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위인 네명이 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신사임당, 세종대왕, 율곡 이이, 퇴계 이황. 모두 지폐 속 인물이다. 1천원권, 5천원권, 1만원권, 5만원권을 보고 있노라면 이 중에서도 단연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눈에 띈다. 돈의 값어치가 비싸서도, 외모가 출중해서도 아니다. 모자(母子)가 나란히 화폐의 한 면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율곡 선생은 1536년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사임당 신씨가 율곡을 낳던 날 밤, 검은 용이 바다에서 침실로 날아와 아이를 안겨줘 어릴 적에는 현룡(見龍)으로 불렸고, 훗날 율곡(栗谷)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호는 자신이 성장한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에서 따온 것이다. 이처럼 율곡 선생의 본향(本鄕)이며, 문향 파주(文鄕 坡州)의 근간인 파주지역에서 지난 10월 13일부터 14일까지 뜻깊은 축제가 열렸다. 파주가 낳은 대선현 율곡 선생을 추앙하는 제25회 율곡문화제가 바로 그것.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율곡선생유적지에서 펼쳐진 문화제는 조선 중기 선현들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기에 충분했다. # 율곡 선생의 유덕을 기리다 율곡고등학교에서 율곡선생유적지까지 이어지는 유가행렬 재연ㆍ시민 길놀이가 제25회 율곡문화제의 화려한 막을 올렸다. 율곡선생이 구도장원 후 귀향길을 재연한 유가행렬에 시민들이 함께 참여했다. 예년과 다르게 참가자들은 미리 주문받았던 재미있는 분장을 하고 율곡 선생의 가치를 알아가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어 율곡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된 자운서원(경기도기념물 제45호) 문성사에서 선생을 추모하는 추향제가 열렸다. 추향제는 집례관의 참홀에 따라 초헌관 이재율 경기도 경제부지사, 아헌관 이명세 파주시 노인회장, 종헌관 기우남 여충사 도유사 순으로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봉행됐다. 이어 권종인 파주시장 부인, 이평자 파주시의회 부의장, 종헌관 이상면 성균관 석전교육원 겸임교수 순으로 헌작을 하는 신사임당 추향제도 이어졌다. 추향제가 진행되는 동안 눈에 띄는 단체가 있었다. 이번 문화제의 꽃인 이야기로 만나는 율곡기행에 참가한 200여 명의 참가자들. 이야기로 만나는 율곡기행은 파주문화원 소속 문화해설사 15명이 율곡 이이 선생의 발자취를 유적지 현장을 직접 찾아가 이야기로 들려주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다. 오랜 시간 율곡선생의 생전 모습이 담겨 있는 유적지가 파주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타 지역민은 물론 파주지역 신도시에 둥지를 튼 시민들조차 이를 잘 알지 못하고 있어 뜻깊은 기행이 마련된 것이다. 오전 9시에 모인 기행단은 오전 추향제에 참여한 이후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제자들과 시와 학문을 나눴던 화석정, 율곡 선생이 자란 율곡리마을, 파주지역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서원인 파산서원을 둘러봤다. 장작 7시간 동안 진행된 기행에서 이들은 화석정의 유래를 시작으로 밤나무골 이야기, 임진강을 밝힌 화석정, 효성이 깃든 시묘살이, 화석정과 우계를 오가며 쌓은 우정(友情) 등 500년을 이어 온 이야기들을 만나며 민족사를 빛낸 율곡 이이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서교송 파주문화원 사무국장은 율곡문화제가 제례만 지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율곡 선생을 알리는 것이 중심이라며 율곡선생이 자라고 누워있는 이곳에서 방문객들이 끌려가는 행사가 아닌 자신이 직접 참여해 행사를 이끌어나가는 문화제로 준비했다고 말했다. # 율곡 선생과 통(通)하다다양한 문화예술의 향연 율곡선생의 제례를 마치고 다양한 행사가 마련돼 있는 율곡선생유적지 내 잔디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할머니 몇 분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율곡 선생에 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파주 설화를 보며 그림에 맞는 지역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와 함께하는 파주이야기를 진행하는 문화해설사였다. 