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8. 사문난적으로 몰린 실천적 지식인 박세당

▲ 박세당묘
병자호란의 항복은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청의 정복 사실과 청 황제의 업적을 칭송하는 글을 지어 비를 세우도록 강요했다. 그 비문을 누가 쓸 것인가? 누구든 써야 했다. 퇴짜 끝에 임금이 이경석(李景奭, 1595~1671)에게 간곡하게 당부했고, 그의 글이 채택되었다. 이것이 바로 삼전도비문이다. 이경석은 누군가 짊어질 짐을 진 것이다.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그를 비난했다. 

이경석이 죽고 그의 후손은 신도비를 박세당(朴世堂, 1629~1703)에게 부탁했다. 나이 74세의 박세당은 그 부탁을 마다하지 않고 맡았다. 이미 당쟁으로 아들들을 잃은 슬픔을 겪은 그였다. 그의 신도비는 예사롭지 않았다. 

 

첫 부분이 노성인(老成人)은 사라져도 전형은 남으며, 치란과 존망이 이에 달렸으니 함부로 노성인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말로 시작했다. 마지막 비명 부분에서는 “올빼미는 봉황과 성질이 달라 / 성내고 꾸짖는다네 / 불선자(不善者)가 미워해도 / 군자가 뭘 상관하랴”는 대목이 있었다. 

 

이경석을 노성인이라 칭했으며, 봉황으로 비유하고, 군자로 규정했다. 노성인을 업신여긴 이, 올빼미로 비유된 자, 착하지 않은 자는 송시열이었다. 이경석에 의해 조정에 추천되기도 했던 송시열은 한두 가지 서운한 일이 생기자 삼전도비문을 쓴 사실을 들어 이경석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박세당은 그점을 지나치지 않았다. 

 

송시열은 이미 죽은 후였지만 그의 문인들은 들고 일어났다. 비문만으로는 명분이 약하다 생각해, 아직 발간도 되지 않은 그의 저서 <사변록>을 공격했다. 주희의 해석을 벗어났다 하여 ‘흉서’로 규정하고 그에게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낙인을 찍었다. 박세당은 노구를 이끌고 유배길에 올랐다. 곧 유배가 풀려 석촌에 돌아왔지만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떴으니, 그의 나이 75세였다. 

 

박세당은 명문가인 반남(潘南) 박씨 집안 출신이다. 호는 잠수(潛叟)·서계(西溪)이며,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그는 주류 노론에 비판적인 소론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나이 32세에 벼슬길에 나아가지만 40세 이후로는 줄곧 물러나 양주(楊州) 수락산 석촌동(石泉洞)에서 학문에 몰두했다. 그는 대학, 중용, 논어, 맹자의 순서로 사서의 주해를 쓰고, 이어 서경·시경에 대해 주해를 내놓았다. 한편, 당시 유학자들이 꺼린 노자, 장자에 대해서도 주해서를 내놓았다. 

 

▲ 백헌이경석신도비
박세당이 이경석의 인품을 칭찬하는 신도비에서 송시열의 인격적인 면모를 비난하고 있지만, 정치적으로도 학문적으로나 송시열과 대립적인 입장이었다. 우선 국제관계 인식에서 명나라에 대한 의리명분론보다 현실의 청나라를 인정하는 실질적인 입장을 취했다. 병자호란 당시의 정책 평가에서도 실효가 없는 척화론보다 부득이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실리를 추구한 주화론을 더 현실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경석 신도비를 감히 지어준 배경이라 할 수 있다. 

