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TK 맹주, 충청도 맹주

최근 한 종편 방송이 대구 출신 유승민 새누리당 국회의원의 근황을 소개했다. 유의원이 원내대표에서 ‘축출된’ 지 100일만에 공개적인 강연을 시작으로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치인이 강연을 하고 유권자와 만나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굳이 유의원이 뉴스의 초점이 된 것은, 박근혜대통령과의 불편한 관계와 그가 100일만의 공개강의에서 TK 역할을 강조한 때문일 것 같다. 이 때문에 서울에서 20여명의 기자들이 몰려가 귀를 기울였고 현지 유권자들도 관심을 쏟았을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유의원은 ‘박정희대통령의 따님’을 대통령으로 만든 대구경북이 이제 그 다음도 준비를 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랜만에 기지개를 켜고 연단에 선 유의원의 발언으로서는 실망과 함께 또 지역감정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낳게 했다. 이날 이를 보도한 방송도 그동안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그리고 지금의 박근혜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대구경북, 소위 TK지역에서 5명의 대통령이 배출됐는데 유의원이 ‘대구가 개혁의 중심이 돼야한다’, ‘그 다음도 준비를 하자’고 한 것은 그가 ‘TK맹주’를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그러면서 방송은 노태우대통령 시절의 황태자로 불리던 박철언 전장관이 “TK는 박정희대통령을 비롯 30여년 이 나라 근대화의 주역이었으며 통일신라시대 이후 1000년 주도 세력이었다”고 한 말을 상기시켰다. 그러니까 유의원의 이날 강연 내용과 박철언 전장관의 발언이 겹쳐지면서 시청자로 하여금 벌써 김문수 전경기지사, 최경환 경제부총리 등 TK의 성골진골 쟁투가 벌어졌고 그것이 곧 다음 대권과 이어지는 것인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과연 그런가? 맹주는 TK만 있고 경기도, 충청도는 없는가? 충청도의 경우 지난번 이완구 전국무총리의 낙마로 전국이 요동칠 때 충청도 사람들에게는 ‘성완종으로 부터의 불법정치자금’ 여부를 떠나 애석해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가 충청도 맹주로 등장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관심을 모았는데 성완종의 유서 한 장에 총리자리가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동안 충청도 맹주로 자타가 인정하던 JP(김종필 전총리)가 만년 2인자로 머무르다 주저앉은터라 이완구 전총리에 대해서만은 정치기류를 잘 타서 대권에까지 이르렀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도 적지않았다. 이렇게 허탈해 하는 충청도 사람들에게 반기문 UN사무총장의 대권론 부상은 큰 관심사가 되고 있다. 반총장은 국내 정치에 대해 어떤 언급도 없었고 특별히 충청도 맹주로서의 욕심을 간접적으로도 표시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다크호스로서 떠오르고 있다. 문제는 TK니, 호남이니, 충청이니 하는 ‘지역적 등가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물에 의해 대권의 반열에 올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고 특정 지역의 맹주이기 때문에 대권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우리 정치발전을 되돌리는 것이다. 앞으로 시간이 다가오면서 이와같은 지역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자극적 발언이 잦아질텐데 참으로 우려스럽다. 일순간 지역민들을 단합시키는데는 지역감정을 건드리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유혹에서 벗어나는 용기있는 정치인이 필요하다. 그런 정치인의 용기를 보고싶다. ‘맹주’니 ‘대부’니 하는 전근대적 용어 자체가 사라져야 한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안면도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10월은 산이 좋다. 그러나 10월의 안면도(安眠島)는 산보다 더 아름답다. 만리포, 천리포에 등을 기대고 누워있는 안면도의 백사장은 가을 햇빛에 더욱 눈부시고 그 출렁이는 파도와 갈매기 떼는 너무 시적(詩的)이다. 특히 이맘때면 바로 옆 천리포의 수목원이 수줍게, 그러나 찬란하게 변색을 한다. 10여 년 전 세상을 떠난 미국인 민병갈(본명 C.F. Miller)씨가 평생을 가꾸어 온 이 수목원은 세계 60여 나라 식물 1천3백 종이 잘 가꾸어져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 수목원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는 1979년 한국인으로 귀화했고 평생 수집해온 이 수목원을 그가 사랑했던 한국에 남기고 2002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생전에 그토록 사랑했던 이곳 안면도는 그만큼 가을에 빛을 발한다. 천리포 수목원에서 좀 더 남쪽으로 내려오면 꽃지해수욕장이 있고 이 일대의 늘펀한 횟집들이 대하축제를 찾는 여행객들의 발길을 잡아 끈다. 안면도의 가장 숨겨진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적송(赤松) 휴양림! 어쩌면 저렇게 밋밋하고 고고하게 수많은 세월 억센 해풍을 거스르며 하늘을 향해 뻗어날 수 있었을까? 한 떼의 홍학이 모여 기도라도 하는 듯 그렇게 붉은 몸통의 노송들이 조용히 바람 소리를 내고 있다. 이 아름다운 안면도의 가을. 그러나 안면도의 아름다움 뒷면에는 냉혹한 사연들도 엮여있다. 원래 안면도는 섬이 아니었다. 1638년 인조 16년은 나라가 병자호란으로 쑥대밭이 된 지 채 1년밖에 안되었는데 조정에서는 안면도 북쪽 신온리와 남쪽 창기리를 뚫는 대운하 공사를 벌였다. 그래서 전국 각지에서 많은 백성이 노역에 동원되었다. 지금처럼 현대식 장비가 갖추어지지 않은 그 시절 이런 대공사를 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병자호란으로 국고가 바닥나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처럼 일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역시 텅 빈 국고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안면도 근해에는 고려 혹은 조선시대 선박이 심심찮게 인양되고 있다. 조선조의 절대적 재원인 호남의 곡물을 싣고 한양을 향하던 선박, 호남지방의 분청사기를 비롯 왕실 용품을 가득 실은 선박…. 이런 선박들이 안면도 근해의 험한 물살과 복잡한 지형에 갇혀 좌초되곤 했던 것. 원래 이곳 물살이 험하여 난행량(難行梁)이라 했는데 조운선(漕運船)의 사고가 너무 많아 지명을 안면도로 까지 고쳤고 안파사(安波寺)라는 절도 세웠지만, 그래도 사고는 줄지 않았다. 거기에다 호남지방에서 올라오던 배가 이곳에 이르러 일부러 조난을 당한 것처럼 허위 보고를 하고는 배에 실었던 곡물을 빼돌려 암거래하는 일도 자주 발생했다. 그래서 백성들 사이에서는 ‘안면도에서는 쌀이 썩는다’는 말이 나돌았다. 조정에서도 이런 정보를 입수하여 현지에 조사관을 파견해 보았지만 조사관들도 한통속이 되어 뇌물을 먹고 유야무야해버린 일이 잦았다는 것. 그렇게 조선은 부패가 만연했던 것이다. 정부 국고에 들어가야 할 세곡을 험한 바다가 삼키고, 멀쩡한 배도 조난당한 것처럼 도둑질하고, 관리들은 그 도둑을 등쳐먹고…. 엉망진창 세월호의 비리구조가 그때도 똑같았다. 그래서 안면도를 돌지 않고 빠르고 안전한 항로를 확보하고 조난을 막기 위해 운하를 만들고 또한 비리까지 없애겠다는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기강이 바로 잡혔을까? 애꿎게 안면도만 섬으로 만들지는 않았을까? 그 대답은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더욱 부패가 더해지고 나라까지 망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 심각한 우리의 부패상은 어떤 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어느 대학 화장실 낙서의 충격

