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의무고용 지켜야

장애인 의무고용비율을 지키지 않는 사업장은 올해부터 고용부담금을 상향조정키로 했다는 정부의 방침은 진일보한 장애인 복지정책이다. 현행 법령에 따르면 300인 이상 사업장은 상시근로자의 2% 이상을 장애인으로 의무 고용토록 돼있으나 현재 사업장 평균 장애인 고용비율은 0.54%로 너무 낮은 수준이다. 정부가 장애인 고용촉진을 위해 고용비율이 1% 미만인 업체에 고용부담금을 1인당 최저임금의 60%(21만6천원)에서 70%(25만3천원)로 인상한 것이 그래서 이해가 간다. 그러나 사업장이 장애인 의무고용비율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여 고용부담금 상향 조정으로만 장애인 고용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 기업체들이 상시근로자의 2% 이상을 장애인으로 고용해야하는 의무규정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다. 노동할 자격과 의사가 있는 모든 국민에게 고용기회를 창출해주어야 하는 것은 혼합경제체제 국가가 이행해야 하는 가장 큰 책무 가운데 하나이다. 지난 90년 법제정을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장애인고용을 위한 정책기반을 마련하였고 법추진을 위한 기구로서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이 설립됐다. 법제정의 기본취지에 따라 91년에는 300인 이상 고용사업장에 대하여 1%의 장애인고용을 의무화했고, 92년에는 1.6%, 93년에는 2%의 고용률을 규정하여 장애인 고용의무 비중을 점차 확대했다. 그러나 추진실적은 고용의무제도 실시 첫해인 91년의 경우 고용의무인원의 43%인 9천1백명 수준에 머물렀다. 추진실적이 기대에 못 미친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문제는 장애인 고용에 대한 기업체와 사회전반의 인식이 크게 부족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사회는 질병, 교통사고, 산업재해 등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어 장애인 문제는 언제 내 문제가 될지 모르는 일이다. 앞으로 장애인 고용문제를 생각할 때 장애인 일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 문제라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아울러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올 7월부터 시행되는 공무원 신규채용시 장애인 의무채용비율 5%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동안의 의무채용비율 2%는 너무 형식적이었다. 만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장애인 의무고용을 지키지 않는다면 기업체에 고용부담금을 물리게 할 권한이 없다.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이 착실히 시행될 때 진정한 복지사회는 이룩되는 것이다.

대통령과 총재의 차이?

대통령과 집권당 총재의 차이를 한마디로 구분하기는 어렵다. 그렇다해서 같은 것은 아니다. 분명히 다르다. 대통령은 집권당을 위한 대통령이 아니다. 국민의 대통령이다. 이를 혼동할 경우 정치가 혼탁하고 나라가 시끄럽다. 신년사는 대통령으로서 그 해의 시정방침을 국민에게 밝히는 국정백서다. 연두기자회견 같은데서 집권당 총재로서 질문받은 내용에 답변하는 것과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신년사는 오직 대통령의 입장에서만 국정지표를 피력해야 하는 것이 상궤다. 김대중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신당을 언급한 것은 그같은 상궤를 일탈했다. ‘국정이념을 실현하고자 신당을 창당한다’고 말한 것은 국정지표와 정권목표를 혼동했다. 대통령의 위치에서 집권당 총재의 모습을 보인 것은 불가하다. 신당창당은 정권차원의 작업이지 국정일 수가 없다. 정권목표의 신당을 대통령의 위치에서 운운하는 것은 대통령의 직무를 무기삼아 엄호하는 것으로 보여져 심히 부당하다. 대통령의 직무수행을 위해 신당 의석안정의 정치수단으로 언급할 수 있다는 강변은 어디까지나 강변이다. 그같은 얘기는 총재로서 당의 행사에서나 가능하다. 민주주의의 요체는 정당기능과 국가기능을 능히 식별할 줄 아는데 있다. 이를 혼동하면 민주주의가 위협받는다. 대통령과 집권당 총재의 혼선은 전에도 있었다. 역대 정권의 집권자들이 대개는 그랬다. 재야의 김대중씨가 민주화운동을 벌인 것도 그같은 정권의 부도덕성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만은 전철을 답습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 그 역시 구태를 못벗은 것은 유감이다. 중임제도 아닌 단임제에서 대통령과 총재 구분의 도덕성이 축적되지 못하는 것은 정치발전의 정체로 불행한 현상이다. 진정, 다가오는 4·13총선이 걱정되면 새로운 면모를 국민에게 보여주는 성찰이 필요하다. 총재가 대통령의 입장에서 신당을 자꾸 들먹이는 것은 공정치 못한 게임으로 국민들이 보기에 썩 보기 좋은 것은 못된다. 신당은 분명히 국민회의 총재가 만드는 정권목표의 작업이다. 국가기관으로써의 대통령과는 어디까지 별개다. 본란이 이를 굳이 언급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정치수준이 그만큼 낙후돼 있음을 말한다.

