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수원교구 신년음악회 오는 13일 정자동주교좌성당서… 합창·교향악·솔로 무대 등 레퍼토리 '풍성'

새해맞이를 성가(聖歌)의 영성함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된다.오는 13일 천주교 정자동주교좌성당서 오후 7시30분 열리는 ‘2017 수원교구 신년음악회’가 그것. 수원교구 복음화국이 주최·수원교구 성음악위원회가 주관한 이번 음악회는 어린이·청소년의 맑은 음색이 도드라지는 합창 및 독창·독주 등 솔로무대까지 다채로운 레퍼토리가 뷰 포인트. 무대의 막은 전형부씨(안젤로)의 지휘아래 비제(Bizet) 아를르의 여인 제2모음곡 중 간주곡, 체코슬로바키아의 향토를 음에 녹인 작곡가, 드보르작 교향곡 8번을 교구청소년교향악단의 풋풋한 연주로 걷어올린다. 이어 이정옥씨(에밀리아나)가 지휘봉을 이어받아 알무스그레고리오합창단과 무대에 올라 ·아무것도 너를을 강지미씨(젬마)의 반주선율에 녹여 전달한다. 또 교구어린이합창단(지휘 오선주(루치아))이 ·를, 아르스노바합창단(지휘 이철수(베네딕도))이 작은 기쁨 되게 하소서·주의 사랑 전하리를, 교구청년합창단(지휘 김재희(티모테아))이 ·주님은 나의 목자를, 너울남성합창단(지휘 박선미(데레사))이 ·사공의 그리움(홍난파·신동수)를, 교구합창단(지휘 한근희(요셉))이 찬미가 ·를 각각 불러 사랑과 찬미가 가득한 공간을 연출한다. 이어 테너 정동혁씨(미카엘)가 ·왕이신 나의 하느님으로 솔로무대를, 강다영씨(크레센시아)가 독일출신 작곡가 G. Muffat의 곡를 오르간 건반에 실어나른다. 관람료 무료. 문의 천주교 수원교구 성음악위원회 공연기획팀(010-6255-9151) 권소영기자

