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화분 두 개를 선물로 받았다. 하나는 야생화이고 하나는 꽃집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인데 안타깝게도 적어준 꽃 이름을 모두 잃어버렸다. 야생화는 우리나라 고유의 토속어로 되어 있는데 한동안 그 이름을 기억하지 않고 내버려 둔 것은 내 사무실 창가를 차지하고 있기는 너무 예쁘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늦가을, 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늘색 빛깔의 들국화를 닮은 그야말로 내 눈을 끌기에는 너무 평범한 꽃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물도 주고 다듬어 주다 보니 가지에서 뻗어 나온 꽃망울이 계속 피어나기 시작했다. 한 번은 스프레이로 물을 뿌려주는데 창밖의 햇살이 투영되면서 꽃들이 보석처럼 빛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허리를 굽혀 자세히 보니 그 빛깔이 너무 아름다웠다. 문득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이 떠올랐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는 비로소 이 꽃에 대한 미안함으로 그 이름을 알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개망초’라는 것을 알았다. ‘망초’에 ‘개’자를 붙인 것. 이렇게 이름을 알게 된 것도 다행이지만 우리 야생화의 이름이 참 해학적으로 재미있게 지어졌음을 발견했다. 작은 땅 비싸리, 병아리풀, 요강꽃, 노루귀, 노루발풀, 홀아비 바람꽃, 개불알꽃, 며느리밥풀꽃, 여우오줌싸개…. 물론 그 이름마다 이야기가 있다. 쌀이 귀한 가난한 시절, 며느리의 밥그릇에 얼마나 아까운 밥알이었겠는가? 그래서 ‘며느리밥풀꽃’은 밥알처럼 깨끗하고 성글다. 이렇게 촌스럽고 해학적인 꽃 이름만큼 우리의 야생화는 하나같이 아름답고 청아하다. 물론 자세히 보아야 그렇고, 오래 보아야 그렇다. 한반도를 ‘금수강산’이라고 한 것도 이처럼 산천초목 모두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을 보는 눈도 그럴 것 같다. 어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처음 교실에서 아이들을 마주했을 때, 눈에 띄게 예쁜 녀석들도 있고 저렇게 못생겼을까 하는 녀석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보면 밉게 생긴 아이는 하나도 없어요. 다 예쁘지요. 참 신기합니다.” 그 교장선생님 이야기처럼 모든 아이들이 다 예뻐 보이려면 역시 나태주 시인의 ‘풀꽃’처럼 ‘오래 보아야’하고 ‘자세히 보아야’ 한다. 물론 그러자면 마음에 편견이나 선입관 없이 그야말로 인내심, 여유, 사랑의 눈이 필요할 것이다. 이처럼 사람을 대하는 데는 외국인에게도 마찬가지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종차별은 그 도가 심해서 자주 문제를 일으킨다. 심지어 미국에 사는 우리 교포들이 자주 흑인이나 히스패닉계로부터 표적이 되는 경우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외국인 백만명 시대에 들어섰고 그 가운데서도 다문화가정은 일찍이 보지 못했던 우리 사회의 한 기둥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들 결혼이주여성이 겪어야하는 인권문제는 사회적 갈등으로 번지고 있다. 특히 그 가정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소위 ‘왕따’를 당해 학업을 포기하는 일까지 번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아이도 우리가 함께 살아야할 대한민국 국민인데 그대로 방치하면 결국 ‘외로운 늑대’가 되고 마는 것이다. 풀꽃이 아름다운 것은 오래 보아야하고 자세히 보아서이다. 모든 꽃이 아름다운 것처럼 다문화 가정도 보듬을수록 아름답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오피니언
변평섭
2016-07-05 2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