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원에서 놀자]<20>동두천문화원, 어린이 향토사 장원경시

조선 중종(16세기) 이후 맑고 소박한 연못이 있다 해서 이담골(伊淡골)이라고 불리던 마을이 있었다. 지금은 이담골이라는 지명을 기억하는 이는 없지만 왜 이담골이라 불렸는지 증명이라 하듯 이 마을엔 생연동(生淵洞), 못골, 방축골 등 연못이나 저수지와 연관지어진 지명을 가진 곳이 여전히 남아있다. 이담골은 과연 어떤 곳일까? 동쪽에 머리를 두고 흐르는 천이 있다는 지금의 동두천(東豆川)시가 바로 그곳이다. 동두천을 샅샅이 아는 사람이 드물기에 이담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런 동두천의 과거를 파헤치기 위해 어린이들이 모였다. 지난 11월 21일 동두천시민회관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3회 어린이 향토사 장원경시대회에 참여한 어린이 180여명이 그 주인공. 학교 시험만큼이나 학생들의 손에 땀을 쥐게 했던 장원경시 현장으로 가보자. # 동두천, 내가 제일 잘 알아~ 덩덩 쿵덕쿵 쿵따쿵따 쿵타쿵~ 신명나는 사물놀이가 제3회 어린이 향토사 장원경시대회의 막을 올렸다. 동두천 지역의 9개 학교에서 모인 4~6학년 학생들은 질서정연하게 대열을 갖추고 앉아 풍물패의 공연을 지켜봤다. 이런 와중에도 지난 7월 동두천문화원에서 받은 이담골 역사기행 책을 뚫어져라 보는 아이들도 있었다. 노란 형광펜으로 표시해 놓은 중요한 내용을 다시 한번 훑어보며 장원의 자리를 노렸던 것. 풍물패 공연에 박수갈채가 이어지고서 드디어 시험이 시작됐다. 동두천문화원에서 이사, 문화해설사로 활동하는 이들이 이날만큼은 감투를 버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시험 도우미로 나서 손자, 손녀들에게 시험지, 답안지, 볼펜을 나눠줬다. 시험지를 받는 그 순간까지 아이들의 얼굴엔 긴장감이 역력했다. 시험지를 받아 든 아이 옆에 자리를 잡고 문제를 보니 객관식 20문항, 주관식 6문항으로 구성돼 있었다. 동두천에 미군이 있다는 것만 아는 기자의 눈엔 시험지의 까만 색은 글씨요, 하얀색은 바탕일 뿐이었다. 하지만 어린이 향토사들은 구석기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동두천에 대한 역사, 임금님이 떠 마셨다는 어수정, 경기도 무형문화재인 송서율창 등에 대한 객관식 문제를 시원하게 풀어낸다. 문제는 주관식이었다. 소요산 자재암에서 보관하고 있는 1994년 10월 17일 보물 제 1211호 지정된 이 판본은 ~(이하 생략), 이것은?, 닥채 나무를 많이 재배해 종이를 생산하는 부락이라 해 종이골이라 불리다가 (?)로 부르게 되었다 등.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한참을 고민한 끝에 답을 써내려가는 아이가 있는 반면 결국 칸을 채우지 못하는 아이도 있었다. 40분간의 장원경시가 끝이 난 뒤 아이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동두천 어린이 향토사로서 한 발자국 내디딘 대견한 모습들은 모두 같았다. 최영은양(11ㆍ생연초4)은 공부를 하면서 어유소장군 등 우리 고장의 역사를 알 수 있어 좋았다며 시험이 조금 어려웠지만 장원이 꼭 돼서 상장을 받고 싶다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박용철 사무국장은 학생들에게 지역의 역사 바로 알리고자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며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내 고장에 대한 자긍심과 정체성을 심어줄 수 있는 기회가 됐길 바란다고 말했다. # 장원경시에 투호놀이까지재미가 두 배 전통 투호놀이 대회가 시험을 마친 어린이 향토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마트폰, 컴퓨터 게임에 익숙한 어린이들에게 투호놀이라는 색다른 체험을 통해 전통놀이문화를 만날 수 있는 자리였다. 