국학지능원에서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 수업을 받고 있는 이들은 파주 역사 속 이야기, 옛날 미담 등을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고 재미있게 들려줘 가족 단위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과거 시험을 보는 듯한 전국한시백일장엔 웃지 못할 풍경도 벌어졌다. 장원급제를 위해 화선지를 깔고 먹을 가는 청년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백발노인들이 자리를 메웠던 것. 포부만큼은 젊은이들 못지않았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백일장 참가자들은 율곡 선생의 주옥같은 글을 되새기며 온고지신의 지혜를 자신의 글 속에 풀어냈다. 백일장에 참여하기 위해 대전에서 올라 온 박병성씨(68)는 율곡선생의 뜻을 기리며 애국정신을 주제로 글을 써내려갔다면서 수상 여부를 떠나 선생의 훌륭한 학식과 인품을 느낄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전했다. 이어 마당을 쓰는 빗자루만큼이나 큰 대붓으로 율곡선생의 글귀를 써내려가는 서예퍼포먼스가 진행될 때에는 관람객들이 이를 구경하기 위해 몰리며 장사진을 이뤘다. 이밖에 파주역사, 파주의 인물을 맞추는 장원급제 퀴즈대회, 율곡백일장사임당 미술제, 전통예절 배우기, 사물놀이 배우기 등의 관광객 참여행사와 국악뮤지컬 갈라 효녀심청, 서원음악회, 국악한마당 등의 공연이 펼쳐져 관람객들은 율곡 선생을 기리는 동시에 다양한 문화예술의 향연을 누렸다. # 율곡문화제, 세계로 향한다 율곡문화제가 올해로 25살 청년이 됐다. 그러나 아쉽게도 다른 지역 축제나 문화제처럼 규모가 크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율곡선생이 잠들어 있는 이곳 파주가 지역적 특색상 교통이 불편한 탓에 율곡선생 유적지가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상황의 율곡문화제에도 해 뜰 날이 기다리고 있다. 내년 파주의 동서를 연결하는 56번 도로가 개통되면 운정신도시, 서울지역, 강원지역에서의 접근성이 좋아져 율곡 선생을 알고 싶은 이들이 언제든지 이곳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난 6월 파주시가 율곡선생 관련 학술대회를 열고 이를 토대로 율곡선생 유적지를 국가사적 승격을 추진하면서 율곡선생 유적지에 대한 관심도가 더욱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감도 감출 수 없다. 파주문화원이 율곡 선생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야심차게 기획했던 율곡문화제가 지역민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제로 거듭나는 전환점이 된 순간이 머지 않았다. 우관제 파주문화원장은 현재 경기도문화재인 율곡선생 유적지를 국가문화재로 업그레이드 하려고 준비 중이라며 이를 바탕으로 내년부터는 율곡선생의 유덕을 기리는 문화제를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 알리고 파주를 문화의 도시로 알리는데 힘쓸 계획이라고 밝혔다. 장혜준 기자 wshj222@kyeonggi.com
분청사기(粉靑沙器)란 말은 1930년대 고유섭 선생이 당시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미시마[三島]란 용어에 반대하여 새롭게 지은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줄임말이다. 퇴락한 상감청자에 그 연원을 두는 이 사기는 14세기 후반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 생산된 도자기로 청자에서 백자로 전이되는 전환기에 우리나라에서만 독특하게 발전된 도자 생산 양식이다. 분청사기의 특징은 청자나 백자에서는 볼 수 없는 자유분방하고 활력에 넘치는 실용적인 형태와 다양한 분장기법(粉粧技法), 그리고 의미와 특성을 살리면서도 때로는 대담하게 생략, 변형시켜 재구성한 무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분청사기가 유교의 사회기반 위에서 성장하였고 고려 이래의 불교와 함께 표면상으로는 크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지방마다 특색이 있는 전통의 영향이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청자, 청화백자, 백자와 같은 도자기가 대부분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도자기 제작을 담당하던 관요(官窯)에서 제작되었다면, 분청사기는 민간에서 주도된 민요(民窯)에서 제작되었다. 그래서 지역별, 시기별로 그 형태 및 문양이 매우 다양하고 흥미롭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분청사기는 세계 도자기 역사에서 유례없는, 매우 독창적인 도자기 종류로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매우 가치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 장군은 측면이 완전한 직사각형에 가깝고 양쪽 옆면이 직선에 가까운 완만한 곡면을 이루고 있어서 크고 듬직하며 무게감이 느껴지는 형태이다. 