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옥수 목사, 왕실초청으로 남아프리카의 스와질란드서 설교

기쁜소식선교회 박옥수 목사(기쁜소식 강남교회 시무)가 왕실초청으로 남아프리카의 스와질란드(Kingdom of Swaziland)를 방문, ‘국왕 기도회(King‘s Prayer Service)에서 설교했다. 22일(현지시간), 스와질란드의 수도 음바바네에 위치한 왕궁 컨벤션센터에서 개최된 ‘국왕기도회’에 참석한 박옥수 목사는 스와질란드 국왕 음스와티 3세(Mswati Ⅲ)를 비롯한 왕족과 국무총리 등 국내ㆍ외 귀빈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경말씀을 전했다. 사도행전 13장을 통해 설교한 박옥수 목사는 “하나님과 마음을 합할 때 우리에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며 로마서 3장의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것”을 강조했다. 박 목사의 설교에 앞서 함께 초청된 그라시아스합창단이 ‘시야봉가 예수(Siyabonga Jesu)’등 스와질란드 찬송을 불러 참석자들의 큰 환호를 받았다. 스와질란드의 ‘국왕 기도회’는 1년에 두 차례 가지는 왕실의 공식 행사로 국영방송인 ’Swazi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는 등 국가 연례행사로 개최되고 있다. 이날 행사도 전국에 생중계됐다. 한편, 스와질란드 정부는 박옥수 목사의 청소년 활동에 공감하면서 ‘국가 청소년 발전 위원회(National Committee for Youth Development)’를 조직, 청소년 사업을 적극 후원하고 있다. 송시연기자

경기도 부흥을 꿈꾸며… 새천년 여는 열쇠 찾는다

‘경기도’가 한국 역사에 등장한지 천년이 되는 해인 2018년을 앞두고 경기학회(회장 강진갑)와 경기일보(회장 신선철)가 ‘2016 경기천년 학술대회’를 공동 주최한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개최하는 학술대회로 경기도 천년 역사의 주요 거점을 방문하는 ‘문명 탐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경기천년, 미래를 여는 열쇠’를 주제로 한 2016 경기천년 학술대회는 21일 경기대학교 수원캠퍼스 복지관과 호연관 등에서 펼쳐진다. 교수, 연구원, 기업인, 활동가 등 150여 명이 참여해 기조 강연을 비롯한 6개 주제에 27편의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기조발제는 ‘문명의 전환과 경기 새천년’(강진갑 경기학회장), ‘경기 천년의 역사적 성격’(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 ‘경기 새천년의 비전’(임해규 경기연구원장) 등이다. 주제 발표는 다채롭다. 신광철 한신대학교 교수가 좌장을 맡은 ‘새천년 미래 도시의 대안, 인문도시’에서는 문정호 국토연구원 연구위원의 ‘공간계획에의 인문학적 접근: 포용적 국토와 도시’, 김진형 한양대 박사후연구원의 ‘수도권 세 인문도시의 정책 비교를 통한 여주 인문도시의 창의적 추진 방향’, 조미아 경기대학교 교수의 ‘수원 인문도시 사업에 관한 연구’, 김연권 경기대 교수의 ‘안양 인문도시의 취지와 전망’이 각각 발표된다. 이와 함께 △분단 극복과 평화 △경기천년, 역사적 전통과 문명의 전환 △경기도민의 삶의 질과 행복 문제 △경기 새천년, 지식정보와 기술사회 △ 인공지능시대와 삶: 인공지능 시대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의 파고에 대한 응전 등을 주제로 한 발표가 이어진다. 각 주제 발표 및 토론에는 양훈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심승구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황금회 경기연구원 연구위원, 김상헌 상명대학교 교수, 김성하 경기연구원 연구위원 등이 좌장으로 이끈다. 주최 측은 또 학술토론회에 이어 11월 중 ‘경기 천년 문명 탐사’를 진행할 계획이다. 전문가를 따라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 및 전곡선사박물관을 비롯해 문명 전환이 이뤄진 거점을 직접 가보는 프로그램이다. 강진갑 회장은 “경기천년의 역사와 전통, 현실 등을 토론하면서 우리의 위기를 돌파하고 새천년을 여는 ‘열쇠’를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학술대회 개최 목적을 밝혔다. [2016 경기천년 학술대회 일정표] 다운받기 류설아기자

