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오디세이] 차별과 폭력의 발아 순간

돌아보면 10대와 20대에는 유독 한국 밖을 경험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중학교 시절 어느 옷가게에서 옷을 구매하고 공짜로 받은 아이비리그 달력이 필자에게는 그렇게 소중했다. 그 달력에는 네이비색 바탕에 미국을 대표하는 아이비리그 대학들의 풍경이 월별로 펼쳐져 있었다. 어느 달에는 초록색 담쟁이 넝쿨이 고풍스러운 빨간 벽돌의 건물을 타고 올라가는 장면이 클로즈업돼 있었는데 그 장면만으로도 막연한 위엄이 느껴졌다. 그때 그 달력을 바라보며 마음속에 다짐 혹은 소원 같은 게 박혔던 것 같다. 언젠가는 나도 저곳에 가리라고. 물론 그것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나 자신이 그러한 다짐이나 소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잊고 한국에서 평범한 대학원생으로 살던 어느 날, 박사과정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미국의 한 대학에 펠로우십(일종의 교환연구원 장학)을 지원받게 됐다. 비행기삯만 지불하면 현지에서 생활비를 받으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주변 대학의 연구자들과 함께 공동으로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지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무엇보다 미국 체류 기간에 거주할 수 있는 집 또한 이미 저비용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된 상황이었기에 나로서는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꿈꾸던 것이 현실에서 이뤄진 것이지만 너무나 갑작스럽게 결정된 것이라 인천국제공항에서 애틀랜타행 비행기에 탑승하는 순간까지도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만큼 불안감도 컸지만 기대감만 못했다. 그렇게 부푼 기대를 안고 출발한 미국 생활은 적어도 초반에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내가 출근할 학교의 건물은 중학교 때의 그 아이비리그 대학 달력 속 건물과 거의 차이가 없었고 교직원들 또한 하나같이 친절했을 뿐 아니라 거주지의 이웃마저 갑작스럽게 이사온 이방인을 열린 마음으로 대해 줬다. 그런데 모든 일이 그렇듯이 우리 삶에는 늘 좋은 일만 있지는 않다. 나의 미국 생활에서 그것은, 정말이지 이것이 문화 이론서에서만 봤던 문화 적응의 허니문 단계임을 실감하며 미국 생활에 한껏 취해 있을 때쯤 자동차 사고처럼 다가왔다. 거주지 근처에는 마트가 없어 제대로 된 식자재를 사려면 30분쯤 걸어 큰 슈퍼마켓으로 가야 했는데 그날은 오랜만에 그곳으로 가는 날이라 이것저것 사다 보니 비닐봉투에 든 짐이 여러 개가 돼 버렸다. 참고로 미국은 워낙 땅 덩어리가 넓은 나라라 자가용으로 이동하는 인구가 많아서인지 뉴욕 같은 대도시가 아니면 대중교통이 그리 발달하지 않았다. 필자가 거주한 애틀랜타 교외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슈퍼마켓 근처에서 버스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펠로우십 연구원 주제에 한번 타면 기본적으로 100달러는 족히 깨지는 택시를 탈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짐이 든 비닐 봉지 여러 개를 양 손목에 걸치고 두 손으로 잡고 하면서 낑낑대며 집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도로를 가로지르던 차량 한 대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안에 타고 있던 청년들이 창문을 내리려고 했다. 내심 내게 도움을 주려고 그러나 싶었지만 정작 돌아온 것은 할리우드 영화로만 봤을 뿐 내 생애 결코 들어본 적도 없는 욕설과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망언이었다. 다행히 그들은 그렇게 내게 조롱 섞인 차별의 말만 남기고 총기 사건 등의 물리적 폭력은 없이 순식간에 떠났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저들은 나를 도대체 얼마나 안다고 저런 저주를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퍼부을까. 자신들이 차별주의자라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 그리고 본인들이 방금 내게 한 것이 범죄에 해당하는 폭력인 것은 인지하고 있을까 등등의 여러 생각이 오갔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 끝에는 내 안에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분노만 남아 있음을 봤다. 그것은 내가 조금만 덜 도덕적이었다면 살기로 이어졌을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 차별과 폭력은 누군가의 일상과 행복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며, 그 사람이 다시는 그 사건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렇기에 차별과 폭력을 경험하면 또 다른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으며 누군가의 희생 없이는 그 광기의 사슬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고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되풀이된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바라보며 그 옛날 나의 미국 생활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지금이라도 우리 각자의 언동 하나하나를 뜯어보고 성찰해야만 또 다른 차별과 폭력의 발아 순간을 막을 수 있다.

[삶, 오디세이] 주례사 비평은 잘못인가

문학평론의 위기를 말하는 것 중 하나가 주례사 비평이다. 문학평론가는 작품을 평할 때 엄격하게 장단점을 말해야 올바른 평론이 된다. 그런데 비평이 마치 결혼식 주례사처럼 듣기 좋은 말만 늘어 놓아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비평의 존재 이유가 없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문학평론을 하는 사람들은 현장 비평가다. 문학평론가는 매일 생산되는 수많은 문학작품을 대상으로 현실적 가치에 질문을 던져보는 사람이다. 비평은 텍스트들이 현실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분석하고 새로운 답을 찾아가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문단에서는 평론가들이 이러한 임무를 저버리고 지나치게 칭찬만 해 잘못을 저지른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회자되는 주례사 비평은 과연 잘못인가. 어느 날 몇 명의 문학평론가가 인천의 한 음식점에 마주 앉았다. 젊은 평론가 M이 시집 해설을 쓰고 난 후 일어난 일화를 들려줬다. M평론가는 시집 해설을 의뢰받고 평론가의 자의식으로 솔직하게 해설을 썼다고 한다. 요즘 문제시되는 주례사 비평이 아닌 시의 작품성 위주로 평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를 분석하니 시집은 혹평이 됐다. 그 후 시집의 저자인 시인에게 전화상으로 M평론가는 상스러운 욕을 먹었다. 이 젊은 평론가는 정말 주례사 비평을 싫어했다. 또 다른 예도 들려줬다. 출판사로부터 의뢰받은 시집 해설을 쓸 때의 일이었다고 한다. 이 역시 문제점 위주로 시를 평가했다. 그리고 시집 출판기념식에서 저자인 시인으로부터 M평론가는 멱살을 잡히고 육두문자를 들어야 했다. M은 평론가로서 자의식이 확실한 자신을 거듭 강조했다. 현재는 폐간을 한 모 권위지에서는 매호 작가 특집 코너가 있었다. 문예지에서 그 호에 특집으로 다룰 작가는 이름이 알려진 소설가였다. 특집 대상의 소설가는 평론가의 평가에 기대를 많이 했다. 당연히 우리 시대를 대표할 만한 소설가였기 때문에 긍정적인 평가를 기대하며 문예지의 발간을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특집의 평론을 맡은 B평론가는 해당 작가의 작품세계를 혹평했다. 특집 대상의 작가는 한 번도 받아보지 않은 혹평을 받고 큰 상처를 받았다. 그는 늦은 밤 만취해 울분에 찬 목소리로 문예지 편집위원에게 전화를 걸어 절필 선언을 하고 말았다. 문예지의 특집이 되는 작가들은 평론가들로부터 빛나는 조명을 받는다. 문학 장 안에서의 문예지와 평론가 그리고 작가의 카르텔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특집의 대상이 되면 작가는 문단에서 지위가 상승한다. 그런데 B평론가의 혹평이 한 작가의 자존감을 처참하게 무너뜨리고 만 것이다. 위에서 예를 든 두 명의 평론가는 자의식을 갖고 해당 작품을 평가했다. 문단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주례사 비평을 하지 않았다. 한국 문학의 발전을 위해 작품에 대한 평가는 냉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두 명의 평론가는 칭찬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필자는 시집 해설과 문예지 특집의 작품론은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문예지의 특집은 B평론가처럼 자의식을 갖고 작품의 문제점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할 수 있다. 비평은 감시받지 않는 절대 자유 속에서 대상 텍스트를 평가해야 한다. 작품의 문제의식과 인간의 다양한 욕망 그리고 부조리를 실존적 의미와 결부해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비평의 문장은 결기와 파열음이 가득해야 존재 이유가 확실해진다. 필자가 편집인으로 있는 시와 비평 전문지 포엠피플에 ‘문제적 비평’이라는 코너가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집 해설일 경우는 다른 시각이 필요하다. 시인이 시집을 출간하는 것은 매우 큰 축제에 해당한다. 시인은 자신의 시집 출간을 최대한 축복받고 싶어 한다. 문단에서 평론가로부터 평가받는 작가는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말한 아비투스 자장 안에서 문단은 작동한다. 따라서 문학 장 안에서의 헤게모니 투쟁의 승자는 소수의 스타급 작가다. 비평의 대상은 이들로 국한돼 있다. 하지만 비권위지 출신의 시인이 평론가로부터 평가받을 수 있는 순간이 있다. 바로 시집을 출간할 때다. 시인들은 기대에 부풀어 섭외한 평론가의 평가를 기다린다. 문단에서는 비권위지 출신이지만 개성이 강하고 작품성이 높은 시를 쓰는 시인이 많다. 이들의 문학에 대한 열망은 매우 높고 자존심도 강하다. 시집 출간이라는 자신의 축제에 M평론가처럼 혹평을 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시집 출간이라는 축제의 측면에서 보면 M평론가는 잘못을 저질렀다. 필자는 시집 출간을 할 때는 시인의 축제에 참여했으므로 문학적 열망과 결과에 대한 답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게 옳다고 본다. 다만 작품론이나 작가론을 쓸 때는 평론가의 자의식으로 냉정하게 평가하는 것이 맞다.