서울 명문대학 화장실에 이런 낙서가 있었다고 한다. “공부 열심히 한다고 자랑하지 마. 머리 좋은 놈 못 당해. 머리 좋은 것 자랑하지 마. 운 좋은 놈 못 당해.” 그런데 어느 대학 화장실은 ‘운 좋은 놈’이 ‘탯줄 좋은 놈’으로 바뀌었고, 또 어느 대학은 그 밑에 한 줄 더 넣어 ‘어차피 치킨집 차릴텐데’라고 써있더라는 것이다. 운이 지배하고 그 보다 탯줄, 즉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젊은이들의 해학적 낙서가 왠지 가슴을 찌른다. 더욱이 그렇게 피터지게 경쟁하다 결국은 치킨집이나 차릴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의 취업현실은 우리 같은 기성세대가 그들에게 큰 죄를 지은 것만 같다. 우리 젊은이들이 부대끼며 느끼는 것은 심각한 불평등의 높은 장벽일 것이다. 그것은 당장 생존의 기본인 주택문제에서 출발한다. 자율형 사립고등학교의 합격자 발표는 12월 초, 그러니까 1개월도 더 남았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아직 합격자 발표도 안했는데 학교 근처의 아파트 전세는 벌써 바닥이 났다는 것이다. 합격에 자신을 갖고 있거나 경제력 있는 부모들이 학교 인근에 미리 집을 마련하는 것인데 이 때문에 전셋값도 오르고 전세난을 가중시키는 것은 물론이다. 자율형 사립고등학교 인근 아파트의 때 이른 전세전쟁은 경기도 일대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양상이다. 이미 서울의 전세물량 부족사태는 잘 알려진 사실. 그래서 서울 인근의 경기도에 신축 중인 아파트에 전세 예약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 완공되지도 않은 아파트에 달려가 웃돈을 치르고 예약을 하는 것. 이런 현상을 부추기는 투기꾼들은 2억7천만원의 전세가가 집이 완공되는 내년 봄에는 5천만원 이상 오를 것이라고 장담을 하고 있는 것이다. 5천만원, 웬만한 직장인의 연봉에 해당하는 돈이 잠깐 사이에 날아가는 이 심각한 불평등을 젊은 세대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이렇게 하여 우리의 가계부채는 1천100조에 이르렀는데 이는 작년보다 2.9% 증가한 것으로 그 속도가 위협적으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집 없는 직장인들 중에는 힘든 전세대란을 겪느니 차라리 저렴하고 작은 내 집을 장만하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가령 2억원 은행대출로 집을 마련했는데 주택시장 쇼크로 집값이 떨어질 경우 2억원 은행대출은 실제로 3억원의 대출을 받은 것 같은, 그래서 오히려 빚만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몇 년 전 미국에서 발생한 ‘모기지론’ 파행으로 미국뿐 아니라 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들었던 악몽이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고민 속에서도 서울의 최고급 부자 아파트 쓰레기장에서 1억원 수표뭉치가 나뒹군 사건이나 부산 해운대 펜트하우스가 3.3㎡당 7천만원의 아파트 분양가 역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는데도 청약자가 68대 1의 경쟁을 보였다는 뉴스에 다시 한 번 이 땅의 ‘불평등’의 심각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물론 이런 불평등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 고민이다. 그래서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프린스턴대학 앵거스 디턴박사는 이와 같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깊게 파고들어 수상의 영광을 안았는데 그 역시 “불평등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 이제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때 그는 불평등이 오히려 경제성장의 동력이 되고 있다고 주장하여 큰 주목을 받았었지만 이제는 그 수준을 넘었다는 심각한 경고다. 지금 우리는 이 경고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모두가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그 고민 속에 대한민국의 더 큰 미래가 달려있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휴전선 철조망으로 만든 가시관

철조망이 등장한 것은 1860년대 미국 중서부지방의 농장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농장주들은 야생동물로부터 가축과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해 이를 고안해 낸 것이다. 지금은 국경을 지키는 군사용으로 크게 활용하며 거기에 고압전류까지 흐르게 하는 등 무기역할까지 하고 있다. 최근 시리아 난민들이 유럽으로 가기 위해 헝가리로 몰려들자 헝가리 정부가 국경선을 철조망으로 신속히 봉쇄한 것이 대표적 예다. 그러나 철조망의 가장 상징적인 형태는 한반도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휴전선 155마일에 걸쳐 살벌하게 설치된 철조망은 우리 민족의 아픈 현대사를 말해 준다. DMZ를 가로지르는 이 철조망에서 남북 모든 것이 막혀 있고 지난여름 있었던 목함지뢰 폭발사고 등 전쟁의 문턱까지 치닫는 긴장이 지속되고 있다. 특히 북한은 휴전선 DMZ도 모자라 탈북자를 방지하기 위해 두만강 국경지대에 철조망을 설치하고 철조망 밑에는 구덩이까지 파놓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중국과의 국경을 이루는 압록강과 나진선봉특구에 까지도 철조망을 설치했다는 것. 그러면 그 엄청난 양의 철조망이 어떻게 조달됐을까? 주성하씨가 쓴 ‘서울에서 쓰는 북한 이야기’에 의하면 북한은 그것을 독일에서 수입해왔다는 것이다. 독일은 서독과 동독으로 갈라져 있었고 철조망이 양쪽을 갈라놓고 있었다.그러나 한 민족, 한 언어를 쓰는 그들은 마침내 통일이 되었고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으며 철조망은 철거되고 말았다. 그것을 북한이 가져다 여기저기 사용했으니 한 나라는 통일이 되어 철거를 하고, 다른 한 나라는 분단을 위해 그것을 가져다 사용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지난해 8월 우리나라를 방문한 프란시스코 교황은 종교에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감동을 주었고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 위안부 할머니들, 해직 근로자 등 소외받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주고 떠났다. 그래서 ‘8월의 크리스마스’가 되었다고 언론은 교황의 방한을 평가했었다. 각별한 한국 사랑을 표현한 교황에게 한국 천주교는 철조망을 잘라 만든 가시관을 기념으로 선물했다. 그 철조망은 우리의 남북을 가로막고 있는 휴전선에 설치된 것. 프란시스코 교황은 이 의미 깊은 ‘철조망 가시관’을 소중하게 로마로 가지고 가서 바티칸에 전시했다. 우리 민족의 비극적 역사를 상징하는 휴전선 철조망의 가시관은 이제 바티칸에서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를 바라는 세계인의 기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원래 기독교에서의 가시관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될 때 로마 병사들이 만들어 씌운, 말하자면 조롱과 고통의 상징이다. 그때 만들어진 가시나무는 가시가 길고 뾰족한 산딸나무의 일종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에 찔리면 붉은 피가 흐르고 고통이 뼛속까지 저며 온다. 유명한 루벤스의 그림 ‘가시관 쓴 예수’에서 그 모양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런 의미의 휴전선 철조망으로 엮은 가시관을 들고 한국을 떠나기 전 교황은 한반도의 통일에 대한 질문을 받고 자신은 그것에 대해 희망을 갖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왜 희망을 갖는지에 대해서 남북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한 민족이기 때문임을 분명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지난 10월 10일 노동당 70주년을 맞아 북한은 엄청난 돈을 퍼부어가며 군사 퍼레이드를 벌였다. 어떻게 21세기에 그런 광기(狂氣)가 연출될 수 있을까? 같은 민족, 같은 언어를 쓰는 북한 동포가 더없이 측은하게 생각되었다. 그 광기를 보면서, 우리 모두가 휴전선 철조망의 가시관을 쓰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日本 1만엔권 초상화는 말한다

일본은 2004년 그들의 화폐에 등장하는 초상화를 다 바꿨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의 인물, 그것도 1만엔권에 자리잡고 있는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의 초상화는 그대로 두고 있다.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후쿠자와 유기치를 그렇게 존경하는가. 1835년에 태어난 그는 일본의 유신, 일본의 개화기를 이끈 정신적 대부이다. 일찍이 미국과 유럽을 유람하고 돌아와 일본이 아시아에 머물지 말고 세계열강에 합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국민을 계몽시키는데 앞장섰다. 일본의 명문 게이오대학도 그의 손에 의해 세워졌고 이런 계몽사상을 담은 그의 책은 당시 3천만부 이상 팔리는 선풍을 일으켰다. 일본이 아시아를 탈피하기 위해 조선과 중국을 정복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그의 침략적 팽창주의는 오늘까지도 일본의 숨겨진 국가적 기간이 되고 있다. 그래서 화폐의 초상화가 다 바뀌어도 그의 초상화는 지금껏 1만엔권에 자리잡고 있다. 후쿠자와 유기치가 얼마나 우리나라를 멸시했는가는 그의 책과 언행에서 볼 수 있다. 이런 거지들을 상대로 싸우다가는 벼룩이 옮길 우려가 있다. 조선은 하루라도 빨리 멸망하는 쪽이 하늘의 뜻에 부합하는 길이다. 그러나 일본에 이와 같은 인물만 있는 건 아니다. 아주 멀리는 임진왜란 때 조선침략에 출전했던 장군 사야가가 있다. 막상 조선땅에 발을 디딘 사야가 장군은 우리 문화와 자연에 반하여 귀화를 결행, 조정으로부터 우록 김씨 성을 하사받고 이름도 김충선으로 개명했다. 그는 당시 왜군의 위력적인 무기 조총에 대한 기술을 우리에게 전수하는가 하면 임진왜란은 물론 북쪽 국경 수비에 10년간 힘쓰다 병자호란때에는 광주 쌍령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지금도 대구 달성 가창면에 그를 기리는 녹동서원(洞書院)이 있다. 일제식민시대에는 후세 다츠지 같은 변호사도 있다. 그는 검사직을 내던지고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변호하는데 힘썼다. 결국 그는 자기 나라 일본 사법당국에 의해 구속돼 실형을 살았고 변호사 자격도 정지당해야 했다. 우리 정부는 2004년 그의 유족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호소카 유지라고 하는 일본인은 15년이나 독도종합연구소장으로 독도가 한국땅임을 주장하며 2002년에는 우리나라로 귀화했다. 일본 국회의원(참의원) 중에도 야마모토 다로 의원은 일찍이 독도는 한국 영토라고 주장했고 지난 9월 18일 아베 정부의 안보법 강행에 자민당이 죽은 날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침묵의 항의를 벌이기도 했다. 우스키 게이코라는 할머니는 우리의 위안부 희생자들을 위해 여러 가지로 뒷바라지를 하며 요즘도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나눔의 집을 찾곤 한다. 뿐만아니라 그는 일본 총리가 직접 위안부 할머니 한분 한분 모두에게 찾아가 직접 사과를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는 지난 8월 서울을 방문해 서대문형무소 순국열사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일본식민지배를 사죄했다. 빌리브란트 전 독일총리가 유대인 집단수용소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연상되는 장면이었다. 특히 그는 다음달 서울대에서 특강을 하기로 하여 관심을 끌고 있다. 나쁜 DNA를 가진 일본인, 착한 DNA를 가진 일본인이 공존하는 일본!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전히 1만엔권 주인공은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던 후쿠자와 유기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그 뿌리가 지금도 도쿄 거리에서 반한(反韓) 시위에 목청을 높이고 있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세종시에서 벌어지는 금개구리 논쟁