몸통의 듬직함과 같이 입술도 넓고 굵으며 굽다리도 완전한 직사각형으로 넓게 만들어 붙여서 전체는 크고 듬직하며 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다. 면(面)과 선(線)의 상감기법으로 모란문과 당초문, 그리고 인화문이 몸체 전면에 화려하게 조각된 분청사기로 유약이 굽 안바닥에 이르기까지 전면에 시유(施釉)되어 기형, 장식과 더불어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안정감 있는 당당한 기형에 활달하고 대담한 문양, 섬세한 인화기법의 표현 등에서 15세기 분청사기장군을 대표하는 예이며 도자사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분청사기는 16세기경 일본에 전파되어 차(茶)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에게 다구(茶具)로 사랑받기 시작하였고, 임진왜란시 많은 도공들이 일본에 끌려가 일본 도자기술이 발전할 수 있게 촉매제 역할을 한 원조 한류스타였다.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총회장 김주철 목사)가 경기남부 지역의 두 곳, 군포시와 안양시에 새 성전을 설립했다. 지난 6일 오후 헌당기념예배를 개최한 군포금정 하나님의 교회는 군포시 금정동에 위치한다. 단독건물로 대지면적 1천195.8m, 연면적 1천402.16m에 지상 2층의 성전은 아담하면서도 아름다운 외관을 자랑한다. 주변에 공원이 있어 생활환경이 좋으며, 주택가 안에 자리한데다 붉은 벽돌의 외관이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새 성전이 들어선 이후 주변환경이 깨끗하고 밝아져 이웃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는 후문이다. 대예배실을 비롯해 소예배실, 사무실, 교육실, 식당 과 주차장 등 부대시설이 잘 마련돼 있다. 당일 헌당예배에는 동 교회 목회자와 성도 1천여 명이 참여해 새 성전 기쁨을 함께 나눴다.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에 새로 마련한 안양만안 하나님의 교회도 같은 날 헌당기념예배를 가졌다. 안양만안교회는 대지면적 3천990㎡의 안양월드 빌딩 4층에 위치한다. 600여 명이 예배를 볼 수 있는 대예배실을 중심에 두고 좌측과 우측에 교육실과 시청각실 등의 교육시설과 식당과 휴게실 등의 편의시설을 갖췄다. 안양만안교회에서 사역을 맡게 된 위상현 당회장은 안양에서도 만안구에는 생활형편이 어려운 이웃들도 많아 영육간에 어머니 하나님의 사랑이 많이 필요한 곳이라며 진리 전파와 함께 이웃사랑 실천에도 다방면에서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한편, 하나님의 교회는 2012년에만 경기 지역에 7개의 단독 성전을 새로 설립했다. 앞서 4월에는 부천소사교회와 의정부녹양교회, 5월에는 안산중앙교회와 용인수지교회, 6월에는 수원팔달교회를 새로 설립한 바 있다. 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
우리의 역사까지 편입 왜곡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비판이 수년째 들끓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바른 역사관으로 우리의 역사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헌데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 비단 동시대 한국인만의 고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300년 전, 우리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정립하는 데 힘쓴 역사학자가 있었다. 조선 최대의 역사서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집필한 순암 안정복이 그 주인공이다. 실학박물관(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은 내년 3월 17일까지 기획전시실과 로비에서 순암 안정복, 우리 역사 이야기-동사강목을 타이틀로 내건 기념 특별전을 연다. 경기도 광주(현재 광주 경안면 덕곡리)에서 태어난 학자 안정복의 탄신 300년을 기념한 전시다. 그는 가난한 탓에 스승도 없이 독학으로 공부하다가 35세의 늦은 나이에 성호 이익의 문하로 들어갔다. 이후 평생 역사학과 백과전서학 분야에 수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로 섰다. 독특한 나름의 저술 방식이 있었는데, 남의 저작을 베낀 것은 초서롱에 넣고 직접 지은 글은 저서롱에 담은 것이 그러하다. 안정복은 또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 등 기존의 역사서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방향으로 우리 역사 정리에 나섰으며, 최초로 발해사를 한국의 역사를 봤다. 전시에선 이같은 역사학자 안정복이 남긴 위대한 기록부터 아버지이자 진보적인 한 인간으로서의 성향을 드러내는 편지글 등을 볼 수 있다. 특히 그가 내세운 우리 역사학의 정통체계를 세우고 찬탈자와 반역자를 엄하게 평할 것이라는 내용의 역사 서술 5가지 원칙은 수백년이 흐른 지금 시사하는 더 크게 느껴진다.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7시. 관람료 성인/4천원, 청소년/2천원, 경기도민 50% 할인. 문의(031)579-6000 류설아기자 rsa119@kyeonggi.com