[삶, 오디세이] 2025년, 나의 꿈

바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꿈’은 좀 먼 나라의 무지개를 손에 잡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새해를 맞으면서 새로운 마음으로 꿈 꿀 수 있다면 많이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대 속에서도 의미 있는 새해, 2025년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필자도 새해 아침 광교산 형제봉을 오르면서 2025년 ‘나의 꿈’을 찾는 시간을 가졌다. 2025년 버킷 리스트 50이다. 꿈은 꾸는 사람에게 이뤄진다. 이 글을 읽으며 각자 2025년 자신의 꿈을 찾아보았으면 좋겠다. 리스트 중에는 조금은 황당한 것도 있지만 꼭 50가지는 아니더라도 5가지, 10가지, 20가지를 정해 꿈을 따라 살아가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그럼 천천히 하나씩 꿈 찾기에 도전해 보자. △잘 웃기 △먼저 인사하기 △약속 시간 늦지 않기 △감사일기 쓰기△큰 소리로 노래 부르기 △안 먹는 음식 먹기에 도전하기 △해외여행 가기 △장례식장 조문하기 △3명의 친구 만들기 △결혼식장에 가서 사진 찍기 △부모님께 용돈 드리기 △서점 방문해 책 구입하기 △영혼의 짝 1명 만들기 △헤어스타일 바꾸기 △새 노래 배우기 △운동 시작하기 △악기 한 가지 배우기 △몸에 안 좋은 음식 끊기 △다이어트 △외국어 배우기 △장롱 속 면허증 꺼내 운전하기 △유튜브, 카톡 사용 시간 줄이기 △면허증 따기 △친척 집 방문해 1박하기 △건강을 위해 매일 비타민 먹기 △매일 1만 걸음 걷기 △말하기보다 경청하기 △아직 가보지 않은 가장 높은 산에 가기 △양보 운전하기 △겸손하게 낮아지기 △직장에서 가족 자랑하기 △손해인 줄 알지만 선행하기 △책 읽기(한 달에 1권) △저축하기 △필요한 사람에게 돈 빌려주고 받지 않기 △아기 갖기 △컴퓨터 배우기 △섬 여행하기(제주도, 울릉도, 백령도 등) △사진찍는 법 배우기 △사막에 가보기 △아들딸 결혼시키기 △한 달에 한 번 가족들과 외식하기 △가족들과 여행하기 △요리 배우기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기 △부모님 여행 보내 드리기 △캠핑에 도전 △자전거 타기 △혼자서 하루 여행하기 △유언장 쓰기 꿈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은 바쁘지 않다. 해야 할 일을 하지만 그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삶은 여유가 있고 동기와 목적이 분명하기에 발걸음은 힘이 있다. 빅토르 위고는 “매일 아침 하루를 계획하고 그 계획을 실행하는 사람은 극도로 바쁜 미로 같은 삶 속에서도 그는 인내할 수 있는 한 올의 실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계획이 서 있지 않고 단순히 우발적으로 시간을 사용하게 된다면 곧 무질서가 삶을 지배할 것”이라고 말했다. 꿈을 꾸라. 꿈을 이루기 위해서 살라. 2025년이 과거가 됐을 때의 성공과 실패는 오늘 나의 꿈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진심으로 변화된 인생을 살고 싶다면 새해 첫날이 아니라 지금 당장 시작하라.” -짐 스토벌

[삶, 오디세이] 다시 이 시간

2024년이 떠나가고 2025년이 다가왔다. 우리는 그 시간을 보낸 적이 없으나 시간은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고 또 다른 이름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이 시간은 이제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순간순간을 선물할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시간을 보내고 맞이한다. 그러나 이 시간은 그 찰나뿐이다. 불교에서는 시간에 대해 ‘찰나생(刹那生) 찰나멸(刹那滅)’이라는 가르침을 설한다. 매 순간이 새롭게 다가오고 지나간 순간은 두 번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로 지금을 사는 우리가 이 순간을 간절하게 대하고 어떤 미련도 후회도 없이 적극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매일의 시간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이 시간이 지나도 다른 시간이 찾아올 것이고 항상 그렇게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연말과 새해를 대할 때면 시간의 무서움을 여실히 느낀다. 얼마 전 새해라고 기뻐하고 설레던 것 같지만 돌아보면 눈앞에 연말이 다가와 있다. 분명 하루하루가 너무나 길고 지루하기까지 했건만 1년이라는 긴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 것이다. 그리고 사라진 시간 속에는 수많은 아쉬움과 미련 등이 뒤섞여 있다. 이러한 찰나의 시간을 이제 더 이상 놓치면 안 된다. 시간은 잡을 수 없지만 놓쳐서도 안 된다. 이 시간이 지나가 버리면 절대 되돌릴 수 없다. ‘지나간 1초는 1억의 가치보다 크다’는 말과 같이 어떤 재물로도 환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산다.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 언제쯤 행복해질까. 이 물음의 대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내가 행복한 일을 하고, 지금 내가 행복한 마음을 갖고, 지금 내가 행복하게 살아야만 그 ‘행복’이 생겨나는 것이다. 즉, 행복의 완성은 다른 무언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금을 사는 여러분이, 제가, 우리가 행복할 때 이뤄지는 것이다. 때때로 특별한 이벤트나 선물 등으로 행복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 특별한 순간만의 행복이며 기쁨이다. 오래 지속되고 항상 하는 행복은 일상 속에 있어야 한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과 주변이 그 행복의 토대가 돼 줘야 지금 웃을 수 있고, 어제가 추억되고, 내일이 기대되는 것이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가르침은 특별한 삶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잔잔하며 평안한 매일을 사는 것이야말로 참된 깨달음의 삶이며 그 안의 모든 것이 행복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평상심의 마음을 지니고 산다면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의 매일이 행복한(좋은) 날이 된다. 특별한 재물이나 시간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우리가 행복할 때 모든 것이 그처럼 변해 우리와 함께 지금을 살아갈 것이다. 지금 환히 웃는 그대의 미소가 세상을 밝히고 그 빛은 모든 인연에게 이어져 다시 우리에게 전해진다.

