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봄날은 간다

요즘은 판타지로 포장된 사랑 이야기보다 일상의 소소한 에피소드를 다룬 ‘현실밀착형’ 멜로 영화들이 환영받는 분위기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가 그랬고,‘하루’ ‘선물’ ‘불후의 명작’등도 비슷한 범주에 있는 작품들이다. 그런데 이런 영화들은 한가지 오류에 빠지기 쉽다. 일상에 관한 지나친 강박관념 때문에 단순하게 일상의 에피소드만 나열하기가 쉬운 것이다. 영화를 보는 순간에는 ‘내 얘기야’라고 맞장구치지만 극장문을 나서서까지 여운과 감흥을 느낄 수 없다. 허진호 감독의 신작 ‘봄날은 간다’는 좀 다르다. 남녀의 자연스러운 연애 감정을 정말 그럴듯하게, 유머와 위트를 섞어 풀어내면서도 사랑과 인생에 관한 깊은 통찰력도 빼놓지 않는다. 다가설 듯 말듯 망설이는 사랑을 다뤘던 ‘8월의 크리스마스’와는 달리 감독은 이번엔 불같은 사랑을 택했다. 격정적인 만큼 후유증도 큰 사랑이다. 이혼 경력이 있는 지방 라디오 방송국 PD 은수(이영애)와 26살의 녹음기사 상우(유지태)가 주인공. 상우는 자연의 소리를 채집해 들려주는 프로그램의 아나운서 은수와 함께 일을 하게 된다. 두 사람은 소리채집을 위해 대나무숲, 강가 등을 여행하면서 가까워지고, 은수의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보낸 상우는 불 같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결혼’이란 말 앞에서 의외로 쉽게 삐걱댄다. ‘죽으면 무덤에 함께 묻힐 수 있느냐’고 묻던 은수는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상우가 갑자기 부담스럽게 느껴지고, 이후부터 그녀의 태도는 급변한다. “헤어져”라고 야멸찬 말을 내뱉는 은수에게 상우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묻는다. 다른 한 축에는 집 나간 남편을 매일같이 기다리는 치매 걸린 상우의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는 자신에게 잘 대해줬던 젊은 시절 남편의 모습만 기억한다. 실연의 상처에 허덕이던 상우는 마지막 순간 “여자와 버스는 떠난 다음 잡지 않는 거란다”라는 말을 남기고 간 할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비로소 자신을 되찾는다. 어린 상우의 불같은 사랑과 할머니의 남편의 사랑은 묘한 대비를 이룬다. 평생 잊지못할 것 같던 사랑의 아픔도 긴 인생에서 보면 작은 흠집에 불과하다는 것.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은 누구나 가장 행복했고 아름다운 순간인 인생의 ‘봄날’을 기억하고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고, 인생이 아니냐고 감독은 말한다. 이영애와 유지태의 실감나는 연기가 없었다면 그저 그런 작품이 될 수도 있었다. 쉽게 사랑에 빠졌다가도 또 쉽게 그 사랑을 잊을 수 있는, 복합적인 성격의 여주인공 ‘은수’역을 맡은 이영애는 그동안 작품 가운데 가장 물오른 연기를 보여준다. 밑에서 찍은 대나무 숲과 고요한 산사의 풍경 등 한 컷 한 컷 공들여찍은 미려한 영상과 정선 아우라지 물소리, 보리밭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도 감상할 수 있다.