갈등해결은 평화적으로

공공기관은 국가질서와 구성원에 대한 봉사를 상징하는 장소이다. 때문에 공공기관이 사회구성원으로부터 동의를 얻어 권위를 가지고 국가질서를 유지하고 국민에 대한 봉사를 하고 있다. 따라서 공공기관은 여하한 경우에도 권위를 가지고 힘을 발휘하여야 하며 또한 주민과 더욱 친근하게 대면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또한 공공기관은 공권력을 상징한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는 공공기관에 대한 권위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권위를 잃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권력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까지 야기되고 있어 이에 대한 조속한 대책이 요망되고 있다. 공공기관이 무시의 대상이 되는 차원을 넘어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면 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구랍 12월 30일 인천과 성남에서 공공기관의 업무 처리에 불만을 가진 민원인에 의해 시청과 구청 청사 유리창과 컴퓨터 등 기물이 파손되고 공무원을 폭행하는 사태가 발생하였으니, 이는 평화적인 방법에 의한 불만의 표출이 아닌 것이다. 물론 공공기관의 권위가 무시되는 것은 공공기관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 과거 공공기관은 강력한 집행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권력을 자의적으로 불편부당하게 사용하여 공공기관 자체의 권위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위를 하였다. 즉 공공기관이 정당하지 못하게 힘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때로는 공공기관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대명사로 국민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접근하기 조차 어려운 상황도 있었다. 때문에 공공기관 스스로 정당한 힘을 정당하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민주사회에서는 여하한 경우에도 폭력을 통한 갈등해결은 안된다. 더구나 국가질서와 구성원 봉사에 바탕을 이루고 있는 공공기관이 폭력의 대상이 된다면 사회 질서는 유지될 수 없다. 더 이상 공공기관의 권위가 무시되는 사회가 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자성하여야 될 것이다. 폭력은 폭력의 악순환만을 유발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되새길 필요가 있다. 공공기관의 권위가 사회구성원의 합의에 의하여 조속히 회복되기를 기대한다.