[삶, 오디세이] 부분의 법칙과 POGS

조금이라도 젊고 어렸던 날에는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뭔가 거창한 계획을 세우곤 했다. 그러나 그건 실제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계획이 아니라 늘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이상이나 꿈에 가까운 것이었음을 마흔이 훌쩍 넘은 뒤에야 알았다. 인간이란 이리도 어리석은 존재로구나 하고 몸소 깨달은 순간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당초 계획이란 것 자체가 지금, 여기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할 때 그 실천력과 추진력을 바탕으로 더 큰 계획을 할 수 있고 보다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것 아니던가. 어쩌면 불변의 진리였을 그 사실은 실제로 가정에서 훈육하는 부모나 정규 교육과정 중에 스승으로부터 충분히 들었을 법한 것임에도 그때는 들을 귀가 없어 40년 이상을 미련하게 살았나 보다 싶다. 한편으로 다행인 것은 이미 늦었다고 생각한 그 순간이 사실은 그것을 하기에 가장 이른 때라는 사실이다. 이는 오랜 시간 미련하게 무모한 계획을 세우며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깨닫게 된 삶의 지혜로 보인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인생을 살아 오면서 실제로 우리 삶에는 사실상 늦은 것이란 없음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나 계획은 그 필요성을 깨달아 알았을 때에야 비로소 목적성이 구체화되며 실행력을 지니게 된다. 딱히 내 삶에 필요하지 않음에도 그것을 얻기 위해 남들보다 빨리 움직인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시의적절하다고 평가될 수 없는 이유다. 그래서 사람이 무엇인가를 할 때에는 분명 적절한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한 때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은 아니므로 뭔가 하고 싶지만 이미 늦었다고 느끼는 것이 있다면 그때야말로 그것을 시작해야 할 때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것들은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그 시작이 고민될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자신의 바람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뭔가 하고 싶은 것들이 있지만 그것을 하려면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이 많아 손을 대기도 전에 머리부터 복잡해지는 경험은 누구나 한다. 그런 순간에는 계획하는 것조차 막막하기 때문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버거워질 수밖에 없다. 그럴 때에 기억할 만한 것이 ‘부분의 법칙’이다. 부분의 법칙이란 행동주의 언어교수법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언어를 가르칠 때 큰 단위를 작은 단위로 쪼개 하나씩 제시하고 연습하면 언어 학습과 습득에 용이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 기계적 반복이 강조돼 맥락이 결여된 언어 학습이 이뤄지기 쉽다는 단점이 있지만 습관화 혹은 자동화에는 분명 도움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습과화와 자동화는 언어 사용의 정확성을 발달시키지만 유창성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언어 사용의 정확성과 유창성이 기본적으로 부분의 법칙에 따른 언어 요소의 객관화를 바탕으로 획득되는 것처럼 우리가 바라는 것이나 도모하는 일도 그러한 법칙으로 구체화해 실천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잘게 쪼개 그 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각자 나름대로 터득한 삶의 기술이 필요한데 필자는 개인적으로 POGS라는 것을 주로 활용한다. POGS는 목적(Purpose), 목표(Object), 하위 목표(Goal), 세부전략(Standard)의 머릿글자를 따온 것으로 삶의 큰 목적(P) 아래 그것을 이루기 위한 목표(O)를 정하고 그 목표를 내 삶의 영역별(G)로 어떻게 실천해 나갈 것인지(S)를 세부적으로 기술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막연했던 바람이 내 삶의 전 영역에 걸쳐 구체적인 실천 계획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필자는 새해가 되면 늘 POGS를 짜곤 한다. 바라는 것도 없고 그래서 계획하고 싶지도 않다면 그 순간에 자신의 삶의 영역을 잘게 쪼개 계획이 필요한 곳은 없는지 한번 살펴보자. 그러한 작은 실천과 함께 하루하루 살아간다면 분명 을사년 2025년의 끝에는 어떤 형태로든 좀 더 나은 내가 서 있으리라 확신한다. 부디 이번 을사년은 모두가 마음을 나누며 함께 서로를 돌아보고 뱀같이 지혜로운 한 해가 됐으면 좋겠다.

[삶, 오디세이] 작가와 트라우마

12·3 비상계엄 사태는 시민들에게는 큰 충격이었고 상처였다. 서울 도로에 나타난 군 장갑차와 국회의사당으로 들이닥친 무장한 군인들로 인해 대한민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과거 계엄 때 받았던 공포 스위치가 켜진 것이다. 수많은 시민이 한밤중인데도 국회의사당으로 모여들어 맨몸으로 계엄군을 막아냈다. 시민들이 계엄군과 맞서는 사이 우원식 국회의장 등 다수의 국회의원이 국회의 담을 넘었다. 결국 국회의사당에 모인 190명의 국회의원이 155분 만에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비상계엄은 6시간 만에 해제됐다. 12·3 비상계엄 사태는 지금 이곳의 작가에게 심리적 외상을 입혔다. 이제 작가들은 작품으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할 것이다. 역사적 트라우마는 시를 쓰는 데 바탕이 되는 중요한 재료가 된다. 일제강점기 카프 계열의 대표적인 시인 임화는 ‘현해탄’에서 “어떤 사람은 돌아오자 죽어갔다/어떤 사람은 영영 생사도 모른다/어떤 사람은 아픈 패배에 울었다”며 주권 잃은 트라우마를 노래했다. 의열단 요원이었던 이육사는 ‘광야’에서 “다시 천고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며 역사적 트라우마를 극복할 날을 예고했다. 그런가 하면 서정주처럼 ‘오장 마쓰이 송가’를 써서 가미카제 특공대로 죽어간 동족의 젊은이를 미화한 시인도 있다. 서정주는 민족의 트라우마를 잘못 사용해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역사적 트라우마는 서사라는 특징 때문에 중요한 소설의 소재가 된다. 조정래는 ‘태백산맥’에서 제국주의 국가들의 세계관과 우리나라의 분단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며 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좌익 진영의 염상진과 우익 진영의 염상구는 형제다. 두 인물은 남북이 형제라는 것을 상징한다. 또 김원일은 ‘손풍금’에서 분단의 비극이라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서사로 엮어냈다. 손풍금은 남파 간첩으로 잠입했다가 체포돼 21년을 복역한 박광수와 남한에 정착한 박도수의 이야기다. 태백산맥처럼 손풍금도 분단 시대의 형제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은 우리에게 닥친 큰 충격이다. 이러한 충격이 역사적 트라우마로 작가의 작품 소재가 됐다. 심리적 외상인 트라우마는 문학뿐만 아니라 영화와 미술 등에 종사하는 작가들에게도 중요한 소재가 된다. 천만 관객 달성으로 알려진 ‘서울의 봄’은 12·12군사반란에 의한 트라우마를 형상화했고 액션의 명작인 ‘글래디에이터’는 로마 제국에 저항하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서사화했다. 이처럼 트라우마는 화면에 생생한 액션을 불러오고 잘못된 역사에 저항했던 주인공을 영웅으로 만든다. 노르웨이의 화가 뭉크가 역사적 트라우마로 ‘절규’라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그는 미술사에 남지 못했을 것이다. 뭉크는 노란색과 붉은색 등 원색으로 공포에 질려 있는 인물을 그렸다. 세계대전을 경험한 뭉크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원색으로 질문을 던진 통찰력이 뛰어난 화가다. 작가는 질문하는 사람이다. 세계에 질문하고, 현상에 질문하고, 사물에 질문한다. 한강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질문한 결과 훌륭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소설 ‘소년이 온다’와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질문했고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제주4·3항쟁이라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질문했다. 이제 지금 이곳의 작가들이 12·3 비상계엄이라는 트라우마로 작품을 만들 것이다. 시인은 시로, 소설가는 소설로, 감독은 영화로, 화가는 그림으로 12·3 비상계엄에 질문을 던질 것이다. 작가는 질문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삶, 오디세이] 성탄절의 소원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주 예수 나신 밤....” 어김없이 2024년에도 성탄절을 맞고 있다. 매년 12월25일 성탄절은 전 세계인들이 함께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날이다. 어떤 해는 더 빨리 오거나, 어떤 일 때문에 늦어지지는 않는다. 많은 어려움이 있는 올해도 화이트크리스마스냐, 아니냐의 차이만 있을 뿐 온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성탄절이 다가온다. 필자는 2002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성탄절을 맞은 적이 있다. 기독교 국가가 아니었지만 그곳의 성탄절도 필자가 알고 있는 성탄절과 똑같았다. 호텔 로비와 거리에는 형형색색의 조명과 장식물로 화려하게 성탄을 맞는 모습에 당황한 것 오히려 나였다. 그리고 책에서 배우지 않은 종교와 문화에 대해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4년마다 전 세계를 들썩이게 하는 월드컵 축구대회는 축구에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는 의미 없는 축제이고, 지구촌의 축제라고 말하는 올림픽도 개최국이나 스포츠 팬들을 제외하면 무관심할 수 있는데 성탄절은 지구촌 사람 모두, 남녀노소, 인종과 국가와 문화를 초월하는 세계 최고의 축제일이다. 필자는 중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녀 어린 시절 성탄에 대한 추억은 없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굴뚝을 타고 들어와 아이가 원하는 선물을 양말 속에 넣어 놓고 간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커서 책에서 배웠다. 자녀가 공부를 잘하기 원하는 한 부모님이 있었다. 성탄절 때마다 아이에게 책을 선물했다. 그런데 아이는 점점 크면서 성탄절 선물로 받고 싶은 장난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 부모는 어김없이 책으로 성탄절 선물을 준비해 양말 속에 넣어 뒀다. 그 아이의 어린 시절 성탄절은 그렇게 기다려지는 날은 아니었단다. 2024년 성탄절의 소원이 있다. 우선 우크라이나전쟁이 끝나는 것이다. 더구나 그곳에는 북한의 젊은이들이 용병으로 전쟁에 참가하고 있다. 전쟁이 종식되는 성탄절 선물을 기다린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하마스, 헤즈볼라의 전쟁도 선물 보따리에 들어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한밤중의 비상계엄으로 시작된 대통령 탄핵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이 평화롭게 정리되는 선물을 주시면 좋겠다. 대한민국에는 뛰어난 정치 지도자들이 있지만 일은 점점 더 꼬이고 어려워지고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2024년 성탄절에는 이 땅에 아기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에 질서를 더해 온 국민이 안심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일상의 축복을 선물로 주시면 좋겠다. 끝으로 2024 성탄절에는 지난 1년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감사의 바구니에 담아 하나님께 선물로 올려 드리고 싶다. 크고 작은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돌아보니 가장 필요했고 좋은 것들이었다. 일이 일어난 그때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 성탄의 불빛에 비춰 보니 다 감사한 일이고 축복된 일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인사드린다. 성탄에 행복하세요. 메리 크리스마스!