<새영화>스파이더 게임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지성파 흑인배우의 표상으로 군림하고 있는 모건 프리먼이 4년 만에 알렉스 크로스 박사로 돌아왔다. 18일 개봉될 ‘스파이더 게임’(원제 Along Came a Spider)은 97년 ‘키스 더걸’의 속편 격으로 형사와 범죄자의 심리게임을 담은 정통 수사물. 전편의 연쇄살인범에 이어 이번에는 린드버그 신드롬에 빠진 유괴범이 알렉스 크로스 박사와 맞대결을 벌인다. 린드버그 신드롬이란 비행기로 대서양 횡단에 성공한 찰스 린드버그의 아들이 유괴당해 유명해졌던 것처럼 이름난 인물이나 그의 가족을 납치해 언론의 각광을 받으려는 범죄심리를 일컫는 말. 악역 전문배우 마이클 윈콧이 유괴범 게리 손지로 등장해 최고의 납치를 꿈꾼다. 미국 워싱턴 D.C 경찰국의 크로스 박사는 범죄심리학의 최고 권위자로 강간범의 심리수사에 착수했다가 동료 여형사가 숨지자 자신의 실수로 여겨 한동안 칩거에 들어간다. 그러던 어느날 상원의원의 딸 메건 로즈를 납치한 손지가 전화를 걸어 자신을 수사해달라고 요청한다. 로즈를 미끼로 삼아 그의 남자 친구인 러시아 대통령의 아들을 납치하려는손지와 이를 저지하려는 크로스 박사의 대결이 불을 뿜는 가운데 누군가의 개입으로 사건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모건 프리먼의 노련한 형사연기는 전편과 함께 ‘아웃 브레이크’나 ‘세븐’ 등을 통해 익히 알려진 터이고 마이클 윈콧의 성격연기도 일품이지만 크로스의 새로운 파트너 제시카 플래니건으로 등장한 모니카 포터의 연기는 다소 역부족이다. 가장 아쉬운 대목은 뉴질랜드 출신 감독인 리 타마호리의 독특한 색채가 전혀화면에 드러나지 않은 것. 96년 서부극 풍의 갱스터 영화 ‘머홀랜드 폴스’로 할리우드에 화려하게 데뷔했던 그는 관객과 평단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저 그런 수사물을 만드는 데 그쳤다. 전편보다 나은 속편 없다는 영화가의 통설은 이제 ‘언터처블(untouchable)’의신화로 굳어진 것일까. /연합

<새영화>기사 윌리엄

132분의 러닝타임이 흐른 뒤 유럽 대륙 투어가 마무리되는 영국 런던의 경기장. 숨을 죽이며 마지막 승부를 지켜보던 관중들이 승리자의 탄생과 함께 퀸의 ‘위 아더 챔피언(We Are The Champions)’을 부르자 화면이 어두워지면서 스태프 자막이 올라온다. 14세기 유럽을 무대로 마상창술대결 등이 펼쳐지는 ‘기사 윌리엄’(원제 A Knight’s Tale)은 장중함과 트렌디 드라마의 감각이 한데 모은 복합장르 영화다. 누구나 환상을 품음직한 중세 기사의 이야기에 코미디란 양념을 얹고 현대 유행음악이란 기름을 쳐서 버무렸다. 가난한 지붕 수리공의 아들로 태어난 윌리엄은 주인으로 모시던 기사 액터 경이 마창대회 도중 숨지자 대타로 출전해 얼떨결에 우승의 황금종려 가지를 거머쥔다. 마창대회에는 귀족만이 출전할 수 있지만 자신감을 얻은 윌리엄은 마술과 창술 등을익힌 뒤 울리히 경이라는 가짜 작위 신분으로 아예 마창대회 전문기사로 나선다.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그는 귀족의 딸 조슬린에게 연정을 품게 되고 조슬린 또한 윌리엄의 남자다움에 이끌린다. 그러나 연적인 에드해머 백작이 윌리엄의 뒤를 밟아 출신의 비밀을 밝혀내는 바람에 그는 사랑과 명예와 부는 물론 목숨까지 잃을 위기에 놓인다. 말을 탄 두 기사가 키를 넘는 창을 꼬나쥐고 서로를 노려보다가 땅을 박차고 돌진해 상대를 거꾸러뜨리는 장면은 ‘벤허’의 전차경주나 ‘글래디에이터’검투시합에 비길 정도로 수준급이다. 관중들이 깃발의 움직임을 따라 ‘파도타기’ 응원을 펼치거나 대장장이 처녀가 갑옷을 만들어주며 나이키의 상표를 심벌로 새기는 장면 등에서는 재기발랄함이 넘쳐난다. 한편 중세 유럽풍의 화면을 뮤직 비디오 삼아 퀸, 에릭 크랩튼, 데이비드 보위 등 팝거장들의 음악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화면이 바뀔 때마다 감정 연결이 끊어져 중세와 현대, 그리고 서사극과 코미디의 결합이 화학적인 ‘퓨전(Fusion)’에 이르지 못하고 물리적인 ‘믹스처(Mixture)’에 그쳤다. 관객들도 경기장 장면만 나오면 긴장과 흥분에 휩싸이다가 멜로풍의 대목에서는 이내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윌리엄 역의 헤쓰 레저는 영화 전편을 이끌어갈 카리스마가 부족했고 조슬린 역의 셰넌 소새이먼은 관객을 화면 속으로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떨어졌다. ‘LA 컨피덴셜’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차지한 브라이언 헬게랜드가 각본과 감독에 프로듀서까지 맡아 다재다능함을 과시하려는 시도가 애초에 무리였을까. 24일 개봉. /연합

