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근대화를 이끈 표트르 황제는 귀족들의 긴 수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다 1703년 ‘수염세(稅)’를 공표했다. 수염이 긴 사람에게 세금을 걷는 것이었는데 큰 효과를 봤다. 권력자가 휘두르는 세금은 이처럼 수염세 말고도 얼마든지 이름을 붙여 수탈하는 것이 과거 역사였다.
결국 미국의 독립전쟁도 영국이 ‘인지세’라는 멋대로 붙여진 세금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된 것이고 이때 생겨난 말이 ‘대표가 없으면 과세도 없다’, 즉 세금은 국민의 대표에 의해서만 결정한다는 것. 이처럼 세금은 어쩔 수 없이 민주주의 제도의 핵심과제로 진화해왔다.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암살되고서 미망인이 된 재클린여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을 하여 전세계에 화제를 뿌렸다. 특히 재클린이 ‘천박한’ 오나시스와 재혼한 것은 많은 미국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 결국 이 결혼도 얼마 못가 파경을 맞았지만 이처럼 오나시스가 선박왕으로 거부(巨富)가 된 것은 그리스 정부의 허술한 세제 혜택이 큰 몫을 했다는 것이다.
지금 그리스의 세금제도는 엉성한 그물 같아서 큰 고기는 다 빠져나가고 송사리만 잡는 꼴인데다 포퓰리즘에 의한 복지정책으로 나라의 운명이 휘청거리는 것이다. 오죽하면 채권국 독일이 그리스에 대해 535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주는 조건으로 연금 삭감과 세금 인상을 강력히 요구했을까.
그러나 그리스는 주권 국가에 대한 내정간섭 같은 이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세금은 국가 존립에 필수적인 요소임을 그리스 위기는 잘 보여준 것.
그리스의 경우와 달리 조세제도가 잘 발달된 국가에서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식의 지능적인 탈세방법이 날로 진화하고 있다.
요즘 신조어로 자주 등장하는 ‘세금 스텔스기’라는 말도 그렇게 생긴 것이 아닐까.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고 자유자재로 적진을 휘젓고 날아다니는 스텔스기. 법망을 피해 이루어지는 재벌들의 천문학적 탈세, 그리고 세금계산서 없이 거래가 되는 연예인들의 외국공연 수입….
과연 레이더를 피하는 스텔스의 위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2011년 강호동, 장근석 등 많은 인기연예인들이 세무당국으로부터 호된 추궁을 당하고 한때 무대에서 하차해야 했다. 집이 세 채 있어도 건강보험료를 1원도 안내는 몰염치한 68만명-이들도 스텔스기를 탄 사람들이다.
카리브해의 영국령 버진아일랜드는 인구는 10만명 정도의 작은 섬이지만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페이퍼컴퍼니가 인구수 보다 많은 12만 개가 몰려있다.
그래서 버진아일랜드는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한 세금 피난처(Tax Heaven)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나라 기업도 70여개 정도가 이곳에 유령회사로 등록을 하고 금융계좌를 개설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특히 그들 가운데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 문제만 거론되면 등장하는 그의 장남 전재국씨도 끼어있다는 보도로 충격을 준 바 있다.
버진아일랜드 말고도 파나마, 케인만 군도 등에도 우리나라의 많은 역외 법인이 산재해 있는데 지난 8년간 4천3백억불이 이런 유령법인으로 송금됐고 국내로 회수되지 못한 것이 1천6백억불에 이른다는 것이다. ‘세금 스텔스’의 전형적 모델이다.
정부는 10월1일부터 6개월 동안 이와 같은 해외 숨겨진 소득, 재산의 자진신고 접수기간을 설정했다.
정부가 추정하는 해외 숨겨진 소득액은 무려 4조원이나 되고 있다. 이렇게 자진신고를 통해 이 가운데 얼마가 납세와 연결될지는 미지수다.
아무튼 정부는 새해 세수 확보를 위해 ‘유리지갑’을 가진 봉급자, 중소상인 등 ‘새우’를 노리기 보다 ‘고래’를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조세 피난처에 숨어 있는 고래, 스텔스기에도 안 잡히는 고래 사냥이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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