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더하기] 역사를 잊은 민족의 결말, 그 문턱에서

지금도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는 2023년 고등학교 11학년 세계사 교과서를 개정하며 학생들에게 한국의 역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는 개정된 교과서에 ‘한국전쟁과 그 이후의 재건’ 사례 등을 새로 포함했다. 그동안 우크라이나의 교육과정에는 중국, 일본, 인도 등 동아시아 주요국은 포함돼 있었지만 한국은 빠져 있었다. 전후 초토화된 한국이 불과 수십년 만에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룬 사례를 자신들이 설계할 미래 희망의 모델로 삼고 있다. 반가운 일이며 자랑스러운 일이다. 이 교과서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실려 있다고 한다. “1950년 한국은 전쟁으로 국토의 80%가 파괴됐지만 수십년 후 아시아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민주적인 나라가 됐다.” 전시의 포화 속에서도 한국의 사례를 가르치며 미래를 준비하는 우크라이나의 모습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과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정작 우리 현실의 모습은 어떤가. 2025년은 6·25전쟁 발발 75주년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6·25는 점점 ‘시험에 나오는 연도나 지명’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지난해 국가보훈부의 조사에 따르면 60대 이상 국민의 81.4%가 ‘6·25를 잘 알고 있다’고 응답했지만 20대 이하에서는 그 비율이 22.7%에 불과했다. 전쟁의 상처와 교훈은 세대의 변화와 함께 빠르게 잊히고 있다. 6·25는 단순한 군사 충돌이 아니었다. 광복 후 미소 냉전이 격화되며 한반도는 이념의 대리전장이 됐고 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의 남침으로 민족이 총을 겨눈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전쟁이 시작됐다. 전쟁 기간 우리 군인과 경찰 15만명이 전사했고 250만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다고 한다. 유엔군 참전 16개국 가운데 약 4만명의 젊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그중 미국 병사만 해도 3만7천여명에 이른다. 안타깝게도 이들의 평균 나이는 19세였다고 한다. 이는 한반도의 전쟁이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냉전의 최전선이자 국제사회가 함께 치른 전쟁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평화를 누리는 우리는, 정작 그 역사를 우리 아이들에게 전하지 못하고 있다. 기억되지 않는 전쟁은 반복될 수 있다. 기념일만으로는 부족하다. 살아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전쟁의 폐허에서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평화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자라나는 세대가 반드시 체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전쟁의 기억을 단지 고통으로만 남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국가의 위기 속에서 전 세계가 함께 지킨 자유의 기록이기도 하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동시에 대한민국은 여러 분야에서 1위 자리를 내어주며 국가경쟁력이 쇠퇴하고 있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 자신과 미래 세대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국민 모두의 힘을 결집해 ‘한강의 기적’을 다시 한번 이뤄내는 것이다. 국가의 존립과 다른 나라도 도울 수 있다는 교훈을 우리는 되새겨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억을 다음 세대에게 온전히 전해줘야 한다.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기고] 대왕님표 여주쌀, 미국에서도 통할까

