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선택의 세계는 지금] 대한민국이 세계 6대 강국인가

최근 인터넷 인기 기사를 보면 미국 언론 매체인 유에스뉴스앤드월드리포트가 발표한 세계 강대국 순위가 포함돼 있다. 조사 대상 89개국 가운데 대한민국이 6위로 집계됐다는 결론이 눈길을 끌 수밖에 없다. 1위 미국에 이어 중국, 러시아, 영국, 독일 다음에 한국이다. 이어 프랑스와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이 그 뒤를 잇고 있다. 한국 사람이라면 이런 조사 결과를 놀라움과 감동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100년 전만 해도 국력이 약해 일본 식민지로 전락했고 광복 이후에도 세계 극빈국 가운데 하나로 약소국의 비애를 숙명처럼 안고 살던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순위 발표 내용을 자세히 검토하면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어 잠시 숨 고르기가 필요하다. 우선적으로 검토할 내용은 이번 조사가 ‘최고 좋은 나라’ 순위를 매기는 것이고 강대국 순위는 하위 세부 항목 10개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강대국 조건 가운데 상당 부분이 다른 세부 항목으로 처리됐고 그쪽을 보면 현저하게 낮은 순위가 여러 개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은 혁신 추동력 5위를 비롯해 국력 6위, 문화 영향력 7위, 기업가정신 7위, 기민함 10위로 비교적 높은 편이지만 삶의 질은 25위, 유산 32위, 사회적 명분 42위, 모험요소 51위, 사업 개방성 70위로 중하위권을 맴도는 분야도 상당한 것으로 조사됐다. 모든 항목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한국은 ‘최고 좋은 나라’ 18위로 집계됐다. 한국 언론은 세부 항목 중에서 국력 부문을 중시해 한국이 6위라고 강조했지만 전체적인 조사 맥락으로 보면 강대국 개념에는 종합순위가 더 가까운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국력 순위를 강대국 순위로 인정한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군사력 부문에서 한국이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핵무기 보유 여부보다는 병력 규모나 재래식 무기 체계를 중시한 결과다. 경제력에서도 교역 규모를 기준으로 하면 한국이 강대국이지만 금융 자본이나 제도를 기준으로 제시하면 현저하게 다른 순위가 나올 수 있다. 외교 정책 분야나 지식 생태계, 복지 제도, 효과적인 소통 등은 전통적인 사고 기준으로 보면 강대국의 핵심 요소인데도 이번 조사에서는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강대국 개념을 중시한다면 하드파워, 소프트파워, 스마트파워로 구분해 조사하는 것이 간결할 것이다. 하드파워로는 군사력과 경제력, 인구 및 영토가 중요하고 소프트파워에서는 문화,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정치제도가 중요하다. 스마트파워에서는 외교, 지식, 소통이 핵심 기준이다. 한국은 하드파워에서 금융 분야와 인구 및 영토 부문, 소프트파워에서는 ESG 분야에 약점이 있어 15위 이내에 들기 어려울 것이다. 스마트파워 부문에서는 문제가 더 많다. 외교 역량에서 한미동맹에 대한 과도한 의존으로 자주적 외교 역량이 부족하다. 또 한국 지식인 다수가 여전히 대한민국을 모방국가로 생각하기 때문에 지식 생태계가 허약하다. 소통 분야에서도 선진국 방식인 투명성, 쌍방향, 대화보다는 개발도상국 방식인 통제, 일방향, 인정투쟁에 급급하다. 30위 이내에 들기도 어려운 현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번 조사 결과를 근거로 대한민국이 세계 6대 강대국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도하게 자기 중심적으로 보인다. 같은 조사에서 종합 등수 18위가 존재하는데도 우리 언론은 이를 애써 외면하고 굳이 강국 순위 6위에만 집중하는 것 자체가 과도한 인정투쟁의 일면을 보여주는 듯 해 씁쓸하다. 다만 대한민국의 눈부신 국가 발전 역사는 이번 지표에도 충분히 반영돼 있다. 이번 조사에서 부족한 것으로 드러난 부분은 국가적인 합의만 이룰 수 있다면 짧은 시간 안에 극복하고 진짜 세계 6강이 될 가능성과 잠재성이 충분하다. 우리 언론이 그런 점에 주목한다면 세계 6강에 진입하는 시기는 더 빨라질 것이다.

