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대의료원, 소아과학 국제학술 심포지엄

한림대의료원(원장 배상훈)은 오는 26일 오전 9시~오후 5시 서울 삼성동 코엑스 그랜드볼룸에서 소아천식, 수면장애, 소아비만, 유전대사질환, 소아두통 등 소아과학을 주제로 국내외 저명한 의학자들을 초청, 제4차 한림-컬럼비아-코넬 의과대학 국제학술 심포지엄을 마련한다. 심포지엄 제1부에선 기도질환의 최신 경향을 주제로 로버트 멜린스(Robert B. Mellins) 미국 컬럼비아의대 박사와 아태(아시아·태평양) 소아알레르기 호흡기면역학회를 이끌고 있는 이해란 강동성심병원 교수 등이 소아천식의 최근 경향과 치료법을 소개한다. 수면무호흡증의 세계적인 대가인 제랄드 라클린(Gerald M. Loughlin) 미국 코넬의대 박사의 소아 폐쇄성 수면 무호흡 증후군에 대한 특강도 진행된다. 2부에선 내분비와 신진대사질환에 대해 컬럼비아의대 나오미 당뇨병센터에서 대사질환의 유전학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웬디 정(Wendy Chung) 박사와 국내 유전성 대사장애질환 분석의 대가인 이홍진 춘천성심병원 교수 등이 발표한다. 3부에선 소아신경학에 대해 신경대사 및 신경유전학에서 탁월한 연구업적을 이룩한 마크 패터슨(Marc C. Patterson) 미국 컬럼비아의대 소아신경과 교수와 국내 소아신경학 교수들이 해당 전문분야의 최신 소식과 향후 발전 전망을 발표한다. 배상훈 한림대의료원장은 “어린이들을 건강하게 키워내는 일은 우리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로 이번 심포지엄이 국내 소아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종현기자 major01@kgib.co.kr

“화성행궁앞 공간 원형복원 중요”

수원 화성의 옛 모습과 행궁앞 공간의 복원을 위해선 우선 옛날 그대로 18세기 수원의 도시 원형 복원이 가장 중요하며 원형을 복원할 때까지 행궁 앞 공간을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사)화성연구회(이사장 김이환)는 지난달 29일 선경도서관 강당에서 조병로 경기대 교수 사회로 ‘화성행궁 앞 문화공간 원형 복원과 활용’을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열고 유봉학 한신대 교수, 심승구 한국체대 교수 주제 발표에 이어 홍순민 명지대 교수, 엄서호 경기대 교수의 지정토론과 시민과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자유토론을 벌였다. 이 자리에서 심승구 한국체대 교수는 ‘수원 화성행궁 앞 공간의 문화 복원과 전망’이란 주제 발표를 통해 “세계문화윤산의 화성에서 공간은 원형공간으로 복원이 가장 바람직하고 이를 위해 ‘화성성역의궤’, ‘화성도’, ‘원행을묘정리의궤’ 등의 도설과 원문을 기초로 화성행궁 앞 거리를 옛날 그대호 복원해 18세기 수원의 도시 원형을 살리는 형태로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 교수는 이와 관련. “도시의 원형 복원은 실제 사람이 거주하면서 생활하는 등 공간의 활용문제를 행·재정적 뒷받침이 수반돼야 하고 의식주를 비롯 전통문화와 관련된 기능인이나 예술인, 문화계 종사자 등이 실제 거주하면서 기술 전수나 창작활동, 문화상품 유통에 종사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마을이나 거리문화를 조성하는 게 필요하다”고 밝혔다. 심 교수는 자료 발굴을 통한 원형 도시로서의 정체성을 찾기가 어렵다면 행궁 복원이 이뤄질 때까지 행궁 앞 공간을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정체성 유지를 위해 광장 옆으로 화성을 만든 대표적 인물들을 기억할 수 있는 상징물을 세우는 방안 검토도 제안됐다. /이종현기자 major01@kgib.co.kr

장경호 기전문화재연구원장 “문화재와 한 평생…”