국내 쌀 소비가 줄고 있다. 하지만 이런 흐름 속에서도 ‘대왕님표 여주쌀’은 새로운 길을 개척 중이다. 단순한 내수 판매를 넘어 해외 수출형 프리미엄 브랜드로 도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대왕님표 여주쌀은 2025 한국산업의 브랜드파워(K-BPI) 조사에서 농산물 브랜드 부문 1위에 올랐다. 그리고 미국 뉴욕·뉴저지 지역 한인마트에 정식 입점하며 첫 수출 물량 3t을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 전체 여주쌀 미국 수출량의 10%에 해당하는 규모로 본격적인 해외 진출의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K-푸드 확산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라면, 떡볶이, 냉동김밥 등 한국 가공식품의 인기가 높아지며 자연스럽게 한국산 식재료에 대한 인식도 개선되고 있다. 한국 쌀은 특히 찰기 있고 쫀득한 식감으로 김밥, 덮밥, 비빔밥 등 한식과 찰떡궁합을 이룬다. 실제로 미국 내 냉동김밥 판매 호조에 따라 쌀가공식품 수출도 20% 이상 증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여주쌀의 미국 진출은 단순한 수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내수 침체에서 벗어난 지속가능한 농업 해법으로 ‘수출형 프리미엄 농업’이라는 새로운 모델을 실험 중이기 때문이다. 여주쌀이 가진 경쟁력은 단단하다. 첫째, 여주는 풍부한 일조량과 깨끗한 수자원, 규산·유기물이 풍부한 토질 등 벼농사에 최적화된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췄다. 둘째, 여주시는 독자적 품종 ‘진상미’를 개발하고 재배를 독점해 고유성을 확보했다. 이 품종은 찰기와 감칠맛이 뛰어나 프리미엄 소비층에 적합하다. 셋째, 여주시농업기술센터는 DNA 종자검정, 성분분석, 미질분석 등 과학적 품질관리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식미치 75점 이상, 단백질 6% 이하라는 고품질 기준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브랜드 시스템도 강점이다. 여주시농산업공동브랜드활성화센터는 품질 인증, 공동마케팅, 유통망 관리, 관광 자원 연계까지 통합적으로 브랜드를 운영한다. 이 같은 브랜드 역량 덕분에 K-BPI 1위라는 신뢰를 얻었고 해외 수출도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미국 시장에서 확실한 프리미엄 쌀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제가 있다. 미국 시장은 여전히 롱그레인 쌀이 주류이며 한국 쌀에 대한 인지도는 한인 커뮤니티와 K-푸드 팬층에 한정돼 있다. 이를 넘어서는 전략이 필요하다. 단순히 ‘한국산 쌀’이라는 설명을 넘어 ‘왜 이 쌀이 특별하고 건강한가’에 대한 문화적·품질적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 ‘조선시대 왕에게 올리던 쌀’이라는 정체성은 미국 소비자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고급 브랜드 자산이다. 쌀 소비가 줄어드는 시대에도 농업은 성장할 수 있다. 핵심은 ‘프리미엄화→브랜드화→수출산업화’라는 선순환 구조를 얼마나 잘 만들 수 있느냐다. 대왕님표 여주쌀은 이 길을 선도하며 한국 농업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K-푸드가 세계로 뻗어가는 지금 여주쌀의 도전은 한국 쌀, 나아가 한국 농업 전체의 미래를 여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경기만평] 매에 장사없다...