[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3. 잠곡 김육과 대동법

김육(金堉, 1580~1658)은 생애는 파란만장했다. 그는 10대와 50대에 조선왕조가 겪은 두 차례의 전란을 모두 경험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바로 그것이다. 격동의 시기에 황폐해진 국가의 재건을 꿈꾸었던 조선 최고의 경세관료, 바로 오늘날 평가받는 김육의 위상이다. 사림 명가의 후예 김육의 본관은 청풍이며 이 집안이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된 때는 김식(金湜, 1482~1520)에 이르러서였다. 김식은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중종년간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사림의 영수로 활동하였다. 도학정치의 구현을 위해 개혁을 추진하던 김식은 1519년(중종 14) 훈구파의 공격으로 일어난 기묘사화로 화를 입었다. 정치적 참화이후 주춤했던 가문의 활동은 사림의 정국 주도가 본격화되던 선조(宣祖)년간부터 재개되었다. 김식의 손자인 김권(金權, 1549~1622)이 과거에 급제해 호조참판을 역임했고 김식의 현손인 김육은 인조~효종년간의 대표적인 경세관료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늦었던 출사, 개혁으로 마무리한 삶 김육은 26세 때 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의 재임(齋任)으로 있었으나, 곧이은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뒤로 한 채 경기도 가평 잠곡의 청덕동(淸德洞)으로 은거하였다. 그는 은거 생활 10년동안 직접 농사를 지었으나, 잠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바로 경세관료로서 그의 면모가 성숙되는 시기였다. 김육은 인조반정이후 음사(蔭仕)로 음성현감에 임명되었으나, 그 해에 곧바로 문과에 급제했고 57세 때에는 동지성절천추진하사로 중국에 파견되었다. 그후 충청도 관찰사, 예조판서 등을 거쳤다. 효종 원년 김육은 그가 평생토록 추진해 왔던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을 조건으로 70세에 우의정에 나아갔다. 72세 때에 영의정에 제수되었고, 곧 좌의정으로 충청도의 대동법 시행을 주관했다. 79세에 서필원(徐必遠)을 전라감사로 추천하여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시행하게 하고, 바로 그 해에 서울 회현방에서 별세하였다.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을 실현 김육이 남긴 최고의 업적은 대동법이다. 이 법은 백성들이 바치는 조세 중 가장 무거운 부담이던 공납제에 대한 개혁으로, 당시 각 군현에서 부담하는 공물은 수백가지 토산물 납부에 대한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단일품목인 쌀로 징수하는 제도였다. 당초 신법에 담긴 주장은 대단히 이상적이어서,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조차 실현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았다. 하지만, 이 법이 시범 실시되고 점차 백성들의 생활과 국가 재정을 획기적으로 개선시키자, 이후 다른 지역으로 점차 확대되었다. 대동법의 의의는 매우 크다. 기존 인두세(人頭稅) 성격의 공물이 지주층에 부과되면서 토지세로 바뀌었다. 때문에 입법과정에서 지주층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왔다. 또한 당초 권력이 개입되어 왔던 세금 수취와 운영의 비효율성을 청산하며 백성들에게서 국가 재정으로 들어오는 세금의 누수를 차단했다. 그리고 대동법의 실시는 현물을 거두는 대신 그것을 상품으로 구입함으로써 조선후기 상업발전의 커다란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김육은 대동법 뿐 아니라 새로운 역법인 시헌력(時憲曆)의 도입과 실시에 앞장섰고, 수레·수차 및 동전의 유통과 활자의 제작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 충청도에 대동법 시행을 기념하는 비(경기도 평택시) 김육과 조선의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효종은 북벌에 뜻을 두고 이를 위한 명분확보 차원에서 복수설치(復讎雪恥)의 의리를 앞세우는 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 등의 재야의 명망있는 학자들을 불러들였다. 아울러 북벌을 위한 군사력의 강화는 원두표(元斗杓)·이완(李浣) 같은 무장세력에게 맡겼다. 그리고 북벌을 위한 준비를 총괄하며 민생 문제를 비롯한 국정 전반을 주도할 인물이 필요했다. 여기서 이름난 사림 집안 출신이면서 일찍부터 경세관료로 널리 알려졌던 김육을 발탁하여 국정을 맡겼던 것이다. 자연히 김육 주위에는 민생 문제의 해결을 중시하며 당파적 명분보다는 현실을 우선하는 실무 관료들이 모여들었다. 김육 역시 이들의 실무 능력에 의지해 국정을 수행하였다. 허적(許積)·서필원(徐必遠)·이시백(李時白)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김육을 위시한 이들 실무 관료들은 다른 하나의 큰 정치집단인 김집·송시열계의 산림집단과 국정운영의 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대동법 실시를 둘러 싼 논쟁과 대립은 이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여기서 김육을 위시한 한수(漢水)이북 즉 재경관료(在京官僚)세력이란 의미의 ‘한당(漢黨)’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김육은 바로 이 한당의 중심인물이었던 것이다. 후대의 평가 대동법은 전란으로 황폐화한 조선 재건을 위한 가장 큰 개혁이었다. 17세기 국가 재건을 위한 일련의 시도는 대동법 성립으로 표현되는 자발적인 국정 개혁을 나타났다. 사림세력의 명분과 현실문제 해결을 위한 감각이 결합되어 나타난 결과였다. 이러한 현실적인 국정운영의 중심에 김육은 위치했고 그의 정론을 따르는 전문관료집단이 그의 개혁을 뒷받침했다. 김육을 정점으로 한당 세력은 전란이후 피폐해진 민생과 국가의 재건을 위한 장기적인 비전과 신념을 공유했다. 대표적으로 대동법을 추진했고 제반 개혁을 주도해 나갔다. 이러한 측면에서 전란이후 조선왕조의 집권 체제는 큰 흔들림 없이 나아갈 수 있는 한 요인을 찾을 수 있다. 조준호 실학박물관 학예기획부장