수원향교(전교 최인영)는 경로효친사상 고취를 위해 오는 11월 7일 오전 11시 30분 수원향교 유림회관 3층에서 기로연(耆老宴) 시연회를 개최한다. 기로연(耆老宴)은 조선시대 70세 이상의 원로 문신들을 위로하고 예우하기 위해 봄가을에 정기적으로 국가에서 베푼 잔치로, 오늘날 경로잔치와 유사하다. 현대 들어 경로효친사상과 미풍양속을 고양시키기 위한 윤리 및 도덕 등 인성을 함양시키기 위한 교육의 일환으로 전국 향교에서 시연하고 있는 전통적인 연례행사이다. 이날 기로연에서는 유림원로 및 장의, 관내 어르신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물놀이, 민속춤, 민용 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질 예정이다. 문의(031)245-7639 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
장만(15661629)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인동, 호는 낙서(洛西)다. 전라도와 함경도의 관찰사와 형조판서 등의 벼슬을 거쳐 우찬성을 지낸 문신이며, 말년에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진무공신 1등으로 옥성부원군에 봉해졌다. 문무겸전인 장만은 2점의 초상이 전해지는데, 하나는 단령 차림의 정장관복본(正裝官服本)이며, 다른 하나는 심의 차림의 연거복본(燕居服本)이다. 오사모에 단령을 입고 있는 정장관복본은 진무공신 책록에 의해 그려진 공신상으로, 113240㎝ 크기로 진무공신에 오른 후 인조 3년(1625)에 도화서 화원에 의하여 그려진 것이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의 공신도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화원이 그린 당시 최고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초상화의 특징은 왼쪽 눈에 안대를 차고 있는 모습과 얼굴에 선명하게 보이는 마마자국이다. 기록에 의하면 장만은 오랜 외직 생활로 병을 얻어 실명했으며, 9세때 천연두를 앓은 병력으로 마마자국이 생겼다. 덕망 높은 선비의 연거복본 차림 초상화는 113253㎝로 당건(唐巾)과 심의(深衣)를 입고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좌상으로 한손은 무릎위에 놓고 한손엔 부채를 들고 있는 우리나라 초상화 중 유래를 찾기 힘든 희귀한 유형의 초상화다. 특히 부채는 학의 깃털을 재료로 만든 것으로 신선(神仙)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 두 초상은 장만의 성품을 그대로 나타내주는 것으로서 정장관복의 공신상은 그의 주도면밀하고 엄정한 공직 삶 속에서의 모습을, 연거복본은 속세를 떠나 자연에서 노닐기를 바라는 은사(隱士)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조 인물로서 다양한 복식을 착용하고 초상화를 그린 예는 그리 많지 않으며, 특히 조선 중기 인물로서 반신상이 아닌 전신상으로서 정장관복본과 연거복본 두본 모두 완전하게 현전하는 예는 장만의 초상화가 유일하다. 특히 하나는 왕명에 의해 그려진 공신상이며 하나는 아주 희귀한 유형의 초상화라는 점은 더욱 더 주목되는 문화재다. 이 영정들은 장만선생의 사당인 김포의 옥성사(玉城祠)에서 보관해 오다 최근 보존처리 과정을 모두 마치고 경기도박물관에서 위탁 보관하고 있다.
에이여라 지경이여, 에이여라 지경이여 단풍이 곱게 물든 남한산성 자락에 풍악이 울려 퍼진다. 가을 정취를 만끽하기 위해 나온 등산객,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나들이 나온 아이 등 가족 행락객의 발길이 자연스레 구수한 전통 가락에 이끌려 멈춰 선다. 이내 이무술 집터 다지는 소리라고 멋스럽게 써내려간 붓글씨가 관객들에게 공연 시작을 알린다. 평소와는 다른 사물놀이어서 그럴까. 어느새 남한산성유원지 놀이마당에는 풍악을 함께 즐기려는 관람객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이무술이 술인지 사람 이름인지, 집터는 왜 다졌다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그 소리의 역사를 따라가 봤다. ■이무술은 왜 집터를 다졌나 이무술은 술도 사람 이름도 아니다. 지금의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의 옛 지명이다. 300년 전 천렵을 즐기던 한 농부가 냇가에서 커다란 고기를 안고 나와 죽은 일이 있었는데 그 고기가 바로 천 년 만에 승천할 이무기였던 것. 마을 주민들이 죽은 이무기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서 위령승천제를 지내자 그 자리에 난데없이 매화나무 두 그루가 솟아 그 후부터 이매동으로 불리기 시작했단다. 이 마을에서는 자손을 분가시키거나 새로 집을 지을 때 집터를 닦고 지반을 튼튼하게 다졌는데, 이때 집을 짓는 동안의 안녕과 집은 지은 후의 복록을 기원하기 위해 소리를 내며 작업을 해왔다. 