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순국 70주년 학술세미나 최홍규 경기사학회장 주제발표

민족주의 사상가이자 역사학자, 독립운동가…“丹齋 애국혼 다시 살려야”

“단재 신채호(1880~1936)는 최초로 우리나라 근대 민족주의 사학을 창건했고, 한국사를 왜곡한 일제 초기 식민주의 사관과 대결한 인물입니다”

70년대말부터 단행본 ‘단재 신채호’(1979)와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상’(1983) 그리고 다수의 논문을 선보였던 최홍규 경기사학회장(전 경기대 사학과 교수) <사진> 이 단재 순국 70주년을 맞아 열리는 2차례 학술세미나에 주제 발표자로 참여한다.

단재문화예술제전 추진위원회 주최로 17일 단재의 고향 청주에서 열리는 ‘단재 신채호 연구의 재조명’ 주제 학술발표회와 21일 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 주최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학술 행사의 발표문을 요약 정리했다.

◇신채호 사학의 근대성과 민중사관 문제

구한말에서 20세기 전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이론과 실천 활동을 통해 근·현대사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민족주의 사상가이자 역사학자, 독립운동가, 문학가로서 여순감옥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치열한 삶을 살았다.

구한말 애국계몽운동기에 ‘독사신론’, 국외망명 독립운동기에는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등을 집필, 우리나라 근대 민족주의 사상을 이끌었다.

특히 한국사를 왜곡하는 일제 초기 식민주의 사관을 비판·극복함으로써 우리나라 근대사학을 개척한 인물이다. 단재는 한국고대사를 주체적인 입장에서 새롭게 체계화시켜 민족자주독립을 실현코자 했고 민족주의자로 항일독립운동을 추진, 민중 주체의 근대 민족국 수립을 도모했다.

일제침략이 본격화되던 1900년 초 대한매일신보 논객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적 위장사상에 응전하기 위해 민족주의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이후 독립협회와 신민회 운동에 참여했고, 논설 ‘20세기 신국민’을 통해 시민적 민족주의에 입각한 입헌공화제를 제시했다.

초기에는 민족사적 입장에서 을지문덕과 최영, 이순신 등 위인들을 통해 국권회복과 민족중흥을 추구했으며 단군 고조선이 차지하는 민족사적 시원과 발해사와 신라사 등을 동등한 입장에서 조명한 ‘남북국시대사’를 주장했다.

여기다 ‘삼국사기’와 ‘동국통감’, ‘동국사략’ 등 유고사관 내지 존화사관을 통렬히 비판했으며 일본 근대사가들의 ‘임나일본부설’과 ‘신라정벌설’ 등의 조작적 허구성에 대해 최초로 실증적 비판을 가했다.

◇신채호의 민족운동노선과 민족주의 사학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항일 민족해방운동전선에 직접 뛰어든 인물이다. 당시 국내외 정세와 일제 식민지 정책의 변화, 민족해방운동 내부의 갈등 등에 따라 민족주의 사상과 실천적 전술론의 일대 전환이 필요했다.

군국주의 일제를 타도하기 위해 비타협적 자주독립노선과 무장투쟁방법만이 가장 유효한 목적이자 수단으로 인식했다.

특히 1920년 초부터 항일 독립운동을 민족해방을 위한 혁명적 단계로 설정하고 게릴라적 폭력을 전제로 한 민중직접혁명론을 강력 주장했다.

민중이 사회와 역사의 주인공이며 각성된 민중이 주체가 돼 항일 독립운동을 수행·전개할 때 민족해방 목표를 달성하고 자주·자유·평등의 독립국가(근대적 민족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절대독립과 완전독립 노선을 시종일관 주장, 1927년 진보적인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협동으로 발족한 신간회의 독립노선을 정립시키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신간회가 조선 민족의 정치적·경제적 해방의 실현, 모든 개량주의운동을 배격하며 민족의 현실적 공동이익을 위해 투쟁할 것 등을 결의한 점이 이를 뒷받침해준다./이형복기자 bok@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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