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시대에 축조돼 지금은 ‘서호’라는 이름으로 수원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축만제(祝萬堤)’가 국내 최초로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 선정 ‘세계관개시설물 유산(Heritage Irrigation Structures)’에 등재되는 쾌거를 거뒀다.이번 세계유산 등재는 정조의 ‘애민정신’과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모두 함축된 축만제의 역사적, 사회적 의의가 재조명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이제는 수원을 넘어 대한민국의 자랑이 된 축만제의 가치와 세계유산으로 등재까지의 뒷이야기를 짚어본다.■ 역사적ㆍ문화적 가치가 살아 숨 쉬는 ‘축만제’ 축만제는 1799년(정조 23년) 수원화성을 축조할 당시 함께 만들어졌다. 정조는 화성을 축조하면서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호수를 조성했다. 현재 서호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는 축만제는 화성을 기준으로 서쪽 여기산 아래에 축조됐다.북쪽에는 현재 만석공원으로 조성된 ‘만석거’(일왕저수지), 남쪽에는 사도세자 묘역 근처에 시설한 ‘만년제’가 조성됐다. 동쪽 호수는 수원시 지동에 위치했다고 하지만 현재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상태다. 이렇게 호수를 만든 데에는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정조의 ‘애민정신’이 담겨 있다. 정조는 수원화성 공사를 진행하다가도 흉년이 들자 공사를 멈추고 백성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먼저 해결하도록 했다. 축만제의 설치에도 이 같은 정조의 마음이 담겨 있다.가뭄이 들었을 때 저수지 물을 활용해 농사에 지장이 없도록 구휼 대책을 펼치고, 화성에 거주하는 주민에게는 혜택을 주기 위함이다. 정조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도 축만제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화성 조성을 통해 신도시를 만들려 한 정조는 축만제 일대에 ‘둔전’을 설치하고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이 식량은 백성들뿐 아니라 화성을 지키는 군사들의 식량으로, 또 성을 지키는 재원으로 활용했다. 요즘 말로 하면 ‘베드타운(Bedtown)’이 아닌 ‘자족도시’를 기획한 것이다. 여기에 1831년(순조 31년) 화성유수 박기수에 의해 세워진 ‘항미정’은 축만제를 단순한 저수지에서 벗어나 전통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 수원팔경으로 꼽히는 ‘서호낙조’를 항미정에서 바라보면서 우리네 조상들은 시조를 읊으며 풍류를 논했다.한반도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1908년 융건릉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기차를 타고 서호 임시 정거장에 도착해 항미정에서 차를 마시며 잠시 쉬어간 곳이기도 하다. 2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축만제 일대는 얼마전까지 농촌진흥청 등이 자리했던 농업의 중심지이자 수원시민들이 즐겨 찾는 명소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김수현 수원시 학예연구사는 “축만제는 아버지에 대한 효심은 물론 민생안정을 위한 노력과 혁신적인 신도시 아이디어, 시대를 거치면서도 명맥을 유지하는 등 수많은 가치를 함축하고 있다”며 “우리 주변에 살아 있는 역사교과서이자 배움의 장”이라고 강조했다. ■ 세계유산 등재까지 6개월간 숨은 노력…축만제 가치를 인정받다 지난 1950년에 설립된 ICID는 관개ㆍ배수ㆍ홍수조절ㆍ환경보존 등을 다루는 비영리 국제기구다. UN경제사회이사회, UN식량농업기구(FAO), 유네스코(UNESCO) 등의 자문기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1992년부터 사단법인 한국관개배수학회가 한국지부로 활동하고 있다. ICID가 선정하는 세계관개시설물 유산은 까다로운 조건을 갖춰야만 등재될 수 있다. 