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조계석(各國租界石)은 인천시립박물관(인천 연수구 청량로160번길 26)에 있는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4호다. 조계는 지방행정권을 외국인에게 위임한 외국인전용 주거지역을 이르며, 조계석은 이러한 지역의 경계를 표시해 놓은 일종의 푯말이다. 인천에는 1883년 일본전관조계를 시작으로, 1884년 화상지계각국조계 등 3개의 조계가 설정되었는데, 그 중 이 각국 조계는 우리나라와 미국영국청국일본독일 대표 사이에 체결된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에 따라 지정된 것이다. 약 14만평 규모의 송학동송월동만석동 일대 외국인 주거지역의 경계를 표시한 것으로, 각 면이 잘 다듬어진 4각을 이루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대모산성은 양주 백석읍 방성리 789에 위치한 문화유산으로 임진강과 한강 유역을 연결하는 길목에 자리했다. 주변의 산성 중 주 교통로에 위치해 방어만을 목적으로 축조된 게 아니라 행정치소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던 복합적 성격의 유적이다. 양주지역의 전술적 요충지 또는 치소로서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장방형으로 가공한 화성암계 변성암으로 높이 약 7.5m 내외의 외벽을 쌓아 올린 형태다. 그 다음 외부에 삼각형 모양의 단면형태를 띤 45m 높이의 보축을 덧대 축조한 우수한 축성술과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는 현문식(懸門式) 성문구조, 축조 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는 성벽 등을 갖췄다. 이는 67세기의 고대 축성기술을 구체적으로 밝혀낼 수 있는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1980년부터 1998년까지 7차례 이루어진 발굴조사로 635점의 금속유물이 출토됐다. 최고 관리 계층이 소유할 수 있었던 청동 팔찌, 청동 도장 등은 대모산성의 위상을 보여준다. 문화재청 제공
전등사 대조루(傳燈寺 對潮樓)는 인천 강화군에 있는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7호다. 전등사는 아도화상이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에 세운 절로 정족산성 안에 자리잡고 있다. 대웅보전 앞 마당 바로 밑에 세운 대조루는 기둥을 세워 지면과 사이를 두고 지은 누각이다. 지은 시기를 알 수 없으나 1748년(영조 24) 주지 초윤(楚允)과 화주인 보학(寶學) 등이 고쳐지었다고 하며, 1841년(헌종 7)에는 화주 연홍 등이 중건했다고 전등사본말사지에 명기되어 있다. 그 뒤 크고 작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안쪽에는 선원각, 장사각 현판과 함께 영조의 친필이라는 취향당 현판을 보관하고 있는데 현재 이들을 걸어 두었던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원래 대조루의 건물 용도는 사중의 행사 및 연회나 손님 접대 등의 목적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대조루 계단 아래서 대웅전의 본존불을 향한 자연스러운 조망이 가능토록 포치한 주의 깊은 건축 설계는 부처님에 대한 존신과 귀의를 더욱 고취시키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송산사지는 의정부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송산사터는 조선의 개국에 참여하지 않고 고려 왕조와의 절개를 지킨 조견, 원선, 이중인, 김양남, 유천, 김주 등 여섯 분의 뜻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사당이 있던 터이다. 조선 정조 22년(1798)에 건립돼 삼귀서사(三歸書社)라 하였는데, 순조 3년(1803)에 송산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고종 5년 (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건물은 헐려 없어졌고, 1892년 옛터 위에 여섯 분의 위패가 모셔진 단이 마련되었다. 1995년의 발굴조사 결과 재실의 남쪽에서 사당터가 확인되었다. 사당터는 북향으로 자리잡고 있어 고려의 왕도인 개성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에서 보면 사람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앞면에 개방된 툇간이 있으며 옆면과 뒷면에는 방화벽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송산사터는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소규모 사당터이나 배치가 북쪽을 향해 있어 매우 특이한 유적이다. 문화재청 제공
