기독교를 전파하고자 멕시코대성당도 이 돌로 지음으로써 아스테카 문명의 혼이 잠든 콜로니얼의 아픈 상흔이다. 이곳은 아스테카 시대부터 왕실과 제례 종교의식을 치렀던 신성한 장소였으나 콜로니얼 시대에는 총독의 취임? 군사 퍼레이드? 독립 기념행사? 가톨릭의 성주간 등 축제 장소였다. 지금은 국가 행사와 각종 집회 장소로 사용하지만 멕시코를 찾는 여행자에게는 제일 먼저 찾는 관광명소다. 광장 주변은 아스테카 문명과 식민 역사 그리고 현대의 문화 예술이 뒤섞여 있는 특별한 장소다. 대통령 집무실과 연방대법원이 주변에 있어 경비가 삼엄하지만, 여행객에게 불편을 주지 않는다. 광장 중앙에는 멕시코에서 가장 높은 국기 게양대에 녹색 백색 적색의 세 가지 색의 초대형 국기가 항상 펄럭인다. 멕시코 국기는 언뜻 보면 이탈리아 국기와 혼동하기 쉽다. 삼색 중 녹색은 독립과 대지의 자원, 백색은 순결과 통일, 적색은 백인 인디오 메스티소를 포함한 다양한 인종의 통합과 독립을 위해 바친 독립운동가의 헌신과 희생의 상징이다. 가운데 국장은 독수리가 뱀을 물고 앉아 있는 호숫가 선인장이 있는 곳에 도읍을 세우라는 아스테카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의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박태수 수필가
에피소드 1 : 아스테카 혼이 깃든 소칼로 광장과 콜로니얼의 상징 멕시코 대성당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혼재한 멕시코는 축구와 데킬라 그리고 사막 지형에 커다란 선인장과 마리아치 음악을 즐기는 정열적인 나라 정도만 알고 떠난다. 여행 서적과 인터넷 서핑으로 자료를 조사하였으나 빙산 한 조각에도 미치지 못하는 정보를 가지고 두려움보다는 설렌 마음으로 비행기를 탄다. LA를 거쳐 이른 아침에 멕시코시티국제공항에 도착한다. 여행 시기가 1월 중순의 겨울철이고 북반구라도 적도와 가까운 지역이라 춥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해발고도 2천300m 고원 탓인지 공항 날씨는 코끝에서 냉기를 느끼게 한다. 입국 절차를 마치고 짐을 찾아 밖으로 나가자 차가운 아침 공기는 밤사이 피로를 밀쳐내고 정신까지 번쩍 들게 한다. 관광 안내소에서 지도 한 장을 구하여 호텔 위치를 표시하고 택시 정류장으로 간다. 45달러라는 가격은 생각보다 비싼 가격이다. 아침부터 흥정으로 서로 기분을 상하지 않기 위하여 택시 타기를 포기하고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간다. 그곳에서 친절한 현지인의 도움으로 시내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숙소가 있는 소칼로 광장 부근까지 간다. 월요일 아침 출근 시간이라 버스 안은 이리 밀리고 저리 치이고 발 디딜 틈 없을 정도여서 마치 80년대 서울 시내버스 안으로 시간여행을 온 듯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함으로써 교통비 절약을 떠나 차창 밖 삶의 모습까지 볼 수 있어 돌 한 개를 던져 새 두 마리 잡은 기분이 들고 2천 원도 되지 않는 돈으로 숙소 부근까지 이동하고 보니 배낭여행자로서의 첫 출발을 잘한 것 같다. 버스에서 내려 소칼로 광장에 다다르자 멕시코시티에 도착한 것을 실감한다. 주변은 유럽의 어느 도시로 착각할 만큼 화려한 중세 건물이 즐비하다. 체크인이 되지 않는 이른 시간이라 호텔에 가방을 맡기고 선글라스와 몇 가지 필요한 물건을 챙겨 소칼로 광장으로 간다. 광장은 생각보다 크고 중남미 여러 나라에 있는 에스파냐 식민 시절 조성한 마요르 광장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오늘따라 화물차노동조합이 광장에서 집회하고 있어 골목마다 수많은 경찰이 배치되어 있다. 멕시코 대성당(Cathedral Metropolitana)과 대통령궁을 한눈에 보기 어렵지만 우리네 집회처럼 고성능 확성기를 사용하거나 도로를 점거하지 않아 다소 불편하여도 지장이 없다. 소칼로는 아스테카 시대 수도 테노치티틀란(Tenochititlan)의 중심지로 호수 속 아름다운 섬이었으나 1521년에 에스파냐 정복자 코르테스(Cortes)는 이곳을 점령하고 호수를 메워 그 자리에 누에바 에스파냐를 세우고자 사방 240m 크기의 광장을 만들었다. 박태수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