학교별 단체전과 개인전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단체전이 진행되는 동안 병 속에 화살이 들어갈 때마다 응원석에선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물론 화살이 바닥에 떨어질 땐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와 응원의 목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개인전은 단체전에 비해 더욱더 치열했다. 향토사 장원경시처럼 투호대회에도 상장과 부상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투호가 일반 백성은 엄두를 내지 못하는 놀이였다는 것을 교재를 통해 배운 어린이 향토사들은 책 속의 내용에 실제 체험을 곁들여 자신들만의 실력을 뽐냈다. 왼손잡이면서도 좋은 성적을 낸 김가람군(13ㆍ지행초6)은 작년에 학교민속놀이체험에서 해봤는데 재밌어서 참가해게 됐다며 10개 중 7개가 들어가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라고 즐거움을 전했다. 한바탕 투호놀이를 한 아이들이 떠난 뒤 동두천문화원 관계자들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이날 치른 장원경시 채점이 시작된 것. 180여 장의 답안지를 채점한 뒤에 순위가 가려졌다. 81점을 얻은 이담초등학교 6학년 이가연양(13)이 장원을 차지하며 시장상을 거머쥐게 됐다. 강민호군(13ㆍ송내초6), 심규혁군(13ㆍ이담초6)이 각각 78점, 71점으로 뒤를 이어 시의장상을, 3위와 장려상을 받은 9명의 어린이 향토사는 동두천문화원장상을 받게 됐다. # 어린이 향토사 양성, 지원이 절실하다 제3회 어린이 향토사 장원경시대회는 시험도 보고 놀이도 즐기는 일석이조의 대회였지만, 몇몇 아이들에게서는 볼멘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담골 역사기행 교재에서 모두 출제됐다는 시험문제 중에서 모르는 것들이 있었단다. 그도 그럴 것이 제1회, 제2회 향토사 장원경시 때는 시험 6개월 전부터 이창선 신흥고등학교 역사 교사가 일주일에 한 번 지역 내 초등학교를 순회 방문하며 향토사를 꿈꾸는 어린이들에게 동두천의 역사부터 역사적 인물, 향토문화유산에 대해 수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3회째를 맞는 올해는 어린이 향토사 장원경시에 대한 예산 지원이 줄어 교재를 나눠주는 게 전부였다. 이렇다 보니 제대로 된 교육을 진행하지 못해 아이들의 이해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 동두천문화원이 지난 2010년부터 어린이들의 인성교육, 지역 애향심, 효(孝) 교육 등을 위해 야심 차게 마련한 행사가 기관, 지자체의 부족한 지원 탓에 제 역할을 발휘하지 못한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현 초등학교 교과과정으로 편성된 내 고장 알기에 한 발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동두천에 관한 역사, 문화, 주요사적지를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어린이 향토사 교육에 대한 지자체의 관심이 요구된다. 안민규 동두천문화원장은 어린이들은 동두천의 꿈나무라며 동두천이 다른 지역에 비해 소외된 부분이 있는데 역사 교육을 통해 자부심을 불어넣어 이곳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문화도 복지도 좋지만 아이들에게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동두천문화원의 어린이 향토사 장원경시는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장혜준 기자 wshj222@kyeonggi.com