[천자춘추] 소상공인, 민생정책 적극 나서야

곧 민생지원금 등 대규모 추경이 시작된다. 소비를 진작해 경기를 끌어올리겠다는 정부의 의지다. 소상공인 업계는 이를 크게 환영하고 있다. 정부는 민생회복지원금 외에도 소상공인의 장기연체채권 소각, 상환 기간 연장, 폐업 지원금 인상 등 다양한 대책을 예고했다. 소비쿠폰, 숙박여행권, 영화관람권 지급 등을 통해 자영업자들의 숨통을 틔우겠다는 구상이다. 이런 지원책이 주변 자영업자들에게는 직접적인 도움이 되겠지만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제조업 기반의 ‘소공인’이다. 중소벤처기업부의 2023년 소상공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체 소상공인 기업체 약 596만개 중 약 55만4천개가 제조 소공인으로 전체의 약 9.3%를 차지한다. 음식점이나 카페처럼 1인 사업장이 많은 업종과 달리 소공인은 평균 10인 미만의 사업장으로 고용도 많고 산업 파급력도 크다. 그러나 이들도 내수 부진과 수출 감소로 이중고를 겪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제조 소공인들의 해외 진출이 본격화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지난해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은 베트남 하노이에 ‘두근두근’ 매장을 출점시켜 K-뷰티의 바람을 타고 크게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 매장에는 국내 유망 화장품 제조 소공인이 200여개 기업이 참여 중으로 새로운 판로 개척과 기업 홍보로 국내 소공인들의 신시장을 개척하는 모델이 되고 있다. 이 사례는 카카오, 한진 등 대기업이 적극 나서 협업을 진행해 대기업이 가진 노하우와 기술을 바탕으로 신속하게 소공인의 해외 진출을 돕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와 지역 대학이 협력해 소공인의 해외 진출을 돕는 사례도 주목을 끈다. 최근 인천시와 인하대는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에서 인천지역 화장품 제조 소공인을 지원하고 나섰다. 키르기스스탄은 유통업이 발달한 국가로 수도 비슈케크에는 세계 3대 시장 중 하나인 ‘도르도이 바자르’가 있다. K-뷰티가 전 세계에서 인기를 얻고 있지만 이 지역은 국내 소공인에게는 처음 진출한 곳으로 현지 시민과 바이어의 관심이 뜨거웠다. 제품 사용법과 특징에 대한 문의가 이어졌고 거래 가능성도 논의됐다. 주키르기스스탄 한국대사관 역시 적극 협력하고 있다. 이처럼 여러 기관이 손잡아야 가능한 성과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많은 소공인들이 아마존, 쇼피 등 온라인 시장에 진출했지만 화장품처럼 체험과 문화 경험이 중요한 제품은 오프라인 매장이 여전히 중요하다. 소공인도 더 이상 대기업 수주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판로 개척에 적극 나서고 지역과 대학, 기관이 이를 함께 뒷받침해야 한다. 소비쿠폰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사각지대를 찾고 도와야 하는 것이 진정한 소상공인 지원기관의 존재 이유다.