교통혼잡비용이 12조라니

최근 교통개발연구원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98년 우리나라의 총 교통혼잡비용은 당시 국민총생산(GDP)의 2.7%인 약 12조2천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 약 7조원은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그리고 나머지 5조원은 고속도로와 국도 및 지방도에서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물론 이런 수치는 경기악화의 영향으로 97년의 18조원에 비하여 줄어 든 것이기는 하나, 아직도 다른 선진국가에 비해 대단히 높은 수치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획기적인 개선책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교통문화는 경제수준에 비해 후진국 수준에 머물고 있다. 교통혼잡 비용도 많을 뿐만 아니라 교통질서를 비롯한 교통문화는 더욱 문제이다.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의 발표에 의하면 한국의 자동차 생산량은 29개 회원국 중 8위, 인구 1백명당 자동차 보유대수는 하위권인 27위를 기록하고 있음에도, 유독 교통사고 사망률은 2위를 기록하고 있다. 폭증하는 교통사고에 대한 이런 통계는 손해보험협회가 지난 9월말까지 분석한 자료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즉 사고발생건수가 전체보험 가입 건수의 4.6%에 달하며, 이는 사상 최고였던 92년의 4.7%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사고에 의하여 1년에 약 66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다. 66만명이라는 사상자수는 전북 전주시에 해당되는 숫자이니, 1년에 전주시 규모의 인구가 교통사고로 사망 또는 부상을 입고 있다니 참으로 무서운 일 아닐 수 없다. 이런 추세가 지속되면 우리 나라는 또 다시 교통사고 1위의 부끄러운 기록을 다시 가져야 될 것 같다. 외국 관광객들도 한국 관광에서 가장 힘든 것이 무질서와 난폭운전의 교통질서를 지적하고 있을 정도로 우리의 교통문화는 하위수준이다. 교통문화의 선진화는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높은 교통혼잡비용과 각종 교통사고를 줄이기 위한 노력은 지속되어야 하며, 이를 위하여 정부는 물론 시민 개개인의 교통문화 의식 제고가 절실한 과제이다. 특히 차량운행이 폭증하는 연초를 맞아 선진화된 교통문화는 더욱 필요하다.

총재회담의 ‘핵심’

정치개혁은 제도와 의식개혁이 병행돼야 한다. 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이를 운용하는 의식이 개선되지 않으면 정치개혁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제도개혁에 편중된 정치개혁이 그나마 지극히 지지부진하면서 의식개혁은 실종된 가운데 올 벽두에 여·야가 정치복원을 강조하고 나섰다. 이는 정치의식의 개혁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아 일단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말에 대한 신뢰성을 이미 잃은 정치권이 얼마나 실천에 옮길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우리가 연초벽두, 이번 주중에 가질 것으로 알려진 여·야 총재회담을 새삼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가 강조한 정치복원의 시금석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더이상 과거잡기의 족쇄로 미래발전을 막는 구세기적 정쟁을 바라지 않는다. 누구인들 과거가 온전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저변의 사회정서다. 그런데도 역대 정권의 발목잡기는 거의 일방적 플레이로 이루어져 말하자면 불공평한 게임이었다. 현 집권층 역시 그같은 공포를 경험하였으면서 여전히 구태를 계속 답습한다면 밀레니엄 화합의 표방에 합당하다 할 수 없다. 여·야총재회담은 정치발전의 틀을 새롭게 짜는 협상의 내실이 담겨야 그 가치가 있다. 정치협상은 제반 현안에 대한 상호 시각의 장단점을 보완하는 작업이다. 무엇이든간에 자신의 생각만이 절대로 옳을 수는 없으며, 누구이든간에 그같은 아집을 갖는다면 민주적 사고방식에 반하는 독선이다. 우리는 이번 여·야총재회담만은 지난 예와는 달리 진정 정치복원의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는 성과가 있기를 기대한다. 만일에 그렇지 못하고 또 겉모양새로 끝나면 정치권은 공멸의 국민적 지탄을 면치 못한다. 새천년의 새 시대에 들어섰으면 정치도 이젠 현실 민생문제와 아울러 미래의 청사진을 두고 싸워도 좀 그럴듯한 싸움을 해야 국민이 희망을 갖는다. 이같은 정치품질의 개혁이 이번 여·야총재회담의 핵심이 돼야 한다. 이는 또 정국을 주도할 책임이 있는 집권여당쪽에 더 막중한 사명이 부하된다.