전세계에서 ‘새예루살렘의 날’ 기념 봉사활동

지난 11월 28일 의정부시 녹양동 주택가에 자리한 한 교회가 잔치를 베풀었다. 날씨가 쌀쌀해지면 자식 걱정 먼저 하는 어르신들을 위로하고자 마련한 자리. 불고기와 잡채, 떡과 과일 등 맛있는 음식으로 어르신들을 대접하고 이미용 봉사도 펼쳤다. 따뜻한 내복도 선물했다. 이튿날인 29일, 군포시 금정동의 교회는 독거노인을 비롯해 차상위계층 이웃들을 지원해 달라며 금정동 주민센터에 김치 50박스를 전달했다. 이보다 앞선 12일에는 서울 송파구의 교회가 소외된 이웃들을 지원하기 위해 직접 담근 김치 200박스를 송파구청, 문정1동과 장지동 주민센터에 전달했다. 필리핀에서는 22일 400명의 교회 성도들이 케손시티, 마닐라, 파식 등 곳곳에서 대규모 정화활동을 벌였고 25일에는 미국 아리조나 주 피닉스 현지 성도들이 혈액부족으로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고자 헌혈 릴레이에 나섰다. 이처럼 지구촌 곳곳에 따뜻한 사랑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주인공은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로 2012 새예루살렘의 날을 기념해 지난달부터 사랑나눔 봉사에 나서고 있는 것. 교회 측은 반목과 분쟁, 경제 불황, 기후 재앙 등으로 어지러운 지구촌에 가장 필요한 것이 어머니의 사랑이라며 인류가 어머니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구원의 소식을 접하고 진정한 평화와 위로, 나아가 구원을 얻게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이번 봉사활동은 해당 국가와 지역의 특수성, 지자체와 지역민들의 요구와 필요성에 따라, 환경정화활동, 헌혈, 김장나누기, 연탄배달, 독거노인을 비롯한 어려운 이웃돕기, 관공서와 기관 위로방문 등 다방면에서 진행되고 있다. 구예리기자 yell@kyeonggi.com

하나님의 교회, 시흥시 장현동에 단독성전 설립

이웃에 희망과 구원을 베푸는 교회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가 신도시 개발이 한창인 시흥시 장현동에 단독성전인 시흥 하나님의 교회를 설립하고 지난 1일 목회자와 성도 8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헌당기념예배를 가졌다. 김주철 목사는 이날 돌들의 외침이라는 설교를 통해 세상이 하나님의 음성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기에 사람들이 신뢰하는 다양한 방법으로 시대의 위기를 경고하고 있다면서 세상을 구원하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새 성전이 세워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노아와 롯이 가족들을 구원한 것처럼 구원의 진리인 새 언약 유월절과 엘로힘 하나님을 알려 이웃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교회가 되길 바란다고 부탁했다. 새 성전은 연면적 1천780m의 지하 1층 지상 4층 건물로 대리석과 벽돌과 유리를 조화롭게 이용한 현대적 감각의 외관이 세련되고 멋스럽다. 특히 꼭대기까지 유리를 사용한 모서리 벽면은 마치 하늘에 간절한 소망을 기원하는 모습으로 지나는 이들의 눈길을 붙잡는다. 넓은 성전은 내부구조가 독특하고 재미있다. 외관상 하나처럼 보이는 건물은 지하의 대예배실을 제외하곤 두 개로 분리돼 있다. 한쪽은 식당과 사무실 등의 편의시설이, 다른 쪽은 크고 작은 교육실과 시청각실 그리고 연령별 모임이 가능한 교육시설이 자리한다. 기념예배에 참석한 윤인희씨(48여)는 젊은 층이 많은 도시에 성전이 세워져 벌써부터 활력이 넘친다며 어머니의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교회로 인해 이 지역이 더욱 빛나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새 성전에서 사역을 담당하게 된 김한철 목사는 아름다운 성전이 세워지니 성도들의 자부심도 커지고, 주변 이웃들도 마음의 문을 여는 것 같다며 어머니께서 본보이신 대로 영육간 섬기는 목회로 영혼을 구원하는 데 힘쓸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하나님의 교회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새 언약 유월절을 구원의 진리로 지키고 전한다. 또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어머니 하나님을 믿는 교회로 잘 알려져 있다. 지난 1964년 설립 이후 꾸준한 성장세를 유지하며 설립 반세기 만에 150개국에 2천200개의 교회를 세웠다. 최근에는 성도 수의 증가와 함께 전 세계에서 단독성전 설립을 계속해 주목을 받고 있다. 올 한 해 동안 의정부, 부천, 안산, 용인, 수원 등 경기도 8개 지역을 포함해 국내에서만 30개 지역에 단독성전을 새로 설립했다. 지난달 6일에는 군포시와 안양시, 20일에는 서울 강남구와 동작구 등 하루에 성전 두 곳에서 연이어 헌당예배를 갖기도 했다. 구예리기자 yell@kyeonggi.com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 인천·경기 환경대상 수상