[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14. 중화주의를 비판한 실학자, 홍대용

조선후기 실학자 중에서는 요즘 말로 흙수저 출신들이 많다. 박제가나 이덕무, 유득공 등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조선사회에서는 결코 주류가 될 수 없는 이른바 서자 출신이다. 물론, 성호 이익이나 다산 정약용처럼 서자가 아니라 해도 정치적으로 비주류인 남인계 출신들이 많다. 반면에 드물지만 담헌 홍대용처럼 금수저 출신의 실학자도 있다. 구도자적 삶을 지향한 선비 홍대용은 조선사회의 중심에서 출발한 인물이다. 그가 속한 남양 홍씨 가문은 누대로 정계에 진출한 노론의 핵심 문벌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출세는 보장받은 혈통인 셈이다. 그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홍대용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과거시험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필자는 홍대용이란 인물을 말할 때 “주류에서 태어났지만, 비주류의 삶을 지향했던 실학자”라고 평가한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삶을 포기하고 비주류의 삶을 지향하기란 너무도 어렵기 때문에서다. ‘지구가 자전한다’는 그의 유명한 명제는 어쩌면 남다른 삶의 지향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노론의 명망가 출신이다보니 스승을 정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던 홍대용은 어린 나이에 현재 경기도 남양주에 소재했던 석실서원이란 곳에 들어갔다. 석실서원은 안동김씨 세거지에 있었던 서원으로 북벌론의 이념적 표상이었던 김상헌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었다.홍대용이 석실서원에서 수학한 기간은 12세부터 35세까지 23년간이다. 이 기간 동안 엄격한 학풍을 내면화하면서 철저한 도학자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아울러 이 무렵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를 형성했던 인물들과 교유하였고, 부친이 나주목사를 하던 시기에는 나주의 실학자인 나경적과 함께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처럼 청년시절에 이룩한 구도자적 삶과 과학적 탐구정신은 연행을 통하여 빛을 발하게 되었다. 홍대용은 원리 원칙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형적인 선비 타입의 인물이다. 세속적인 선비가 아닌 진실한 선비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다. 그가 동시대를 살았던 선비들과 다른 점이라면, ‘명나라’여야만 된다는 아집에만 젖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병자호란 뒤 조선사회는 북벌과 함께 청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올랐다. 전통적인 화이관에 젖은 조선 유학자들은 청을 중화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 중국 연행을 다녀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들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선 인물이 홍대용이다. 실옹과 허자의 오디세이, 「의산문답」 1765년 겨울, 홍대용은 서른다섯의 나이로 머나먼 중국 땅에 가게 된다. 그에게서 중국 여행은 세계관을 변화시킨 큰 경험이었다. 북경 유리창에서 만난 항주의 선비 엄성과 반정균, 육비와 시공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면서, 그리고 천주당과 관상대를 방문하여 서양의 문물을 접하면서 홍대용은 서서히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인물로 탈바꿈되어갔다. 혹자는 그가 실학자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모든 것이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그의 인식은 분명 근대적이고 실학적인 세계관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 다녀 온 뒤 홍대용은「의산문답」이란 글을 썼다. 홍대용의 과학사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소설 「의산문답」은 실제로 북경 방문길에 들른 의무려산(醫巫麗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의산문답」은 모든 사람이 진리라고 믿는 것을 풍자한 과학소설이라는 점에서 1623년 갈릴레이가 쓴 천동설과 지동설에 대한 오디세이, 즉「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에 비견되는 글이다.「의산문답」은 의무려산을 배경으로 세속적인 허례허식과 공리공담만을 일삼는 허자의 물음에 실학적인 인물인 실옹이 답하는 대화체의 글로, 30년간 성리학을 익힌 허자가 자신의 학문을 자랑하다가 의무려산에서 실옹을 만나 자신이 그동안 배운 학문이 헛된 것이었음을 풍자한 놀라운 작품이다. 그렇다면 홍대용은 왜 의무려산에서 지전설과 우주무한론을 주장했을까? 북경 방문길에 들렸던 소설 속 배경인 의무려산은 화이(華夷)의 구분을 짓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그가 의무려산에서 무한우주관을 제시한 것은 최종적으로 중국과 오랑캐, 즉 화와 이의 구분을 부정하는데 있었다. 북경 방문을 계기로 홍대용은 기존의 우주관에 회의를 품으며, 그를 유명하게 만든 중요한 이론인 지전설과 무한우주관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홍대용의 우주관은 사실 금성, 수성, 화성, 목성, 토성 등의 행성은 태양 둘레를 돌고 태양과 달은 지구의 둘레를 돈다는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Tycho Brahe)의 우주 체계에다가 지전설만을 덧붙인 것이었다.따라서 홍대용의 우주체계는 독창적인 것이 아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도 그는 “지전설은 송나라 학자 장횡거가 그 원리를 조금 밝혀냈으며, 서양 사람도 배에 타고 있으면 배가 나아가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이론으로 추정해냈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추론은 지전설에서 멈추지 않고 우주가 무한하다는 것으로 자신의 우주관을 완성해 냈다. 중심주의를 해체한 조선의 지성 1636년 병자호란 이후 한 세기 이상이 지났지만, 조선사회는 여전히 중화주의적 명분론에 사로잡혀 있었다. 청나라는 여전히 야만국이었고 명나라의 제도를 보존하고 있는 조선은 사라진 중화의 적통이었다. 홍대용의 북경 여행은 조선 유자들이 사로잡혀 있는 명분론이 비현실적인 것임을 깨우쳐 주는 계기가 되었다. 30년간 성리학 공부만 하던 허자가 세상에 나와 야심차게 내뱉은 말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던 것이고 허자는 곧 홍대용 자신이었다. 홍대용의 “지구는 우주의 한 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의 우주관은 실로 대담하기 이를 데 없는 인식론적 대전환을 제기했다는 측면과 함께 과학적으로 상당한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지만, 폄하되는 면도 없지 않다. 과학자로서의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그가 동양의 지성으로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하고 새로운 문명지도를 그린 선각자였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정성희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세계문화 유산을 가다] 경기천년 속 꽃핀 수원화성 새로운 미래천년 빛난다