<미리가본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

‘사랑·환상·모험 그리고 자유·저항·반란·공포·엽기’한여름 영화축제인‘제5회 부천 국제 판타스틱영화제(PiFan2001)’의 주제. PiFan2001은 오는 12일 오후 5시 부천시민회관에서 화려한 개막식에 이어 미국 대런 애로노프프스키 감독의‘레퀴엠(Requiem for a Dream)’으로 막을 열고, 프랑스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의 ‘아멜리에(Amelie from Montmarte)’와 윤종찬 감독의 개봉작‘소름’으로 9일간의 시네마 여행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세계 35개국에서 골라모은 141편(장편 76·단편65)의 영화가 모두 9개의 섹션으로 매일 오전 11시부터 밤 12시 심야 및 야외상영까지 복사골 문화센터·부천시민회관·부천시청 대강당·소사구청 소향관 등 4개 주상영관에서 상영된다. ■공식 상영출품작-“가족영화에서 엽기영화까지” 영화팬들의 입맛에 따라‘골라’감상할 수 있도록‘사랑·환상·모험’이라는 큰 틀속에‘자유·저항·반란·공포·엽기’까지 아우르며 잔잔한 감동까지 덤으로 주는 영화들을 골고루 포진시켜 놓았다. ◇부천초이스= 영화제의 유일한 공식 경쟁부문으로 장·단편영화가 각각 9편씩 18편이 출품됐으며, 이 가운데 한국영화인 6mm디지털영화인‘나비’가 장편부문에,‘폴링’이 단편부문에 포함돼 있다. 장편부문에선 올 칸영화제에서 갈채받은 화제작인 태국영화‘검은 호랑이의 눈물’과 로맨틱 판타지‘뉴질랜드 이불 도난사건’등이, 단편부문에선 노동자 해고문제를 코믹하게 다룬‘쇼핑 카트 무도회’와 여자들의 삶에서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은‘가위 바위 보’등이 눈길을 끈다.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판타스틱 영화의 광범위한 개념을 적용한 센션답게 호러와 스릴러는 물론 실험영화와 다큐멘터리까지 아시아·남미·유럽 등 세계 각국에서 출품된 29편의 영화가 포진돼 판타지영화의 세계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홍콩 느와르인‘방콕 데인저러스’, 실험영화 스타일인‘이소룡을 찾아랏!’등 영화뷔페답게 다양한 영화가 기다리고 있다. ◇제한구역= TV쇼의 본질을 비판한‘시리즈7’, 올 칸영화제에서 누드와 스트리킹으로 영화를 홍보해 화제가 된‘네이키드 어게인’등 출품된 7편의 영화마다 진지한 사회비판의 테마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판타스틱 단편걸작선= 출품작 42편 가운데 14편의 애니메이션이 포함돼 셀부터 유토, 클레이, 첨단 3D까지 모든 형태의 애니메이션 기법을 볼 수 있다. 한국영화 11편도 포함돼 있으며, 실험영화와 호러까지 다양한 장르와 짧은 시간내 촌철살인의 풍자와 삶에 대한 사색 등 내용도 다양해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작품들이다. ◇패밀리 섹션=‘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로 국내에서 유명한 감독의‘리틀 뱀파이어’와 노래와 춤을 곁들인 뮤지컬형식의‘마법의 진주’등 가족 구성원 모두가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고 감동받을 수 있는 작품 5편이 선보인다. ◇메이드인코리아= 영화제 기간동안 초청된 해외 영화관련 인사들에게 한국영화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영화로 