[사설] 건국국채는 6·25 폐허 극복하자는 애국이었다

‘금 모으기’는 IMF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다. 전 국민이 힘을 모았던 28여년 전 역사다. 이보다 절절한 나라 구하기가 75년 전에 있었다. 1949~6·25전쟁 시기의 건국국채다. 빈손 건국과 전쟁 폐허의 시기였다. 세입 부족, 재정 적자로 나라가 어려웠다. 1949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채법이 제정됐다. 최빈국 국채는 필연적으로 불안했다. 그랬던 건국국채를 매입하는 심리는 애국심이었다. 내 돈을 기꺼이 국가 발전에 넣겠다는 사명감이었다. 6월 25일을 앞두고 경기일보가 건국국채 얘기를 전했다. 30년 전 작고한 장래복씨의 역사다. 경기도를 근거로 활동했던 사업가다. 제재소, 건설, 화물업을 했다. 1972년 경기도화물자동차운송사업조합 이사장도 역임했다. 그가 남긴 유품이 전해 온다. 오천원·이천원·일천원·일백환짜리 국채다. 발행일 ‘단기 4281년’, 발행 책임자 ‘재무부장관’. 만기는 5년이다. 장씨는 이 국채를 환가하지 않았다. 그의 자서전 갈피에 소중히 남겨 뒀다. 그의 딸 장성숙씨(중소기업융합경기연합회 고문)가 본보에 그 사연을 전했다. “아버지는 늘 애국 정신을 가지고 살라고 가르치셨다.” 부친이 건국국채를 사들인 이유를 짐작했다. “6·25전쟁 직후 사들인 건국국채도 애국심이셨던 것 같다.” 폐허의 나라를 재건하려고 발행한 국채였다. 그 취지에 기꺼이 함께한 애국심이었다. 어찌 장씨만의 역사였겠는가. 해방공간, 6·25전쟁을 겪은 수많은 국민이 그렇게 참여했다. 기재부 관계자도 확인했다. 이제 대한민국은 성장했다. 국부가 몰라 보게 커졌다. 국채의 규모, 성격, 한계가 딴 세상 얘기다. 이재명 정부의 첫 추가경정예산이 30조5천억원이다. 이 중에 19조8천억원을 국채로 조달한다. 하반기에도 추가 국채 발행이 예상된다. 국채 발행 한도가 197조6천억원에서 229조8천억원으로 확대됐다. 관리재정수지 적자가 73조9천억원에서 110조4천억원으로 불어난다. 총 국가 채무도 1천300조6천억원으로 늘어난다. 국채의 많고 적음은 기준이 아니다. 통화 규모 증대는 경제 성장의 기본 요소다. 경기부양의 기능도 갖고 있다. 다만 커진 국채 규모의 적정선을 걱정하는 소리는 있다. 국채로 형성한 통화의 사용처도 중요하다. 현금 지원, 부채 탕감 등에는 이견이 있다. 국채가 늘어도 감당 가능한 조건은 있다. 인구 규모가 크고, 기축통화국이거나 신용등급이 높으면 괜찮다. 우리는 아니다. 그래서 편하게만 지켜볼 수 없다. 75년 전 건국국채는 나라 살리는 애국심이었는데 2025년 국채는 풍요 속 적정성을 따져야 하는 과제다. 6·25전쟁 75주년에 새겨 볼 만한 고민이다.

[사설] 철도 노선도 못 정한 인천 계양TV... 어어하다 베드타운 될라

인천 계양구에 조성 중인 계양테크노밸리(계양TV)는 수도권 3기 신도시다. 자족기능을 갖춘 첨단산업복합지구가 콘셉트다. 일자리와 주거, 녹지가 융합된 첨단자족도시다. 경기 판교 신도시나 서울 마곡지구가 모델인 셈이다.그러나 본격 입주가 머지 않았는데도 첨단산업 유치는 걸음도 떼지 못했다. 기업 유치에 가장 중요한 철도 등 교통 인프라 확충부터 멈춰 있다. 인천시가 최근 계양TV 투자유치 활성화 3종 대책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투자유치 전담 태스크포스(TF), 세제 감면 확대, 기업고충처리센터 운영 등이다. 그러나 핵심이 빠져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광역교통망 확충과 첨단산업단지 지정 문제다. 계양TV 광역교통망은 부천 대장지구의 철도망인 대장홍대선의 연장이다. 이 연장선이 계양TV를 통과한 뒤 공항철도·인천지하철 1호선 환승역인 계양역과 연결하는 방안이다. 첨단 기업 유치를 위해서는 철도 교통망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계양구가 이 같은 노선 계획을 반대하고 있다. 계양역이 아닌 박촌역으로 연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노선을 정하지 못한 채 지금껏 논의 단계에 발 묶여 있다. 계양구는 계양 구도심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따라 박촌역 연결을 주장한다. 반면 계양신도시 입주 예정자들은 도시첨단산업역 신설과 계양역 연결을 주장한다. 여기에 계양TV의 첨단산업단지 지정도 여전히 미완성이다. 첨단산단 지정은 기업 유치와 그에 따른 인센티브 등을 위한 필수 전제조건이다. 계양TV는 처음 전체 75만7천457㎡(22만9천532평) 규모의 첨단산단을 계획했다. 그러나 현재 중앙정부로부터 승인받은 면적은 34만7천㎡(46%)에 불과하다. 절반이 넘는 산업부지가 아직도 첨단산단으로 지정받지 못한 상태다. 계양TV 사업 초기에는 인천시에 입주의향서를 낸 기업들도 있었다. ㈜케이티(KT), 씨제이㈜(CJ), ㈜엘지유플러스(LG U+) 등 여섯 곳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 때문에 수년이 지나도록 계약까지는 이어지지 않고 있다. 인천시의회 등에서는 인천시의 소극적 대처를 지적한다. 여태껏 대장홍대선 연장 노선도 확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떤 기업이 들어오겠느냐는 것이다. 첨단산업복합지구의 완성은 한 지역을 크게 바꿔 놓는다. 서울 마곡지구는 LG사이언스파크로 인해 상전벽해의 변화를 이뤘다. 계양TV와 같이 출발한 부천 대장지구에도 굵직한 기업 유치 뉴스가 잇따른다. SK그룹과 대한항공 등이다. 그런데 계양TV는 철도 노선 하나 정하지 못해 우왕좌왕이라니. 이러다 또 하나 베드타운만 보탤 것이 걱정이다.

