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11. 문무를 겸전(兼全)한 정승, 남구만

외로운 세자의 보호를 자처하다
남구만(1629~1711)의 본관은 의령이고, 호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미재(美齋) 등이다. 당색은 서인으로, 후에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면서는 소론으로 활동하였다.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으로,“문인과 사우와 더불어 종유(從遊)하니 당시 명망이 더욱 높아갔다”고 한다. 1656년(효종 7) 문과에 급제한 뒤 병조좌랑과 이조좌랑 및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현종 연간에는 중진으로 승정원의 승지를 비롯해 사간원 대사간 등과 안변부사, 전라감사 등을 거쳐 이조참의와 형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 즉위 이후인 1675년(숙종 1) 이른바 삼복(三福 ; 福昌君, 福善君, 福平君 지칭)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강력한 처벌을 요청하였다. 삼복 사건이란 복창군 등이 궁궐 내에 출입하면서 내시나 궁녀들과 결탁하여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어내어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숙종은 삼촌뻘인 이들을 보호하려는 입장이었는데, 이를 문제제기한 것이다. 남인이 집권하던 1679년(숙종 5) 남인 영수인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과 윤휴(尹鑴) 등이 복창군 등과 연결되어 모반할 마음이 있다고 하여 국법으로 다스릴 것을 요청했다가, 집권 남인들에 의해 거제도와 남해 등지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1684년(숙종 10) 1월 우의정에 제수된 뒤 좌의정을 거쳤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이 일어나면서 강릉으로 유배된 뒤 한 동안 정계에서 물러나 있던 남구만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이 발생하자 영의정으로 복귀하였다. 갑술환국 이후 세자(후일의 경종) 및 생모인 희빈 장씨를 보호하는데 주력하였다. 세자의 외삼촌인 장희재(張希載)를 중심으로 인현왕후를 모해하려는 혐의가 발각되어 주륙되었을 때 죄의 경감을 요청한 바 있다. 

 

이후 세자의 처지가 “지극히 외롭고 위태한” 상황에서 세자의 보호에 주력하였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의 죽음이 희빈 장씨의 무고(巫蠱)로 인한 것으로 밝혀져 사사(賜死)되었는데, 이때 소론계 최석정(崔錫鼎)이 희빈 장씨의 죽음만은 막으려고 하였다. 희빈 장씨를 보호하자는 논의의 원류가 남구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여 언론으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1702년(숙종 28)에 아산으로 유배되었다가 몇 개월 뒤에 방환되었다. 사후에는 경기 용인에 안치되었다. 

훈척의 정치 배제와 탕평의 지향
남구만은 정치에서 훈척의 정치 참여 배제를 주장하였다. 남구만은 경신환국 당시 김석주(金錫冑)가 허견의 역모를 염탐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방법인 기찰을 한 것이라든지 김환(金煥)이 전익대(全翊戴)를 유인하고 협박한 것 등을 비판하였다. 

 

대개 사림들은 외척의 정치 참여를 비판하였다. 공개적이고 공론에 따라 정치를 하기 보다는 궁중 내 인사들과 결탁하여 기찰 정치 등을 행하기 때문이었다. 남구만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세력들은 김석주와 같은 붕당인 서인 세력이면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이 점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될 때 소론의 당색을 갖게 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러면서도 남구만은 남인에 대해서는 상당히 온건한 태도로 대하였다. 남구만은 갑술환국 이후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된 뒤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 남구만은 앞서 기사환국 당시 서인에서 남인으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많은 서인계 인사들이 화를 당한 것은 원통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남인 세력을 일망타진하는 식의 정치 보복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남인 중 죄의 경중을 분별하여 죄가 가벼운 자는 서용하고 간악하고 무거운 죄만을 벌하자고 하였다. 이를 통해 탕탕평평의 경지를 이루고자 하였다. 이후 세자(후일의 경종)와 희빈 장씨의 보호를 자처했던 이유이기도 하였다.  

‘우리 땅’북방 영토에 대한 인식 
남구만은 안변부사와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하면서 북방 영토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남구만은 1673년(현종 14) 12월 자신의 의견을 담은 상소를 제출했다. 상소에서 남구만은 북방 영토가 관리되지 않는 점을 문제 제기하면서 차유령 밖의 두만강 이내 수 백 리 땅이 모두 조선의 소유이므로 이곳에 진보를 설치해 관리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지역에 살았던 여진인이 이미 이곳을 떠났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남구만은 폐지되었던 후주(厚州)와 폐사군(廢四郡)의 복설을 주장하였다. 후주는 본래 우리 땅으로, 언제 폐지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들녘이 광활하고 토지가 비옥”하며, “기온이 자못 따뜻하여” 농사가 적당하므로 이곳에 다시 후주를 설치하면  삼수와 갑산과 서로 의지하면서 함흥의 울타리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폐사군은 조선 초 세종 때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되었던 여연(閭延)․우예(虞芮)․무창(茂昌)․자성(慈城)을 말한다. 이곳은 세종 때 설치된 뒤 단종과 세조 때에 큰 효과가 없다고 하여 폐지되었던 곳이다. 폐사군에 대해 남구만은 “모두 넓은 들인데다가 비옥한 토지”라고 하며 이곳에 군(郡)을 설치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남구만의 주장 중 일부는 정책에 반영되어 후주진을 비롯해 무창과 자성이 설치되기는 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폐지되었다. 
당시 청나라와 긴장 관계를 조성할 사안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남구만도 자신의 주장이 실현되기가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였다. 그럼에도 “기자의 옛 강역과 목조·익조께서 옛날에 살던 곳”이므로 우리 땅으로 삼아야 한다는 인식이 내재된 것이었다. 

글_이근호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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