이미 개봉된‘번지점프를 하다’‘단적비연수’친구’등 5편을 영문 자막과 함께 상영하고, 국내 영화팬들에게 인터넷영화를 스크린을 통해 감상할 수 있는‘극단적 하루’‘아치와 씨팍’‘커밍 아웃’등 4편이 선보인다. ■특별프로그램-“중장년층을 위한 추억의 영화…” 중장년층에게 한국영화의 묘미와 향수를 달래줄 추억의 영화와 무협영화의 거장 호금전 감독의 영화세계를 조명한다. ◇한국영화 걸작 회고전= 올드 영화팬과 신세대 관객들에게 선보이게 될 한국영화는 60년대 제작된‘아 백범 김구선생’‘장희빈’‘김약국의 딸들’‘십년세도’‘남과 북’‘어느 여배우의 고백’‘창공에 산다’등 7편이 선정됐다. ◇호금전 회고전= 호금전 감독의 무협영화를 통해 중국의 철학과 문화의 정수를 느낄 수 있도록 마련된 코너로‘용문객’‘협녀’충혈도’‘산중전기’천하제일’등 5편이 기다리고 있다. ■특별상영-“영화매니아를 위한 특별한 만남…” 4개부문의 특별상영은 그 부문별로 남다른 의미를 가지면서 웬만한 영화매니아가 아니고선 쉽게 감상할 수 없는 할리우드 고전 공포영화 걸작품이 소개된다. ◇존 베리 특별전= 지난 98년 제3회 영화제때 장편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을 맡아 부천을 방문했던 고(故) 존 베리 감독의 유작으로 대니 글로버와 안젤라 바셋이 주연한‘보스만과 리나’를 상영한다. ◇SRF 프로젝트= 프랑스 감독·작가협회(SRF) 주관으로‘문화의 확일화·독점화·전지구화에 대한 반대’를 모토로 각국의 문화적 다양성과 고유한 개성에 찬동하는 프랑스·독일·스페인·멕시코·이집트·이스라엘·중국 등 8개국 9명의 감독들이 연출한 5분내외의 단편작품을 선보인다. ◇추송웅 회고전= 1인극으로 1천여회의 공연신기록을 세운‘빠알간 피이터의 고백’으로 유명한 고(故) 추송웅이 주연한‘병태의 감격시대(75년)’와 아들 추상록의‘빨간 피터의 고백’, 영화배우인 딸 추상미가 연출한‘언포케터블 추송웅’ 등 2편의 디지털 작품을 상영한다. ◇할리우드 고전 공포영화 특별전= 30년대 대공황이 지배하던 불안한 시대에 벨라 루고시와 함께 괴물영화를 지배한 대표적인 스타였던 보리스 카를로프가 주연한‘프랑켄슈타인(31년)’과‘미이라(32년)’등 2편을 깜짝 상영한다. PiFan의 또다른 즐거움이랄 수 있는 부대행사로 메가토크와 씨네·락 나이트,크라잉 너트,스크린 달리다 등의 영화적 이벤트가 마련돼 영화팬들에게 진지함과 유쾌함을 선사하게 된다. ■입장권 구입방법-“상영관 지정좌석제 실시… 사전 예매 필수” 예년과 달리 공식상영관에 대해 지정좌석제를 운영하기 때문에 좋은 영화를 편안하게 감상하기 위해서는 사전 예매가 필수적. 28일부터 시작된 입장권 예매는 영화제 공식홈페이지(www.pifan.com)와 티켓파크(www.ticketpark.com), 전화(02-1588-1555), 우체국 등지에서 하며 영화제 기간동안에는 상영관별로 현장판매를 실시한다. 일반 상영작은 5천원, 개·폐막식과 심야상영·씨네-락 나이트·크라잉 너트(영화·공연) 입장권은 1만원이다. ■상영관 순회 3개노선 무료 셔틀버스 운행 무료 셔틀버스가 △사랑노선(송내역∼복사골문화센터∼시청∼시민회관∼송내역) △환상노선(송내역∼시민회관∼시청∼복사골 문화센터∼송내역) △모험노선(송내역∼시민회관∼소향관∼시민회관∼송내역) 등 3개노선으로 4개 주상영관을 순회하며 7월13∼20일까지 오전 10시∼오후 11시 매 20분마다 운행된다. 기타 PiFan2001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영화제 공식홈페이지(www.pifan.com)를 클릭하거나 영화제 사무국(032-032-345-6313∼4) 또는 홍보팀(032-327-1292). /부천= 오세광·강영백기자 kyb@kgib.co.kr