이번 등재도 전 세계에서 48개소가 신청하였으나, 불과 9개소만 등재되었을 뿐이다.등재 요건은 100년 이상된 관개시설물로, 농업 발전에 공헌했거나 탁월한 기술을 바탕으로 건설되는 등 역사적, 기술적, 사회적으로 가치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지난 2012년에 제정돼 2014년부터 중국과 일본 등에서는 매년 등재가 이뤄졌으나, 우리나라 관개시설은 단 한 번도 등재된 적이 없었다. 이번 축만제의 세계유산 등재에는 숨은 노력들이 함께했다. 국내 관개시설의 세계유산 등재를 목표로 한국관개배수학회는 지난 5월 말 수원시에 축만제의 등재 도전을 타진했다.축만제가 가진 역사성과 가치를 알아본 것이다. 정조의 농업정책과 수리시설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판단한 수원시의 노력도 함께했다.6월 한 달간 시는 축만제의 가치를 발굴하기 위한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화성성역의궤 등 고서 기록은 물론 일제강점기 시절 자료까지 확보에 나섰다. 그리고 7월 ICID에 정식으로 축만제의 세계관개시설물 등재를 상정했다. ICID는 축만제의 가치를 종합적으로 심사했다. ICID는 9개의 선정 기준을 두고 1개 이상만 만족해도 세계관개시설물로 선정한다. 그 하나하나의 기준은 무척 높다. 뛰어난 역사적 가치를 비롯해 농업 문화 발전에 대한 기여도, 디자인과 건축기술의 혁신성 등을 갖춰야만 한다. 그런데 축만제는 이 가운데 3개의 기준을 충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축만제의 새로운 가치를 발굴해낸 노력의 산물이었다. 마침내 축만제는 지난 8일 ICID 집행위원회 전체 회의를 통해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중국, 일본, 파키스탄, 스리랑카, 태국에 이어 세계 6번째 보유국이 됐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세계적인 기구로부터 축만제의 가치를 인정받게 돼 기쁘다”면서 “이번 등재가 축만제를 세계에 홍보하고 수원시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알릴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총회장 김선규 목사) 총회전도법인국이 오는 21일 서울 사랑의교회서 ‘새신자 전도 정착,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전도정책 포럼을 개최한다. 포럼 패널로는 소강석(용인 새에덴교회)·장창수(대구대명교회)· 오종향(서울 뉴시티교회)·오주환(익산 예안교회) 목사, 강명옥(서울 사랑의교회) 전도사가 강사로 나서 ‘새신자 전도 정착의 방법과 실제’, ‘새신자 정착을 위한 아날로그 목회’, ‘효과적인 새신자 양육과 정착’ 등을 주제로 강의한다. 참가대상은 전국교회 성도와 새신자 담당자 등이며 총회 홈페이지(www.gapck.org) 또는 전화(02-559-5676)를 통해 참가신청을 할 수 있다. 참가비는 사전접수의 경우 1만 원, 현장접수는 1만5천 원(점심식사, 자료집 제공)이며 선착순으로 500명까지 접수 받는다.
수원화성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924호로 지정됐다. 수원시는 17일 문화재청아 조선경국전 등 9건에 대해 보물 지정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조선경국전은 조선 개국 공신인 정도전이 1394년(태조 3년) 왕에게 지어 올린 사찬(私撰) 법전으로 국가 운영을 위한 기본 강령이 담긴 ‘조선왕조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관제·군사·호적·경리·농상 등 각 분야 제도를 기술해 조선의 건국 이념,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대한 기본 방향을 제시했다. 조선경국전은 경제육전(개국 초 반포된 공적 법전), 육전등록 등 법전 편찬의 토대가 됐다. 조선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 1476년 완성)의 모체가 되기도 했다. 1책 79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이 현재까지 전해지는 국내 유일본이다. 박물관은 문화재 지정을 위해 2013년 문화재 지정 신청을 하고, 2014년 ‘삼봉 정도전과 조선경국전’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해 조선경국전의 가치를 알려왔다.