선수돈대(船首墩臺)는 인천 강화군에 있는 조선시대 유적건조물로, 1995년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됐다.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보통 높은 평지에 쌓아두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둔다. 특히 강화도에 있는 돈대들은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이에 놀란 조정에서 해안 경비를 튼튼히 하기 곳곳에 쌓아두도록 한 것이다. 이 돈대는 당시 병조판서를 지내던 김석주의 명을 받아 쌓은 49돈대 중 하나로, 검암돈대라고도 불리운다. 일부는 둥글게, 일부는 각이 지게 쌓아 위에서 내려다 볼 때 반달모양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것으로, 강화유수 윤이제가 어영군을 동원하여 쌓았다. 문화재청 제공
잿머리 성황제는 안산 단원구 성곡동 잿머리에서 전해 내려오고있는 마을의 공동 제사이다. 이 마을제의는 성황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구체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성곡동 잿머리 성황제는 잿머리마을 주민들이 마을 수호신에게 안녕과 무병풍년을 빌기 위하여 올리는 마을 제사다. 고려 성종 때부터 내려오는 마을신앙으로 제당에는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비 홍씨와 장모인 안씨를 모시고 있다. 마을굿 형태로 전승되고 있으며, 성곡동 잿머리 성황제는 매년 10월 초순에 길일을 잡아 안말도란말벌말 등 인근의 10여 개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고 있다. 삼현육각을 대동하고 장군놀이신장놀이대감놀이대신놀이줄타기 등을 펼친다. 고려 성종때 내부시랑 서희가 송나라 사신으로 가는 길에 폭풍우를 만났는데 꿈에 나타난 혼령(경순왕인 김부대왕의 비 홍씨와 친정어머니 안씨)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사당을 짓고 제를 지내준 후 무사히 임무를 수행했다는 전설이 있다. 문화재청 제공
능인교당 현왕탱화(能仁敎堂 現王幀畵,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24호)는 백발이 성성한 왕을 중심으로 상하 좌우에 권속들을 배치시켜 오존도 형식을 보이는 현왕도로서, 병풍을 배경으로 녹색 머리 광배를 구비한 채 등받이 높다란 의자에 앉아 오른손으로 홀을 쥐고 왼손으로 긴 수염을 쓰다듬고 있는 왕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왕은 물론 어깨 좌우에 자리한 대신을 비롯하여 앞쪽에 서서 왕에게 보고를 하고 있는 판관들 모두 적색에 녹색과 청색이 가미된 복색을 하여, 배경과 함께 주조를 이룬다. 왕의 복식을 비록하여 권속들의 복식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문양도 장식하지 않아 전반적으로 단조로운 느낌이 있으나, 색채의 변화를 준 배경이라든가 병풍과 서책, 책상 등 경물의 배치, 그리고 책상의 나뭇결과 책상 아래로 늘어진 천 자락에 그려진 작은 무늬로 인하여 이를 해소하고 있다. 이 그림은 근대 불교 화단의 대표적 화승인 석성스님과 화경스님에 의해 1932년 조성되어 능인교당에 봉안되었으며 지옥고통을 벗어나고자 하는 발원에 의하였음이 파악된다. 문화재청 제공
아미타회상도는 서방극락세계를 관장하면서 중생들에게 무한한 안락과 수명을 보장해주는 아미타불의 설법장면을 그린 것으로 정토삼부경에 근거한 불화이다. 안산 쌍계사 요사에 마련된 법당 안에 봉안된 아미타회상도는 안산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원래 극락보전에 봉안되었던 불화다. 현재는 불단에 가려 화면의 3분의 1 밖에 볼 수 없다. 불화는 가로 220㎝, 세로 185㎝의 비단바탕에 진한 채색으로 그려져 있다. 중앙의 아미타불은 키형의 두광과 신광을 두르고, 높은 대좌 위에 결가부좌하였다. 단아한 얼굴에 건장한 신체를 가진 아미타불 아래 좌우에 백의를 걸친 관음보살은 몸을 틀어 가지런히 정병을 잡고, 대세지보살은 오른손이 연화가지의 중간을, 왼손이 연화가지의 끝은 잡고 본존을 향하여 약간 몸을 틀고 서 있다. 나머지 보살은 문수, 보현, 금강장, 제장애, 미륵, 지장보살로 관음과 대세지보살 뒤쪽으로 비스듬히 사선으로 상단까지 좌우로 늘어져 있다. 화기는 잘려 나가 제작시기와 관련 승려를 알 수 없지만, 전체적으로 광배(光背)의 형태와 작은 이목구비를 갖춘 얼굴 및 본존이 걸친 붉은 색 대의와 문양 등에서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 해관문서(仁川 海關文書)는 인천 동구 화도진도서관에 있는 기록유산으로, 2002년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20호로 지정됐다. 인천해관에서 인천감리서로 보낸 공문의 부본 12종으로 2종은 1886년, 10종은 1889년에 작성된 것이다. 이 문서에는 당시 인천세관장 대리 J.F.Schoenicke(한국명:사납기)의 친필서명 및 발송 연월일이 기재되어 있으며, 당시 인천해관 세무사의 직인을 제1면 좌측에 첨부했다. 이 문서는 사납기의 친필서명과 서명일시, 문서번호 등 명문이 뚜렷한 보기 드문 자료로서 19세기말 인천항 개항시기의 각국 조계지 조성과 관련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아울러 우리나라의 영문표기가 COREA로 표기된 것이 눈에 띈다. 문화재청 제공