“문화재 보존과 개발논리 가운데서 줄타기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경기문화재단 부설 기전문화재연구원(이하 기문원)을 초기부터 이끌었던 장경호 원장(71). 그는 10만평의 파주 LCD단지와 조선 최대 왕실사찰인 양주 회암사지 등 굵직굵직한 역사적 현장을 발굴했고 매년 발굴사업 50여건을 진두 지휘했다. 7년여의 기문원 생활을 끝으로 사임한 장 원장을 만나 그동안 감회와 향후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평생 문화재와 떨어지지 않았던 그는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미술공예실장과 국립문화재연구소장, 경기도박물관장 등을 역임하며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문화재청에 있을 때만해도 문화재 보존에 더 비중을 뒀습니다. 한쪽에선 문화재 보존, 또 다른쪽에선 아파트나 산업단지 건설 등 발전부분을 주장했죠. 경기도에 내려와 실상을 대하니 지역경제 발전을 위한 부분도 쉽게 간과할 수 없더군요.” 파주 LCD 부지 발굴은 10만평이란 규모도 그렇지만 통상 겨울철에는 발굴을 하지 않는 관례를 깨고 추진했다. 외자유치 등 사업성격을 감안해 용단을 내렸고 4천500평 규모의 비닐하우스를 설치해 작업을 진행했다. 문화재 역사와 함께 한 장 원장은 백제 무녕왕릉 발견의 단초를 제공했고 미륵사지 석탑 규모를 밝혀 내기도 했다. “당시 고분에 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 물막이 설계도를 작성하고 이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무녕왕릉 입구의 전돌이 걸리게 됐죠. 단순히 지하수 차단을 막으려 했던 게 백제의 혼이 담긴 무녕왕릉인 줄은 몰랐어요.” 그는 익산 미륵사지 동쪽에 위치했던 석탑의 층수를 밝혀냈다. 그는 석탑의 부재 260여개를 하나하나 꿰맞춰 9층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 미술사학자 고유섭씨가 7층 높이라고 주장한 이래 학계는 이를 정설로 받아 들이는 분위기였다. “그때는 젊은 혈기도 있었지만 선배들의 주장을 후배가 뒤엎는 게 괘씸하게 여겨졌던 것 같아요. 그래서 현재 김동현 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가 재조사를 하기에 이르렀는데 그때도 9층으로 판명났죠.” 가장 보람된 일은 경기도박물관에 이어 두번째로 보존과학실을 만든 것. 수집한 유물을 과학적으로 처리하는 시설을 마련해 발굴과 보존을 함께 진행할 수 있게 됐다. 반면 한가지 풀지 못한 건 도내 산재한 문화재를 총제적으로 발굴, 연구, 조사할 수 있는 가칭 ‘경기도 문화재 연구소’를 건립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현재 개발수요로 문화재 지표조사가 활발하지만 현 정부가 얘기하는 아파트 거품붕괴에 따른 건설경기 둔화 등이 현실화될 경우 발굴에만 의존하는 건 한계가 있죠. 도내 전통문화를 총괄하는 기구가 언젠가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장 원장은 수원 장안문 근처 기문원 자료실에서 전공인 전통건축물 등과 관련, 건물지 발굴에 대한 노하우를 담은 책을 엮을 예정이다. 한편 그동안 모은 장서 4천여권을 추려 일부는 기문원에 기증한다./이형복기자 bok@kgib.co.kr

단재 순국 70주년 학술세미나 최홍규 경기사학회장 주제발표

“단재 신채호(1880~1936)는 최초로 우리나라 근대 민족주의 사학을 창건했고, 한국사를 왜곡한 일제 초기 식민주의 사관과 대결한 인물입니다” 70년대말부터 단행본 ‘단재 신채호’(1979)와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상’(1983) 그리고 다수의 논문을 선보였던 최홍규 경기사학회장(전 경기대 사학과 교수)<사진>이 단재 순국 70주년을 맞아 열리는 2차례 학술세미나에 주제 발표자로 참여한다. 단재문화예술제전 추진위원회 주최로 17일 단재의 고향 청주에서 열리는 ‘단재 신채호 연구의 재조명’ 주제 학술발표회와 21일 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 주최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학술 행사의 발표문을 요약 정리했다. ◇신채호 사학의 근대성과 민중사관 문제 구한말에서 20세기 전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이론과 실천 활동을 통해 근·현대사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민족주의 사상가이자 역사학자, 독립운동가, 문학가로서 여순감옥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치열한 삶을 살았다. 구한말 애국계몽운동기에 ‘독사신론’, 국외망명 독립운동기에는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등을 집필, 우리나라 근대 민족주의 사상을 이끌었다. 특히 한국사를 왜곡하는 일제 초기 식민주의 사관을 비판·극복함으로써 우리나라 근대사학을 개척한 인물이다. 단재는 한국고대사를 주체적인 입장에서 새롭게 체계화시켜 민족자주독립을 실현코자 했고 민족주의자로 항일독립운동을 추진, 민중 주체의 근대 민족국 수립을 도모했다. 일제침략이 본격화되던 1900년 초 대한매일신보 논객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적 위장사상에 응전하기 위해 민족주의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이후 독립협회와 신민회 운동에 참여했고, 논설 ‘20세기 신국민’을 통해 시민적 민족주의에 입각한 입헌공화제를 제시했다. 초기에는 민족사적 입장에서 을지문덕과 최영, 이순신 등 위인들을 통해 국권회복과 민족중흥을 추구했으며 단군 고조선이 차지하는 민족사적 시원과 발해사와 신라사 등을 동등한 입장에서 조명한 ‘남북국시대사’를 주장했다. 여기다 ‘삼국사기’와 ‘동국통감’, ‘동국사략’ 등 유고사관 내지 존화사관을 통렬히 비판했으며 일본 근대사가들의 ‘임나일본부설’과 ‘신라정벌설’ 등의 조작적 허구성에 대해 최초로 실증적 비판을 가했다. ◇신채호의 민족운동노선과 민족주의 사학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항일 민족해방운동전선에 직접 뛰어든 인물이다. 당시 국내외 정세와 일제 식민지 정책의 변화, 민족해방운동 내부의 갈등 등에 따라 민족주의 사상과 실천적 전술론의 일대 전환이 필요했다. 군국주의 일제를 타도하기 위해 비타협적 자주독립노선과 무장투쟁방법만이 가장 유효한 목적이자 수단으로 인식했다. 특히 1920년 초부터 항일 독립운동을 민족해방을 위한 혁명적 단계로 설정하고 게릴라적 폭력을 전제로 한 민중직접혁명론을 강력 주장했다. 민중이 사회와 역사의 주인공이며 각성된 민중이 주체가 돼 항일 독립운동을 수행·전개할 때 민족해방 목표를 달성하고 자주·자유·평등의 독립국가(근대적 민족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절대독립과 완전독립 노선을 시종일관 주장, 1927년 진보적인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협동으로 발족한 신간회의 독립노선을 정립시키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신간회가 조선 민족의 정치적·경제적 해방의 실현, 모든 개량주의운동을 배격하며 민족의 현실적 공동이익을 위해 투쟁할 것 등을 결의한 점이 이를 뒷받침해준다./이형복기자 bok@kgib.co.kr