바로 이무술 집 터 다지는 소리다. 과거 이무술 자연부락 사람들은 주로 밤에 집터 다지기를 했다. 귀신이 밤에 움직인다고 믿어 컴컴해진 뒤에야 궂은 액을 쫓아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이때 집주인은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마련하고 지경돌과 횃불을 준비한다. 고사 술상을 준비하고 큰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빌며 술을 사방에 뿌리고 동네 사람들과 나눠 마신 뒤 횃불을 켜들고 터를 다지기 시작한다. 선소리꾼이 선창하면 지경꾼들이 후렴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지경꾼들 말들어라 일시에 들었다 일시에 놓고 힘있게 들었다 힘차게 놓자 한눈팔다간 큰일난다 앞무릎 발등을 조심들 하세 에이여라 지경이요 남한산성 나린 줄기 영장산의 힘을 얻어 학의 등에 터를 닦고 온천하에 부귀영화 이 집터에 다 들었네 에이여라 지경이요 소리가 고된 작업을 흥으로 바꿔 힘든 줄 모르고 신명나게 일할 수 있게 하고, 마을 사람들의 협동심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는 이유에서다. 이때부터 이웃들과 집터를 다지는 미풍양속이 이어져 오면서 이매동의 집터 다지는 소리는 특색있게 발달돼 현재 후손들에게까지 전해내려오게 됐다. 방영기 총연출(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전수조교)은 18대가 이매동에서 쭉 살아왔다. 내가 우리 민족의 얼을 찾기 위해 집터 다지는 소리를 발굴하고 전승한지 30년이 됐다며 어렸을 때 할아버지 손을 잡고 이웃집에 따라가 집터를 다지고 쌀 떡국을 먹으며 보고 기억한 걸 그대로 옮겼다고 말했다. ■출연자, 관람객 모두가 즐기는 집터 다지기 지난 20일 오후 남한산성유원지 놀이마당에서 펼쳐진 이무술 집터 다지는 소리 시연행사에는 방영기 총연출과 이무술 집터 다지는 소리 보존회원, 성남농협주부농악단원, 한국국악협회 성남시지부 회원 등 200여명이 참여해 옛날 모습 그대로를 재현했다. 집터를 다지기 위해 나온 사람들의 복장은 모두 제각각었다. 알록달록 예쁜 한복을 입은 여인부터, 누더기 옷을 입은 아낙네, 광목 그대로를 입은 처자까지. 당시 동네 사람 개개인마다의 생활수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경꾼들은 가래줄로 집터를 고르고, 지경돌을 이용해 초지경 다지기를 시작했다. 단연 방영기 총연출의 북소리와 함께 선소리는 빠질 수가 없다. 양산도 타령에 맞춰 초지경을 다지며 옆집 아저씨가 힘들까, 건넛마을 아낙 팔이 아프진 않을까 서로 역할을 바꾸기도 한다. 한참 터다지기를 하더니 고된 작업으로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마당놀이 한판이 벌어진다. 음식을 담당하는 아낙네들이 지경꾼들에게 막걸리 한 사발을 건네고 김치 지짐이 한 조각, 쫄깃한 인절미를 입속에 넣어준다. 맛있는 음식을 먹은 그들의 노랫소리는 더욱 커진다. 여기에 지경꾼들 그들만의 잔치가 아닌 관람객들과 함께 탁주와 음식을 나눠 먹으며 옛날 그 시절의 정을 불러일으키자 관객들의 반응도 뜨거워졌다. 뱃속이 든든해진 지경꾼들은 잠시 일을 내려놓은 채 방아타령을 부르며 흥겹게 춤을 추며 뛰놀고서, 마무리 터다지기 작업에 들어간다. 여기저기 다지던 지경돌을 다시 중심으로 갖다놓고 지경꾼들도 각자 제 위치로 돌아온다. 집을 튼튼하게 지을 수 있도록 땅이 잘 다져졌다 싶을 때쯤, 지경꾼들은 자손 대대로 만년유택을 누리고, 평생 풍년이 들라는 의미에서 풍년가를 부르며 작업을 마무리한다. 흥이 절정에 다다른 지경꾼들은 박수를 치고 있는 관람객들을 집터로 모시고 나와 함께 장단을 맞추며 어깨춤을 춘다. 이무술의 집 터 다지기는 품앗이로 집터를 다지며 상부상조하는 동시에 평소 어울릴 수 없었던 이웃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 어려움을 나누고 기쁨을 함께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공연 내내 함께 춤을 추며 즐기던 박길순씨(64여)는 처음으로 이 공연을 봤는데 저절로 흥이 났다면서 옛날 것을 복원해서 다시 보여주고 맛있는 걸 같이 나눠 먹으니 어릴 적 생각이 났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성남지역 민속놀이 전승 작업 한창 최근 신도시가 우후죽순 개발되면서 지역의 향토문화들이 자칫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농촌지역이었던 성남 분당구 이매동 일대 역시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변모하면서 그 옛날 이곳에서 불리던 집터 다지는 소리는 다시는 들리지 않게 됐다. 이에 성남문화원은 지역의 사라져가는 민속 예술을 조사재현하는 민속놀이 보존 전승 사업을 중점 사업으로 추진하고, 이무술 집 터 다지는 소리 시연회를 이날 세 번째로 시민들에게 선보였다. 이뿐만 아니라 판교지역에서 새해 초 한 해의 복을 기원하는 정월 대보름 행사인 판교 쌍용거줄다리기와 지난 6월 선보인 구미동 오리뜰 농악 등 성남에서 잊혀가는 민속놀이를 발굴해 후손들이 함께할 수 있는 민속놀이를 만드는 데 힘쓰고 있다. 다만, 옛것을 지키기 위해 성남문화원, 이매동 집터 다지는 소리 보존회 등 지역 민속놀이 분야 전승자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는 가운데 아직은 미비한 지자체 예산 지원과 민속놀이 복원을 시민들의 소극적인 참여가 앞으로 풀어가야 할 숙제로 남아 보인다. 한춘섭 성남문화원장은 개원 34주년이 된 우리 문화원은 그동안 지역의 전통문화를 발굴하고 계승 발전 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며 도시화의 물결 속에 사라져가는 전통 민속을 보존전승해 성남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앞장 서겠다고 밝혔다. 장혜준기자 wshj222@kyeonggi.com