팔곡리향나무는 안산을 대표하는 천연기념물 문화재로 키가 9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 3m에 이르는 큰 나무다. 나이가 600여년이라고도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향나무는 본래 키가 23m, 줄기의 가슴높이 둘레가 3m 이상까지 자라는 늘푸른나무이며 가지가 위와 아래로 뻗는 특징이 있다. 잎은 바늘모양인 것과 비늘모양인 것이 있어서 7~8년생 이상인 것은 주로 비늘모양의 잎이 달린다. 현재 소재지는 안산 상록구 팔곡일동 59-3이며 안산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지난 1976년 8월27일에 도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돼 현재에 이르렀다. 문화재청 제공
대한민국 수준원점(大韓民國 水準原點)은 인천 미추홀구에 있는 국가등록문화재 제247호로, 1963년 보호각직경 3.3m, 높이 3.36m 규모로 수준원점표석(보호각 포함)이 설치됐다. 수준원점이란 우리나라의 국토 높이를 측정하는 기준점으로, 평균 해수면과의 차이를 측량하여 육지에 설치해 놓은 시설물이다. 강원도 설악산과 제주도 한라산의 높이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이 수준원점이 있기 때문이다. 둥근 받침돌 위에 화강석으로 된 육면체의 설치대를 얹고 그 위에 자수정으로 수준원점을 표시하였으며, 아담한 원형 벽돌 건축물이 수준원점을 보호하고 있다. 전국의 수준점을 정할 때 높이 기준이 되는 이 수준원점의 높이는 26.6871m 이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왕조의궤는 성남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의궤(儀軌)란 의식(儀式)의 궤범(軌範)이라는 뜻으로 국가전례의 따라야할 기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조선왕조의궤(朝鮮王朝儀軌)〉는 조선왕실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그 내용을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한 대표적인 국가기록물이다. 또한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조선만의 독특한 전통으로서 예법을 중시하고 기록을 철저히 보존하려는 조선시대의 우수한 기록문화 중 하나로서 국가지정문화재의 가치가 충분하다. 지난 2016년 5월3일 보물 제1901-2호로 지정됐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성남 분당구 하오개로 323)에서 소장 중이다. 문화재청 제공
장도포대지(獐島砲臺址) 인천 남동구 논현동에 있는 2천275㎡ 규모의 조선시대 말기 성곽시설로, 2001년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19호로 지정됐다. 장도포대지는 조선 고종 16년(1879)에 일본 측이 서해안을 측량하면서 개항지를 탐색하는 것을 보고 인천을 개항 후보지로 요구할 것을 대비하여 어영대장 신정희와 강화유수 이경하가 인천과 부평 연안에 화도진을 설치하고 포대를 만들 때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서 1999년 화도진도 원본 확인을 통해 이곳에 3혈(穴)의 포대를 설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현재는 포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문헌에는 포좌 3기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화재청 제공
구리갈매동도당굿은 구리에 소재하고 있다. 보유자는 악사로 허용업, 무녀로는 조순자가 지정되어 있으며 전수조교는 허재훈이다. 이 굿은 전형적인 도당굿의 명칭을 사용하지만, 경기도 북부의 마을 당굿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이 주요한 특징이다. 갈매동 도당굿은 마을의 굿이기 때문에 이 마을 사람 모두가 참석하는 특성이 있다. 그러한 특성은 두 가지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표출된다. 새오개의 서낭에 모셔져 있는 도당할아버지와 도당할머니를 모셔서 마을의 굿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오개의 도당신을 상수리 나무 또는 참나무에 모셔서 오는 대잡이 행사에 의해서 마을 곳곳을 다니는 유가 의례가 있다. 갈매동 도당굿은 두 가지 의의가 있다. 하나는 마을의 공동 축제를 제의의 형식을 빌어서 표현한다는 것이다. 마을의 신성한 신을 모시고 마을 사람 전체가 동참하여 세속적 놀이를 통해서 결속을 다지게된다. 이와 더불어 본격적인 농경이 시작되는 음력 3월에 풍농을 기원하고 마을 수호신을 빌어서 축제의례를 벌이는 것은 농경세시 의례로서도 긴요한 의의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구)인천일본제1은행지점(仁川日本第一銀行支店)은 인천 중구에 있는 유적건조물로, 1982년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됐다. 구)인천일본제1은행지점은 고종 광무 3년(1899)에 지은 석조건물이다. 일본인 니이노이에 다카마사가 설계한 건물로 모래, 자갈, 석회를 제외한 나머지의 모든 건축 재료를 일본에서 직접 가져와 만들었다. 현관은 반원의 곡선형으로 중앙에 만들었는데 그 위로 르네상스풍의 작은 돔을 올려서 좌우대칭으로 꾸몄다. 바깥벽은 화강암을 다듬어 쌓았고 지붕의 꼭대기 부분인 용마루에는 장식창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중앙 돔의 양옆에 있는 작은 탑은 나중에 첨가된 것으로 보이는데, 전체적으로 후기 르네상스 양식을 본떠서 단순화한 건물이다. 문화재청 제공