좌절한 청년, 실학의 길을 열다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은 부친 이하진의 유배지인 평안도 운산에서 태어났다. 이익의 선대는 서울 경기지역에서 현달한 가문으로 활동했지만, 18세기이후 치열했던 중앙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부친과 친형이 화를 당하면서 세상에 나아갈 꿈을 접어야 했다.세상에 좌절했던 청년 이익은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전국을 유랑하였다. 이 방랑길에서 그는 백성이 당면한 현실을 직접 보고 들으며 훗날 개혁론을 구상하는 바탕으로 삼았다.현실 비판, 개혁론의 출발이익은 자신의 집안이 겪은 정치적 참화의 원인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붕당론(朋黨論)으로 정리했다. 정쟁과 관련한 그의 설명에 따르면, 밥그릇은 하나뿐인데 굶주린 사람이 열이라면 싸움이 일어난다. 과거 급제자는 늘어나지만 관직은 제한돼 있으니 벼슬을 놓고 무리지어 싸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진단이 이러했으니 대책도 달랐다. 우선 과거제와 관료제를 개혁해야 한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양반에게 다른 호구책을 마련해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이 필요하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후일 실용과 실천으로 대표되는 경세치용의 학문을 수립해 나간 출발점이었다. 성호이익초상화 인정(仁政)과 안민(安民)의 경세론이익은 주자학이외에 양명학, 고증학 등 다양한 사조에 대한 연구와 함께 서양의 지연과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새로운 학문세계로 나가기 위해 제자들에게 사설(師說)을 따르지 말고 스스로 터득하는 자득(自得)과 회의의 학문 태도를 중시했다.특히 성호 이후의 학자들은 대개 서양의 문화적 자극으로 학문적 사유를 더욱 진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지구설을 받아들여 중화를 중심으로 한 위계적 세계관을 극복해 나갔다.18세기이후 사회경제적으로 중앙 벌열과 결탁한 독점상인에게 부가 집중되고, 농촌에서는 소수의 부농이 대규모 농사를 지음으로서 대다수 농민은 작은 경작지마저 얻기 힘들었다. 분배의 불균등으로 인한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었다. 민생을 위해 국가 경영의 틀을 새로 짜는 경세학이 지극히 필요한 시점이었다.이익은 국가의 인정(仁政)과 안민(安民)과 균(均)의 정책 이념을 발전시켜 노비제와 특권신분층을 부정했고, 균등한 과거 시행 그리고 전체 농민의 생업 안정을 주장하였다. 그의 경세론은 ‘바다의 파도가 만리에 미친다[海波萬里]’로 언급될 정도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글_조준호 실학박물관 학예기획부장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장 김희중 대주교)가 인천 오라카이 송도 파크호텔에서 15일~17일 3일간 ‘제22회 한·일 주교 교류모임’을 연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군수 산업과 미디어’를 주제로 한 이번 행사에 한국 주교단은 김희중 대주교(광주대교구장)이 주교회의 의장을, 장봉훈 주교(청주교구장)가 부의장을 맡고 이용훈 수원교구청 교구장 주교 등 20여 명이 참석한다. 또 일본 주교단은 다카미 미쓰아키 대주교가 주교회의 의장을, 마에다 만요 대주교가 부의장을 맡은 데 이어 12명의 주교가 함께 자리한다. 개막일인 15일 오후에는 김지영 동양대학교) 교수가, 다음날인 16일엔 모치즈키 이소코 기자가 각각 발표자로 나서 학계와 미디어가 바라 본 군수산업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 한편, 지난해 11월 ‘제21회 한일주교교류모임’은 일본 요코하마교구서 ‘전후 70년 동안 가톨릭교회는 사회 안에서 어떻게 복음을 살아왔는가-복음의 기쁨’을 주제로 사회복음화 활동을 놓고 한일 주교 간 의견을 교류한 바 있다.
정조의 효심이 깃든 사찰, 용주사가 불법 도량에 합격기원 촛불로 불을 밝힌다. 용주사는 오는 12일 오는 12일 오전 10시~오후 6시까지 ‘수능합격 발원 3천 배(배 기도 정진회’를 갖는다. 6명의 스님 및 신도가 함께 올리는 이번 정진회는 자녀의 수능합격을 기원하는 학부모 및 기도에 참여하고 싶은 일반시민도 참여할 수 있다. 기도비을 공양하면 축원에 반영된다. 용주사 종무소 관계자는 “수능합격을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발원하는 이번 3천배 정진기도를 통해 학부모와 수험생들이 학업원만성취를 위해 간절히 발원하는 시간”이라며 “신도 및 일반인들에겐 참회와 청정한 삶을 위한 자성의 계기가 돌 것”이라 말했다. 참여 문의는 용주사 종무소(031-234-0040)으로 하면 된다.