리얼미터와 JTBC가 지난 5월에 조사한 전국 광역시ㆍ도의 주민만족도에서 세종시는 울산, 제주, 경북에 이어 4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8월에 와서는 단연 1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이와 같은 현상을 전문가들은 세종시의 기반시설이 속속 확충되고 있는 것이 큰 효과를 보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요즘 새로운 이슈가 세종시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정부청사 인근에 땅값을 빼고도 공사비만 1천641억원을 들여 조성되는 국내 최대의 중앙공원에 금개구리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것으로 공원 조성을 추진하는 당국과 주민들 사이에 벌어지는 논쟁이 그것이다. 지난 9월 15일 뜨거운 열기 속에 공청회까지 열었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멸종위기 2급인 금개구리가 발견된 것은 신도시가 건설되면서였고 환경단체와 시민단체 등이 이의 보호를 위해 끈질긴 요구를 한끝에 LH 측은 공원내의 생산의 대지라는 이름의 코너에 이들 금개구리를 보호 서식할 계획이었다. 말이 생산의 대지이지 전체 공원의 46%나 되는 면적이다. 바로 이것이 신도심에 사는 주민들의 불만이다. 금개구리 1마리당 2.7평의 면적 꼴인데 우리나라 주택 1인당 평균 면적의 절반에 가까운 땅을 금개구리에게 할애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주민들은 금개구리가 세종시에만 있는 것도 아니며 세계 어느 도시에도 공원 속에 논은 없다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LH 당국은 바로 그것이 세종시의 특성화라고 설득한다. 어느 도시나 있는 그런 붕어빵식 공원이 아니라 도심에 농지가 있어 오리를 풀어 기르는 등의 친환경 농사를 짓고 둠벙도 만들어 금개구리가 서식하며 메뚜기 잡기 등 환경 체험이 가능한 그야말로 빈 들을 대지의 예술로 승화시키자는 것. 어쩌면 이 말은 이충재 행복청장이 주장하는 행정도시를 뛰어넘어야 세종시가 산다는 것과 상통하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금개구리 논쟁으로 귀중한 시간과 예산을 낭비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마치 경부고속철도 2단계 사업을 시행할 때 금정산-천성산의 26.3km 터널을 뚫어야 하는데 뜻밖에 공사를 중단시킨 도롱뇽 파동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이때 지율스님은 청와대와 부산시청 등에서 다섯 차례나 단식투쟁을 하며 천성산 습지와 도롱뇽 보호를 주장했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도 마침내 노선 변경 검토를 지시하기에 이르렀고 공사는 중단됐다. 이 때문에 대법원의 판결이 있은 2006년 6월까지 3년 가까이 공사중단과 소송 등으로 막대한 예산이 사라졌고 고속철도 개통 역시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율스님은 찬사도 받았지만 대법원의 기각 판결이 나오고 공사가 재개되면서 비판도 많이 받아야 했다. 중요한 것은 터널이 뚫리고 고속열차가 달리는 지금, 천성산에 도롱뇽은 여전히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국책사업과 자연보호가 충돌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선택인가? 세종시의 금개구리 논쟁도 마찬가지. 분명한 것은 세종시가 계속 주민만족도 1위를 유지하고 세계적 명품 도시가 되려면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높은 빌딩, 광장, 공원이 아니라 차별화되고 특성화된 친환경 도시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특성화된 건물, 특성화된 시설(종교시설을 포함하여), 특성화된 공원, 더욱 고양된 문화적 정서 그래서 시민과의 대화가 잘 이루어져 금개구리가 헤엄치는 생산의 대지라는 구상이 행정도시를 뛰어넘는 세종시로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墟墓에 술잔 올리는 마음을 아는가

그 바닷가에는 시신없는 무덤이 많다. 얼마나 버려 두었는지 나무와 풀 뿌리가 엉켜있다. 밤이면 별들이 내려와 죽은 자의 내력을 캐묻지만 아무도 태풍에 휩쓸려간 이름들을 불러내진 못한다 임동윤 시인의 시 허묘(墟墓)의 일부다. 이름 그대로 허묘는 빈 무덤을 말한다. 바다가 보이는 어촌의 언덕에는 무덤 같지도 않은 버려진 초라한 무덤들이 자주 눈에 띈다. 고기잡이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또는 자식을 그리는 마음에서 이렇게 빈 무덤을 만들고 추석이나 생일같은 날, 송편도 몇 개 놓기도 하고 술잔을 따르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 가난한 어부의 피붙이들은 가슴에 슬픔의 만남을 이어가는 것이다. 올 추석절에도 어김없이 그 빈무덤들 앞에 간촐한 음식물이 놓여질 것이다. 비록 그것들이 까치나 짐승들의 먹이로 치워진다 해도. 어쨌든 우리는 세상을 떠난 이들과의 만남을 이런 식으로라도 이어가려고 한다. 만남-그 절절함이 지구상에서 한국인처럼 강한 민족은 없을 것이다. 특히 이런 감정이 추석 같은 명절에 잘 나타난다. 몇 년전 어느 외국인이 쓴 글이 생각난다. 그는 한국에 오랫동안 살면서 이처럼 시끄럽고 무질서한 사회를 이만큼이라도 지켜주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봤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해 추석날 고속도로를 달리다 공원묘지를 뒤덮은 인파를 발견했다. 무엇일까? 물론 성묘꾼이다. 그제서야 이 외국인은 한국인의 그 만남의 뜨거운 정, 바로 이것이 한국인을 지탱해주는 정신적 힘이라고 생각했다고. 그는 자신의 뿌리가 되어준 저 세상으로 떠난 분들에 대한 만남의 정이 대를 이어 계속되는 현장을 본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효(孝)라고 한다. 그래서 6.25 때 고향을 떠나 피난온 동포들이 임진각에서 제상을 차려 놓고 북쪽 산하를 향해 제사를 드리고 절을 올리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찡하다. 이와 같은 한국인의 독특한 효 문화를 나타내고 있는 추석절을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은 한 언론을 통해 유네스코에 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운동을 벌이자고 제안했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제안이다. 흔히 우리 추석을 서양의 추수감사절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엄밀히 그 내용은 다르다. 우리의 추석은 한 해 추수에 대한 감사의 뜻 말고도 만남의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 조상과의 만남, 가족은 물론 시집간 딸과의 만남, 그 만남을 위해 우리는 이날을 기다리지 않는가? 특히 올 추석은 다음 달에 있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더 없이 만남의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에게 큰 위안이 되어줄 것이다. 그래서 지난 9월9일자 경기일보 1면의 사진 한 장이 가슴을 찡하게 했다. 다음 달에 있을 남북이산가족상봉을 위해 적십자사를 찾은 80대 할머니가 죽기 전에 꿈에 그리던 큰 오빠를 만나고 싶다며 흐느껴 우는 모습이다. 그 주름진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이 너무나 절절한 그리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놓을 수 없는 복병도 있다. 오는 10월10일, 북한의 노동당 창건 70주년을 맞아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이루어지면 그 만남의 꿈은 무산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북한은 또 한번 만남을 위해 수많은 날들을 초조히 기다려온 동포의 가슴에 못질을 하는 것이다. 이런 걸 생각하면 정체된 고속도로에서 고향에 가기 위해 몇시간이고 불편을 겪는다해도 만날 사람이 있고 자신의 뿌리를 찾아 성묘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 만남의 추석절이 눈 앞에 다가왔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조세피난처의 고래사냥