1. 다산문학은 인간학과 경학의 만남이었다 2. 밤남정 주막집의 두 형제이별 3. 강진흑산도에서 만난 실학의 혼 4. 유배지서도 꿈에 그리던 고향 초천 5. 유네스코선정 2012세계문화기념인물 ■ 수기치인(修己治人), 유학진면목 회복을 필생사명으로 유배 중 다산 정약용은 아들 학유에게 주는 글에서 내 나이 스무 살 때 우주(宇宙)간의 모든 일을 일제히 해결하고, 일제히 정돈하고 싶었다고 밝힌바 있다. 젊은시절 벌써 광대무변(廣大無邊)했던 다산의 기개와 포부를 읽게 해주는 대목이다. 대과 급제(28세, 1790)후 10년간 정조대왕의 총애 속에, 거칠 것 없이 고관대작의 벼슬을 두루 거쳤던 탁월한 조정대신이 어느날 비운의 귀양길(1801)에 오르게 된다. 그로부터 다산은 산천오지에 갇힌 채, 고독한 학문탐구에 들어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압축되는 유학(儒學)의 진면목회복을 일생의 사명으로 삼고, 필생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 결과 18년에 걸친 유배기간 동안 경전(經典)연구에 전념, 저술한 것이 총 230권이었고 귀배 후 3년간 수정보완, 추가하여 시경중용대학 등 경집만 250권 88책을 완간했다. 또한 문집 87권, 경세유표 등 잡찬 166권 등 총 503권에 달하는 불굴의 대저작을 세상에 내놓았다(새조선, 296). 불운한 선비는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가(儒家)학문세계를 정밀탐구하고 오묘하게 깨쳐서, 성인(聖人)의 본지(本旨)를 재해석 대단원의 저술로 후세에 헌상(獻上)했다. 우리는 이를 통칭해 다산경학(茶山經學)이라 부른다. ■ 다산실학은 한대(漢代)이래 최대 창견(創見)제시 한국실학학회 주최로 지난 6월9일 열린 다산 탄신250주년기념 학술대회에서 토론참석자들은 다산경학의 특징 하나는, 수많은 창견(創見)을 제시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는데 견해를 함께했다. 창견을 담지(擔持)하는 사상적 배경과 지향점에 대해서는 원시 유학(儒學)의 진면모 회복과, 탁고개제(托古改制)를 위한 창의적 의견을 업적으로 남겼다는 뜻으로 읽힌다. 한 대(漢代) 이래, 한자문화권의 수많은 경학자 가운데서 가장 많은 창의적 시각과 신설을 제시한 학자로 다산을 꼽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을 터이다. 어쩌면 봉건시대에 명멸했던 수많은 경학자들 가운데 그가 정점에 서 있을 가능성도 높다고 보는 이유다. 다산 선생이 대단하다 싶은 건, 그처럼 방대한 유교사상과 철학을 섭렵해 자신의 실학사상과 실천철학으로 담아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거대 유학세계를 다산실학이라는 그 만의 특허 프리즘에 통과시켜 자기방식으로 재구성, 재해석한 그 원대함과 도도함에 우리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다산학프리즘에 넣어 거대 유학 재해석 다상사상(茶山思想)의 큰 저수지에는 6경(經)4서(書)에 담겨있는 지혜의 총서가 망라돼 있다. 다산이 이상으로 여겼던 유교사상의 창건계승자는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 공자(孔子) 등 8인 이었다. 다산 의식의 묘당(廟堂)에는 이 여덟 명의 신(神)이 되어 모셔져 있을 뿐이다. 공자이후 유가의 적통임을 자부하였던 무수한 유학지상주의자들 마저 이 묘당에 들지 못했다. 다산은 모든 학문의 표준을 공자에게 집중시키고, 나아가 도덕의 표준에도 공자를 상정하고 있다. 다산이 공자와 유가의 대표적인 경전인 6경에 대한 금문학파와 고문학파의 상이한 견해에 어떤 이해를 가졌는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시경, 서경, 예기, 악기, 역경, 춘추 등 6경이 대부분 공자의 손을 거쳤다고 믿고 있음은 금문학파의 주장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산은 또한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4서를 섭렵, 실증적 연구를 집중함으로서 기존의 성리학적 해석에서 벗어나 실학의 새로운 관점을 보여 주었다. 그렇듯 다산은 6경4서에 담긴 심오한 제도와 정신을, 현실정치 및 사회에 맞게 구현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을 일생의 사명으로 삼았다. ■ 목민심서, 고을수령(군수)은 임금과 같아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고을현감(군수)은 한 나라의 임금의 역할과 같다고 정의했다. 