변씨는 허생의 재능을 알게 되자 말했다. “지금 나라에서 병자호란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하니, 뜻있는 선비가 나서서 지혜를 펼 때요. 그런데 당신 같이 재주 있는 사람이 왜 은둔하여 생을 마치려 합니까?” 허생이 답했다. “예로부터 재주를 갖고도 은둔한 사람이 어디 한두 분이었소? 반계거사 같은 분은 군량미를 조달할 능력이 있었건만 저 먼 바닷가에서 배회했소.” 연암 박지원(1737~1805)의 허생전에 나온 한 대목이다. 세상을 경륜할 실력을 갖추고도 기회를 얻지 못하고, 일생을 마친 반계거사는 바로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다. 그가 거닌 바닷가는 전북 부안의 우반동이었다. 반계는 본디 서울 소정릉동(지금의 정동)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북인계였던 아버지 유흠(1596~1623)이 ‘유몽인 옥사’ 때 사망했다. 아버지는 불과 28세로 요절한 것이다. 아버지를 잃은 반계는 외숙 이원진과 고모부 김세렴의 보살핌 아래 학문을 익혔다. 그의 나이 15세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조부모와 홀어머니를 모시고 피난생활을 했던 반계에게 병자호란은 큰 충격이었다. 서울의 명문가라 할 수 있는 반계의 가족은 지방으로 내려가 활로를 모색했다. 그곳이 바로 부안 우반동이다. 이곳에는 세종대 우의정을 지내고 청백리로 꼽힌 9대조 유관(1346~1433)의 사패지(賜牌地)가 있었다. 반계는 32세 때 이곳 우반동에 거처를 정했다. 그의 호, ‘반계(磻溪)’는 ‘우반동(愚磻洞)의 냇물[溪]’이란 뜻이다. 우반동 골짜기는 바다에 접하고, 산과 들에 이어져 있다. 허균이 이곳에서 ‘홍길동전’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은거하여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에 적합한 곳으로 평가된다. 반계는 이곳 우반동에 거처를 정하고도 서울로, 충청도로, 경상도로 수시로 전국 곳곳을 다녀오곤 했다. 세상과 떨어져 칩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33세 진사과에 합격했으나 더 이상 대과에 응하지 않았다. 집안 때문에 어차피 출세의 가능성이 없는 데다 본격적으로 세상에 도움이 되는 학문에 전념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계수록이 바로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31세에 시작했던 저서는 49세 무렵에 완성됐다(1670). 3년 후 5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으니 필생의 역작이었다. 반계수록의 ‘서수록후(書隨錄後)’에는 집필동기가 드러나 있다. 제도가 오래되어 폐단이 드러남에도,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간 이는 인습대로 할 뿐이고, 초야에 있는 선비는 자기 수양에는 뜻을 두면서 경세의 활용에는 성의를 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치세를 이룰 수 없고, 생민의 화가 끝이 없다는 것이다. 반계수록은 26권 1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8권은 토지제도(田制)를 다뤘다. 권9에서 권12까지가 교육과 과거시험(敎選), 권13에서 권14까지는 관리임명(任官), 권15에서 권18까지는 직위와 관등(職官), 권19에서 권20은 관료의 봉급(祿制), 권21에서 권24는 군사제도와 국방(兵制)에 관한 내용 등이다. 요컨대 토지제도와 교육·관리충원, 군사문제를 중심으로 부국강병을 위한 방책을 제시한 경세서였다. 반계는 토지의 공전(公田)원칙과 균분을 강조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토지 공개념이며, 경자유전의 원칙에 입각해 자영농을 육성하고 보호하려는 것이다. 또 과거제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인재의 천거제를 주장했다. 