 

‘평제탑비발(平濟塔碑跋)’이란 글에서 박세당은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국제관계관을 피력하고 있다. “삼국(고구려·백제·신라)을 위한 계책으로는 안으로 백성과 친하고 밖으로 이웃나라와 우호하며, 중국(中國)을 잘 섬겨 감히 잘못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 삼국 중 고구려가 가장 크고 가장 강했으며 중국과 가장 가까웠는데 가장 먼저 망했다. … 신라가 가장 작고 가장 약했으며 중국과 가장 멀었는데 망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가까이 있으면 형세가 각박하고 강대함을 믿으면 불공(不恭)하기 마련이다. 불공하면 재앙을 부르고 재앙을 부르면 나라가 망한다. 멀리 있으면 형세가 여유롭고 작고 약함을 걱정하면 공손하기 마련이다. 공손하면 스스로 안전을 꾀하고 스스로 안전을 꾀하면 망하지 않는다.”

 

그의 ‘응구언소(應求言疏)’에서 무실(務實)을 중요시하는 그의 태도를 볼 수 있다. “고쳐야 할 폐단이 있는데도 고치지 않고 채택해야 할 말이 있는데도 채택하지 않으니, 자세히 살핀다는 것은 머뭇거림일 뿐이요, 재앙을 그치게 한다는 것은 허문(虛文)일 뿐이다.” 그는 ‘허문(虛文)을 물리치고 실효(實效)를 숭상할 것’을 강조했다.

 

당시 큰 정치적 쟁점이 되었던 예송논쟁에 대해, 박세당은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진실로 복(服)의 길고 짧음이 종통(宗統)이 밝아지냐 아니냐와는 관계가 없다. … 그런즉 오늘날 전례(典禮)를 다퉈 종통이 밝지 못하다는 주장을 고집하는 자는 불인(不仁)이 심한 것이요, 상대를 공격하려고 일부러 빌린 주장이요, 상대를 배제하려고 일부러 빌린 명분이다. 그 마음씀이 험하고 위태롭도다.” 박세당은 ‘예송변(禮訟辨)’을 통해 소모적이고 배타적인 논쟁을 비판한 것이다. 

 

학문적 태도에서 그는 교조적 이론에 갇히지 않았다. 양명학 하는 사람들도 인정했을 뿐 아니라, 노장(老莊)을 깊이 연구하고, 유교 경전에 관해 주희와는 다른 해석도 시도했다. 당시 주류는 절대적으로 주희를 존숭하여 다른 해석을 일체 허용하지 않았으며, 노장과 양명학을 이단시했다. ‘사문난적’이란 말 자체가 당시 사상계의 협량함을 자백한 것이다. ‘사문난적’의 낙인은 차라리 진정한 사상가에게 주는 훈장이었다. 

 

▲ 석천동취승대
박세당은 공리공론보다 경세와 민생에 관심이 있었다. <색경> 서문[穡經序]에서 “농사[稼穡]는 그야말로 민생(民生)의 근본이요 천하의 중요한 도(道)다. 성인(聖人)이 그 기술을 폐한 적이 없으며 몸소 직접 배워서 남에게 가르치기까지 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색경>을 지은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선비가 나아가 조정에서 도를 행하면 군자라 이르고, 물러나 들에서 밭을 갈아 스스로 먹고 사는 이를 야인이라 이른다. … 내가 일찍이 벼슬할 때 나의 도가 행해지기에 부족함을 알고 물러나 스스로 농사지으며 먹고살고자 한 지가 오래다. 그리하여 비각(祕閣)의 도서를 열람하다가 이를 얻으면 기쁘게 내 스승을 얻었다 여겨 즉시 베꼈다. 그후 번잡한 내용을 간추리고 중복된 부분을 제거하여 한 질로 정리함으로써 살펴보기에 편하게 하고 <색경>이라 이름을 붙였다.” 

 

박세당은 연구하고 농사짓는 지식인의 모습을 실천했다. 그는 교조적 이론에 비판적이었고, 공허한 논쟁과 관념적 명분론을 싫어했다. 그렇지만 그의 타협하지 않는 성격으로 인해 ‘사문난적’으로 낙인찍히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는 문(文)이나 명(名)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고, 질(質)과 실(實)을 중요시했다. 그는 실사(實事)에서 옳음을 구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김태희 다산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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