남한산성 행궁은 정무시설은 물론 다른 행궁에 없는 종묘사직 위패 봉안 건물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조선시대 행궁제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또한 역사적으로 한번도 함락되지 않은 대외 항전의 전적지다. 최고의 수준에 달하는 우리나라 성곽 축조기술을 보여주는 남한산성(사적 제57호)과 역사를 함께하고 있는 행궁은 1999년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상궐, 좌전이 복원됐다. 현재는 일부 건물지에서 초대형 기와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는 중요한 유적이다. 지난 2007년 6월8일 사적 제480호로 지정됐으며 광주 남한산성로 784-29 (남한산성면, 남한산성행궁) 외 일원에 위치해 있다. 문화재청 제공
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권31(大方廣佛華嚴經 貞元本 卷三十一) 은 인천 연수구에 있는 기록유산으로, 1993년 보물 제1154호로 지정됐다. 대방광불화엄경은 줄여서 화엄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중심사상으로 하고 있다. 화엄종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이 책은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마치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절첩장 형태이며, 접었을 때의 크기는 세로 31.6㎝, 가로 12.3㎝이다. 검푸른 빛의 표지에는 금색으로 제목이 써 있고 끝에 정(貞)자가 있어 당나라 삼장반야(三臟般若)가 한문으로 번역한 정원본임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회룡사의 신중도는 가로 219.5cm, 세로 176cm나 되는 꽤 큰폭의 그림이다. 앞줄 중앙에 위태천, 뒷줄 좌우에 제석, 범천이 배치되어 있고, 그 주위로 제석, 범천의 권속과 팔부중이 배치된 꽉 찬 화면도구를 보여주고 있다. 형태는 늘씬하면서도 경직된 면이 보이는 신체와 19세기 말에 유행하던 특유의 얼굴을 나타내고 있다. 신중들의 옷은 주로 분홍색에 가가운 옅은 붉은 색으로 되어 있는데 군청과 녹색들이 약간씩 가미된 19세기 후반시 채색을 칠해 당대 신중탱화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특히 서울 근교의 불화 양식이 잘 표현 되어 있는 이 신중도는 서울 동작 지장사 신중도와 친연성이 짙은 것으로 당대의 신중도 가운데 대표적인 예로 평가될 수 있다. 지난 2003년 4월21일 도 문화재자료 제118호로 지정된 바 있다. 문화재청 제공
강화 전등사 약사전(江華 傳燈寺 藥師殿)은 인천 강화군 전등사에 있는 법당으로, 1963년 보물 제179호로 지정됐다.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하지만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조선 선조 38년(1605)과 광해군 6년(1614)에 큰 불이 일어나 다시 짓기 시작하여 광해군 13년(1621)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대웅보전 서쪽에 있는 아담한 약사전은 중생의 병을 고쳐준다는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 언제 지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고 건축 수법이 대웅보전과 비슷하여 조선 중기 건물로 짐작하고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이며 주위에는 화려한 연꽃무늬와 덩굴무늬를 그려 놓았다. 문화재청 제공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안산시 수암동에 있는 안산읍성과 관아지는 수암봉에서 서쪽으로 길게 뻗는 능선을 이용하여 평지를 감싸도록 쌓았다. 전형적인 평지산성으로, 고려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쌓은 성은 직사각형 모양이고 각 모서리가 약간 둥글게 처리되었다. 성의 둘레는 772m이고, 서쪽과 북쪽은 바깥쪽이 매우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어 주요 방어 지역이었을 듯하다. 성의 남쪽에 문터가 있고 북서쪽 꼭대기의 편평한 터는 장대(주변보다 높게 쌓아올린 장수의 지휘대)가 있던 자리로 여겨진다. 성의 형태로 보아 행정적 역할이 강한 전형적인 읍성으로, 조선 초기 왜구를 막기 위해 세웠던 서해안 지역의 여러 읍성과 같은 계통에 속한다. 관아터는 조선 현종 10년(1669)에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관아의 시설들은 모두 파괴되고 곳곳에 흩어진 주춧돌과 기와조각들이 발견된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