[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2. 수기와 치인을 실천한 경세가, 조익

조선시대 ‘조익’이란 이름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동법을 시행한 주역들 명단에서 우리는 조익이란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조익은 학자관료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론과 실천을 결합한 유자(儒者)관료이다. 우리는 조선시대 인물 가운데 이런 인물에 좀더 주목해야한다. 조익(趙翼, 1579~1655)은 학자였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드러났다. 15세에 이정구에게 나아가 배우면서 칭찬 받았다. 17세엔 문장가였던 외종조인 윤근수(尹根壽)에게 배웠는데, 윤근수는 조익의 재주를 인정하고 크게 기대했다.20세 즈음에 조익이 문장 학업을 중단할 때 매우 애석해했다. 조익은 사서(논어·맹자·대학·중용)를 읽고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래서 문장 학업을 중단하고 성리학에 몰두했다. 조익은 24세(1602, 선조 35)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이른 출사다. 관직에 나아가서도 조익은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탁마록(琢磨錄)이라는 소책자가 있었는데, 날마다 읽고 외운 글과 행한 일들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날짜별로 일과를 정해서 기록해 둔 공서일록(攻書日錄)도 있었다. 나이를 먹고 관직에 있으면서도 마치 학동이 계획표대로 공부하는 모습이었다. 35세 때(1613, 광해군 5) 대북파의 전횡이 계축옥사로 나타났다. 조익은 벼슬의 뜻을 버렸다. 선영(先塋)이 있는 광주(廣州)로 갔다. 나중엔 처가가 있는 충청도 신창으로 옮겨 도고산(道高山) 아래 우거했다. 본디 조익은 서울 창선방(昌善坊) 자택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종로구 창신동 부근이다. 서울을 떠날 때 서소문 밖에 있는 집에 살고 있었는데, 집을 팔아버렸다. 다시는 올라오지 않을 각오였다. 조익은 구차하게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광해군 초기에 권세가인 이이첨이 그의 환심을 사려고 이조 전랑 자리를 제의하려고 해도 응하지 않았다. 서울을 떠난 이후 10년간 조정에서 불러도 모두 거절했다. 도원수 한준겸이 그를 종사관으로 삼고자 여러 차례 불렀으나 사양했다. 그의 뜻을 안 한준겸은 결국 포기했다. “혼탁한 이 시대에 깨끗한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 하는데, 내가 어찌 강요할 수 있겠는가.” 조익은 진퇴와 출처(出處)가 분명한 선비였다. 조익은 사대부였다. 즉 학자이자 관료였다. 그의 공부는 공부를 위한 공부가 아니었다. 관료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의 답을 구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공부였다. 그는 은거 기간에 본격적으로 학업에 몰두했다. 공부한 것이 쌓여 44세 무렵에는 대학곤득(大學困得), 중용곤득(中庸困得), 논어천설(論語淺說), 맹자천설(孟子淺說) 등의 글이 모두 하나의 책으로 완성되었다. 대북파의 전횡은 역모를 초래했다. 인조반정(1623)이었다. 역모에 주역으로 참석한 장유(1587~1638)·최명길(1586~1647)·이시백(1581~1660) 등은 조익의 오랜 친구들이었다. 조익에게도 모의를 알리려 했으나, 이시백이 “초연히 세상 밖에서 노니는 사람에게 위험한 일로 폐를 끼칠 수는 없다”며 말렸다고 한다. 