[지지대] 불운의 타이틀을 차지할 다음 지자체는?

“지역의 이름은 그 지역의 얼굴과도 같다. 하지만 큰 사고가 발생하면 익숙하게 붙는 지역명은 안성 하면 ‘배’ 대신 ‘교량 붕괴 사고’를, 포천 하면 ‘막걸리’보다 ‘전투기 오폭 사고’를 떠올리게 한다. 이는 해당 지역 주민에게 경제적, 사회적으로 또 다른 피해를 발생시키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지난 3월 후배 기자가 쓴 기사 내용 중 일부다. 지난해 6월24일, 화성시 서신면의 리튬 배터리 공장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 참사는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로 명명됐다. 기자가 글을 쓰고 있는 현재. 23명의 목숨을 앗아간, 한국 산업현장의 구조적 안전 문제를 여실히 드러낸 대형 참사가 발생한 지 정확히 1년이 된 날이다. 이날 사고 현장 앞에서 열린 ‘화성 아리셀 공장화재 사고 1주기 현장 추모 위령제’가 열리며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유가족을 위로하는 시간을 가졌다. 희생자들은 일부 한국인을 포함한 하청·파견업체 소속 외국인 이주 노동자가 다수였다. 사고 3개월 뒤 회사 대표와 대표의 아들인 총괄본부장이 구속 기소됐지만 이후 올해 2월 해당 대표는 수원지법에 “증거 인멸과 도주 우려가 없다”며 보석을 신청, 현재 석방된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다. 유족 측은 중대재해참사대책위원회를 구성, 회사 대표가 중대재해처벌법으로 강력히 처벌되도록 서명운동을 전개한다고 밝혔다. 유족 측의 한 맺힌 투쟁과 절규가 이어지는 상황에도 전국 곳곳에서는 수없이 터져 나오는 각종 사고에 희생자들의 수는 늘고 있다. 이란-이스라엘과 같이 전쟁이 발발한 것도, 예기치 못한 자연재해가 덮친 것도 아니다. 늘 일하던 곳에서 작업자들이 끔찍한 사고로 목숨을 잃고 있다. 경기도내 지자체가 31곳이다. 제대로 된 재발 방지 대책 없이 사고 발생 후 쏟아내는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식 대처는 죽음의 행렬을 부추길 것이고 먼 훗날 도내 31개 지자체의 명칭 뒤에 죽음의 재난을 의미하는 단어가 하나씩 붙을까 걱정이다.

[강성곤의 말글풍경] TV 오락프로그램의 ‘호칭 인플레’