1796년 완공돼 2016년 축조 220주년을 맞은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이에 수원시는 2016년을 ‘수원화성 방문의 해’로 삼고 적극적인 수원화성 발전방안 마련과 관광객 유치에 나섰다. 2017년에도 이어진다.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지 20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연이어 맞이하는 ‘겹경사’이다.그러나 수원화성이 처음부터 이렇게 ‘꽃길’만을 걸어온 것은 아니다. 220년 동안 숱한 고초와 위기를 겪어 왔고, 전쟁의 포화 속에 무너졌다. 여기에 군사정권의 국방유산 복원 사업의 일원으로 복원이 진행되면서 정조대왕의 효심 등 수원화성이 가진 ‘핵심가치’는 뒷전으로 밀려나기도 했다.이처럼 갖은 고초를 겪은 수원화성은 이제 새로운 날갯짓을 하고 있다. 특히나 더 큰 의미는 ‘천년 경기’를 이어주는 하나의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조선시대 기술의 정수가 집약됐고, 정조대왕의 효심과 애민정신이 함께한다. 요즘 말로 치면 ‘문ㆍ이과 통합’을 실현한 것이 바로 수원화성이다. 이러한 수원화성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걸어보고 경기천년을 열어갈 새로운 가치를 찾아본다.■ 도망가서 동문, 부서져서 북문… 홍수ㆍ전쟁에 수난 겪은 수원화성 1796년 수원화성이 축조된 이후 두 번의 변곡점이 찾아온다. 첫 번째는 홍수다. 1800년대 찾아온 홍수로 인해 시설물들이 상당수 날아갔지만, 헌종 때 이를 복원했다. 이어 1920년대 일제강점기 시기, 큰 홍수가 짝수해마다 찾아오면서 결국 화홍문, 매향교, 남수문이 파괴됐다.수원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요구에 1930년대 일제에 의해 화홍문은 복원됐으나, 남수문은 끝끝내 복원되지 않았다. 이 남수문은 100여 년이 지난 2012년에 와서야 복원됐다. 두 번째는 다름 아닌 한국전쟁이다. 포격으로 인해 성곽과 축조물들 상당수가 무너져 버렸다. 전쟁 이후 수원화성과 관련, “북문은 부서지고, 동문은 도망가고, 서문은 서 있고, 남문은 남아있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그만큼 장안문과 창룡문의 피해가 가장 컸다. 누각이 완전히 파괴됐고, 성문의 몸이라 볼 수 있는 ‘육축’(문루를 떠받치는 기반시설) 일부가 부서졌다. 팔달문과 화서문은 다행히 큰 피해를 보지는 않았으나, 성곽 전역에서 멀쩡한 누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1970년대 복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수원화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20여 채의 누각이 사라진 상태였다. 지금은 팔달산 정상에 우뚝 솟은 서장대를 비롯한 포루와 동북공심돈, 서남각루 등의 누각이다. ■ 다시 일어선 수원화성…세계문화유산 등재로 날개를 달다 수원화성이 복원되기 시작한 것은 4공화국 시기다. 박정희 대통령 정권의 후반기 ‘호국문화유적 복원사업’을 통해서다.당시 4년 동안 복원 사업을 진행하면서 장안문~팔달문(1975년), 화홍문~창룡문(1976년), 장안문~화홍문(1977년), 창룡문~동남각루(1978년) 구간이 차례로 복원됐다. ‘수원성복원정화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수원화성 복원 사업의 흔적은 현재 장안공원에 있는 수원성복원정화 기념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그러나 당시의 복원은 정조대왕의 효심 등 역사를 복원한다는 차원에서 보다는 국방유적을 복원함으로써 국민 단결을 도모한다는 차원에서 이뤄진 반쪽짜리 복원에 그쳤다는 점에 아쉬움을 남겼다. 이러한 아쉬움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해결될 기미를 보인다. 세계기구인 유네스코 차원에서 관리를 받기 시작하면서 2005~2007년 진행된 장안문 여장 잇기 등을 통해 현재 수원화성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이 성곽의 복원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 사업을 통해 시민들이 장안문의 옹성과 문루, 북성적대 사이의 구간을 관람하고 통행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지난 2012년에 복원된 남수문은 그 정점을 찍었다. 일제강점기인 1922년 홍수로 붕괴된 이후 흔적조차 볼 수 없었던 남수문이 90년 만에 제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이로써 화홍문과 함께 수원천을 가르는 2개의 수문이 완성됐다. ■ 정조의 ‘애민정신’ 바탕으로…미래로 나가는 수원화성 수원화성은 이제 미래를 준비한다. 완공 220년을 맞아 진행된 ‘수원화성 방문의 해’를 비롯해 수원화성에 자부심을 느끼는 시민들의 의지 속에 예전의 영광된 모습을 찾고 있다.정조대왕이 수원화성을 축조하면서 함께 조성한 4대 저수지 중 축만제(서호)가 세계관계시설유산으로 등재된 것도 자긍심을 더하고 있다. 장안동에 조성되고 있는 한옥마을, 옛 신풍초등학교 부지에서 진행되는 화성행궁의 완벽한 복원을 위한 발굴 등으로 향후 수원화성은 더욱 큰 역사적ㆍ문화적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이 바로 정조의 ‘애민정신’과 ‘효심’이다. 민초들을 사랑하는 정조의 마음이 없었다면 수원화성은 존재하지 못했다. 수많은 인고의 세월과 고통을 이겨낸 수원화성과 정조를 닮은 수원시민들의 마음은 새로운 경기도의 천년을 열어가는 초석이 될 것이다.이관주기자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장“전통문화 기초한 콘텐츠 차별화 대한민국 대표적 관광지 만들 것”지난 1997년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수원화성은 외ㆍ내형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그 변화상을 직접 지켜보며 수원화성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고 있는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장을 만났다. 한 관장은 “수원화성의 미래는 결국 콘텐츠”라며 “차별화되고 고급화된 전통문화에 기초한 새로운 수원화성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원화성이 세계문화유산 선정 20년을 맞는다. 그 의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화성은 복원과 관리 등에서 질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수원화성을 관리하는 화성사업소로 조직이 개편되고 전문인력이 대거 충원됐다. 분야별 전담부서가 생겼고, 상시 모니터링이 이뤄지고 있다. 중장기적인 보존방안이 마련돼 체계적인 관리가 이뤄지는 점도 세계유산 지정 이후에 가능해졌다. 박물관에서도 이와 관련, 가을에 특별기획전을 준비할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서 수원화성은 어떻나. 중국의 평요고성(한나라 시기의 고대도시) 등 다른 국가의 세계문화유산을 보면 단순히 유적지 하나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 주민들의 집, 생활방식, 문화 등이 전통방식으로 보존돼 있다. 단순히 성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삶의 모습, 골목을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수원화성은 성곽만 남아있다. 토박이는 나가고 독거노인이나 외국인, 외지인들만 유입돼 동네에 대한 자부심도 떨어진다. 영ㆍ정조시대를 조선후기 문예부흥기, 문화의 정수라 부른다. 이를 향유하고 참여하게끔 해야 한다. -우리가 생각해볼만 한 구체적인 콘텐츠는 없나. 예를 들어 수원화성 안에 섹터를 분리해 한 구역 정도를 기와나 초가집으로 꾸민다. 이곳에는 석공, 주물, 유기, 대목장 등 전통 무형문화재를 보유한 분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이곳에서 생산한 물건은 공방거리를 통해 판매한다. 전통과 현대가 결부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수원화성이 축조 220년을 넘겼다. 앞으로의 200년, 2천년을 바라본다면. 이제는 단순히 세계유산이라는 타이틀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차별화, 고급화, 전통문화에 기초한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과 호흡하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풍토도 조성돼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대한민국’하면 대표적인 관광지로 ‘수원화성’이 떠오를 수 있게끔 해야 한다. 결국 답은 콘텐츠다. 이관주기자

