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계선생순절비는 병자호란때 순절한 남양부사 윤계(1585~1636)의 추모비로 현재 화성 남양동 1392-1번지에 위치해 있다. 윤계는 조선 인조 5년(1627)에 문과에 급제한 후 전적, 교리의 벼슬을 거쳐 남양부사를 지냈다. 병자호란 때 군비를 갖추기도 전에 청나라 군대가 기습하여 패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장렬히 싸우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항상 오랑캐와 화의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했으며, 그의 친동생 윤집은 청과의 화의를 강경하게 반대한 3학사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비는 연꽃무늬를 새긴 받침돌 위에 비문을 세운 간결한 모습이다. 현종 9년(1668)에 세운 비로, 당시 우의정이었던 우암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비의 명칭은 민유중이 썼다. 지난 1979년 9월3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부평두레놀이(富平두레놀이)는 2015년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이다. 부평두레놀이는 인천광역시 부평구 삼산동에 전승되는 두레농악이다. 과거에 농사일을 할 때 두레를 짜서 농사일의 신명을 돋우던 두레패 농악을 계승한 것이다. 농사일 시작 전 의식 및 두레기 받기를 기원하는 당산제, 모찌기, 모심기, 김매기 등이 농사 재현, 농사일이 끝나고 호미를 씻어 걸어두는 호미걸이, 일년 농사를 모두 끝내고 당산에 가서 제사하는 당산제의 네 마당으로 구성된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이며 학자인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ㆍ1342~1398)이 조선건국 초기에 국가 경영을 위한 기본적인 통치전범을 마련하기 위하고자 주례(周禮)의 육전체제(六典體制)를 바탕으로 조선의 실정에 적합하게 편찬한 법전서다. 정도전의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은 비록 개인의 사찬(私撰)이기는 하지만 그가 조선건국의 중심에 있었고 실제적으로 조선건국의 이념을 창안한 실질적 책임자였다는 점에서 그의 이 저작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특히 이 책이 토대가 되어 이후경제육전(經濟六典), 육전등록(六典謄錄) 등 법전의 편찬단계를 거쳐서 조선의 기본법전인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에 모체가 되었다는 점과 조선전기의 간본으로는 이 책이 유일한 책이라는 점에서 도서출판과 법전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따라서 국가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다. 현재는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4호인 꽃맞이굿은 꽃피는 봄철을 맞이하여 신(神)의 음덕에 감사 하기 위해 행하는 무속 의례이다. 이 굿에는 무당이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것과 재가집(단골집)의 요청으로 하는 것이 있다. 무당이 자신이 모신 신령님과 자신을 위해 하는 신굿은 자신의 건강과 무업(巫業) 번창을 재가집을 위한 굿은 집안의 평안을 감사하는 것이 목적이다. 즉 꽃맞이굿은 신에게 감사하는 것이 목적이며, 무사태평, 무병장수, 부귀공명을 비는 기복적 내용이 담겨 있다. 문화재청 제공
시흥 거모동 산62번지에 위치한 청주한씨문익공파묘역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인조의 장인인 한준겸(15571627) 선생의 묘역을 중심으로 자손들의 묘가 함께 있다. 묘 앞에는 제물을 놓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상석(床石),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있는 돌로 만든 등)이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과 망주석(望柱石: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돌기둥) 등이 갖추어져 있다. 묘역 아래에는 효종 3년(1652)에 세운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가에 세우던 비)가 있는데 비문은 이정구가 짓고 오준이 글씨를 쓴 것이다. 청주한씨문익공파묘역은 지난 1997년 5월16일에 도 기념물 제163호로 지정됐으며 현재는 청주한씨문익공파종중에서 관리 중이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호인 김재로 묘(金在魯 墓)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청사(淸沙) 김재로(16821759)의 묘소이다. 숙종 28년(170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숙종 36년(1710)에는 춘당대 문과에 급제해 겸설서(兼說書)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간 후 부재학, 대사간, 우의정, 좌의정 등 주요관직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특히 지춘추관사로 있을 때 실록도청 당상을 견직해 경종수정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판중추부사 때에는 청나라에 가서 명사(明史)를 가져오기도 했다. 현재 운연동 만의골 입구 동산 정상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그의 묘역에는 봉분 아랫부분에 둘레돌을 두른 묘와 묘비ㆍ망주석ㆍ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ㆍ돌짐승 한 쌍이 있으며 주위에는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시립박물관에는 그의 51세 때의 모습과 36세 때의 모습을 그린 영정 2폭이 보관되어 있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백자 달항아리는 용인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커다란 백자 항아리다. 