인조반정으로 조익은 다시 관직에 나아갔다. 이조좌랑으로 돌아온 조익은 곧 재생선혜청(裁省宣惠廳) 도청(都廳)을 겸하게 되었다. 새 정권은 민심을 얻고자 폐정 개혁을 단행하고자 했다. 대동법을 확대 시행하기로 했다. 경기도 대동법 시행을 주도했던 이원익이 주도하게 되었다. 그가 조익을 실무자로 발탁했다. 조익은 밤낮으로 강구하여 절목을 만들어 시행했다. 그러나 반대논의가 만만치 않았다. 조익은 상소로써 안민과 국부를 위한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법도를 제정한 것은 백성에게 항산(恒産)이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말한 왕도정치(王道政治)라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일 따름이니, 이른바 10분의 1의 세금을 걷는다는 것도 모두 곡물을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재(理財)에 법도가 없어서 전세(田稅)는 가볍고 공물(貢物)은 무거운데도 곡물은 조금 징수하고 잡물(雜物)을 부과하니, 그 때문에 온갖 병폐가 발생하여 …”(?포저 연보?, 한국고전번역원 DB, 이상현 역)조익이 대동법 시행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은 자신의 공부와 부합한 것이었다. 조익은 대학곤득에서 처재(處財)와 용인(用人)을 나라를 다스리는 핵심으로 보았다. 처재, 즉 경제운용의 중요한 것이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공평하게 하는 것이었다.대동법 시행이 바로 그런 것이다. 조익이 과거제에서 강경(講經)하는 방식을 외는 배강(背講)에서 임강(臨講)으로 바꾸어 오로지 문의(文義)를 위주로 하게 하자고 제안한 것도 경술(經術)을 제대로 닦은 인재를 얻기 위한 고민이었다. 병자호란(1636)이 일어났을 때, 조익은 강화도로 이동 중 갑자기 남한산성으로 행선지를 바꾼 인조를 호종하지 못했다. 사라진 아버지를 찾느라 헤맸던 것이다. 이로 인해 이듬해 파직된 조익은 다시 충청도 신창에 머물면서 10여년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70세(1648)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77세에 세상을 떴다(1655). 조익의 자(字)는 비경(飛卿)이며, 자호(自號)는 존재(存齋)이다. 포저(浦渚)라고 하는 호는 학자들이 일컬은 것이다. 그의 문집이 포저집(浦渚集)이다. 그의 시호는 문효(文孝)다. 68세 때 인조에게 대학곤득을 바치면서, 서경의 전(典)과 모(謨), 시경의 아(雅)와 송(頌)을 제외하고는 사서(四書)만한 것이 없으며, 사서야말로 성인을 배우는 자들의 필수과목이라고 했다. 사서 가운데에서도 대학을 우선이라 했다. 그런데 졸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가 지은 서경천설(書經淺說)·용학곤득(庸學困得) 등의 책 가운데에서는 주자장구(朱子章句)를 제법 고쳤는데, 사람들이 이 때문에 흠잡는다.” 주희의 해석을 벗어나는 것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으려 한 당시의 학문세태가 문제인가, 성리학 공부를 깊이 하면서 해석을 갈고 다듬은 조익이 문제인가.조익은 나아가 배운 성리학대로 실천하고자 힘썼다. 수신(修身)을 강조했지만, 이에 머물지 않고 치인(治人)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려는 대동법 시행이나 제대로 된 인재를 뽑으려는 과거제 개혁안 등은 그 노력의 일례다. 그러한 노력은 앞선 정도전부터 뒤에 오는 정약용까지 실천적 경세가의 궤를 잇는 것이다. 김태희 다산연구소 연구실장