러시아 근대화를 이끈 표트르 황제는 귀족들의 긴 수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다 1703년 수염세(稅)를 공표했다. 수염이 긴 사람에게 세금을 걷는 것이었는데 큰 효과를 봤다. 권력자가 휘두르는 세금은 이처럼 수염세 말고도 얼마든지 이름을 붙여 수탈하는 것이 과거 역사였다. 결국 미국의 독립전쟁도 영국이 인지세라는 멋대로 붙여진 세금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된 것이고 이때 생겨난 말이 대표가 없으면 과세도 없다, 즉 세금은 국민의 대표에 의해서만 결정한다는 것. 이처럼 세금은 어쩔 수 없이 민주주의 제도의 핵심과제로 진화해왔다.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암살되고서 미망인이 된 재클린여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을 하여 전세계에 화제를 뿌렸다. 특히 재클린이 천박한 오나시스와 재혼한 것은 많은 미국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 결국 이 결혼도 얼마 못가 파경을 맞았지만 이처럼 오나시스가 선박왕으로 거부(巨富)가 된 것은 그리스 정부의 허술한 세제 혜택이 큰 몫을 했다는 것이다. 지금 그리스의 세금제도는 엉성한 그물 같아서 큰 고기는 다 빠져나가고 송사리만 잡는 꼴인데다 포퓰리즘에 의한 복지정책으로 나라의 운명이 휘청거리는 것이다. 오죽하면 채권국 독일이 그리스에 대해 535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주는 조건으로 연금 삭감과 세금 인상을 강력히 요구했을까. 그러나 그리스는 주권 국가에 대한 내정간섭 같은 이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세금은 국가 존립에 필수적인 요소임을 그리스 위기는 잘 보여준 것. 그리스의 경우와 달리 조세제도가 잘 발달된 국가에서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식의 지능적인 탈세방법이 날로 진화하고 있다. 요즘 신조어로 자주 등장하는 세금 스텔스기라는 말도 그렇게 생긴 것이 아닐까.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고 자유자재로 적진을 휘젓고 날아다니는 스텔스기. 법망을 피해 이루어지는 재벌들의 천문학적 탈세, 그리고 세금계산서 없이 거래가 되는 연예인들의 외국공연 수입. 과연 레이더를 피하는 스텔스의 위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2011년 강호동, 장근석 등 많은 인기연예인들이 세무당국으로부터 호된 추궁을 당하고 한때 무대에서 하차해야 했다. 집이 세 채 있어도 건강보험료를 1원도 안내는 몰염치한 68만명-이들도 스텔스기를 탄 사람들이다. 카리브해의 영국령 버진아일랜드는 인구는 10만명 정도의 작은 섬이지만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페이퍼컴퍼니가 인구수 보다 많은 12만 개가 몰려있다. 그래서 버진아일랜드는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한 세금 피난처(Tax Heaven)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나라 기업도 70여개 정도가 이곳에 유령회사로 등록을 하고 금융계좌를 개설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특히 그들 가운데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 문제만 거론되면 등장하는 그의 장남 전재국씨도 끼어있다는 보도로 충격을 준 바 있다. 버진아일랜드 말고도 파나마, 케인만 군도 등에도 우리나라의 많은 역외 법인이 산재해 있는데 지난 8년간 4천3백억불이 이런 유령법인으로 송금됐고 국내로 회수되지 못한 것이 1천6백억불에 이른다는 것이다. 세금 스텔스의 전형적 모델이다. 정부는 10월1일부터 6개월 동안 이와 같은 해외 숨겨진 소득, 재산의 자진신고 접수기간을 설정했다. 정부가 추정하는 해외 숨겨진 소득액은 무려 4조원이나 되고 있다. 이렇게 자진신고를 통해 이 가운데 얼마가 납세와 연결될지는 미지수다. 아무튼 정부는 새해 세수 확보를 위해 유리지갑을 가진 봉급자, 중소상인 등 새우를 노리기 보다 고래를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조세 피난처에 숨어 있는 고래, 스텔스기에도 안 잡히는 고래 사냥이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와 세종시

요즘 세종시에서 가장 인기있는 것은 복숭아다. 특히 조치원 복숭아로 널리 알려진 황도는 그 맛이 비길 데 없다. 그 맛도 맛이지만 생김새와 색깔이 정말 유혹적이다. 그래서일까. 복숭아의 도(桃)는 여색(女色)을 뜻하기도 하고, 복숭아밭을 뜻하는 도원(桃源)은 인류가 추구하는 이상향을 뜻하는 등 두 가지 다소 상반된 상징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중국의 고전 삼국지에 나오는 도원결의(桃園結義)는 이상향 건설을 꿈꾸는 유비, 관우, 장비가 복숭아밭에서 형제의 결의를 다지는 것을 뜻한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1447년 봄날, 꿈을 꾼 복숭아밭의 황홀한 모습 역시 그가 그리는 이상향이었다. 형 수양대군의 위협 속에 살아야 하는 안평대군으로서는 아주 절실한 파라다이스가 복숭아밭의 꿈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 안평대군은 당대 최고의 화가 안견(安堅)을 불러 꿈 이야기를 하고 그림으로 그리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그림은 전란 속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구보가 되어 덴리대학교가 소유하고 있다. 결국 안평대군은 이 그림이 그려진 지 6년 후 수양대군에 의해 유배지 교동도에서 사약을 받고 쓸쓸히 죽어야 했다. 그렇게 복숭아밭을 파라다이스로 꿈꾸던 안평대군이 지금 복숭아가 한창인 세종시에 나타난다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세종시가 탄생한 것은 시행착오를 거듭해온 이 나라 도시 건설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백지 상태에서 가장 쾌적한 이상적 도시를 만들자는 것에서 출발했다. 행정수도를 기존의 도시로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땅에서 시작한 것도 그런 뜻에서다. 이와 같은 야심적 도시건설의 꿈은 우리나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브라질은 수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무려 900km나 멀리 떨어져 있는 해발 1천100m의 황량한 고원지대 브라질리아에 신도시를 건설했다. 한동안 끊임없는 저항에 직면했으나 브라질리아는 날아가는 제트기 모양으로 도시 모형을 정하고 건물의 대칭성까지 도시의 전체적 조화를 이뤄냈다. 가장 아름다운 건물, 가장 아름다운 광장, 가장 아름다운 산책로, 가장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도로망 1987년 유네스코는 고대도시가 아닌 현대도시 임에도 브라질리아 도시 전체를 인류문화재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말레이시아 역시 외과의사 출신 마하티르 모하마드 총리의 강력한 지도력 아래 백지상태의 푸트라자야에 신행정수도를 건설하는데 성공했다. 예쁘고 아름다운 정부청사, 웅장한 이슬람의 모스크사원, 아름다운 호수 그래서 지금 푸트라자야는 말레이시아 현대화의 아버지라 일컫는 마하티르의 또 하나의 세계적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세종시는 어떤가? 이에 대해 이충재 행복도시건설청장은 브라질리아나 푸트라자야는 물론 일찍 수도를 옮긴 호주 캔버라에 비해서도 세종시가 월등히 요건이 좋다고 말한다. 오히려 세종시가 인근 대전, 수원, 전주 등을 1시간대 가까이 끼고 있는 것이 도시발전의 에너지가 될 수 있고 브라질리아나 푸트라자야를 능가하는 세계적 명품도시를 건설할 수 있다고 이청장은 열정을 나타낸다. 이번에 발표한 세종시 내의 유럽형 단독주택단지를 위한 토지공급을 실시키로 한 것도 말하자면 그런 아름다운 명품도시의 그림을 맞추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유럽형, 한옥형 이런 다양하고 새로운 주택패러다임을 선보이는 것, 그래서 세계도시건설 마케팅에도 성공을 하겠다는 것이다. 아버지 세종 임금을 딴 세종시-그 복숭아밭 꿈이 펼쳐진다면 이 역시 대한민국의 국격이 세계적으로 업그레이드 되는 것이 아닐까.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여성존중 캠페인 ‘He For She’

요즘 발행되는 여권을 비롯 외국과의 문서에 기재되는 남여 성별란에 영문 표시가 sex에서 gender로 바뀐 곳이 많다. 1995년 9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세계여성대회에서 sex는 생물학적 남여 구별의 뜻이 강하기 때문에 신체적 구별을 뛰어넘어 사회적 의미의 gender로 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뜻에서 그와 같이 결정한 것이다. 획기적인 성(性)평등을 이룩하자는 강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엔은 여성을 존중하자는 취지로 He For She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캠페인을 벌이면서 2013년 7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파키스탄의 16세 소녀 말랄라 유사프자이를 유엔 총회에 초청해 연설하게 했다. 유엔에서 연설한 최연소 소녀의 기록을 세우기도 한 말랄라는 겨우 11살 나이에 영국 BBC 방송의 블로그에 자기가 사는 파키스탄의 가족 이야기를 올리면서 여자는 외부 남자와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것, 혼자서 외출을 할 수 없는 것, 여자는 학교를 다닐 수 없는 것 등 여성차별을 계속 소개했다. 그래서 2012년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인 탈레반의 공격대상이 되어 머리에 총격을 받고 중상을 입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현지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영국의 퀸엘리자베스 병원으로 긴급 후송돼 장시간의 수술 끝에 기적적으로 회생했다. 그리고 계속 영국에 남아 여성교육운동과 평화운동을 전개하여 마침내 2014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는데 이 역시 역대 노벨 수상자 중에 최연소의 기록을 세웠다. 말랄라의 유엔 총회 연설은 큰 감동을 주었다. 가장 강한 무기인 책과 펜을 들고 문맹과 빈곤, 테러와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 책과 펜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입니다. 한 명의 어린이가, 한 권의 책이, 한 자루의 펜이 세상을 바꿉니다 이처럼 위험을 무릅쓴 여성운동이 때로는 감동적인 뉴스가 되고 있음은 아직도 지구상에 남여의 성평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어떤가? 최근 유엔 발표를 보면 한국의 세계여성인권 순위가 15위로 일본프랑스보다 높게 나타났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는 여성총리 1호였고, 여성 대통령도 미국보다 먼저였으며 전문대학 이상의 대학진학율에서도 여성이 74.6%로 남자의 67.6% 보다 7% 앞서고 있다. 취업 인구에서도 남자의 65.2%에는 따라오지 못하고 있지만 꾸준히 향상되고 있어 지난해 여성취업율은 42%에까지 이르렀다. 여성 의사는 24.4%, 여성 국회의원도 1990년대에 불과 1%였지만 지금은 15.7%로 47명에 이른다. 여성 1호 축구 국제심판도 나오고, 경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금녀(禁女)의 벽을 깨고 첫 여성 단장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어쩌면 He For She라는 유엔 구호가 거꾸로 She For Men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잠깐, 어느 통계는 우리 여권 순위를 108위로 발표하여 조사방법을 두고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어째서 그런 통계가 나왔을까? 아직도 우리 여성 인권이 외형적으로는 15위일지라도 질에 있어서는 108위라는 뜻인가? 여성지위-문제는 순위가 아니라 질일 것이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제3한강교와 제2경부고속도로