현감, 곧 수령은 그 고을에 관한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한을 한 손에 지니고 있어 한 나라의 군주(君主)와 같다고 보았기 때문이리라. 수령은 제후(諸侯)와 같다. 만 백성을 주재하니 하루에 만기(滿機)를 처리한다. 그 정도야 약하지만 본질은 다름이 없다.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자와 비록 크고 작음이 다르나 처지는 실로 같은 것이다. - 목민심서 - 다산은 젊은시절, 부친의 부임지를 따라 몇몇 고을의 관아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다. 아버지 정재원(1730~1792)은 현감 두 곳, 군수 한곳, 도호부사 한곳, 목사 한곳 등 여러 지방을 돌며 수령을 지냈다. 그 때마다 다산은 아버지를 따라가 살게된다. 자연히 아버지로부터 고을 다스리는 법을 보고 배워 두루 익숙하게 된 배경이다. 이런 경험은 후일 목민심서를 저술하는데 매우 유효했다. 신혼 초, 다산일생에도 가장 꿈같은 시절이 있었다. 다산부부는 화순현감(군수)으로 발령받은 아버지를 따라 나선다. 열여섯 살 되던 해(1777년) 음력 10월로 초겨울 이었다. 부친은 이때 경기도 연천 현감을 지낸지 10년 만의 지방수령 전직발령이었다. 승지벼슬을 한 홍화보의 딸 풍산 홍씨와 결혼한 지 갓 1년이 된 다산은 아내를 데리고 아버지와 함께 새 부임지인 전라도 화순에 도착했다. ■ 화순고을서 신혼생활꿈같은 시기 화순고을에서 시작한 호남 땅의 생활로 다산은 이때 넉넉한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신관 사또의 자제로 글 잘하고 시 잘 짓는 문사(文士)는 아름다운 남도경관에 마음을 기울이고 그곳 선비들과 어울리면서 명승지를 관람하며 시문 짓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다산은 또 친구들과 어울려 전라도 풍광 중에서도 온 나라에 이름이 높은 화순 동복의 적벽강(赤壁江)과 강변풍치와 어우러진 물염정(勿染亭)을 둘러보고 감탄하며 적벽강 물염정 이란 시를 남긴다. 다산은 또 광주의 명산인 무등산에도 올라 기행기와 다수 시를 읊는다. 화순에서 가장 뜻 깊었던 일은 읍내 북쪽으로 2km쯤 떨어져 있는 동림사(東林寺)에서 둘째형과 함께 독서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 놓칠 수 없는 일은 당대의 큰 선승이자 학승이었던 연담(蓮潭) 유일(有一) 스님과의 만남이다. 유일 스님은 본디 화순출신으로, 33년 동안 산문(山門)밖을 나오지 않고 불도만 닦은 당대의 명승이었다. 유일 스님은 훗날, 다산이 강진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만나 절친한 관계로 발전했던 혜장 스님의 스승이기도 했다. 인생의 인연이란 참으로 기이하고 오묘한 것이었다. ■ 다산실학 비판 및 21C 다산학의 새로운 모색 다산 위 세대로, 조선의 실학사에서 가장 혁혁한 공을 올린 이는 성호였다. 경기도 안성 출신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은 전북 부안 학자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 1622~1672)의 반계수록(磻溪隨錄) 학문을 이어받아 실학사상의 기틀과 체계를 세웠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다산은 성호선생을 기리며 충남 아산의 봉곡사에서 성호학세미나(1795년 10월)를 열고 유용한 학문(有用之學: 實學)에 힘써 요순세상 만들자는 결의를 하기도 했다. 다산의 또 다른 호 사암(俟菴)은 후세의 지기(知己)를 기다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다산의 경학(經學) 저술은 청대 초엽까지의 훈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하고 이에 더한 탈(脫)성리학적, 독창적인 의(義)와 리(理) 학으로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런 일은 다산경학의 학문구조가 아직도 일부 학자들의 의식이나 펜 끝에서 조금씩 운위되고 있을 뿐, 그의 훈고나 의리가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는 다산탄신 250주년으로 또한 유네스코 2012세계기념인물 선정으로 뜻 깊은 행사가 많았지만, 선생이 가신지 17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다산의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경서(經書)의 해석본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저 송구하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지난 20세기 100년간은 유학의 침체기였다. 21세기 들어 천박한 황금만능의 사조로부터 탈출할 유력한 대안이자 유일기재의 하나로서, 유학이 차츰 부활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 거기에 중국의 급부상도 한몫 거들고, 한반도를 위시한 동아시아의 역동성 또한 동양사상의 고향인 유학의 재부상 가능성을 그만큼 높이고 있다. 