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의 조속한 안정을 위해 기독교인이 모여 기도로서 힘을 모았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지난 15일 한국기독교연합회관 3층 대강당서 ‘2016 제27회 한국교회 기도의 날’을 마련, 300여 명의 교단 대표와 목회자들이 참석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와 한국 기독교를 위해 기도하자는 취지로 마련된 이날 예배는 이태근 목사(공동회장)의 사회로 진행됐다. 엄신형 목사(증경대표회장)가 대표기도, 박홍자 장로(공동회장)가 성경봉독 후 이어 대표회장 이영훈 목사가 ‘하나님의 절대주권(롬8:28)’을 제목으로 설교했다. 이영훈 대표회장 목사는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나아가면 한국교회는 반드시 하나 된다”며 “우리가 ‘하나님 제일주의’의 삶을 살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면 한국교회와 이 나라를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국민 앞에 군림하거나 통치하지 않고, 국민을 위해 헌신하고 낮아지는 단체가 돼야 한다”며 “그러면 모든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뤄 주실 것”이라고 강조했다. 더불어 특별기도 시간에는 김용도 목사(명예회장)가 ‘한국교회의 연합과 부흥을 위하여’를, 이태희 목사(명예회장)가 ‘국가 안정과 경제회복을 위하여’를, 이재창 목사(공동회장)가 ‘국가 미래와 다음 세대를 위하여’를, 엄정묵 목사(공동회장)가 ‘북한 복음화와 통일을 위하여’를, 김원남 목사(공동회장)가 ‘세계 복음화와 선교사를 위하여’를, 정학채 목사(공동회장)가 ‘사회 현안의 조속한 해결을 위하여’를, 이병순 목사(공동회장)가 ‘이단사이비의 대책과 근절을 위하여’를, 강기원 목사(공동회장)가 ‘동성애, 역사교과서, 이슬람 확산 저지를 위하여’를, 함동근 목사(공동회장)가 ‘회원 교단(단체)과 신임 교단(단체)장을 위하여’를 주제로 각각 기도를 올렸다. 예배는 길자연 목사(증경대표회장)의 축도로 마쳤다. 이어 2부 행사는 이강평 목사(명예회장)의 사회로 증경대표회장인 국민대통합위원장 최성규 목사와 이용규 목사 및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축전 등을 전하는 축사·격려사 순으로 막을 내렸다. 한편, 이날 경찰 자녀들을 위한 장학금 5천만 원을 전달하는 기념식도 열렸다. 권소영기자
1970년대 초 도난당한 뒤 40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불화, 송광사 오불도가 14일 모습을 드러냈다. 대한불교조계종은 14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지난 8일 미국 포틀랜드박물관에서 환수한 송광사 오불도를 공개하고, 본래 소장처인 전남 순천 송광사로 불화를 옮겼다. 가로 117㎝, 세로 157㎝ 크기인 송광사 오불도는 ‘관약왕약상이보살경’(觀藥王藥上二菩薩經)을 바탕으로 그린 그림인 ‘오십삼불도’ 중 하나다. 전남 순천 송광사 불조전에 있는 오십삼불도는 조선시대 후기 화승인 의겸이 1725년 제작했으며, 칠불도 1폭, 구불도 2폭, 십사불도 2폭, 오불도 2폭 등 7폭으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오불도 2폭은 1969∼1970년 진행된 불조전 보수공사 과정에서 다른 전각으로 옮겨졌다가 1970년대 초반에 사라졌다. 미국인 로버트 마티엘리씨(86)는 인사동 골동품점에서 송광사 오불도 한 폭을 구입한 뒤 1985년 미국으로 돌아갈 때 가져갔고, 2014년 포틀랜드박물관에 불화를 기탁했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포틀랜드박물관에 있는 한국 문화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송광사 오불도가 도난 문화재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조계종과 함께 마티엘리 씨를 설득해 환수하는 데 성공했다. 송광사는 오는 29일 오전 11시 대웅전에서 봉안식을 개최하고, 내년 1월 30일부터 2월 25일까지 불화를 전시할 예정이다. 송광사 주지 진화 스님은 “내년 상반기에 새로운 성보박물관이 개관하면 마티엘리 씨 부부와 포틀랜드박물관 관계자를 초청해 다시 한 번 감사의 뜻을 표할 것”이라며 “포틀랜드박물관과 업무협약을 맺어 두 기관의 문화재를 교차 전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 진화 스님은 “또 다른 오불도 한 폭과 1975년 도난당한 16국사 진영도 돌아오길바란다”고 덧붙였다. 조계종 총무원장인 자승 스님은 “송광사 오불도 환수를 계기로 도난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커질 것”이라며 “문화재가 도난당하지 않도록 방재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도 각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권소영기자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이영훈 목사가 오는 25일 성탄을 맞아 14일 메시지를 밝혔다. 