시민단체 官邊化 경계한다

지난 27일 김대중 대통령은 전국에 걸쳐 활동하고 있는 민간단체 대표들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간담회를 개최, 시민단체가 정부정책 수행에 있어 비판자의 기능뿐만 아니라 협력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줄 것을 요망했다. 시민단체를 국정 수행에 있어 일종의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다면서 새천년을 맞이하여 시민단체의 역할이 더욱 증대될 것이므로 정부도 시민단체에 대한 지원을 강화할 것이며, 시민단체들도 국민들의 기대에 어긋나게 행동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시민단체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 증대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시민운동가가 임명되어 활동하고 있으며, 여당 주도로 비영리민간단체지원법안이 제출되어 지난 중순 정기국회 말에 통과되었다. 소위 NGO지원법으로 통칭되고 있는 상기 법령에 의하여 시민단체들은 국공유 시설을 무상 또는 실비로 대부 또는 양여하거나 사용할 수 있으며, 중앙정부나 지자체로부터 보조금을 지원받을 수 있다. 또한 비영리단체는 세법에 따라 조세감면을 받을 수 있으며, 공익활동에 필요한 우편물은 요금의 일부를 감액받을 수 있어 앞으로 시민단체 운영에 있어 상당한 도움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의 중요성이나 그 역할에 대해 새삼 재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미 시민단체는 우리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동안 경제정의실천, 깨끗한 정치 추구, 교육환경 개선, 부패추방운동, 환경보호운동 등에서 시민단체들이 보인 활동은 괄목하며, 다양한 주제에 대한 문제 접근을 통하여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반을 확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NGO지원법 등과 같은 정부의 지원책에 힘입어 자율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시민단체 조직 자체를 유지하는데 급급하거나 또는 각종 단체들이 정부의 지원금을 받기 위하여 우후죽순으로 생길 가능성도 있다. 정부도 보조금 지급을 미끼로 시민단체를 관변단체로 만들 우려도 있다. 따라서 어느때보다도 시민단체에 대한 역할이 기대되지만 한편으로는 시민단체 자체가 위상 정립에 있어 더욱 많은 노력과 스스로의 성찰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희망주는 새 천년 통일기원제

경기도가 만세에 길이 남을 기념탑을 세웠다. 2000년을 맞이해 개최하는 밀레니엄 축제 ‘새 천년 통일 기원제’를 완벽하게 준비한 것이다. 28일 파주 임진각에서 있은 ‘새천년통일기원제추진위원회’ 제4차 회의를 마친 후 가진 ‘평화의 종’ 제막식과 시험타종은 당초의 반신반의를 기우로 돌려 놓았다. 21세기를 상징, 21t의 무게로 주조된 ‘평화의 종’은 민족화합과 조국통일, 그리고 인류평화를 기원하며 분단의 현장 임진각 일원에 900만 경기도민의 뜻과 정성을 모아 ‘평화의 종각’과 함께 건립한 민족염원의 상징물이다. 인류평화가 어찌 우리만의 기원이겠는가. ‘평화의 종각’ 옆에 자리한 ‘피스가든(Peace Garden)’의 조형물 ‘평화의 돌’은 세계 64개국 86개 전쟁터의 한과 슬픔이 서린 돌을 모아 설계됐다. 이 ‘평화의 돌’ 역시 인류평화의 간절한 염원을 모아 경기도민이 세운 상징물이다. 이제 이틀 후인 2000년 1월 1일 0시가 되면 ‘평화의 종’이 15분간 타종된다. 각계 각층의 대표들이 타종할 ‘평화의 종’소리는 새 천년이 열리는 남북하늘에, 그리고 국민들의 가슴속으로 장엄하게 울려퍼질 것이다. 31일 밤 8시부터 새해 1일 미명의 1시30분까지 열리는 ‘새 천년 통일기원제’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이유는 ‘미래를 향하여’ ‘통일기원제’ ‘철조망 끊기’ ‘평화의 종 타종’ ‘DMZ 2000’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지난 천년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새 천년의 민족화합과 도약을 다짐하는 엄숙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새 천년을 맞이하는 행사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열린다. 그러나 경기도가 주관하는 ‘새 천년 통일기원제’는 경기도민만의 행사가 아니다. 국가적이요, 세계적인 축제다. ‘새 천년 통일기원제’를 계기로 새로운 21세기에는 민족화합과 인류평화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지난날 역사속에 있었던 미움과 분노와 원한이 용서와 화해와 사랑으로 피어나고, 이웃과 이웃, 겨레와 겨레, 나라와 나라가 모두 형제되어 서로 얼싸안는 세상이 되기를 기원한다. 무엇보다 먼저 남북으로 나뉜 이 땅이 하나가 되고 좌우로 갈라선 이 겨레가 하나로 합쳐지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행사의 주요 내용이 MBC-TV를 통해 세계 87개국과 전국에 생방송될 ‘새 천년 통일기원제’가 전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공적인 대축제로 승화할 것으로 믿는다.