[세상읽기] ‘맘다니’ 돌풍과 진보적 실용정치

“뉴욕은 너무 비쌉니다. 조란은 비용을 낮추고 삶을 더 편하게 만들 것입니다.” 세계 언론이 뉴욕 시장 예비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선출돼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조란 맘다니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맘다니가 승리할 것이라고 예상한 시민과 언론은 거의 없었다. 2월에 지지율이 불과 1%에 지나지 않았던 맘다니는 6월 예비선거에서 43.5%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정치 거물 앤드루 쿠오모 전 뉴욕 주지사를 이겼다. 맘다니의 뒤에는 청년층, 진보층, 이민자들의 열광적인 지지가 있었다. 뉴욕타임스는 “맘다니는 민주당이 오바마 시대 이후로 지지를 잃은 젊은층과 소수민족 집단이란 전통적 지지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흥분을 불러일으켰다”고 평가했다. 11월까지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맘다니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한 기득권층의 거대한 벽을 뚫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트럼프 대통령의 비하와 조롱, 보수 언론의 폄하, 뉴욕 월스트리트의 공격, 상위 1%들의 거액 광고, 집주인들의 반발, 금융자본의 후원을 받는 민주당 정치인들의 우려를 넘어섰다. 미국 언론들은 맘다니가 민주당에 등을 돌린 청년과 사회적 약자를 대변했다고 분석했다. 또 세대교체에 대한 갈망과 기득권층에 대한 분노를 모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미국 민주당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뉴욕시 아파트 절반에 대한 임대료 동결, 무상 시내버스 확대, 영유아 무상 보육 확대, 뉴욕시 소유 땅과 건물에 저렴한 식료품점 운영, 이를 위한 슈퍼 부자 증세 등 정책의 목표와 대상자가 선명하다.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비용'이라는 미국 유권자들의 핵심 의제에 다가가며 진보적 의제를 제시했다. 민주당은 불평등을 외면했고 맘다니는 불평등을 직시했다. 이 모습은 미국의 현재와 미래의 교훈이면서 동시에 지난 대선에서 패배한 미국 민주당에 주는 교훈까지 함축하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대런 아제모을루는 미국 민주당의 대선 패배를 두고 “트럼프 쇼크는 민주당 책임”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었다. 한국 정치에도 던지는 중요한 질문이자 해법이다. “민주당은 이미 오래전부터 미국 노동자들의 안식처가 되지 못하고 있다. 대신 민주당은 디지털 혁신에 따른 변화(digital disruption), 세계화, 거대한 이민의 유입, 그리고 ‘워크’(woke) 사상에서 지지를 구해 왔다. 그 결과 오늘날 민주당에 투표하는 지지층은 제조업 노동자가 아니라 고학력층이다. 미국을 비롯해 어떤 나라든 중도 좌파 정당이 좀 더 친노동 정당이 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나빠지게 된다.” 지금 대한민국은 뉴욕처럼, 아니 뉴욕보다 너무 비싸다. 서울 원룸 평균 월세는 72만원이다. 경제활동을 하는 직장인에게도 만만찮은 금액이다. 대학생들에겐 말할 것도 없다. 부동산 증여는 사회의 출발선을 계급화하고 있다. 부유세를 강화하고, 토지공개념을 제도화하고, 청년과 중산층의 주거권을 확대하는 등 도전적인 의제들이 논의돼야 한다. 맘다니는 대선에서 트럼프를 뽑았던 유권자를 찾아갔다. 그들이 호소하는 불평등을 캠페인 영상으로 제작했다. 일부 트럼프 지지층은 맘다니를 지지했다. 그들은 극우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안정과 희망을 찾아선 것이다. 상위 1%는 불황을 먹고 자라고, 극우는 불평등을 먹고산다는 말은 우리 모두가 아프게 새겨야 한다. 정치가 불평등의 비용을 낮추고 삶을 더 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진보이고 실용이다.

[사설] 화장률 95%인데 화장장 부족해 큰일이다

묘지를 택하는 방식 중에 이런 게 있었다. 이른 봄에 가장 먼저 눈 녹는 곳이 있다.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적은 곳이다. 이곳을 어르신들의 묘지로 선택했다. 마을 최고의 길지는 ‘죽은 자’에게 주어졌다. 장례문화의 숭고함이란 게 그랬다. 지금 세대는 이해하지 못할 옛이야기다. 요즘은 매장 묘지 조성 허가 자체가 어렵다. 매장도 크게 줄어 전체 장례의 5% 정도다. 2023년 경기도에서 7만5천여명이 사망했다. 95%인 7만1천명이 화장을 택했다. 언제부턴가 이 화장의 기회를 잡는 것도 쉽지 않다. 우리의 전통적인 장례 절차는 ‘3일장’이다. 이 기간 내에 장례를 마치는 게 점점 빠듯해진다. 경기도민의 3일 차 화장률이라는 게 있다. 2021년 88.1%, 2022년 73.3%, 2023년 71.5%다. 모두 전국 평균보다 낮다. 장례가 몰리는 시기에 사정은 더하다. 이를테면 2023년 12월의 3일 차 화장률이 46.8%였다. 절반 넘는 망인이 화장장을 제때 구하지 못했다. 간단한 이유다. 화장장이 부족하다. 경기도의 한 해 평균 사망자는 7만5천명이다. 현재 종합화장시설은 네 곳에만 있다. 수원, 성남, 용인, 화성이다. 서울 이북, 경기 북부에는 한 곳도 없다. 북부에서 남부까지 원정 화장을 해야 할 형편이다. 하다 하다 장례에서까지 차별을 받는가. 그렇게 볼 건 아니고, 관건은 화장장이다. 인접 시·군끼리 설립·사용하는 화장장을 만들면 된다. 화성(함백산추모공원)도 7개 시·군이 함께 만들었다. 북부 7개 시·군의 광역화장장이 양주에 추진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멈춰섰다. 부지 인근 주민들의 반대 때문이다. 도청에 ‘장사시설 백지화’ 청원도 올라온 상태다. 남부에서도 그렇다. 용인에 봉안시설이 추진되다가 무산됐다. 경기도가 불허 결정을 내렸다. 평택, 안성 등에서의 장사 시설 추진도 힘겹다. 다 주민 반대 때문이다. ‘화장장 오면 집값 떨어진다’며 결사 반대다. 전문가들은 장사시설에 대한 ‘계몽’을 말한다. ‘설명해서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한다. 씨도 안 먹힐 소리다. 그렇게 풀어냈던 예도 없다. 관건은 입지다. 그리고 그 입지를 선정하는 과정이다. 행정기관이 ‘찍는 방식’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힘겹더라도 주민과 소통하며 찾아가야 한다. 때마침 화장장 부지를 확정한 이천시립화장장이 그랬다. 2019년 ‘부발읍 수정리’를 찍어 추진했다. 인근 여주 주민의 반발로 백지화됐다. 2024년 ‘구시리 화장시설’을 추진했다. 이 역시 주민 반대로 백지화됐다. 마침내 ‘호법면 단천리’로 확정했다. 이제 이천시가 자랑한다. ‘전국 최초 주민 제안 방식이다.’ 무엇보다 어려운 공무(公務)임을 잘 안다. 인내가 필요한 지난한 사업이다. 말로 다 못할 어려움도 있다. 그렇더라도 ‘원정 화장’을 보고 있을 순 없다. 생애 주기의 마지막 복지다. 처음부터 주민들과 같이 추진하길 권한다. 그런 화장장 추진이 대체로 성공했다.