인재를 선발하는 방식으로 과거시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관리의 봉급을 현실화시키고 봉급을 따로 주지 않았던 아전에게도 봉급을 주자는 주장도 했다. 봉급이 적은 관리, 봉급 안 받고 일하는 아전이 어디서 본전을 찾겠는가. 부정부패를 방지를 위한 대책인 것이다. 반계수록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영조와 정조 시대에 와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미 당대에도 미수 허목(1595~1682)은 자신을 찾아온 반계의 재주를 알아보고 ‘왕을 도울 인재’라 평가했다. 그의 사후 38년 뒤, 83세의 명재 윤증(1629∼1714)이 반계수록을 읽고 감명받아 발문을 썼다(1711). 허목은 근기 남인의 지도자였으며, 명재는 소론의 지도자였다. 명재의 제자였던 덕촌 양득중(1665~1742)이 영조에게 반계수록을 추천했다(1741). “근세에 호남 유생 유형원이란 사람이 쓴 책이 반계수록입니다. 신은 일찍이 스승 윤증의 집에서 본 적이 있는데, 옛 성왕의 정치를 시행하고자 한다면 꼭 갖추어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영조는 즉시 반계수록을 구해 올리도록 명했고, 이로써 그동안 초야에 묻혀 있던 반계수록과 저자인 유형원이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노론계의 홍계희(1730~1771)가 영조에게 출간을 청했다. 북인계 남인으로 분류되는 반계와 그의 주장이 당색을 초월하여 인정을 받은 것이다. 왕명으로 경상도 감영에서 목판본으로 출간한 때가 1770년으로 반계가 세상을 떠난 지 약 100년 만이었다. 성호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의 ‘변법(變法)’에서 반계를 이렇게 평가했다. “조선이 세워진 뒤로 시무(時務)를 알았던 분을 손꼽아 보면, 오직 율곡 이이(1536~1584)와 반계 유형원 두 분이 있을 뿐이다. 율곡의 주장은 태반이 시행할 만하고, 반계의 주장은 그 근원을 궁구하여 일체를 깎고 새롭게 하여 왕정(王政)의 시초로 삼으려 했다. 그 뜻이 참으로 크다.” 안정복(1712~1791)은 유형원의 증손인 유발로부터 반계수록을 빌려 읽은 후 반계를 흠모하게 되고, ‘반계선생연보’를 편찬했다. 반계는 17세기 사람이다. 후대 사람인 18세기의 성호 이익, 순암 안정복,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 등은 반계를 개혁가이자 경세가로서 높이 평가하고 본받고자 했다. 앞 세대의 정도전, 이이를 있는 개혁가이자 경세가로서, 후대의 뜻있는 선비의 모델이 되었다. 반계는 ‘서수록후(書隨錄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치든 도(道)든 구체적인 사물과 일을 통해서 드러나고 행해진다. 또 말하길, “천하의 이치는 본말(本末)과 대소(大小)가 떨어진 적이 없다. 치[寸]가 잘못된 자[尺]는 자 구실을 할 수 없고, 눈금이 잘못된 저울은 저울 구실을 할 수 없다. 그물눈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데도 벼리가 제 구실을 하는 경우란 없다.” 큰 그림을 그리면서도 구체적이고 작은 일에서 출발하는 실천적인 자세를 알 수 있다.
제주 해녀 문화의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가 확실시 된다.문화재청은 우리나라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한 '제주 해녀 문화'가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 간 위원회(무형유산위원회) 산하 평가기구로부터 '등재 권고' 판정을 받았다고 31일 밝혔다.이에 따라 제주 해녀 문화는 한국의 19번째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될 것이 확실시된다. 제주 해녀 문화의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여부는 오는 26일부터 12월 2일까지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리는 제11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 최종 결정된다.