사도세자 친누나 ‘화협옹주’ 이장 전 무덤 발견

영조의 딸이자 사도세자의 친누나인 화협옹주(和協翁主, 1733∼1752)의 이장 전 무덤이 남양주 삼패동에서 확인됐다. 문화재청은 남양주시와 고려문화재연구원이 남양주 삼패동 산43-19번지에서 화협옹주의 무덤 유적과 영조가 지은 글을 새긴 지석(誌石) 등을 찾았다고 28일 밝혔다. 화협옹주는 영조와 후궁 영빈 이씨의 딸로 영의정 신만의 아들인 영성위 신광수와 혼인했다. 그러나 후사 없이 19세에 홍역으로 사망했다. 이번에 발굴된 무덤은 화협옹주와 남편 신광수를 합장했던 묘로, 유골은 없는 상태다. 이들의 무덤은 현대에 남양주 진건면으로 이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11월부터 최근까지 진행한 1~2차 발굴조사에서 백자 명기(망자의 내세 생활을 위해 함께 묻는 작은 기물) 3개가 담긴 석함, 화협옹주의 묘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지석, 화장품으로 추정되는 물질이 남아 있는 청화백자합 10점 등이 나왔다. 이 중 지석 ‘어제화협옹주묘지’(御製和協翁主墓誌)는 394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옹주에 대한 영조의 슬픔이 드러난다. 관계자는 “사대부가와 결혼한 왕녀에 대한 장례와 생활 문화 등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로 추가 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류설아기자

[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13. 정약용의 국가개혁론, ‘경세유표’