이 목사는 이날 서면을 통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라고 성경의 가르침을 되뇌었다. 또한 “어려운 시국을 살아가는 요즈음, 예수님의 나심을 앞둔 목자와 같이 기쁘고 복된 소식을 만방에 전하자”며 “예수의 오심은 비움이고, 낮아짐이며, 죄악으로 가득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희생이었습니다. 멸시받고 천대받는 자들의 친구였으며, 병든 자들을 치료하는 위로자였음을 상기하자”고 밝혔다. 이어 이 목사는 “거룩한 성탄을 맞아 낮은 곳으로 임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대한민국과 북한 동포들과 나아가 온 세계 위에 충만하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물과 피를 쏟으신 대속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으며 진노에서 벗어나 은혜 안에 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큰 사랑을 경험한 우리는 이제 우리의 자리에서 작은 사랑을 실천하며, 예수님의 나심을 전한 목자와 같이 기쁘고 복된 소식을 만방에 전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최순실 사태로 인한 탄핵 정국의 여파로 연말 불우이웃 돕기 손길이 예년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나라가 어려울수록 소외된 이웃을 향한 사랑 실천에 더욱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고 강조했다. 덧붙여 이 목사는 “섬김과 나눔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섬김과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나눔은 예수님의 삶이었고, 우리가 순종해야 할 길입니다. 성탄의 참된 의미를 마음 깊이 되새기며 소외되고 병든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며, 품고 보듬어서 상처를 싸매주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고 사명품은 연말연시 사랑을 주문했다. 권소영기자
외로운 세자의 보호를 자처하다
경기소리전수관에서 8일 열린 경기도무형문화재의 위상과 발전적 지원정책 모색을 위한 학술 심포지엄에서 김승국 수원문화재단 대표와 이선호 본보 문화부장 등 패널들이 의견을 나누고 있다. 경기 혼(魂)과 맥(脈)의 정수, 경기도무형문화재의 위상을 제고하고 발전을 위한 정책적 지원을 위해 학계와 무형문화계의 제언을 나누는 자리가 마련됐다. 과천시 문원동에 소재한 경기소리전수관서 8일 오후 2시께 열린 ‘경기도무형문화재의 위상과 발전적 지원 정책 모색’ 학술 심포지엄이 그 현장. (사)경기무형문화재총연합회가 주최하고 한국전통공연예술학회가 주관, 본보가 후원한 이날 심포지엄은 이선호 본보 문화부장의 ‘경기도무형문화재 지원정책과 한계’를 주제로 한 기조발제로 문을 열었다. 김승국 수원문화재단 대표가 좌장을 맡아 기조발제자로 마이크를 넘겨받은 이선호 문화부장은 “소멸해가는 전통문화의 힘을 키우고자 정부는 지난 1962년 제정이래 개정을 거쳐 문화재보호법을 마련했다. 이후 경기도무형문화재도 법망 아래 보호·보존되는 시스템아래 경기의 얼과 혼을 지켜왔다”며 경기도무형문화재 전반을 갈음했다. 곧이어 이 부장은 “정부 및 경기도가 보존·관리에만 초점이 맞춰진 채 ‘전승’이라는 핵심은 쏙 빠진 상태서 △자립적 생계 미지원 △무형문화재 공연행사 비용 지급 가이드라인 부재 △무형문화재 이수자에 대한 지원사업 미흡 등 보존·관리적 관점에서 기·예만 관리하지 경제적 여건은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전체적인 무형문화재 제도의 허점이다”라고 꼬집었다. 이에 대한 개선으로 이 부장은 △경제적 안정을 위한 맞춤 일자리 제공 △전수공간 및 시설 개선안 마련 △고령 전승자에 대한 의료복지 확대 △전승 지원금 제도 점검 등을 통한 전승자의 니즈(needs)를 충족시키는 현실적 솔루션을 제안했다. 