전국노래자랑의 상징인 송해씨는 1970년대 제3한강교에서 아들이 교통사고로 숨지는 불행을 겪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는 제3한강교를 건너지 않는다. 그만큼 그에게 제3한강교는 가슴을 울리는 슬픈 이야기다. 그러나 한남대교로 이름을 바꿨지만 제3한강교는 경부고속도로와 서울 도심을 연결하는 귀중한 역할을 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 1970년대 혜은이가 불러 크게 히트한 것만 보아도 제3한강교가 국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이 다리의 하루 교통량 역시 20만5천여대. 그만큼 경부고속도로가 국가의 동맥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보조기능을 다 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로마가 망한 것을 두고는 여러 설이 있지만 로마가 2000년이나 대제국을 이룬 것의 가장 큰 힘이 도로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로마의 도로는 로마를 출발하여 가야할 곳, 지배해야할 곳, 그 어디든 직선으로 뚫었고 그 길이가 3세기에 이미 8천500km나 되었다. 우리나라 서울-부산 경부고속도로의 20배나 긴 도로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일찍이 길은 로마로!(All roads lead to Rome!)라는 말이 생겼다. 특히 로마의 도로는 로마군이 직접 건설했고 구간마다 공사책임자의 실명을 새겨놓아 그 책임과 명예를 동시에 부여했다. 이렇게 건설된 도로를 통해 모든 식민지의 물자가 올라갔고 로마의 통치가 이루어졌으며 전쟁 때는 신속한 군사행동이 가능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의 중추신경역할을 하고 있는 경부고속도로가 과부하가 걸린 나머지 제 기능을 잃고 있다. 사람으로 치면 비만으로 동맥경화에 걸린 것과 같다. 특히 휴가철이나 설^추석 명절, 연휴 때의 경부고속도로 정체는 경제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가져오고 있다. 그때마다 제2경부고속도로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사실 이 때문에 2004년 제2경부고속도로의 구상이 시작됐고 2009년에는 타당성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세종시가 출범하면서 경기도 구리시와 세종시간 150km에 건설비 6조8천억원의 그림이 그려지기도 했다. 특히 세종시의 발족은 제2경부고속도로를 절실히 필요로 하게 되었고 세종시는 줄기차게 이를 추진했으나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지난주부터 세종시는 이를 위해 서명운동에 돌입했고 경기도의 관계 지방자치단체가 호응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솔직히 이와 같은 세종시가 벌이는 서명운동을 보면서 측은한 생각이 든다. 지난 6월 세종시청 개청식 때 코앞에 있는 정부청사의 국무총리는 고사하고 장관 한 명 참석 않는 홀대를 보여 시민들을 실망시킨 것은 말할 것 없고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기 때문이다. 치열한 국제경쟁 시대, 서울과 세종시간 공무원들이 길에다 쏟아 붓는 시간과 돈, 메르스 사태 때 보여준 산더미처럼 쌓이는 비능률, 비효율을 해결하기 위해 국회 분원이라도 세종시에 와야 한다는 소리도 허공을 맴돌고 있다. 어렵게 세종시에 거점을 마련한 서울대학병원의 진료팀도 처음 가졌던 연구중심의 글로벌 병원의 꿈을 접고 곧 철수할 예정이다. 세종시가 아무리 좋은 그림을 그려도 그것을 추진할 파워와 리더가 약하면 그것은 허상에 불과하다. 정부청사는 있어도 파워가 없는 세종시-세종시가 자꾸만 외로운 섬처럼 보이는 게 안타깝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日本의 문화재 도둑은 무죄인가

몇 해 전 일본 출장길에 도쿄 오쿠라 호텔에 들러 호텔 정원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이름난 호텔인데다 특히 정원이 매우 유명한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원 산책길 한쪽에 유달리 나의 시선을 끄는 석탑(石塔)이 있었다. 어쩐지 꼭 우리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 안내인에게 물었더니 과연 그것은 고려시대 세워진 평양 율리사지(趾) 5층 석탑이라는 대답을 듣고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가 일본인 호텔 정원의 장식품으로 버려져 있다니 하는 생각에서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그 후에 언론을 통해 오쿠라 호텔의 5층 석탑을 북한에서 돌려달라는 조정재판을 신청했고 지난 7월 22일 첫 심리가 열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재판에 대해서는 모처럼 남북이 하나로 여론이 일어나고 있음도. 그런데 더욱 우리를 분노케 하는 것은 이렇게 석탑의 반환 문제가 제기되자 호텔 측은 지난 2월 이미 전격적으로 석탑을 해체하여 지금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석탑을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훔쳐간 오쿠라는 일본 강점기 때 우리 문화재 도굴 왕으로 악명을 떨친 인물. 지난 2012년 일본 쓰시마(대마도)의 가이진 신사에 있던 동조여래입상과 간논지(觀音寺)에 있던 고려 불상인 관세음보살좌상 한 점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몰래 훔쳐 국내로 반입했다가 경찰에 붙잡힌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정부는 즉시 이들 문화재의 반환을 강력히 요구했고 일본의 언론도 거들었다. 우리 사법당국은 3년에 걸쳐 이 사건을 다룬 끝에 동조여래입상은 돌려주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마침내 지난달 17일 일본에 반환했다. 이날 불상을 보관하고 있던 대전 소재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철저한 비공개로 일본대사관 관계자에게 인도했고 일본은 이것을 즉시 항공편으로 귀국시켜 007식 작전을 방불케 했다. 그러나 훔쳐온 다른 한 점, 관세음보살좌상은 반환하지 않고 있다. 앞에 것은 일본 쓰시마로 건너간 경로가 불명확하기 때문에 관계법과 국제관례로 돌려주지만 후자의 경우, 충남 서산에 있는 부석사(浮石寺)의 소유가 확인됐고 특히 부석사 일대가 왜구의 침입이 여섯 번이나 있었던 역사 기록이 있는 만큼 이때 약탈해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처럼 일본이 닥치는 대로 마구잡이식 약탈을 해간 우리 문화재는 공식적으로 6만7천점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개인들이 가져간 것까지 합치면 30만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2013년 2월, 세종대왕의 익선관(翼善冠)을 일본에서 입수했다 하여 매스컴이 흥분한 적이 있었는데 이 역시 일본에 떠도는 약탈 문화재의 하나다. 익선관은 임금이 집무할 때 쓰는 관으로 정밀감정 결과 1660년대 것으로 확인돼 세종대왕과는 관계가 없음이 밝혀지기도 했지만 그러나 이 역시 궁중에서 사용하던 것이 분명하고, 임진왜란 때 약탈해 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이처럼 약탈해간 것 중에는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것도 있는데 이렇듯 일본의 문화재 도둑은 무죄인지 슬픈 일이다. 한국은 일본에 대하여 무슨 문제만 생기면 감정적으로 접근한다고 비판하는 주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나라의 주권을 도둑질 당하고 강제징용에, 위안부로 끌려갔을 뿐 아니라 수많은 애국열사가 피를 흘린 나라, 그 민족의 혼이 깃든 귀중한 문화재들마저 약탈당한 나라-그 나라의 입장에 서면 우리의 아픈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광복 70년을 맞으며, 또 하나 빠뜨려서는 안되는 것이 우리의 문화재 반환운동임을 강조하고 싶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부자가 3代를 못가는 이유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수이며 배우인 제인 버킨이 자신의 이름을 붙인 에르메스 버킨백에서 버킨을 삭제해달라고 제조회사에 요구하여 화제가 됐다. 그러나 이미 1997년 버킨과 상표명 등록이 합의된 상태이기 때문에 에르메스 측으로서는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버킨이 자신의 이름 삭제를 요구하는 것은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나일 악어 양식장에서 1년에 4만3천마리가 에르메스의 가방용 가죽을 위해 죽어나가는데 그 살해방법이 너무 잔인한 때문이라고 한다. 에르메스는 프랑스의 티에르 에르메스 3세에 의해 1837년 창업되었으니까 무려 178년의 역사를 가진 기업이다. 처음에는 왕실과 귀족의 말 안장을 제작 납품하는 것으로 출발했으나 자동차가 등장함으로써 말안장 대신 자동차 시트를 만들었고 이어 여성용 가방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최고 2억원까지 하는 세계에서 가장 고가의 명품이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이 기업은 178년의 역사, 6대에 걸친 가족경영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에르메스의 깔레쉬라는 상표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마부가 마차를 모는 마부석이 비어있는 마차-그러니까 비어있는 자리가 바로 고객, 즉 소비자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고객이 주인이라는 기업정신이다. 형제나 부자간의 지분, 자식들간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오직 소비자만 생각하기 때문에 경영구조를 둘러싼 싸움도 없고 상품의 질, 그 하나로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가방의 명품으로 세계적 각광을 받는 구치(Gucci)는 1921년에 이태리 피렌체에서 구치오 구치에 의해 창업되었으나 2세, 3세에 이르러 자식들간의 경영권 다툼으로 살인까지 벌어진 끝에 결국 100년을 넘기지 못하고 1993년 경영권을 넘기는 비극을 맞았다. 그러니까 지금 구치는 이름만 구치이지 오너가 아닌 것이다. 소비자가 아니라 가족 지배구조 다툼에 에너지를 탕진하는 기업은 이처럼 100년을 넘기지 못한다. 특별히 창업자의 권위있는 유언으로 가족경영이 100년을 넘기는 장수 기업도 있다. 250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세계 제1의 금융재벌 로스차일드가 그것이다. 유대계인 로스차일드가의 3세 안젤름은 유언을 남겼는데 서로간에 분쟁이나 불화를 일으키지 말고, 재판을 하지 말며. 서로를 감싸주고 악한 감정에 빠지지 않아야한다. 가족간의 분쟁을 야기하는 어떤 종류의 활동을 할 경우, 나의 유언에 도전하는 것으로 처벌 받는다. 이와 같은 로스차일드의 유언은 8대째 철저히 지켜져 미국, 캐나다, 독일 등 전유럽에 퍼져 국제금융계를 장악하는 도이치뱅크, HSBC, 노바스코샤를 비롯해 전세계의 와인 업계까지 장악, 그 자산규모가 미국 GDP의 절반에 가까운 부를 이루게 했다. 그러나 가족 갈등이나 환경과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기업은 망하고 마는데 한 통계에 의하면 창업주의 2대 성공률은 30%로 줄어들고 3대의 성공률은 12%에 불과하다. 4대 성공률은 고작 3%다. 물론 마부석을 빈 자리로 남겨둔 에르메스와 같은 경영, 사회환원의 기업윤리(경주 최부자집이나 미국의 록펠러 그리고 빌게이츠와 같은)에 충실한 기업들은 100년을 넘긴다. 이번 전국민의 비난을 뜨겁게 받고 있는 롯데가의 추한 가족싸움을 보면서, 그리고 아직도 계속되는 11개 재벌그룹의 가족 분쟁을 보면서 부디 우리나라에서도 100년을 넘고 세기를 넘어 세계 무대를 주름잡는 기업들이 많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변평섭 전 세종시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대원군의 3대 적폐와 국회