[사설] 인천 어촌마을 ‘소멸’ 경고등... 바라만 볼 일 아니다

인천 어촌마을들에 소멸 위기 경고등이 들어왔다고 한다. 고령화와 청년 인구 유출이 1차 원인이다. 수산자원 감소와 불편한 생활환경 등으로 청년 유입은 쉽지 않다. 인천 어업 가구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이대로 더 10년이 흐르면 어촌 소멸이 현실화할 것이라는 진단이다. 어촌마을은 수산업을 영위하는 곳만이 아니다. 우리 국토를 지탱하는 여러 공익적 기능을 수행해 왔다. 먼저 경기일보가 돌아본 인천 어촌마을의 실상을 보자. 옹진군 덕적면 북1리 마을은 과거 덕적도의 대표 어촌이었다. 1960년대에는 널찍한 선주 집에 선원들이 모여 사는 등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어민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현재 이 마을엔 어업에 종사하는 어민이 단 1명도 남지 않았다. 물고기가 잘 안 잡히고 일도 힘들어 들어오는 사람은 없이 마을이 비어 가는 것이다. 어민들이 떠나자 마을이 쇠락하기 시작했다. 마을 부자였던 한 선주의 2층 주택도 무너져 내린 채 풀로 뒤덮여 있다. 마을 번화가의 옷 가게와 여관도 문을 닫았다. 어민들이 소금기를 씻어내던 대중목욕탕도, 바닷가의 어망 제조공장도 사라진 지 오래다. 마을을 지탱하던 이런 어촌 시스템의 붕괴가 지역 소멸로 이어질까 걱정한다. 남은 주민들도 하나둘 돌아가시거나 요양병원으로 떠난다. 인천의 어업가구(어가·漁家)가 최근 10년 사이 절반 이상 줄었다. 지난 2014년 인천의 어가 인구는 6천138명이었다. 그러나 2024년엔 2천943명이었다. 지난 10년간 해마다 300명 이상씩 줄어든 셈이다. 어가는 판매할 목적으로 1개월 이상 어선어업이나 마을어업, 양식어업을 직접 경영한 가구를 말한다. 현지 어업 종사자들은 힘든 어로 노동과 불편한 생활환경 등으로 어민들이 떠난다고 본다. 그러나 이를 메워 줄 청년층이나 신규 어민 유입은 없다. 어촌 소멸로 가는 것이다. 인천 강화도 한 어촌계장의 푸념이 현실을 말해 준다. “고된 바닷일을 견디거나 슈퍼 하나 없는 어촌 생활을 버텨낼 청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 세대가 늙어 가버리면 어촌마을은 소멸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인천만의 현상은 아니다. 지난해 기준 부산 지역 어업 종사 가구원이 1천911명이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35%나 줄었다고 한다. 연안 어업 어선에서도 외국인 근로자 없이는 조업이 어려운 요즘이다. 거대한 시대적 흐름인가. 그러나 어촌 소멸은 바라보고만 있을 일이 아니다. 수산업을 떠나 지역 소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큰 틀에서 어업 지원 정책을 손 봐야 할 때다.

