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문화유산] 군포 산본동 조선백자 요지

요지란 토기나 기와, 자기를 굽던 가마터를 말한다. 수리산 남동쪽 해발 9198m의 구릉에 자리한 이 가마터는 조선시대 자기를 굽던 곳으로 비교적 가파른 암반 위에 있다. 가마 이외에 주변관련 유구는 확인할 수 없다. 가마는 7칸으로 아궁이 쪽이 좁고, 굴뚝부분이 넓은 조선 백자 가마의 일반구조를 보이지만 아궁이 구조가 특이하다. 주로 대접과 접시종류가 많이 나왔고 항아리편이나 합으로 된 여러 종류의 자기가 발견 되었다. 특히 청화백자 조각이 많이 있었고, 대접에 복(福), 제(祭)의 여러 글자들이 씌어 있다. 이는 이 가마터가 일상 생활용기만 만든 것이 아니라, 특수용도의 그릇도 만들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나라에서 관리하던 가마터(관요)인 금사리 가마터에서도 이러한 자기류와 가마구조를 보이고 있어, 같은 시기(18세기 전반)에 제작되었음을 알려주며, 관요와 일반가마터의 관계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산본동 가마터는 심한 파괴에도 불구하고 가마 제작방법과 관요와 일반가마터의 관계를 보여주는 조선후기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일반가마터에서도 특수용도의 그릇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빛나는 문화유산] 자리걷이

지난 2016년 11월 8일 시도무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된 자리걷이는 서울과 경기지역에서 장례를 치룬 당일 밤에 행하는 의례 중 하나로 일종의 정화의식이다. 무속신앙에서의 주검과 주검을 둘러싼 것을 부정하다고 정의하는데 이는 산 사람의 관점에서 보는 관념이다. 부정을 정화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의식에서 자리걷이가 행해지며 이런 죽음 의례 배경은 죽은 자를 위한 의례를 통해 산 자들의 길복을 추구한다. 자리걷이는 소규모 의례로 절차와 내용이 복잡하지 않으며 크게 부정청배, 자리걷이, 뒷전으로 구성된다. 굿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춤, 노래, 반주음악 등이 수반되지 않는다. 최소한의 절차는 대부분 앉아서 연행하며, 고리짝이나 키를 이용해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여러 지역, 여러 사람에 의해서 자리걷이가 행해지지만 정영도의 자리걷이는 구성이나 내용에 있어서 각별하게 주목되는 절차를 갖춘다. 부정한 자리와 부정한 곳을 정화하는 절차가 구체적으로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전통문화유산으로서의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난다.자리걷이 보유자 정영도는 부천지역에서 무업을 해왔으며 부천 넘말 신씨네 만신으로 불리던 김씨와 구리 돌다리 권씨 만신으로부터 자리걷이를 학습하였다. 1993년에는 자리걷이 보존회를 결성하여 경기도 자리걷이의 전승을 위해 힘쓰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빛나는 문화유산] 조각장

조각장은 예전에 공조 교서관, 선공감에서 조각일을 맡았던 장인을 말한다. 조각은 쇠끌로 선이나 면을 파고 표면에 무늬를 만드는 기법이다. 우리말로는 파기인데 주금이나 단금 따위의 표면을 장식하는 기술이다. 기법으로는 평각, 육각, 투각, 고각, 상감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는 지난 2004년 1월5일부로 문화재청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조각장 보유자 곽홍찬은 조선후기 인사동에서 곽씨공방을 운영했던 곽순복, 부친 곽상진을 이어 3대에 걸쳐 가업을 계승하였다. 곽씨 공방은 주로 궁궐에서 필요한 물품을 비롯해 양반들의 고급 생활용품, 또는 향로와 사리함과 같은 고급 사찰용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곽홍찬은 부친 외에도 두 명의 스승으로부터 전통적 방식의 조각 기술을 익혔으며, 국보급 문화재나, 중요한 문화유산을 원형대로 복원해 널리 알리고 전승시키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백제 칠지도를 은입사 상감기법으로 원형 복원했으며 일제강점기 때 유출 돼 현재 보스턴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려시대 은제도금주자 및 승반도 복원했다. 최근에는 그의 기술과 이론을 적용한 은입사 기법으로 윤도와 천상열차분야지도 재현에 성공했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의 문화유산] 흥륜사 아미타불도

인천시 연수구 동춘동 흥륜사에 있는 불화이며,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27호로 지정됐다. 흥륜사 아미타불도는 조선시대 그려진 불화로, 일부 채색이 박락되기는 했으나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구성은 가운데 아미타불좌상을 중심으로 주위에 보살과 사천왕상, 나한상 등이 둘러싸고 있는 단순한 구도로 되어 있으며, 황색 바탕에 짙은 붉은색과 남색, 밝은 녹색을 주로 사용했다. 아미타불의 좌우에는 백의(白衣)를 입은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배치됐는데 보관이나 천의 표현 등에서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모두 녹색의 원형 두광을 갖추고 있다. 특히 백의관음이 협시로 등장한 것은 19세기 이후의 조선 후기 불화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며 아미타불상과 함께 현세의 기복적인 성격을 말해준다. 그 양옆으로 2구씩 배치된 사천왕상은 머리에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신장상의 모습으로 표현됐다. 현재 화기가 없어 조성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전체 화면의 구성이나 채색, 세부표현 등에서 조선 후기의 아미타불도에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아미타불상의 머리표현과 백의관음의 등장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제작된 불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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