대원군은 조선의 세가지 적폐를 논했다고 한다. 물론 그의 사적인 편견이 강하게 녹아있는 것이지만 잠시 돌이켜 볼 필요도 있다. 첫째는 상류사회의 스캔들을 생산하고 공직기강을 흐렸던 평양 기생을 꼽았다. 두 번째는 전라도 등 지방 아전을 지적했다. 당시 지방관속의 아전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고정된 급여가 없어 힘없는 백성들을 수탈해 원성이 높은 존재였다. 대표적인 것이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 전라도 강진에서 1803년 겪은 실화다. 그 동네 한 사람이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출생 3일 만에 갓난아기를 관청에서 군적(軍籍)에 올렸다. 말하자면 군 입대자로 병적에 올린 것. 그리고는 생명줄과 같은 외양간의 소를 끌고 가 버렸다. 아기 아버지는 너무 분개하여 자신의 생식기를 잘라버리고 다시는 아기를 낳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그 부인은 잘린 남편의 생식기를 들고 관가에 가서 항의하려 했지만 정문에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났다. 이 딱한 이야기를 듣고 정약용 선생이 지은 시가 유명한 애절양(哀絶陽)이다. 셋째는 충청도 양반. 유달리 서원과 향교가 많았고 당쟁의 영수급 인물들이 많았던 충청도 양반들이 걸핏하면 상소를 올리는 등 대원군을 괴롭힌 것에서 나라를 어지럽히는 존재로 찍힌 것 같다. 만약 오늘날 대원군이 살아있다면 그의 세가지 적폐는 다음과 같이 바뀌지 않았을까. 첫째는 방위산업청과 원자력발전소 등 국가 안위에 관련된 기관의 천문학적 부정부패. 둘째는 불쌍한 서민 등쳐먹는 보이스피싱. 셋째는 밤낮없이 365일 싸움판만 벌이는 국회, 일 안 하고 거액의 세비를 타먹는 국회의원 말이다. 지난해 말 한국정당학회가 조사한 여론조사에서는 국민의 72%가 현재의 국회의원 300명은 많으니 줄여야 한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초에 대전발전연구원이 대전의 국회의원 선거구 증설에 관해 1천명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는데 여기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인구가 광주시보다 많은데도 국회의원 수는 광주보다 적은 것에 논란이 있어온터라 의원 증원에 찬성하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높으리라 예측됐다. 결과는 의외로 선거구 증설 찬성이 45.7%에 그쳤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한마디로 국회의원 많아야 정치인들 판만 키워주는 것이지 우리 시민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세금만 축낼 뿐, 민생에는 관심없다는 것이다. 얼마 전 갤럽의 여론조사에서도 응답자의 88%가 우리 국회의원이 역할을 잘못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외국에서 같으면 충격적인 일이다. 그러니 최근 새정치국민연합에서 불거진 국회의원 390명 증원론(論)을 접하는 국민들은 눈과 귀를 의심했을 것이다.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한다고! 국회의원 늘릴 생각 말고 청년 취업률이나 늘리라고. 그러나 슬픈 사실은 우리 국민들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여야가 정치공학적 계산이 서로 맞아떨어지는 순간 그 원치 않는 국회의원 증원은 현실화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대원군 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3대 적폐는 모양만 바뀌며 계속될 것이다. 아마도 대원군이 지금의 국회를 본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나라 국회, 개혁이 시급하도다. 변평섭 前 세종시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세종시에 ‘正二品松’ 심은 뜻은

지난 7월 16일, 세종특별자치시가 새 청사를 마련하고 개청식을 가졌다. 유유히 흐르는 금강 가까이에 물 위를 떠있는 배의 형상을 하고 있는 현대식 건물이다. 원래 이곳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서해로부터 올라온 소금 배와 한양으로 보내는 조곡(租穀)을 실은 배들이 붐볐던 곳인데 금강의 하상이 점점 높아지면서 그런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 세종시는 원대한 미래를 향해 항해를 한다는 뜻으로 청사 건물도 배 모양으로 그렇게 설계를 한 것이다. 그런데 이날 개청식 때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보은 속리산 입구에 있는 정이품송(正二品松)의 후계목 한 그루를 참석자들 모두 흙을 한 삽씩 떠 심은 것이다. 정이품 소나무에 얽힌 이야기는 우리 국민들이 익히 알고 있다. 조선 7대 임금 세조가 속리산 법주사를 행차하다가 바로 이 소나무 가지에 세조를 태운 연이 걸리게 되었고, 세조가 한마디 하자 가지가 들려 일행이 무사히 통과했다는 것. 그래서 정이품이라는 높은 관직을 내리고. 소나무 가지가 들릴 만큼 세조의 왕권이 강력한 힘을 발휘했고 국정을 일사불란하게 이끌었음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일 수 있다. 어쨌든 수령 700년이 넘은 이 소나무가 산불이나 태풍, 폭설 등 재해로부터 손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몇 년 전 국립 산림과학원과 문화재청이 소나무의 DNA를 추출, 영구보존하는 한편 복제나무를 키워왔다. 바로 세종시청 마당에 심은 소나무가 정이품송에서 나온 후계목인 것이다. 공식 이름이 후계목이지 정이품송의 손자뻘 되는 셈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2004년 신행정수도특별법이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으로 판결나자 다시 이름을 바꿔 2005년 5월 18일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했고 그것이 오늘 세종시의 출발의 모태가 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때 이를 기념하여 충북도가 정이품송 후계목을 청주시 상당공원에 심었다가 이번 세종청사 준공에 맞춰 옮겨 심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 소나무를 보는 사람들은 이제 나무도 인공적으로 유전자를 보존할 수 있고 후계목도 배양할 수 있구나하는 현대과학의 발달을 실감할 수도 있고 또는 세조의 서슬퍼런 위세에 가지를 번쩍 든 소나무의 후손이 여기 세종시에서 뿌리를 내렸구나하고 역사를 회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먼 먼 훗날, 이 소나무가 거목이 되었을 때 대한민국은 어떤 위치에 있을까를 상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특히 소나무는 우리 민족의 마음을 담은 가장 사랑받는 나무. 그래서 조선 궁궐과 마주하는 서울의 남산에는 오직 소나무만 가꾸고 잡목은 아예 뿌리를 내릴 수 없게 해 애국가에 나오는 것처럼 철갑을 두른 듯 무성하지 않았는가? 낙낙장송(落落長松)의 독야청청한 모습은 선비들이 그리는 인격의 표상이었고 신라시대 황룡사 벽에 그린 솔거(率居)의 노송은 새들이 날아와 부딪힐 정도로 생동감이 넘치는 부처님 세계의 꿈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일송정 푸른 솔은 만주 벌판을 달리며 독립운동을 하던 선구자들의 위안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세종시에 심은 정이품송의 후계목은 무엇을 역사에 남겨야 할 것인가? 국토균형발전이 마침내 대한민국의 새로운 지방화 시대를 열었다고 증언할 것인가? 아니면 그 비효율로 나라가 후퇴했다고 할 것인가? 정이품 소나무를 심는 마음이 무겁기만 한다. 변평섭 前 세종시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백종원 요리 열풍… 정치권 침흘리나