[지지대] 첫 번째 시험대에 오른 ‘李정부’

이재명 정부의 국정 지지율이 60%에 육박한다. 최근 한 여론조사 업체가 발표한 이 대통령 국정 수행 평가 조사 결과, 긍정 평가는 59.7%, 부정 평가는 33.6%, 잘모름 응답은 6.8%였다. 이번 조사 결과가 의미 있는 이유는 긍정 평가가 이전 조사보다 높아졌고 수도권과 비수도권 등 전 지역에서 50% 이상의 긍정 평가가 나왔기 때문이다. 산뜻한 출발을 보인 이재명 정부가 최근 ‘부동산 정책’을 발표했다. 이재명 정부가 내놓은 첫 번째 부동산 정책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강력한 대출 규제’다. 금융위원회 등 관계 부처가 발표한 이번 방안은 수도권·규제지역에서 주택을 구입할 때 주택담보대출 한도를 6억원 이하로 제한하고 수도권·규제지역 2주택 이상 보유자의 추가 대출을 전면 금지하는 것이 골자다. 이는 최근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아파트 가격이 크게 상승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이번 대책에 대해 전문가들은 단기적으로는 주택 시장을 안정화시키는 데 효과가 있을 것으로 분석하면서도 장기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번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체감이 이전과는 다르다. 규제의 강도가 강한 것도 있지만, 이 대통령이 갖고 있는 ‘이재명은 합니다’라는 강력한 행정 실행 이미지가 국민들로 하여금 ‘이번에는 진짜다’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 같다. 대통령실은 일단 이번 부동산 대책에 대해 “금융위에서 나온 대책으로 대통령실 대책이 아니다”라며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번 대책에 대한 책임은 결국 이재명 정부의 몫이다. 이미 집의 목적이 ‘거주’가 아닌 ‘재산’으로 자리 잡은 대한민국. 주택 가격은 떨어져야 하지만 ‘내 집’ 가격은 올라야 한다는 국민들. 이재명 정부가 출범 이후 첫 번째 시험대에 올랐다.