방송사에서 예능 프로그램은 큰 수익원이다. 광고나 협찬이 거의 집중된다. 차치하고 예능이란 이름이 맞나. 공자는 정명순행(正名順行)이라 했다. 실제에 부합하는 이름이라야 매사가 합리적으로 진행된다는 뜻. 오락 프로그램이라고 해야 걸맞다. 예능과 오락은 엄연히 다르다. 예능은 재주와 기능의 영역이며 음악·미술·연극·영화 따위의 예술과 관련된 능력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방송 프로그램에서 이 분야를 제외한 프로그램은 어디까지나 오락 프로그램이다. 오락은 쉬는 시간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분을 즐겁게 하는 일이란 의미다. 독일말에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운터할퉁(Unterhaltung·오락)은 반드시 대화와 환담을 전제한다. 그러니까 공연이나 퍼포먼스 위주는 예능 프로그램, 토크와 재담 따위의 구성은 오락 프로그램으로 바루어야 제대로 된 이름이다. 오락 프로그램에서의 호칭은 무엇이 문제인가. 언제부턴가 연예인들이 우르르 나와서는 “아무개가 아무개보다 형. 네가 그러니까 동생. 인제 보니 누나네. 앞으로 오빠라고 불러. 언니였어요? 몰랐어요”라며 키득대는 모습을 본다. 몹시 잔망스럽고 보기 불편하다. “나이가 자기보다 곱절이 되면 아버지처럼 대하고, 열 살 이상 위면 형으로 대하며, 다섯 살 정도 차이면 웬만큼 공경하는 게 좋다.” 조선시대 학자 이율곡의 말이다. 적어도 열 살 차이는 나야 형∙동생 관계이니 요즘에 적용하면 초등학생에게 대학생은 물론 형이지만 중학생과 고등학생은 친구뻘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현실과의 괴리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서너 살, 아니면 대여섯살 차이를 갖고 서열화∙위계화하는 모양새는 외려 퇴행적이다. 나이가 좀 위랍시고 상대에게 들입다 “야, 너” 반말을 하고 그 반대면 이내 ‘형님, 누나, 오빠, 언니’ 하는 모양새가 오히려 비례(非禮) 아닐까. 웬만한 나이 차이에서는 서로 높임법을 쓰고 적당한 거리를 두다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면 예사말을 쓰던 이전 세대의 모습이 차라리 낫다. 3~4세 안팎은 서로 아무개씨 하는 적당히 낙낙하고 느슨한 관계가 바람직하다. 존댓말도 아니고 반말도 아닌 예사말의 존재감을 망각하는 부박함이 안타깝다. 지칭(指稱)도 마찬가지다. 다수의 진행자∙출연자들이 나이∙지위가 위인 사람들을 언급하며 형님∙누님에서부터 대표님∙사장님∙선생님∙대선배님 운운하며 극존칭을 쏟아낼 때 시청자는 당혹스럽다. 또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신인급이라 하더라도 이들을 함부로 하대(下待)하는 따위도 생각 없기는 마찬가지다. 방송 프로그램은 어디까지나 시청자가 중심이며 주인이다. 연예인 특유의 라포(Rapport·친근감)를 앞세워 얼토당토않은 극존칭을 쓴다거나 역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반말을 하는 건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의사소통의 구현을 방송 프로그램이 가장 자주, 크게 방해하고 있는 셈이다. 차제에 연예인 관련 프로그램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오빠’를 다뤄보자. 오빠는 이제 ‘손위 남자 형제를 부르는 친족어’로서의 기능보다 연인이나 젊은 부부 사이에서 여성이 남성을 부르는 호칭으로 더 친숙하다. 명절 때 ‘오빠’를 부르면 친오빠와 남편이 동시에 돌아본다는 아내들의 경험담이 익숙한 현실이다. ‘오파(opa)’는 놀랍게도 글로벌적(?)이다. 독일어∙네덜란드어∙인도네시아어에서는 ‘할아버지’의 애칭 혹은 노인을 뜻하고 스페인어로는 ‘바보·멍청이’, 또는 ‘안녕‘이라는 인사말로 쓰인다. 우즈베크어는 ‘누이·형’을 아우른다. 그리고 베트남어는 희한하게도 우리처럼 그대로 ‘오빠’의 의미다. 케이팝 팬들의 ‘오빠, 오빠’ 아우성은 그래서 자연스러운지도 모른다. 오빠에는 그런데 음습한 면도 있다. “아저씨가 뭐야. 오빠라고 불러, 오빠 믿지?” 이런 경우는 젠더(gender)의 위계를 교묘히 악용하는 사례 아닌가. 그 사람 자신을 뜻하는 ‘자기(自己)·자기야’가 차라리 상대를 직접 부르지 않고 간접 소환하는, 괜찮은 완곡어법이라는 생각이다. ‘자기’를 과감히 재소환하고 ‘오빠’는 다시 친족에게만 쓰는 건 어떨지. 물론 케이팝 팬의 ‘오빠’는 그 자체로 단단한 성채이니 손댈 일은 아니다.