충청도에서 유독 맛있는 식당이 많은 곳으로 예산(禮山)을 꼽는다. 예산읍내에 있는 S식당은 박정희 전대통령이 이쪽 지방을 지날 때는 꼭 들르는 단골집으로 유명하다. 주메뉴는 숯불 갈비. 식탁에서 굽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주방에서 참나무 숯불에 갈비를 지글지글 구워 가져오는데 뼈가 없고 갈비살만 있다. 그 갈비 굽는 냄새가 골목까지 퍼져 한층 식욕을 돋운다. 박 전대통령은 이 갈비에 막걸리를 곁들였다. 예산에는 S식당 말고도 수덕사가 있는 덕산에도 유명한 갈비집이 있고 삽교(삽다리)에는 돼지 곱창구이가 아주 유명하다. 가야산 더덕구이도 일품이다. 요즘 요리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백종원씨의 고향이 바로 이곳이라고 하면 독자들은 아, 그럴만한 곳에서 태어났군이라고 할 것이다. 백종원씨의 아버지는 충남 교육감을 지내는 등 명문 교육자의 집안이다. 최근까지도 그의 선친이 세운 고등학교 이사장으로 활동하다 아들 백종원씨에게 몇 년 전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러니까 백종원씨는 요리전문가이며 방송인이기도 하고, 교육자이기도 한 셈이다. 물론 사업가는 기본으로 치고 말이다. 과연 그의 인기는 지금 대한민국 모든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치솟고 있다. tvN의 집밥 백선생을 비롯하여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 올리브TV 한식대첩 3 등 어떤 날은 TV 채널을 돌리는 곳마다 그가 출연하고 있어 과연 백종원 바람을 실감할 수 있다. 그가 운영하고 있는 브랜드만 해도 H포차, Y우동 등 27개나 되며 국내외 매장이 7백 곳을 넘어 연간 매출 1천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으니 사업가로서도 크게 성공한 셈이다. 그렇지 않아도 몇일 전 그의 브랜드가 붙은 식당에 들렀더니 손님이 넘쳐 한동안 줄을 서 기다려야 했다. 이런 백종원 신드롬의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백씨 자신이 요리를 누구나 올라타고 즐길 수 있는 세발 자전거에 비유할 만큼 쉽고 편한 레시피 때문이다. 예를 들면 통조림 고등어 김치찜, 잔치국수, 깻잎으로 만드는 모히또. 싱글족이나 피곤한 워킹맘, 그 누구든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입맛을 돋우게 하는 것들이다. 그렇다. 요즘 세월호, 메르스, 불경기에 정치판 싸움까지 피곤한 도시인의 삶을 잠시 잊게 해주는 것이 백종원 바람의 원천이다. 이 때문일까. 일각에서 그를 정치권에 끌어들이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물론 그는 단호히 부인했다. 최근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좀 잘 나가면 정치판으로 끌어들이려는 우리의 고질병이 또 도지는구나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든다. 요즘 TV 드라마에 할배가 된 원로급 탤런트 중엔 한 때 국회의원 배지를 단 사람들도 있지만 오히려 추하게 이름을 남긴 사람도 더러 있다. 국민들의 인기에 편승, 정치권에서 유혹을 하는가 하면 때로는 반 협박조로 동원된 사람도 있고, 뽀빠이 이상용처럼 5공화국 시절 정치권의 부름(?)을 거절했다가 가혹한 수사를 받아 엄청난 상처를 입은 사람도 있다. 잘 나가는 대학교수, 인기있는 연예인, 방송인이면 정치권에서 탐을 낼 만도 하지만 그것이 꼭 정치권의 물갈이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백종원씨는 고향에 있는 여고를 조리고로 만들어 한식 인력을 양성하고 한식의 세계화를 이루려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것이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정치싸움에 휘말리는 것 보다 훨씬 가치가 있을 것이다. 변평섭 前 세종시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日王 몸에 韓國人의 피가 흐른다는데…

유네스코가 공주ㆍ부여 등 백제유적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결정하면서 백제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강 유역에서부터 남해안에 이르는 긴 국경선을 갖고 있던 백제는 그 당시 인구, 병력으로 보면 국방에 엄청난 부담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국경의 성벽을 지키는 군사중 일부를 일본의 병력으로 채운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활용했다. 그래서 일본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는 것인데 백제 왕실의 공주가 일왕과 결혼을 하고 왕자들은 일왕의 딸들과 혼인을 하는 한편 백제로 돌아와 왕위에 오르는 것이다. 김현구 교수 같은 학자는 전지왕, 동성왕, 무령왕 등을 꼽았고 왕은 되지 못했지만 왕자로 머무른 경우로 아좌태자, 곤지 등을 예로 들면서 일본 왕실에 백제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혈연으로 백제는 일본에 문화를 전해주고 일본으로 부터는 병력을 지원받는 특수한 관계가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아키히토 천황은 2001년 1월 23일 공식적으로 나 자신으로 말하면 간무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501~523)의 자손이며 내 몸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고백한 바 있다. 실제 30대 천황 비타스(敏達 572~585)는 백제 왕족으로 분류된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사학자로 서기(書記)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하고 있는 교토시립역사자료관장 이노우에씨는 백제는 우리의 배꼽이며 일본인의 DNA에 백제의 것이 있다.고 고백했다. 이야말로 일왕은 물론 일본 문화의 본류는 통째로 백제의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확실히 일본은 백제와 군사적 협력을 돈독히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660년 6월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663년 7월 2만명이나 되는 병력을 파견, 백제를 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금강을 따라 부여로 향하던 일본군은 백강(白江) 좁은 협곡에서 나당연합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1만7천명이 전멸했다. 이것이야말로 한반도에서 펼쳐진 일본과 중국(唐)이 참전한 최초의 국제전이었는지 모른다. 또한 이것이 한반도가 지닌 지정학적 운명이기도 하다. 그 후에도 일본군이 미군과 더불어 이 땅에서 전쟁을 치를 기회가 있었다. 1950년 6월 27일, 북한의 남침으로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갈 위기에서 정부는 대전으로 피란을 왔었다. 충남도지사 관사가 이승만 대통령의 임시관저로, 충남도청은 임시 중앙청이 되었다. 그때 7월 1일 밤, 무쵸 초대 주한미국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했다. 그리고는 625 전세가 좋지 않으니 급한대로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게 어떤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이대통령은 얼굴이 굳어지며 만약 일본이 우리를 돕겠다고 상륙해온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총구를 돌려 쫓아내겠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그로부터 미국은 이대통령 앞에서 다시는 이 문제를 꺼내지 않았다. 한일 국방장관 회담이 4년여만에 지난 달 싱가포르에서 열렸는데 유사시 미국과 공조로 일본이 한반도에서 군사행동을 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관심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반도 유사시 일본의 군사적 행동은 여전히 의심스러운데가 있다. 지난해 일본 내각이 통과시킨 헌법해석에 대해 아베 신조(安倍晉三) 총리가 자위조치로서의 무력행사란 모호한 개념을 도입하였기 때문이다. 근대사에 이르러 배신의 外交를 수없이 반복해 우리 민족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준 일본이기에 우리는 계속 경계와 의심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번 유네스코가 일본의 근대산업시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때 전제가 됐던 강제노역(forced to work)의 합의문 해석을 뒤집는 것만 봐도 그렇다. 요즘 배신의 정치가 화두이지만 배신의 외교가 더 무서운 것은 국가의 안보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日王의 몸에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면 우리에게 신뢰의 이웃이 될 수는 없을까? 前 세종시정무부시장변평섭