[김종구 칼럼] 한국은행 총재 차례인가

“내 목장의 황소처럼 다루겠다.” 갈등의 발단은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였다. 존슨 대통령이 1964년 연두에 화두로 던졌다. 그리고 그해 가을 압도적 지지로 재선에 올랐다. 막대한 돈을 투입하는 정책이었다. 마틴 연준 의장이 금리 인상을 고집했다. 금리 인하를 요구하는 존슨 대통령과 반대로 갔다. 인플레이션을 막는 연준의 기본 책무였다. 그러자 존슨 대통령이 그의 목장으로 불러 ‘저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마틴은 금리를 인상했다. 연준 독립성을 지켜낸 역사가 됐다. ‘금리 인하’(政) 대 ‘금리 인상’(經). 비슷한 갈등이 미국 역사에는 많다. 현직 대통령과 연준 의장 간의 대립이다. 내용은 경기 부양과 인플레이션 억제다. 1972년 닉슨 대통령이 아서 번스 연준 의장을 압박했다. 경기부양을 위해 금리를 인하하라고 했다. 여기서는 닉슨의 금리 인하 주장이 먹혔다. 카터가 임명한 폴 볼커 의장의 투쟁도 남아 있다. 기준금리를 20% 끌어 올려 정치권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엄청난 압박을 가했지만 소신을 지켰다. 자본주의 미국의 역사가 남긴 단면들이다. 요즘도 본다. 트럼프의 파월 의장 망신 주기다. 너무 많아서 정리하기도 힘들다. 최근 외신에서 뽑으면 이런 말이 있다. “파월은 곧 물러나게 된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형편없다. 후임자는 3~4명으로 압축해 두고 있다.” 미국 정치 언어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정도면 세계 공통 언어다. 대놓고 ‘나가라’는 망신 주기다. 이번에도 원인은 대통령의 금리인하 압박이다. 트럼프는 2.5%포인트 인하 요구, 파월은 4.25~4.5% 유지다. 맞서는 파월 의장도 참 어지간하다. 우리에는 한국은행 총재가 그런 건가. 여당 이언주 의원의 논평이 상당히 이채롭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를 실명 공격했다. 그것도 최고위원회의에서 나온 공개·공식 비판이다. 한은 총재를 비난하면 안 될 거야 있겠나. 하지만 논평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도 아니다. ‘오지랖이 너무 넓다’로 주장을 열었다. “한은 총재가 할 말이 있으면 대통령 면담을 신청하든가, 대통령실에 조용히 전달하면 되지 언론플레이 할 일은 아니다”, “자숙하고 본래 한은 역할에 충실하라”는 충고도 했다. 시간이 꽤 지난 발언도 문제 삼던데.... 그것보다는 최근 발언 몇 개가 직접적 도화선이 된 듯하다. 지난 23일 시중은행장 모임에서 말을 했다. “금리 인하 기조하에서 주택 시장 및 각 대출과 관련한 리스크가 다시 확대되지 않도록 은행권의 안정적인 가계부채 관리가 중요한 시기다.” 6월 가계 대출 잔액 증가액이 6조원에 육박한다. 사상 최대 영끌 광풍이 불었던 게 지난해 8월이다. 그때 증가폭이 9조7천억원이었다. 이걸 훤히 들여다보는 한국은행 총재다. ‘그러니 관리하라’는 거였다. 사흘 뒤, 이재명 정부 첫 부동산 대책이 나왔다. 여기서도 대출을 방어하는 게 핵심이었다. 이 총재 발언과 차이도, 문제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 며칠 앞서 다른 발언도 있었다. “민생지원금, 선택적 지원이 보편 지원보다 효율적이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나온 말이다. 민생지원금은 통화의 직접 증가다. 한국은행이 관심둬야 할 본연의 영역이다. 그걸 물으니 그렇게 답한 거다. 며칠 뒤 정부 추경안이 나왔다. ‘선택적 지원’을 골자로 편성됐다. 여기서도 ‘경고받을 말’은 안 보인다. 이언주 의원의 발언 이후 댓글을 봤다. ‘옮기기 민망한 표현’들이 부쩍 늘었다. 이 총재를 향한 부정적인 평가다. 결과적으로 ‘좌표 찍기’의 전형이 됐다. 그렇게 보면 ‘이재명 정책’은 통화 증가를 유인한다. 한국은행의 역할이 중요하다. 혹, 그래서 한은총재를 경고해둔 것일까. 아니면 근본적인 ‘변화’까지 암시하는 것일까. 한국은행은 원래 껄끄럽다. 그래야 자본주의가 지켜진다. 마틴 연준 의장이 남긴 말도 그런 거였다. “연준의 역할은 파티가 무르익었을 때 그릇을 치우는 것이다.” 主筆 김종구

[기고] 약물운전의 위험성

교통사고를 조사하는 경찰관이자 어린 두 자녀를 키우고 있는 아버지로서 아이들에게 교통사고는 준비되지 않은 ‘슬픈 이별’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며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말해주곤 한다. 요즘 뉴스를 통해 종종 보도되는 충격적인 사고 소식 중 술을 마신 운전자로 인해 무고한 사람이 소중한 목숨을 잃게 됐다는 소식을 접하면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하고 허무함과 깊은 탄식을 안기곤 한다. 이같이 음주운전에 대한 경각심과 그 위험성에 대한 공감대는 이제 일정 수준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술에 취해 운전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가 무엇일까. 음주 상태에서는 운동능력이 떨어져 조향·제동장치를 정확하게 조작할 수 없어 편리한 교통수단이 자칫 ‘살상무기’로 돌변할 수 있기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술이 아닌 의약품이라면 괜찮을까. 그렇지 않다. 통계에 따르면 약물운전으로 인해 면허가 취소된 사례는 2022년 80건에서 2024년 164건으로 2배 이상 증가했으며 올해도 3월 기준 잠정치 20건을 넘기는 추세로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다. 실제로 2023년 8월 서울 강남 롤스로이스 사건을 비롯해 직접 처리한 사건 중 교통사고 충격으로 전복된 승용차 운전자가 마치 술에 취한 듯 대화할 수 없고 거동조차 어려우나 술 냄새가 나지 않았고 조사 결과 조울증 치료를 위해 진정 및 수면 효과가 있는 처방 약물인 ‘졸피신정’을 복용한 사실이 확인돼 형사처벌과 함께 운전면허를 취소시킨 사례가 있었다. 약물운전의 위험성은 점차 현실이 된 듯하다. 이렇듯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에서 금지한 약물 외 의사로부터 처방받은 약물로 인해 발생하는 교통사고의 피해 또한 음주운전과 같거나 그 이상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를 예방하기 위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을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우선 도로교통법 제45조(과로한 때 등의 운전금지)에서 약물운전을 금지하고 있으며 약물운전 의심자가 검사에 불응하면 처벌(5년 이하의 징역, 2천만원 이하의 벌금)할 수 있는 도로교통법 일부 개정안이 내년 4월2일 시행을 앞두고 있다. 경찰에서도 예방을 위한 홍보활동을 전개하고 타액을 통한 신속 검사 키트를 보급하는 등 단속을 병행해 약물로 인해 정상적인 운전이 곤란한 상태에서 운전하면 강력하게 처벌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의료기관에서도 정상적인 운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약물을 처방하면 강력한 복약지도가 이뤄져야 하며 국민 또한 처방받은 약물이 운전에 지장을 줄 수 있다면 운전을 금지하고 주변에서도 이를 만류해야 한다. 술과 금지된 약물은 물론이고 처방받은 약물로 인한 운전 행위가 자신뿐만아니라 다른 무고한 사람에게 ‘슬픈 이별’을 초래하지 않도록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더욱 안전한 대한민국이 되기를 기원한다.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천자춘추] 기축통화 패권과 관세전쟁