<새영화> 선물

정통 멜로영화의 계보를 잇는 ‘선물’은 철저히 감정에 호소하는 영화다.시한부 삶을 태연하게 살고있는 아내와 남을 웃겨야 하는 무명 개그맨 남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색조합에서부터 관객들의 심금을 작정하고 건드리겠다는 제작진의 의도가 감지된다.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은 척 자신의 병을 숨기고 사는 아내 정연(이영애)은 끝까지 꿋꿋함을 잃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슬픔을 홀로 삭인다. 그런 아내의 병세를 눈치채고 가슴 아파하면서도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전달해야 하는 얄궂은 삶을 살고 있는 남편 용기(이정재)는 아내에게 바치는 마지막 ‘선물’로 30년 러브스토리를 마임으로 엮어낸다. 이런 스토리 라인에다 눈물과 웃음을 교차편집해 놓은 이 영화는 빛바랜 사진첩을 들여다 보듯 정연과 용기의 초등학교 시절로 수시로 거슬러 올라가 아련한 추억을 더듬기도 한다. 연출을 맡은 오기환 감독의 표현대로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에 젖게하는 복고풍 멜로”를 지향한 탓일까. 개그맨 용기가 죽어가는 아내앞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 제3막 ‘별은 빛나건만’의 아리아에 맞춰 눈물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무엇보다 압권. 이정재와 이영애의 슬픔을 삭이는 연기가 그런대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연예계 뒤안길을 서성이는 사기꾼에서 개과천선해 용기-정연 부부의 행복한 이별을 준비해주는 추억의 메신저 학수(권해효), 학철(이무현)의 코믹 콤비연기는 멜로영화가 빠지기 쉬운 지루함을 걷어내는데 일조하고 있다. 그러나 병원을 제집 드나들 듯 하면서 ‘난, 괜찮아’라고 되뇌는 정연의 시한부인생이 다소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고,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흠으로 남을 것 같다. 24일 개봉

<새영화> 친구

추억에는 아련한 감동과 씁쓸함이 묻어나기 마련이다.곽경택 감독의 ‘친구’는 1976년부터 1996년까지 20년간 우정을 나눈 ‘사나이’네명의 추억을 더듬어 가는,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영화다. 거칠지만 의리가 있는 ‘준석’(유오성), 내성적인 ‘동수’(장동건), 모범생 ‘상택’(서태화), 감초같은 ‘중호’(정운택) 등 100% 토종 부산남자 4명이 주인공이다. 주연 여배우도 등장하지 않는다. 폭력조직의 두목을 아버지로 둔 준석과 가난한 장의사의 아들 동수, 화목한 가정에서 티없이 자란 상택, 밀수업자 부모를 둔 귀여운 중호, 호기심많은 네명의 까까머리 중학생은 음란잡지 플레이보이를 훔쳐보며 낄낄대거나 조오련과 바다 거북이중 누가 빠른가를 놓고 입씨름을 벌이며 진한 우정을 나눈다. 스무살이 됐을때 중호와 상택은 대학생이 됐고 동수는 감옥에, 준석은 마약에 빠져 있다. 그 친구들의 인생행로는 반전을 거듭하다 20대 후반시절 준석은 아버지 조직의행동대장이, 동수는 준석과 등지고 새로운 조직의 행동대장이 돼 일전도 불사해야 하는 얄궂은 운명에 처한다. 상의단추 1-2개쯤은 풀어놓은 70년대의 검정색 교복을 걸쳐입고 모자를 눌러쓴 학창시절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해 놓은데다 20여년전 달동네 풍경도 온전히 담아내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할 뿐 아니라 사춘기때 주고받는 은어(隱語)마저 온전히 되살려 오프닝 자막이 오른뒤 한참동안은 연신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폭력배로 성장한 준석과 동수의 삶을 보여주는 후반부는 무자비한 살인장면 등을 거침없이 보여줘 소름이 돋게 하는 등 남성영화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유오성과 장동건, 성악도에서 배우로 변신한 서태화, 연극배우인 정운택의 연기도 리얼하다는 평이다. 낡은 흑백사진을 들춰보는 것 같은 인상을 남기는 이 영화에 대해 곽 감독은 “사람냄새, 살냄새가 나는 영화다. 오히려 요즘 블록버스터나 예쁘게 포장된 영화보다 더 이국적인 영화라고 생각한다”면서 “남자들만의 거친 삶, 진한 우정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31일 개봉.