[변평섭 칼럼] 燕山君, 환관을 무참히 죽이다

이 늙은 신은 네 분 임금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전하처럼 문란한 왕은 보질 못했습니다. 임금 자리에 오래 있지 못할 것 같아 원통합니다. 1505년 환관 김처선(金處善)이 국정은 돌보지 않고 사냥터에서 활쏘기에만 정신을 쏟고 있는 연산군(燕山君)에게 허리를 굽혀 아뢰었다. 그러자 연산군은 노기가 발동하여 들고 있던 활을 당겨 김처선에게 쏘았다. 김처선은 옆구리에 화살을 맞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러자 연산군은 내시 주제에 감히하며 이번에는 칼을 들어 무참히 김처선을 살해했다. 그래도 누구 하나 미치광이처럼 날뛰는 연산군을 말리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가 자기에게 닥치지 않을까 벌벌 떨뿐이었다. 사실 김처선의 연산군에 대한 충언은 이번만이 아니라 기회 있을 때마다 행해졌고 특히 연산군이 궁중에서 처용희(處容戱)를 벌일 때 더욱 강한 톤으로 아뢰었다. 그것이 매우 난잡한 섹스 놀음이었기 때문이다. 연산군은 궁으로 돌아와 김처선의 고향 충청도 전의(全義, 지금의 세종시)에 묻혀있는 김처선 조상의 묘를 파헤치도록 했고, 세종시 전의초등학교 운동장 서편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생가를 불태워 초토화시키도록 했다. 얼마나 바른말로 연산군을 질타했으면 무자비한 보복을 당했을까? 김처선은 내시, 환관의 신분이면서도 특출한 능력을 가졌던 사람으로 전해진다. 네 분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모신 것만 보아도(연산군까지 다섯 임금) 그의 위상을 알 수 있다. 그는 文宗 때 한 사건에 연루돼 유배를 갔다가 단종 때 풀려나기도 했고 1455년 단종 3년, 또다시 정변에 연루돼 유배를 가는 등 유배와 복직을 되풀이했다. 환관의 신분이면서 궁중에서의 비중이 컸던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중국어에 능통하여 성종 때에 임금 곁에서 통역을 맡기도 했고 의술에도 뛰어나 성종의 대비를 치료한 공로를 인정받아 자헌대부에 오르게 된다. 그러니까 정치, 의술, 통역, 의전에 이르기까지 환관 김처선의 실력은 가히 궁궐을 주름잡았다 하겠다. 다시 연산군을 지근거리에서 모시게 된 1505년, 그는 그의 죽음을 예감한 듯 연산군 앞에 나서기 전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는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할 말은 하겠다.고 했다는 것인데 과연 그는 그렇게 극간을 토하고 무참히 죽음을 당했다. 세종시 향토문화연구소는 2년 전 김처선에 대한 포럼을 열고 그의 생애와 역사적 의미를 조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임을 이끌고 있는 황우성씨(전 충남도의원)는 김처선이 내시여서 후손이 없고 그래서 자료를 모으기가 매우 힘들어 더 진척시키지 못한다고 했다. 황회장은 예산까지 부족해 공주대학 이모 교수에게 의뢰해 김처선의 생애를 만화로 만들어 겨우 5백부를 각급 학교에 돌렸다며 김처선의 생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전의초등학교 교문 근처에 그의 생애를 소개하는 비라도 세웠으면 하는 바람들을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 정말 이들의 소박한 바람이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비록 내시의 하잘것없는 신분이면서도 감히 광기에 사로잡힌 연산군에게 무참히 살해되면서도 직언을 했던 그 정신은 후대에까지 높이 사야 할 것이 아닌가? 가령 그가 내시의 신분이 아니고 벼슬아치로 임금에게 대들다 죽임을 당했다면 우리는 그를 충신이라고 높이 떠받들지 않겠는가? 같은 말이라 해도 신분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면 그건 모순이다. 변평섭 前 세종시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개미고개 전투와 한국전

625때 최초로 투입된 미24사단의 스미스 부대는 고작 406명으로 거침없이 밀고 내려오는 3만명의 북한군을 막으려 했다. 그들은 우리가 전선에 나타나기만 하면 도망쳐 버릴 것이다. 625 종군기자로 이런 전쟁이라는 책을 쓴 퍼렌 버그는 이렇게 미군들이 북한군을 깔봤다고 했다. 그러나 7월 5일 북한군과의 첫 접전지,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 스미스 부대가 무너져 버렸고, 다시 보강해 투입된 34연대까지도 7월 6일 천안에서 퇴각을 당하는가 하면 연대장 마아틴대령마저 전사를 하고 만다. 한국전 최초의 연대장 전사였다. 잇달아 비보를 접한 24사단장 윌리엄.F.딘 소장은 북한군 탱크를 저지할 대전차포를 일본에 있는 맥아더사령부에 긴급히 요구하며 전선을 뛰어다녔다. 7월 6일, 천안이 무너지자 딘 장군은 지금의 세종시 전의면 소재 개미고개에 미군 667명으로 하여금 적의 남하를 결사 저지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국전 가운데 한 전투에서 가장 많은 미군 전사자를 낸 개미고개의 전투가 7월 11일까지 무려 5일간이나 치열하게 전개된다. 개미고개는 차령산맥을 가로지르는 분수령이어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거기다 국도 1호선이 지나고 경부선 철도가 상하행선 나란히 긴 터널을 빠져나가고 있다. 철도가 지나는 깊은 계곡과 터널, 모두가 전략적으로 그 역할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곳은 지형적으로 안개가 자주 끼는데 그때도 그랬다. 미군이 터뜨리는 조명탄으로는 안갯속을 움직이는 적을 식별할 수가 없었다. 결국 5일간의 전투에서 미군은 667명중 517명이라는 엄청난 전사자를 내고 조치원으로 퇴각했으며 지금의 세종시를 에워싸고 흐르는 금강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그마저 무너지고 포위된 대전을 탈출하던 딘 장군은 북한군에 포로가 되고 만다. 한국전 최초의 미군 사단장 포로라는 불명예를 안고 말았다. 517명의 목숨을 앗아간 개미고개-지금 그곳에는 알지도 못하는 아시아의 조그만 나라, 한국을 위해 목숨을 던진 미군들을 기념하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전투자세를 취하고 있는 3명의 미군 병사와 쓰러진 전우를 일으켜 세우고 있는 병사, 그리고 한켤레의 흙묻은 군화와 철모가 얹혀진 총검의 조형물이 있고 그런 부조물이 반원형으로 펼쳐져있어 그날의 처절했던 장면을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의 희생은 헛된 것이었을까? 아니다. 한국전을 연구한 사람들은 개미고개에서 517명의 전사자를 내면서까지 5일간을 버티어낸 것이 결국 북한군의 남진계획에 차질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미24사단이 비록 패퇴했지만 대전전투에서 시간을 끌었고 그것은 다시 낙동강 전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어줬다는 것. 만약 그때 낙동강 전선이 구축되지 않았으면 부산까지도 적의 수중에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니 참으로 아찔하다. 세종시가 해마다 개미고개 전투가 벌어진 7월 6일, 현장에서 추념식을 갖는 것도 그런 의미가 있다. 지금의 이때쯤이면 개미고개 깊은 계곡에 피어나는 짙은 안개를 보면 이국땅에서 장렬히 산화한 517명 혼령에 저절로 숙연해진다. 변평섭 前 세종시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위기때 드러난 세종시의 허점

대한민국 국보1호 숭례문이 어처구니없는 방화범에 의해 소실된 2008년 2월 10일 밤 8시 40분경,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급보를 받고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갔다. 숭례문은 문화재, 특히 국보 1호이기 때문에 그냥 불을 꺼야하는 단순함이 아니라 복잡한 문화재의 전문적 판단이 시급했는데 최고 결정권자는 그 시간을 서울로 올라가는데 허비할 수밖에 없었다. 초동 화재 진압에서 실패한 숭례문 화재는 지금 전국을 불안케 하고 있는 메르스 사태를 초기 대응 실패로 규정하는 것과 비슷하다. 뿐만 아니라 2010년 3월 26일에 발생한 천안함 폭침사건 때도 사건을 지휘해야 할 합참의장은 계룡대에서 보고를 받고 KTX 편으로 서울로 올라갔다. 1분 1초가 긴박한 시간, 계룡대에서 서울까지 합참의장이 작전 헬리콥터가 아닌 KTX에 기대에 1시간을 소비하다니. 황당한 일이었다. 이번 메르스 사태에서도 이와 같은 늑장 대응의 함정이 놓여 있었다. 세종시와 서울 사이의 정부 기능, 특히 위기관리 시스템의 민낯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메르스는 삼성서울병원과 경기도 평택성모병원이 중심이 되어 퍼져 나갔는데 보건복지부는 세종시에 있었다. 메르스와 직접 대면해 싸워야 할 질병관리본부는 충북 오송에 있다. 서울에서는 1시간 30분 이상이 소요되고 세종시에서도 30분이나 되는 거리다. 또 실제적인 상황통제는 서울에 있는 건강보험공단에서 복지부 관료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진행됐다. 그러니 주요 발화점은 수도권인데 진화는 세종시와 충북 오송, 서울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어 졌으니 얼마나 비효율적이었을까? 역시 장차관은 물론 복지부 관료들은 천안함 폭침때의 합참의장처럼 KTX에 의존하거나 자동차로 왔다갔다 아까운 시간을 소비했다. 특히 국회에 불려나가 보고도 하고 방역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의원들의 호통만 듣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가? 그 시간에 메르스는 얼마나 많이 퍼졌을까? 이번 메르스 사태만이 아니라 지난해 세월호 침몰 때도 해수부는 세종시에, 현장지휘는 팽목항과 정부 서울청사에 있어 콘트롤타워가 일사분란하지 못했다. 따라서 우리 정부의 60%가 넘는 9부, 2처, 2청의 36개 행정기관이 서울로부터 150km 떨어진 세종시에 있기 때문에 국가 비상시 우왕좌왕 않도록 대책을 확고히 세워야 한다. 이제 와서 세종시를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첫째는 국회 상임위원회만이라도 세종시에서 열 수 있어야 한다. 장차관이 하루종일 국회에서 대기하다 겨우 몇마디 보고하거나 허탕치고 돌아오는 국정의 낭비를 막기 위해 국회가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세종시를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지금 오송역과 별도로 시급히 세종시에 KTX역을 만들어야 한다. 사실 세종 정부청사에서 KTX를 타려면 오송까지 가야되는데 그 시간이 만만치 않다. 기왕 세종시로 호남고속철도가 개통되어 역 하나만 세우면 즉시 열차를 이용해 길에서 버리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변평섭 前 세종시정무부시장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