기축통화의 기원을 경기FTA통상진흥센터의 시각에서 풀어보고자 한다. 우리가 위기 상황에 대비해 지출을 줄이고 저축을 늘리듯 국가들도 경제적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위해 외화를 비축하는데 이를 ‘외환보유고’라 한다. 이 중 미국 달러는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70년 기준으로 세계 외환보유고의 약 80%가 달러였고 2020년에도 여전히 약 60%에 달한다. 금을 제외한 대부분의 통화는 그 비중이 5%에도 못 미친다. 이는 달러가 국제 금융질서를 주도하는 기축통화로 여전히 군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수십년간 달러 패권에 도전하는 국가들이 등장하고 있다. 독일, 일본, 중국, 브릭스(BRICS) 등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미국 중심의 통화질서에 균열을 내며 트럼프 정부의 관세전쟁을 촉발하는 배경이 됐다. 독일의 마르크화: 냉전 시기 유럽에서 소련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창설하고 독일을 핵심 국가로 삼아 지원하며 마르크화가 유럽의 중심화로 떠오르게 했다. 일본의 엔화: 아시아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전개됐고 중국과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은 일본의 재건을 돕게되며 엔화는 아시아 대표 통화가 됐다. 미국의 응징: 독일과 일본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성장했으나 달러에 도전하자 미국은 강하게 대응했다. 1985년 9월 미국은 독일·일본·프랑스·영국과 함께 ‘플라자 합의’를 체결하며 엔화와 마르크화의 강제 절상을 유도했고 이로 인해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에 접어들고 독일은 유로화로 통합되며 개별 통화로서의 위상은 사라졌다. 중국의 위안화: 2000년대 들어 중국의 위안화가 새로운 도전자로 등장했다. 1편에서 언급한 ‘페트로 달러 체제’ 아래 원유는 달러로 거래되며 미국이 사우디의 안보를 보장했지만 바이든 정부에서는 중국이 원유 대금을 위안화로 결제하며 ‘페트로 위안’ 체제를 시도하고 있다. 이는 페트로 달러 체제의 붕괴를 암시했고 미국과 중국의 통화 패권전쟁은 본격화되며 관세전쟁으로 확산됐다. 또 미국과 사우디는 오일 협력국에서 에너지 패권 경쟁국으로 전환되고 있다. 미국은 셰일가스로 세계 최대 산유국이 됐고 사우디는 이란과의 핵무장을 둘러싼 갈등을 겪고 있다. 미국의 전략적 관심도 아시아에서 태평양으로 이동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의 근저에 달러 패권이 있다면 우리는 이 충돌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브릭스(BRICS): 2023년 8월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푸틴 대통령은 “달러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고 선언했다. 이는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대한 불만이 현실로 이어지고 있으며 향후 달러의 역할 변화에도 주목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미국은 관세전쟁을 멈출 의향이 있을까. 가능성은 희박하다. 트럼프 행정부의 전략가 스티브 배넌은 2017년 시진핑 주석이 글로벌 패권국 도약을 선언한 직후 “위안화가 기축통화가 되는 날, 게임은 끝나는 것”이라며 중국의 도전을 경고한 바 있다. 라이트하이저는 최근 방한 중 “트럼프 정부가 끝나더라도 미국의 관세정책은 유지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금 미국은 전 세계에 묻고 있다. “패권전쟁에 동참할 것인가, 독자적인 길을 갈 것인가.” 우리는 관세전쟁의 끝에서 ‘환율전쟁’이라는 대혼란을 맞이할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행히 대한민국에는 실용주의를 내건 정부가 들어섰고 지방자치의 리더십을 자처하는 경기도가 중심을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 현실에 작게나마 기대를 걸어본다.