이에대해 패널들은 한결같이 “전승자들이 단순히 기·예만 전승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문화를 지킨다는 활동·운동가로서 단합된 힘으로 무형문화재의 현실적인 전승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점검하고 축제적인 공동체 문화 및 사회·학교교육 시스템서 무형문화재의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도록 총체적·생산적·생태성의 선상에서 무형유산의 의미를 찾고, 무형문화재 보호지구(가명) 등 살아 숨쉬는 유산으로서 삶과 역사와 더불어 문화유산이 함께 어우러지는 정책을 만들어야한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김헌선 경기대 교수와 양종승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각각 ‘경기도무형문화재 제도의 정책과 육성방안’에 대한 갈음과 더불어 개선안을, 김헌선 경기대 교수 및 전지영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김성태 경기학연구센터 수석연구원 등이 각각 경기도무형문화재의 향후 방향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 전통과 불교문화 확산을 위한 맞춤사업을 펴는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이 해외문화홍보원과 8일 오전 11시 템플스테이통합정보센터서 업무협약을 맺었다. 협약의 주요 내용으로는 양 기관 간 해외 주재 한국문화원의 현지 네트워크를 활용한 ▲한국불교문화콘텐츠·템플스테이·사찰음식 홍보 및 전시·체험행사 공동개최 해외 주요인사 초청 상호협력 등이다. 한국불교문화사업단장 성효 스님은 “이번 업무협약을 통해 템플스테이, 사찰음식을 비롯한 전통불교문화상품과 불교문화관광콘텐츠를 활용한 해외홍보사업을 연계할 계획이며, 이를 통하여 외국인들에게 올바른 한국전통ㆍ불교문화를 알리고 한국에 대한 관심과 방문 증가를 기대한다”며 “한국불교문화사업단에서는 2017년 러시아, 독일, 미국 뉴욕, 중국 상해에 이어 2018년 스페인, 이탈리아 등에서 다양한 전통·불교문화 홍보행사를 진행하겠다”고 협약에 따른 기대효과를 설명했다. 앞서 한국불교문화사업단 측은 지난 10월, 프랑스 한국문화원과 공동으로 ‘템플스테이·사찰음식 프랑스 홍보’를 주제로한 행사 개막식과 파리현지 여행사 설명회를 함께 개최한 바 있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책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고전을 읽으면 옛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고 거기서 지혜를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우리 역사에서 18-19세기는 책읽기가 유행처럼 일어났던 시기였다. 특히 19세기는 독서의 시대였다. 이 시대가 독서의 시대가 된 것은 그만큼 많은 서적이 출간되고 읽혀졌기 때문이다. 19세기는 청나라로부터 서양 지식을 소개하는 책들이 무수히 수입된 시기였고, 고증학의 영향으로 고전을 해석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왔던 때였다. 이 시기를 살았던 지식인들은 독서클럽을 만들어 습득한 지식을 교류하면서 고전 읽기와 새로운 지식 사조를 넘나들었다. 고전과 신지식이 함께 숨을 쉬던 시기가 바로 19세기였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못하여 현실의 벽 앞에서 많은 지식인들이 좌절하고 절망하던 시기이기도 했다.19세기 지식인, 홍석주조선 순조대에 재상까지 지낸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1774~1842)는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홍석주는 역대 한국의 10대 문장가들의 글을 소개해 놓은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門鈔」에 글이 실릴 정도로 문장력과 학식이 탁월했다. 그의 어머니는 영수합서씨(1753-1823)로 조선시대 여성으로는 드물게 철학과 역사에 통달한 여성 지식인이었다. 「문헌통고(文獻通考)」를 비롯한 제자백가의 글을 통채로 암기할 정도로 기억력과 독서력이 비상한 여성이었다고 전한다. 서씨는 홍석주 외에도 길주, 현주 등 3형제를 훌륭하게 키워낸 어머니로도 유명하다.글을 좋아하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홍석주는 어려서 부터 독서광으로 소문이 날 정도로 책읽기를 좋아했다. 여섯 살 때 밤이 되도록 방에 없어서 가족들이 찾아보니, 뒷 뜰 달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는 일화가 전해져올 정도다. 「임하필기(林下筆記)」를 쓴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은 그 글에서 ‘연천은 매일 아침마다 어느 책이든 막론하고 4, 5행을 기준으로 삼아 반드시 다섯 번씩 읽곤 하였다“고 증언하였다.부모의 영향도 있겠지만 실제로 홍석주 집안은 19세기를 대표하는 경화세족으로 다양한 서적을 수집하고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누구보다 빠르게 섭취한 가문이었다. 책을 좋아한 만큼, 집안에는 국내외 서적으로 가득했다.삼국지를 읽고 관우를 꾸짖다어려서부터 홍석주는 병약했다. 단순히 몸만 약한 것이 아니라 의원마저 치료를 포기할 정도로 중병에 걸린 적이 있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주변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머니인 영수합서씨는 아주 태연했다고 한다. 서씨가 태연한 이유는 일찍이 태몽에서 ‘좌의정 홍공의 관’이라고 적혀있는 관 뚜껑을 봤기 때문이었다. 영수합서씨의 예언처럼 그는 죽지 않았고, 실제 좌의정 자리까지 올랐다.병약한 홍석주였지만, 기개는 남달랐다. 12세가 되던 때인 어느 날 그는
