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실장군묘는 고려 후기의 무신 이방실(?1362) 장군과 그의 두 부인을 함께 모신 합장묘이다. 장군은 충목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모신 공으로 왕이 즉위하자 무관의 벼슬인 중랑장에 오르게 됐다. 공민왕 8년(1359)에 4만 여명의 홍건적이 침입해오자 관군들과 적을 무찌르는 큰 공을 세워 왕명의 출납과 군기를 맡는 추밀원 부사가 됐다. 공민왕 10년(1361)에 20여 만명의 홍건적이 다시 침입해 개경까지 오자 여러 장군들과 합심하여 적을 완전히 물리쳤다. 그러나 그의 공을 시기한 간신 김용의 모략으로 공민왕 11년(1362)에 살해됐다. 현재 묘역은 경기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 산81번지에 위치해 반달 모양으로 두둑하게 둘러 싸여 있고 그 앞에 국한문 혼용으로 쓰여진 비문과 무인석 등이 배치돼 있다. 지난 1972년 7월10일 경기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제공
욕은지는 인천 계양구에 있는 조선시대 유적건조물로 1982년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됐다. 인천시 계양구 부평초등학교에 자리한 욕은지는 학교 동쪽에 있는 어사대와 함께 있다. 원래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조선 고종 24년(1887)에 새로이 고쳐 지으면서 이곳으로 옮겼다. 돌을 쌓아 만든 연못으로 크기는 가로 18m, 세로 16m이다. 가운데에 둘레 7m의 돌산을 만들어 풀과 나무를 심고, 다리를 만들어 남쪽과 연결하였다. 연못 동쪽에 쌓여있는 돌 가운데에는, 고종 24년에 고쳐 지었다는 기록을 새긴 돌이 끼어 있다. 정조 21년(1797) 왕은 김포의 장릉을 참배하고, 부평을 경유하여 생부를 모신 수원 현륭원에 갔다고 전해진다. 이 때 부평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이 곳에서 활을 쏘고 손을 씻은 것으로 여겨진다. 문화재청 제공
안양사귀부는 안양사 대웅전 앞에 위치하고 있는 문화재로 원래 위치는 알 수 없다. 비신과 이수는 없어지고 귀부만 전하고 있다.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비곽을 형성한 후 지대석과 귀부가 하나의 석재로 조성돼 있다. 귀부의 머리는 용의 형상인데, 뒷목이 몸체에 붙어 답답한 느낌을 준다. 얼굴에는 눈ㆍ코ㆍ입 등이 묘사되었는데, 주변에는 갈기가 표현됐고 목에는 인갑문이 시문됐다. 등에는 육각형의 귀갑문이 촘촘히 시문돼 있다. 앞발은 3개의 발가락이 전면을 향하고 뒷발은 앞을 향해 웅크린 형상을 했다. 귀부의 중앙에는 비신을 꼽기 위한 장방형의 비좌가 마련됐다. 비좌의 측면에는 구름 무늬, 윗면에는 단엽 24판의 복련이 시문됐다. 그리고 비좌의 중앙에는 장방형의 비신공이 마련됐다. 용두화한 머리와 더불어 귀갑문, 연화문의 조식을 볼 때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제공
원층사지는 인천 강화군에 있는 사찰터로 1995년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됐다. 별립산(別立山)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이 절터를 마을 사람들이 아직도 원층골이라 부르고 있는 사실로 보아 강도지(江都誌)에 언급된 원층사터임을 알 수 있다. 사찰의 규모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석재유물로 미루어 꽤 큰 사찰로 생각된다. 불상은 보이지 않지만 큼직한 연꽃무늬 대좌(臺座)가 남아 있어서 석불상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석탑 부재들도 꽤 많이 남아 있는데 특히 석탑 옥개석은 모두 남아 있으며, 3단의 옥개받침이나 독특한 수법은 고려시대의 작품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강도지의 기록대로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던 시기의 사찰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석탑이나 불상의 부재들은 당시의 불교 미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제공