[삶, 오디세이] 지구의 방생

불교에 ‘방생(放生)’이라는 의식이 있다. 인간에 의해 잡힌 동물을 다시 그들이 살던 자연으로 되돌려주는 것으로 생명 존중과 공생이라는 불교의 가치관을 실천하는 의식이다. 사찰에서는 봄, 가을이나 물고기의 산란기에 맞춰 방생의 법회를 열어 많은 불교인들과 함께 인간만이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공존하고 함께하는 지구라는 가르침을 일깨워 준다. 과거에는 방생에서 물고기나 새 등을 풀어주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이것이 자칫 생태계를 교란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오면서 방생문화도 점차 변하고 있다. 최근에는 방생의 의미를 보다 넓게 해석해 생명이 살아가는 것에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활동으로 변해 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강가에 버드나무를 심어 정화작용을 돕거나 겨울철 먹이가 부족한 산짐승이나 철새에게 사료를 제공하는 방생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새로운 방생문화는 생명 존중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이 보다 지금의 현실에 맞게 실천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몇 해 전부터 방생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바로 지구를 위한 방생이다. 당장 11월 말의 폭설을 떠올려 보면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고 예측조차 못할 정도의 기록적인 눈이 내려 수도권을 비롯한 전국에 대란을 일으켰다. 더불어 장마와 태풍은 매년 그 피해와 규모의 기록을 갈아 치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우리의 지구가 이제는 우리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하던 곳에서 두려움과 걱정의 대상이 돼 가고 있다. 모든 인류는 지금까지 지구에서 태어났고, 지구에서 살다가 다시 지구의 품으로 돌아갔다. 이 지구는 단지 우리의 터전을 넘어 모든 생명의 토대이고 그 생명들의 세상이다. 그러나 그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오직 자신만을 위해 마구잡이로 생산하고, 편리하다는 이유로 일회용품을 사용하며, 흥청망청 자원을 소비한다면 지구가 제공하던 터전은 그리고 세상은 어쩌면 이제 우리를 품어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생명을 지키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이제 지구를 위한 방생을 해야 한다. 지구를 위한 우리의 방생이 어쩌면 다소 늦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 탓을 할 때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실천해야 한다. 그 방법도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으나 오히려 실천하지 않은 것이 문제인 것이다. 사용하는 자원을 조금만 아끼고, 사용한 것은 잘 분리해 버리며, 다시 쓸 수 있는 것은 꼭 다시 쓰면 된다. 그리고 주변에 타인에 의해 버려지거나 훼손된 것을 내가 먼저 줍고 정리한다면 그 작은 실천이 하나둘 모여 거대한 힘이 돼 지구를 살리는 방생이 된다. 누구나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 한다. 이 ‘행복하고 잘 사는 것’은 우리의 자리에서 이뤄지는 것이고 그 자리가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다. 오늘 무엇 하나를 줍거나 아낀 그 행동이 훗날 더 아름답고 안락한 지구가 돼 우리에게 행복의 터전을 제공해 줄 것이다.

[삶, 오디세이] ‘꼬리표’ 농담처럼 사소화되는 편견과 차별

꼬리표란 단어가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 늘 따라다니는 떳떳하지 않은 평판이나 좋지 않은 평가’를 뜻한다. 그런데 누구나 이 단어에 부정적인 의미가 있음을 잘 알고는 있어도 자신이 누군가에게 무심코 던지는 말로 그 꼬리표를 붙이고 있다는 사실은 쉽게 감지하지 못한다. 일례로 ‘동남아’와 ‘다문화’라는 단어를 한번 돌아보자. 이것의 사전적 의미는 각각 ‘동남아시아의 음역어’와 ‘한 사회 안에 여러 민족이나 여러 국가의 문화가 혼재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즉, ‘동남아’는 ‘아시아의 동남부’ 지역인 ‘동남아시아’를 한자로 간단히 나타낸 지리학 관련 용어이고 ‘다문화’란 한 사회의 문화적 변화 양상을 의미하는 사회문화학 관련 용어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한국의 학계가 아닌 일반 언중은 이 ‘동남아’와 ‘다문화’라는 용어를 그 본래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을까. 만약 그랬다면 지금처럼 특정 언어·문화권의 사람들을 ‘동남아’나 ‘다문화’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 같다. 현재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이민자들의 출신 국가 중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 중 하나가 동남아시아다. 그래서인지 스스로 ‘한민족 순수 혈통’이라 자부하는 일부 한국인은 그 지역에서 온 이주민을 통틀어 ‘동남아’ 내지는 ‘다문화’라고 부르곤 한다. 이때의 ‘동남아’는 더 이상 지리적으로 아시아의 동남부를 뜻하는 지리학 용어가 아니다. 그보다는 동남아시아 출신의 이주민을 지칭하는 것으로 그 안에는 이들을 향한 편견이 내재해 있다. 그러한 점에서 ‘동남아’는 편견으로 점철된 꼬리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다문화’라는 용어는 또 어떠한가. 한국의 언중 사이에서 주고받는 ‘다문화’는 더 이상 학계에서 공유되는 사회문화학 용어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제 언중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한민족 순수 혈통’이라 할 수 없는 이주민을 구분하고자 하는 꼬리표로서의 기능만 할 뿐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평범한 말로 누군가에게 꼬리표를 붙이며 살아가고 있다. 문제는 그렇게 꼬리표가 붙은 대상자는 본인도 의도하지 않은 편견 속에 숨죽이며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꼬리표에 짓밟히고 있는 셈인데, 평범한 말로 꼬리표를 붙인 당사자들에게 이러한 지적을 하면 그들은 대부분 무심코 그랬다거나 농담으로 한 소리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로 생각 없는 말이나 농담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하는 동시에 언어에 사고가 반영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무심코 사용하는 말들 속에 편견이 내재해 있거나 그 속에서 잠재적인 편견이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배우가 한 시상식에서 “편견은 차별을 낳고, 차별은 폭력으로 이어진다”고 한 적 있다. 무심코 던진 말에는 모종의 편견이 내재해 있을 수 있고 그래서 농담이라 항변하는 말들도 누군가에게는 꼬리표가 될 수 있다. 그렇게 한번 붙은 꼬리표는 쉽게 떼기 어려우며 그 꼬리표로 차별받는 일상은 당사자에게 벗어날 수 없는 폭력 그 자체로 작용한다. 이렇게 농담처럼 무심코 던지는 말들이 사실은 편견 어린 차별이자 잠재적인 폭력임을 기억해야 한다.

[삶, 오디세이] 문예지 발간의 어려움

문예지는 발간하기도 어렵고 발간 이후 지속하기도 어렵다. 그 이유는 기획 능력과 특별한 사명감 그리고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다. 이 중에서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클 것이다. 문예지를 발간하는 데는 청탁한 원고에 대한 고료가 가장 많이 들어간다. 고료가 없으면 좋은 필자에게 원고를 청탁하지 못한다. 최근 폐간 또는 휴간에 들어간 문학사상과 시인수첩 같은 수준 높은 문예지도 여럿 있다. 과거에는 우리 문단을 대표하는 10대 문예지가 있었다. 10대 문예지들은 어느 곳이든 각자 개성 있는 문학적 담론을 생산해 냈다. 순수 문예지가 폐간 또는 휴간하는 것은 한국 문학 발전에 장애로 작용한다. 필자가 작가들에게 자주 듣는 질문이 포엠피플 발간 비용을 어떻게 마련하느냐는 것이다. 발간 비용은 우선 인천시인협회 회원들의 연회비에서 나온다. 인천시인협회는 가입할 때 심의위원회에서 작품 심의를 한다. 심의에 탈락하는 분이 많다. 그 대신 가입하면 시인으로 성장할 다양한 기회를 제공한다. 포엠피플은 시와 비평 전문지이므로 시 발표뿐만 아니라 평론가로부터 평가받을 기회를 수시로 준다. 회원 수가 많지 않고 연회비가 다른 단체보다는 조금 더 많다. 연회비로 한 호 발간이 가능하다. 포엠피플은 과거의 문학과 대화하고 현재의 문학을 성찰한다. 그리고 한국 문학의 미래를 짚어보는 담론을 다양한 특집을 통해 생산한다. 인천시인협회 회원들은 포엠피플과 동반 성장하고 있다. 다음으로 문화재단의 기금을 지원받는다. 포엠피플은 인천에서 발행하는 문예지이기 때문에 인천문화재단에 기금을 신청한다. 올해는 문화재단으로부터 동인지와 동일한 금액을 지원받았다. 문예지와 동인지는 분명 차이가 있다. 문예지는 수많은 외부 필자가 참여하고 동인지는 동인들만 참여한다. 따라서 발간 비용만 호당 2배 이상 차이가 난다. 동인지는 1년에 한 번 펴내는 연간지이고 포엠피플은 반년간지에서 계간지를 목표로 하는 전문 문예지다. 이에 부당함을 느낀 필자는 인천문화재단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처럼 호당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호당 지원이 어려우면 동인지와 차등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학판이 변하는데 문화재단이 변하지 않으면 문학 발전은 어렵게 된다. 포엠피플을 지속적으로 발간할 수 있는 것은 선경산업으로부터 후원을 받기 때문이다. 선경산업은 호마다 포엠피플 표4에 광고를 싣는다. 문예지는 광고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광고로 후원해 주는 것이다. 이 기업은 우리뿐만 아니라 문학상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선경산업은 문학에 대한 후원이 선구적이고 적극적이다. 글로벌 시대 문학의 발전은 제조업 분야의 상품 판매에 영향을 미친다. 예술과 문학의 부가가치가 상품에 얹히기 때문이다. 정부와 기업의 인식 전환이 시급하다. 포엠피플은 10대 문예지를 목표로 한다. 인천시인협회가 시와 비평 전문지 포엠피플을 발간할 수 있는 것은 회원과 문화재단 기금 그리고 선경산업의 후원 때문이다. 순수 문예지인 포엠피플을 지속적으로 발간하려면 문화재단의 현실성 있는 기금 지원이 절실하다. 작가들은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하며 성장한다. 한강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해 K-문학을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제2의 한강을 찾기 위해 포엠피플은 매년 신인을 탄생시키며 문학의 저변을 확장하고 있다. 한 권의 좋은 문예지가 작가들에게 주는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이것이 어려움을 딛고 포엠피플을 발간하는 이유다.