왕실 예법 적용의 차별성을 주장하다허목(1595~1682)은 서울에서 출생하고 경기 연천에서 만년을 보냈다. 젊은 시절에는 부친을 따라 양성이나 포천 등 경기 지역과 산음이나 창녕, 의령 등 경상 우도에 거처한 바 있다.1617년(광해군 9) 아버지가 거창현감에 제수되자 아버지를 따라서 거창에 내려가 문위(文緯)를 사사하였으며, 그의 소개를 받아 정구(鄭逑)를 찾아가 학문을 배웠다. 허목은 이밖에도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당시에는 강원도로 피난했다가 1638년에는 의령에서 거처하였다. 이후에도 경상 우도에서 생활하다가 1646년에 연천으로 돌아왔다. 허목이 관직에 나아간 것은 56세 때인 1650년(효종 1) 1월 천거로 정릉참봉(靖陵參奉)에 제수되면서 부터였다. 당시 부인 이씨는 출사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나, 허목은 “벼슬하지 않음은 의리가 없는 짓이다”라며 입장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재직 기간은 1개월에 그쳤다. 이후 조지서 별좌, 공조좌랑, 용궁현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고 사직하였다.이어 1657년(효종 8) 7월에 다시 공조좌랑에 제수되었다가 8월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지평 재직시에는 국왕과 면대한 자리에서“군주가 위에서 덕을 닦으면 안으로는 내치(內治)가 바르게 되고 궁금(宮禁)이 엄해지며 밖으로는 백관이 법을 지키고 조정이 엄숙해지며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조심할 줄 알게 됩니다. 인심과 풍속을 변화시키는 일은 여기에 달렸습니다”라며 군주의 수신을 강조하는 발언을 한 바 있다. 현종 즉위 후 부호군, 장악원정, 장령 등이 계속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659년(현종 즉위년) 12월 상의원정에 제수되자 출사하였고, 1660년(현종 1) 장령에 제수된 뒤인 3월에는 효종의 국상과 관련한 의례 문제를 상소하였다. 기해예송이라 하며 혹은 제1차 예송이라는 불리는 논쟁을 불러온 주목되는 상소이다. 기해예송은 효종 승하 뒤 인조의 계비 조대비의 상복 문제를 두고 전개된 것으로, 특히 허목이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의 입장을 정면 반박하여 논쟁에 불을 붙였다. 송시열은 비록 왕통을 계승했다고 하여도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3년복을 입을 수 없는 4가지 경우, 이른바 사종지설(四種之說)을 내세우면서 1년복인 기년복을 주장하였다.이에 대해 허목은 송시열의 견해를 조목조목 비판하며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특히 차자라도 왕통을 계승했으면 장자가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송시열이 주장한 서자는 장자가 아닌 다른 아들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첩자(妾子)라고 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허목의 주장은 송시열 등 서인들의 주장이 왕실도 사대부의 예법을 동등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인데 비해 왕실의 예법 적용은 달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허목은 논쟁에서 패배하였고 같은 해 9월에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삼척부사에 재직하면서는 향약을 실시하거나 이사(里社)를 설치하였으며, 삼척의 지리지인 척주지를 찬술하는 한편 이때 유명한 동해송(東海頌)을 지었다. 1662년(현종 3) 가을에 삼척부사를 그만두고 연천으로 돌아왔다. 한 동안 저술활동과 유력(遊歷) 등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숙종이 즉위하면서 대사헌을 시작으로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집권 남인 내에서 대립이 심해지는 속에 영의정 허적(許績)과의 불화가 생겨 향리인 연천으로 물러났고,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대거 축출되며 허적·윤휴 등이 역으로 몰려 처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벼슬이 삭탈되는 선에서 와석종신(臥席終身)하였다. 