유학의 본질을 꿰뚫는 간명(簡明)한 이론의 확립이 요구되는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구의 이론을 그 중심에 세울 것인가? 다시 다산(茶山)이 아니고, 다산학(茶山學) 이론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한국사회 뿐 아니라, 유네스코가 앞장선 국제사회까지 나서, 개명천지의 21세기에 다시 다산을 찾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다산실학은 중국의 주자학, 양명학과 함께 대안 가운데 하나가 될 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다. 다산학이 과연 중국 전통학문의 흐름에 뛰어들어 중요한 부분을 점유하고 시대적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후세의 지기를 기다린다란 뜻의 사암, 곧 다산의 기다림은 얼마나 더 지속되어야 할지 모른다. 21세기 다산학 연구의 새로운 모색이 필요한 오늘이다. 글=구동수 (사) 다산연구소 연구위원 국제정치학 박사
요즘 1,000만 관객을 넘은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장안의 화제이다. 이 영화에서 왕이 된 하선이 백성들에게 이로운 법이라 하여 시행하고자 했던 것이 대동법(大同法)이다. 이 비는 바로 그 대동법의 실시를 알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조선의 공물제도(貢物制度)는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게 했는데 부담이 불공평하고 수송과 저장에도 불편이 많았다. 또한 관리와 상인이 백성을 대신하여 공물을 바치고 그 댓가를 가중해서 백성들로부터 받아내는 방납(防納)이라는 제도가 있어 백성의 부담이 한층 가중되었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농토 1결당 백미 12말로 통일하여 바치도록 한 조세제도가 바로 대동법이다. 대동법의 시행은 조선시대의 경제체제의 변화를 초래하였고, 상공인층이 사회적으로 성장하고, 농민계층의 분화를 촉진시켜 이전의 신분제도를 와해시킴으로써 조선사회가 변화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 선조 41년(1608)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되었고, 효종 2년(1651) 충청감사로 있던 김육(金堉 1580~1658)이 충청도에 대동법을 시행토록 상소를 하여 왕의 허락을 얻어 실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동안 어려움에 처했던 백성들의 수고가 덜어지는 등 좋은 성과를 이루게 되자, 왕은 이를 기념하고 만인에게 널리 알리도록 하기 위해 이 비를 세운 것이다. 기념비는 거북받침돌[龜趺] 위로 몸돌을 세우고, 맨위에 머릿돌[?首]까지 갖춘 모습으로, 각 부분의 조각은 정교하지 못하다. 비의 원래 명칭은 김육대동균역만세불망비(金堉大同均役萬世不亡碑) 또는 호서선혜비(湖西宣惠碑)이다. 비문은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이민구가 짓고, 의정부 우참찬 오준이 글씨를 썼다. 효종 10년(1659)에 세운 것으로, 원래는 이곳에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1970년대에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대동법시행기념비가 세원진 이 지역은 삼남대로(三南大路)로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넘어오는 첫 번째 역원(驛院)인 소사원이 있던 지역으로 사람들의 통행이 가장 많은 곳이었기에 국가에서는 대동법의 시행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의미에서 이곳에 비를 세운 것이다.
제2회 수원 청소년像 심포지엄이 25일 오후 3시 수원청소년문화센터 은하수홀에서 열린다. 수원시청소년육성재단과 경기도수원교육지원청이 공동주최하는 이번 심포지엄은 수원인, 수원학, 수원지역 교육 공동체란 배경을 갖고 수원 청소년의 미래상을 그려 보기 위해 마련됐다. 이광호 경기대 청소년학과 교수의 수원 청소년은 누구인가, 그들의 삶은 무엇인가라는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강신주 연세대 철학과 교수의 다양하고 창의적으로 표현하게 하는 인문학에 대한 발표가 진행된다. 이어 안상헌 Meaning 독서경영연구소장과 김준혁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각각 바람직한 청소년상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제시할 예정이다. 최현우 수원청소년문화센터 팀장은 인문학 도시인 수원시의 미래 주체가 되는 청소년들을 역사적, 문학적, 철학적, 측면에서 해석하는 자리라며 청소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 인가에 대한 물음과 답을 스스로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문의 (031)218-0419 장혜준기자 wshj222@kyeongg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