죽은 후에 임금에게 바쳐질 글, 경세유표 정약용은 1801년 천주교 박해에 연류되어 강진으로 유배된다. 이 곳에서 그는 유교 경전에 대한 연구와 주석에 마음을 두고 저술에 집중하였다. 1816년경 경전에 대한 연구를 일단락지은 정약용은 후일 ‘1표 2서’라 알려진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심서의 저술을 시작했다. 이 중 경세유표(經世遺表)는 옛 성군들이 실천했던 왕정의 회복하는데 목표를 둔 국가 개혁론이다. 하지만 이 책은 자기가 죽은 후에나 임금에게 바쳐지게 될 글이란 뜻으로 ‘유표’라고 명명했다. 유배생활과 학문의 심화 “나는 나이 20살 때에 우주 사이의 일을 모두 취해다가 일제히 펴보고 일제히 정돈하고 싶었는데, 30세가 되고 40세가 되어도 그러한 뜻은 변하지는 않았다.” 유배지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말이다. 이처럼 정약용은 젊은 시절부터 개혁적 경세론을 많이 저술했다.여유당전서에 수록된 대책(對策)?문(問)?의(議)?원(原)?론(論)?변(辨) 등의 여러 논문들이 거기 해당한다. 당시 개혁론을 관통하는 정약용의 인식은 현 지배 체제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하여 근본적인 변화를 지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통치권 성립의 근거를 묻고, 백성의 뜻에 어긋나는 통치 권력을 혁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검토했다. 또한 토지의 공유(共有)와 공산적 생산관계를 탐색한다든가, 더 나아가 국가 행정력을 동원하여 여러 산업 기술의 발전을 도모하는 등의 개혁론들을 구상하고 있었다. 젊은 날의 이상은 유배시기 오랜 경학 공부를 통해 다듬어지고 학문적으로 심화하였다. 경전 연구를 통한 새로운 깨달음의 과정에서 소위 ‘조종의 법제’란 것이 결코 제대로 마련된 법제일 수 없음을 회의했다. 조선후기 발생하는 폐단들은 모두가 경전의 뜻을 밝히지 못한 데에서 말미암았고, 종국에는 조선은 현재 “터럭 한 끝에 이르기까지 병들지 않은 것이 없으니, 지금에 와서 법제를 개혁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나라가 망하고야 말 것이다.”라는 위기 의식을 토로하게 된다. 새로운 조선 국가 개혁의 주장 이러한 인식하에 정약용은 새로운 ‘왕정’을 이룩하기 위해서 근본적 변법(變法)이야말로 필수 과제였다. 경세유표는 정약용이 새로운 경전 공부를 통해 깨쳐낸 성인(聖人)들의 본 뜻을 현실에 적용하여 왕정(王政)을 회복하고자 하는 국가개혁론의 종합이다. 총 15권으로 구성한 경세유표의 내용상 특징은, 첫째 국가 체제 전체를 객관적 기준에 따라 새롭게 정립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정전제(井田制)의 실현 방안 서술에 가장 비중을 두었다. 둘째, 정전제의 바탕 위에서 전국의 모든 상업 분야를 개발 진흥하고 그 모두에게 세금을 거둔다. 동시에 모든 백성들을 9개의 직(職)으로 배치하여 세금을 바치도록 하는 부공제(賦貢制)를 운용한다. 그래서 정전제의 공전에서 거두는 1/9조(租)와 여기 부공이 국가의 양대 재원(財源)을 이룬다. 다산의 정전제론에서는 ‘농사짓는 자만이 토지를 얻고 농사짓지 않는 자는 토지를 얻지 못한다.’라는 정전제의 실현을 통해 주곡 생산의 농업 제도를 확립한다. 그 기초 위에다 부공제를 운용하여 국가의 산업 제분야를 확대 개발함으로써 백성들의 생업의 영위할 기틀을 확보한다. 그리고 양자의 분립으로 정립되는 9직에다 만백성을 분업적으로 배치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각자의 직사를 전업적(專業的)으로 수행하도록 제도화한다. 결국 전국의 만백성은 자기 직사에 전업적으로 종사함에 따라 자기 분야의 기술을 더욱 개발하는 한편, 모두가 타 직사 종사자들과 분업적 협업관계로 연계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도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필수적 구조적 연계를 갖게 되기 마련이다. ▲ 정약용 영정 바로 여기서 경세유표를 중심으로 하는 정약용의 경세론은 여타 실학자들의 주장과 비교해 질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그는 무엇보다도 정전제의 기초 위에다 전 국가의 경제?산업 제분야를 새로이 개발 진흥하는 방책을 제시했다. 백성을 9직으로 나누어 각자의 직무를 전담하도록 편성 배치함으로써 백성들이 상생하는 협업관계로 연계되도록 한 것이다. 셋째, 법제에 의한 제도적 통치론을 들 수 있다. 즉 중앙의 벌열로부터 지방 향리들에 의해 자행되는 중간 농단의 행태가 여기서는 용납될 근거 자체를 잃는다. 가령 전정(田政) 한 가지를 예로 들더라도, 정전제에서 사전(私田)을 경작하는 농부는 8명이 조력하여 공전(公田)을 경작할 뿐이요. 자기 소출은 자기가 다 차지한다. 국가는 단지 공전의 소출만을 거두어 갈 뿐, 그 외에는 어떠한 침탈도 없다. 이에 따라 중간 농단은 근거를 잃고 이제 왕권으로 권력이 귀일하는 결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전근대 국가체제 최후의 원형 제시 경세유표는 우리나라 전근대 역사에서 국가 체제의 구성과 운용에 관한 제도적 원형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무릇 국가라는 공동체를 운용하면서 백성들 각자가 실질을 살려 성취할 수 있는 다양한 길들을 모색하고 제시했다. 그 과정에서 이상적인 면에서부터 현실적인 면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사례들을 탐구하고 종합했다. 이를 통해 전근대 국가 체제 최후의 원형을 집대성해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최후의 원형은 이미 새 시대를 지향하는 새로운 기준들을 다수 포함하면서 새로운 국가론(國家論)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글_조준호 실학박물관 학예기획부장