지구환경을 위해 다방면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펼쳐온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총회장 김주철 목사)가 인천경기 환경대상 경기도지사상을 수상했다. 시상식은 지난달 28일 송영길 인천시장과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시청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하나님의 교회는 극심한 기후변화, 환경파괴와 오염 등으로 병든 지구를 살리기 위해 꾸준하게 지구환경정화운동을 펼쳐왔다. 인천과 경기도에서는 연인원 4만4천명이 환경정화활동을 진행했고 자연보호캠페인 같은 환경의식개혁운동과 청소년 환경정화 체험교육 등을 실시해왔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자연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만들고 환경보호에 대한 인식제고와 저변확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단체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심사를 맡은 최계윤 인천대 교수는 자율성, 환경개선의지, 지역과의 소통 부문을 집중적으로 심사했다면서 하나님의 교회의 경우 환경을 사랑하고 그에 맞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실천한 점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평했다. 송영길 시장 역시 축하인사를 전하며 녹색기후기금을 유치한 도시에 걸맞게 생활 속에서 환경을 지키고 가꾸는 실천을 해가는 데 교인들이 모범이 되어 앞장서 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며 앞으로도 지역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이 되어 달라고 당부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동안 내가 사는 동네를 시작으로 지역, 국가, 나아가 전 세계 자연환경을 안전하고 깨끗하게 만들어 인류의 생명을 구한다는 목표로 산과 바다, 강과 하천, 공원 정화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왔다. 경기도와 인천에서도 도심정화활동을 비롯해 평택 오산천, 광명 한내천, 분당 탄천, 의정부 백석천, 동두천 신천, 안양 안양천 등 하천정화활동을 펼쳐왔다. 또한 방아머리해수욕장, 제부도해수욕장, 동막해수욕장, 수인선 철길, 경기국제항공전부지, 남한산성, 수원 화성 등 지역 명소와 유적지 보호활동에도 힘을 기울여왔다. 성도들을 대표해 시상식에 참여한 김주철 총회장은 앞장서 본을 보이신 어머니 하나님을 따라 푸른 환경조성에 솔선수범한 성도들과 기쁨을 함께 하겠다며 환경활동은 인류 구원의 또 다른 방법인 만큼 앞으로도 지속적인 활동을 펼칠 것이라고 전했다. 구예리기자 yell@kyeonggi.com

[장덕호의 보물읽기]마애종

안양 석수동 안양유원지의 바위산 아래에는 조그마한 목조 보호각이 있다. 그 안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현전하는 암벽에 새긴 마애종이 모셔져 있다. 마애(磨崖)란 석벽에 글씨나 불상 등을 새긴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글씨, 불상, 보살상, 탑 등을 많이 새겼다. 이 마애종은 535550㎝ 정도의 커다란 암면을 고르게 다듬은 뒤 음각과 양각의 부조형태로 조각하였다. 벽면 중앙에 범종을 중심으로 기둥을 세우고 보를 얹어 거기에 쇠사슬로 매달아 놓은 종을 새겼는데, 소리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이나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의 모습이 비교적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종의 윗부분에는 사각형의 유곽을 두 곳에 배치하고, 안에는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양각하였다. 종의 가운데에는 종을 치는 부위인 당좌를 꽃무늬로 3군데에 새기고, 오른쪽의 승려가 긴 당목을 이용하여 종을 치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아랫부분에는 음각선을 두른 전체적으로 약간 벌어진 형태의 종이다. 마애종에서 주목할 점은 첫째 안양(安養)이라고 하는 지명이 불교식 지명이며, 이곳과 인접한 곳에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인 중초사지(中初寺址)와 고려초기에 건립된 사찰인 안양사지(安養寺址)가 자리잡고 있어 이 마애종은 이들 사찰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비록 바위에 부조로 새긴 종이기는 하지만, 그 표현수법이 청동제 한국 범종의 양식을 충실하게 묘사함으로써 고대 범종의 변천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며, 셋째 종을 치는 도구인 당목을 표현함으로써 고대 당목을 재현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라는 점이다. 이 마애종은 종과 종을 치고 있는 스님을 사실적인 비례감으로 표현하였고, 실제 청동제 한국 범종을 보는 듯 조각수법도 매우 우수하여 인근의 중초사지나 안양사지에 전해지는 여러 석조문화재에 비견될 만큼 매우 중요한 문화재이다.

