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초로와 같아서(人生如草露)/만날 때가 많지 않는 것(會合不多時)-
운명을 예견했을까. 연산군이 갑자기 시를 읊었다. 풀피리(草)를 내려놓고 눈물까지 흘렸다. 나인들이 웃었다. 따라 우는 이는 전비(田非)와 장녹수(張綠水) 뿐이었다. 그가 둘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지금 태평한 지 오래이니 어찌 불의에 변이 있겠느냐마는, 만약 변고가 있게 되면 너희들은 반드시 면하지 못하리라. 그리고 9일 뒤, 연산군은 쫓겨났다. 그에겐 반란(反亂)이었지만 역사는 반정(反正)이라고 기록했다(중종반정1506년 9월 2일). 그리고 바로 그날 강화도로 유배됐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밤 2고(鼓오후 9~11시)에 안윤국(安潤國)이 중종에게 보고했다. 폐주는 갓(笠)을 쓰고 분홍 옷에 띠를 띠지 않고 나와서, 땅에 엎드려 가마에 타며 말하기를, 내가 큰 죄가 있는데, 특별히 상의 덕을 입어 무사하게 간다 했습니다. 도착한 곳은 강화도 교동이었다. 위리(圍籬)한 곳은 몹시 좁아 해를 볼 수 없었다. 음식을 들여 보낼 수 있는 작은 문이 하나 있었다. 폐왕이 위리 안에 들어가자마자 여시(女侍)들이 목놓아 울부짖었다. 그를 호송한 심순경이 당시 모습을 이렇게 보고했다. 신 등이 작별을 고하니, 폐왕이 말을 전하기를, 나 때문에 멀리 오느라 수고하였다. 고맙고 고맙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시각 한양에서는 장녹수가 참형되고 있었다. 11월7일자 실록에 연산군이 다시 등장한다. 교동 수직장 김양필이 중종을 찾아와 연산군이 역질로 몹시 괴로와 하여 물도 마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눈도 뜨지 못합니다고 아다. 하지만 연산은 이미 하루 전(6일)에 죽었다. 8일 김양필이 다시 궁에 들어 보고했다. 초 6일에 연산군이 역질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다른 말은 없었고 다만 신씨를 보고 싶다 하였습니다. 폭군 연산은 그렇게 죽었고 근처 어딘가에 묻혔다. 강화도가 그런 곳이다. 그런데 그곳엔 연산이 없다. 어디서 살았는지도 알 길이 없다. 강화사, 교동향교지는 읍내리 부근당 252번지를 연산군 유배지로 지목하고 있다. 연려실기술 등을 근거로 화개산 앞쪽의 고구리를 지목하는 주장도 있다. 연산이 읊었다는 시의 인진나루 보이는 곳에라는 구절 등을 근거로 봉소리 신곡동, 이른바 신골을 유배지로 보는 견해도 있다. 3곳 모두에 연산군 유배지라는 표식이 붙어 있다. 유배지는 죄인의 흔적이다. 온전히 남아 있기 어렵다. 그래서 보전과 보존이 함께 필요하다. 단종 유배의 마을 영월, 그 중심인 청령포 기와집은 영조 대에 지은 것이다. 황희 유배의 고장 남원, 대표 유적 광한루는 초라한 광풍루를 선조 대에 키운 것이다. 다산 유배의 보물 다산초당, 1957년 다산유적보존회가 짓고 다산초당이라 써 붙였다. 단종, 황희, 다산은 그렇게 영월, 남원, 강진에서 부활했다. 이게 유배 문화의 계승이다. 하지만, 강화는 하지 않았다. 안타깝다. 강화만큼 유배 역사가 많은 곳도 없다. 고려 희종이 유배됐고 폐위된 광해도 거쳐 갔다. 안평대군ㆍ임해군ㆍ능창대군은 이곳에서 최후를 맞았다. 더 없는 교육의 장이다. 광해를 통해 당파 정치의 폐해를 볼 수 있고, 연산을 통해 권선징악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게다가 언제든 달려갈 2천만명의 교육 수요자가 지척인 수도권에 몰려 있다. 해야 한다. 이제 정리해야 한다. 한꺼번에 할 수 없다면 연산군부터라도 해야 한다. 그가 도착했던 나루터를 찾고, 그가 감금됐던 처소를 찾고, 그가 묻혔던 묘지 터를 찾아야 한다. 보전과 보존의 두 가치를 인정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학술 경쟁을 통해 서로 다른 의견을 모으고, 주민의견을 물어 이해의 폭을 줄이면 된다. 독재 폭력 패륜으로 얼룩진 오욕의 역사 11년. 그 뒤로 남겨진 나약한 인간의 모습 두 달. 그 흔적을 찾아내는 것이 509년 역사를 살리는 길이고 낙후된 강화도를 살리는 길이다. (자료 인용: 중종실록ㆍ연려실기술)
[이슈&토크 참여하기 = 江華가 살려면 연산군을 살려라] 김종구 논설실장
오피니언
김종구 논설실장
2015-04-22 1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