종교계 성탄절 맞아 이웃에 나눔 행사

종교계가 성탄절을 맞아 소외된 이웃과 함께 기념 미사·예배를 올리고 나눔 행사를 잇달아 펼친다. 20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에 따르면 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은 오는 23일 오후 2시 서울 강동구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성지보호작업장에서 장애인들을 위해 성탄 미사를 집전한다. 오는 21일 오후 2시 서울 마포구 맑음터에서는 교구 총대리 손희송 주교가 주례하는 성탄 미사가 열린다. 또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는 난치병 어린이들에게 성탄 선물을 전달하는 ‘2016 산타가 되어주세요’ 행사를 진행한다.성탄절을 맞아 전국 21개 병원 소아병동 환아 1천600여 명과 2004년 이후 치료를 받은 어린이 200여 명에게 선물을 전달할 예정이다. 더불어 한국 개신교계가 매년 열고 있는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성탄절 연합 예배’는 오는 25일 오후 3시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다. ‘어둠은 가고 빛이 오니’를 주제로KTX 여승무원들과 함께 성탄 예배를 진행할 계획이다. 김경호 들꽃향린교회 목사가 설교를 맡을 예정으로 세월호 희생자 가족과 시민, 신학생 등으로 구성된 ‘4·16 합창단’의 특별공연도 마련돼 있다. 아울러 대한예수교장로회 사회봉사부는 오는 24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영등포 햇살보금자리와 쪽방촌 일대에서 ‘쪽방촌 주민 및 노숙인과 함께 드리는 성탄 예배’를 올리면서 소외된 이웃에게 무료 급식을 제공하고 방한용품을 증정한다. 권소영기자

[단독] 엉터리 수원화성 벽화…고증과 달라 역사 왜곡

수원화성 축조 220주년을 맞은 ‘2016 수원화성 방문의 해’에 역사적 사실과 다른 ‘엉터리’ 수원화성 벽화가 그려져 물의를 빚고 있다.수원화성 축조물들의 기본적인 위치조차 맞지 않는데다 깃발이나 의상 등도 고증과는 전혀 다르게 그려진 것이다. 특히 벽화가 하루 1만여 명이 이용하는 지하철역 인근에 있어 시급한 정비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19일 수원시 등에 따르면 팔달구는 지난달 초 총 7천900여만 원을 들여 ‘화산지하차도 정비사업’(화서역 인근)을 진행했다.특히 이 사업의 일환으로 팔달구는 화산지하차도 내 보도 한쪽 벽면에 수원화성을 담은 벽화를 조성하기로 하고 벽화전문업체 A사에 의뢰, 20m가량 길이의 벽화 작업을 진행했다. 어두컴컴한 지하보도의 분위기를 바꾸고 수원화성을 알리자는 취지에서 벽화는 산뜻한 만화 풍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해당 벽화 작업이 제대로 된 감수 없이 진행돼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것으로 확인됐다. 우선 기본적인 수원화성 축조물들의 순서가 달랐다. 현재 벽화는 화서역에서 환승주차장 방향으로 봤을 때 장안문~서장대ㆍ서노대~봉돈~팔달문~동북포루 등 순으로 그려져 있다.하지만 벽화의 세 번째에 있는 봉돈은 실제 팔달문과 창룡문 사이에 위치해 있다. 즉 장안문~서장대ㆍ서노대~팔달문~봉돈~동북포루 순으로 그려졌어야 정확한 위치라는 것이다. 고증에 대한 오류도 눈에 띈다. 수원화성 성곽에 그려진 깃발이 모두 빨간색과 노란색이어서, 중앙과 동서남북 방향에 따른 ‘오방색’이 전혀 표현되지 않았다. 중앙을 의미하는 노란색의 경우 서장대에만 이용돼야 하고 장안문에는 북쪽을 나타내는 검정색 깃발이 그려져야 한다. 이와 함께 장안문으로 들어가는 정조대왕이 입은 갑옷 또한 비늘 등이 표현되지 않아 마치 누더기처럼 보일 정도였다. 김수현 수원시 문화예술과 학예사는 “벽화의 일부 내용들이 사실과 다른 점이 곳곳에서 보인다”며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아쉬운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팔달구청 관계자는 “벽화를 그릴 당시 수원화성의 순서대로 그려줄 것을 요청했으나 중간에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며 “깃발 등을 비롯해 수정이 필요한 부분들은 조속히 보완하겠다”고 말했다. 이관주기자