사찰음식 배우고 맛보고… 건강 밥상 ‘한자리’

“사찰음식이 이렇게 맛있고 다양한지 몰랐습니다.” ‘2016 제8차 봉녕사 사찰음식 대향연’을 찾은 박지은씨(42ㆍ여)의 말이다. 지난 7~8일 수원 봉녕사에서 열린 대향연에는 5천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 대향연은 봉녕사가 사찰음식에 깃든 정신과 이로움을 대중에 소개하기 위해 ‘자연의 맛 나눔의 마음’이란 슬로건으로 2009년부터 개최하고 있는 축제다. 올해는 사찰음식의 대가라고 불리는 선재스님을 비롯해 지견스님, 혜성스님, 원상스님이 함께 참여해 더욱 풍성한 축제로 만들었다. 선재스님과 지견스님은 체험부스에서 사찰음식을 만들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진행, 행사장을 찾은 많은 사람들이 직접 사찰음식을 만들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원상스님과 지견스님은 각각 ‘슬로푸드와 사찰음식’ ‘자비의 에너지 사찰음식’이라는 강연을 통해 사찰음식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뜻을 전달했다. 가족과 함께 봉녕사를 찾은 이창연씨(48)는 “건강상의 이유로 사찰음식에 관심이 많았는데, 사찰음식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며 “당장 오늘부터 사찰음식을 만들어 봐야겠다”고 웃어보였다. 심인 적연 금강율학승가대학원장은 “최근 사찰음식은 현대인의 건강을 보호하는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며 “사찰음식을 통해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삶을 누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송시연ㆍ손의연기자

제3회 수원화성향토문화연구소 학술대회 열려

제3회 수원화성향토문화연구소 학술대회 열려 수원문화원 부설 수원화성향토문화연구소가 오는 30일 제3회 ‘수원화성의 축성, 방문, 기록의 의미와 가치’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수원문화재단 홍보관 영상실에서 열리는 이번 학술대회는 ‘2016 수원화성 방문의 해’를 맞아 수원화성의 축성배경과 축성의 과정, 수원화성만이 갖는 고유한 특징과 의미를 되짚어보는 자리다. 또한 1920~30년대 일제강점기 서울지역 주부들의 수원화성 단체관광에 대한 언론사의 기록들은 물론, 수원화성과 관련한 시문과 사진 및 그림과 같은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수원화성에 대한 문학적 구현들을 살펴본다. 일정은 오후 4시~6시30분까지 진행되며, 이달호 수원화성연구소장이 ‘화성건설’을 주제로 첫 발표를 시작한다. 이어서 박철하 전 수원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의 ‘일제강점기 주부들의 방문기록’, 정수자 시인의 ‘수원화성의 문학적 기록과 그 의의’에 대한 발제가 1시간여에 걸쳐 차례로 이어질 예정이다. 그 다음으로는 염상균 수원화성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장을 좌장으로 하여 최형국 수원시립공연단 상임연출, 김준기 시인, 이춘전 수원공고 국어교사 등 세 명의 토론자가 참여해 앞의 3가지 발제 내용을 중심으로 한 종합토론과 질의응답 시간을 갖는다. 문의 (031)244-2161 권오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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