[장덕호의 보물읽기]만안교

만안교는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을 참배하러 갈 때 참배행렬의 편의를 위해 축조한 다리이다. 정조의 화산 행차는 원래 용산에서 배다리를 놓아 한강을 건너고 노량진과 동작을 거쳐 과천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에는 다리가 많고 남태령이라는 고갯길이 있어서 행차에 어려움이 많았다. 또한 과천에는 영조를 부추켜서 부친인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도록 한 김상노(金尙魯)의 형인 김약로(金若魯)의 묘를 지나게 되므로 정조가 이를 불쾌하게 여겨 시흥에서 수원으로 가는 길로 바꾸면서 이곳 안양천을 지나게 되었다. 안양천에는 원래 다리가 없어서 왕의 행차시에는 나무다리를 가설했다가 왕의 행차가 있은 뒤에는 바로 철거하는 것이 상례였다. 시흥로가 개설된 것은 정조 18년으로 첫해에는 이처럼 임시로 나무다리를 놓아 사용하였는데 다리를 놓았다 헐었다 하는 번거로움과 평상시 다리가 없어 백성들의 불편해 하였으므로 항구적인 돌다리를 놓게 되었다. 정조는 1795년(정조 19) 경기관찰사 서유방(徐有防)에게 명하여 3개월의 공역 끝에 만안교를 완성하게 되었다. 만안(萬安)이란 의미는 만년동안 백성들이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는 다리라는 뜻으로 정조가 직접 작명하였다. 다리의 규모는 원래 길이 15장(약 30m), 폭 4장(약 8m), 높이 3장(약 6m)이고 홍예수문(虹?水門 : 무지개처럼 둥근 수문)이 5개라 하였는데, 현재는 홍예가 7개인 것으로 보아 시공 당시 변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홍예는 정교하게 다듬은 장대석을 써서 반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에는 장대석을 깔아 노면을 형성하였다. 전체적으로 축조 양식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평가되며, 만안교 처럼 홍예가 7개인 다리는 만안교가 유일한 것으로 전해진다. 만안교는 원래 현재의 위치에서 남쪽으로 약 200여m 떨어진 만안로 입구에 있었는데 1980년 국도 확장 때 이곳으로 옮겨 복원되었다. 다리 앞에는 서유방이 글을 짓고, 당시 명필이었던 조윤형(曺允亨)이 글씨를 쓴 만안교비가 있어 이 다리의 연혁을 설명해주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는 매년 안양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인 만안교 다리밟기 놀이가 펼쳐지고 있어 정조가 이 다리를 축조한 뜻을 계승하고 있다. 장덕호 경기도박물관 학예실장