[천자춘추] 문화의 힘이 나오는 바탕

우여곡절 끝에 새 정부가 출범했다. ‘진짜 대한민국’을 표방하며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K-컬처를 통한 신성장 에너지를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당면한 경기 침체를 극복하고 소위 ‘잘사니즘’을 실현하기 위해 현 정부는 대선 시기에 세 가지 성장 에너지를 제시했다. 인공지능, 재생에너지, 그리고 K-컬처다. 문화가 미래 먹거리를 창출하는 중요한 영역이라는 인식 아래 국민 앞에 약속한 것이다. 문화의 힘을 이처럼 중요하게 인식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실제로 2023년 기준 우리나라 콘텐츠 산업의 매출액은 153조원에 달한다. 문화 콘텐츠를 잘 만들어 세계시장을 점유하고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며 미래 먹거리를 생산하는 전략은 현 시대에 부합한다. 현대 산업은 제조업 기반 산업 시대에서 지식 기반 산업 시대로, 다시 인공지능·사물인터넷(IoT)·빅데이터에 기반한 4차 산업혁명 시대로 발전해 왔다. 지금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 지닌 창의성이다. 창의성의 힘으로 미래 먹거리를 창출하고 이를 위해 창의적인 K-컬처 산업을 육성하는 일은 타당한 성장 전략이다. 그러나 K-컬처는 문화산업 시스템 자체에 대한 투자와 육성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기초예술 분야에 대한 강력한 지원을 통해 창의적 시도와 도전을 끊임없이 이어갈 수 있는 예술 생태계를 조성하는 일이 K-컬처 활성화의 전제이자 본질이다. K-컬처가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는 힘은 기술이 아니라 창의적 서사와 보편적 공감대 형성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시대적 아픔에 대한 공감과 성찰 없이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불가능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빈부 격차에 대한 통찰과 풍자 없이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 작품상 및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기초예술 분야에 대한 지원과 육성이 동반돼야 K-컬처가 세계 시장에서 이른바 ‘잭팟’을 터뜨릴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이는 현 정부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 사실이다. 또 지역문화를 진흥하고 생활문화를 육성함으로써 국민들의 삶이 문화적으로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도 중요하다. ‘문화’란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활양식이며 함께 공유하고 지켜 나가는 가치 체계다. 지난 정부 때 ‘지역문화진흥원’ 사업이 대폭 축소됐다. 지역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역문화를 창조하는 일이 중단되고 관료가 주도하는 분위기로 변해 버린 것이다. 새로운 정부는 이를 빠르게 복구해 지역주민들이 스스로 문화를 만들어가는 ‘문화자치’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의 주도성과 창의성이 발현되는 문화가 형성되고 창의적인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다. 창의적인 인물이 많아야 K-컬처가 성공할 수 있음은 자명하다. K-컬처 성공의 두 번째 조건은 바로 지역문화 진흥과 생활문화 육성을 통해 ‘문화자치’ 시대를 여는 것이다. 기초예술에 대한 강력한 지원, 지역문화 진흥 및 생활문화 육성을 통해 문화자치 시대로 나아가는 변화야말로 K-컬처 성공의 전제이자 본질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이재명 정부의 문화 정책이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세상읽기] 디지털 리터러시와 소비역량