왕실의 외척 가문, 청풍 김씨 김석주(1634~1684)의 본관은 청풍으로 자는 사백(斯百)이고 호는 식암(息庵)이다. 김석주가 속한 청풍 김씨는 중종대 정암 조광조와 함께 사림 세력의 핵심에서 활동하던 김식(金湜)의 후손들이다. 청풍 김씨의 본격적인 정치적 진출은 인조대 김육(1580~1658) 때에 이르러서이다. 특히 김육은 효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는데, 이는 1651년 김육의 둘째아들인 김우명(金佑明)의 딸이 왕세자(후일의 현종)의 빈으로 간택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로써 청풍 김씨는 왕실의 외척 가문이 되었다. 김석주는 세자빈(후일의 명성왕후)의 사촌 오빠이다. 김석주는 1662년(현종 3) 3월 과거에 급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문신 인사를 주관하는 이조(吏曹)의 관직에는 쉽게 임명되지 못하였다. 이조의 6품직 좌랑에 진출한 시기는 1670년(현종 11)으로, 이조 관직에 나오는데 약 8년 정도가 소요되었다. 비슷한 시기 김수항(1629~1689)이 1651년(효종 2) 과거 급제 후 약 3년 정도가 지난 1654년(효종 5)에 이조 좌랑에 제수된 것을 보면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김석주의 이조 관직 진출이 늦어진 것은 외척이라는 이유와 함께 당시 정치를 주도하던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세력과의 대립이 주요한 이유였다. 송시열과의 대립은 가정사에서도 확인되는데, 김석주의 조부인 김육 사후에 장례를 치르면서 수도(隧道)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송시열 등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수도란 묘를 조성하면서 관이 있는 곳까지 굴을 뚫고는 문을 달아서 출입하게 하는 길을 말하는데, 신하의 무덤에 만들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송시열 등은 이를 참람된다며 비판하였다. 이런 갈등이 내재된 상태에서 1674년(현종 15) 이른바 제2차 예송(갑인예송이라고 함)이 발생하였다. 2차 예송은 효종비 인선왕후의 국상 때 앞서 1차 예송과 마찬가지로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의 상복을 두고 일어난 논쟁이다. 그런데 이때의 논쟁은 앞선 제1차 예송논쟁 때 문제로 파급되었는데, 이 문제를 제기한 대표적인 인물이 김석주이었다. 예송의 결과 남인 정권이 들어서게 되는데, 이 과정은 김석주의 주도에 의한 것이었다. 환국정치의 포문을 열다 현종 말년 남인 허적이 영의정에 임명되면서 서서히 남인들이 조정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숙종 초반 남인 정권은 한계가 있었다. 남인이 정권을 차지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사실상 김석주의 주도에 의한 것이기에 권력의 핵심에는 김석주가 위치하였다. 김석주는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의 사촌 오빠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더욱 입지가 공고해졌다. 이를 반영하듯이 김석주는 숙종이 즉위한 직후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되는 한편 중앙 군영의 하나인 수어청의 장관인 수어사를 비롯해 군사 행정을 책임지는 병조판서와 역시 중앙 군영인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제조직을 겸하였다.숙종의 경우는 권력 운영 과정에서 특히 군권은 모후의 사촌 오빠인 김석주를 중심으로 운영하면서 동시에 장인인 김만기에도 호위대장의 직책을 주어 자신의 신변 호위를 맡겼다. 권력 운영에서 군사력의 문제는 정권 안정의 물리적 기반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군사력 장악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남인 정권은 왠지 불안한 측면이 있었다. 군사력을 두고 각축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남인은 도체찰사부, 약칭으로 체부라는 기관을 통해서 군사적인 약점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남인 측의 의도를 모를 리 없는 김석주의 반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김석주는 자칫 군권의 집중으로 남인의 권력이 비대화되는 것은 원치 않았던 것이다. 