요지란 토기나 기와, 자기를 굽던 가마터를 말한다. 수리산 남동쪽 해발 9198m의 구릉에 자리한 이 가마터는 조선시대 자기를 굽던 곳으로 비교적 가파른 암반 위에 있다. 가마 이외에 주변관련 유구는 확인할 수 없다. 가마는 7칸으로 아궁이 쪽이 좁고, 굴뚝부분이 넓은 조선 백자 가마의 일반구조를 보이지만 아궁이 구조가 특이하다. 주로 대접과 접시종류가 많이 나왔고 항아리편이나 합으로 된 여러 종류의 자기가 발견 되었다. 특히 청화백자 조각이 많이 있었고, 대접에 복(福), 제(祭)의 여러 글자들이 씌어 있다. 이는 이 가마터가 일상 생활용기만 만든 것이 아니라, 특수용도의 그릇도 만들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나라에서 관리하던 가마터(관요)인 금사리 가마터에서도 이러한 자기류와 가마구조를 보이고 있어, 같은 시기(18세기 전반)에 제작되었음을 알려주며, 관요와 일반가마터의 관계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산본동 가마터는 심한 파괴에도 불구하고 가마 제작방법과 관요와 일반가마터의 관계를 보여주는 조선후기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일반가마터에서도 특수용도의 그릇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참성단 중수비는 인천 강화군에 있는 조선시대 기록유산으로 1995년 문화재자료 제13호로 지정됐다. 참성단(인천시사적 제136호)을 새로이 보수한 후 그 내용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가파른 바위 윗면을 손질해 그 위에 비문을 새겼다. 마니산 꼭대기에 자리잡은 참성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조선 숙종 때 강화유수를 지내던 최석항이 지역 내를 순찰하며 마니산에 올랐다가 이곳이 무너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당시 전등사 총섭이었던 승려 신묵에게 명해 새로이 고쳐 짓도록 했다. 최석항은 참성단은 단군이 돌을 쌓아 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하던 곳이라며 수천 년이 지나도록 후손들이 우러러보며 공경할 곳이니 고쳐서 완전하게 하는 일을 어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적었다. 비는 조선 숙종 43년(1717) 5월에 마련해 놓은 것으로 비문에는 참성단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연, 참성단에 대한 선조들의 뜻 등에 관한 기록들이 함께 적혀 있다. 문화재청 제공
모락산성은 지난 2007년 9월7일 지정된 경기도기념물 제216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산 122번지 일대다. 2002년과 2005년 두 번에 걸친 세종대박물관의 지표조사 결과 자연지형을 최대한으로 이용, 석축 또는 토석 혼축을 병용해 축조한 해발 385m 길이 878m의 테뫼식 산성이다. 내부시설로는 문지, 망대지, 치성, 건물지 등이 확인됐다. 유물로는 백제계의 호, 옹, 완 등의 토기편류가 주로 채집돼 한성백제기에 초축된 성으로 확인됐다. 백제 석축성곽 축조의 시원양식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성곽이다. 산성의 역할은 한성기 백제시대 때 남쪽에서의 마한의 침입에 대비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했으며 수도방위 역할을 담당했던 풍납토성의 배후 거점성으로써의 큰 역할을 담당했던 성이었다. 문화재청ㆍ경기문화재연구원 제공
남북동 조병수가옥은 인천 중구에 있는 대한제국시대 유적건조물로, 1997년 문화재자료 제16호로 지정됐다. 조병수가옥은 1890년에 세운 중류층 주택이다. 대문채와 안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부 면이 끊어진 ㅁ자 형태이다. 안채는 앞면 3칸옆면 1칸 반 규모이며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배치했다. 안방 옆에는 부엌을 달았으며 부엌 천장 일부를 낮춰 안방에서 사용하는 다락방을 꾸몄다. 대문채는 출입문인 대문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사랑방을, 서쪽에는 방 1칸과 창고를 두었는데 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이와 같은 평면 구성은 전형적인 중부형 주거이며, 경기충청지방에 많은 주거 형식이다. 안채의 중도리에 기록된 상량문에 의하면 1890년에 건립됐다고 한다. 문화재청 제공
지난 2016년 11월 8일 시도무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된 자리걷이는 서울과 경기지역에서 장례를 치룬 당일 밤에 행하는 의례 중 하나로 일종의 정화의식이다. 무속신앙에서의 주검과 주검을 둘러싼 것을 부정하다고 정의하는데 이는 산 사람의 관점에서 보는 관념이다. 부정을 정화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의식에서 자리걷이가 행해지며 이런 죽음 의례 배경은 죽은 자를 위한 의례를 통해 산 자들의 길복을 추구한다. 자리걷이는 소규모 의례로 절차와 내용이 복잡하지 않으며 크게 부정청배, 자리걷이, 뒷전으로 구성된다. 굿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춤, 노래, 반주음악 등이 수반되지 않는다. 