[문화산책] ‘오즈의 마법사’에서 마주한 AI

1900년 출판된 오즈의 마법사는 미국인 작가 라이먼 프랭크 바움이 어린이를 위해 쓴 소설로 출판 직후 큰 성공을 거뒀다. 이 책은 아이들이 주변 환경의 아름다움을 찾도록 이끌었고 더불어 도로시,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겁쟁이 사자, 착한 마녀 글린다 등 기억에 남는 캐릭터를 등장시켜 당시 전 연령대 미국인들의 상상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바움은 총 14권의 오즈 시리즈를 더 집필했다. 영화 오즈의 마법사 역시 1939년 제작돼 대중과 비평가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1914년 바움은 자신의 오즈 시리즈를 영화화하기 위해 ‘오즈영화제작회사(The Oz Film Manufacturing Company)’를 설립했다. 그 직후 영화사는 3편의 영화를 제작했는데 첫 작품은 ‘The Patchwork Girl of Oz’였고 ‘The Magic Cloak of Oz’는 두 번째 작품, ‘His Majesty, the Scarecrow of Oz’는 세 번째 작품이었다. 영화사 설립 목적은 폭력적인 서부영화에 노출된 아이들에게 가족 친화적인 영화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영화사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Dramatic Feature Films라는 이름으로 재기를 시도했으나 이마저 실패한 후 결국 Metro Pictures에 흡수됐다가 현재는 Metro-Goldwyn-Mayer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오즈에 등장하는 캐릭터 중에서 바움이 가장 좋아한 캐릭터는 허수아비(scarecrow)였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는 ‘His Majesty, the Scarecrow of Oz’를 가장 좋아했고 이 영화의 성공을 확신하기도 했다. 한편 오즈의 마법사가 집필되던 1900년대는 기존 체제와 단절하려는 진보주의가 결국 농경사회의 윤리를 기반으로 태동하게 된 소위 딜레마적인 시대였다. 이런 경향은 무지개 너머 오즈의 마법사가 사는 마을을 통해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농촌의 윤리가 현대적인 오즈의 마을에 전승돼 그 딜레마를 더욱 뚜렷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바움은 이러한 설정을 캐릭터에게도 마찬가지로 투사했다. 도로시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지만 이를 단순하고 직관적으로만 해석하려는 태도를 고수하고, 허수아비는 자신에게 뇌가 없다고 한탄하지만 실은 가장 창의적이고 논리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양철 나무꾼은 심장이 없다고 하지만 누구보다도 감정에 충실하며 겁쟁이 사자 역시 용기가 없다고 하지만 위기 상황이면 항상 용기를 내어 행동한다. 착한 마녀 글린다 역시 알고 있는 것을 알려주지 않는 자로서 블랙박스의 딜레마를 드러낸다. 그렇게 오즈의 마법사는 미국 사회와 역사를 모두 관통해 시대를 보듬는 이야기로 거듭난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 포함돼 있는 결핍과 딜레마라는 인간성의 문법은 AI의 특성과 미묘하게 연결된다. 그 시작은 ‘허수아비’에게서 출발한다. 결정적으로 허수아비는 뇌가 없음에도 결국 가장 현명한 조언자로 인정받는다. 거기에 더해 도로시는 메타인지의 가능성을, 양철 나무꾼은 기계화된 감정의 문제를, 겁쟁이 사자는 자율적 판단 윤리를, 착한 마녀 글린다는 딥러닝 구조의 블랙박스 특성을 답습한다. 사실 AI의 초기 연구는 1940년대에 이른바 ‘전자뇌’를 구축하려는 시도에서 시작했다. 그 시도의 실패 이후 기어이 찾아낸 딥러닝 대형 언어모델(LLMs)은 뇌 없이 작동하는 블랙박스 모듈로 완전한 해결책을 제공하기보다는 주변의 지식, 감정, 판단, 책임을 끊임없이 보완해 나가는 오즈의 캐릭터들, 그중에서도 특히 허수아비와 같이 작동한다. AI라는 개념조차 희박할 때 허수아비의 딜레마는 우리에게 뜻밖에 AI의 특성과 알고리즘의 은유를 예언처럼 그렇게 마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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