본보 주최 혜담스님 고려불화 재현 국제학술세미나

“고려불화의 화려함은 안료에 있습니다. 녹청과 군청 등 대부분의 색감을 안료의 원색을 사용합니다. 또 순금을 사용해 옷주름선과 유관선을 사용해 깊이를 더 했습니다” 경기일보가 주최한 혜담 스님 고려불화 재현 제5회 특별초대전(10~20일)과 함께 개막식이 열린 지난 10일 오후 3~6시 경기도 문화의 전당 국제회의장에서 ‘종교예술과 영성’을 주제로 국제학술세미나가 열렸다. 세미나는 김재영 서강대 교수(종교학) 사회로 정우택 동국대 교수와 오구스틴 토타카라 크미 인도 다르마람대 교수의 주제 발표와 종합 토론 등으로 진행됐다. 한편 이날 세미나에선 ‘네팔 불교와 만다라’를 주제로 나왕 라마 네팔대 교수와 ‘한 예술가의 생애에 녹아 있는 열정성의 이해’를 주제로 김소희 충주대 교수 등의 강연도 펼쳐졌다. 다음은 정우택 교수와 오구스틴 토타카라 크미 교수 주제발표 요약분이다. ◇고려불화의 아름다움(정우택 교수) 고려불화는 채색에서 주(朱), 녹청(綠靑), 군청(群靑) 등이 기본색이다. 혼합보다는 안료의 원색을 그대로 사용한다. 이는 혼합할수록 색도가 떨어져 탁해 보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특징은 금니(金泥)의 적절한 사용에 있다. 고려불화의 금색은 모두 순금이며 육신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윤곽선과 옷주름선, 각 부분 표면을 장식하는 문양 등을 금니로 표현했다. 이들 금니선은 바탕 면적의 크기와 색의 상태에 따라 때로는 가늘고 굵게 조절해 채색의 표현의도를 저해하거나 번잡스러워 보이지 않게 했다. 일본불화처럼 금박을 가늘게 잘라 붙이는 소외 절금(切金)기법을 고려불화에선 찾아 볼 수 없다. 묘선(描線)은 육신부의 경우 대부분 얇은 윤곽을 잡고 선을 따라 다시 얇은 주선(朱線)을 그어 나타냈으며 이중선 위로 엷게 바림해 입체감을 나타냈다. 법의의 윤곽과 옷주름은 얇은 먹선으로 묘사하든지 선을 따라 다시 굵은 먹선으로 강조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 선을 따라 금니선을 나타냈다. 금니선 마감은 일종의 하이라이드 효과를 얻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불화의 문양은 매우 다양하다. 각종 문양은 표현되는 장소에 따라 종류를 달리하지만 어느 정도 통일성이 엿보인다. 여래상의 문양은 가사에 ‘연화당초원문(蓮華唐草圓文)’을 가장 많이 사용했고, 대의(大衣)에는 거의 모든 그림에 공통적으로 구름과 봉화의 운봉문이 표현되며, 치마에는 타원형의 연화문과 연화당초문 그리고 구름무늬도 간혹 선보인다. ◇인도 종교예술과 영성(오구스틴 토타카라 크미 교수) 인도에선 미술을 비롯한 예술작품의 영감이 종교에서 나왔다. 특히 인도 간다라지방에서 탄생한 불교의 영향이 가장 크다. 불교 미술은 기독교 미술과 달리 철학적인 컨셉으로 이뤄진 점이 특징이다. 결국 불교미술의 핵심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란 물음에 대한 답변이다. 이같은 개념은 요가와 일맥상통한다. 요가가 동(動)적이지 않고 정(靜)적이듯 불교미술도 정적인 상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인도 철학의 요체가 그렇듯 불교미술의 핵심도 희생에서 출발한다. 불교미술이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계승되면서 고려시대에 이르러 찬란한 꽃을 피운 것은 의미가 깊다. /이형복기자 bok@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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