최소한의 절차는 대부분 앉아서 연행하며, 고리짝이나 키를 이용해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여러 지역, 여러 사람에 의해서 자리걷이가 행해지지만 정영도의 자리걷이는 구성이나 내용에 있어서 각별하게 주목되는 절차를 갖춘다. 부정한 자리와 부정한 곳을 정화하는 절차가 구체적으로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전통문화유산으로서의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난다.자리걷이 보유자 정영도는 부천지역에서 무업을 해왔으며 부천 넘말 신씨네 만신으로 불리던 김씨와 구리 돌다리 권씨 만신으로부터 자리걷이를 학습하였다. 1993년에는 자리걷이 보존회를 결성하여 경기도 자리걷이의 전승을 위해 힘쓰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강화 서도 중앙교회는 인천 강화군에 있는 일제강점기 유적건조물로, 1997년 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됐다. 강화 서도 중앙교회 건물은 1923년 교인들의 헌금으로 지은 한옥 예배당이다. 1902년 감리교 전도사 윤정일이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 이곳 주문도리에 들어왔고, 1905년에는 교회와 신도가 마음을 모아 영생학교를 설립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1923년 교인들의 헌금으로 이 교회를 새로 지었다. 1978년 주문교회에서 서도 중앙교회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며, 홑처마집이다. 건물 안은 중세 전기의 서양교회 양식을 하고 있으나 매우 단순해, 예배실로 쓰이는 좁은 신랑(身廊)과 측랑(側廊), 중앙의 강단으로 구성돼 있다. 우리 전통 목조건물의 가구형식을 바탕으로 서양교회를 지었다는데 큰 의미를 지닌다. 문화재청 제공
조각장은 예전에 공조 교서관, 선공감에서 조각일을 맡았던 장인을 말한다. 조각은 쇠끌로 선이나 면을 파고 표면에 무늬를 만드는 기법이다. 우리말로는 파기인데 주금이나 단금 따위의 표면을 장식하는 기술이다. 기법으로는 평각, 육각, 투각, 고각, 상감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는 지난 2004년 1월5일부로 문화재청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조각장 보유자 곽홍찬은 조선후기 인사동에서 곽씨공방을 운영했던 곽순복, 부친 곽상진을 이어 3대에 걸쳐 가업을 계승하였다. 곽씨 공방은 주로 궁궐에서 필요한 물품을 비롯해 양반들의 고급 생활용품, 또는 향로와 사리함과 같은 고급 사찰용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곽홍찬은 부친 외에도 두 명의 스승으로부터 전통적 방식의 조각 기술을 익혔으며, 국보급 문화재나, 중요한 문화유산을 원형대로 복원해 널리 알리고 전승시키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백제 칠지도를 은입사 상감기법으로 원형 복원했으며 일제강점기 때 유출 돼 현재 보스턴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려시대 은제도금주자 및 승반도 복원했다. 최근에는 그의 기술과 이론을 적용한 은입사 기법으로 윤도와 천상열차분야지도 재현에 성공했다. 문화재청 제공
화도돈대는 인천 강화군에 있는 조선시대 성곽시설로, 1999년 문화재자료 제17호로 지정됐다.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친다.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에 이후 5개 돈대가 추가로 지어졌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천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천262명이 80일정도 걸려서 쌓았다. 돈대 축조를 기획하고 감독한 이는 병조판서 김석주였고 실무 총괄은 강화유수 윤이제였다. 화도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오두돈대광성돈대와 함께 광성보에 속했다. 원래는 화도보 소속이었으나, 1710년(숙종 36)에 화도보가 폐지되면서 광성보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방형 구조로 둘레가 129m이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중기의 문신인 충숙공 이수(?1645)의 묘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궁내로 52에 위치해있다. 그는 왕족의 후손으로 학문이 뛰어났으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에는 국왕을 모시게 돼 선전관에 임명됐다. 광해군 9년(1617)에 이이첨 등의 죄를 밝히고 윤선도 등을 변호하다 전라남도 순천에 유배됐으나 인조반정으로 관직에 복귀하게 됐다. 