사실 김석주의 지지 기반은 서인 세력이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개인적인 사감으로 현종 말년 이들을 정권에서 축출하였던 것이지, 남인 정권의 영구화를 의도했던 것은 아니다. 김석주는 자신의 심복을 시켜 남인 측의 의심스러운 일들에 대한 정보를 차곡차곡 확보하였고, 그 결과로 남인들을 쫓아내고 서인들로 정국을 구성하였다.이것이 1680년(숙종 6) 이른바 경신환국이다. 정권 교체의 직접적인 계기는 천막 문제이지만 이미 충분히 사전 작업이 진행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그 같은 배경에는 김석주가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김석주의 행태에 대해 일부에서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숙종의 입장에서 볼 때 김석주는 악역을 자초하며 국사를 위해 몸을 바친 “국궁진췌(鞠躬盡? , 국사를 위해 몸을 바침)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군역 문제 해결에 주력하다 김석주가 속한 청풍 김씨는 경세론에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었다. 조부인 김육은 치열한 논쟁 속에 조선 사회에서 대동법이 정착되는데 공헌하였다. 부친 김좌명은 현종 연간 전라도 산간 지역에 대동법을 실시할 때 이를 주도하였다. 당시 “이 일을 담당할 만한 자는 김좌명 밖에 없다”는 평가가 있었으며, 김좌명에게 맡기면 아버지 김육의 뜻을 잘 이을 것이라고 하였다. 김석주는 당시에 가장 큰 사회적 문제로 부상한 군역 문제의 해결에 주력하였다. 군역은 인정(人丁)을 단위로 부과하던 역으로, 김석주가 생존하던 시기에 이미 군역의 폐단으로 알려진 백골징포, 황구첨정, 인징 등이 나타나고 있었다. 김석주는 이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호포제(戶布制)를 주장하였다. 가호별 인구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징수하자는 것인데, 이는 군역의 부과 기준을 인정에서 가호(家戶)로 옮겨 징수하자는 것이었다. 호포제의 시행을 놓고 관직자에게 징수하면 “군자와 야인의 구별이 없어지며 명분이 점차 무너질 것이다”라는 비판이 있었다. 김석주는 인정에 대한 신포(身布)로 징수하면 그럴 수 있겠으나 자신의 주장은 가호를 단위로 징수하는 것이므로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였다.오히려 호포제를 시행함으로써 국가의 재정을 튼실하게 하고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라 자부하였다. 조정에서는 김육과 김좌명이 대동법을 주관하였듯이 호포제에 대해서는 김석주에게 관장하게 하자는 주장이 있기도 하였다. 김석주가 주장한 호포제는 당대에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군역 문제 해결 방안으로 제시된 호포론의 선구적인 논의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글_이근호 명지대학교 교수
경기도기독교총연합회(이하 경기총) 제29차 정기총회가 내달 1일 영통영락교회당에서 열린다. 지난해 12월 경기 남부 21개 시·군과 경기 북부 10개 시·군이 연합 경기총으로 통합된 이후 성과를 돌아보는 이날 총회는 31개 시·군 1만5천 교회의 350만 성도를 이끌 회장단을 선출한다. 현재 경기총 대표회장으로는 소강석 목사(용인 새에덴교회)가 사목 중이다.
병자호란의 항복은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청의 정복 사실과 청 황제의 업적을 칭송하는 글을 지어 비를 세우도록 강요했다. 그 비문을 누가 쓸 것인가? 누구든 써야 했다. 퇴짜 끝에 임금이 이경석(李景奭, 1595~1671)에게 간곡하게 당부했고, 그의 글이 채택되었다. 이것이 바로 삼전도비문이다. 이경석은 누군가 짊어질 짐을 진 것이다.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그를 비난했다.박세당이 이경석의 인품을 칭찬하는 신도비에서 송시열의 인격적인 면모를 비난하고 있지만, 정치적으로도 학문적으로나 송시열과 대립적인 입장이었다. 우선 국제관계 인식에서 명나라에 대한 의리명분론보다 현실의 청나라를 인정하는 실질적인 입장을 취했다. 병자호란 당시의 정책 평가에서도 실효가 없는 척화론보다 부득이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실리를 추구한 주화론을 더 현실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경석 신도비를 감히 지어준 배경이라 할 수 있다.박세당은 공리공론보다 경세와 민생에 관심이 있었다. 색경 서문[穡經序]에서 “농사[稼穡]는 그야말로 민생(民生)의 근본이요 천하의 중요한 도(道)다. 성인(聖人)이 그 기술을 폐한 적이 없으며 몸소 직접 배워서 남에게 가르치기까지 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색경을 지은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