크기는 높이 49.0㎝, 아가리 지름 20.1㎝, 밑 지름 15.7㎝이다. 큰 항아리는 형태를 만들거나 구워내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한번에 물레로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고,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따로 만든 후, 두 부분을 접합시켜 완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짧은 아가리가 사선으로 작은 각을 이루며 맵시있게 꺾인 이 항아리는 아가리 주변 아래에서부터 목이 따로 없이 자연스러운 곡선을 그리면서 벌어지다가, 몸체 중앙의 접합부를 지나면서 다시 좁아져, 아가리 지름과 비슷한 크기의 굽에 이른다. 조선시대 백자의 특징인 온화한 백색과 유려한 곡선, 넉넉하고 꾸밈없는 형태를 고루 갖추어진 항아리로 백자호(국보 제261호)와 비교되는 대표적인 백자 항아리이다. 엷은 청색의 유약이 내외면에 고르게 씌워졌으며, 표면의 색조는 유백색이다. 지난 1991년 1월25일 국보 제262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제공
계산동 은행나무(桂山洞 은행나무)는 인천 계양구 계산동에 있는 자연유산으로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1호이다.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부평초등학교 안에서 자라고 있는 계산동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5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5m, 둘레 10m이다. 이 나무는 본래 부평도호부 관아 건물의 주변 환경을 아름답게 하기 위한 풍치목으로 심었다고 한다. 계산동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보살핌 속에 살아온 나무로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인정되어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벼루장은 문방사우 중 하나인 벼루를 만드는 장인을 말한다. 문방사우인 붓과 먹, 종이, 벼루는 가장 오래된 필기도구다. 일반적으로 벼루의 원석은 경도가 낮아서 생동감 있는 조각이 불가능하다. 이 한계를 극복하게 해 준 것이 벼루장 보유자 신근식이 소유하고 있는 단양의 자석(紫石)이다. 신근식 벼루장 보유자는 지난 1998년 9월21일 3대째 벼루장으로 활동해 온 이력을 인정받아 도 무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된 바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이규보 묘(李奎報 墓)는 인천 강화군에 있는 고려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11681241) 선생의 묘소로,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5호이다. 이규보 선생은 고려의 무신정권 하에서 태어나 무신정권에 적극 협력했던 문인의 한 사람으로 명종 19년(1191)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에 올랐다. 시문에 능하였던 선생은 중국의 모방이 많았던 당시에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이야기를 서사시로 엮는 등 민족정신에 바탕을 두고 글을 썼다. 현재 묘역에는 상석과 장명등(長明燈:무덤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으며 좌우에는 문인석무인석망주석이 한 쌍씩 세워져 있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기조 선생 묘는 조선 중기의 문신 호암 이기조(15951653) 선생의 묘소로 군포 산본동 산 1152-11번지에 있다. 그는 광해군 7년(1615)에 병과로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난의 평정에 공을 세웠고, 인조 13년(1635)에 경상도 관찰사를 지낼 때는 많은 덕을 쌓아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묘지는 부인 고령 신씨와의 합장묘이며 봉분 앞에는 향로석과 제물을 차려 놓기 위한 상석이 있다. 1990년 4월30일에 도 기념물 제121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제공
영신군 이이묘(永新君 李怡墓)는 인천 계양구에 있는 인천시 기념물 제43호이다. 영신군 이이는 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손자이자 의성군 채(采)의 여섯째 아들이다. 자는 화보(和甫)로 단종2년(1454)에 출생하여 왕족으로서 종실과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워 정의대부(正義大夫) 영신군(永新君)에 봉해졌으며 부평에 낙향하여 기거하다가 중종21년(1526) 73세로 사망했다. 영신공원(永新公園)으로 조성된 묘역은 그의 묘를 비롯한 가족묘 10여 기가 위치하고 있으며 첫째 아들인 명원군(明原君)의 묘는 양주 장흥면에 따로 있고 둘째 아들인 함원군(咸原君)의 묘가 이곳에 있다. 함원군(咸原君)은 경학에 밝고 정직 청백하고 어전에서 치평지도(治平之道)를 건의하기도 했다. 각묘의 묘갈과 석물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조선시대 왕실 묘제와 시제 그리고 미술 공예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화성 남양동 651-6번지에 위치한 남양풍화당은 남양풍화당기로회라는 현판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일종의 경로당 건물이다. 기로소란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다. 이와 같은 국가적인 단위의 기로소 외에 지방에 설치된 기로소는 흔치않은 예에 속한다. 현재 풍화당에는 기영사좌목(耆英社座目), 풍화당기로회강명(風化堂耆老會講明) 등 기로소의 운영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자료들이 잘 보존돼 오고 있다. 