인조 2년(1624)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국왕을 공주로 모시고 갔으며, 인조 5년(1627)에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국왕을 강화로 모셨다. 죽은 뒤 정1품 벼슬 등급에만 기록할 수 있는 현록대부에 오르기까지 했다. 묘는 부인 정씨와의 합장묘로 쌍분이고 봉분 아랫부분에는 길고 네모난 둘레석을 돌려 묘를 보호하고 있다. 그 좌우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배치되어 있다. 묘 아래에는 이재가 글을 짓고 이승휘가 글씨를 쓴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무태돈대는 인천 강화군에 있는 조선시대 성곽시설로, 1999년 문화재자료 제18호로 지정됐다.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보통 높은 평지에 쌓아 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해 포를 설치해 둔다. 특히 강화도에 있는 돈대들은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이에 놀란 조정에서 해안 경비를 튼튼히 하기 위해 곳곳에 쌓아두도록 한 것이다. 창후리 선착장에서 북쪽으로 난 비포장길을 따라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 돈대는 해안을 따라 직사각형으로 길게 쌓았다. 강화유수를 지내던 윤이제가 해안 방어를 위해 쌓은 여러 돈대들 중 하나이다. 무태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중 하나로 인화돈대광암돈대구등곶돈대작성돈대와 함께 인화보의 관할 하에 있었다. 방형 구조로 둘레가 145m, 석벽의 높이는 120~530㎝이다. 창후리 포구에서 북쪽 길로 간다. 문화재청 제공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은 불조직지심체요절또는 불조직지심체라고도 부르며 역대 여러 부처와 고승들의 법어, 대화, 편지 등에서 중요한 내용을 뽑아서 편찬했다. 중심 주제인 직지심체는 사람이 마음을 바르게 가졌을 때 그 심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백운화상이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 원나라에서 받아온 불조직지심체요절 1권의 내용을 대폭 늘려 상하 2권으로 엮은 것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크기는 세로 21.4㎝, 가로 15.8㎝이다. 간행기록에 의하면 고려 우왕 4년(1378) 6월에 백운화상이 입적한 여주 취암사에서 제자 법린 등이 우왕 3년(1377)년에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한 금속활자본을 바탕으로 간행한 것이다. 서문은 1377년에 성사달이 쓴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앞부분에 1378년에 이색이 쓴 서문을 추가하여 간행하였다. 이와 동일한 판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있으나, 이 판본이 인쇄상태가 좋은 편이고 두 개의 서문이 붙어있어 완전한 형태이다. 문화재청 제공
전등사 강설당 아미타불탱은 인천 강화군에 있는 일제강점기에 그려진 탱화(불화)로 2002년에 문화재자료 제22호로 지정됐다. 아미타불탱은 전등사 강설당에 보존되어 있다.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액자나 족자 형태로 만들어진 불화를 말한다. 1918년에 제작된 그림으로 많은 존상들이 정연하게 늘어서 있어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각 인물들의 얼굴과 자세, 의습선 등에서 정치(精緻)한 필력(筆力)을 엿볼 수 있다. 색 배합은 밝은 홍색과 녹색, 황색 위주이고 간간이 백색과 청색을 섞어 썼다. 포대위에 선정인을 취하고 있는 아미타불의 신광과 두광, 그리고 원만, 구족한 상호와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어깨선의 처리는 절로 평화로운 극락세계로 인도받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문화재청 제공