[삶, 오디세이] 노년의 아름다움

지금 대한민국은 노인 천만의 시대, 초고령사회를 맞이하고 있다. 노인을 책임지고 부양해야 하는 젊은 세대의 짐도 점점 더 커지지만 사실 노인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어른들의 삶의 자세는 더 중요하게 됐다. 어떻게 하면 노년의 삶이 풍요롭고 행복할 수 있을까. ‘겪어보면 안다’는 김홍신 작가의 글이다. ‘굶어보면 안다. 밥이 하늘인걸/목마름에 지쳐보면 안다. 물이 생명인걸/일이 없어 놀아보면 안다. 일터가 낙원인걸/아파보면 안다. 건강이 엄청 큰 재산인걸/잃은 뒤에 안다. 그것이 참 소중한걸/이별하면 안다. 그이가 천사인걸/지나보면 안다. 고통이 추억인걸/불행해지면 안다. 아주 적은 게 행복인걸/죽음이 닥치면 안다. 내가 세상의 주인인걸.’ 젊을 땐 몰랐는데 나이 들어 노년이 돼 보면 인생이 얼마나 축복인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이 아름다운 것처럼 인생도 어린아이의 시절도, 푸른 청년의 시절도, 빛나는 중년의 시절도, 황금빛 노년의 시간은 모두 다 아름답고 풍요롭다. 생각해 보면 봄만 좋고 여름은 나쁜 것이 아니다. 여름만 좋고 가을은 나쁜 것이 아니다. 가을만 좋고 겨울은 나쁜 것이 아니다. 봄은 봄이라서 좋고, 여름은 여름이라서 좋고, 가을은 가을이라서 좋고, 겨울은 겨울이라서 좋다. 물론 봄에는 봄의 어려움과 극복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중국에서 불어오는 황사와 코감기와 꽃샘추위를 극복해야 봄의 따뜻한 바람과 예쁜 꽃을 맞이할 수 있다. 여름에는 여름에 극복해야 할 열대야 무더위와 장마와 홍수와 태풍이 있다. 가을에는 가을에 극복해야 할 가을걷이의 분주함과 겨울을 준비하는 수고가 있다. 겨울에는 겨울에 극복해야 할 추위, 눈길의 미끄러움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극복해야 할 문제와 환경을 주셨다. 그리고 그 너머에 풍요롭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해주신다. 구약성경의 시편 71편 9절에는 이런 기도가 있다.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 인생은 누구에게나 늙고 약해질 때가 있다. 그때 늙고 약한 나를 붙잡아 줄 손길이 필요하다. 노년이 되면 자신을 지탱하고 방어할 힘이 약해진다. 특히 경제적으로 어렵고 몸이 아프다. 그때 노인을 도울 분이 있어야 한다. 나이보다 젊게 사는 사람들이 자신을 과신하며 내뱉는 말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인데 92세 어르신 목사님께서 농담 삼아 말씀하시기를 ‘그 말은 거짓말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안 아픈 곳이 없다’고 하셔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몸이 개운하고 힘이 생기는 것도 젊었을 때인가 보다. 그래서 기도하는 노년이 돼야 한다. 시편의 기도가 ‘늙은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인데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은 한 번도 버리지 않으셨고, 떠나지 않으셨다. 다만 젊을 때 바쁘다는 핑계로, 세상에 할 일이 많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멀리했던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래서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나를 떠나지 마소서’라는 기도는 자기 고백과 결심이다. 세상의 일들에서 조금은 자유로운 노년에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세상을 향한 문을 조금씩 닫고 하나님께로 문을 활짝 열어 가시길 바란다.

[삶, 오디세이] 그 자리의 자신

어느새 올해도 11월에 접어들며 연말에 다가서고 있다. 올해도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각국에 여러 일이 벌어졌고 현재진행형인 경우도 상당하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해마다 듣는 뉴스이지만 경제와 물가, 취업 문제가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 이러한 모습 속에서 무엇보다 염려되는 것은 사람들이 점차 현실을 떠난 곳에서 일상을 찾고 경제활동을 하려는 모습이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요새는 정말 누구나 주식과 코인 등의 투자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식당이나 카페에서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상당수가 투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한쪽에서는 좋은 투자처라며 흥분돼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쪽에서는 떨어졌네, 잃었네 하며 속상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들이 기대하는 것과 같은 밝은 투자는 거의 없는 듯하다. 이러한 모습이 일반화된 이유를 생각해보면 현실에서의 모습과 전망에 큰 희망과 기대를 가질 수 없다는 생각에 의해서다. 매일같이 어두운 소식의 뉴스가 나오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서는 자신을 뺀 모든 사람이 부유하게 사는 듯한 괴리감을 준다. ‘오징어게임’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저마다의 이유로 삶을 포기했던 사람들이 잔혹한 게임을 하며 일확천금해 다시 살아가려는 희망을 갖는 내용의 드라마다. 주인공 기훈(이정재)이 그 게임장에서 쌍문동에서 가장 똑똑한 상우(박해수)를 만나 이런 곳에 올 사람이 아니라며 놀라는 장면이 있다. 이때 상우는 ‘선물’에 투자했다가 부도가 났다고 하지만 기훈은 선물이 진짜 ‘선물’인 줄 아는 웃기며 슬픈 내용이 있다. 어느덧 오징어게임이 나온 지 3년이나 지났으나 상우를 통해 전하고자 한 모습은 어느새 잊혀지고 오히려 더 많은 ‘상우’가 생겨 나고 있는 듯한 지금이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라도 지금 자신이 있는 그곳에서 하루를 살아간다. 그리고 그 하루 동안 그곳에서 많은 사람과 여러 인연을 쌓고, 그 인연 속에서 다시금 내일을 준비하며 하루를 마친다. 이러한 삶 속에서 ‘그곳’이라는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설령 현실이 힘들고 많은 것에 의해 어려움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결국 우리는 그 자리의 자신으로 살아야만 한다. 그래서 상우도 현실을 떠난 큰 꿈을 꿨으나 돌아온 곳은 지독하게 현실을 직시한 그 자리였다. ‘땅에 넘어진 자, 그 땅을 짚고 일어나라’는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가르침이 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땅에 서서 살아간다. 그 땅은 자신의 지금이고 나아갈 토대다. 누구라도 지금보다 나은 자신을 바란다.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지금 그 자리의 자신을 명확하게 바라보고, 그 자신이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움츠러드는 추운 계절이지만 웅크린 가슴을 펴고 문 밖의 공기를 한 아름 마시며 오늘 그 자리의 자신으로 이 하루의 한 걸음을 내딛자.