‘DJ總選觀’타당한가?

신당관계자들에게 밝힌 김대중대통령의 총선관이 언론에 논란이 되고 있는 것 같다. 본란 또한 이에대해 지녀온 생각을 밝힐 필요를 갖는다. 대통령은 야당시절에 여당의 독주를 저지할 견제 세력을 호소했다. 자신의 야당시절과 지금의 야당의 차이, 과거의 여당과 지금의 집권여당 차이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먼저 듣고 싶다. 우리가 알기로는 본질적 차이가 없다. 만약에 대통령이 자신만은 다르다고 믿는다면 다분히 독선이다. 신당관계자들에게 밝힌 말가운데 독선이 발견되는 것은 심히 유감이다. ‘여권이 내년 총선에서 안정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면 경제동요, 노동계 불안으로 제2의 남미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또 ‘북한은 남한사회를 흔들어 남북문제가 어려워 질 것’이라고도 했다. 제 2남미설이나 북한책동설은 듣기가 민망하다. 아무리 당내 관계자들에게 한 말일지라도 듣기에 따라서는 국민에 대한 위압으로도 들린다. ‘개혁이 물거품된다’고도 했으나 벌써 형해화해버린 개혁의 실체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지난 2년동안 안정의석을 확보했다. 비록 인위적 재편이긴 했으나 어떻든 안정의석속에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를 묻고싶다. 걸핏하면 야당이 발목을 잡는다고 우기는 것은 책임회피다. 자신의 생각은 다 옳다고 보아 상대의 승복만을 강요하는 비민주적 논리는 대통령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야당이 다 잘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제는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에 있다. 물론 내년총선의 안정의석 희구는 그로써는 당연하지만 대통령의 발언은 적절치 않다. 과거에 대한 평가, 미래에 대한 전망이 총선을 판가름한다. 대통령의 국민적 중간평가가 내년 4·13총선이다. 클린턴이 여소야대에 야당을 탓하거나 그를 구실삼아 국민의 불행을 말한적은 없다. 김대중대통령이 일방적 독주를 안정으로 여긴다면 과거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설사, 안정의석을 얻지 못해도 이를 극복해낼 수 있는 분명한 정치적 도덕성과 신뢰성있는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오히려 안정의석을 얻는 길이다. 국민의 신임은 어떤 요술적이거나 주술적 정치방법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나라와 국민이 잘되고 못되고 하는 것은 대통령의 절대적 책임이다. 헌법상 권력이 이같은 의무를 기속시키고 있다.