전주이씨안양군묘는 조선 성종의 셋째 아들 안양군 이행(?1505)의 묘로 경기 군포시 산본동 산158-1번지에 위치했다. 이행의 어머니는 성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다. 연산군은 생모인 폐비 윤씨 사건의 원인을 성종의 후궁인 정씨와 엄씨가 무고하게 왕에게 고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연산군 10년(1504)에 안양군과 정씨, 봉안군(성종의 여섯째 아들)에게 사약을 내렸다. 1506년에 중종이 즉위하면서 복직됐고 중종 15년(1520)에 부인의 상소에 따라 다시 장례를 지내도록 교지가 내려졌다. 묘는 부인 능성 구씨와의 합장묘이며 묘역은 원래의 자리가 아니라 고종 32년(1895) 양주에서 석물과 함께 이장한 것이다. 봉분 앞에는 제물을 놓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상석이 있고, 그 앞에 불을 밝히기 위한 장명등이 있다. 좌우로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망주석과 문인석 등의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묘역 앞에는 신종묵이 글을 짓고, 이일형이 글씨를 쓴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세워져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시 동구 송현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시대 유적건조물로, 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됐다. 송현배수지는 인천 최초의 상수도 시설이자 도시계획 시설로 1905년 중도(中島)박사에 의해 경인수도 설계가 완성됨에 따라 1906년 11월 착공해 1908년 준공됐다. 또한 1910년 10월 노량진 수원지 정수시설이 준공돼 같은 해 12월 급수를 하기 시작했다. 송현배수지는 표고 56.8m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모는 부지면적 3만6천780㎡, 5천㎡로 저수조 3개를 갖추고 있다. 현존하는 배수지 건물로는 제수변실과 23단의 화강석으로 된 장대석 계단과 철제 정문이 있고 정문은 화강석 초반 위에 콘크리트 기둥을 심고 4각 모양과 둥근 화강석의 주두로 이뤄져 있다. 제수변실은 배수지에서 배수관의 단수 및 유압조절기능을 담당하는 제수밸브를 보호하는 시설물로써 원통형이며 일체식 무근 콘크리트 구조로 돼 있다. 문화재청 제공
석우동석실분은 삼성산 남쪽 기슭 중턱에 있는 안양사의 오른편에 1기가 있고 이보다 위쪽에 있는 십자 바위 아래쪽에 또 다른 1기가 있다. 유적은 안양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현재까지 2기의 무덤이 알려졌으나 지형 조건으로 보아 더 많은 무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곳의 무덤은 무덤방으로 통하는 널길이 마련되지 않은 횡혈식 돌방무덤이다. 돌방의 세 벽은 막돌을 가지고 축조했으며 나머지 한 벽은 커다란 판석을 이용하여 축조한 공통점을 지닌다. 돌방의 길이는 약 4.5m, 너비는 1.7m이며 현재 높이는 약 1m다. 십자 바위 아래쪽의 무덤은 도굴됐고 금귀걸이가 나왔다고 전하지만 그 유물이 어디에 있는 지는 알 수 없다. 석수동 돌방무덤은 무덤 양식의 변천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므로 자세한 발굴 조사가 뒤따라야 할 것으로 평가받는다. 헌재 시도기념물 제126호인 석우동석실분은 지난 1991년 4월12일에 기념물로 지정됐으며 현재 소재지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53-3번지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시 연수구 동춘동 흥륜사에 있는 불화이며,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27호로 지정됐다. 흥륜사 아미타불도는 조선시대 그려진 불화로, 일부 채색이 박락되기는 했으나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구성은 가운데 아미타불좌상을 중심으로 주위에 보살과 사천왕상, 나한상 등이 둘러싸고 있는 단순한 구도로 되어 있으며, 황색 바탕에 짙은 붉은색과 남색, 밝은 녹색을 주로 사용했다. 아미타불의 좌우에는 백의(白衣)를 입은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배치됐는데 보관이나 천의 표현 등에서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모두 녹색의 원형 두광을 갖추고 있다. 특히 백의관음이 협시로 등장한 것은 19세기 이후의 조선 후기 불화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며 아미타불상과 함께 현세의 기복적인 성격을 말해준다. 그 양옆으로 2구씩 배치된 사천왕상은 머리에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신장상의 모습으로 표현됐다. 현재 화기가 없어 조성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전체 화면의 구성이나 채색, 세부표현 등에서 조선 후기의 아미타불도에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아미타불상의 머리표현과 백의관음의 등장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제작된 불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