[삶, 오디세이] 프로답게 산다는 것은

필자는 개인적으로 미국에 대해 별다른 적대심도 없고 그렇다고 크게 선호하는 마음도 없지만 미국의 대선 때만 되면 한 번쯤 미국에서 살 때를 떠올리며 추억에 젖곤 한다. 한국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대학원 펠로십이라는 이름으로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한 사립대학을 다닐 때의 이야기다. 평소 전공 분야뿐만 아니라 영화평론에도 관여하고 있던 터라 그날도 영화 리뷰 하나를 쓰기 위해 도서관 인문학 열람실을 찾았다. 참고로 그 대학 도서관의 경우 주중에는 24시간 개방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늦은 밤이나 새벽 시간대에도 책을 읽고 있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한국 대학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주중 24시간 개방이라는 학교 도서관 정책에 한번 놀라고, 그 늦은 시각에도 학교 도서관에서 책에 집중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또 한번 놀랐던 순간이다. 그렇게 인문학 서적이 진열된 장서실 여기저기를 대중없이 훑어보다가 우연히 정치학 코너에서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놈 촘스키. 촘스키는 필자가 속한 언어학 분야에서 변형생성문법 이론을 창시해 미국이 좁다 하고 전 세계 언어학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세계적인 언어학자다. 그런 언어학자의 이름을 대학 도서관의 정치학 코너에서 발견하게 되리라고는 개인적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그 순간에는 잠시 동명이인일 것이라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 책의 저자 소개란에는 언어학자 촘스키의 사진이 붙어 있었고 그걸 확인하는 순간 느껴졌던 한 인간에 대한 경이로운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사실 촘스키와 관련해 놀랐던 적은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가 교수로 소속된 학교가 흔히 MIT로 불리는 매사추세츠공대라는 것을 알았을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의 과학기술 연구 중심의 대학들은 언어학과 같은 순수 인문학을 대학 글쓰기나 외국인 유학생 대상의 한국어 등의 교양 과목 운영을 위한 조건 정도로만 여길 뿐 그것을 핵심 연구 분야로 두고 명성을 떨치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MIT가 테크닉 중심의 기술인 양산이 아닌 인간을 생각하는 철학적 공학인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됐다는 것은 익히 알고는 있었다. 그렇다고 언어학이라는 순수 인문학이 공대를 기반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필자로서는 감히 쉽게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만큼 놀라움이 컸던 것이다. 언젠가부터 한국에서는 ‘문송하다’는 자조 섞인 신조어가 대학생들과 채용가를 중심으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 정도로 인문학의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 상황을 생각해 보면 학문의 경계를 넘어 학제적 연구가 자유롭게 이뤄지는 미국 대학의 개방성에 눈길이 간다. 이뿐만 아니라 연구자든 누구든 스스로를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만 정의할 필요가 없는 미국식 인재상 또한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한국은 불과 10년 전만 해도 한 사람이 여러 전문 분야에 걸쳐 이른바 멀티태스킹을 할 경우 어느 영역에서도 전문성을 갖지 못하는 한량처럼 정의하려 들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한국의 지배적 정서상 MIT나 촘스키 같은 멀티플레이란 한국에서 태생적으로 기대하기 힘든 구조인 것이 명확하다. 하지만 반가운 것은 그러한 한국의 경직된 사회 분위기가 지금의 MZ세대를 중심으로 크게 변하고 있는 점이다. 비록 구직 후 잦은 이직이 문제처럼 비치기도 하지만 그것은 한 개인이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이리라. 지금 여기에서 프로답게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는 반드시 프로여야만 하는가.

[삶, 오디세이] 우리가 원하던 문화 강국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며 문화 강국을 꿈꿨다. 이제 김구의 꿈이 이뤄졌다. 한국의 문화는 케이팝, K-드라마, K-뷰티, K-푸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한강이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돼 K-문학이 세계의 변방에서 중심이 됐다. 한림원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을 선보였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그동안 국제 사회에 부정적으로 비쳤던 한국의 역사적 트라우마가 뛰어난 문학작품이 돼 빛을 발한 것이다. 한강의 노벨 문학상이 갖는 의미는 한국의 문화가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순수문화인 문학에서도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 쾌거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를 지나 분단 시대를 맞이했고 6·25전쟁을 겪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군사독재를 유지하다가 민주화를 이뤄냈다. 따라서 외국인의 시각에서 보면 한국은 부정적인 면이 많은 나라다. 권위주의 시대 우리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다. 가수가 음반을 낼 때 건전가요를 넣어야 했다. 작가들도 글을 쓸 때 자기 검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예술과 문학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발전하기 어렵다. 한국은 경제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다. 민주화가 되자 예술인과 작가들은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했다. 이 때문에 국제적인 가수가 탄생했고 한류를 주도할 드라마가 만들어졌다. 드디어 한국의 문화는 글로벌 시대 세계인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게 됐다. 문화의 힘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긍지와 자부심을 준다. 선진국들은 자신의 나라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가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우리를 대표하는 작가가 그동안은 없었다. 이제 한강이 그 길을 열었으니 우리의 K-문학도 세계 중심이 됐다. 문학의 본질을 놓고 보면 노벨 문학상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노벨 문학상이 갖는 의미는 아주 크다. 세계화 시대 국제 시장에서 한국의 제조업 상품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예술과 문화라는 부가가치가 제조업 상품에 얹어져야 한다. 수준 높은 예술과 문화가 없으면 싼 가격으로 경쟁할 수밖에 없다. 제조업을 하는 분들은 예술과 문학에 종사하는 문화인들로부터 사실 큰 도움을 받고 있다. 국제 시장에서 소비자가 상품을 구매할 때 그 나라의 문화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이유로 예술과 문화는 제조업 상품을 판매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실질적 상황이 이런데도 한국에서 예술과 문학을 한다는 것은 늘 고통을 동반한다. 국가의 지원은 약하고 기업의 후원은 찾기 어렵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문화 강국이 되려면 정치인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하거나 지원금을 삭감하는 일이 더는 반복되면 안 된다. 필자가 발행인으로 있는 ‘포엠피플’도 재정난이 심각하다. 매번 발간 위기에 놓여 전전긍긍한다. 우리나라에서 작가로 산다는 것은 소수를 빼고는 작품 활동으로 수익을 내지 못한다. 제2, 제3의 한강이 나오기 위해 문학에 대한 지원 대책을 다양하게 만들어야 한다. 국가 예산이 700조원 가까이 되는 나라에서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의 경우 2024년 총예산 지원이 발간지원 6억원, 발표지원 6억원이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상황이 이런데도 한강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한강의 기적’이다.

[삶, 오디세이] 커피 한잔에 담긴 ‘행복’

외국인들이 한국에 여행을 오면 두 번 놀라는 일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수많은 커피숍이 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그 커피숍들이 한결같이 예쁘기 때문이란다. 맞는 말이다. 어느덧 대한민국은 미국, 독일, 브라질…. 세계 15위 커피 소비국이 됐다. 현대인들의 삶 깊은 곳에는 커피의 향이 스며 있다. 아침이면 잘 내린 커피 한잔, 점심이면 식후 커피 한잔, 친구를 만나도 커피 한잔을 빼놓을 수 없다. 점심시간에 길거리에 나가 보면 젊은이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손에 커피 하나를 손에 들고 길을 걷는 것을 볼 수 있다. 직장 생활의 피곤과 힘든 것을 커피를 마시면서 힘을 얻어 오후 업무를 준비하는 것이다. 올여름에 필자도 작정하고 거금을 들여 커피 공부를 했다. 수원에서 세종을 열한 번 오가며 커피의 대가를 찾아가 커피의 생성 및 맛과 향을 감별하는 것에서부터 커피를 추출하는 것까지의 과정을 열심히 공부했다. 필자가 커피를 공부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맛있는 커피가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은 어떤 커피는 맛있는 커피라고 말하고 어떤 커피는 맛없는 커피라고 말하는가. 그 기준은 무엇이고 누가 기준을 만드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컸다. 필자에게 커피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은 첫 번째 시간에 “커피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했다. 필자는 “커피는 행복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아주 훌륭한 대답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맛에는 사회성이 있다’라는 말로 많은 궁금증에 답을 주셨다. 어머니의 요리 솜씨가 세계 최고는 아니지만 어머니가 끓여 주는 된장국을 그리워하고 그 어머니의 된장국을 맛있게 먹는 것은 어려서부터 길들여진 맛의 사회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르신들은 멋진 커피숍의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잔보다 종이컵에 따뜻한 물을 담아 타 마시는 맥심 커피가 더 맛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커피는 개인 취향이 강한 기호식품이란다. 커피를 배우고 난 다음 교인 13명에게 커피를 가르쳐드리고 바리스타 자격증을 갖게 해 드렸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 오전에 만나 커피 공부를 계속하던 중 가을에 교회 앞마당에 거리 카페를 열고 지나가는 분들에게 맛있는 커피를 나누고 있다. 커피 한잔을 놓고 마주 앉아 수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자식 이야기, 동네 이야기, 나라와 정치 이야기, 북한의 오물풍선 성토와 노후의 삶 이야기….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지면서 대화는 누구 하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거나 거스르지 않아 좋다. 커피가 주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서 누군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아무도 없다. 목사인 필자에게 뭔가를 듣고 싶은 기대가 있지만 필자는 열심히 듣다가 필요하면 또 커피를 준비해 지나가는 한 분에게 맛있는 커피 드시고 가라고 권할 뿐 말을 줄인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커피를 대하는 자세는 첫째는 행복하기 위해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커피를 준비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먹고살 수 있는 양식뿐 아니라 과일을 주신 것은 더 행복하라고 하시는 뜻이라고 믿는다. 밥만 먹으면 살 수 있고 일할 수 있는데 식후에 후식으로 과일을 먹는 것은 배고파 먹는 것이 아니다. 배부르기 위해 먹는 것은 양식이지만 행복하기 위해 먹는 것이 과일이다. 필자는 유난히 과일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은 너무 시다며 못 먹겠다는 자두도 사과도 필자는 참 맛있게 먹는다. 그래서 아내에게 종종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서 맛없는 과일이 어딨어.’ 커피는 과일 열매다. 그 과일의 씨앗을 농사해서 잘 볶아 정성스럽게 준비해 행복하기 위해 마시는 것이 커피다. 그리고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청결’이다. 깨끗하게 위생적으로 관리하고 만들어야 한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커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커피 기계를 다루는 과정에서 맡은 사람들이 청결에 집중하지 않으면 사람을 속이는 일이 된다. 커피 한잔 때문에 몸이 상하거나 병이 생기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겉으로는 실컷 웃으면서 행복하게 커피를 마시는데 그 커피를 담은 손이 깨끗하지 않다면 불행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와 내 곁에 있는 사람들, 이웃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삶, 오디세이] 한 사람의 언어라는 세계

