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사드와 일본 속의 百濟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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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구마모토(熊本)현에 기구치(鞠智城)라는 성이 있다. 1400년 전 우리 백제에서 건너간 귀족이 세운 성으로 65ha에 이르는 이 넓은 성에는 인근 3개 성에 대한 무기, 병참, 예비병력을 담당했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성의 외곽 등은 요즘 들어 복원된 것.

특히 성 광장에 세워진 백제 귀족 억예복유(憶福留)의 축성 지휘를 하는 모습의 동상이 인상적이다.

 

그는 왜 일본에까지 와서 이와 같은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벌였을까? 일본은 왜 지금껏 당시의 병영 모습을 애써 보존하려는 것일까?

 

660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은 백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663년 8월 2만7천명의 군사를 파견했다. 훗날 천지(天智) 천황의 이름으로 등극한 중대형(中大兄) 왕자가 원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 일본 원군은 마침내 지금의 강경 포구와 부여(사비성) 사이의 금강을 타고 진격해 왔다.

 

하지만 강폭이 좁고, 강 양안에 매복해 있던 당나라와 신라군의 기습 공격에 일본은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하고 무참히 패배했다. 4백여 척의 전함이 불탔고 거의 모든 병력을 금강물에 빠뜨린 왜군 사령관은 겨우 백강(금강의 강경포구 구간의 별칭) 전투현장을 벗어나 일본으로 귀국했다. 이것이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동북아 3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인 ‘백강전투’.

 

한반도에서 벌어진 첫 국제전이기도 하고 중국대륙과 해양세력 일본 사이에 낀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이 빚은 미래의 전주곡이기도 했다.

 

어쨌든 ‘백강전투’에서 일본군이 패퇴할 때 이 전투에 참여했던 많은 백제 귀족들이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들은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이번에는 일본으로 쳐들어 올 것에 대해 숙의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들은 일본으로 올라오는 목줄과도 같은 구마모토의 기쿠치에 성을 쌓는 작업을 서둘렀고 그 총책임자는 백제에서 건너온 귀족이 맡았다. 그렇게 기쿠치성 안내문에 기록되어 있다.

 

기쿠치성 외에 일본 야마모토 조정은 인근의 오노성(大野城), 사가현의 기이성, 나가사키현의 가네다성을 축성했으니 일본이 당나라에 대해 큰 위협을 느낀 것 같다. 이 성을 돌아보노라면 멀리 적의 침입을 감시하는 팔각형의 대형 전망대, 당시 병사들이 숙소로 쓰던 막사 등이 1400년 전 가졌던 대륙에 대한 경계심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대륙세력(중국)과 해양세력(일본)이 맞부딪히는 한반도는 유럽의 폴란드처럼 강대국 틈새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계속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1274년과 1281년 몽고는 고려를 앞세워 일본을 침략했는데 마침 불어온 태풍 ‘가미카제(神風)’에 의해 좌절되고 만다. 이 침략전쟁으로 하여 몽고군의 병선(兵船)을 만드느라 우리 남부지방은 벌목으로 거의 모든 산들이 민둥산이 되었고 제주도는 몽고군의 말 목장이 되어 지금도 그 상처가 남아있다.

 

이후에도 계속된 임진왜란, 6ㆍ25와 국토분단 등 우리 한반도가 겪어야 할 지정학적 운명의 상처는 너무 가혹하게 전개되어 왔다.

 

요즘 사드 배치를 둘러싸고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 중국, 일본 등 주변국이 뜨겁다. 1400년 전에 ‘백강전투’에서 활 쏘는 전쟁으로 시작된 대륙과 해양세력의 충돌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활보다 무서운 핵무기가 등장한 것이 다를 뿐.

 

지정학적 ‘샌드위치 신세’를 벗어나려는 어떤 선택-역시 그럴만한 혜안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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