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墟墓에 술잔 올리는 마음을 아는가

“…그 바닷가에는 시신없는 무덤이 많다. 얼마나 버려 두었는지 나무와 풀 뿌리가 엉켜있다. 밤이면 별들이 내려와 죽은 자의 내력을 캐묻지만 아무도 태풍에 휩쓸려간 이름들을 불러내진 못한다…” 임동윤 시인의 시 ‘허묘(墟墓)’의 일부다. 이름 그대로 허묘는 빈 무덤을 말한다. 바다가 보이는 어촌의 언덕에는 무덤 같지도 않은 버려진 초라한 무덤들이 자주 눈에 띈다.

고기잡이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또는 자식을 그리는 마음에서 이렇게 빈 무덤을 만들고 추석이나 생일같은 날, 송편도 몇 개 놓기도 하고 술잔을 따르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 가난한 어부의 피붙이들은 가슴에 슬픔의 만남을 이어가는 것이다.

올 추석절에도 어김없이 그 빈무덤들 앞에 간촐한 음식물이 놓여질 것이다. 비록 그것들이 까치나 짐승들의 먹이로 치워진다 해도……. 어쨌든 우리는 세상을 떠난 이들과의 만남을 이런 식으로라도 이어가려고 한다. 만남-그 절절함이 지구상에서 한국인처럼 강한 민족은 없을 것이다. 특히 이런 감정이 추석 같은 명절에 잘 나타난다.

몇 년전 어느 외국인이 쓴 글이 생각난다. 그는 한국에 오랫동안 살면서 이처럼 시끄럽고 무질서한 사회를 이만큼이라도 지켜주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봤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해 추석날 고속도로를 달리다 공원묘지를 뒤덮은 인파를 발견했다. 무엇일까? 물론 성묘꾼이다. 그제서야 이 외국인은 한국인의 그 만남의 뜨거운 정, 바로 이것이 한국인을 지탱해주는 정신적 힘이라고 생각했다고.

그는 자신의 뿌리가 되어준 저 세상으로 떠난 분들에 대한 만남의 정이 대를 이어 계속되는 현장을 본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효(孝)’라고 한다. 그래서 6.25 때 고향을 떠나 피난온 동포들이 임진각에서 제상을 차려 놓고 북쪽 산하를 향해 제사를 드리고 절을 올리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찡하다.

이와 같은 한국인의 독특한 효 문화를 나타내고 있는 추석절을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은 한 언론을 통해 유네스코에 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운동을 벌이자고 제안했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제안이다.

흔히 우리 추석을 서양의 추수감사절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엄밀히 그 내용은 다르다. 우리의 추석은 한 해 추수에 대한 감사의 뜻 말고도 만남의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 조상과의 만남, 가족은 물론 시집간 딸과의 만남, 그 만남을 위해 우리는 이날을 기다리지 않는가?

특히 올 추석은 다음 달에 있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더 없이 만남의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에게 큰 위안이 되어줄 것이다.

그래서 지난 9월9일자 경기일보 1면의 사진 한 장이 가슴을 찡하게 했다. 다음 달에 있을 남북이산가족상봉을 위해 적십자사를 찾은 80대 할머니가 “죽기 전에 꿈에 그리던 큰 오빠를 만나고 싶다”며 흐느껴 우는 모습이다. 그 주름진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이 너무나 절절한 그리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놓을 수 없는 복병도 있다. 오는 10월10일, 북한의 노동당 창건 70주년을 맞아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이루어지면 그 만남의 꿈은 무산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북한은 또 한번 만남을 위해 수많은 날들을 초조히 기다려온 동포의 가슴에 못질을 하는 것이다.

이런 걸 생각하면 정체된 고속도로에서 고향에 가기 위해 몇시간이고 불편을 겪는다해도 만날 사람이 있고 자신의 뿌리를 찾아 성묘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 만남의 추석절이 눈 앞에 다가왔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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