리가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말과 순간순간 드는 일련의 생각들은 마치 하나의 신경처럼 연결돼 있다. 듣거나 읽은 것을 머릿속으로 상상하기도 하고, 스스로 떠올린 단편적인 생각의 조각들을 나름대로의 체계로 엮어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도 하니 말이다. 그런 걸 보면 인간의 언어와 사고야말로 일심동체인 듯하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고가 언어를 통제하는 것일까. 이와 관련한 학술적 논의 중 하나가 바로 사피어-워프 가설이다. 이는 언어적 상대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그것을 지지하는 관점에는 인간의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강성론적 입장과 언어가 사고에 크든 작든 영향을 준다는 중도적 입장이 공존한다. 언어와 사고에 관한 이러한 학술적 논의는 사실 정교하게 검증하기 쉽지 않아 여전히 언어학적, 심리학적 난제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언어와 사고는 명백히 긴밀한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캐나다의 드니 빌뇌브 감독은 ‘컨택트’(원제 ‘Arrival’·2017년)라는 작품에서 풍부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이 영화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비행물체 안의 외계 생명체와 인간이 소통하는 과정을 핵심 서사로 삼는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은 저명한 언어학자와 과학자를 섭외해 외계 생명체에게 인간의 언어를 가르치는 방식으로 외계의 도형 문자 패턴을 발견하고 그것을 해독하며 서로 소통한다. 그러던 중 지구에 온 목적을 묻는 질문에 외계 생명체가 ‘무기를 주다’로 답하자 각국 정상은 일대 혼란에 빠진 채 전투태세에 돌입한다. 다행스럽게도 돌이킬 수 없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이르렀을 때 한 언어학자에 의해 외계 생명체가 표현한 ‘무기’란 ‘선물’을 의미한 것이란 사실이 밝혀진다. 가상의 스토리로 엮어낸 영화이지만 기본적으로 이러한 갈등은 사람들이 인간의 언어 사용 방식대로 외계 생명체의 언어를 이해하려 들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과연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한다는 사피어-워프 가설의 방증처럼 보이기도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러한 언어 사용으로 발생하는 오해와 불통의 문제는 일상생활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누군가가 제습기가 필요하다고 할 때 대부분의 사람은 습기를 제거해 주는 기계를 떠올리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습기를 흡수해주는 제습제를 떠올리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방향을 가르쳐줄 때 어떤 사람들은 먼 곳을 가리키면서 ‘저쪽’이 아니라 ‘이쪽’으로 안내하기도 하며, 어떤 이들은 다르다는 말을 틀리다로 인식하기도 하니 말이다. 그것은 대부분 가벼운 해프닝 정도로 생각할 수 있지만 때로는 극단적인 갈등과 그로 인한 관계의 단절을 야기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가 같은 언어권이라도 각자 생활하는 상황과 맥락은 다르며, 그에 따라 자기만의 사고 체계 안에서 구축된 자신만의 세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 서로에게 외계 생명체와도 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과연 누군가의 말처럼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한 세계를 만나는 것과 다름없다. 그 세계를 만날 때, 그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 세계의 언어 체계와 사고 방식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필수적이다. 지금 내 주변의 사람들은 과연 어떤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일까.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어떤 세계의 사람일까.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면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세계 안으로 기꺼이 뛰어들어야 한다.

[삶, 오디세이] 오늘은 내일의 선물

‘원각도량하처(圓覺道場何處),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是).’ 해인사 법보전의 주련에 쓰여 있는 가르침으로 ‘깨달음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가. 지금 이 순간 삶과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의미다. 불교를 수행하며 추구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어떤 형상이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순간 자신으로서 참되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라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것을 원하고, 어떠한 존재가 되고 싶거나 무언가를 갖고자 한다. 이는 어쩌면 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중요한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처럼 원하고 지니며 살아가지만 삶은 언제나 갈증을 느끼고 지금도 다른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 끊임없이 이렇게 살아가지만 이 순간이 지나면 그것을 뒤로하고 또 다른 것에 갈증을 느끼는 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다. 법보전의 주련은 이러한 인간의 삶 속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가르침이다.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깨달음일지언정 그것을 갖거나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 순간의 마음이 그것을 원하는 것뿐이고, 그것을 얻게 됐더라도 다른 순간이 되면 다른 것을 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일지라도 만약 갖거나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누군가에게 사라질 수도 있고 뺏길 수도 있는 것이 돼 버린다. 그러나 오늘 이 순간을 우리가 이처럼 살아 있고 살아 간다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고 기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살아 있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오늘 하루를 나로서 무언가를 해 나갈 수 있고 다시금 나를 만날 수 있는 기회다.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오늘 또다시 기회를 맞이하고 있지만 그 기회가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당연히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살아 있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러나 살아 있으면서 무엇도 하지 않는다면 그 살아 있다(生)는 생생(生生)함을 상실하게 된다. 불교에서 모든 존재는 업(業)의 힘에 의해 끌려 산다고 한다. 그러나 인과(因果)를 통찰해 자신의 주변에 인연이 일어나는 것을 깨달은 연기법(緣起法)에 의해 삶을 이끌어갈 수 있다고 한다. 즉, 우리의 오늘을 당연한 하루로 여기고 그저 그렇게 업과 시간의 힘에 끌려 보내게 된다면 지나간 어제와 같이 귀중한 이 순간이 허망하게 사라져 버린다. 오늘은 우리 모두가 태어나 처음 맞이하는 하루다. 이 하루의 시간에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일을 해보고, 사랑하는 인연과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면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우리는 분명 오늘보다 행복해질 것이다.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바라며 살아간다. 행복은 어느 날 문득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 동안 자신이 만든 삶이라는 상자에 행복을 담아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자신에게 보내는 것이다. 우리의 오늘은 내일의 선물이다. 그 선물상자에 자신이 바라는 행복을 담아 로켓 배송을 보내주자.