10여년 전만 해도 우리는 마트나 백화점에서 직접 물건을 고르고 계산대에 줄을 서서 결제하는 풍경에 익숙했다. 이제 소비는 더 이상 그런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모바일 앱, 소셜 플랫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공지능 추천 시스템을 통해 소비가 이뤄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가격 비교만 잘한다고 현명한 소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를 중심으로 설계된 디지털 소비 환경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지켜야 할 책임자가 되고 있다. 그래서 진짜 필요한 것은 소비자 역량이다. 수많은 디지털 정보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다. 상품의 성능, 가격, 환불 조건, 후기 등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고 소비자에게 불리한 조건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다. 디지털 콘텐츠나 서비스를 이용하고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안전하게 내가 원하는 조건을 구매할 수 있고 결제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디지털 환경에서 피해를 당했을 때 문제를 적극 해결할 수 있는 권리와 책임에 대한 역량까지 모두 포괄하는 것이 바로 디지털 리터러시다. 디지털 리터러시와 정보 판단 능력이 부족한 소비자는 허위광고나 과장 마케팅에 쉽게 속거나 피해를 보기 십상이다. 최근 ‘구독경제’가 소비생활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기존의 소유 중심, 일회성 소비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꿔 정기적으로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원하는 콘텐츠와 상품, 서비스를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구독 서비스가 일상화됐다. OTT 등의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음악 스트리밍, 전자책, 쇼핑 멤버십, 식료품, 학습 서비스 등 서비스 범위도 확장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은 평균 3.4개의 구독 서비스를 이용하며 월평균 4만원, 연평균 50만원에 달하는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그러나 한두 개의 소액 구독은 가벼워 보여도 구독 서비스 수가 늘어나면 관리와 지출에 대한 부담이 증가하는데 최근 조사에 따르면 71%에 달하는 소비자가 구독 서비스 관리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시스템에는 해지는 어렵고 유지되기 쉬운 구조가 숨어 있는데 이처럼 소비자의 행동을 교묘히 유도하는 ‘다크패턴 (Dark Pattern)’이라는 설계 전략이 있다. 다크패턴은 소비자가 불리한 선택을 하도록 의도적으로 설계된 UI(사용자 인터페이스)·UX(사용자 경험)를 말한다. 최근 구독경제 서비스에서 다크패턴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 무료 체험을 미끼로 결제 정보를 미리 입력한 뒤 체험 종료 후 별도의 고지 없이 자동 유료 전환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또 해지하려 해도 버튼은 보이지 않고 웹사이트를 몇 번이나 클릭해야 겨우 연락처를 찾을 수 있거나 고객센터는 연결되지 않고 ‘다음 결제일 하루 전까지 해지 가능’이라는 말만 화면에 남기도 한다. 일부 서비스에서는 저렴한 요금제를 작은 글씨나 접힌 메뉴에 숨기고 가장 비싼 요금제를 화면 중앙에 노출해 소비자를 유인하기도 한다. 다크패턴은 소비자에게 불필요한 지출을 유도하기도 하고 이러한 구조적 불합리함에 소비자들이 대응하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해지 방법을 찾지 못하거나 약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며 귀찮음과 불안감에 해지를 포기하는 일이 반복될 수 있는데 이는 단순히 서비스의 불친절함에 의한 것뿐만 아니라 소비자 자신의 역량 부족에서 비롯한 측면도 있다. 디지털 소비 환경에서 소비자는 매우 적극적인 주체가 돼가고 있다. 자신과 관련된 데이터 활용에 대해 주체적인 의사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고(마이데이터) 문제가 생겼을 때 고객센터에 이의를 제기하고 공정거래위원회나 한국소비자원 등 관련 기관을 통해 구제를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 유튜브, SNS, 쇼핑 앱 등이 끊임없이 ‘지금 사야 한다’는 충동을 자극하지만 소비자는 한발 물러서 그것이 진짜 필요한지, 나의 가치와 맞는지, 지속가능한 소비인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곧 미래를 위해 필요한 소비자 역량이다. 소비는 단순한 구매 행위가 아니다. 소비는 삶의 방식이며, 사회에 대한 태도이며, 나의 가치관이 드러나는 선택이다. 그 선택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정보를 읽는 눈, 권리를 지키는 힘, 가치를 판단하는 지석이 필요하다. 변화하는 소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소비자는 플랫폼 속의 타깃이 될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소비가 아니라 더 똑똑하고 더 주체적인 소비 역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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