하남시에서 출토된 국가귀속문화재 556점 하남역사박물관으로 위탁돼

하남역사박물관은 국가귀속 절차가 진행중이었던 천왕사지(하남 하사창동) 출토 용문 와당을 비롯한 556점의 유물이 하남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18일 밝혔다. 이번에 위탁된 유물들은 천왕(天王) 명기와, 용무늬기와, 청동대접 등으로 하남 천왕사지 유적을 비롯한 전체 10개 유적에서 출토된 국가귀속문화재 556점이다. 하남 천왕사지는 고려시대 사찰 유적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보물 제332호인 철조석가여래좌상이 출토된 곳이다. 고려사, 세종실록에 따르면 천왕사는 고려ㆍ조선의 왕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전한다. 출토된 천왕 명기와는 문헌으로 전해오던 천왕사가 실재함을 입증할 수 있는 중요 자료다. 이전에는 단순히 사찰 관련 유적으로만 파악돼 왔다. 용무늬 기와는 사래기와(추녀 끝에 잇대어 댄 기와)에 해당, 악귀나 질병의 침입 없이 생활하고자 한 당대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있는 유물이다. 박물관 관계자는 “이번에 성사된 국가귀속문화재의 위탁을 시작으로 출토된 문화유산에 대한 위탁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라며 “박물관으로 위탁된 국가귀속문화재는 상설 및 특별전시, 교육프로그램 등의 컨텐츠로서 다양하게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박물관은 지난 2015년 매장 문화재를 보관ㆍ관리 ㆍ운영할 수 있는 ‘국가귀속문화재 위탁기관’으로 지정됐다. 손의연기자

[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12. 발해를 우리 역사로 서술한 실학자, 유득공