이후 허목이 세거하고 있던 연천의 거소(居所)는 그의 나이 84세(숙종 4년)에 왕으로부터 특별히 전택(田宅)을 하사받음으로써 허씨가의 기반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군비의 축소와 민생 회복을 주장하다 허목의 학문은 정구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밖에도 선대에서 관계를 가진 북인 계통의 남명 조식이나 화담 서경덕의 영향도 적지 않으며, 외할아버지 임제(林悌)로부터도 도가 사상 측면에서 영향을 받았다.그런 때문인지 허목의 학문은 당시 서인들이 주자서나 사서(四書)에 비중을 둔 것과는 달리 원시 유학인 육경학(六經學)에 중심을 두었다. 허목 스스로 자신의 글이 육경으로 근본을 삼고 예악을 참고하고 백가의 변을 통하여 분발하였음을 밝히고 있다.주자서에 얽매이지 않는 학문적 태도로 인해 제자백가 학문이나 천문, 지리, 노장학 등 다양한 범위에 학문에 대해서도 스스로 연구할 수 있었다. 또한 역사 인식의 측면에서도 한국사의 개별성을 강조하며 토풍(土風), 즉 고유문화를 존중하는 자세를 보였다. 허목은 현실에 있어서 북벌을 반대하였다. 조선은 국력이 약하고, 자연 조건이 공격에 불리하다는 점과 함께 북벌론이 국가 기강을 무너뜨리고 백성을 괴롭히는 것이며 집권층의 치부 수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북벌보다는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安民〕이 급선무라고 하였다. 이런 전제하에 군비 확장을 반대하면서 군영을 혁파하여 병력을 감축해야 한다고 하였다. 군사 재정에 충당하기 위해 설치한 군둔전이나 호포법 역시 오히려 백성들에게 피해가 되며 권세가들이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고 하여 반대하였다. 17세기 조선은 대내외적으로 복잡다단한 시기였다. 대외적으로는 명청교체기라는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 전란을 경험하였다. 대내적으로 서인과 남인의 정권 경쟁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현종대에는 의례 문제를 둘러싸고 두 차례 예송이 발생하였고, 그 결과로 숙종 초에는 서인에서 남인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상황이었다.허목은 이런 대내외적인 상황을 몸소 경험하여 국가 재건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왕실 예법 적용의 특수성을 강조하거나 북벌을 반대하며 철저하게 민생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이근호(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
개인의 치욕은 뒤로 하고, 삼전도비의 찬술이경석(李景奭, 1595∼1671)의 본관은 전주이다. 정종(定宗)의 왕자 덕천군 6대손이다.어려서는 형 이경직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성장해서는 당대 대표적 유학자인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과거 급제 후에는 검열, 봉교를 비롯해 이조좌랑 등 이른바 엘리트코스를 거치며 승승장구를 거듭하였다.인사를 담당하는 자리에서는 정치적 이해를 초월해 인재를 등용하였고,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몇 차례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가 재정의 확충과 민생 안정을 꾀하기도 하였다. 관직 진출 후 이경석은 문명(文名)을 날리게 되는데, 이로 인해 후일 논란이 된 삼전도비(三田渡碑 ; 본래 이름은 청태종공덕비)의 비문을 짓게 되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 청나라에서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한 자리에 ‘대청황제공덕비’를 세울 것을 요구해왔다.조선으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항복하였지만 여전히 청나라는 오랑캐요, 명나라만이 중화(中華)로 생각했던 사대부들이 비문을 지으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의 입장에서 청나라의 요구를 무조건 무시할 수 없었다. 인조의 명에 따라 마지못해 장유, 조희일, 이경석 3인의 글이 올라왔는데, 당시 기록에 따르면 조희일은 채택될 것을 우려, 고의로 글을 거칠게 만들었다고 한다. 결국 조선에서는 장유와 이경석이 지은 글을 청나라에 보냈다. 청나라에서 이들의 글을 심의한 결과, 이경석의 글이 수정을 전제로 최종 채택되었다. 인조의 지시로 이경석은 글을 수정하였고, 이것이 청나라에 최종적으로 승인되어 지금 삼전도에 세워진 비에 새겨지게 되었다. 