풍화당의 건립연대는 상량문과 기록자료를 종합해 볼 때 1867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중앙관서에 설립되었던 기로소를 따라 지방에서 설립, 운영된 보기 드문 예로 당시 지방의 기로소 운영의 면모를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다. 지난 2002년 9월16일에 도 문화재자료 제112호로 지정된 바 있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교산리고인돌군(橋山里 고인돌群)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교산리에 있는 청동시대 유적건조물로, 1999년 인천시 기념물 제48호로 지정됐다. 교산리고인돌무덤은 별립산(해발 340m) 북쪽 구릉 보호구역(28만7천625㎡)에 11기가 분포하고 있다. 고인돌무덤은 굄돌과 덮개돌의 일부만 훼손되었을 뿐 대체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굄돌과 마감돌 및 덮개돌을 갖춘 북방식 고인돌무덤이 있으며 간혹 크기가 34m나 되는 덮개돌을 갖춘 남방식 계통의 고인돌무덤도 있는데 이들은 굄돌 없이 땅위에 덮개돌만 놓은 이른바 개석식 고인돌무덤이다. 문화재청 제공
공연 형태를 갖춘 검무는 삼국시대 신라의 황창랑 설화에 기인했다고 알려졌다. 이는 가면을 쓴 동자가 춤을 추는 형식으로 조선시대 초까지 처용무와 함께 공연됐다. 조선 숙종 이후로 가면을 벗고 여기검무가 등장했다. 경기검무의 칼춤사위에 나타나는 특징은 양팔을 수평으로 펴서 칼을 돌리는 옆돌림사위가 많고 상대방과 만나 힘을 겨루는 듯한 동작이 궁중검무에 비해 다양하다는 것이다. 또한 음양머리 윗사위는 경기검무만의 독특한 칼춤사위이다. 경기검무는 태평무 보유자 강선영(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의 제자 김근희가 경기검무 보존회를 이끌며 공연 및 전승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난 2011년 6월17일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된 바 있다. 문화재청 제공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화 통제영학당지(江華 統制營學堂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는 교육시설로, 2001년 인천시 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됐다. 통제영 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로 여겨진다. 조선수사해방학당, 총제영학당으로도 불렸다. 조선정부는 해군 지휘관 양성을 목표로 통제영학당을 세웠다. 1893년 2월 기존의 수군편제를 해군편제로 개편하면서 그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같은 해 3월 해군사관 및 하사관 양성학교인 통제영학당 설치령을 공표하고 갑곶진 인근에 교사를 신축하여 1893년 10월에 사관생도 50명, 수병 300명을 모집하면서 개교하였다. 개교와 함께 영국장교들이 교관으로 부임하여 교육하였으나 1894년 10월에 일본의 압박으로 폐교되었다. 문화재청 제공
평택은 소샛들이라는 넓은 들을 끼고 있어 예로부터 농산물이 풍부했다. 이는 평택농악을 이루는 중요한 배경이 됐다. 또한 평택 근처의 청룡사는 일찍부터 사당패들의 근거지가 돼 조선 말기에는 그들의 농악이 크게 발달했다. 농악에 사용되는 악기로는 꽹과리, 징, 북, 버꾸, 호적, 나팔이 있다. 악기에 있어서 징과 북이 타지역에 비하여 적으며 소고와 법고의 구별이 없다. 가락의 가림새가 분명하며 노래굿이 있는 것도 특이하다. 평택농악은 두레농악의 소박한 전통에 뿌리를 두면서도 공연성이 뛰어난 남사당패 예인들의 전문적인 연희를 받아들여 복합적으로 구성한 수준높은 농악이다. 무동놀이(어른의 목말을 타고 아이가 춤추는 놀이)가 특히 발달했다. 지난 1985년 12월1일 국가무형문화재 제11-2호로 지정된 바 있다. 문화재청 제공
청일조계지 경계계단(淸日租界地 境界階段)은 인천 중구 전동에 있는 조선시대 유적건조물로 2002년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됐다. 이 지역은 1883년 일본 조계(租界)를 시작으로 1884년 청국 조계(租界)가 설정되는 경계지역으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으로 연결되어 계단과 조경이 마련된 공간이다. 약 120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본 조계지 경계계단은 중앙에 석조 계단이 형성되어 있고 양단을 중심으로 급한 경사인 점을 감안하여 계단참을 두고, 조경식재 공간을 마련하여 공간의 이용적 측면과 인천항 경관을 여유롭게 즐길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자유공원의 서남쪽 가파른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계단을 중심으로 청국과 일본의 건물들이 확연하게 서로 다른 양식들로 번화하게 들어서 있다. 청일조계지 경계계단은 계단 자체의 가치는 적으나 역사성 및 장소적 측면의 가치가 높다. 문화재청 제공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으로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함께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처음에는 연무당으로 부르던 것을 숙종(16741720) 때 연병관이라 쓴 현판을 하사하여 통칭 연병관 또는 연무관이라 부르고 있다. 이곳에서 무술을 닦은 무사들 중 무예가 뛰어난 사람은 선발되어 한양으로 진출하였다고 한다. 건물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벽은 널벽으로 좌우 벽에 널문을 3개씩 설치했다. 앞면은 벽이나 문이 없이 개방되어 있는데 흔적이 남아있어 여러 차례에 걸친 보수공사로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광주 중부면 산성리 400-1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지난 1972년 5월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된 바 있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