북학파 실학자로 널리 알려진 초정 박제가는 자신의 벗인 유득공을 가리켜 “시를 잘 지으며 역사를 잘 아는 인물”이라 평했다.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은 조선후기 북학파 계열의 실학자로 정조가 발탁한 네 명의 규장각 초대 검서관 중의 한 사람이다. 서자 출신이었던 유득공은 불과 그의 나이 다섯 살 때 부친마저 여위어 경제적으로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외가가 있는 경기도 남양 백곡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도 이런 이유였다. 28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유득공의 어머니 홍씨부인은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고관들이 많이 사는 서울 경행방(지금의 종로구 경운동)으로 이사하여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자식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유득공은 시인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25세 때 기자(箕子)로부터 후백제에 이르는 시기의 우리나라 한시를 모은 「동시맹東詩萌」을 엮으면서 역사를 바탕으로 한 이른바 서사 시인으로 두각을 내었다. 1773년에는 박지원, 이덕무와 함께 개성과 평양을 유람하고 이어서 백제의 도읍지인 공주를 다녀오면서 역사지리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위만조선부터 고려까지 도읍지를 기행하며 읊은 유명한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이때의 기행이 토대가 된 것이다. 유득공은 1774년 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소과시험에 합격하여 생원은 되었지만 대과시험인 문과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그가 벼슬길에 나간 것은 1779년 32세가 되던 해였다.마침내 이덕무·박제가·서이수와 함께 규장각 초대 검서관에 등용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역사지리라는 학문에만 전념하여 가난이라는 시련을 맞아야 했던 유득공은 검서관이 되어서야 어느 정도 생계를 해결 할 수 있었다. 규장각 일 외에도 35세에는 강화도 외규장각에 머물면서 서적들을 조사하는 업무를 맡기도 하였다. 15년에 이르는 검서관 생활 외에도 37세 때인 1784년에 포천현감을 시작으로 지방관 생활을 하였는데, 「발해고」는 이 무렵에 저술된 것이다. 규장각에서의 연구 활동이 「발해고」를 서술하는데 밑거름이 된 것이다.이듬해에는 양근(지금의 양평)군수로 옮겼다가 42세 때인 1789년에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와 광흥창 주무로 있었고, 다시 이듬해 5월에는 사도시 주부로 자리를 옮겼다. 지방관으로서 유득공은 “나랏일을 하는데 나라법이 양반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는 생각을 토대로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공평하게 일처리를 하였다.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즉위하자, 유득공은 1801년( 순조 원년)에 풍천부사에서 물러난 뒤 칩거하며 저술에만 몰두했다. 60세를 일기로 1807년 9월 1일에 세상을 떠나 성해응이 은거하던 포천 향산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양주(楊州) 송산(지금의 의정부시 송산동)에 묻혔다. 유득공은 무려 세 차례나 중국 땅을 밟았다. 북경을 두 번, 심양을 한 번 여행했다.물론 공적으로 다녀 온 것이었고, 중국 견문을 바탕으로 「난양록?陽錄」과 「연대재유록燕臺再游錄」을 저술했다. 유득공이 처음 중국을 방문한 것은 1778년(정조 2)으로 이미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과 「이십일도회고시」를 통해 그의 명성이 중국에 널리 알려진 뒤였다. 유득공에 앞서 홍대용이 중국을 한 차례 다녀왔고, 그의 숙부인 유금도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이서구의 시를 엮은 「한객건연집」을 중국 문인들에게 소개한 뒤였으므로, 중국은 그에게 낯선 나라가 아니었다. 유득공의 첫 여행지는 심양이었다. 1778년 심양 여행은 유득공의 생애에 큰 전환기를 가져왔다. 한백겸의 「동국지리지」를 통해 상상만 했던 한반도 북부와 만주일대의 고구려·발해 옛땅을 직접 가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훗날 그가 「발해고」를 쓰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심양을 다녀 온 이듬해 유득공은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되었다.이후 10년 뒤인 1790년(정조 14) 8월에 박제가와 함께 갈망하던 중국 북경을 가게 되었다. 건륭제의 80세 생일축하사절단의 일원으로 뽑혀서 북경을 가게 되었는데 마침 건륭제가 열하에 있었던 관계로 열하까지 가게 되었다. 이때의 여정을 글로 남긴 것이 「난양록」이다. 1801년 유득공은 주자서 선본을 구하라는 왕명을 받아 2차 연경 연행길에 올랐다. 「연대재유록」은 1801년 중국 연행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사실 유득공은 역사가라기 보다는 시인에 가까웠다. 유득공은 훌륭한 시를 짓기 위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문학 작품들을 섭렵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고, 그런 가운데 점차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유득공은 중국을 비롯하여 만주, 몽고, 이슬람, 베트남, 미얀마, 대만, 유구 등 다른 나라들로 관심 영역을 넓혀갔고, 이는 세계관의 확장을 가져와 종래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한백겸의 「동국지리지」의 영향을 받아 한강 이남의 역사에 주목했던 유득공은 점차 한강 이북의 북방사로 관심을 돌렸다. 그가 북방 역사에 주목하게 된 것은 더 이상 만주지역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현실 비판에서 출발한 것이었다.「발해고」서문에서 유득공은 우리 역사의 무대였던 만주를 잃어버린 것을 통탄하였다. 유득공은 발해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야 되는 이유를 확고하게 주장하였다. 발해 영토가 거란과 여진에게 넘어가 버리고 고려 또한 발해사를 서술하지 않아 이 땅을 되찾으려 하여도 근거가 없게 된 것이 그 이유였다. 18세기에 들어와 북방 영토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인물이 비단 유득공뿐만이 아니지만,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발해사를 우리 역사 속에 넣을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발해사를 체계화시키고자 했다. 유득공은 발해의 옛 땅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발해고」를 저술했고, 북방 역사의 연원을 밝혀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한사군 역사에 관한 「사군지四郡志」를 저술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다산 정약용의 「아방강역고」와 한치윤의 「해동역사」가 나올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글_실학박물관 정성희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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