이 일로 이경석은 스스로 “문자를 배운 것을 후회한다”고 자술하였으나, “군주의 욕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 몸을 돌아보고 아낄 겨를이 없다”고 하며 기꺼이 글을 짓고 수정하였다. 이미지박세당 찬 백헌비명초의 일부(한국학자료센터,http://www.kostma.net). “모두 나의 책임이다”, 원로의 정치적 자세 이경석은 이후 우의정, 영의정 등으로 승진하였다. 효종 즉위 직후 이경석의 정치적 자세를 보여주는 일이 일어났다. 효종 즉위 직후인 1650년 2월 청나라에서 칙사 6명을 조선에 파견하였다.효종이 즉위하면서 친청(親淸) 세력의 입지가 약화되자, 친청 인물인 김자점이 청나라에 “새 임금이 옛 신하를 쫓아내고 산림의 인사를 등용해서 군사를 일으켜 오랑캐를 치려고 한다”고 참소하자 이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것이다. 칙사가 나왔다는 소식에 조선 조정은 당황하면서 대처 방안 마련에 고심하였다. 이 와중에 국가 최고 원로로 영의정에 재직하던 이경석은 당시 국가의 위기가 자신의 책임이므로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이경석의 책임있는 행동은 결국 청나라 사신들에게 믿음을 주었다. 이경석을 만난 청나라 사신은 이경석이 자신들이 있는 곳까지 직접 왔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처음에 생각하기에는 예관(禮官)을 보고도 가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영상이 멀리서 왔기 때문에 예로써 한다”며 그를 대접하였다. 이경석이 파견되면서 진정되었던 긴장 관계는, 청나라 사신이 서울로 들어오면서 다시 표면화되었다. 칙사들이 가지고 온 칙서 2통 가운데 1통이 조선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것이다. 문제의 칙서는, 효종 즉위 초 청나라에 보낸 표문(表文)의 내용을 문제삼은 것이다. 표문의 내용은 인조 말년부터 왜인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자, 방비를 위해 산성과 무기 등을 수리하는 것을 허가해달라는 것이었다. 병자호란 후 산성 등의 수리는 금지조항이었다. 청나라에서는 이 사안을 새롭게 즉위한 효종이 친청 세력을 제거하고 북벌을 하려는 것으로 의심하였던 것이었다. 이미지이경석 사궤장연회도첩 중 선독교서도(경기도박물관 소장) 청나라 사신이 관련 당사자들을 불러 문책하는 자리에 이경석도 참석하였다. 청나라 사신의 계속된 힐책에 대해 이경석은, “모두 나의 과실이고 우리 임금님은 알지 못합니다” 라며,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렸다.이경석과 함께 문책 대상이 된 인물은 조경(趙絅)으로, 그는 표문을 보낼 당시 예조 판서 및 대제학이었다. 청나라 사신이 조경을 계속 문책하자, 이경석은 다시 말하기를, “내가 수상이니 일에 미진함이 있는 것은 모두 나의 책임이다”라고 하였다.이경석의 계속된 주장으로 청나라 사신은 더 이상 조경 등을 문책하지 못하고, 이경석과 조경에게 벌을 주게 하였다. 청나라 사신의 심문 당시 이경석의 가족들은 그가 죽어서나 나올 것이라 생각하여 초상 치르는 기구를 가지고 사신이 머물던 객관의 문 앞에서 기다렸다고 한다. 당시의 살벌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장시간에 걸쳐 심문이 진행되었으나, 오히려 청나라 사신들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 이경석의 자세에 감동하였는지, 그들 스스로, “동국(東國)에는 오직 이 정승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고 하였다. 결국 이때의 일은 이경석과 표문을 작성한 조경이 책임지는 선에서 마무리 되었고, 효종과 신하들의 구명운동으로, 이경석 등은 극형만은 면하고 청나라 사신으로부터 당분간 백마산성에 위리안치(圍籬安置:집 둘레에 울타리를 둘러치거나 가시덤불로 싸서 외인의 출입을 금한 중죄인의 안치)하라는 답변을 받아냈다. 백마산성에 위리안치되었던 이경석은 다음해 2월에 풀려나 서울로 돌아왔다. 복잡한 외교 상황 속에서 이경석이 원로로서 보여준 책임있는 자세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에게 많은 시사를 던져주는 것이 아닐까? 이경석 사후 박세당(朴世堂)이 비문의 일부를 옮기는 것으로 글을 맺는다. 세 조정에서의 원로였고 한세대의 충신이었다. 오직 나라만을 위하였고, 자신의 집을 잊었도다. 오직 임금만을 위하였고,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았도다. 진심어린 정성은 해처럼 빛났고, 평소의 행실은 서릿발처럼 늠름하였도다. 험난한 처지와 어려운 일들을 두루 맛보았도다. 이근호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