대입 高價전형료 낮춰야

대학들의 고가(高價)입시전형료가 또다시 도마위에 올랐다. 정부가 수험생들의 부담경감을 위해 대학들에 입시전형료 인하를 권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대학들이 이를 무시하고 작년수준의 전형료를 책정, 여전히 돈벌이에 급급하다는 비난이 일고 있는 것이다. 올해 책정된 입시전형료는 특차가 3만∼4만원에 정시모집은 인문·자연계열이 3만∼4만5천원, 실기시험을 치르는 예·체능계열은 7만원에 이르고 있다. 현행 입시제도 아래서 수험생이 특차와 정시모집 4개 대학에 복수지원할 경우 최고 32만원의 전형료를 부담하게 된다. 이는 거의 작년과 비슷한 수준이다. 경제위기를 넘겼다지만 아직도 서민 가계가 주름살을 펴지 못하고 있는 형편에 자녀들의 입시전형료를 이처럼 최고 32만원이상 내야 한다면 여간 부담이 큰 게 아니다. 지난 9월의 국감자료에 따르면 작년 전국대학의 전형료 총수입은 7백12억원으로 순수 전형경비를 빼고 10억원의 흑자를 낸 대학이 있는가 하면 140여 대학이 대체로 3억∼4억원의 흑자를 낸 것으로 집계됐다. 입시전형료는 사용자 부담원칙에 따라 꼭 필요한 경비만큼 응시자가 내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런데도 자녀입시에 약한 학부모 심리를 이용해 전형료로 대학이 장사를 하려 든다면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다. 입시 홍보나 신입생 설명회 비용을 전형료에 포함시킬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대학측 설명이지만 대학 홍보비와 전형료는 전혀 별개인 것이다. 대학 홍보비나 설명회 비용을 수험생에게까지 전가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대학이 출혈을 해가면서 전형료를 대폭 낮추라는 요구도 무리다. 적정선을 도출해서 전형료 부담을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입시전형료의 적정선은 대학마다 학교마다 다를 수 있어 획일적 전형료를 매길 수는 없다. 그렇지만 대학마다 전형료 사용내역을 성실하게 작성 공개해 공정성을 인정받음으로써 적어도 대학이 전형료를 받아 장사를 한다는 오해의 소지를 남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제 대학은 전형료 몇푼을 더 받아 챙기려는 얕은 수로 대학재정을 꾸려나갈 생각을 버려야 한다. 재단의 전입금 확충 또는 기부금의 활성화 등 근원적인 대책으로 재정난을 풀어갈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연말연시를 뜻있게

요즘 각처의 유흥가와 번화가가 세기말을 즐기려는 인파들로 연일 새벽까지 흥청망청대고 있는 모습은 비정한 사회의 한 단면이다. 나이트클럽, 주점, 여관 등이 초저녁부터 만원사례를 이루고 유통업계들은 소위 ‘세기말 특수’를 노린 ‘밀레니엄 상술’로 과소비심리를 부채질하고 있다. 대형백화점들이 일정액수 이상을 구입하는 고객들을 대상으로 해돋이 비행기 여행과 스키여행을 내거는 등 각종 이벤트를 마련해놓고 과소비를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온통 낭비풍조로 들떠 있다. 올해 우리나라의 주가상승률은 세계 8위를 기록했고 백화점의 연말세일은 매출액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국내외 휴양지로 향하는 비행기표는 구하기가 힘들어졌고 호화아파트 분양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호텔마다 송년회로 흥청거리고 고급 음식점과 호텔 식당은 지난 11월 거의 예약이 끝났다. 사치성 수입도 급증하고 기업들은 돈이 남아돈다고 한다. 그러나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의 세상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다. 고아원, 양로원 등 사회복지시설에는 방문객이 줄어 더욱 쓸쓸하고 가장의 실직으로 무료급식을 받는 학생들이 이 순간에도 늘어나고 있다. 소년소녀 가장이 늘고 있으며 의탁할 곳 없는 노인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이다. IMF를 극복했다고 정부는 자랑하지만 빈부의 격차는 더 극심해졌다. 어려운 이웃은 아랑곳 없이 혼자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이기심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맥빠지게 한다. 내돈 갖고 내가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이 사회연대의식을 깨뜨리고 있다. 경제는 호황이라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IMF로 인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지탱하기가 정말 어렵다. 이제부터라도 연말연시의 각종 모임을 줄여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한다. 과소비성 쇼핑을 자제하여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성금을 내야 한다. 우리의 작은 도움이 온정의 강물이 되어 이 춥고 메마른 사회를 적셔주는 것이다. 우리의 작은 이웃사랑이 화톳불이 되어 꽝꽝 얼어붙은 이 사회를 따뜻하게 녹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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