<새영화>퀼스

‘퀼스’(Quills)는 프랑스 실존인물 사드 후작의 격동적인 삶을 그린 영화다. 사디즘의 어원이 된 사드 후작이 음란서적 발간 혐의로 붙잡혀 샤렝턴 정신병원에서 보낸 생애 마지막 10년의 일대기가 꽤나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프랑스 최고 귀족가문 출신으로 인간의 욕정과 성적집착에 대한 글을 써 27년이나 감옥생활을 한 자유주의자이자 혁명주의자인 도나시엥 알퐁스 프랑소아 드 사드의 금기에 도전한 글쓰기에 대한 묘사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나폴레옹 황제 치하의 18세기 프랑스, 대혁명 말기 공포정치 시대에 수천명의 시민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 사드(제프리 러시)는 젊은 시절부터 가학적이고 문란한 성행위와 성도착적인 소설집필에 몰두, 악명을 떨친다. 정신병원에 수감된 사드는 병원 세탁부 종업원인 마들렌(케이트 윈슬렛)을 통해 직접 쓴 음란소설을 외부로 빼내 몰래 출판하고, 이런 사드를 나폴레옹은 의사를 파견해 감시한다. 위선적 도덕주의자인 이 의사는 사드의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인 글쓰기를 철저히 금지하고, 그럴 수록 사드의 광기는 더욱 노골화돼 간다. 이런 가운데 마들렌은 사드의 원고 유출에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붙잡혀 공개태형에 처해지고, 마들렌을 몰래 사랑했던 쿨미어 신부(조아킨 피닉스)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마들렌을 멀리 떠내보내기로 마음먹는다. 마들렌은 쿨미어 신부를 찾아 사랑을 고백하면서 자신을 떠나 보내지 말아달라고 애원하지만 거절당하고, 병원을 떠나기 앞서 사드에게 마지막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그 부탁이 화근이 돼 사드가 마지막 이야기를 마들렌에게 전하는 도중에 병원은 화염에 휩싸이고 마들렌도 병원내 정신병자에게 ‘희생’당하고 만다. ‘프라하의 봄’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의 필립 카프만이 연출을 맡은 이 영화는 올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미술상, 의상상 등 3개부문 후보에 올라 있다. 지난해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도 화제가 됐었다. 18-19세기 프랑스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는 것도 색다른 재미로 꼽힐 수 있겠다. 또 ‘샤인’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데 이어 올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2연패에 도전하는 제프리 러시와 ‘타이타닉’의 케이트 윈슬렛, ‘글래디에이터’의 조아킨 피닉스의 연기가 조화를 잘 이뤘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17일 개봉