[장덕호의 보물읽기]경기감영도

경기감영도는 백악산인왕산북악산삼각산 아래로 넓게 펼쳐진 서대문 밖 경기감영 일대의 풍경을 12폭으로 그린 그림으로, 경기감영은 경기관찰사가 정사를 펼치던 관청이다. 제1폭에는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이 있고, 5~7폭에 걸쳐서 경기감영이 보인다. 제6폭의 중앙에 감영의 본관 건물이 있으며, 건물 정면에는 임금의 덕을 베풀고 백성을 교화함을 뜻하는 선화당(宣化堂)이란 편액을 달았다. 또한 경기감영 주위로 영은문모화관활터 등 주변 주요 지역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경기감영과 그 주변의 경관 및 시설물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기록화이자, 주변의 지형 등을 파악하여 그린 일종의 회화식 지도이다. 또한 감영 주변의 수많은 민가와 인물들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풍속화적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각각의 건물에는 이름이 쓰여 있어 건물의 용도를 알 수 있는데, 특히 벽에 흰색 칠을 하고 상호를 써 넣은 약방과 미투리 파는 신발가게쌀가게행상 등이 큰 길가에 배치되어 있어 시장의 생생함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림에서 더욱 주목할 만한 장면은 화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활 장면으로 제3~6폭 하단에는 경기관찰사의 긴 행렬이 보이는데 여기서 경기관찰사로 추정되는 말을 탄 인물은 여타 인물과 달리 눈, 코, 입이 정확하게 그려져 있어 경기감영의 주인공이 경기관찰사임을 말해준다. 이 행차에 참여한 주악대(奏樂隊)와 따르는 인물들, 그리고 이를 구경하고 있는 어른과 아이들 역시 현장감을 살려 표현하고 있다. 이밖에도 건물에 딸린 마당과 큰 길이나 골목길 여기저기에는 다양한 포즈와 동작 중의 인물들이 묘사되어 풍속화의 좋은 예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림은 경기감영이 돈의문 밖에 있었던 시절인 1800년대 후반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은 사라진 경기감영의 실체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문화재이다. 경기감영은 지금의 경기도청으로 조선초기에는 수원에 있었으며, 광주로 옮겨지고 다시 돈의문 밖 반송방으로, 다시 포천으로 갔다가, 또 반송방으로 옮겨진다. 이 그림은 두 번째 반송방으로 옮겨지고 난 뒤에 그려진 그림이다. 이 그림에 존재하던 경기감영은 이후 한성부, 고양시청, 서대문 경찰서로 사용되다가 일제강점기때 헐리게 된다. 경기감영은 조선후기 혁파되고 경기도청이 되면서 광화문 앞에 있다가 1967년에 현재의 위치인 수원 팔달산 아래로 옮겨지게 되었다.

29일 마지막 미사 봉헌하는 최재용 수원대리구장 신부

사제의 길 42년,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최재용 바르톨로메오 수원대리구장(경기일보 필진) 신부가 42년의 사제생활을 정리하는 마지막 미사가 오는 29일 오전 10시 30분 권선동성당에서 봉헌된다. 최 신부는 1970년 7월 11일 사제품을 받고 반월성 주임신부로 첫 사목을 시작해 장호원ㆍ고색동ㆍ월피동ㆍ산본ㆍ야탑동 성 마르코본당 주임, 교구 사무처장과 사목국장 등을 지냈으며 교구 꾸르실료, 어린이 전교회 등의 지도신부를 역임했다. 특히 지난 2006년부터 수원대리구장 신부로 봉직하고 있으며 본당사목과 사무행정 경험이 두루 풍부할 뿐 아니라 영성면에서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최 신부는 소박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평소 책읽기를 즐겨하며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어 공연장도 자주 찾는 사제였다. 특히 6년여 동안 위암과 대장암 투병 중에도 열정적인 사목을 펼쳐왔다. 퇴임을 앞두고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최 신부는 막상 퇴임할 시간이 다가오니 허전하기도 하고 홀가분하기도 합니다. 부족한 사람이 이 자리까지 온 것은 모두 하느님과 여러분 덕분이라며 신자들과 후배 사제단의 기도와 행동으로 보여주신 헌신적 신앙생활이 사제생활에 큰 원동력이 됐고, 이에 다시금 감사드린다며 거듭 감사의 뜻을 전했다. 최 신부는 퇴임 후 가장 하고 싶은 일탈(?)로 여행을 꼽았다. 우선 미국에 있는 친지들을 만나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갖고 싶어 여건이 되면 유럽 성지 여행을 꼭 다녀오고 싶다면서 주님께서 원하는 대로 하루하루를 지내며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느 곳이라도 찾아가 사목하며 기쁘게 살겠다고 말했다. 특히 노인들에 대한 사목적인 배려가 시스템화되어 있지 않아 기회가 된다면 어르신들을 위한 사목활동에 집중하고 싶다는 바람도 나타냈다. 최 신부는 후배 사제들에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뭐든지 적극적으로 일하라는 당부였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말에 노 사제는 웃으며 답했다. 사제에게는 군인들 제대나 직장인들처럼 정년이라는 게 없습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주님 부르심에 충실하게 살아가야지요. 경제발전으로 인해 그늘진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보듬고 사랑하는 일에 더 노력하겠습니다. 한편 최 신부는 수원 당수동 아파트에 머물며 원로사목자로서 제2의 삶을 이어갈 계획이다. 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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