[삶, 오디세이] 인공지능 시대의 창작

챗GPT는 오픈AI가 개발한 프로토타입 대화형 인공지능 챗봇이다. 챗GPT는 발전을 거듭해 2023년에는 챗GPT-4 터보가 발표됐고 2024년 5월에는 인간처럼 대화가 가능한 챗GPT-4o가 공개됐다. 인공지능은 교육, 산업, 군사, 사법, 예술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끼치지 않는 곳이 없다. 문단도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제 챗GPT가 시를 쓴다. 챗GPT가 요구하는 입력값대로 시를 쓰게 되자 문단에 비상이 걸렸다. 작년에는 다수의 문예지가 챗GPT 특집을 다뤘고 올해는 급기야 문학상 공모에 ‘GPT를 활용한 작품이라고 판단될 경우 수상을 취소한다’는 유의 사항이 붙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챗GPT를 활용했다고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이런 유의 사항은 챗GPT는 동일한 입력값에도 모두 다른 시를 생산해 내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다. 문단에 챗GPT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됐던 2023년 ‘포엠피플’ 여름호 특집으로 필자는 ‘챗GPT, 시인으로서의 (불)가능성―한국의 명시 7선과 챗GPT의 명시 7선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챗GPT에 동일한 한국 명시 제목과 주제를 입력값으로 시를 쓰게 했다. 그중 챗GPT가 쓴 명시 1편을 소개한다. “이별의 정한에 서로를 바라보며/슬픔에 잠긴 눈빛으로 말없이 손을 흔들며/길을 나선 그대와 나/희미해진 뒷모습을 바라보며 떨리는 가슴을 감추지 못하고//진달래꽃이 피는 곳마다/서로를 지키며 함께한 추억이 번져/그리움과 아픔이 한껏 더해져/이젠 서로의 곁에서 멀어져 가고 있음을 알면서도//진달래꽃이 지는 그날까지/이별의 정한을 깨지 않으려 애쓰는 그대와 나/서로의 마음속에 간직한 추억으로/진달래꽃처럼 아름답게 떠나기를 바라며//진달래꽃이 지는 그날까지/서로의 마음을 잊지 않으리라.”(챗GPT∙‘진달래꽃’ 전문) 이 시는 챗GPT에 “진달래꽃이라는 제목으로 4연 12행의 시를 쓰시오. 주제는 이별의 정한입니다”를 입력값으로 줘 생산해냈다. 챗GPT는 필자가 요구한 4연은 지켰으나 12행은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데이터를 기반으로 학습한 시를 주제에 맞게 써냈다. 아직 챗GPT는 시적 착상과 사유를 발전시키는 데 미숙하다. 사유의 구체성과 시적 화자가 어떤 상태인지 확실치 않다. 그러나 챗GPT가 쓴 시는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주제에 충실했다. 문예 창작을 전공하는 학생이 필자에게 “교수님, 챗GPT가 저보다 시를 잘 쓰는 거 같아요”라고 강의 중에 말했다. 학생의 말은 인공지능 시대 창작자의 위기감을 압축한다고 본다. 현대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챗GPT를 활용해 업무의 효율을 높이듯이 작가들도 챗GPT를 활용할지 모른다. 챗GPT에 입력값을 주고 초고를 쓴 다음 끊임없이 퇴고한다면 초고와는 전혀 다른 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전자계산기를 도구화하듯이, 그리고 19세기 사진기의 등장으로 인상파가 출현했듯이 이제 인공지능 시대의 창작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삶, 오디세이] 허풍 심한 사람은 약점이 많다

2주 전에 강원도 정선의 한 컨벤션센터에서 전국적인 회의가 있어 다녀왔다. 2박3일간의 회의를 마치고 수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반도지형’을 처음으로 여행하게 됐다. 주차요금이 포함된 입장료를 내고 각자 칡주스를 하나씩 손에 들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소나무 산길을 한참 따라가다 보니 생각보다 먼 곳에 다다랐을 때 그 유명한 한반도지형이 신비롭게 눈앞에 펼쳐졌다. 순간 먼저 도착해 사진을 찍으면서 서로 작은 소리로 ‘와우~ 대박^^’ 감탄으로 더운 땀을 식히고 있는 분들이 있었다. 장난기 가득하게 두 손을 높이 들고 ‘대한민국~ 짜 자짝 짝짝’을 손벽치며 2002년 월드컵 구호를 외쳤더니 분위기가 썰렁하지 않게 먼저 온 몇 사람도 같이 호응해 대한민국을 외쳤다. 어디서 오셨느냐고 물었더니 천안에서 여행을 왔다고 한다. 나는 수원에서 왔다며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우리 둘을 사진 찍어 달라고 부탁하며 핸드폰을 내밀었더니 흔쾌히 사진을 찍어줬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나누고 그분들은 먼저 온 길로 되돌아가고 남아 사진 몇 장 더 찍고 동행인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런 말을 해 깜짝 놀랐다. “형님, 제가 형님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까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감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 자신감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에게서 표현되는 모습인데 저도 그런 모습을 닮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의도하지 않았던 일인데 나에게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 알게 됐다. 과장이나 허풍은 상대방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때가 더 많다. 모든 상황을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사람은 ‘자신감이 부족할 때 허풍을 떤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과도하게 허풍을 떨 때 그에게 뭔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 것은 단지 모르는 척 할 뿐이다. 내가 과장하고 허풍을 떨 때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굳게 잠그거나 눈살을 찌푸리며 외면한다는 사실이다. 매일 홍수처럼 쏟아지는 매스컴의 정치 뉴스를 보면 과장과 허풍이 하늘을 찌를듯한 국회의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논리에도 맞지 않고 예의에도 어긋나며 도대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목적도 불분명하다. 단지 진영논리에 갇혀 소리를 치고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과장과 허풍에 국민들은 이미 고개를 돌리고 실망하고 말았다. 추석 때 문경의 한 리조트에서 가족들이 모여 명절을 보냈다. 대구와 대전에 있는 자녀들이 같이 모일 수 있는 중간 지점이고 아버지께서 10년 동안 광부로 사셨던 문경에서 모이면 좋겠다고 해서 문경에 살고 있는 동생의 도움으로 좋은 장소에서 머무를 수 있었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문경에는 문경새재, 문경오미자, 문경약돌고기, 문경사과로 지역 먹거리와 관광상품이 특화돼 있었다. 문경새재는 전국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지라고 하고 문경약돌 삼겹살 식당도 여러 곳 있었다. 높은 가을 하늘아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레일바이크를 타며 허풍스럽지 않은 작은 도시의 최적화한 지역 상품화와 개발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수원에도 10월에 화성문화제와 수원성을 중심으로 많은 축제가 열린다. 과장과 허풍의 거품을 제거하고 내실 있고 수원스러운 행사로 시민들과 수원을 찾는 분들이 고개를 끄떡이며 만족했으면 좋겠다. 수원특례시는 정조대왕의 효와 수원갈비뿐 아니라 깨끗한 화장실문화로 이미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문화의 도시가 돼 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가꾸고 다듬으면 될 일이지 타 도시를 흉내 낼 필요는 전혀 없다. 지금 이대로의 모습에 자신감을 조금 더하고 겸손을 겸비하면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내가 될 수 있다.

[삶, 오디세이] 불교적 하루, 연기적 삶

‘중도, 깨달음’ 등 불교를 대표하는 많은 표현이 있지만 불교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우리나라의 불교는 수행과 더불어 다양한 사상과 기복적 요소까지 더해지며 더욱 복잡해졌다. 그렇기에 이러한 불교에 대한 물음에 가장 적절한 답은 아마 부처님이 깨달으신 ‘법(法)’일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깨달으신 그 법이란 무엇인가. 바로 ‘연기(緣起)’다. 연기법이라고도 하는데 ‘인과(因果)’에 대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이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가 생긴다’는 아주 간단한 법칙이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고 누구나 아는 것이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이 인과적 연기법에 대해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연기에는 ‘자업자득, 인과응보’라는 특별한 법칙이 있다. 자신이 지은 어떠한 원인은 업(業)이라는 결과가 돼 반드시 그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이 두 표현과 업은 우리나라에서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다 보니 불교를 염세주의나 허무주의로 보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법칙을 다르게 생각해 보면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이 원인이 돼 다음의 결과가 되는 것이기에 지금 좋은 일을 하면 그것이 원인이 돼 좋은 결과가 반드시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선물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업이 나쁜 것만이 아니라 선업과 악업의 두 종류가 있다고 하여 선업을 지으면 삼선도라는 좋은 곳에, 악업을 지으면 지옥을 포함한 삼악도에 태어난다고 한다. 즉, 선하고 올바른 삶을 산다면 그로 인해 좋은 결과가 생겨나 그 자신을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다. ‘불교적’이라는 것은 자신의 삶을 ‘연기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 나의 모습은 어제를 비롯한 지난날의 내가 보내온 원인의 과정이다. 만약 지금이 행복하고 좋다면 지난날의 자신에게 감사해야 하고 만약 피로하고 힘들다면 지난날의 자신을 반성하고 그것을 수정하도록 정진해야 한다. 그리고 내일에 대한 기대와 꿈이 있다면 오늘의 이 하루를 자신이 원하는 모습에 가깝게 살아야 한다. 그러면 이 하루가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나에게 선업이라는 법의 힘을 만들어 뜯어보지 않은 선물을 전해줄 것이다. ‘연기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볼 것이며, 법을 보는 사람은 연기를 볼 것이다’라는 불교의 가르침이 있다. 잘 사는 법, 행복해지는 법의 첫 번째는 연기적 삶을 사는 것이다. 내 곁의 인연들과 화합하고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해 그 모든 것들과 행복해지기 위한 오늘을 산다면 내일은 반드시 행복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적 삶의 실천이며 마음의 주인이 돼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다. 오늘은 어제의 이어짐이며 내일은 오늘의 이어짐이다. 이 시간 속에서 마음의 주인이 돼 자신의 하루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의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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