<새영화>어둠속의 댄서

‘어둠속의 댄서’는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를 온통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덴마크 출신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형식을 파괴한 영화다. 미국 워싱턴의 작은 마을, 프레스 공장에서 일하는 ‘셀마’(비요크)는 유전병으로 점차 시력을 잃어가지만, 자신처럼 갈수록 시력이 약해지는 아들이 열세살이 되기전까지 수술을 시켜주겠다는 희망으로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녀의 또 다른 꿈이자 삶의 기쁨은 스스로 노래하고 춤추는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는 것. 춤과 노래는 고통스런 현실을 잊게 하는 그녀의 유일한 버팀목에 다름 아니다. 그녀가 세들어사는 집 주인은 아내의 사치를 감당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경찰관인 ‘빌’(데이빗 모스) 부부. 어느날 밤 빌은 셀마에게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고, 셀마 또한 아들의 시력을 회복시켜주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다고 비밀을 고백하고 만다. 그러나 그녀는 비밀을 끝까지 지키기로 한 약속을 저버리고 배신한 집 주인 빌로 인해 희망을 잃게 되고, 결국 법정에서 냉엄한 미국의 ‘현실’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런 셀마의 ‘벼랑끝 삶’은 영상혁명가로 불리는 유럽최고의 스타일리스트 라스폰 트리에 감독의 독특한 연출로 때로는 처연하게 때로는 감동적으로 관객들의 감정선을 자극하면서 삶의 애환과 모성애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특히 작업장과 달리는 기차위에서 펼쳐지는 뮤지컬은 그녀의 삶의 고통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연출력의 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두 6∼7회에 걸쳐 전개되는 영화속 뮤지컬 장면을 위해 100대의 카메라가 동원됐다고 한다. 역동적인 비주얼을 생동감있게 잡아냄으로써 상상속 세계를 스크린에 담아 고통의 현실과 절묘하게 대비시킬 수 있었던 것도 그 덕택이다. 현실과 환상, 드라마와 음악이 뒤섞인 이 영화는 지난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여우주연상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눈물샘을 자극하는 ‘셀마’역의 비요크는 아이슬란드 최고의 가수. 이 한편의 데뷔작으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을 정도로 사실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셀마’를 끝까지 돌봐주는 ‘캐시’역의 카트린 드뇌브와 ‘제프’역의 피터 스토메어의 절제된 연기도 영화를 떠받치고 있다. 24일 개봉.

<새영화>초콜렛

스웨덴 출신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신작 ‘초콜렛’은 제목만큼이나 달콤한 로맨틱 코미디영화다. 초콜릿 맛을 소재로 삼아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한편의 우화 또는 동화같은 작품으로, ‘따뜻한’ 사랑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있다. 100년간 변화라곤 모른 채 침체돼 있던 프랑스의 어느 시골마을에 북풍(北風)과 함께 날아든 신비의 여인 비엔나(줄리엣 비노시)와 그의 어린딸은 곧 ‘이상한’ 가게를 연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한번도 맛본 적 없는 초콜릿을 그 가게에서 만들기 시작하고, 이로 인해 그동안 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던 마을은 술렁댄다. 초콜릿 맛을 본 사람들은 마치 홀리기라도 한 듯 가게로 몰려들고, 엄격한 보수주의자인 마을시장은 그럴 수록 그녀를 악을 퍼뜨리는 악녀로 몰아세우며 쫓아낼 궁리에 열중한다. 이 두 사람간의 갈등은 잠시 고조되는 듯 하지만 ‘초콜릿없이는 못살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시골마을의 민심은 이내 비엔나쪽으로 기울고 만다. 이렇듯 두편으로 나뉘어 티격태격하는 사이 배를 타고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다 찾아든 집시 남자 루(조니 뎁)는 냉대하는 마을 사람들과 달리 따뜻하게 맞아주는 비엔나와 사랑에 빠진다. 금욕과 전통을 강요하는 마을시장과 자유와 변화를 추구하는 비엔나의 대립각이 너무나 분명해 결과가 불을 보듯 뻔해 보이기도 하지만 섬세하면서도 코믹한 상황처리로 관객들의 눈길을 끈질기게 붙들어 맨다는 것이 강점. 지난 85년부터 할리우드로 건너가 ‘개같은 내인생’으로 입지를 굳힌 라세 할스트롬 감독은 여전히 인물 심리 묘사 등에 치중하는 유럽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못한 걸까. 부드러우면서도 잔잔하게 인물들의 심리변화를 훑어가는 스크린은 삶의 의미와 사랑과 관용의 힘을 되돌아보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올해 베를린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으며, 오는 3월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음악상, 각본상 등 5개부문 후보로 올라있다. 24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